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회복학교

회복(40)-제자도

등불지기 2012. 3. 10. 21:53

 

 

그리스도인의 삶의 회복, 영성의 회복은 다름 아니라 제자도의 회복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처음부터 제자도를 말하지 않았던 것은 처음부터 제자의 길을 가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 역시 제자의 길을 가기 위해 3년 동안이나 예수님과 동고동락하면서 보고 배우며 훈련받았던 것입니다.

사랑하고 축복합니다.

김광락 선교사 올림.

 

제자의 길

 

마16:24

 

지난번 영적 성숙에 관해 여러분에게 말씀드린 내용을 기억하고 있나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은 영적 성장과 성숙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것, 이것이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 아버지의 뜻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늘 무엇이 되고, 무엇을 하고, 무엇을 갖는 것에 대해 마음을 씁니다. 예를 들어, 결혼을 하느냐, 직장을 들어가느냐, 내가 하고 싶은 것, 내게 적합한 일, 내가 가야 할 길, 등등.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것에 대해서 언제 하번이라도 진지하게 마음을 쓴 적이 있습니까?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대로 생각해본 적이 있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 가지는 생각이 나름대로 그럴듯하지만 그 생각이 과연 우리를 향하신 그분의 생각과 일치하는지 진지하게 생각해보았습니까? 그렇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그분을 향해 자라가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최고의 목표이자 최대 소원이어야 합니다. 우리 자신의 삶을 향한 방향과 목적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그것과 일치해야 합니다. 그래서 오늘은 우리가 진정 소망하는 그분, 우리가 진정 닮아가야 할 그분, 우리의 모든 비전의 핵심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닮기 위해 우리가 가야 할 길, 다시 말해서 제자도에 관해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다시 한 번 우리 삶의 목표에 대해서 잊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우리의 최종 목표는 예수 그리스도와 같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닮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향해 부단히 자라가는 것입니다. 목사가 되고, 선교사가 되고, 사장이 되고, 남편과 아내가 되고 하는 것은 그것과 비교해볼 때 빛을 잃는 것입니다. 제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이해하십니까? 제가 주중에 하는 사역은 예수제자훈련학교에서 전임간사로 섬기는 것입니다. 이번 스쿨에도 입학금 130만원을 내고 15명의 학생들이 들어와서 직장생활과 가정생활을 하면서 DTS훈련을 받고 있습니다. 그런데 입학하는 분들의 동기는 저마다 다릅니다. 어떤 분은 내면의 상처가 치유되기 원해서 들어옵니다. 또 어떤 분들은 정말 싫은데 부모님에게 떠밀려서 들어오기도 합니다. 어떤 분들은 은혜를 체험하기 위해서 들어오기도 합니다. 그런데 내가 예수님을 닮아가기 위해서 들어오고 싶다는 분들은 거의 없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법을 배우기 위해서 입학한 분들은 많지 않습니다. 대부분의 동기는 자기중심적입니다. 내가 이렇게 변화되고, 내가 이런 문제가 해결되고, 내가 이런 은혜를 체험하고 싶고, 라는 식입니다. 그런 분들에게 말씀드리는 것은 치유받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내 소원을 성취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뒤따라 살아가는 것입니다.

