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회복학교

회복(37)-영적권위

등불지기 2012. 3. 10. 21:43

 

 

영적 질서와 영적 권위에 대한 성경적 이해는 회복을 위한 필수적인 가르침입니다.

치유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맛보았다면 이제 질서와 권위에 대해 배워야 할 때입니다.

치유 그 자체로는 성숙을 보장하지 않습니다.

병에서 나음받는 것과 건강한 몸으로 회복되어서 건강한 몸으로 선한 영향력을 끼치며 성숙하게 살아가는 것과는 별개입니다.

오늘은 참 권위를 알고, 사용하는 것에 대해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도록 합니다.

축복합니다.

김광락 선교사 올림.

 

영 적 권 위

 

본문: 눅22:24-34

 

오늘은 영적 권위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저와 여러분을 향한 우리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은 그분의 자녀된 우리가 영적 권위를 가지고 이 세상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권위가 있는 삶을 살기를 아버지 하나님께서 바라고 계시는 것입니다. 권위가 있는 삶이란 영향을 받는 것이 아니라 주는 삶을 의미합니다. 반면 권위가 무너진 삶은 무질서하며 무능하며 무감각하며 무력합니다. 지난 시간에 살펴본 영적 질서와 영적 권위와의 관계는 매우 중요합니다. 서로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입니다. 영적 질서에서 제가 강조한 것은 영적인 세계에서 정말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고 그 순서를 지키는 것이 영적 성숙의 척도라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은사는 덕을 세우는 목적 아래 사용되어져야 한다는 것, 성령의 은사보다 성령의 열매가 더 우선된다는 것, 나의 열정보다 중요한 것은 다른 사람의 유익이라는 것, 하나님이 세우신 권위자를 존중함으로 순종하는 것, 그래서 전체적인 화평과 덕을 추구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 등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이 모든 영적 질서의 핵심에는 하나님을 아는 것이 있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은 질서의 하나님이시며 화평의 하나님이심을 알기에 우리는 영적인 질서를 지킬 수 있는 지혜가 생기는 것입니다. 오늘 살펴보게 될 영적 권위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영적인 권위는 영적인 질서를 지키기 위해 매우 중요한 은사입니다. 그리고 영적 질서를 지킬 줄 아는 사람에게 하나님은 당신의 권위를 부여하십니다. 오늘은 영적인 권위에 대해서 함께 주의 말씀을 배우도록 합시다.

