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인의 삶, 회복된 삶, 회복된 영성이란 다름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뒤따라는 삶입니다.
제자도에 대해 한번 더 배워봅시다.
김광락 선교사 올림.
예수님을 따르는 삶
요12:26
지난 시간에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기 위해 어떤 과정을 거쳐야 하는지에 대해서 말씀을 함께 나누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16:24)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과정은 3가지 단계를 거쳐야 합니다. 첫째는 자기를 부인하는 것입니다. 자기를 부인한다는 것은 자기 생각을 내려놓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내 야망을 성취하려는 생각을 내려놓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능력을 빌어서 사람들로부터 인정받고 칭찬받고자 하는 욕구가 있다면 기꺼이 그것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자아를 실현하고자 하는 의도를 포기하는 것입니다. 베드로를 비롯한 많은 제자들은 자기를 부인하지 못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결국 주님을 부인하는 자리까지 가고 말았던 것입니다. 자기를 부인하지 못하면 주님을 부인하게 되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끝까지 따라가면 자신들이 원하는 무엇인가를 성취할 줄로 믿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예루살렘에서 부귀영화를 이룰 것을 믿었습니다. 하나님 나라에서 자신들이 놀라운 지위와 명예를 얻게 될 것을 굳게 믿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을 부인하지 못했습니다. 이처럼 오늘날도 교회 안에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을 섬기고 있지만 자신을 부인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헌신과 봉사에 대한 대가를 톡톡히 지불하여주실 주님을 굳게 신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자신들이 자기를 부인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감지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지난번에 말씀드렸듯이 주님께 헌신된 사람일수록 자신을 부인하지 못할 경우가 더 많습니다. 그들은 이렇게 생각합니다. “내가 이처럼 주님을 섬기고 봉사했으니 적어도 이 정도는 해주실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온전한 헌신이 아니죠. 참 헌신이란 주님을 따르는 것 자체가 즐거움이고 행복이어야 합니다. 어떤 조건이나 기대감이나 목적을 가지고 주님을 따른다면 그것은 온전한 헌신일 수 없습니다. 온전한 헌신이란 자기를 부인할 때 비로소 가능한 것입니다.
자기를 부인하는 것! 오늘날 교회 안에서 이 말은 참으로 오해받고 있는 말씀 중에 하나입니다. 이 말씀에 대한 무지와 오해는 교회 안에서 매우 광범위하게 퍼져 있습니다. 가장 큰 오해는 자기를 미워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예수님 자신을 따르기 위해서 우리가 자기 자신을 미워해야 한다고 가르치신 적이 결코 없습니다. 자기를 미워하는 것이 자기를 부인하는 것처럼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자기를 미워하는 것과 자기를 부인하는 것은 별개임을 알아야 합니다. 자기를 미워하는 것으로 오해하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자기를 미워하게 되면 자기를 학대하고 핍박하고 괴롭히게 됩니다. 이러한 자기 학대는 주님의 뜻이 아닙니다. 자기를 미워하는 것이 자기를 부인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왜냐면 자기를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은 결코 다른 사람도 사랑하지 못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이웃을 자기 몸처럼 사랑하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자기 자신을 이해하지 못하면 다른 사람을 이해하지 못하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기를 미워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원만한 관계를 이루지 못하는 고통을 겪게 됩니다.