나의 삶을 돌아보면 나 역시도 그랬습니다. 솔직히 나도 목사가 되기 위해 공부했고, 교회를 잘 섬기기 위해서 이 것 저 것 훈련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닮고 싶다든가, 혹은 주님을 잘 따르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은 거의 해본 적이 없는 것 같습니다. 제가 이 말씀을 여러분과 나누는 것은 나 자신이 다시 한 번 이 고귀하고 높은 목표를 다시 한 번 마음에 새기기 위함인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닮는 자로서 사는 것,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로 사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고 싶습니다. 그러나 저는 복음서를 보면서 한 가지 발견하게 되는 것은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랐지만 그러나 예수님을 따르는 일에 성공한 사람은 많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그렇습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을 따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예수님을 따르지는 못합니다. 예수님을 따르기를 원하는 사람은 많지만 실제로 예수님을 따르는 삶을 사는 사람은 결코 많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어떤 분이 헌신의 단계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 것이 생각납니다. 첫째는 이것입니다. “주님이 나에게 이것을 해주시기 전에는 나는 결코 주님을 따르지 않을거야.” 둘째는 이것입니다. “내가 주님을 따르겠지만 그에 대한 보상으로 이것을 해주셔야 해.” 셋째는 이것입니다. “내가 어떤 보상이나 결과가 없더라도 나는 주님을 따를거야.” 여러분은 지금 어느 단계의 헌신에 머물러 있습니까? 혹시 “내가 왜 그분을 따라야 해? 나는 내 마음대로 살거야.”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와 어떤 관계에 있습니까? 내 마음대로, 내 생각대로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아니면 주님을 따른다고 하지만 내 생각대로 그분이 이루어주기를 기대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오늘 읽은 한 절 말씀 속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로 살려면 어떤 길로 가야 하는지, 그분의 제자가 되기 위해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 세 가지를 말씀해주고 계십니다. 첫째는 자신을 부인하는 것이고, 둘째는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셋째는 그분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오늘은 첫째와 둘째 두 가지만 나누겠습니다. 첫째, 예수님의 제자가 되려면 자신을 부인해야만 합니다. 그러면 자신을 부인하는 것이 어떤 것일까요? 사람에게는 누구나 기본적인 욕구를 가지고 있습니다. 미국의 심리학자인 A.H.Maslow란 사람은 인간의 욕구를 5단계로 분류하고 있습니다. 사람은 낮은 단계의 욕구를 충족시키면 높은 단계의 욕구를 충족시키려고 한다는 이론입니다. ① 생리적(본능 충족과 의식주 해결) 욕구. ② 안전(안정을 위한) 욕구. ③ 함께(사회계층에 참여) 하려는 욕구. ④ 존경(인정과 존중)받고 싶은 욕구, ⑤ 자기실현(자아 완성)의 욕구라는 것입니다. 저는 이러한 이론에 대해 별로 찬성하는 편은 아니지만 적어도 사람들을 이해하는데 조금은 도움을 준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면에서 오늘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인 “나를 따르려면 먼저 자기 자신을 부인해야 한다.”는 말씀도 조금은 이해할 수 있도록 해준다고 생각합니다. 자신을 부인하라는 말씀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모든 욕구를 부정하라는 말씀이 결코 아닙니다. 심리학자의 용어를 굳이 빌자면 네 번째와 다섯 번째의 욕구를 부정하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꼭 그렇게 보기엔 어려움이 있습니다. 그래서 말씀을 중심으로 좀 더 살펴볼 필요가 있는 겁니다.

