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회복학교

회복(36)-영적질서

등불지기 2012. 3. 10. 21:37

 

치유는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고 강조했습니다.

치유는 회복으로 가는 관문이라고 했습니다.

치유 자체를 목적으로 간주하는 사역이나 교회는 건강하다고 볼 수 없습니다.

치유 자체를 목표로 하는 사역자나 교회는 길을 잃기 쉽습니다.

그리고 치유 자체를 강조할 경우 여러 가지 무질서를 낳을 위험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영적 질서, 영적 권위 등에 대해 이해할 단계입니다.

축복합니다.

김광락 선교사 올림.

 

영 적 질 서

 

본문: 고전14:33-40

 

지난 시간까지 저는 하나님의 치유하시는 은혜에 관해 말씀을 드렸습니다. 이제부터는 치유 받은 자로서 어떻게 하면 세상을 다스리는 자로서 회복되어나갈 것인가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저의 관심은 여러분이 치유되는 것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다스리는 자로 회복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영적 지도력에 관한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에 영향을 끼치는 자로서 살아가는 것을 우리 주님께서 간절히 바라고 계십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가 먼저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오늘은 그 첫 번째로 영적 질서에 관한 것입니다. 영적 질서를 이해하지 못하고서 결코 주님께 쓰임받는 삶을 살 수 없습니다. 이 문제에 대해 얼마나 중요한지 여러분이 새롭게 깨닫게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어느 나라를 가건 그 나라의 교통질서를 보면 그 나라의 문화의식이나 시민의식의 성숙도를 가늠해볼 수 있습니다. 보이는 공공질서도 지키지 못하면서 보이지 않는 내면의 질서를 지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예를 들어서, 영국의 교통문화는 정말 본받을만 합니다. 우리나라처럼 신호등이 있는 교차로는 그렇게 많지 않다고 합니다. 대부분은 신호등이 필요 없는 로터리라고 합니다. 운전하는 사람들은 교통경찰이 서 있지 않아도 누구의 차가 우선권이 있는지 잘 알고 또 존중합니다. 이것은 매우 높은 수준의 질서의식이 없이는 어려운 일입니다. 반면 인도의 교통문화를 보면 얼마나 답답한지 모릅니다. 제가 인도의 캘커타에 가보았을 때 거리마다 경적소리로 가득 차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얼마나 끼어들기가 심한지 모릅니다. 그러면 우리나라의 교통문화는 어떨까요? 한국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질서의식의 수준은 어느 정도일까요? 그것은 여러분이 판단해보기 바랍니다.

세상 나라에서도 나름대로의 질서가 있듯이 하나님 나라에서도 마찬가지로 질서가 존재합니다. 질서는 그 교회나 각각의 그리스도인들이 가지고 있는 영적 수준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이것은 보이지 않는 질서입니다. 그래서 영적 질서라고 합니다. 영적 질서를 아는 것은 영적 성장의 척도입니다. 성숙한 사람은 질서를 잘 지키는 사람입니다. 질서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에서 시작되는 성품 중에 하나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라고 말하고 있습니까? 예, 그렇습니다.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은 질서의 하나님이십니다. 질서라고 하면 어떤 느낌이 듭니까? 딱딱하고 통제하고 답답하고 자유롭지 못한 느낌이 듭니까? 아니면 평온하고 안정감이 있는 느낌이 듭니까? 하나님께서 질서를 존중하신다는 사실을 믿습니까? 그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하나님께서 질서의 하나님이란 사실은 오늘 우리에게 매우 감사한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질서를 무시하시는 분이라면 우리는 불안에 떨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질서를 존중하시는 것은 우리가 평안하고 안정감 있는 삶을 살도록 하기 위함인 것입니다. 세상에는 나름대로의 질서를 가지고 있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장유유서의 질서가 있지요. 즉, 혈통에 의한 질서인 것입니다. 우리는 그러한 질서를 매우 존중해야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질서, 영적인 질서라고 할 때 그것은 반드시 세상이 말하는 그런 질서와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질서, 영적 질서를 알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더욱 많이 알아야 합니다. 만약 이러한 영적 질서를 알지 못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우리가 가진 어떤 열정이나 은사들이 매우 위험한 '흉기'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열정이나 은사들은 질서 안에 있을 때 아름답게 빛나는 것입니다. 질서를 무시한 은사나 열정은 아름답기는커녕 추한 것입니다.

