살아계신 하나님은 치유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도 공생애 사역기간에 치유를 많이 행하셨습니다.
제자들을 부르시고 보내실 때에도 치유의 권세를 주시며 치유하라고 하셨습니다.
오늘날 교회가 치유를 소홀히 하는 듯 보이는 것은 정말 안타까운 현실입니다.
교회는 세상을 치유하기 위해 부름받은 곳입니다.
목회자는 치유자healer들입니다.
설교는 치유의 능력healing power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실제적으로 치유하는 능력이 있음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교회는 치유의 메시지를 회복해야 합니다.
그러나 치유가 목적이 아님을 명심해야 합니다.
치유는 회복을 향해 나아가는 관문이지 목적지가 아닙니다.
치유사역이 중요한 교회사역이 되어야 하지만 치유사역이 모든 사역,궁극적인 사역의 목표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육신의 치유가 사역의 목적이자 목표인 것처럼 사역하는 아프리카 목회자들을 보면 안타까운 마음도 듭니다.
그들을 신학훈련시킬 때 언제나 "음란한 세대가 표적과 기적을 추구한다"라고 엄중히 경고합니다.
하지만 치유는 복음사역의 열매요 동반자로 항상 따라다녀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 치유와 기적은 항상 뒤따라오는 것입니다.
김광락 선교사 올림.
하나님의 다림줄
본문: 암7:7-9, 고전3:16
오늘 읽은 본문 말씀에 보면 하나님께서 다림줄을 손에 잡고 서계시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다림줄은 무거운 추에 줄을 매달아 놓은 기구인데 건물을 세우거나 혹은 허물 때 사용하는 것입니다. 다림줄을 띄우게 되면 건물이 바로 서 있는지 바로 서 있지 않는지 비로소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건물이 바로 서 있지 않으면 허물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하나님께서 다림줄을 베풀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것은 바로 서 있지 못한 건물을 허물겠다는 뜻이고, 또 한편으로 새로운 건물을 짓겠다는 선언이기도 합니다. 오늘 우리는 이 말씀이 옛날 아모스 선지자의 시대에만 적용된 말씀으로 보아서는 안 될 것입니다. 이 말씀은 오늘 우리에게도 적용되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다림줄은 하나님의 진리를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다림줄을 우리 삶에 베푸실 때에는 새롭게 하시는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지금 하나님께서 아모스 선지자를 통해서 새 일을 행하겠다는 약속의 말씀을 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이 오늘 나와 무슨 상관이 있을까요? 이 말씀은 우리가 어떤 사람인지 보여줍니다. 우리 모두는 다 집을 짓는 사람입니다. 성경은 우리가 다 건축가들이라고 말해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어떻게 집을 지을 것인가 주의하라고 말씀해주셨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되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주초를 반석 위에 세운 연고요 나의 이 말을 듣고 행치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매 무너져 그 무너짐이 심하니라."(마7:24-27) 사도 바울 역시 우리가 다 건축가인데 각자 어떻게 건축할 것인지 조심하라고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내가 지혜로운 건축자와 같이 터를 닦아 두매 다른 이가 그 위에 세우나 그러나 각각 어떻게 그 위에 세우기를 조심할지니라. 이 닦아 둔 것 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 둘 자가 없으니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 만일 누구든지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이 터 위에 세우면 각각 공력이 나타날 터인데 그 날이 공력을 밝히리니 이는 불로 나타내고 그 불이 각 사람의 공력이 어떠한 것을 시험할 것임이니라. 만일 누구든지 그 위에 세운 공력이 그대로 있으면 상을 받고 누구든지 공력이 불타면 해를 받으리니 그러나 자기는 구원을 얻되 불 가운데서 얻은 것 같으리라."(고전3:10-15) 우리가 지은 집이 평가받을 때가 분명히 올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지혜로운 건축가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오늘 우리가 지어야 할 집은 어떤 집을 말하는 걸까요? 사도 바울이 우리에게 각자 집을 지혜롭게 지어야 한다고 가르친 말씀 직후에 우리가 지어야 할 집에 대해서 분명히 선포하고 있는 말씀이 이어집니다.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고전3:16,17) 우리가 지어야 할 집은 어떤 집입니까? 예,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성전인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거하실 집을 짓는 사람들입니다. 나 혼자만 들어가서 편안하게 살 집이 아닌 것입니다. 하나님과 함께 거할 집을 지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바로 이 과업을 위해서 지음을 받은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집을 짓기 위해서 지음을 받은 것입니다. 우리는 나름대로 성공하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자신이 지어져가는 하나님의 집이란 사실을 놓치고 살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세상 사람들 모두가 멋진 집을 짓고 편안하게 살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자신들이 곧 집이란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요? 우리 자신이 곧 건축되어야 할 집이란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이야기해봅시다. 우리가 지어야 할 집이 다름 아니라 바로 우리 자신이라면 구체적으로 무엇을 해야 합니까? 