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치심의 치유는 가장 근원적인 치유의 영역입니다.
인류가 안고 있는 수치심은 모든 불행의 근본입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수치심을 치유할 유일한 처방입니다.
김광락 선교사 올림.
수치심의 치유
본문: 시편25:1-3
오늘은 ‘내 얼굴을 도우시는 하나님’에 대해서 여러분과 말씀을 나누기 원합니다. 수치심에 관하여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여러분과 나누고 싶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죄를 범했을 때 처음으로 느낀 감정은 ‘수치심’이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벌거벗었음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아담의 후손으로 태어난 모든 사람에게는 수치심의 감정이 있습니다. 이러한 수치심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근원적인 감정입니다. 이러한 수치심이란 감정을 어떻게 정의할 수 있을까요? 저는 수치심이란 자신이 불완전하다고 느끼는 믿음 혹은 신념을 의미한다고 봅니다.
이 수치심은 하나님과, 그리고 이웃과의 친밀한 관계를 가로막는 장애물입니다. 수치심 때문에 자신이 숨고, 자신을 숨기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독생자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신 중요한 목적 중에 하나가 인간이 가지고 있는 근원적인 수치심을 치유하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오신 것은 인간의 수치심을 치유하고 하나님과 이웃에 대해 친밀한 관계를 형성할 수 있도록 하시기 위함입니다. 그러면 이 장애물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요? 수치심에서 치유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일단 치료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 처방전이 있음을 온전히 믿어야 합니다. 시편 42편 11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나는 내 얼굴을 도우시는 내 하나님을 인하여 오히려 찬송하리로다.”
수치심에 대해서 우리는 잘 모른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하지만 일상생활에서 매우 가까이 경험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삶속에서 경험하는 근본적인 상처의 뿌리입니다.
부모의 말 한 마디나 친구의 말 한 마디 때문에 인생 전체에 큰 영향을 받는 것을 종종 봅니다. 대부분 말 때문에 상처를 받는 경우는 이 수치심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수치심을 자극하여 동기를 부여하려고 합니다. 부모는 자식으로 하여금 공부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동생이나 혹은 다른 친구들과 비교함으로써 동기를 부여하려고 합니다. 이것이 바로 수치심을 주는 대표적인 방식입니다. 남편과 아내가 서로 말다툼을 할 때 종종 “당신은 왜 그래?”라는 말로써 상대방의 수치심을 자극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방식은 아무리 좋은 말로도 정당화될 수 없습니다. 수치심을 주는 그 어떤 것도 친밀감을 깨뜨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부모와 자식이 멀어지고, 사랑했던 남편과 아내가 멀어지는 근본적인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친밀감을 깨뜨리기 원한다면 수치심을 건드려야 합니다. 수치심은 친밀감의 적입니다. 친밀한 관계를 원한다면 수치를 가려주어야 합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은 우리와 친밀한 관계를 갖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아들을 보내주셨던 것입니다.
성경에서 수치심과 관련된 구절을 찾기란 어렵지 않습니다!
아담과 하와를 보세요. 범죄한 그들이 보인 반응은 서로에게 수치심을 주는 관계가 되었습니다. 자신이 완전하지 못하다는 신념이 자신을 과도하게 방어하거나 상대방을 공격하게 만드는 뿌리가 됩니다. 가인이 동생 아벨을 왜 죽였습니까? 살인의 동기는 수치심 때문이었습니다. 사무엘상에서 브닌나가 한나를 격동했다는 것은 수치심을 주는 것이었습니다. 사단은 수치심을 주는데 명수입니다. 교회 안에서 관계를 깨뜨리는 원수의 전략이 바로 이것입니다. 수치심을 자극함으로써 관계를 깨뜨리는 것입니다. 팀이 하나되지 못하고 분열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 있습니다. 가정이 깨어지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모든 상처 중에서 가장 근원적인 상처가 바로 수치심입니다.
그러나 다윗을 통해 오늘 우리가 도전받는 것이 있습니다. 다윗은 수치심을 극복한 인물입니다.