요즘 젊은 청년들이 많이 읽는 책 중에 하나가 [심리학에 물든 부족한 기독교]란 책입니다. 유명한 목사님의 아들이 쓴 책입니다. 이 책은 기독교가 심리학에 많은 영향을 받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래서 각성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 책에서는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 곧 죄라는 가정 하에서 논리를 펼치고 있습니다. 저는 이 책을 통해 오늘날 기독교가 각성해야 할 부분이 있다고 봅니다. 예를 들어, 적극적 사고방식의 경우 위험한 부분이 있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저는 이 책이 약간 좁은 시각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자기를 사랑하는 것은 죄라는 인식에서 모든 것을 바라보기 때문에 너무 극단적인 보수성을 띌 수밖에 없다고 봅니다. 예를 들어 이 책에서는 내적치유란 칼 융의 심리학 이론을 이용한 것이라고 비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상한 마음을 치유하는데 관심이 많으신 분이란 사실을 놓쳐 버립니다. 마음의 쓴 뿌리를 치유하는 것이 비성경적입니까? 저는 아니라고 봅니다. 문제는 쓴 뿌리에만 집중하면서 더 나아가지 못하는 감정적인 사람이 문제이지 쓴 뿌리를 치유하여서 건강한 속사람으로 회복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까지 매도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자기를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정해놓으신 울타리 안에서는 결코 죄가 아닙니다. 자기를 참으로 사랑하는 것은 오히려 성경은 가르치고 있는 진리입니다. 성경은 우리의 자존감과 정체성과 고귀한 신분에 대해서 얼마나 자주 그리고 많이 말씀하고 있습니까?
또 자기를 부인하는 것에 대해 어떤 오해가 있을까요? 어떤 사람들은 “나”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다시 말해서 ‘자기를 주장하는 것’은 죄라는 것입니다. [구원이란 무엇인가]라는 유명한 책이 있습니다. 꼭 한 번 읽어보기를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가 얻은 구원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에 대해서 매우 명쾌하게 기록한 책입니다. 이 책에서 죄는 곧 자기를 주장하려는 의지(self-assertive will)라고 정의를 내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이 말을 오해합니다. ‘나는’ 혹은 ‘나의’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은 자기를 부인하지 못한 죄성이라고 오해합니다. 그리고 자기감정, 자기 생각을 정직하게 표현하는 것에 대해 스스로 수치심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가 우리의 생각과 감정을 정직하게 표현하는 것을 결코 정죄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성경은 우리가 ‘나’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것에 대해서 금지하거나 터부시하지 않습니다. 자기를 주장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가진 권위를 부정하고 자신의 의나 자신의 논리를 더 우위에 두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정직하게 표현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오히려 우리가 우리의 감정에 대해서 정직할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우리가 더욱 또렷한 자아상을 가질 것에 대해 격려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의 그 유명한 고백을 들어보세요.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2:20절) 사도 바울은 결코 자기 자신을 미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결코 ‘나’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았습니다. 사도행전을 비롯한 그의 서신서를 보면 얼마나 자기주장이 분명한지 우리는 그의 강력한 논증에 압도당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기를 부인하는 것에 대해서 오해하지 않게 되기를 바랍니다. 자기를 부인하는 것은 자기를 미워하거나 자기를 없애버리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생각에 자신의 생각을 일치시키려는 의지와 결단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생각에 내 생각을 맞추려는 시도! 이것이 진정한 자기 부인입니다.
이와 같이 자기 자신을 부인하게 될 때 우리는 비로소 우리의 십자가를 바로 짊어질 수 있게 됩니다. 자신을 부인하지 못하는 사람은 자신의 십자가를 결코 질 수 없습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에 대해서도 많은 오해가 퍼져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자기 십자가를 것에 대해 가장 대표적인 오해는 바로 피할 수 없는 고난과 고통에 대한 체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에 대해 지난번 말씀드렸기 때문에 더 자세히 말씀드리지 않겠습니다. 중요한 것은 다른 사람의 십자가가 아닌 바로 나 자신의 십자가란 사실입니다. 주님은 다른 사람이 져야 할 십자가를 지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다른 사람이 해야 할 일을 내가 대신 떠안고서 이것이 내가 짊어져야 할 십자가라고 말하지 않게 되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에게 있어서 십자가는 예수님이 목숨을 바쳐서 이루어야 할 사명이었고, 이 세상에 그를 보내신 하나님 아버지의 뜻이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져야 할 십자가는 바로 우리가 순종해야 할 하나님 아버지의 뜻이자, 우리가 목숨 바쳐 이루어야 할 사명인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은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온전히 순종하고자 하는 강력한 의지를 말씀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러한 의지를 품고 살아가는 것은 곧 자기 십자가를 지고 가는 것을 뜻합니다.
