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복 메시지 서른 네 번 째입니다.
계속해서 치유에 대한 메시지를 올려봅니다.
치유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메시지가 용서의 능력이지요..
용서는 감옥에 갇힌 자신을 풀어내는 능력입니다.
용서는 내게 상처를 준 그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사실은 용서하지 않음으로 묶여 있던 나를 위한 것입니다.
김광락 선교사 올림.
용서의 능력
본문: 마6:14,15
오늘은 용서의 능력에 대해서 여러분과 함께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치유를 이야기할 때 결코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 바로 용서입니다. 용서는 치유의 핵심입니다. 용서가 없는 치유는 없습니다. 진정한 치유는 용서를 반드시 동반합니다. 이처럼 용서는 중요하지만 오늘 우리는 용서에 대해서 잘 모르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 용서를 너무나 막연하게 생각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 시간 성경이 가르치는 용서가 어떤 것인지 함께 나누려고 하는 것입니다. 얼마 전 뉴스에서 일본의 총리와 미국의 부시 대통령간의 대화를 보여준 적이 있었습니다. 종군위안부 문제로 한참 예민해져있을 때였습니다. 일본 총리는 미국 대통령에게 '사과의 뜻을 전한다'고 했고, 미국 대통령은 '사과를 받아들인다'고 하는 장면을 볼 수 있었습니다. 제가 이 장면을 보고 참 한심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경우를 보면 어느 경우도 참된 용서라고 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일본 총리가 미국 대통령에게 용서를 구하는 것은 진정한 사과가 아니었습니다. 이것은 다분히 미국 내 반 일본 감정을 누그러뜨리려고 하는 일본 총리의 정치적인 제스츄어에 불과한 것이었습니다. 일본 총리는 위안부 할머니들에게 찾아가서 머리를 조아리고 사죄를 해야 했습니다. 또한 미국 대통령 또한 사과를 받아들일 위치가 아니었습니다. 부시 대통령이 '사과를 받아들인다'고 말한 것을 볼 때 정말이지 개념이 있는 사람인가 싶었습니다. 뉴스를 보면서 황당한 상황이었지만 조금 곰곰이 생각해보니 용서에 대해 올바른 개념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 싶었습니다. 그리고 용서를 제대로 실천하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싶었습니다. 여러분은 용서에 대해 바르게 이해하고 있습니까? 용서가 얼마나 중요한지 여러분은 알고 있습니까? 성경이 말하는 용서에 대해 알고 있습니까?
오늘 읽은 본문 말씀은 예수님께서 바른 기도를 가르치신 직후에 하신 말씀입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기도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가르쳐달라고 말입니다. 예수님은 먼저 유대인의 외식하는 기도와 이방인의 중언부언하는 기도를 멀리하라고 가르친 다음에 기도의 본질과 기본정신에 대해 가르치셨습니다. 우리가 너무나 잘 아는, 그래서 암송까지 하고 있는 주기도입니다. 그런 다음에 예수님은 오늘 읽은 본문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면 너희 천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시려니와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 용서가 기도에 있어서 어떤 영향을 주는지 말씀하신 것입니다. 내가 다른 사람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볼 때, 용서는 우선 기도의 능력이기도 합니다. 능력 있는 기도를 하기 원합니까? 그렇다면 용서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용서를 실천하지 않으면서 능력 있는 기도를 할 수 없습니다. 용서는 기도에 있어서 절대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내가 용서하지 아니하면 하나님은 결코 내 얼굴을 돌아보지 않으실 것입니다. 이처럼 용서는 매우 중요한 문제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싶습니까? 그렇다면 먼저 용서해야 합니다. 이처럼 용서는 중요한 문제입니다. 용서는 하나님의 얼굴을 보느냐 보지 못하느냐를 결정짓는 문제입니다. 그러나 유대인들과 이방인 종교는 용서를 중요하게 가르치지 않습니다. 세상 철학과 세상 종교들은 용서의 문제를 부차적인 문제로 여깁니다. 그러나 진정한 기독교는 용서를 가장 중요한 문제로 여깁니다. 여러분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을 이것으로 증명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용서를 최우선 순종해야 할 과제로 여기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고 자신 있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용서의 실천은 참 그리스도인의 표지입니다.