요한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 그러나 너희가 영생을 얻기 위하여 내게 오기를 원하지 아니하는도다. 나는 사람에게 영광을 취하지 아니하노라. 다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너희 속에 없음을 알았노라. 나는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왔으매 너희가 영접지 아니하나 만일 다른 사람이 자기 이름으로 오면 영접하리라. 너희가 서로 영광을 취하고 유일하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광은 구하지 아니하니 어찌 나를 믿을 수 있느냐.”(요5:39-44)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지 못하는 이유에 대해서 예수님은 어떻게 말씀하셨는가를 보십시오. 사람들은 둘 중에 하나라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사람의 영광을 구합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영광을 구합니다. 예수님을 믿으려고 하면서도 안 되는 이유, 예수님을 따르고자 하지만 안 되는 이유는 사람의 영광을 구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사람이 가지고 있는 욕구 중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물리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자신을 돋보이고 싶은 욕구, 사람들로부터 칭찬과 영광을 받고 싶은 욕구인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이것을 부인하지 않고서는 자신을 따를 수 없을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을 영화롭게 하고 싶은 욕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주님을 믿고 따르면서도 그 욕망을 쉽게 포기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주님의 말씀은 이것입니다. 주님의 도움을 빌어서 나 자신을 영화롭게 하려는 욕망을 부정하지 않으면 주님을 따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읽은 말씀이 어떤 문맥 속에 있는지를 한번 보십시오. 베드로는 굉장히 우쭐해 있습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고 고백했을 때 베드로가 예수님으로부터 칭찬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마16:17-19) 이 정도 칭찬이만 베드로의 마음이 굉장히 우쭐해졌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 말씀을 하신 직후에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그리스도임을 분명히 하시면서 자신이 고난을 받게 될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21절을 보세요. “이 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 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가르치시니” 예수님께서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아야 한다고 가르치신 것은 처음이었습니다. 당시 어느 제자도, 어떤 유대인도 그리스도가 고난을 당한다는 것은 생각지도 못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그런 일을 당하지 않도록 하겠다고 나서게 되었습니다. 그 순간 예수님은 베드로를 돌아보시면서 무서운 책망을 하셨습니다.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23절) 그런 다음에 예수님은 오늘 읽은 말씀을 주셨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자신을 부인하라는 말씀은 어떤 의미인지 깨달을 수 있습니다. 베드로가 부인하지 못한 것은 무엇이었습니까? 베드로는 자신을 부인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자신을 부인하지 못한 베드로는 훗날 주님을 부인하는 자리까지 가고 말았습니다. 이것은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을 부인하지 못하면 주님을 부인하는 자리에 가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을 따른다고 하지만 주님을 부인하는 자리까지 간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자신을 부인하는 것에 대해서 정확하게 배우고 또한 삶 속에 적용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결코 엑서세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생명에 관련된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한 번 생각해봅시다. 자신을 부인하는 것이 도대체 어떤 것일까요? 베드로가 부인하지 못한 것은 어떤 것입니까? 베드로는 그리스도가 고난 받는 것을 믿지 못했습니다. 베드로는 그리스도를 통해 자신이 영광을 누리게 될 것을 믿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고난 받으신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면 자신을 부인하는 것이 무엇인지 도무지 알 수 없을 것입니다. 자신을 부인하는 것이란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기로 작정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는다고 말하지만 예수님의 고난에 동참하려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오늘날 조국교회의 문제는 바로 이것입니다. 자신을 부인하지 못하기 때문에 생기는 것입니다. 자신을 부인하는 것에 대해서 주님께서 쉽게 부연설명해주셨습니다.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다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25,26절) 베드로는 자기 목숨을 잃기 위해서 예수님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베드로는 무엇인가를 얻기 위해서 예수님을 뒤따른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 우리에게도 심각하게 중요합니다. 오늘 우리는 무엇을 얻기 위해서 예수님을 믿습니까? 아니면 소중한 것을 잃기 위해서 예수님을 믿습니까? 예수님을 따랐던 많은 사람들이 있었지만 저마다 동기는 달랐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배고픔을 해결하기 위해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병을 치유하기 위해서 따랐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기적을 보기 위해서 따랐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예루살렘에서 한 자리 차지하기 위해서 따랐습니다. 순수한 목적으로, 단지 주님의 베푸신 은혜에 감사하여 사랑하는 마음으로 따랐던 사람들은 매우 소수였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동기를 한번 점검해보기 원합니다. 우리는 어떤 동기로 예수님을 믿습니까? 어떤 동기로 교회에 나옵니까? 우리의 동기와 우리의 마음이 예수 그리스도 그분의 동기와 그분의 목적과 일치합니까?