이제 세 번째로 중요한 길이 있는데 그것은 매우 단순하면서도 가장 강력한 말씀입니다. 그것은 주님을 따르라는 말씀입니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나를 따르라!” 여러분은 예수님을 따라가고 있습니까? 예수님을 따르는 삶이란 어떤 것일까요? 먼저, 그것은 주님이 아닌 다른 어떤 것을 따르지 않는 것을 의미합니다. 함께 요한복음 10장 1절에서 5절까지 한번 찾아볼까요?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양의 우리에 문으로 들어가지 아니하고 다른 데로 넘어가는 자는 절도며 강도요 문으로 들어가는 이가 양의 목자라. 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 자기 양을 다 내어놓은 후에 앞서가면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 고로 따라오되 타인의 음성은 알지 못하는 고로 타인을 따르지 아니하고 도리어 도망하느니라.” 이 말씀 속에 주님과 우리의 관계에 대해 중요한 거의 모든 교훈이 담겨 있습니다. 주님을 따른다는 것은 타인의 음성에 반응하지 않는 것입니다. 타인의 음성을 듣고 따라가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은 오직 예수님 한분만을 나의 참 목자로 인정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러분은 주님만을 여러분이 신뢰하고 따라야 할 선한 목자로 여기고 살아갑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주님을 따르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둘째, 주님을 따른다는 것은 주님을 앞서지 않는 것을 의미합니다. 주님이 움직이지 않으면 움직이지 않는 것입니다. 주님이 움직이면 나도 움직이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을 따라가는 삶인 것입니다. 저의 삶을 돌아보면 의외로 많은 부분에 있어서 주님을 앞서려고 했던 모습을 발견해봅니다. 그러다가 큰 낭패를 경험하곤 했습니다. 주님을 앞서는 것이 무엇일까요? 주님을 보고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내 생각을 따라 움직이는 것이겠지요. 주님의 영광, 주님의 임재는 어떤 일을 결정할 때 중요한 문제가 아닌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내 생각인 것입니다. 내 생각이 주님의 임재와 주님의 영광보다 앞설 때가 많았던 것입니다. 그것이 주님을 앞서는 것입니다. 그저 눈앞에 펼쳐진 초장을 바라보면서 나아가다보면 목자를 놓쳐버리고 길을 잃게 되는 것이지요. 우리 자신의 삶을 한번 돌아보기 원합니다. 나는 무엇을 결정할 때 주님의 임재와 영광을 중요하게 생각하는가, 아니면 내 생각과 감정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가? 중요한 결정에 있어서 결정적인 영향을 주는 것은 주님의 임재인가, 아니면 내 생각인가?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주님을 따르기 위해서는 연습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끊임없이 우리 자신을 돌아보고 점검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지금 나는 무엇을 바라보고 나아가는가? 주님을 바라보고 나아가는가, 아니면 초장을 바라보고 나아가는가? 아브라함의 조카 롯은 소돔과 고모라 땅의 푸르고 푸른 초장을 바라보고 나아갔던 것처럼 나도 세상의 영광, 이생의 자랑,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을 따라 나아가지는 않는가? 