먼저 권위가 무엇입니까? 권위는 영향력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줄 수 있는 위치나 자리를 말합니다. 권위가 있다는 말은 영향력이 있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권위의 원천은 하나님이십니다. 모든 권위는 하나님께로부터 흘러나옵니다. 그래서 권위 자체는 하나님의 은사요 선물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권위라는 단어를 듣기만 해도 거부감을 가집니다. 그러나 권위 자체는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기에 선하고 거룩한 것입니다. 문제는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성품대로 권위를 사용하지 않는 것입니다. 권위가 없는 삶은 무질서하고 무능력하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권위가 없는 삶보다 더 심각하고 위험한 것은 권위를 남용하거나 오용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로부터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저는 권위를 돈으로 비유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돈 그 자체는 좋은 것입니다. 문제는 그 돈을 어떻게 사용하느냐, 그 돈에 대해 어떤 태도를 가지느냐? 인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다른 사람에게 영향력을 줄 수 있는 자리나 위치는 하나님께로부터 왔지만 어떻게 그 권위를 사용하느냐, 그 권위에 대해 어떤 태도를 지니느냐는 하나님께서 판단하실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 은사에 대해 잠시 언급했습니다. 은사는 좋은 것입니다. 은사는 귀한 것입니다. 그러나 은사를 잘못 사용하게 될 때 공동체에 어려움을 줄 수 있는 것입니다. 은사에 대해 잘못된 태도를 갖게 될 때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다. 은사는 날카로운 칼과 같습니다. 어떤 목적으로 사용하느냐에 따라서 귀한 도구가 될 수도 있고 무서운 흉기가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은사도 그렇습니다. 그리고 권위도 그렇습니다. 그 자체는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지만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들이 어떤 목적과 어떤 태도를 가지고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서 많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많은 은사자들이 이 점을 놓치고 있습니다. 은사를 받은 것으로 만족해버리는 것입니다. 은사가 있다는 것으로 자신이 영적인 사람인 줄 착각합니다. 은사가 있어도 육적으로 사용한다면 그는 영적인 사람이 아닙니다. 영적이라는 말은 어떤 목적과 어떤 태도로 사용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은사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은사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영적으로 사용할 줄 모르면 소용이 없습니다. 몇몇 은사를 가졌다고 생각하는 분들의 문제는 어떤 태도와 어떤 목적을 가지고 어떻게 사용하느냐를 두고 고민하지 않기 때문에 공동체에 어려움을 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중심적인 사고방식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에 그러한 것을 개의치 않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권위는 둘로 나눌 수 있습니다. 세상적 권위가 있고 성경적 권위 혹은 영적인 권위가 있습니다. 권위를 세상적인 방식으로 사용하느냐 혹은 주님의 방식으로 사용하느냐 둘 중의 하나만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은사에도 재정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날 세상은 권위가 없어서가 문제가 아닙니다. 진정한 권위, 다시 말해서 영적인 권위가 없어서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정치나 경제의 영역에서도 영적인 권위를 간절히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니 교회는 더더욱 영적인 권위를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권위가 무엇인지 몸으로는 느끼고 있습니다. 그리고 참된 권위가 필요하다는 점에 대해서 다들 느끼고 있습니다. 문제는 무엇이 참된 권위인가, 무엇이 진정한 영적인 권위인가에 대해서 혼란을 겪고 있기 때문에 생기는 것입니다.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영적 권위에 대한 오해가 생기는 가장 근본 원인은 예수님의 삶에 대해 무지하거나 오해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삶은 오늘 우리에게 진정한 권위가 무엇인지 그대로 보여주는 모델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보면서 "아, 저것이 참된 권위자의 모습이구나."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하늘의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이 세상에 보내주셔서 참된 권위가 무엇인지 말씀해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영적 권위자의 모델이십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는 진정한 권위에 대해서 명확하게 말씀하고 게십니다. 어느 날 제자들 사이에서 다툼이 일어났습니다. 다툼은 허영심에서 생기는 것입니다. 참된 영광, 하나님의 영광,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영광을 구하는 사람은 결코 다투지 않습니다. 그러나 헛된 영광, 세상 영광을 구하는 사람은 잘 다투고 잘 싸웁니다. 제자들이 싸운 것도 그러했습니다. 자기들 중에서 누가 크냐의 문제를 가지고 다툰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믿고 따르고 있었지만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세상의 영광을 구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날도 그렇습니다. 예수님을 사랑하고 예수님을 위해 헌신적으로 일하는 사람들 중에서도 사실은 하나님의 영광이 아닌 세상의 영광, 헛된 영광을 구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역자들 중에서 종종 찾아볼 수 있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서로 다툰 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영광이 아닌 세상 영광을 구하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다툰 때를 보십시오. 그들이 서로 싸운 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 고난을 당하시기 직전이었습니다. 이 얼마나 아이러니한 것입니까?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러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습니다. 그리고 내일이면 십자가를 지실 것을 바라보고 계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은 "우리 중에 누가 큰 사람인가?"