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회복학교

회복(35)-치유

등불지기 2012. 3. 10. 21:30

 

 

치유 메시지를 전하는 분들 중에 '손님대접'에 대해 이야기하는 분을 찾아보기란 정말 하늘에 별따기입니다.

사실은 치유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적용이 '손님대접하기'입니다.

이것은 저의 독창적인 메시지가 결코 아닙니다.

성경을 보세요..

아브라함은 손님을 잘 대접함으로써 닫힌 태의 문을 열 수 있었지 않습니까?

치유받기를 원한다면, 병에서 놓여 건강하기를 원한다면, 손님을 잘 대접하십시오..

이것은 치유를 경험하기 위한 매우 실제적인 적용입니다.

이것이 오늘 제가 강조하고자 하는 메시지입니다.

손님대접과 치유는 아주 중요한 관계랍니다.

실제로 '손님대접을 잘 한다'는 말을 영어로 hospitality라고 하는데

병자를 치유하는 병원hospital과 같은 의미의 단어이지요.

손님대접하기는 나름 치유의 은사가 있다고 하는 분들이 잘 전하지 않는 주제이기도 합니다.

치유사역자들이 놓치기 쉬운 이 주제에 대해서 한번 공부해볼까요?

김광락 선교사 올림.

 

손님 대접하기

 

본문: 히13:1-3

 

계속해서 치유에 관해 말씀을 드리고 있습니다. 실제적으로 치유하는 일은 성령께서 행하시지만 저는 여러분들이 좀 더 쉽게 치유의 은혜를 받을 수 있도록 말씀으로 준비시키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치유에 대해 이야기를 하는데 오늘 저의 설교 제목이 좀 생뚱맞지 않나? 라고 어떤 분들이 혹시 생각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손님대접하는 것은 교회가 세상을 치유하기 위해 반드시 알아야 하고 또 순종해야 할 영역입니다. 손님을 잘 대접하라는 것은 성경에서 가르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것입니다. 손님을 대접하는 말에 쓰이는 단어는 hospitable인데 이 말은 '대접이 좋은' '손님접대를 잘 하는' '친절한' '공손한' '극진한' '흔쾌히 받아들이는'이란 사전적인 뜻이 있습니다. 우리가 극진한 대접을 받았다는 말을 영어로 표현하면 We received a hospitable reception.라고 합니다. 이 단어와 가장 가까운 단어가 병원이란 뜻의 hospital이란 단어입니다. 병원은 어떤 곳입니까? 환자들을 치유하는 곳이지요?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들이 손님을 잘 대접하는 정신으로 살아가는 것은 곧 상처가 많은 세상을 치유하는 자로서 살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왜냐면 손님에게는 언제나 두려움과 긴장감이 그 마음을 누르고 있는데 손님을 잘 대접하는 행위는 그 손님의 마음에 있는 두려움을 해소시켜주고 긴장을 풀어주는 치유의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손님대접은 치유행위입니다. 교회는 세상을 치유하는 곳입니다. 즉, 교회는 손님대접하기를 잘 해야 합니다.

옛날 우리나라 선조들이 살았던 집을 방문해보면 손님을 맞이하는 방이 따로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서양에서도 손님을 맞이하는 '응접실'을 갖춘 집들이 많습니다. 응접실은 어떻게 꾸밉니까? 분위기 아늑한 방에 깨끗한 식탁보를 두른 테이블이 있습니다. 테이블 위에는 꽃병과 꽃이 있고 그 옆에는 초가 놓여져 있습니다. 그리고 아늑한 의자에서 향기 그윽한 차를 마실 수 있는 그런 장소가 바로 응접실입니다. 낯선 손님을 밝고 환한 미소로 이런 장소로 안내할 때 사람들의 마음은 따뜻해지게 되고 다시 들르고 싶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환영받는다는 느낌 속에서 사람들의 마음을 만지고 부드럽게 하며 엉키고 꼬인 마음은 풀어지는 것입니다. 이러한 응접실이 있는 집에서 산다는 것은 얼마나 멋진 일입니까? 저는 그러한 응접실을 갖추고 사는 것을 꿈꾸지만 아직 그런 방은 없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정신이요 마음인 것입니다. 우리가 손님을 잘 대접하겠다는 마음으로 사는 것이 중요합니다. 손님을 편안하게 해주고 즐겁게 해주는 것을 즐거움으로 삼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사는 사람에게는 더더욱 중요합니다.