자기를 부인한다는 것은 자기 생각을 내려놓고 그리스도 예수님 그분의 생각을 취하는 것입니다. 자기를 부인하는 것은 내 생각과 그분의 생각이 일치하는지 점검하는 것입니다. 자기를 부인하는 것은 내 생각과 그분의 생각을 일치시키는 것입니다. 자기를 부인하는 것은 내가 사람들로부터 영광을 구하지 않기로 결정하는 것입니다. 자기를 부인하는 것은 사람들로부터 칭찬과 인정받는 것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자기를 부인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기로 결정하는 것입니다. 제가 목사가 되려고 결심한 때는 중학교 2학년 때입니다. 그때가 1980년도입니다. 그러나 점점 세월이 흐르고 신학대학원에 입학하고 전도사와 강도사와 목사로서 교회를 섬기면서 제 안에 야망 같은 것이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나도 모르게 사람들로부터 인정받기 위해 몸부림치는 내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한 모습을 최근에야 보게 되었을 때 제 마음은 얼마나 아프고 아팠는지 모릅니다. 내가 주님을 사랑한다고 말은 하지만 실제로는 주님으로부터 오는 영광을 구한 것이 아니고 사람들로부터 오는 영광을 구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났을 때만 해도 주님의 고난에 기쁨으로 동참하겠다고 기도를 했지만 그러나 점점 내 마음은 무엇인가를 얻기 위해, 성취하기 위해, 자아를 실현하기 위해, 과시하기 위해, 사람들로부터 인정받고 영광을 얻기 위해 애쓰게 되고 만 것입니다. 내가 발견한 내 모습은 주님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내 야망을 위해 주님을 이끌려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저의 실패를 통해 배운 교훈이 오늘 이 말씀입니다. 우리는 주님을 따라야 합니다. 우리가 주님을 이끌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주님을 신뢰하여야 합니다. 우리가 주님을 이용하려고 하면 안 됩니다. 베드로는 자신이 주님을 이용하려고 한다는 것을 전혀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단이 그에게 틈 탄 것입니다.

