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회복학교

회복(39)-영적성숙

등불지기 2012. 3. 10. 21:50

 

회복메시지 서른 아홉 번 째..

제 메시지는 순전히 제 것이 아닙니다. 누군가의 책에서 배웠고, 누군가의 강의를 통해 도전을 받았고, 배운 대로 누군가에게 가르쳐보았고, 설교하였던 것입니다.

누군가 제 메시지를 가져가서 유익을 줄 수 있다면 그것으로 기뻐하고 감사할 것입니다.

다만 아프리카에서 복음의 등불 밝히도록 기도해주시는 것 잊지 마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축복합니다.

김광락 선교사 올림.

 

영 적 성 숙

 

본문: 엡4:13-16

 

생명은 성장합니다. 죽은 것은 성장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성장을 ‘변화’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고 봅니다. 생명이 있다는 것은 안에서 밖을 향하여 변화하는 것이 있다는 뜻입니다. 이러한 변화를 안에서부터 일으키는 것이 바로 생명의 가장 중요한 특징입니다. 죽은 것은 결코 안에서부터 변화를 일으킬 수 없습니다. 밖에서 힘을 가하여 변화를 일으킬 수 있겠지만 그것은 생명의 특징이 아닙니다. 교회도 개인도 기업도 마찬가지입니다. 생명이 있다는 것은 스스로 부단히 변화를 일으켜냅니다. 개혁주의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교회가 성경에 의해서 부단히 새로워져야 한다는 뜻입니다. 교회가 늘 성경을 사랑하고 읽고 연구하고 묵상하고 가르칠 때에 부단히 새로워질 수 있습니다. 변화한다는 것은 옛 것을 과감하게 버리는 것입니다. 한 때는 새 가죽부대였지만 시간이 지나면 낡은 가죽부대가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개혁이라는 말은 한 때 유용한 가죽부대였다 할지라도 새 포도주를 위해 기꺼이 낡은 가죽부대를 버릴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우리에게 생수를 공급하실 준비가 되어 있으시며 또 그렇게 부어주기를 간절히 원하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있는데 그것은 우리에게 있는 낡은 가죽부대를 기꺼이 버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요즘 교회 안에 유행하는 말이 있습니다. 내려놓음이 있어야 채워주심이 있는 겁니다. 채워주심을 경험하려면 내려놓는 용기를 실천에 옮겨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진리 안에서 부단히 변화할 수 있다면 주님은 언제나 우리 안에서 생명으로 역사하실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님 안에서 성장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저는 이 생명의 가장 중요한 측면으로서 ‘성숙’에 대해서 살펴보려고 합니다. 성숙해지는 것 역시 생명의 가장 중요한 특징 중에 하나입니다. 그러면 성장과 성숙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이것은 마치 나무의 나이테와 같습니다. 나무는 계속 성장하다가 그 다음에는 견고해지는 기간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 나무의 나이를 알려면 그 나무의 나이테를 보면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생명에는 이렇게 자라감과 견고해짐이란 패턴이 반복되는 특징이 있습니다. 영적 성장도 마찬가지입니다. 영적 성장과 성숙은 동전의 앞뒤면과 같은 것입니다. 오늘 읽은 본문에서 우리는 영적 성장과 성숙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그려주시는 놀라운 그림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생명의 능력이 동일하게 우리 안에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모시고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은 반드시 생명의 특징인 성장과 성숙을 경험하게 됩니다. 오늘 제가 여러분에게 말씀드리는 것은 이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이 생명의 성장과 성숙의 청사진을 알게 된다면 우리는 보다 쉽게 하나님과 동역할 수 있을 것이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해 행하시는 그 놀라운 영광을 보게 될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을 향하신 우리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은 우리가 부단히 성장하고 또한 성숙해지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가 하나님의 청사진을 동일하게 품고 있어야 하고, 또 영적 성숙을 갈망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과 우리의 마음이 합할 때 놀라운 생명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먼저 정의를 내려봅시다. 그리스도인의 영적 성장은 무엇이고 영적 성숙이란 무엇일까요? 영적 성장은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것이고 영적 성숙이란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견고해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13절을 보세요.