여러분, 보세요. 태초에 하나님께서 천지만물을 창조하실 때를 기억해보세요.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실 때 질서 있게 창조하신 것을 알고 있습니까? 창세기 1장을 보세요. 하나님께서 첫째 날 빛을 창조하신 것은 넷째 날을 위한 것입니다. 그리고 둘째 날 물과 궁창을 만드신 것은 다섯째 날 새와 물고기를 만들기 위한 것입니다. 셋째 날에 땅과 초목을 만드신 것은 여섯 째날 동물들과 사람을 위한 것입니다. 창세기 1장은 하나님께서 얼마나 놀랍도록 질서 있게 천지를 만드셨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해와 달과 별을 만드시고 밤과 낮을 다스리도록 하셨습니다. 그리고 사람을 만드시고 땅과 모든 만물들을 다스리도록 하셨습니다. 이 얼마나 질서정연합니까? 하나님은 질서를 따라 온 세상을 다스리시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갈 때 하나님의 질서를 이해하지 못하면 스스로 고난과 어려움을 자초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질서를 따라 세상을 살아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알아야 할 영적 질서는 어떤 것일까요? 질서라고 할 때 그것은 '순서'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질서를 지킨다고 할 때 그것은 사실 순서를 지키는 것을 뜻합니다. 몇 가지 영역에서 이 보이지 않는 순서에 대해서 우리가 대략 살펴보기 원합니다. 첫째, 관계의 영역에서 영적인 질서가 있습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으면서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여러 관계 속에서도 질서가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러한 순서를 존중하십니다. 우리가 관계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면 관계에서 통하는 영적 질서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인가 가르치실 것이 있다는 뜻입니다. 관계에 있어 영적인 질서를 잘 보여주는 몇 가지 본문만 봅시다. 첫째, 열왕기하 4장을 보면 수넴의 한 여인이 선지자 엘리사를 극진히 대접하게 되자 하나님은 엘리사를 통해 수넴 여인에게 아들을 낳게 하셨습니다. 나이가 많은 여인이었지만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로 아들을 잉태할 힘을 얻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추수하는 날 아들이 갑자기 머리가 아프다고 하면서 쓰러지고 맙니다. 결국 엄마 품에 안긴 채 죽게 됩니다. 그때 수넴 여인의 마음이 얼마나 아팠겠습니까? 수넴 여인이 죽은 아들을 방에 누인 후에 곧바로 엘리사 선지자에게로 달려갑니다. 엘리사 선지자를 보자마다 여인은 선지자의 발을 가슴에 끌어안습니다. 사환이었던 게하시가 여인을 물리치려고 했을 때 엘리사는 게하시를 말리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가만 두라. 그 중심에 괴로움이 있다마는 여호와께서 내게 숨기시고 이르지 아니하셨도다."(왕하4:27) 하나님께서 엘리사에게 충분히 말씀하실 수 있으셨지만 하나님은 순서를 지키셨습니다. 수넴 여인이 직접 엘리사에게 그 마음의 문제를 고백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기다리신 것입니다. 수넴 여인과 엘리사의 관계에서도 이렇듯 질서는 있었던 것입니다.