우리가 어떻게 우리 자신을 지을 수 있단 말입니까?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은 하나님의 다림줄 앞에 날마다 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진리대로 우리 자신이 건축되어지도록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우리를 빚어 가시도록 우리 자신을 최대한 그분의 진리 앞에 내어드리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는다면 우리 생각대로 집을 짓다보면 어느새 우리는 잘못 건축했다는 생각이 들 것이고, 그때가 되면 이미 돌이키기에 때가 늦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지혜로운 건축가가 되기 위해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기본적인 진리 세 가지를 알아야 하겠습니다. 첫째, 기억해야 할 것은 우리 몸이 곧 하나님의 성전이란 사실을 기억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이 집은 내 것이 아니란 사실을 마음에 새겨야 합니다.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전6:19,20) 우리 몸은 주님의 것입니다. 왜냐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 값으로 구속함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기억해야 할 것은 우리 몸은 성령의 전이란 사실입니다. 성령께서 거하시는 처소란 말입니다. 성령께서 거하시기에 적합해야 하는 것입니다. 만약 성령께서 내주하시기에 불편해하신다면 우리는 잘못 건축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내가 사는 집에 들어올 때 현관까지만 오는 사람이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거실까지만 들어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안방까지 들어옵니다. 성령께서 우리 마음의 집에 들어오실 때 어디까지 들어오십니까? 내 마음의 집에 안방까지 편하게 들어오십니까? 그래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하나님의 집을 지어야 하는 것입니다. 셋째로 기억해야 할 것은 우리 몸은 하나님을 드러내야 하는 것입니다.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말씀한 것을 기억하십시오. 우리는 하나님을 드러내기 위해 지음을 받았습니다. 이것은 단지 성품의 문제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하는 일 역시 하나님을 드러내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단지 신학을 하고 설교를 하는 것으로 국한시키지 마십시오. 우리가 어떤 일을 하든지 하나님을 드러내도록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가장 즐겁게 할 수 있는 것, 가장 잘 할 수 있는 것으로 하나님을 가장 하나님 되게 하십시오. 하나님을 드러내는 일에 여러분이 가진 장점이 사용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전공이 하나님을 드러내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의 삶과 성품이 하나님을 드러내기를 바랍니다.
우리 자신이 곧 하나님의 성전이라는 사실에 대해서 좀 더 생각해봅시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시고 사람을 위하여 에덴동산을 지어주셨습니다. 에덴동산은 최초의 성전이었습니다. 에덴동산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정기적으로 만나주시고 함께 거하며 교제하시던 장소였습니다. 그곳에서 사람은 하나님의 제사장으로서 하나님을 섬기며 동시에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피조물들을 다스렸던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이 범죄하게 되자 그 성전에서 추방당하게 되었습니다. 사람은 더 이상 그 성전에 들어가서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길 수 없게 되고 말았습니다. 사람에게는 더 이상 기회가 없었고 오직 참담한 미래만이 남았습니다. 바로 그 때 하나님께서 역사의 전면에 자신을 드러내기 시작하셨습니다. 사람이 스스로의 힘으로 하나님을 찾아 발견할 수 없다는 것을 아시고서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위해 성전을 지어주기로 결정하셨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그를 통해 한 민족을 지으신 것입니다. 그 민족은 성막을 짓고 그 성막을 중심으로 진을 치며 진행하는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성막 공동체라 불린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임재를 중심으로 세상을 향해 나아갔던 것입니다. 성막을 중심으로 견고하게 공동체를 이룰 때 그들을 당해낼 적들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성막을 중심으로 합당하게 살지 못할 때 그들은 온갖 패배와 고통을 겪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이 사사시대인 것입니다. 그 성막은 다윗 시대에 성전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임재를 떠나 우상을 중심으로 살기 시작할 때 하나님께서 여러 선지자들을 통해 말씀하신 것은 "다시 짓겠다!"는 말씀이었습니다. 오늘 읽은 본문도 그러합니다. 하나님의 성전을 잘 지어야 할 이스라엘 땅에서 온갖 산당들과 우상숭배의 자리들이 넘쳐나기 시작하니까 하나님께서 일어나셔서 다림줄을 베풀고 "다시 짓겠다!"고 선언하시는 말씀인 것입니다. 다시 짓기 위해서는 완전히 무너뜨려야 하는 것입니다. 허물지 않고는 새로 짓는 것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새가죽부대로 바꾸지 않고서는 새포도주를 결코 붓지 않는 법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회복시키기 위해서 먼저 무너뜨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적치유시간은 사실 힘든 시간입니다. 