그러면 먼저 용서가 무엇인지부터 생각해봅시다. 용서가 무엇입니까? 용서의 개념부터 명확히 하고 넘어갑시다. 오래 전에 서울에 있을 때 일입니다. 제가 청년부를 맡고 얼마 지나지 않아 어떤 자매가 저를 찾아와서 저에게 용서를 구한다고 하였습니다. 그 자매가 나에게 어떤 잘못을 했는지 궁금했는데 들어보니까 자신이 저를 미워한 것을 용서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때 제가 얼마나 황당했는지 모릅니다. 무슨 말입니까? 그 자매는 신실한 그리스도인이었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애쓰는 모범적인 리더였습니다. 그런데 그 자매는 용서의 번지수를 잘못 찾았던 것입니다. 그럴 때는 누구를 찾아가서 용서를 구해야 합니까? 하나님께 찾아가서 용서를 구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고백해야 할 잘못을 사람에게 고백하게 되면 또 다른 문제를 일으키는 것입니다. 그 자매와 대화한 후에 제 마음이 한 동안 얼마나 어려웠는지 상상해보십시오. 이러한 실수를 하게 되는 까닭은 용서의 개념을 잘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번지수를 잘못 찾는 실수를 범하는 것입니다. 용서가 무엇인지 모르고 막연한 마음의 부담감 때문에 용서를 실천하려고 한다면 이런 실수를 범할 가능성이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용서의 번지수를 제대로 찾아가는 그리스도인입니까?
그러면 용서가 무엇입니까? 용서란 풀어주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용서란 단어는 내게 갚아야 할 빚을 탕감해주는 경제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내가 누군가를 용서한다는 것은 피해보상을 청구할 권리를 포기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용서는 가해자가 피해자에게 찾아가서 용서를 구하는 것이고, 피해자가 가해자에 대해서 용서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용서를 할 때 누가 누구에게 어떤 피해를 끼쳤는지를 분명히 해야 하는 것입니다. 피해를 입은 사람은 손해를 입힌 사람에게 보상을 청구할 수 있습니다. 피해를 입힌 가해자는 손해를 입은 사람에게 겸손히 사과하고 피해를 보상할 의무가 있습니다. 이런 차원에서 용서는 피해자가 가해자에 대해 하는 것이고, 용서를 구하는 것은 가해자가 피해자에게 하는 것입니다. 앞서 말한 그 자매는 저에게 어떤 정신적이고 금전적인 피해를 끼친 적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저에게 찾아와서 용서해달라고 하니 제가 얼마나 황당했겠습니까? 용서는 권리를 가진 자가 포기하는 행위요, 풀어주는 행위요, 자유를 주는 행위인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잘 보십시오. 다른 사람이 나에게 어떤 실수를 했을 때 내가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 자신을 잘 보십시오. 다른 사람이 나에게 어떤 모욕적이거나 무례한 말을 했을 때 나는 어떤 반응을 보입니까? 예, 기분이 나쁩니다. 속으로 화가 납니다. 내가 상대방의 말 한 마디에 정신적인 상해를 입은 것입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어떤 상처를 주는가에 대해서는 잘 생각하지 않고 도리어 사람들에게 내가 어떤 상처를 받았는가에 대해서는 더 잘 기억하는 것이 사람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 받은 상처보다는 다른 사람에게 상처 준 것을 더 생각해야 합니다. 아무튼 내가 입은 상처에 대해 나는 피해보상을 요구할 권리가 있습니다. 이러한 권리를 주님 앞에서 포기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용서인 것입니다. 주님이 가르치신 교훈의 본질은 이것입니다. 내가 다른 사람에게 관대하다면 주님도 내게 관대하실 것입니다. 내가 다른 사람에게 비판적이면 주님도 내게 비판적이실 것입니다. 내가 다른 사람에 어떻게 하는가를 주님이 눈여겨보십니다. 그리고 내가 다른 사람에게 대하는 태도와 행동대로 주님도 나를 대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나를 불쌍히 여겨주시기를 원하신다면 내가 남을 먼저 불쌍히 여겨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나의 문제를 해결해주기를 원하신다면 그래서 내 문제를 해결해달라고 간구한다면 내가 먼저 문제 속에 있는 다른 사람을 도와주려고 마음을 먹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기독교의 정신입니다. 이것이 기도의 기본정신입니다. 내가 아무리 40일 금식을 한다고 하더라도 용서를 실천하지 않는다면 주님은 결코 나를 용서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주님은 내가 다른 사람에게 대하는 태도를 가지고 나를 대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용서란 것은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내가 다른 사람의 실수를 용서할 때 주님은 나의 실수를 용서하시는 것입니다. 내가 다른 사람에게 관대할 때 주님은 나에게 관대한 분으로 나타나시는 것입니다. 내가 다른 사람에게 엄격할 때 주님은 나에게 엄격한 분이 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기본진리를 잊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자, 좀 더 용서에 대해 배우기를 원합니다. 용서에 대한 잘못된 편견들과 개념들을 좀 더 다룹시다. 많은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용서의 편견 중에 이런 것이 있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만일 나에게 최소한 이런 것을 하면 내가 용서할 것이다." 용서의 조건을 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생각하십시오. 주님도 내게 그와 같이 하실 것입니다. "만일 이런 것을 하면 나는 너를 용서하리라."라고 말입니다. 우리가 해야 할 용서는 조건적인 용서가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참된 용서는 무조건적인 용서인 것입니다. 