아니면 하나님의 약속, 하나님의 임재,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면서 묵묵히 약속의 땅에, 비록 푸르고 푸른 초장은 아니었지만 하나님이 함께 거하시는 땅에 머물렀던 아브라함처럼 나아가고 있는가? 이렇게 자신을 점검해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셋째로, 우리가 주님을 따른다는 것은 주님의 음성을 듣는 것입니다. 이것은 너무나도 자명하고 명확한 진리입니다. 양이 목자의 음성을 듣는 것은 특별한 일이 결코 아닙니다. 그것은 일상적인 일입니다. 그것은 놀라운 일도 아닙니다. 그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참되신 목자로 모시고 살아간다면 우리가 그분의 음성을 듣지 않고 살아간다는 것은 거의 기적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주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고 주님을 따라갈 수 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까? 주님의 음성을 듣지 못한다면 주님을 따라가는 것은 결코 불가능할 것입니다. 양의 목자의 음성을 듣습니다! 목자의 음성을 듣지 못한다면 양이 아닐 것입니다. 저희 집 아이들이 너무나 잘 아는 동화가 있습니다. 그것은 늑대와 양 이야기입니다. 어느 날 양이 살던 집에 엄마가 집을 잠시 비우면서 새끼양들에게 신신당부를 하기를 누가 문을 열어달라고 해도 절대로 열어주지 말라고 합니다. 그런데 엄마양이 외출한 것을 본 늑대가 문에 살금살금 다가가서 엄마니까 문을 열어달라고 하지요. 그런데 양들은 대문 밑으로 슬쩍 보니 늑대의 발이란 것을 알고 문을 열어주지 않았답니다. 그 사실을 안 늑대는 자기 발에다 밀가루를 가득 묻혀서 다시 대문으로 다가갔습니다. 그러더니 “엄마다. 문열어다오.”라고 했습니다. 양들은 문 밑으로 쳐다보고서 엄마 양인 줄 알고 문을 열어주었다가 한 마리만 빼고 다 잡아먹혔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늑대가 배불러서 잠든 순간에 나머지 한 마리 양이란 엄마양이란 힘을 합쳐서 늑대의 배를 가르고 그 배에다가 돌을 가득 채웠다는 그런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를 우리 아이들은 매우 그럴 듯하게 믿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퇴근하여 대문에 서서 초인종을 누르고 목소리를 바꾸어서 이상한 사람의 흉내를 내보았습니다. 그랬더니 아이들은 깔깔대면서 하는 말이 이것입니다. “아빠인줄 다 알아!” 그 동화의 문제가 무엇일까요? 양들은 시력이 너무 나쁘다는 사실을 모르는 것입니다. 그리고 양들은 귀가 매우 발달되어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만든 이야기란 사실입니다. 양들은 누가 목자인지 자기 눈으로 보고서 판단하지 않습니다. 양들은 자기 귀로 듣고 판단을 내립니다. 이 사실은 오늘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교훈을 가져다줍니다. 우리는 너무나 보는 것에 익숙합니다. 우리 눈에 무엇인가 보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임재, 하나님의 영광은 우리 눈에 보여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님을 보고 따라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주님의 음성을 듣고 따라가는 존재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주님이 함께 하시는 것을 눈으로 보고 확인합니까? 아니면 귀로 듣고 확인합니까?