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15절을 보세요.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또 16절을 보세요.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여기서 영적 성장에 대해 분명히 말해주고 있습니다. 영적 성장의 최종 목표는 예수 그리스도처럼 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가 성장해야 할 최종 단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처럼 된다는 말은 무슨 말일까요? 그것은 예수님의 성품을 닮아가는 것, 그리고 예수님의 삶의 원칙을 가지고 사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영적 성장에 대한 교회의 보편적이고 광범위한 오해들이 나타납니다. 오늘날 많은 교회들은 영적 성장에 대해 어떤 편견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어떤 훈련프로그램을 수료하는 것, 혹은 어떤 직분을 갖는 것, 혹은 금식과 기도나 구제와 같은 어떤 행위를 하는 것, 혹은 방언과 같은 어떤 신령한 은사들을 갖는 것과 영적 성장을 동일시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거듭 말씀드리고 또 강조하는 것이지만 이러한 것들로 영적 성장을 말하는 것은 매우 심각한 착오로서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매우 큰 위험에 빠져 있다는 사실입니다. 성령의 은사들과 영적 성장은 관련이 없습니다. 또한 금식과 기도와 같은 의식들과도 상관이 없습니다. 혹은 직분과 신학적인 지식도 영적 성장과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영적 성장은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성품과 삶의 원칙들을 얼마나 반영하고 있는가가 영적 성장의 척도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이 어떤 직분이 있고, 어떤 훈련을 통해서 전문적인 지식을 갖게 되었고, 또한 어떤 종교적인 의식들을 행할 줄 알고, 혹은 어떤 은사가 많이 나타난다고 해서 자신이 영적으로 성장한 사람인 양 착각하는 일들이 우리 안에 결코 없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영적 성숙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향하여 자라갈 때 반드시 성숙의 과정을 거치게 됩니다. 마치 나무의 나이테와 같이 말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서도 역시 이러한 영적 성숙에 대해서 분명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14절을 보실까요?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궤술과 간사한 유혹에 빠져 모든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치 않게 하려 함이라.” 이 한 절 말씀이 영적 성숙에 대해 모든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본문에서는 성숙하지 못한 것을 어린아이와 같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성숙하지 못한 그리스도인, 영적으로 어린아이의 특징을 무엇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한 마디로 말해 “잘 흔들린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아무리 은사가 많고, 아무리 많은 지식이 있고, 아무리 목사와 장로와 권사와 같은 직분이 있다고 할지라도 잘 흔들리는 사람은 영적으로 성숙하다고 볼 수 없는 것입니다. 성숙하다는 말은 흔들리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흔들리는 것에 대해서 몇 가지로 나누어서 생각해봅시다. 첫째로, 감정의 기복에 대한 것입니다. 기복이 심한 것은 성숙하지 못하다는 증거입니다. 성숙한 사람은 기복이 심하지 않습니다. 시편 1편에서 복이 있는 사람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는 사람이라고 했고, 반대로 악인은 바람에 나는 겨와 같다고 말하는 것을 기억합니까? 우리는 기복이 심한 사람이 되지 않기를 원합니다. 감정의 기복이 심하다는 것은 기쁨을 느끼다가 갑자기 슬픔을 느끼는 상태를 말하지 않습니다. 제가 말하는 감정의 기복이 심한 상태라는 것은 자기 정체성에 대해서 흔들리는 것을 말합니다. 자기 존재감이 안정되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자신에 대한 평가가 한결같은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오해하지 마십시오. 갑자기 기뻐했다가 갑자기 슬퍼서 우는 모습만 보고 감정의 기복이 심하다고 보지 마십시오. 그런 사람은 성숙한 사람일 수 있고 아닐 수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자기 존재 가치에 대한 평가가 흔들리고 쉽게 오르락내리락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언제나 하나님 아버지의 눈으로 자신을 볼 줄 아는 사람,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자신을 바라볼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영적 성숙의 기본인 것입니다.