왜냐면 주님께서 먼저 나를 용서해주셨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우리를 용서하여 주셨듯이 우리도 남을 용서할 의무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순종해야 하는 계명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사람이 내게 와서 말 한 마디라도 사과를 하면 내가 용서하겠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그렇다면 주님도 내가 갖고 있는 그런 태도로 나를 대하실 것입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어떤 태도로 대하는가를 유심히 살펴보십시오. 그것은 주님이 나를 어떤 태도로 대하는 가를 결정합니다. 내가 먼저 용서하면 주님이 나를 용서하십니다. 내가 먼저 사랑하면 주님이 나를 사랑하십니다. 내가 먼저 풀어주면 주님이 나를 풀어주십니다. 내가 먼저 섬기면 주님이 나를 도우실 것입니다. 내가 남을 치유하면 주님이 나를 치유하실 것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용서는 선택이 아니라 의무입니다. 이것은 내가 세상에서 어떤 태도를 가지고 살아야 하는지 보여줍니다. 내가 다른 사람을 용서하는 것은 다른 사람에 대해서 관대한 태도를 가지고 살아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관대한 태도를 가지고 사람을 대하는 것, 이것은 그리스도인에게는 의무입니다. 또한 그리스도인이 되려는 사람에게도 마찬가지로 의무입니다. 한번은 베드로가 예수님께 묻기를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일곱 번 뿐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까지라도 할지니라."(마18:22)라고 대답하셨습니다. 그리고 일만 달란트 빚진 종의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일만 달란트 빚진 자가 채권자에게 찾아가서 용서를 구했습니다. 채권자를 채무자의 빚을 면제해주었습니다. 채무자는 마음에 평안을 얻고 돌아갔습니다. 용서는 부담을 안고 있는 사람의 마음에 평안을 주는 행위인 것입니다. 그런데 일만 달란트 면제받은 사람이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자신에게 100 데나리온 빚진 동료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태도를 보입니까? 목을 잡고 빚을 갚으라고 독촉합니다. 같이 일하는 동료가 엎드려서 용서를 구합니다. 그러나 그 사람은 옥에 가두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이 어떻게 되었습니까? 일만 달란트 빚을 탕감 받은 사실이 취소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이 비유의 끝에 예수님은 이렇게 끝맺고 계십니다. "너희가 각각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내 천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같이 하시리라."(마18:35) 우리가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해야 합니다. 이것은 말로만 용서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란 것입니다. 용서는 말로만 되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용서는 태도의 변화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일만 달란트 면제 받은 사람은 100 데나리온의 빚을 진 동료에게 예전과 다른 태도를 보여야 했습니다. 그렇지 못했기 때문에 그는 일만 달란트 빚 탕감이 취소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핏값으로 우리의 모든 죄값을 전부 면제시켜주셨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대한 태도를 바꾸지 않는다면, 용서를 실천하지 않는다면 일만 달란트의 빚은 다시 살아나는 것입니다. 내가 중심으로 용서를 실천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마음의 평안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다시 우리 심령은 묶임을 받게 되고 감옥에 갇힌 심령과 같이 답답하고 고통을 겪으면서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참된 용서는 반드시 평강의 열매가 뒤따릅니다. 그러나 중심으로 용서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마음은 감옥에 갇혀 살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만일 감옥에 갇혀 살기를 원한다면 용서를 하지 마십시오. 그러나 마음의 평안과 자유를 느끼면서 살기 원한다면 중심으로 용서하십시오. 여러분의 태도를 바꾸십시오. 용서하는 자로 사십시오. 용서는 바로 여러분 자신을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다른 어떤 사람이 아닌 나 자신을 위해 용서하기로 결정하십시오. 그러나 불행하게도 오늘날도 다른 사람을 용서하지 않음으로 자신이 감옥에 갇혀 사는 가련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런 사람은 마음에 평안도 없습니다. 웬지 모를 답답함을 안고 살아가면서도 자신은 그 원인이 무엇인지조차 모릅니다. 비밀은 여기 있습니다. 감옥에서 나와 마음의 자유와 평안을 되찾는 비결은 바로 용서인 것입니다. 용서는 풀어주는 것입니다. 자유를 선언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풀어주지 아니하면 우리가 묶이게 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정서적으로 재정적으로 묶인 가운데서 살아갑니다. 묶인 것을 풀려면 용서란 열쇠를 가지고 먼저 풀어야 합니다. 주님이 내 삶 속에 풀어주시기를 원합니까? 그렇다면 주님이 나에게 해주기를 바라시는대로 우리가 먼저 다른 사람에게 해주어야 합니다. 우리가 풀어주면 우리가 풀려납니다. 우리가 남에게 자유를 주면 우리가 자유를 누리게 됩니다. 이것이 용서의 참 능력입니다. 용서는 내가 자유와 평안을 얻게 하는 능력입니다.