지난주에는 참 비가 많이 내렸습니다.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는 어느 날 저는 두 분의 젊은 간사들과 함께 대구의 서구지역을 돌면서 교회를 찾아다니면서 무슬림을 위한 기도 포스터를 나눠주고 붙이고 하는 일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날씨는 덥고 비는 내리고 짜증나는 일이었습니다. 십자가가 보이는 건물을 찾아다니면서 포스터를 나눠줄 때 사무실의 반응은 각양각색이었습니다. 어떤 교회는 그냥 놓고 가라고 하고, 또 어떤 교회는 냉담하게 거절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그 많은 교회에서 어떤 교회에 들렀는데 저는 차안에서 머물고 있었는데 포스터를 들고 간 두 분의 자매 간사들이 손에 캔 음료를 들고 오는 것입니다. 기분이 쾌활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별거 아닌 캔 하나에 정서가 확 풀립니다." 저는 그 말을 듣고 깊이 묵상하게 되었습니다. 손님을 대접하는 것이 얼마나 사람의 마음을 풀어주고 치유하며 자유케 하는 힘이 있는가!

제가 서울에서 사역하고 있을 때 일 년에 한 번씩은 다른 교회를 탐방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성장하는 교회와 성장하지 못하는 교회의 차이가 무엇인지 확연하게 알 수 있었습니다. 성장하는 교회는 분위기가 좋은 교회였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손님들을 맞이하는 데 프로정신이 있었습니다. 어떤 교회를 갔는데 그 교회는 출석교회가 수 만 명이나 모이는 대형교회였습니다. 그런데 담임목사님이 직접 나와서 친절하게 교회를 안내하며 사역에 대해 자세하게 브리핑을 하고 자료도 챙겨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교회가 성장하는 것이 결코 우연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제가 대구에 내려온 지 2년이 되어 가는데 대구지역의 교회들은 전반적으로 침체되어 있습니다. 복음화율도 전국에서 최저수준입니다. 그런데 교회의 분위기는 손님을 환대하는 정신과 일치하더라는 것입니다. 손님이 교회에 찾아와도 교역자들이나 사무직원들이나 장로들이나 성도들은 딱딱한 태도, 무관심한 태도로 대하는 것입니다. 나도 혼자서 적응했으니 당신도 알아서 적응하라는 식으로 대하는 것입니다. 손님을 환대하는 정신이 있느냐 없느냐, 어느 정도냐를 가지고 그 교회의 분위기를 진단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교회가 계속 성장할 것인가를 짐작해볼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낯선 사람들에 대해 어떤 태도로 대합니까?