또 누가복음 16장 19절 이하에서 우리는 부자와 거지 나사로에 대해서 주님이 말씀하시는 것을 보게 됩니다. 죽어서 고통 받는 곳에 들어간 부자는 눈을 들어 아브라함에게 이렇게 탄원합니다. "천사를 보내어 아직 죽지 않은 내 형제들에게 보내어 경고해주십시오. 그래서 내 형제들이 이 고통 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하십시오." 그러나 아브라함이 어떻게 대답합니까? 선지자와 율법이 있으니 그들에게 들을 것이다." 무슨 말입니까? 우리 생각으로는 천사들이 나타나서 경고해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그것은 순서가 아닌 것입니다. 왜냐면 하나님께서 복음을 전하기 위해 세우신 사람들을 존중하시기 때문입니다. 오래 전에 제가 결혼문제 때문에 이렇게 기도한 적이 있습니다. "주님, 이 자매가 하나님께서 예비해놓으신 사람이 맞습니까?" 그런데 주님은 제가 아무리 기도해도 아무런 말씀도 없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실 수 없어서 말씀하지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제가 몰랐던 것입니다. 관계에서도 영적인 질서가 있다는 것을 몰랐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아갈수록 영적 질서에 대해서 점점 알아가는 것입니다.

얼마 전 어떤 형제가 어떤 자매에게 이렇게 말한 것을 들었습니다. "내가 기도하니까 하나님께서 당신과 결혼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씀하셨어." 그런데 자매는 전혀 그 형제와 결혼할 마음이 없는 것입니다. 무엇이 문제입니까? 그 형제는 영적 질서를 전혀 이해하지 못한 것입니다. 그가 들었다고 하는 하나님의 음성은 하나님의 음성이 아닌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은 그 자매의 결정과 감정과 선택을 존중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자매가 말하기 전에는 하나님은 결코 말씀하지 않으시는 분입니다. 영적 질서를 알면 충분히 분별할 수 있는 문제인 것입니다. 그런데 영적 질서를 알지 못하면 어떻게 됩니까? 나름대로 기도 좀 한다고 하는 사람들, 은사가 있고 체험도 있고 음성도 듣는다고 하는 사람들이 영적 질서를 알지 못할 때 공동체에서 심각한 문제를 일으키는 것입니다. 질서 안에 있지 않는 은사와 열정은 위험한 것입니다. 저의 고 3 적 친구가 있습니다. 그 친구가 제게 한 말입니다. 기도한다고 하는 분들이 자기에게 와서 "지금 직장을 그만두고 하루빨리 신학교에 들어가서 목사가 되어야 한다"고,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을 하는 것을 들었다고 하는 겁니다. 그것도 세 번 씩이나 그렇게 들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자신은 돈을 많이 벌고 싶고, 목사가 되는 것은 정말이지 싫다는 것입니다. 제가 그 친구에게 뭐라고 얘기했을까요? 이렇게 말해주었습니다. "나는 네가 신학교에 가서 목사되는 것을 쌍수 들고 반대한다."라고 말입니다. 그 친구가 문제가 아닙니다. 그 친구에게 하나님의 뜻이라고, 혹은 예언이라고 말해준 사람들이 영적 질서를 이해하지 못한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영적 질서를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잘못된 말에 속아 넘어가는 것입니다.

둘째는 선교현장에서의 영적 질서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현장에서도 영적 질서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한 영적 질서를 알지 못하면 열정이 매우 위험한 흉기가 될 수 있습니다. 중세시대에 십자군 전쟁이 바로 그러했습니다. 영적 질서를 전혀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십자군 전쟁은 얼마나 무슬림을 향한 교회의 선교를 어렵게 만들었는지 모릅니다. 오늘날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영적 질서를 알지 못한 선교는 오히려 선교를 가로막는 결과를 초래합니다. 최근 아프간 사태에서의 핵심은 바로 이것입니다. 영적 질서를 이해하지 못한 선교는 더 이상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누구에게 더 기름부으십니까? 열정을 가지고 일하는 사람일까요? 아닙니다. 하나님의 권위에 전적으로 순종하는 사람입니다. 선교현장에서는 그 땅을 품고 그 땅에서 평생 살기로 헌신한 사람들에게 일차적으로 기름부으심이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권위가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겨우 일주일 혹은 이주일 짧은 기간 동안 그 땅에 갔다가 사역하고 돌아오는 팀들은 열정은 있지만 그 열정이 영적 질서 안에서 통제되지 못하면 매우 위험한 결과를 초래하게 됩니다. 오늘날 선교의 문제는 장기선교사의 문제라기보다는 단기팀의 문제입니다. 단기팀은 그냥 치고 빠지면 됩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장기선교사의 추방과 복음의 문이 닫히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단기팀은 장기선교사의 권위 아래 철저히 복종하지 않으면 그 단기팀의 헌신과 열정은 매우 위험한 결과를 초래하게 되는 것을 잘 알아야 합니다. 제가 예수전도단에 들어와서 배운 것 중에 하나가 절대순종입니다. 몇 달 동안 기도하면서 워십과 드라마를 연습하고 이것저것을 준비했다고 할지라도 현장에서 장기 선교사가 허락하지 않고 기도만 하라고 하면 아무 말 없이 그렇게 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기 싫어도 장기 선교사가 하라고 한다면 기꺼이 그렇게 해야 합니다. 그렇게 순종할 때에 하나님께서 놀랍게 역사하시는 것을 많이 보았습니다. 시리아에 전도여행을 갔을 때 베두인 가족 전체가 주님께 돌아오는 것을 보기도 했습니다. 열정만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영적 질서 안에 있을 때만이 그 열정이 참으로 귀한 것입니다.