다윗은 수치심으로 가득 찬 생애였습니다. 다윗의 출생부터 보십시오. 다윗은 고백하기를 “죄악중에 출생하였음이여”라고 말합니다. 다윗은 막내로서 부모의 사랑을 충분히 받지 못한 것이 분명합니다. 성장기의 다윗을 보십시오. 다윗은 형들에게 따돌림을 받습니다. 형들이 사무엘 선지자를 맞이할 때 자신은 들판에서 양떼와 같이 있었습니다. 다윗이 형들이 있는 전장에 갔을 때 형들이 다윗에게 어떤 말을 했는지를 보십시오. 형들은 막내에게 분노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그 모든 상처를 극복했습니다. 상처는 극복될 때 상급으로 바뀝니다. 삶의 위기는 어떻게 반응하느냐에 따라 위기가 될 수도 있고 기회가 되기도 합니다. 다윗은 어떻게 그 모든 상처를 극복하고 모든 사람이 우러러보는 삶을 살 수 있었을까요? 오직 한 가지 비결뿐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얼굴을 바라보았다는 것입니다. 수치심을 받을 때마다 그는 하나님의 얼굴을 쳐다보았습니다. 상처로 일그러진 다윗은 하나님의 얼굴을 뵐 때마다 상처는 영광으로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오늘 본문 1-3절, 16-20절까지 보기 바랍니다. 오늘은 이 수치심을 치유하기를 원하시는 우리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나누고 싶습니다. 먼저 생각해볼 것은 이것입니다. 원수는 수치심을 준다는 사실입니다. 원수는 어떻게 하든지 친밀한 관계를 깨뜨리기 위해 노력합니다. 원수는 먼저 불완전한 부분들을 지적합니다. 허물을 보게 합니다. 허물을 보면서 부끄러워하게 합니다. 분명히 기억하십시오. 내가 상대방의 잘못된 부분을 고치기 위해 수치심을 주려고 하는 것도 원수의 도구가 된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원수들이 던지는 거짓메시지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당신은 뭔가 부족해!’ ‘하나님은 당신을 싫어하실거야!’ ‘당신이 온전해지려면 세상의 무엇인가가 필요해!’ 창세기 3장을 보십시오. 사단이 아담과 하와를 어떻게 미혹했습니까? 그들이 완전하지 않다는 사실을 지적함으로써 미혹하지 않았습니까? 오늘도 가정 안에서도, 교회 안에서도 원수의 도구가 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자신도 모르게 원수의 전략에 노리개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친밀감을 깨뜨리는 원수의 일에 동역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다른 사람들에게 수치심을 주는 걸까요?
첫째는 무지하기 때문입니다. 수치심이 몸에 배여 있기 때문에 수치심에 대해서 아무런 생각도 없습니다. 그리고 수치심이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에 전달하고 있다는 사실도 모릅니다. 수치심이 친밀함에 얼마나 악한 영향을 주는지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자신도 수치심으로 고통을 당하고 있으면서도 다른 사람에게 수치심을 줍니다. 수치심을 주는 것에 대해서 아무런 느낌도 없습니다. 둘째는 상대방에 대한 좌절감 때문입니다. 그래서 창피를 주어서라도 상대방에게 변화를 유도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상대방으로 하여금 더욱 더 완고하게 만드는 행위이며, 상대방과의 친밀감이 깨어지는 원인입니다. 상대방을 조종하려는 그 어떤 의도도 친밀한 관계의 적이 됩니다. 셋째로는 권력을 얻거나 통제하려는 수단으로 수치심을 주기도 합니다. 수치심을 주어서 상대방의 자신감을 약화시켜서 상대방에 대한 자신의 주도권을 유지하거나 상대방 위에 군림하려고 합니다. 넷째는 자기를 방어하기 위해서 상대방에게 수치심을 줍니다. 그래서 자신의 열등감을 교묘하게 감추고 자신이 상대방보다 한 수 위라는 느낌을 즐기고자 수치심을 이용합니다. 이것은 다분히 습관적으로 행동합니다. 다섯째로는 자신의 부족함에 대한 관심을 다른 사람의 단점에 초점을 둠으로써 회피하기 위해 수치심을 사용하기도 합니다.
그러면 수치심은 왜 생기는 걸까요?
첫째는 아담의 원죄 때문입니다. 죄는 가장 먼저 수치심을 가져다줍니다. 둘째는 태중에서 수치심을 경험할 수도 있습니다. 원치 않는 임신의 경우 태아는 수치심을 경험합니다. 셋째는 성장하면서 자신이 다르다는 인식을 갖게 되면서 수치심을 경험합니다. 유치원이나 학교에서 경험하는 수치심은 정말 엄청난 영향력을 인생 가운데 행사합니다. 넷째로는 성적학대나 가정의 불행한 사건이 수치심을 가져다줍니다. 다섯째로는 권위자들의 말이 수치심을 줍니다. 가장 대표적인 경우가 부모입니다. 그리고 교사들이 되고, 그 다음은 친구들이 됩니다. 저의 경우는 가정환경에 대한 수치심이 있었습니다. 일단 부모가 그러한 환경을 부끄러워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러한 부모 아래서 자라나는 저는 그러한 환경에 대한 수치심의 상처를 받는 것입니다. 그러한 환경에서 자라날 때 저는 하루빨리 어른이 되어서 성공하고 자립해야겠다는 결의로 가득 찼던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알아가면서 하나님은 내 안에서 근원적인 상처를 치유하기 시작하셨습니다. 사람은 수치심에서 온전히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모든 상처에서 우리를 자유하게 하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그러면 이 수치심을 언제 느끼는 걸까요?