저는 우리 청년부의 영적인 현주소를 이 말씀으로 진단해볼 수 있다고 믿습니다. 우리는 손님을 환대하는 즐거움을 알고 있습니까?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인가 돌아보아야 합니다. 낯선 사람들에 대한 무관심은 대구와 같이 영적으로 침체된 도시일수록 심합니다. 대구의 교회들은 특히 이 말씀을 깊이 새기고 순종하는 일이 필요한 것입니다. 도시의 전반적인 분위기에 휩쓸려 가면 안 되는 것입니다. 교회는 세상을 지배하는 정신과 반대되는 정신으로 행동해야 합니다. 대구의 교회들이 추구하고 회복해야 할 은사가 있다면 바로 손님을 잘 대접하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현 세대의 주된 흐름이라는 것을 지적해야 합니다. 최근 복음과 상황이란 기독 잡지에서 오늘날 캠퍼스의 현실에 대해 다음과 같이 진단을 내렸습니다. 오늘날 대학가는 개인주의와 이기주의가 지배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90년대 중, 하반기부터 실시된 학부제와 광역화 제도 때문에 과 중심의 공동체성이나 선후배 간의 유대의식 등이 사라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도 이러한 이기주의와 개인주의가 들어와 있는 것입니다. 또 각박해지는 경쟁사회, 학교 측에서 부단히 경쟁을 부추기고, 과도한 레포트 등으로 캠퍼스의 낭만은 사라지고 학생들은 저마다 실리 찾기에 급급하게 되었습니다. 또 다원주의와 상대주의도 캠퍼스 안에 들어와 있습니다. 그리고 젊은이들의 영혼은 갈수록 공허함과 고독감으로 일그러지고 있습니다. 청년들은 공동체에 대한 갈망, 친밀감에 대한 갈망은 있지만 독점적인 관계나 혹은 온라인에서만 그러한 친밀감에 대한 갈망을 해소하고 있을 뿐입니다. 이 세대의 정신이 이러하기 때문에 오늘날 우리 청년부 안에 손님을 대접하기를 즐거워하라는 주님의 명령은 가장 실천하기 어려운 것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주님이 가르치신 이 중대한 삶의 원리를 다시금 가슴 깊이 마음에 새겨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가 세상을 치유하는 하나님의 손으로써 쓰임받기를 원한다면 진정 오늘 말씀에 기록된 명령에 순종하는 법을 배워야만 합니다. 오늘 본문을 다시 보실까요? "형제 사랑하기를 계속하고 손님 대접하기를 잊지 말라. 이로써 부지중에 천사들을 대접한 이들이 있었느니라. 자기도 함께 갇힌 것같이 갇힌 자를 생각하고 자기도 몸을 가졌은즉 학대받는 자를 생각하라." 우리가 손님을 잘 대접하는 공동체, 손님을 환대하는 정신을 가지고 실천하는 공동체 그리고 개인이 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형제 사랑하는 일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가족이 서로 사랑하지 못한다면 그 가정에 다른 손님을 초청하고 대접하는 일이 어려울 것입니다. 교회도 그렇지요? 성도들끼리 서로 사랑하지 못하고 미워하고 판단하는데 불신자 초청 전도집회를 계획하고 기도하고 많은 예산을 들이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저는 우리가 손님을 잘 대접하는 삶을 살기 전에 먼저 가까운 사람부터 사랑하는 삶이 전제되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그것이 오늘 본문 말씀이 말하는 바입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공동체라면 손님을 대접하는 것은 즐거워질 수 있을 것입니다. 저는 저의 가족이 서로 사랑한다고 믿습니다. 그래서 저의 집으로 어떤 손님이 찾아와도 즐겁습니다. 손님이 찾아올 때는 폐를 끼치는 것이 아닌가라고 생각하지만 손님과 함께 식사를 나누고 함께 차를 마시고 과일이나 과자를 함께 나누는 것이 얼마나 즐거운지를 잘 압니다. 저와 저의 아이들도 그렇게 느낀다고 믿습니다. 손님이 오는 것이 즐겁습니다. 물론 형식적인 방문이 아니고 개인적인 방문이라면 더 그렇습니다. 왜냐면 손님들이 왔다가 가면 우리 집에 먹을 것과 마실 것이 풍성해지는 것을 아이들이 잘 알거든요. 재정에 잔고가 없더라도 손님을 잘 맞이할 결심을 하고 준비를 하면 어느새 풍성하게 채워주시는 주님의 은혜를 맛보기도 합니다. 그리고 손님을 맞이할 준비를 할 때면 이제 몇 주는 손가락만 빨고 지낼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손님이 왔다가 가면 이상하게도 몇 주 저의 가족들이 더 풍성하게 지내게 됩니다. 이러한 경험을 통해서 저는 손님을 잘 대접하는 것을 주님께서 기뻐하신다고 믿게 되었습니다. 풍성한 삶을 살기 원하십니까? 먼저 사랑함으로써 손님을 잘 대접할 준비를 하십시오.