의 문제를 가지고 서도 다투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생각하고 있는데 그 제자들은 누가 위대한 사람인가를 생각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도 그렇습니다. 주님을 섬기고 주님을 따른다고 자처하는 사람들 중에서도 사실은 주님이 생각하는 것을 생각하지 않고 사실은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을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무엇을 생각합니까? 주님이 생각하는 그것을 생각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그것을 생각하고 있습니까? 우리의 생각이 어떤지는 우리의 말이 증명해줍니다. 우리가 평소 무심결에 하는 말을 보면 우리가 평소 어떤 생각을 하고 지내는지 보여줍니다. 어떤 사람들은 평소에 늘 자동차 이야기를 합니다. 그런 사람들의 생각은 자동차로 가득 차 있는 것입니다. 또 어떤 남자들은 늘 군대이야기만 합니다. 어떤 여자들은 옷과 음식과 사람이야기를 할 때 놀라운 열정을 보이기도 합니다. 그가 무심결에 하는 말들이 그가 생각하는 것을 보여줍니다. 우리가 평소에 생각하는 것들이 말로 나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이러한 생각을 아셨습니다. 그리고 교정해주기를 원하셨습니다. 주님은 오늘 저와 여러분의 생각이 바뀌게 되기를 바라고 계십니다. 생각이 바뀌어야 진정한 변화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생각이 바뀌지 않으면 아무 것도 바뀌지 않은 것입니다. 우리가 좀 더 기도하고 좀 더 성경을 읽고 좀 더 열심히 봉사한다고 하더라도 전혀 생각이 바뀌지 않았다면 우리는 사실 아무 것도 바뀌지 않은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의 생각이 변화되기를 바라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생각을 어떻게 바꾸어 주십니까? 그런데 보십시오. 주님이 말씀하셨어도 제자들의 생각이 전혀 바뀌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대해서 여러 번에 걸쳐서 말씀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은 아직도 하나님의 영광이 아닌 세상의 영광을 구하는 그 생각은 변함이 없었습니다. 제가 여러분의 생각을 바꾸기 위해서 얼마나 노력을 했는지는 주님이 아십니다. 저의 모발이 많이 사라진 것이 또한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말씀을 보면서 위로받습니다.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이 내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기 때문입니다. 보십시오. 주님과 함께 동고동락하는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인데도 제자들의 생각은 변함이 없었습니다. 제자들은 여전히 헛된 영광을 구하고 있었습니다. 여기서 구한다는 말은 집중적으로 생각한다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고 하신 것은 우리의 생각이 집중해야 할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든 그 생각이 그 사람의 됨됨이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평소 무엇을 생각하는가가 여러분의 참 모습이라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아무튼 주님께서 오늘 본문과 같이 말씀하시면서 제자들의 생각을 바꾸려고 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의 생각은 아무 것도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제자들의 생각이 언제 달라졌습니까? 주님께서 부활하시고 제자들에게 성령을 보내주셨을 때부터입니다. 우리의 생각이 달라지는 것은 우리의 노력으로 되지 않습니다. 오직 주님이 보내신 성령이 내 안에 들어오셔야 우리가 달라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자신이 성령을 받았다고 말은 하는데 정작 그 생각이 아무 것도 변하지 않았다면 사실 그는 성령을 받은 것이라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왜냐면 성령을 받은 사람은 그 생각부터 달라지는 것입니다. 성령은 우리의 생각을 바꾸시는 분이십니다. 여러분이 그리스도를 영접했다고 하면서도 여러분의 생각이 세상 사람들의 생각과 별반 차이가 없다면 다시 돌아보아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모신 사람은 그 생각부터다 다르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생각이 변하지 않았다면 성령을 받은 것이라고 볼 수 없는 것입니다. 그가 방언을 하고 예언을 한다고 할지라도 그 생각이 변하지 않았다면 그가 진정 예수 그리스도의 영을 소유하였는지 의심해야 합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의 이 말씀을 듣고서도 그들의 생각이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고 해서 우리가 이 말씀을 무시해도 된다는 뜻이 결코 아닙니다. 우리는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면서 이 말씀을 계속 묵상하고 묵상함으로써 우리 마음에 새겨야 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이 우리 가슴에 새겨질 때 우리는 진정한 권위가 무엇인지 바로 알고 바로 사용하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어떤 방법으로 제자들의 생각, 제자들의 고정관념에 대해서 변화를 시도하셨습니까? 예수님은 세상 나라와 하나님 나라를 서로 비교하셨습니다. 이것은 오늘 우리의 사고방식이어야 합니다. 세상 나라의 방식과 하나님 나라의 방식을 비교할 줄 모른다면 우리는 결코 참된 권위를 알 수도 행할 수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면 먼저 세상 나라는 어떤 것이라고 하셨습니까? 세상 나라는 임금들이 있고 임금들이 세상 사람들을 주관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권위를 행하는 위치에 있는 사람, 본문에서는 집권자라고 표현했는데, 그들은 은인이라 칭함을 받는다고 하셨습니다. 세상 나라에서 생각하는 권위는 어떤 것입니까? 어떤 명칭을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어떤 명칭입니까? '임금' '집권자'들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권위를 무엇으로 평가합니까? 그들은 주관하는 것과 무엇으로 칭함을 받는가를 중요한 기준으로 봅니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이래라 저래라 지시하고 명령하는 것을 권위의 특징으로 여깁니다. 그리고 세상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이런 저런 호칭으로 불리어지는 것을 권위의 기준으로 간주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나를 어떤 사람으로 부르는가에 예민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영적 권위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사람인 것입니다. 또 어떤 사람들에게 지시를 내리고 명령을 내리는 것을 리더십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혹은 다른 사람으로부터 명령을 받는 것을 기분 나빠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모두가 영적인 권위에 대해 무지하기 때문에 생기는 반응들입니다.