세 번째 교회에서 영적 질서를 알아야 합니다. 어느 교회건 성장하는 교회는 영적 질서가 잡혀 있는 교회입니다. 반대로 영적 질서가 무너져 있으면 아무리 열심히 해도 그 교회는 성장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교회 생활을 할 때 영적 조직도를 잘 그려야 합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은 교회에 여러 직분자를 세우셨습니다. 각 직분자들은 자신의 한계와 수준을 잘 알아야 하고 선을 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초신자들에게 함부로 직분을 맡기지 말라고 성경은 말하는 것입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사도들은 기도와 말씀에 전무하고, 집사들은 구제와 봉사에 집중하도록 한 것을 보게 됩니다. 이것 역시 영적인 질서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역자들은 교회의 영적인 일들에 책임을 져야 합니다. 기도와 양육, 교육과 같은 일입니다. 그리고 장로님들은 교회의 건물, 행사와 재정과 같은 일들을 책임져야 합니다. 서로가 서로를 존중해야 합니다. 어느 편에서 다른 편에 권위를 행사하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구약에서는 제사장이 결코 왕이 될 수 없었습니다. 왕은 제사장이 하는 제사업무를 볼 수 없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영적인 질서입니다. 우리 청년부 안에서는 임원들과 리더들이라는 큰 구조가 있습니다. 임원들은 행사와 재정을 책임져야 합니다. 리더들은 기도와 양육에 채임을 져야 합니다. 서로가 서로를 존중해야 하는 것입니다. 구약의 사울왕을 보십시오. 사울은 이 질서를 어김으로써 스스로 하나님의 기름부음에서 끊어진 사람입니다. 사무엘이 오기까지 기다리지 못하고 자신이 직접 하나님께 제사를 지낸 것입니다. 이것 때문에 하나님은 사울을 버리신 것입니다. 영적 질서를 지키지 못할 때 스스로 버림받는 길로 가는 것입니다. 이처럼 영적 질서는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네 번째 예배의 영역입니다. 예배 가운데서도 영적 질서가 있는 예배가 은혜스러운 예배입니다. 열정만으로 결코 은혜스러운 예배가 될 수 없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영적 질서를 알기 위해서 예배를 섬기는 자와 주관하는 자들은 말씀을 가까이 해야 합니다. 말씀을 읽고 연구하고 묵상하는 일에 예배팀은 늘 다른 사람의 모범을 보여야 합니다. 그렇지 않을 때 아무리 은혜스러운 예배를 위해 노력한다고 할지라도 한계를 느끼게 될 것입니다. 제가 속한 예수전도단에서는 예배의 강점이 있습니다. 처음에 예수전도단의 예배를 접할 때는 정말이지 시끄럽고 소란스럽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자꾸만 예배를 경험하면서 그 속에 나름대로의 질서와 순서가 있다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영적인 질서를 알게 되자 예수전도단의 예배가 더 좋아지기 시작했습니다. 여러분이 예배를 경험하기 원한다면 영적 질서에 대해서 배워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전도단에서 1시간 동안 찬양으로만 하나님을 예배할 때 다른 교회의 찬양집회, 다른 단체의 찬양집회와 다른 점이 몇 가지 있습니다. 그 중 첫째가 예배인도자와 찬양인도자가 따로 있다는 것입니다. 보통 교회에서는 찬양인도자와 예배인도자의 개념이 분리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배인도자와 찬양인도자가 따로 세워질 때, 그리고 서로 영적인 질서를 합력하여 세워갈 때 예배 가운데 놀라운 기름부으심이 있습니다. 또 하나는 흐름을 매우 중시한다는 것입니다. 1시간 찬양으로 예배할 때에 어디를 가든 흐름은 비슷합니다. 인도자의 개성과 은사가 서로 다르지만 예배의 흐름은 대충 비슷합니다. 예를 들어, 처음에는 감사의 찬양으로 시작하다가 그 다음에는 강력한 경축의 찬양으로 진행되다가 그 다음에는 하나님의 성품을 선포하면서 조용하고 깊이 있는 경배의 단계로 이어집니다. 이러한 흐름을 알고 예배에 임하면 얼마나 예배가 좋은지 모릅니다. 우리의 예배는 이러한 영적 질서가 있습니까? 만일 처음에 기쁨과 경축의 찬양으로 강력하게 시작했다가 또 기도하고 또 감사의 찬양을 했다가 기도하고 한다면 다시 말해서 들쑥날쑥한다면 하나님께 나아가는 지체들이 혼란을 겪는 것입니다. 예배팀은 그렇기 때문에 어려운 자리입니다. 예배자이면서 동시에 예배인도자가 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예배팀이 예배자로만 하나님께 나아간다면 예배의 영적 질서에 대해 놓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예배자는 열정으로만 충분합니다. 그러나 예배인도자가 되려면 열정뿐만 아니라 영적 질서에 대한 감각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예배의 영적 질서를 알지 못한다면 예배인도자가 되기보다는 그냥 예배자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 나은 것입니다. 열정만으로 하나님이 받으실만은 예배인도자가 될 수 없습니다.