수치심은 거짓메시지 때문에 오는 것입니다. 원수들의 비난을 들을 때 오는 것입니다. 원수들이 거짓 메시지로 비난할 때 사람은 수치심을 느낍니다. 수치심을 느끼면 방어하거나 혹은 공격하거나 혹은 숨거나 혹은 다른 대체물로 자신을 가리는 행동이 나타납니다. 원수의 거짓말은 다음과 같습니다. “당신은 부족하다” “하나님은 당신을 미워해” “온전해지려면 세상의 어떤 것이 필요해” 아담과 하와에게 “하나님과 같이 되어”라고 뱀이 말한 것을 생각해보십시오. 원수의 전략은 완전한 자와 불완전한 자신을 비교하는 것입니다. 가정이나 학교에서 이렇게 비교하는 말로서 수치심을 자극하는 말들이 얼마나 많은지 보면 놀랄 것입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사실은 이 수치심이란 감정은 전염성이 매우 강하다는 사실입니다!
수치심을 주는 행동에는 신체적, 성적, 언어적, 정서적 학대 등이 있습니다. 수치심을 주는 행동들에는 먼저, 감정과 생각을 부정하고 수치심을 주는 것이 있습니다. 감정은 약하고 나쁜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영적으로 위협하는 행동도 포함됩니다. 주일학교 교사가 종종 그렇게 수치심을 줍니다. “네가 그렇게 한 것에 대해 예수님이 뭐라 생각하시겠니?” 혹은 “하나님은 너의 행동에만 관심을 갖고 계신다 마음의 문제는 중요하지 않다.” 의외로 선한 동기로써 수치심을 주는 경우가 가정과 교회에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또한 수치심을 주는 행동으로서 비난이나 유머를 이용한 모독이 있습니다. “지금까지 한 말은 귀담아듣지 않아도 돼!” “그냥 농담이었어!” “그냥 웃자고 한 소리야!” “그냥 재미로 한 말인데 왜 그래?” 이런 경솔한 말들이 수치심을 주는 행위입니다. 그리고 문제에 대해 논의가 다 끝난 후에도 계속 그 문제들을 지적하는 것이라든지, 혹은 다른 사람과 비교하는 것이라든지, 심지어 지나친 보살핌도 수치심을 주기도 합니다. 제가 아는 어떤 청년은 30세가 넘은 건장하고 씩씩한 형제입니다. 그런데 그 어머니가 얼마나 아들을 아끼고 보살피는지 모릅니다. 그 아들은 지나친 보살핌을 받으면서 부끄러워하는 것입니다. 과도한 보호 역시 성숙을 가로막는 것이고 수치심을 주는 행위일 수 있습니다.