자신을 들여다보고 허물어야 할 것을 무너뜨리는 시간이기 때문에 지치고 피고한 시간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꼭 내적치유세미나에 참석하지 않아도 우리 주님께서 강권적으로 우리의 속사람을 이렇게 다루실 때가 있습니다. 진리의 다림줄을 베풀고 무너뜨리시는 역사가 일어나는 것은 우리의 속사람을 새롭게 회복시키시려는 하나님의 선한 뜻이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래서 솔로몬의 화려한 성전은 파괴되고 만 것입니다. 건물이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의 삶이 문제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다림줄에 비추어 심각하게 세워져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열방의 손을 통하여 이스라엘이 자랑하던 성전을 완전히 무너뜨리신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여전히 건물로서의 성전이 다시 회복될 것을 기대했고, 또 지금도 기대하고 있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오셨을 때도 그러했습니다. 예수님은 하늘의 참 성전이셨습니다. 구약의 모든 성막과 성전들은 하늘의 성전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그림자에 불과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눈에 보이는 건물로서의 성전을 무너뜨리시고 참 건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살아있는 성전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성전에 들어가셔서 행하신 일들을 기억합니까? "성전 안에서 소와 양과 비둘기 파는 사람들과 돈 바꾸는 사람들의 앉은 것을 보시고 노끈으로 채찍을 만드사 양이나 소를 다 성전에서 내어 쫓으시며 상을 엎으시고 비둘기 파는 사람들에게 이르시되 이것을 여기서 가져가라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 하시니"(요2:14-16) 예수님께서 이렇게 행동하신 까닭은 구약의 성전을 허물고 새로 짓겠다는 하나님의 마음으로 행하신 것입니다. 단지 성전에서 장사하는 것 자체가 문제라기보다는 성전 자체를 숭배하는 것에 대한 주님의 분노를 나타내신 것입니다. 이렇게 행동하신 것은 예수님 자신이 참 성전으로 오셨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진리의 다림줄을 베푸시는 하나님으로 오셨기 때문인 것입니다. 이렇게 과격한 행동을 행하신 직후에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요2:19) 예수님의 말씀은 자신이 곧 하나님의 참 성전으로 오셨다는 뜻입니다. 복음서 저자도 그렇게 해석합니다. "그러나 예수는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요2:21) 예수님께서 당신이 곧 성전이라고 선언하신 말씀은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 이후에 제자들에게 비로소 받아들여지게 됩니다. 훗날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무리들을 향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이 돌이 되셨느니라.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엡2:20-22) 우리는 하나님께서 거하실 집이 되기 위하여 지어져가는 존재입니다. 짓는 주체는 우리가 아니라 하나님이심을 잊지 맙시다. 우리가 할 일을 하나님의 다림줄을 날마다 대면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다림줄을 피하여 도망가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내면을 계속 지어가시는 놀라운 일을 계속 보게 될 것입니다.
치유란 하나님의 다림줄이 내 안에 베풀어질 때 일어나는 회복의 역사입니다. 하나님의 다림줄이 우리 내면에 베풀어져야 합니다. 그것이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입니다. 이것을 잊지 마십시오. 우리는 무엇을 가져야 하고, 무엇을 해야 하고, 등등 외부에 관심이 많지만 하나님은 우리가 어떤 사람인지, 우리가 무엇을 생각하는지 등등 우리의 내부에 관심이 많으시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왜냐면 우리 몸은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는 성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마음은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집이기 때문입니다. [내 마음 그리스도의 집]이란 소책자가 있는데 그 제목은 오늘 우리가 살펴보는 주제를 얼마나 잘 나타내는지 모릅니다. 만약 이 집이 삐뚤어져있다면 하나님의 다림줄로 바로잡아져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베푸신 다림줄 앞으로 가까이 다가가야 합니다. 그것은 분명 큰 용기를 필요로 하는 행동이지만 또한 큰 보상이 뒤따르는 축복이 예비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다림줄 앞으로 다가가는 것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친히 당신이 거하실 아름다운 집을 지어주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오늘 저와 여러분에게 "내가 다림줄을 베풀고 새로 짓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 있습니다. 사람이 자기 마음대로 지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내 마음대로 할래요. 내버려두세요." 이것이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외치는 바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내면을 다루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기 마음대로 하려고 합니다. 이것이 바로 죄의 본질인 것입니다. 죄의 본질은 고집스러움, 고집불통, 완고함, 강퍅함, 순종하기를 거부함, 자기 마음대로 하려고 함인 것입니다. 진리의 다림줄이 아닌 내 마음대로 살 때 내 마음 곧 하나님의 집은 이상하게 건축되어지는 것입니다. 이런 경우는 하나님께서 친히 다가가셔서 진리의 다림줄을 베푸시고 허물어뜨리시는 것입니다.