다섯째는 영적 은사의 영역입니다. 은사의 세계에 대해서도 영적인 질서는 존재합니다. 영적 질서를 알지 못할 때 은사는 매우 위험할 수도 있고 남용될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읽은 고린도전서 14장 말씀은 교회 안에서 은사들이 영적 질서 안에서 사용되어져야 할 것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은사들이 영적 질서 안에서 사용된다는 것은 무엇을 뜻할까요? 먼저, 그것은 덕을 세우기 위해서 사용되어져야 합니다. 덕을 세운다는 것은 하나님의 성품을 드러내는 것을 의미합니다. 내가 하나님을 더 알게 되고 다른 사람들이 하나님을 더 알게 되도록 내가 가진 은사들이 사용되어져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은사 때문에 주님의 교회가 욕을 먹을 수 있습니다. 우리 가운데 방언을 한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지요? 기억하십시오. 내가 방언 좀 한다고 생각하는 지체들! 그들은 그렇지 못한 사람들보다 더 겸손해져야 합니다. 더 낮아져서 섬겨야 합니다. 더 인사도 잘하고 더 잘 배우고 더 잘 가르치고 더 잘 본을 보여야 합니다. 은사를 가진 사람들 때문에 그렇지 못한 사람들이 상처를 받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합니다. 방언을 할 줄 안다고 우쭐대지 마십시오. 방언을 말하는 것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티벳의 라마승들도 인도의 힌두승려들도 이상한 말로 중얼중얼거리는 것을 제가 보았습니다. 기도할 때 이상한 말을 한다고 내가 대단한 사람인 양, 영적인 사람인 양 착각하지 마십시오. 영적인 사람은 방언을 말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성품에 참여하고, 그리스도의 생활원칙을 따라 사는 사람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 여자가 교회에서 말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이 말씀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본 적이 있습니까? 이 말씀은 여자는 교회에서 일절 아무 말도 하지 말라는 그런 뜻이 아닙니다. 이 말씀은 사실 영적 질서에 대해 가르치는 본문입니다. 특히 예배의 영적 질서를 지키라는 것입니다. 자매들은 예배의 영적 질서를 잘 지켜야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여자'는 남편의 아내들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리고 본문의 문맥은 예배에서 특히 예언에 관계해서 가르치는 것입니다. 예언의 은사를 사용함에 있어서 남편을 둔 아내들은 겸손을 배워야 합니다. 할 말이 있어도 절제해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절제의 원립니다. 절제되지 않는 열정은 위험합니다. 예배에서 절제는 매우 중요합니다. 방언을 할 줄 알아도 통변하는 사람이 없으면 교회에서 잠잠해야 합니다. 예언도 마찬가지입니다. 분별할 사람이 없으면 예언은 절제해야 합니다. 이 예언에 대해서도 제가 할 말이 참 많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언에 대해서 잘못 생각합니다. 핵심만 말씀드리자면 참 예언의 기능은 회개를 돕는 것이고, 믿음 안에서 격려하는 것입니다. 은사의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성령의 열매가 성령의 은사보다 우선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품이 하나님을 위해 하는 사역보다 우선합니다. 하나님의 친밀감이 하나님의 사역보다 우선합니다. 덕을 세우는 일이 은사를 사용하는 것보다 우선합니다. 나의 덕을 세우기보다 남의 덕을 세우는 것이 더 우선합니다. 이러한 것들이 바로 영적 질서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알지 못한다면 자신이 아무리 영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하여도 그는 사실 아무것도 모르는 것입니다. 은사가 있다고 말하지만 사실은 영적인 어린아이인 것입니다.