우리가 제자의 삶이란 주님을 뒤따라가는 삶이라고 한다면 저는 단호하게 주님의 음성을 듣는 삶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주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고 주님을 따른다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지요. 주님의 음성을 어떻게 듣고, 어떻게 분별하는가에 대해서는 다음에 따로 이야기하도록 합시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 집중해 봅시다.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거기 있으리니 사람이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저를 귀히 여기시리라.” 저는 오늘 읽은 이 말씀을 너무 좋아합니다. 주님을 따르는 자들은 어떤 자들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예. “주님을 섬기려는 자들”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주님을 통해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를 원하는 마음으로 주님을 따르기도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주님을 신실하게 따른다면 어떤 놀라운 대가를 얻게 될 것이란 기대감 때문에 따르기도 합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에서 놀라운 한 가지 사실을 발견하게 되는 것은 이것입니다. “주님을 따라가려고 하는 사람은 주님을 섬기려는 사람이다!”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주님을 섬기기위해 주님을 따라가야 합니다. 주님을 섬긴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섬긴다는 말은 필요를 채우는 것을 의미하지요? 그렇다면 주님을 섬긴다는 것은 주님의 필요를 늘 헤아리고 어떻게 하면 주님의 필요를 채울 수 있을 것인가 고민하는 것을 의미할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그렇고, 오늘날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주님의 필요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오로지 관심을 갖는 것은 자신의 필요입니다. 내 필요를 주님이 어떻게 채우실 것인가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주님을 뒤따랐습니다. 그러나 진정 주님의 필요에 관심을 가지고 주님의 그 필요를 채우고자 하는 열망으로 주님을 따르는 사람은 매우 적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어떤가요? 우리는 주님을 섬기는데 관심이 있습니까? 주님의 필요에 관심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주님을 섬기는 것에 대해 좀 더 생각해봅시다. 주님을 섬긴다는 것이 주님의 필요를 채우는 것이라면 주님의 필요란 도대체 무엇일까요? 주님은 무엇을 필요로 하실까요? 오늘 읽은 말씀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주님이 계신 곳에 나도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주님과 함께 하는 것이 곧 주님의 필요입니다. 여러분은 신약성경에서 ‘섬김’이란 단어가 ‘예배’란 말로 사용되었다는 것을 알고 계십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섬긴다는 것은 하나님을 예배한다는 말과 같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 머물러 있는 것 자체가 주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좀 더 쉽게 말해서 주님과 함께 하는 것, 주님 안에 거하는 것, 주님과의 친밀한 교제 안에서 살아가는 것 자체가 주님이 간절히 필요로 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4장을 보면 사마리아 수가성의 한 여인의 증거하는 말을 듣고 온 동네 사람들이 예수님께 나아오게 됩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자기들의 삶 한 가운데로 초청하고자 했습니다. 바로 그 순간 예수님은 자신이 진정 필요로 하는 참 양식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주님과 함께 있기를 원하기만 해도 주님의 간절한 필요는 채워진다는 이 놀라운 사실을 믿고 계십니까? 우리가 우리 삶의 현장 한 가운데 주님을 초청하기만 해도 주님은 기뻐하신다는 사실을 알고 계십니까? 주님이 저와 여러분을 향하고 가지고 계시는 간절한 필요, 그리고 소원이 있다면 주님과 함께 머무는 삶, 주님과 교제하는 삶입니다. 내가 주님을 위해 무엇을 하는 것, 무엇을 성취하는 것, 무엇을 갖게 되는 것은 주님의 필요와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주님과 함께 있는 것이 곧 주님의 필요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과 함께 할 때 주님의 부드럽고 세밀한 음성은 자연스럽게 들리는 것입니다. 주님의 음성을 듣는 것은 결코 어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시켜서는 안 될 것입니다. 주님의 음성을 듣는 것은 주님과 인격적인 사귐을 갖게 될 때 자연스럽게 따라나오는 열매이기 때문입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주님의 음성을 듣는 삶에 대해 오해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다음에 좀 더 자세히 다루기를 원합니다. 다만 이것을 분명히 하고서 오늘 말씀을 마치고 싶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섬기기 위해 주님을 따른다면, 우리가 주님의 마음에 있는 필요를 알고 그 필요를 채우기 위해 주님을 따르기로 한다면 사랑하는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신 하나님 아버지께서 바로 그런 사람을 귀하게 여기실 것이란 사실입니다. 주님을 신실하게 따르는 제자들이 얻을 수 있는 최고의 상급이 있다면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귀하게 여기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영광으로 입혀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존귀, 그리고 영광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신실한 제자들에게 주어지는 영원한 상급이 될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바로 그러한 삶을 소망하는 것입니다. 하늘의 아버지께서 귀하게 여기시는 바로 그런 인생, 그런 삶을 살게 되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신실하게 뒤따라가는 사람은 이처럼 존귀한 것입니다. 바로 그런 존귀와 영광이 저와 여러분 모두에게 충만하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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