성숙하지 못하다 혹은 쉽게 흔들리는 것에 대해서 둘째로 생각해보는 것은 사람의 말에 쉽게 영향을 받는 것입니다. 오늘 읽은 본문에서는 “사람의 궤술”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성숙하지 못한 사람은 사람의 말에 쉽게 영향을 받습니다. 반면 영적으로 성숙한 사람은 사람의 ‘궤술’에 흔들리지 않습니다. 어저께는 캠퍼스를 섬기는 젊은 간사님들에게 설교가 무엇인가에 대해서 강의를 한 적이 있었습니다. 성숙하지 못한 설교자는 사람들의 반응에 민감하게 반응합니다. 그러나 성숙한 설교자는 사람들의 반응에는 신경 쓰지 않습니다. 그러나 대신 전문가의 피드백에 대해서는 귀를 기울일 줄 압니다. 사람의 반응과 피드백을 구분하는 것은 성숙한 설교자로서 반드시 갖추어야 할 자질 중에 하나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우리 자신에 대해 사람들이 이러쿵저러쿵 하는 여러 가지 말들을 듣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반응과 피드백을 구별해야 합니다. 정죄와 책망을 구별할 줄 알아야 합니다. 아부와 칭찬을 구별해야 합니다. 정직한 말과 교묘한 말을 구별할 줄 알아야 합니다. 성숙하다는 것은 사람의 말에 대해서 영향을 받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여러분의 존재가치에 대해 사람들이 하는 말에 대해서 쉽게 흔들리는 편입니까? 아니면 그런 말을 들어도 견고하게 서 있는 편입니까? 사람들의 말에 흔들리지 않는 사람이 되려면 우리가 성숙해야 하는 것입니다.

성숙하지 못하다는 것에 대해서 또 한 가지 생각해보는 것은 잘 속는 것입니다. 성숙하지 못한 사람은 잘 속아 넘어갑니다. 오늘 본문에 “...간사한 유혹에” 잘 빠지는 것입니다. 요즘 ‘충동구매’라는 말이 유행합니다. 속사람이 성숙하지 못한 사람은 이러한 충동구매에 잘 노출됩니다. 또 요즘 남자는 욱하고, 여자는 혹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충동적인 욕구들을 얼마나 잘 다스릴 줄 아느냐, 그리고 욕망을 절제할 줄 아느냐는 성숙의 중요한 기준입니다. 어린아이를 보십시오. 어린아이들은 절제를 잘 모릅니다. 부모가 절제시켜주어야 할 때가 많습니다. 지난주에는 텔레비전을 사고 싶은 ‘아주 강한 유혹’을 느낀 주간이었습니다. 기나긴 추석연휴동안 텔레비전과 가까이 지내면서 제가 좋아하는 사극 드라마를 많이 볼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텔레비전을 보는 사람을 정죄하는 의도는 결코 없습니다. 제가 말하고 싶은 것은 절제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세상에는 온갖 ‘간사한 유혹’들이 넘쳐나고 있습니다. 우리 자신을 지키기에 점점 힘든 세상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더욱 더 영적 성숙을 사모해야 하는 것입니다. 성숙한 사람은 간사한 유혹에 잘 빠지지 않습니다.

성숙하지 못하다는 것은 마지막으로 유행에 휩쓸리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모든 교훈의 풍조에 밀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옷의 유행을 무시하면서 내 마음대로 입고 다니자는 그런 말이 결코 아닙니다. 사람들의 사고방식을 지배하는 흐름이 있는데 그러한 흐름에 밀려다니지 말자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요즘의 남녀노소를 사로잡고 있는 교훈의 풍조에는 ‘외모지상주의’가 있습니다. 외모에 얼마나 예민한지 모릅니다. 그래서 멀쩡한 사람인데 온갖 종류의 성형수술을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의 날에 주님과 같이 영광스럽게 변화될 것을 믿는다면 지금 우리의 겉사람이 낡아져가는 것을 결코 부끄러워하지 않을 것입니다. 부끄러워하기는커녕 오히려 육신의 영광이 쇠할수록 부활의 영광을 기대하게 될 것입니다. 요즘 많은 사람들의 사고방식을 사로잡고 있는 자들을 조심하십시오. 텔레비전과 영화와 같은 대중 매체들은 이러한 ‘교훈의 풍조’를 전파하는데 일등 공신입니다. 세상의 풍조들을 널리 전파하는 전도자들입니다. 우리는 그러한 풍조에 쉽게 흔들려서는 안 될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 사람들의 사고방식에 잘 흔들리는 사람입니까? 아니면 그러한 세상 속에서도 견고하며 흔들리지 않는 사람입니까?