둘째로, 주님은 오늘 본문에서 우리에게 손님대접을 잊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나그네를 대접하는 일은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보여준 정신입니다. 창세기 18장을 보면 주님께서 두 천사와 함께 소돔성을 향하고 계셨습니다. 소돔으로 가는 길에 아브라함의 장막에 잠시 들르셨습니다. 이때 시간은 점심을 먹고 그늘에 누워 쉬는 시간입니다. 아마도 아브라함은 낮잠을 자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쉬는 시간에 낯선 사람을 맞이하는 것은 귀찮은 일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어떻게 행동합니까? 아브라함은 낯선 사람들을 보았습니다. 그들이 하나님 자신과 천사들이라고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이렇게 행동합니다. "눈을 들어 본즉 사람 셋이 맞은편에 섰는지라. 그가 그들을 보자 곧 장막문에서 달려 나가 영접하며 몸을 땅에 굽혀 가로되 내 주여 내가 주게 은혜를 입었사오면 원컨대 종을 떠나 지나가지 마옵시고 물을 조금 가져오게 하사 당신들의 발을 씻으시고 나무 아래서 쉬소서. 내가 떡을 조금 가져오리니 당신들의 마음을 쾌활케 하신 후에 지나가소서. 당신들이 종에게 오셨음이니이다. 그들이 가로되 네 말대로 그리하라. 아브라함이 급히 장막에 들어가 사라에게 이르러 이르되 속히 고운 가루 세 스아를 가져다가 반죽하여 떡을 만들라 하고 아브라함이 또 짐승 떼에 달려가서 기름지고 좋은 송아지를 취하여 하인에게 주니 그가 급히 요리한지라. 아브라함이 뻐터와 우유와 하인이 요리한 송아지를 가져다가 그들의 앞에 진설하고 나무 아래 모셔 서매 그들이 먹으니라."(창18;2-8) 여러분 아브라함이 보여준 행동과 태도를 보십시오. 그가 천사인줄로 알고 행동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나그네인줄로 알고 행동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가 보여준 행동은 하나님을 대하듯이 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사실 하나님이셨고 천사들이었습니다. 이 사건을 두고 오늘 히브리서 본문은 '부지중에 천사를 영접했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만일 우리 가운데 주님이 오신다면 우리는 어떻게 반응하겠습니까? 예, 그렇게 낯선 나그네를 대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대하듯이 손님을 대하는 것, 이것이 그리스도인이 가져야 할 환대의 정신(spirit of hospitality)인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러한 환대의 정신이 있는지 자신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낯선 사람들이 나를 통해 마음이 쾌활해지고, 편안해지고, 기쁨과 희망을 얻게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 환대의 정신이 얼마나 중요한지 우리가 성경을 읽어보면 알 수 있습니다. 구약에서 하나님의 불로 멸망을 당한 소돔과 고모라는 어떠했습니까? 낯선 사람들을 환대한 것이 아니라 공격하려고 했습니다. 사회가 점점 이기적으로 되어갈수록 교회는 더욱 더 환대의 정신을 계발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 부름 받은 교회가 나아갈 길입니다. 그러나 교회가 소돔과 고모라처럼 낯선 사람에게 냉담하게 반응하기 시작하면 지상교회는 망하는 것입니다. 환대의 정신을 잊어버리는 것은 교회가 세상에서 존재할 이유를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요즘 대학 캠퍼스를 지배하는 정신이 이기적이고 개인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정신이라면 오늘을 살아가는 젊은 청년 그리스도인들은 그 반대정신인 환대하는 삶, 손님 대접하는 것을 즐거워하는 삶을 더욱 추구해야 합니다. 손님을 대접하기를 잘 하는 것은 교회의 지도자, 영적 지도자일수록 필수과목이라고 성경은 가르칩니다. 디도서 1장 8절에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직 나그네를 대접하며 선을 좋아하며 근신하며 의로우며 거룩하며 절제하며" 감독의 중요한 자질 중에 하나가 바로 나그네를 대접하며 선을 좋아하는 것입니다. 나그네를 대접하는 것은 형제사랑하는 것을 실천하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그 안에 사랑이 있기 때문에 순종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사랑이 없는데 어떻게 나그네를 편안하게 환대할 수 있겠습니까?