그러면 용서의 능력은 어디서부터 나오는 것일까요? 먼저, 용서의 능력은 자신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마음에서 나옵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을 사랑하지 않음으로 자신을 묶이게 합니다. 자신이 자유하기를 원하지 않기 때문에 다른 사람을 용서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자신이 감옥에서 나오기 위해서 용서를 하기도 합니다. 자신을 진정으로 사랑할 줄 안다면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모르는 사람조차도 용서를 베푸는 삶을 살기도 합니다. 그런 사람은 자신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남을 용서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방법으로 남을 용서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용서의 능력이 흘러나오는 곳이 또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용서를 경험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의 빚 일만 달란트를 탕감해주신 것을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베푸신 죄사함의 은총을 믿음으로 받는 것입니다. 죄를 지은 다윗이 경험한 죄사함의 기쁨을 맛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을 용서할 수 있는 능력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리스도의 공로로 용서하시는 은총을 경험하는데서 생기는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용서의 능력입니다. 우리가 용서의 능력을 얻기 위해 우리는 우리의 죄를 빛이신 하나님 앞에 드러내어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회개를 통해 우리는 용서의 능력을 얻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지은 죄들을 빛 가운데 드러낼 때 하나님의 빛은 우리 안에 스며들어옵니다. 여러분은 이러한 죄사함의 은총을 경험해보셨습니까? 하나님께서 나를 용서하실 때 내 안에 어떤 기쁨이 찾아오는 것을 느껴보셨다면 나는 이미 용서의 능력을 받은 사람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죄사함을 깊이 경험하는 것과 다른 사람을 용서하는 일은 같이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유지하는 길은 내가 나의 죄를 자백하는 것과 내게 잘못을 범한 사람들을 용서하고 관대한 태도로 대하는 것이 같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내가 용서하지 아니하면 주님이 나를 먼저 용서하신 것을 취소하실 것입니다. 내가 용서를 실천함으로 내가 용서받은 자임을 스스로 증명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용서의 영역을 살펴봅시다. 첫째, 나를 용서하는 일이 필요합니다.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용서하지 못하고 용납하지 못한 채 살아갑니다. 다른 사람은 쉽게 용서하는 반면 결코 자신을 용서하지 않습니다. 이런 사람은 착하다고 하는 말은 듣는데 자신에 대해서는 가혹하게 평가를 내림으로 자신에게 상처를 입히고 있습니다. 낮은 자존감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 중에서 많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얼마나 사랑하셨는지를 알고서 자기도 자기 자신을 사랑하고 용서하여야 합니다. 둘째, 내게 상처를 준 사람들을 용서해야 합니다. 대게는 가까운 사람에게서 상처를 많이 받습니다. 부모나 형제, 그리고 심지어 교회 권위자들로부터 상처를 많이 받습니다. 생각이 나지 않는다면 진심으로 가까운 분들을 한분씩 축복해보십시오. 그러면 어떤 영역에서 마음이 걸리는 부분이 있을 것입니다. 바로 그 영역에서 여러분은 진심으로 용서를 해야 합니다. 셋째, 내가 상처를 준 사람들이 있다면 찾아가서 용서를 구해야 합니다. 내게 상처를 준 사람을 용서하는 것도 쉽지 않지만 내가 찾아가서 용서를 구하는 것은 더욱 더 용기가 필요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기 위해 필요한 것입니다. 마태복음 5:23절을 보세요.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 들을 만한 일이 있는 줄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고 하셨습니다. 내가 용서를 구할 일이 있는 채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은 헛되이 예배하는 것입니다. 넷째, 하나님께 죄를 자백하면서 용서를 구해야 합니다. "만일 우리가 죄 없다 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라고 했습니다. 사람에게 용서를 구할 것과 하나님께 용서를 구할 것은 같을 수도 있고 다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앞서 말한 대로 내가 마음으로 누군가를 미워했다면 주님께 자백함으로 충분한 것입니다. 다섯째, 중보자로 죄를 고백하면서 용서를 구하는 일도 있습니다. 이것은 중보기도의 영역에서 다루었습니다. 