여섯째, 가정에서의 영적 질서가 있습니다. 가정의 영적 질서에 대해서는 에베소서에 잘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내는 남편을 존경하며 남편의 결정에 복종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이것이 가장 기본적인 영적 질서입니다. 또 남편 역시 아내를 사랑하고 돌아보며 양육할 의무가 있습니다. 이것도 영적 질서입니다. 부모는 자녀를 주님의 마음으로 양육할 책임과 의무가 있습니다. 자녀 역시 부모를 공경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이러한 의무들을 지켜질 때 비로소 영적 질서가 있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건강한 가정을 이룰 수 있는 것입니다. 영적 질서는 건강한 가정의 기초입니다. 얼마 전 고등학교 학생이 금식기도한다고 집을 나가겠다고 할 때 제가 말린 적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기도를 기뻐하지 않으실 것이라고 말해주었던 것을 기억합니다. 그 학생이 한 동안 저를 원망했지만 저는 제가 잘못 가르쳤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영적 질서의 원리를 따라 지도한 것뿐입니다.

일곱째, 세상에서도 영적 질서가 있습니다. 로마서 13장 1절과 2절에는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굴복하라. 권세는 하나님께로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의 정하신 바라. 그러므로 권세를 거스르는 자는 하나님의 명을 거스림이니 거스리는 자들은 심판을 자초하리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갈 때에도 지켜야 할 영적 질서가 있는 것입니다. 세금문제나 병역의무와 같은 문제 역시 이런 차원에서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질서를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하나님을 알 때입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원칙을 가지고 세상을 다스리는가를 배울 때입니다. 그것은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보십시오. 성경적인 설교를 들으십시오. 성경을 읽고 연구하고 묵상하십시오. 성경을 가까이 하십시오. 성경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그러면 영적인 질서에 대해서 성령께서 가르쳐주실 것입니다. 무엇보다 이것을 꼭 기억하십시오. 열정만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질서 안에 있는 열정이 아름답습니다. 절제하지 못하는 열정은 위험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 40절을 보십시오. "모든 것을 적당하게 하고 질서대로 하라." 영적 질서는 축복의 통로입니다. 축복은 영적 질서를 따라 흐릅니다. 왜냐면 질서는 하나님의 성품과 일치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하나님은 어지러움의 하나님이 아니라 화평의 하나님이시며 질서의 하나님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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