오늘 본문에서 “요동치 않게 하려 함”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을 보십시오. 흔들리지 않는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 되는 것, 바로 그것이 우리의 목표가 되어야 합니다. 흔들리지 않는 사람이 되는 것을 보수적인 사람이 되라는 것으로 오해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세상을 살면서 영향을 받는 사람이 되지 말고 오히려 세상에 영향을 주는 사람이 되자는 뜻입니다. 우리가 흔들리고, 끌려다니고, 유행을 따라 살다보면 나중에 반드시 후회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흔들리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십니다. 그리고 중심을 가지고 살기를 바라고 계십니다. 그리고 영향을 받는 것이 아니라 영향을 주는 삶을 살게 되기를 간절히 바라고 계십니다. 그것이 우리 모두를 향하신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것, 그리고 예수님을 중심으로 견고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심지가 견고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입니다. 중심이 무거운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람이 불어도 날아가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을 하나님 아버지께서 원하십니다. 제가 제주도에서 배를 타고 육지로 나올 기회가 있었습니다. 바람이 심하게 불었는데 5,000톤의 배는 출항이 금지되고 10,000톤의 배는 출항이 허락되었습니다. 다행히 큰 배가 있었기에 육지에 올 수 있었습니다. 만일 없었다면 바람이 잠잠해질 때까지 기다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때 저는 한 가지 교훈을 배웠습니다. 무게중심이 작은 배는 작은 파도에도 쉽게 흔들리는 것처럼 신앙도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성숙하지 못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큰 일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큰 은혜의 바다로 나갈 수 없는 것입니다. 저는 어릴 적부터 교회를 섬겨오면서 은사는 있는데 성숙하지 못한 그리스도인들을 보아왔습니다. 장로나 권사와 같은 직분은 있는데 성숙하지 못한 그리스도인들을 보아왔습니다. 이것저것 훈련을 받는데 성숙하지 못한 그리스도인들을 보아왔습니다. 그들의 한결같은 특징은 무게중심이 얕다는 것입니다. 정말 핵심이 무엇인지 놓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 복음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의라는 핵심을 놓치고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성숙할 수 있을까요? 어떻게 성장할 수 있을까요?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무엇이라고 말하고 있습니까? 첫째,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무슨 말입니까? 이것은 우리의 믿음체계와 사고체계가 일치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럴 때만이 우리가 성장할 수 있고 또 성숙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의 믿음과 우리의 생각이 일치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성장할 수 없고 성숙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실제로 그들이 아는 것은 믿는 것과 다릅니다. 예를 들어볼까요? 그들은 복이 있는 자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그들이 살아가면서 ‘굳게 알고 있는 것’은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이 가지고, 더 잘 살고, 자기 생각과 계획대로 잘 풀려나가는 것이 복이 있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한국 사람의 사고방식에는 샤마니즘적 세계관이 뿌리 깊게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러한 사고방식을 버리지 못한 채로 믿음을 받아들이게 된다면 결코 참된 성장을 경험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여러분이 믿습니까? 좋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의 사고방식도 여러분이 갖고 있는 믿음과 같이 가고 있습니까? 예수님께서 생각하시는 것과 같이 생각하고 있습니까? 우리가 성장하려면, 혹은 성숙해지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여기서 그 놀라운 성장의 비결, 성숙의 열쇠가 있습니다. 믿음과 생각이 같이 가도록 하십시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것이 일치하도록 하십시오. 그러면 성장합니다. 우리의 사고방식이 여전이 옛사람의 사고방식과 같다면, 불신자의 사고방식과 다를 바가 없다면 우리가 아무리 많은 은사를 가졌다고 할지라도 영적인 수준은 어린아이의 단계에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과 생각이 일치할 때 비로소 우리는 온전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성숙해지는가? 둘째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보고 배워야 합니다. 예수님을 보면서 그분의 성품과 그분이 굳게 지키셨던 삶의 원칙들을 배워야 합니다. 그것이 실제적으로 예수님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는 것입니다. 그것을 15절에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라” 전자는 성품이고, 후자는 원칙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보면서 사랑을 배워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제자들과 교회들에게 사랑이란 계명을 주셨지 않습니까?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요13:34,35)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랑은 하나님의 여러 성품 중에서 대표적인 것입니다. 이 성품은 성령의 열매들 중에서 으뜸입니다. 가장 먼저 언급되는 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그리고 이 사랑이란 성품은 거짓 선지자들과 거짓 선생들을 구별하는 기준이기도 합니다. 양의 탈을 쓴 늑대는 결코 사랑의 성품을 보여주지 못합니다. 또한 이 사랑이 없다면 방언도 예언도 믿음도 천사의 말도 사실상 아무 것도 아닌 것입니다. 이처럼 중요한 것이 사랑입니다. 이 사랑뿐만이 아닙니다.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해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예수님에게서 삶의 원칙들을 배워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의 마음에 집중하신 것, 언제나 아버지와의 친밀감을 유지하고자 힘쓰신 것, 그 가운데서 아버지의 뜻에 언제나 순종하고자 하신 것, 이것이 바로 참된 것입니다.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할 때 비로소 우리는 영적으로 성장하게 되고 또한 성숙해져갑니다.