이 환대의 정신이 얼마나 중요한지는 마태복음 25장을 읽어보면 알 수 있습니다.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분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분별하는 것같이 하여 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마25:31-33) 여기서 양과 염소를 구분하는 기준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환대의 정신을 가지고 살았느냐? 인 것입니다. 주님은 의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하라.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아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마25:34-36) 의인들은 자신들이 그런 일을 한 줄을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왜냐면 그것은 그들의 삶이었기 때문입니다. 나그네를 대접하는 일이 그들에게는 자연스러운 일이었고 즐거운 일이었다는 것입니다. 반면 영벌에 떨어질 악인들은 이렇게 반문하지요. "우리가 주님이라면 당연히 잘 대접하였을 것입니다." 그들은 나그네를 대접하는 것이 삶으로 연결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마25:45) 이처럼 손님 대접하는 것은 우리의 구원과도 직결된 문제이기 때문에 중요한 것입니다. 주님은 손님 대접하는 것을 중요하게 보시는 분이십니다.

복음서를 읽어볼 때 우리 주님께서 보여주신 삶도 역시 이 환대의 정신으로 가득 찼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주변에는 언제나 손님들로 북적거렸습니다. 예수님께서 손님을 대접하는 삶을 살지 않으셨다면 예수님 곁에 세리들과 죄인들과 그 당시 사회적으로 소외계층이라 할 수 있는 어린아이들과 여인들이 예수님을 따르지 않았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이 겸손하고 온유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예수님 곁에서 언제나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을 편안하게 해주는 놀라운 기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보여줍니다. 나그네를 영접하고 대접하고 편안하게 해주는 것은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예수님의 손님대접이 가장 잘 나타나는 장면은 부활하신 후에 갈릴리 호숫가에서 제자들을 만나주실 때였습니다. 갈릴리 해변가에서 만나자고 하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바다에 나가 고기를 잡는 동안 해변가에서 숯불을 피우고 고기를 굽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에서 갈릴리로 이어진 먼 길을 오느라 피곤하고 지친 제자들을 이런 방법으로 환대하셨습니다. 예수님에게서는 결코 군림하려는 모습을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몸소 손님을 환대하는 삶을 사셨고 또 제자들에게 본을 보여주셨습니다. 제가 몇 년 전에 청년들과 함께 중국에 정탐여행을 간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보고 놀란 것은 많은 성도들을 섬기는 교단장이 직접 차를 따라주고 음식을 수발드는 모습을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장족이 사는 티벳에도, 위구르족이 사는 신장지역에도 중국의 가정교회 지도자들은 우리를 얼마나 극진히 대접하여주었는지 몸 둘 바를 몰라 할 정도였습니다. 중동지방에 전도여행을 갔을 때도 예수 그리스도를 모르는 무슬림조차도 나그네를 대접하는 것을 잘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물론 소수의 극단주의자들이 있지만 대부분 무슬림들은 손님대접하기를 잘 합니다. 오늘 우리 조국교회는 어떻습니까? 손님에 대한 환대와 배려는 어느 정도일까요? 앞에서도 말했듯이 교회의 분위기는 그 교회의 손님대접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서울에 비해서 대구지역이 손님에 대해서 좀 더 차갑고 무관심한 것 같습니다. 성장하는 교회가 정체된 교회에 비해서 훨씬 더 손님 대접에 대해 적극적이고 열정적입니다. 이것은 개인과 가정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됩니다. 행복한 가정이 좀 더 손님 대접에 적극적입니다. 행복한 개인, 형제사랑을 실천하는 개인이 손님을 환대하는 일에 좀더 열정적입니다. 행복을 느끼지 못하거나 사랑이 없는 개인과 가정일수록 손님을 환대하는 일을 어려워합니다. 자,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여러분의 가정, 여러분의 공동체는요?