그러면 수치심을 받아들이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첫째, 낮은 자존감을 갖게 됩니다. 그래서 자기 거절, 자포자기의 행동을 하게 됩니다. 둘째, 늘 우울한 감정을 갖게 됩니다. 자신이 용납 받지 못하는 존재임을 느끼기 때문에 우울해집니다. 수치심은 활력을 떨어뜨립니다. 행동의 에너지를 빼앗아 가버립니다. 그래서 사람으로 하여금 푹 꺼지게 만듭니다. 셋째로, 칭찬을 받아도 놀림이나 비판으로 들립니다. 넷째, 비교하고 경쟁합니다. 수치심 때문에 경쟁하는 것입니다. 지는 것을 견디지 못합니다. 다섯째, 비판을 견디지 못합니다. 수치심이 많은 사람일수록 책망의 말을 견디지 못합니다. 여섯째, 다른 사람의 실수를 쉽게 비난합니다. 일곱째, 소속감을 느끼지 못합니다. 소속감에 대한 두려움이 있습니다. 친밀한 관계에 대한 어려움을 느낍니다. 마음으로는 친밀감을 간절히 원하지만 수치심 때문에 더 깊은 친밀감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자신을 발견합니다. 여덟째, 지나칠 정도의 자기중심적이 됩니다. 자기 문제에 집중하게 됩니다. 타인의 문제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오로지 자기문제에만 집착하게 됩니다. 수치심이 많은 사람은 자기에 대한 말을 많이 하게 됩니다. 아홉째, 지나치게 외형, 외모를 중시합니다. 수치심이 많은 사람일수록 외모에 관심이 많고 꾸미기에 지나치게 신경을 쓰게 됩니다. 열째, 우상숭배적이 됩니다. 열렬하게 집착하는 어떤 사람이나 물건을 찾게 됩니다. 수치심이 많은 사람은 자신의 수치를 가려줄 ‘나만의 무화과나무잎’을 찾아다닙니다. 세상의 다른 것에 자신의 정체성 찾으려 합니다. 물질이나, 사람이나, 사역 등으로 자신의 수치를 가리려고 노력합니다. 열한 번째로, 중독에 빠져듭니다. 수치심을 잊어버리기 위해서입니다. 열두 번째로, 친밀한 관계를 원하지만 기회가 오면 거부해버립니다. 이성교제를 하는 청년들에게 이런 증상을 종종 찾아볼 수 있습니다. 특히 자매들의 경우 그렇습니다. 멋진 형제가 가까이 다가오면 처음에는 좋아하다가 어느 선부터는 뭔가 모를 두려움 때문에 관계를 끊어버립니다. 열세 번째는 흑백논리가 강한 사람이 됩니다. 완벽함을 추구하며, 그렇지 못하면 포기해버립니다. 열네 번째는 평범함을 증오합니다. 열다섯 번째로 자신의 감정을 인정하지 않거나 감정에 정직하지 못합니다. 자신의 감정을 잘 드러내지 못합니다. 자신의 감정을 인정하지 않거나 감정에 정직하게 못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쉽게 소진되어 있습니다. 삶의 활력이 없어지게 되어버립니다. 이 모든 결과 친밀감을 형성하는데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하나님과, 그리고 이웃과 말입니다. 수치심의 문제는 친밀감을 형성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그리고 이웃과 더 깊은 관계를 원하지만 그렇지 못한 이유는 수치심 때문입니다. 수치심이란 친밀감을 빼앗아가는 도적입니다. 이 수치심이 치유되지 않으면 결코 친밀감을 회복할 수 없습니다.
이 수치심은 매우 끔찍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가져야 할 감정이 결코 아닙니다! 우리는 수치심과 싸워야 합니다! 수치심은 주님께 나오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잠언 3장 35절은 말합니다. “지혜로운 자는 영광을 기업으로 받거니와 미련한 자의 현달함은 욕이 되느니라.” 수치의 반대는 영광입니다. 우리의 수치를 치유하기 위해서는 절대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이 필요합니다. 다니엘서 12장 2절에, 생명책에 그 이름이 없는 사람은 무궁히 부끄러움을 입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어디에서도 이 수치심에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죄를 느끼고 뉘우친다고 해결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자백하는 것과 자책하는 것은 다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가 우리의 죄를 자백할 때만 비로소 하나님은 그 아들의 흘린 피로 만드신 의의 옷으로 우리의 수치를 덮어주실 것입니다. 이것이 근원적인 수치심에 대한 하나님의 치유책입니다.
자, 다윗은 어떻게 이 수치심을 치유할 수 있었는지 한번 봅시다.
그는 상처가 올 때마다 하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는 비교의식과 경쟁의식을 버렸습니다. 비교의식은 수치심의 엔진이라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그는 결코 다른 사람을 비판, 비난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수치심을 가리기 위해 다른 사람을 비난하는 삶을 살지 않기로 결심해야 합니다. 무엇보다 다윗은 자신의 감정에 정직했습니다. 자신의 감정을 있는 그대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 토설했습니다. 다윗은 또한 자신의 연약함을 드러내었습니다. 상처받기 쉬운 자신의 모습을 과감히 노출하였습니다.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는 것은 약한 자의 모습이라는 생각은 사단의 거짓메시지입니다. 그러나 수치심을 치유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약함을 드러내는 진정한 용기가 필요합니다. 무엇보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나의 감정을 드러내는 것이 중요합니다. 상처를 드러내고 고백하는 것은 사람의 몫이고 영광으로 치유하고 채우는 것은 하나님의 몫입니다. 수치심의 사이클을 친밀감의 사이클로 전환하기 위해서 우리는 용기 있게 행동해야 합니다. 용감하게 나아가서 상처받기 쉬운, 혹은 상처받아 아파하고 있는 자신을 드러내야 합니다. 우리는 비난하고 방어하고 위축하는 방식을 내려놓고, 상대방에게-그 대상이 하나님이든 아니면 이웃이든-상처받기 쉽고, 개방적이고, 정직한 모습으로 다가가야 합니다. 숨어 있으면 결코 친밀감이 찾아오지 않습니다. 먼저 빛 가운데 자신을 드러내는 용기를 가져야 합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우리는 친밀감을 위해 지음받았다고 말입니다! 수치심은 이 친밀감을 빼앗아갑니다.