다니엘과 느헤미야의 기도를 보면 조상의 죄를 자백하는 것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께서도 자신을 못 박는 자들을 위해 용서를 비는 기도를 드리셨습니다. 돌에 맞아 죽어가는 스데반 역시 돌을 던지는 자들을 위해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는 기도를 드린 것은 중보기도의 차원에서 용서를 실천한 것입니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용서는 어떻게 하는 것일까요? 첫째 마음으로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중심으로 용서하라고 하셨습니다. 마음으로 빚을 탕감해주는 것이 바로 용서인 것입니다. 둘째, 관대한 태도를 보여줌으로 마음의 평안을 갖게 하는 것입니다. 상대방을 용서했다고 하면서 상대방의 마음을 계속 불안하게 한다든지 상대방에게 계속 협박한다든지 함으로 그 마음에 불안과 염려와 두려움을 심어주는 것은 참된 용서가 아닙니다. 참된 용서는 그 마음에 평안을 심어주는 것입니다. 셋째, 축복하는 것입니다. 마태5:43,44절에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내가 다른 사람을 용서했는지 용서하지 않았는지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진심으로 축복해봄으로써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용서한다고 말은 하면서 축복하지 못한다면 중심으로 용서하지 않은 것입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은 축복함으로써 용서를 베푸는 것입니다. 우리가 진정한 그리스도인인지, 정말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인지 아닌지 이것으로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중심으로 용서를 실천하는가?"로 아는 것입니다.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 하느냐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 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마5:46,47)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용서할 줄 아는 것은 내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을 스스로 증명하는 것입니다.
분명 용서는 쉽지 않습니다. 어렵습니다. 그러나 용서가 불가능한 일은 아닙니다. 용서는 하늘로 통하는 사닥다리입니다. 용서는 은혜와 축복과 회복의 통로입니다. 형 에서가 동생 야곱을 용서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웠겠습니까? 요셉이 형들을 용서하기가 결코 쉽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야곱이 형의 얼굴을 보기 전에 먼저 하나님의 얼굴을 대면한 것은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교훈을 줍니다. 용서를 구하고 용서를 받아들이고 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용서를 실천할 수 있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십자가야말로 용서의 능력이 흘러나오는 원천입니다. 예수님께서 나의 죄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것을 기억해보십시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시면서 제자들을 용서하시고 자신을 못 박는 자들을 용서하시고 자신을 향해 손가락질 하는 사람들을 용서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받으신 고난을 우리가 잠시라도 생각해본다면 우리가 결코 용서하지 못할 사람은 세상에 아주 없게 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그것은 우리가 용서의 능력을 갖게 해주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한국교회가 자랑하는 손양원 목사님의 삶을 아십니까? 자기 두 아들 동인, 동신이를 죽인 공산주의자를 자기의 양아들로 삼고 그를 기어이 복음전도자로 길러낸 삶을 아십니까? 그분은 하나님의 용서를 체험한 사람이 틀림없습니다. 그것은 용서를 실천한 삶을 통해서 증명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용서를 실천하지 못한다면 우리가 정말 하나님의 자녀인지 의심해보아야 합니다. 용서하십시오. 용서는 중요합니다. 내가 자유를 누리며 살기 위해서 꼭 필요한 순종입니다. 용서할 힘이 없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주님은 언제든지 용서할 힘을 주시려고 기다리고 계십니다. 혹시 아직도 우리 마음을 힘들게 하는 사람이 있다면, 여전히 미워할 수밖에 없는 얼굴이 생각난다면 그러한 감정을 가지고 갈보리 언덕 위로 오르십시오. 그리스도의 십자가 그늘 아래 다 내려놓으십시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용서하고 축복할 능력을 넉넉히 주실 것입니다. 내 힘으로 할 수 없다면 십자가의 주님께서 나에게 힘을 더해주시도록 간구합시다. 주님께서 구하는 모든 자에게 능력을 주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