그러면 주님이 말씀하신 영적 권위의 특징은 무엇입니까? 하나님 나라에서의 권위, 참된 권위는 어떤 특징이 있다고 말씀하십니까? 26절을 보세요. "너희는 그렇지 않을지니 너희 중에 큰 자는 젊은 자와 같고 두목은 섬기는 자와 같을지니라." 주님이 말씀하신 것은 이렇게 풀어볼 수 있습니다. "너희는 세상 나라의 방식을 본받아서는 안 된다. 세상 나라의 방식과 전혀 다르다. 너희 중에 자신이 큰 자라고 생각한다면 젊은 자처럼 행동해야 하고, 두목이라고 생각한다면 종과 같은 태도를 보여야 한다." 오늘날 교회를 보면 영적 권위에 대해 오해하는 분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분들은 은사도 있고 체험도 있고 열심도 있지만 예수님에 대해서 잘 모르기 때문에 영적인 권위에 대해서 무지하거나 오해하는 것입니다. 그분들의 특징을 보면 첫째 호칭에 민감합니다. 자신은 목사인데 형제라고 부르는 것에 대해서 예민합니다. 혹은 권사인데 성도라고 불리는 것에 대해 화를 냅니다. 자신이 어떻게 불리는가에 대해서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입니다. 또 한 가지 특징은 자신이 지시하고 명령하는 것을 좋아하고 지시를 받고 명령을 받는 것에 대해 불쾌하게 생각합니다. 이러한 모습은 영적 권위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이 말씀하신 참된 권위, 영적인 권위, 성경적인 권위, 하나님 나라에서의 권위는 어떤 특징이 있을까요? 첫째 젊은 자와 같다고 했습니다. '청년같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제가 청년들을 좋아하는 이유는 목에 힘을 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거드럼을 피우지 않기 때문에 좋아합니다. 근엄한 표정을 짓지 않기 때문에 좋아합니다. 생각이 유연하기 때문에 좋아합니다. 대화하려는 자세가 있어서 좋습니다. 열린 마음을 가지고 있어서 좋아합니다. 생각이 굳어져 있지 않아서 좋아합니다. 늘 배우려는 자세가 있어서 좋아합니다. 물론 요즘 청년들 중에서도 일명 오크족들이 있습니다. 무슨 말을 해도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청년인데 태도는 늙은이처럼 행동합니다. 생각이 굳어져버린 답답한 청년들이 있습니다. 말이 청년이지 마음은 노인입니다. 그러나 대부분 건강한 청년들은 배우려는 자세를 가지고 있습니다. 목이 뻣뻣하지 않습니다. 자기를 주장하지 않습니다. 우리 주님은 영적인 권위자일수록 목이 곧아서는 안 된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둘째로, 영적 권위자의 특징으로서 섬기는 자의 자세, 종의 자세를 가져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참으로 놀라운 말씀입니다. 영적 권위자의 태도는 근엄하고 위엄 있고 풍채가 있는 모습이 아니라 시종과 같은 자세를 지녀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태도에 대해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참된 권위는 어떤 태도를 지녀야 할까요? 제가 진주에 1달 간 전도여행을 갔을 때입니다. 진주에서 부흥하고 성장하는 어느 교회를 전도팀원들이 방문한 적이 있었습니다. 기도하면서 우리 팀원들이 일주일간 머물 수 있는 교회로 인도해달라고 해서 간 교회였습니다. 그 교회의 담임목사님은 이름만 알고 얼굴은 전혀 몰랐습니다. 그런데 그 목사님과 전화가 연결되었습니다. 목사님은 전도팀을 환영하시면서 머물고 가라고 하시면서 머물 수 있는 숙소를 마련하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그 교회에 갔더니 말씀대로 사무원이 우리 팀이 머물 수 있는 숙소로 안내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숙소에서 팀원들이 여장을 풀고 둥글게 앉아 모임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모임 중에 문이 열리더니 시력이 좋지 않아 두꺼운 안경을 쓴 어수룩한 모습의 어떤 남자분이 문밖에서 서 있는 것입니다. 우리 팀원들은 그때 그분이 교회의 사찰 집사님인줄로 알았습니다. 제가 그때 팀리더로 섬겼는데 제가 순간적으로 이분이 담임목사님일수 있겠다 싶어 뛰어가서 인사드렸습니다. 알고 봤더니 그 교회의 담임목사님이셨습니다. 하마터면 저와 저의 팀원들이 큰 결례를 범할 뻔 했습니다.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가슴 쓸어내립니다. 그분은 그 교회와 그 지역에서 매우 존경을 받는 목사님이셨습니다. 그런데 그분의 인상은 시골 아저씨와 같았습니다. 근엄한 표정이나 태도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분이 설교할 때는 얼마나 힘 있게 설교하시는지 모릅니다. 제가 그분과 교제를 나누면서 참된 권위를 맛볼 수 있었습니다. 진짜 권위가 어떤 것인지 배울 수 있었습니다. 복음서 시대에 타임머신을 타고 예수님을 만난다면 그렇지 않을까 싶습니다. 예수님의 외모와 풍채는 보잘 것이 없습니다. 세리와 죄인들이 편하게 다가갈 정도로 편한 인상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영광과 권위는 철저하게 가려져 있었고 숨겨져 있었던 것입니다. 제자들이 변화산에 올랐을 때 예수님의 내면에 감추어진 영광을 보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평소 예수님의 모습은 세련된 바리새인들의 시각에는 굉장히 매력이 없는 분으로 비쳐졌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람의 눈에 보기에 고운 모양도 풍채도 전혀 없으신 분이셨습니다. 이것이 영적 권위의 특징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종의 모습으로 사셨습니다. 실제적으로 종의 태도와 모습으로 사셨다고 저는 믿습니다. 그래서 위엄 있는 옷을 입고 위엄 있는 자리에 앉아 사람들을 내려다보며 이래라 저래라 명령하고 지시를 내리는 모습, 근엄한 모습의 세상 임금들과는 전혀 다른, 정반대의 모습을 보여주신 분이십니다. 그래서 저는 예수님이 좋습니다. 그런 예수님을 사랑할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은 친히 진정한 권위가 무엇인지 삶으로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말씀으로 가르쳐주셨습니다. 주님은 영적 권위자는 섬기는 자와 같아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섬기는 태도를 지녀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에 '섬긴다'는 말은 손님에게 음식을 나르는 일을 의미했습니다. 