제가 속하고 섬기고 있는 예수전도단의 기본정신 제 17 조항을 보면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우리는 손님 대접하기를 힘쓴다. YWAM은 손님대접의 사역이 하나님의 성품을 드러내고 사람들을 존중하는 일임을 확신한다. 우리는 의례적인 행위로서가 아니라 친절과 관대함의 표현으로써 서로에게 그리고 손님과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에게 우리의 마음을 열고 가정과 캠퍼스와 지부를 제공하는 것을 중요하게 여긴다." 저는 YWAM에 들어와서 이 손님 대접의 정신을 새롭게 배우게 된 것을 가장 큰 축복 중에 하나라고 생각하고 주님께 감사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돈을 주고 배울 수 없는 교훈입니다. 예수전도단은 팀사역을 하는데 여러 가지 jop을 나누어서 맡습니다. 그 중에 가장 중요한 jop이 바로 '하스피'란 직임입니다. 이것은 손님대접의 은사를 행하는 직분입니다. DTS 학교를 하게 되면 강사 하스피, 간사 하스피, 학생 하스피, 등 하스피 직분도 여러 개가 있지요. 이러한 직분을 잘 감당하게 됨으로써 YWAM에 훈련받으러 온 학생들이 쉽게 하나님의 친밀감 안으로 들어가게 되고, 상한 마음이 치유되, 하나님의 목적대로 회복하는 일들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지부에서도 hospi가 있어서 손님이 지부사무실로 찾아오면 즉시 차를 가져옵니다. 처음 지부사무실을 찾아갔을 때 저는 hospi를 통해서 쉽게 마음을 열고 적응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도 대구지역의 정서에는 하스피 정신이 많이 결여되어 있는 것을 느낍니다. 그것은 외부인의 왕래가 많지 않은 대구지역만의 특성과 보수적인 정서에서 비롯되는 것이겠지요. 그래도 교회는 그런 지역의 정신을 따라가면 안된다고 봅니다. 왜냐면 교회는 지역을 섬기면서도 동시에 모든 나라와 민족을 다스리시는 우주적인 하나님을 섬기고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우리 교회에 외부 손님이 찾아오거나 할 때 멀뚱멀뚱 쳐다보기만 한다든지 나도 여기 와서 혼자 힘으로 적응했으니 당신도 그래야 한다는 식의 고약한 시어머니 심보로 바라본다든지 하는 것은 결코 주님이 바라시는 그리스도인의 모습이 아닙니다. 얼마 전 포스터를 붙이기 위해 교회에 잠시 들른 젊은이들이 있었습니다. 음료수를 대접하고 친절하게 안내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기본기요 교인으로서의 당연한 의무입니다. 이러한 손님대접 정신은 특정한 교인들에게만 있어서는 안 됩니다. 나그네를 잘 대접하여서 그 마음의 두려움과 긴장과 피곤함을 풀어주는 것은 교회의 분위기 자체가 되어야 합니다. 특히 교역자들과 장로님들과 같은 중직자들은 손님 대접하는 데 있어서 본을 보여야 합니다. 교회의 중직자들이 손님을 그냥 쳐다보고만 있다면 이것은 회개해야 할 문제입니다. 교회는 무엇보다 하스피 정신이 있어야 합니다. 잠시 머물다가 가는 형제자매들을 우리는 어떤 심정으로 맞이합니까? 양복을 입지 않고서 다른 교회에 가보면 그 교회의 하스피 정신이 어느 정도인지 알아볼 수 있습니다. 어떤 교회는 마치 주식회사 건물에 들어가는 것처럼 차갑게 느껴지기도 하고, 어떤 교회는 마치 내 집에 들어가는 것처럼 따뜻하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만약 우리 청년부에 이러한 하스피 정신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손님을 대접하는 것을 즐거워하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요? 우리가 서로 사랑하지 못하는데 어떻게 손님을 편안하게 대접할 수 있겠습니까? 저는 우리 주님께서 지금 우리에게 꼭 필요한 것을 말씀하신다고 믿습니다. 이기적이고 개인주의 그리고 실리주의가 만연해가는 이 세상에서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 지금 저와 여러분에게 말씀해주신다고 믿습니다. 손님을 환대하는 정신이 살지 못하면 예배의 회복과 갱신은 요원한 것입니다. 예배를 회복하기 원한다면 먼저 손님을 환대하는 정신부터 회복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교회만 아니라 나의 삶 속에 이런 저런 복을 주시기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내 마음부터 넓혀야 합니다. 손님과 나그네에 대해 내가 어떤 태도를 가지고 살았는지 점검해보아야 합니다. 하스피 정신을 회복하지 못하면 삶의 진정한 축복 또한 원하는 수준에만 머물게 될 것입니다. 이처럼 하스피 정신은 중요합니다. 우리의 구원에까지 영향을 줄 정도로 중요합니다.