진리의 다림줄이 임할 때 사람들은 고통스럽지만 자신의 내면이 심각하게 삐뚤어져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런 아픔이 없이 결코 내면이 그리스도의 집으로 새롭게 지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진리의 다림줄과 상관없이 우리 마음대로 집을 지었기 때문에 그런 현상이 생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다림줄을 가지고 내면을 가꾸는 사람이 필요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다림줄이 내려질 때 사람들은 자신이 얼마나 왜곡된 집을 지어왔는가를 알고 놀라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다림줄이 없이 지은 마음의 집은 대체로 거절과 반항이란 두 가지 삐뚤어진 벽을 만들어냅니다. 거절의 벽은 하나님의 다림줄에 대해 도망가는 행위로 생기는 것이고, 반항의 벽은 하나님의 다림줄에 대해 공격하는 행위로 생기는 것입니다. 사람은 이러한 거절과 반항의 벽을 만들어가면서 그 안에 숨는 것입니다. 거절과 반항의 벽으로 집을 짓고 그것을 도피처로 삼는 것입니다. 거절과 반항의 벽이 견고하고 높으면 높을수록 그 안에 숨는 자신은 결코 성장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안에 그리스도께서 거하실 수 없는 것입니다. 성인아이(adult child)란 말은 그렇게 생겨난 것입니다. 몸은 어른이 되었지만 그 내면은 아직도 어린아이에 머물러 있는 사람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왜 성인아이가 될까요? 하나님의 다림줄에 따라 내면의 집이 건축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거절과 반항의 벽을 건축했기 때문입니다. 거절과 반항으로 만들어진 내면에 갇혀 있기 때문입니다. 그 안에서 숨어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으로 양육 받거나 공급받을 기회가 없었기 때문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새기는 것, 하나님의 말씀에 대면하는 것은 우리의 속사람이 자라는 유일한 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는 삶은 그래서 중요한 것입니다. 아주 중요한 일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자신을 비추어 보는 것은 내면이 하나님의 집으로 아름답게 건축되기 위해서 필수적인 것입니다.
거절과 반항의 벽에 대해서 좀 더 이야기해봅시다. 하나님의 진리에 대해 사람들이 보여주는 반응은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방어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공격하는 것입니다. 둘 다 거절하는 행동입니다. 먼저, 진리를 순종하기 보다는 방어하게 됨으로써 사람은 자기만의 벽을 만들어서 숨게 됩니다. 방어하게 됨으로 찾아오는 정서적인 반응이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슬픔이란 감정입니다. 우리는 무언가 중요한 것을 상실했을 때 혹은 자신의 가치를 훼손당했을 때 대부분 슬픔을 해결하기 보다는 대체시켜버립니다. 그래서 찾아오는 것은 자기연민입니다. 이것은 긍휼과 다른 것입니다. 자기연민이 깊어지게 되면 증오감이 생기고, 자기증오가 깊어지면 우울증이 생기게 됩니다. 이것은 또 다시 무관심으로 발전하게 됩니다. 이것이 지적인 영역에서는 열등감, 불안정, 실패감, 그리고 자신감 결여, 혹은 깊은 죄책감이 찾아옵니다. 그리고 영적인 영역에서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점점 멀어지게 되고, 죽어가며, 절망과 낙심에 휩싸여 영적인 열정이 꺼지게 되는 현상이 생기게 됩니다. 또 한편으로 진리의 다림줄에 반항하고 공격하게 될 때 찾아오는 반응은 적개심, 분노, 증오심 등이 생기게 됩니다. 화를 내는 것 자체는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문제는 내면의 분노를 다루지 않고 방치해두는 것입니다. 마치 압력솥의 추가 고장 났는데도 내버려두는 것과 같습니다. 이러한 분노가 정서적인 영역에서는 자만심, 궤변, 조울증으로 나타납니다. 그리고 지적인 영역에서는 우월감, 경쟁심, 군림하려는 태도, 완고함, 고집스러움, 자기 뜻을 굽히지 않음, 배우기 싫어함, 사람을 조종하려고 함, 등으로 나타납니다. 그리고 영적으로 망상이 찾아오고 원망이 찾아오며 비판하게 되고 지배욕 혹은 소유욕으로 찾아오게 되는 것입니다. 거절의 대표적인 열매는 자살이고, 반항의 대표적인 열매는 살인입니다. 다시 말해서, 거절의 벽을 극단적으로 쌓게 되면 사람은 자살을 선택하게 됩니다. 그리고 공격의 벽을 극단적으로 쌓게 되면 사람은 살인을 선택하게 됩니다. 