그래서 27절에 "앉아서 먹는 자가 크냐 섬기는 자가 크냐 앉아 먹는 자가 아니냐 그러나 나는 섬기는 자로 너희 중에 있노라."고 하신 것입니다. 섬기는 것은 손님에게 음식으로써 접대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시종이 하는 일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섬기는 자로 소개하셨습니다. 오늘날 섬긴다는 말을 너무 미화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섬김'이라는 이 소중한 단어를 추상적으로 사용하는 것을 피해야 합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섬김이란 음식을 나르는 행위를 말합니다. 섬김의 자세를 가진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요? 그는 언제나 다른 사람의 필요를 찾습니다. 그리고 그 필요를 채울 연구를 합니다. 그리고 실제로 그 필요를 채우는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전에도 한번 이야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우리가 섬기는 자로서 세상을 살아간다면 우리는 결코 상처받을 일이 없습니다. 우리가 섬기는 자의 마음을 놓쳐버리니까 상처도 받고 실망도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필요에 민감합니까? 다른 사람들의 필요에 주님이 주신 은사를 가지고 반응하고 있습니까?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영적 권위가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으로부터 이 섬김의 정신을 배워야 하는 것입니다. 자기만 섬기는 사람은 결코 참된 권위를 가질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섬기는 자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의 삶은 섬김의 삶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것을 이렇게 표현하고 계십니다. '...나의 모든 시험 중에..."(28절) 예수님의 시험이 무엇일까요? 예수님께 주어진 시험은 바로 섬기는 자로서 사는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과 동행한다고 한다면 섬기는 삶으로써 증명해보여야 합니다. 섬김의 삶이 없다면 주님과 동행한다는 것은 거짓말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우리도 섬김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럴 때 주님은 놀라운 축복을 약속하십니다. 첫째, 잘 섬기는 자에게 하나님 나라를 맡기실 것입니다.(29절) 둘째, 예수님과 함께 교제하는 특권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과의 친밀감을 누리면서 살게 될 것입니다.(30절) 셋째, 이스라엘 열 두 지파를 다스리게 하실 것입니다. 이것은 오고 오는 교회를 위해 영향력을 행하게 할 것이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들의 글은 모든 교회에 권위를 행사하는 영향력 있는 글이 된 것입니다. 사도들의 글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 된 것입니다. 사도들의 가르침은 오고 오는 모든 세대의 교회들을 위하여 초석이 된 것입니다. 이와 같이 잘 섬기는 자들이 교회에 참된 영향력을 발휘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 나라의 법칙입니다. 섬김으로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사람이 교회에 참된 영향력과 지도력을 발휘하도록 주님이 이끄시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이렇게 영적 권위가 있는 사람은 주변에 따라 바뀌는 온도계가 아니라 주변을 바꾸는 온도조절계와 같이 사는 것입니다. 영적 권위자가 곧 세상을 바꾸는 사람인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이 이와 같이 말씀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의 생각은 바뀌지 않았습니다. 제자들은 여전히 섬기려고 하기보다는 섬김을 받으려고 했고, 하나님의 영광보다는 세상의 영광을 구하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누구보다 주님을 사랑한다고 자부했고 내세웠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단이 시험할 권리를 하나님께 청구하게 된 것입니다. 사단의 역할은 이것입니다. 우리 안에 잘못된 생각, 잘못된 편견을 깨닫게 해주기 위해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도구입니다. 제자들의 대표라고 자부하던 베드로를 사단이 시험하겠다고 하나님께 말한 것입니다. 이제 베드로는 자신이 얼마나 세상 영광을 구했는지를 철저하게 자신의 진면목을 보게 될 날이 다가오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사단이 우리의 삶속에서도 시험하는 자로 찾아옵니다. 무엇을 시험할까요? 우리가 주님을 믿노라고 하면서도 주님을 따른다고 하면서도 섬기는 삶을 살지 않을 때, 혹은 섬기지 않으려고 할 때 사단은 우리가 어떤 존재인지 보여주기 위해 다가오는 것입니다. 우리가 얼마나 이기적이고 얼마나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 얼마나 세상의 헛된 영광을 구했는지를 보여주기 위해 찾아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영적 위선을 깨닫게 하는 도구로 쓰임 받을 것입니다. 베드로는 사단의 시험에 의해 자신이 주님을 따르면서도 얼마나 이기적이었고 허영에 가득 찬 삶을 살았는지 알게 될 것입니다. 이것을 알게 되는 것은 너무나 큰 고통이기에 스스로 목숨을 끊을 수도 있다는 거을 주님은 아셨습니다. 그래서 베드로의 생명을 위해, 베드로가 사단의 시험에도 불순물만 제거되고 회개하여 정금같이 나올 수 있도록 예수님께서는 베드로를 위해 중보기도하신 것입니다. 오늘 저는 저와 여러분이 모든 종류의 시험을 통과하여 정금과 같이 나오게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그것은 섬기는 자로서 살아가기에 합당하도록, 진정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자로서 살아가도록 준비되는 것입니다.