마지막으로 생각해볼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성장할 수 있는가?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도움을 입어야 하는 것입니다. 16절을 보십시오.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입음으로 연락하고 상합하여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 영적으로 자라나고 또한 세우는 것, 다시 말해서 성장과 성숙의 시작은 이것입니다.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입음으로...” 그렇습니다. 결코 내 힘으로 성장할 수 없고 성숙할 수 없습니다. 내가 좀 더 금식하고 좀 더 기도하고 좀 더 구제하면 성장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말기를 바랍니다. 주님이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우리를 도와주셔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순간마다 이렇게 기도해야 합니다. “주님, 저를 도와주십시오.” “주님의 도우심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모든 순간마다 주님의 도우심을 구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정리해봅시다. 우리는 지금 성장하고 있습니까? 그리스도를 항하여 자라가고 있습니까? 우리는 성숙한 그리스도인입니까? 우리는 세상에서 영향을 받는 자로서 살아가고 있습니까? 아니면 영향을 주는 자로서 살아가고 있습니까? 우리는 쉽게 흔들리는 사람입니까? 아니면 사람의 궤술과 간사한 유혹과 세상의 모든 교훈의 유행에도 끄떡하지 않는 사람입니까? 지금 우리에게 진정 필요한 것이 무엇일까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하면서 그분의 도움을 구하는 것입니다. 또한 그분을 믿는 것과 아는 것을 끊임없이 일치시켜야 합니다. 그분 안에서 내 사고방식을 끊임없이 점검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생각하시는 대로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생각하실까? 라고 자신의 생각을 점검해보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예수님의 삶을 묵상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묵상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읽고 연구하고 묵상해야 합니다. 그럴 때만이 영적 성장과 성숙은 좋은 토양을 만나게 됩니다. 저는 29년 전 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영접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내 마음에 모셨음에도 불구하고 저는 끊임없이 흔들리고 있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저는 감정의 기복이 매우 심한 사람이었습니다. 저는 사람들의 말에 쉽게 영향을 받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던 저에게 주님은 성경말씀을 규칙적으로 읽을 것에 대해 도전하셨습니다. 주님의 도전에 반응하기 시작하면서 저는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내 안에 있는 풍랑들을 주님께서 잠잠하게 하시는 것을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감정의 기복은 조금씩 줄어들기 시작했습니다. 환경과 사람들의 말에 조금씩 덜 영향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아직도 많이 부족하지만 주님의 말씀이 내 속에 들어올 때 그 말씀이 나를 견고하게 하는 것을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그분의 말씀이 나를 요동하지 않게 한다는 것을 경험하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아직도 더 성장하고 싶고 더 성숙해져야 할 필요성을 많이 느낍니다. 하지만 여러분에게 자신 있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부탁을 드립니다. 그것은 말씀으로 돌아오십시오.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돌아오십시오. 예수님의 도우심을 구하십시오. 예수님은 충분히 여러분을 도우셔서 여러분이 성장할 수 있도록, 그리고 성숙하도록 도우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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