이제 두 번째 제자의 길을 살펴보겠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따르기 위해 우리는 우리 자신의 십자가를 져야 합니다.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오늘날 십자가의 의미는 너무나 왜곡되어져있습니다. 십자가는 장신구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또 십자가는 피할 수 없는 운명이나 체념을 의미하는 단어로 퇴색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면 십자가는 어떤 의미입니까? 우리의 십자가는 무엇입니까? 먼저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십자가는 어떤 의미인지 물어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에게 십자가는 하나님의 뜻이었고 사명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기 위해서 이 땅에 오신 분이십니다. 어떤 엉터리 신학자들의 주장처럼 예수님은 어쩔 수 없이 십자가를 지신 것이 결코 아니었습니다. 십자가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시기 전부터 아들에게 요구하신 뜻이었습니다. 아들이신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알고 있었고, 기꺼이 그 뜻을 이루기를 원하셨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십자가였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에게 있는 십자가는 무엇일까요? 나의 십자가를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이렇게 물어보십시오. 나를 향하신 하나님 아버지의 뜻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고 있습니까? 내가 이루어드려야 할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한다면 결코 예수님을 따라가는 삶을 살 수 없다고 자신 있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저는 어떤 분이 어떤 사람을 무척 어려워하고 미워하면서도 그 사람과 함께 생활하는 것, 함께 일하는 것을 자신에게 주어진 ‘십자가’로 이야기하는 것을 들어보았습니다. 여러분 제가 말씀드리는 것은 그러한 것이 오늘 주님께서 말씀하신 ‘자기 십자가를 지라’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라는 말씀은 결코 그런 뜻이 아닙니다. 피하고 싶지만 피할 수 없는 어떤 의무나 부담감을 견디라는 뜻으로 주신 말씀이 결코 아닙니다. 그것은 자기 십자가를 지라는 말씀을 오해하는 것입니다. 어쩌면 그렇게 말하는 분이 져야 할 십자가는 ‘용서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 ‘십자가’는 삶에 어려운 일들을 피하고 싶은데 피할 수 없을 때 사용하는 단어가 아닙니다. ‘십자가’는 내가 순종해야 할 ‘하나님의 뜻’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기 십자가를 지라’는 말씀은 하나님의 뜻에 기꺼이 순종하겠다는 결심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에게 십자가는 하나님 아버지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었기 때문에 순종하셨듯이 오늘 우리는 하나님의 뜻이라면 어떤 대가를 지불하고서라도 순종하고자 할 때 우리는 우리의 십자가를 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각자 십자가를 지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고 있습니까? 무슨 대가를 지불하고서라도 하나님의 뜻을 이룰 결심이 서 있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자기 십자가를 지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내가 순종해야 할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는 것이 최우선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우리 각자를 향하신 그분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을 발견할 수 있을까요? 그것은 오직 기도와 묵상을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다른 방법으로는 결코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없습니다. 제자들 중 어느 누구도 십자가를 지는 것이 예수님을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었고, 또 예수님이 그 뜻을 이루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향하여 가고 계신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습니다. 제자들은 하나님의 뜻을 전혀 알지 못한 상태에서 몸만 예수님을 따라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아이러니가 오늘 우리 삶에 있을 수 있습니다. 내가 교회에 나오고, 교회에서 봉사도 하고, 교회에서 칭찬과 인정도 받지만 자신을 향하신 하나님의 뜻, 자신이 순종해야 할 하나님의 뜻을 전혀 알지 못한 채 무조건 자기 생각으로 열심히 살아가는 분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기도해야 합니다. “주님,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가르쳐주십시오. 내가 그 뜻을 이루어드리겠습니다.” 우리는 성령의 도우심이 아니면 결코 하나님의 뜻을 발견할 수 없는 존재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의 뜻을 내 마음에 계시하여 달라고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해야 합니다. 성경은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생각이 충분하게 계시되어 있는 보배로운 책입니다. 우리 가운데 성경을 읽고 묵상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너무나 기쁘고 감사한 일입니다. 그러나 다시 한 번 강조하는 것은 성경을 읽으면서 하나님의 생각을 읽어야 합니다. 글자를 읽으면서 하나님의 생각, 하나님의 마음을 읽을 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어렵다구요? 이렇게 해보십시오. 성경은 마치 연애편지를 읽는 것처럼 하면 쉽습니다. 성경은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마음을 담은 연애편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이 책을 읽는다면 충분히 성령의 도움을 받아 하나님의 선하신 생각을 알 수 있습니다. 성경을 읽어가면서 부단히 이렇게 물어보십시오. “여기서 하나님은 어떤 분일까?” “여기서 하나님의 생각은 무엇일까?” “여기서 하나님의 마음은 어떻게 나타나는가?” 예를 들어, 창세기 1장에서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천지만물을 창조하실 때 “하나님은 어떤 생각으로 이렇게 하신걸까?” 창세기 12장에서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 “하나님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아브라함을 부르신걸까?” 끊임없이 물어보아야 합니다. “하나님, 그분은 어떤 분일까?” 이런 질문을 늘 가슴에 품고서 성경을 읽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성령의 내적인 음성을 듣는 놀라운 경험을 하게 됩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에 대해서 배웠습니다. 주님은 자신을 따르기 위해서는 자신을 부인해야 하고, 자기 십자가를 져야 한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입니까? 나는 세상의 빛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입니까? 나는 무엇을 이루기 위해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까? 나는 무엇을 얻기 위해서 신앙생활하는 것입니까? 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기를 원합니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 그분의 고난에 동참하기를 원합니다. 그분 때문에 내가 가진 소중한 것을 잃어버리기 원합니다. 왜냐면 그것은 잃는 것이 아니라 얻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다니지만 예수님의 받으신 고난에 동참하는 것을 싫어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오늘날 교회가 세상에서 영향력을 잃어가는 주된 이유입니다. 더 가지려고, 더 이루려고, 발버둥치는 한 우리는 결코 세상을 변화시킬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대신 주님을 위해 무엇인가 버려야 합니다. 포기해야 합니다. 자아를 깨뜨려야 합니다. 사람들로부터 칭찬받고 인정받을 욕구를 부정해야 합니다. 나 자신을 영화롭게 하려는 욕망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그리고 어떤 상황에 있든지 하나님의 뜻에 집중해야 합니다. 자기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다름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살겠노라고 결심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럴 때 예수 그리스도의 진정한 제자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방법으로 하나님 자신의 영광으로 입혀주실 것입니다. 우리 자신에게 스스로 물어봅시다. 나는 제자입니까? 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고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권리포기하고 하늘에서 지상으로 내려오셨듯이 오늘 우리는 권리포기의 정신을 따라 살아가고 있습니까? 내려오려고 하기는 커녕 올라가려고 하지는 않습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다가오실 때 취하셨던 그러한 방식이 오늘 우리의 삶에 나타나고 있습니까? 그럴 때만이 우리는 비로소 그의 제자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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