무엇보다 우리는 비교의식을 버려야 합니다. 사단은 비교의식을 조장하는데 명수입니다. 비교의식을 통해 다음과 같은 거짓메시지를 마음속에 던져줍니다. 첫째, 다른 것은 나쁜 것이다. 둘째, 불완전한 것은 나쁜 것이다. 셋째, 완전한 것만이 용납된다. 넷째, 당신의 가치는 세상의 기준에 의해 평가된다. 이 네 가지는 사단이 수치심이란 상처를 주기 위해 사용하는 보편적인 거짓말의 양상입니다. 이에 대해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첫째, 다른 것은 선한 것이다. 둘째, 불완전한 것은 하나님의 계획이다. 셋째, 완전함이란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사는 상태이다. 넷째, 나의 가치는 나의 정체성 안에 있다. 우리는 이미 사랑을 입은 존재이다! 자, 우리는 선택해야 합니다. 사단의 메시지에 귀를 기울일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일 것인가를 결정해야 합니다. 우리가 바르게 결정하는 것을 도와주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은 아들을 보내어서 우리 죄의 대가를 지불하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을 바라보는 자들을 아무 대가없이 은혜로 수치를 덮어주고 가려주시기로 결정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놀라운 은혜입니다. 이 은혜만이 인생의 모든 수치심을 치유할 수 있습니다. 이 은혜는 예수 그리스도 밖에는 결코 찾을 수 없는 것입니다.
수치심을 치유하기 위해 하나님은 당신의 아들을 보내주시고 죽게 하셨습니다.
우리의 수치를 가려주시고 덮어주시려는 하나님의 강력한 의지를 천명하신 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수치심에서 자유로워지는 유일한 길은 십자가에 나타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성경에서 ‘구속’(redemption)이란 단어는 “덮는다.” 혹은 “가린다”는 뜻입니다. 수치심으로 하나님을 피해 나무 뒤에 숨고, 무화과나무잎으로 자신을 가린 인생들을 위해 하나님 아버지께서 죄 없는 동물을 죽여서 가죽옷을 지어입히셨습니다. 이것이 아들의 희생을 통해 지어진 의의 옷으로 죄인들의 모든 수치를 가려주시고 덮어주시려는 하나님의 마음을 보여주는 사건이었습니다. 하늘의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은 우리의 모든 수치심을 가려주기를 열망하신다. 우리가 어떻게 그 사랑을 받을 수 있을까요? 수치심에 떨면서 은폐하고 엄폐하는 한 결코 불가능합니다. 우리가 숨은 데서 나와야 합니다. 우리가 가리는 것을 하나님 앞에서 벗어던져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바랄 때 하나님은 우리의 얼굴을 도와주시는 분입니다. 수치심은 얼굴에 가장 먼저 나타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광, 하나님의 얼굴빛은 우리의 수치를 가려주는 은혜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도시는 수치심의 도시입니다. 이 도시에 가장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얼굴을 바라보는 믿음입니다. 한국의 문화와 정서와 사고방식은 수치심 문화입니다. 이것은 유교문화와 독재정권의 영향으로 생긴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얼굴빛으로 넉넉히 수치심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내 힘과 내 의지만으로는 결코 수치심에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우리가 상처받는다고 느끼는 순간마다 우리는 하나님의 얼굴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얼굴빛은 우리의 모든 수치심을 친밀감으로 바꾸는 힘이 있습니다. 우리는 상처받을 때마다 이렇게 주 앞에 나아가 고백해야 합니다. “내 영혼이 주를 우러러 봅니다.” “주의 얼굴빛으로 수치심에 떨고 있는 나를 도와주십시오.” “수치심으로 고개를 들지 못하는 나를 도와주셔서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고개를 들도록 도와주십시오.” 하나님의 얼굴빛으로 수치심의 순환고리를 끊고 친밀감으로 나아갑시다. 우리에게 있어야 하는 것은 믿음이라고 하는 작은 용기입니다. 숨은 곳에서 밖으로 나오기만 하면 됩니다. 회복은 하나님께서 하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