정리해봅시다. 영적 권위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요? 그것은 섬김에서 나옵니다. 섬김의 정신을 상실하면 영적 권위를 상실하는 것과 같습니다. 영적 권위란 어떻게 얻어지는 것일까요? 그것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인데 섬김의 본을 보임으로써 얻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섬기는 자로서 본을 보이신 분이십니다. "나는 섬기는 자로 너희 중에 있노라." 예수님은 섬김의 본을 보이신 분이십니다. 또한 섬김이란 중보기도에서 나옵니다. 자신을 위해 기도하는 자가 아니라 남을 위해 기도하는 자가 영적 권위를 갖습니다. 남을 위해 기도할 때 그들의 진정한 필요를 보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을 위해 기도할 때 그들의 필요를 바라보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관점을 얻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영적 권위를 상실하게 되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본문에서 우리는 분명히 보았습니다. 영적 권위를 상실하면 사단의 시험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영적 권위를 가진 자는 시험에 들지 않습니다. 섬기는 마음으로 사는 자는 사단이 시험할 틈을 찾지 못할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섬기러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봅시다. 그리고 예수님에게서 섬김의 정신을 배웁시다. 그렇게 할 때만이 우리가 진정한 권위,, 영적인 권위를 회복하는 길입니다. 우리 모두 주 예수 그리스도를 힘입어 영적 권위를 가지고 살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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