건강한 교회, 성장하는 교회, 주님이 원하시는 교회를 위해서 여러 가지 은사들이 계발되어야 합니다. 방언의 은사에만 집중하지 마십시오. 은사의 종류가 다양합니다. 은사에 따라 섬김의 직분이 주어지는데 얼마나 다양한지 모릅니다. 목자, 교사, 개척자, 지혜, 지식, 권위, 분별, 구제, 섬김, 긍휼, 선교, 전도자, 믿음, 지도자, 다스림, 신유, 방언, 통변, 믿음, 축사, 중보, 그리고 손님대접의 은사(hospitality) 등이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은사에 대해 잘못 생각합니다. 은사가 없기 때문에 특정 사역에 헌신하지 않는 것이나, 방언과 같은 특정 은사에 집중함으로써 오늘 이야기하고 있는 손님 대접하는 것에는 소홀히 하는 것입니다. 오늘 손님을 환대하는 것이 곧 치유하는 통로가 된다는 것을 반드시 마음에 새겨둡시다. 우리가 손님을 환대하는 삶을 사는 것은 그리스도의 몸으로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남에게 대접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라고 가르치셨습니다. 대접하는 것은 율법의 기본정신으로서 주님이 가르치신 사랑의 계명에 포함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손님을 대접하는 일을 즐겼다는 것을 기억합시다. 그리고 바로 그것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사랑하시고 복을 주신 계기가 된 것을 또한 기억합시다. 하나님은 손님을 잘 대접한 아브라함에게 당신을 드러내시고, 아브라함에게 그토록 고대하던 아들을 약속하셨습니다. 손님대접은 축복의 통로임을 기억합시다. 교회가 손님을 잘 환대하면 절로 부흥하고 성장합니다. 가정이 손님을 잘 대접하면 저절로 흥왕합니다. 개인이 손님을 잘 대하면 저절로 사람들이 그에게 모이고 따르게 됩니다. 성경은 서로 포옹하고 입맞춤으로 문안하라고 했는데(롬16:16) 오늘 우리는 우리 공동체를 처음 찾아오는 낯선 사람들에게 마음의 평안과 기쁨을 주는 공동체인가요? 나그네의 마음을 기쁘게 하고 편안하게 하고 묶인 정서를 풀어주는 치유하는 공동체입니까? 낯선 사람들이 우리 안에서 불편해하고 어려워한다면 우리 모두 주님 앞에서 회개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환대하는 공동체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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