사람들은 이러한 벽을 높이 쌓아올려서 그 안에 도피처로 삼고 숨게 될 때에 점점 자라지 않게 되게 되고 결국 성인아이(adult child)로 남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이런 식으로 집을 짓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진리가 아닌 원수들의 거짓말을 믿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기준, 하나님의 다림줄에 따라 집을 지어야 합니다. 우리가 쌓아올린 이러한 벽들을 성령의 능력으로 허물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나와야 합니다. 그리고 진리의 말씀을 용기있게 대면해야 합니다. 어떻게요? 하나님 앞에 가져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내어놓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처리하시도록 내어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진리가 내 마음에 임하도록 잠잠히 기다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다림줄이 내 마음에 베풀어지게 되면 잘못된 집은 무너지게 되고, 그리스도께서 거하실 영광스러운 집이 새로이 지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 먼저 진리의 다림줄과 상관없이 원수들의 거짓말만 믿고 무작정 쌓아올렸던 벽들을 허물어뜨리고 그 안에 갇혀 지내던 어린아이가 밖으로 나와야 하는 것입니다.
원수들이 어떻게 거짓말을 하는지에 대해서는 여러분이 따로 배우면 좋겠지만 성경을 꾸준히 묵상하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말씀묵상이야말로 최고의 치유법입니다. 잘못 지어진 벽에 갇혀 자라지 못하는 어린아이를 풀어주어야 합니다. 성인아이의 특징은 다음과 같습니다. 성인아이는 정상적인 것에 대한 혼란을 겪습니다. 지극히 상식적인 것에 대해 혼동합니다. 또 자신에 대해 지나치게 비판합니다. 친밀한 인간관계에 어려움을 갖습니다. 지나친 분노를 나타냅니다. 인정과 칭찬받기에 급급합니다. 혹은 칭찬하는 것도 인색합니다. 낮은 자존감 때문에 쉽게 충동적이고 튀는 행동을 자주 합니다. 쉽게 중독증세에 빠집니다. 일중독, 사람중독, 소유중독 등과 같이. 또 성인아이는 사랑의 결핍으로 고통을 겪습니다. 사랑이 없기 때문에 자신은 쉽게 공허함과 상실감과 분리감을 느낍니다. 성인아이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은 진리의 다림줄입니다. 진리의 말씀을 받아먹는 것입니다. 진리를 알게 될 때 자유하게 되고 자라나게 됩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속사람이 여전히 어린아이처럼 머물러 있기를 바라지는 않겠지요? 나이가 들었는데도 여전히 생각하고 느끼고 판단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이 되고 싶지는 않겠지요? 성인아이가 되고 싶은 마음은 없겠지요?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어떻게 우리의 속사람이 하나님이 거하실 집이 되어갈까요? 어떻게 우리의 속사람이 자라날 수 있을까요? 첫째, 거절과 반항의 벽을 여리고 성을 무너뜨리듯이 무너뜨려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날마다 내면을 비추어 보아야 합니다. 둘째, 거절과 반항의 벽을 도피처와 은신처로 삼는 일을 즉시 중단해야 합니다. 거기서 나와야 합니다. 셋째, 날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여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내 마음에 새겨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자신을 돌아보는 일을 계속해야 합니다. 넷째, 우리의 마음은 하나님의 집이란 사실을 알고서 날마다 우리의 마음에 그리스도를 초청해야 합니다. 보혜사 성령을 초청해야 합니다. 그리고 성령이 거하시기에 온전한 집이 되도록 날마다 내면을 조사하고 살펴야 하는 것입니다. 혹시 내 안에 거절과 반항의 벽이 지어져가고 있다면, 그것을 하나님의 다림줄에 비추어볼 때 깨닫게 될 때, 우리는 즉시 그것들을 무너뜨리시도록 하나님의 손에 자신을 맡겨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친히 지으시도록 자신을 그분의 선한 손에 내어맡겨야 합니다. 하나님의 다림줄, 그것은 우리의 속사람을 새롭게 빚어 가시는 하나님의 계획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내 마음에 잘못 세워진 벽을 허물고 그 안에서 나오십시오. 하나님께서 그 사랑의 손으로 허무시도록 내어드리십시오. 그러면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대로 여러분 안에 하나님의 성전이 새롭게 건축되어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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