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TS 훈련할 때 이 주제는 두번 째 혹은 세번 째 강의입니다만
저는 제일 나중에 다루려고 노력했습니다.
장로교회에서 자란 저로서는 생소한 주제이기도 하고
또 가장 오해가 많고 가장 잘못 적용하고 가장 주의깊게 배워야 할 영역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하나님이심을 알면서도,
실제적으로 나에게 말씀하실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 믿지 않고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이 많습니다.
그리고 설교하는목회자 역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고 하면서
하나님께서 개인적으로 친밀하게 말씀하실 수 있다고 가르치는 것을 두려워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의외로 많은 성도들이 이 주제에 대해 배우기를 열망하고 있습니다.
회복에 대한 제 메시지 중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부분입니다.
함께 배워보실까요?
김광락 선교사 올림.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삶
본문: 계2:17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살면서 서로 말하지 않는 모습을 그려보는 것만큼 어색한 것은 없을 것입니다. 혹은 한 편에서만 계속 말하고 다른 편에서는 듣지 않는 것처럼 행동하는 것처럼 답답하고 불행한 그림은 또 없을 것입니다. 이와같이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동행한다고 할 때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는 것 역시 불가능한 그림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을 보면 이런 그림이 그려집니다. 하나님은 그를 사랑하셔서 계속 말씀하시는데도 그는 하나님이 어디에 계시는가라고 하소연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여기서 저는 신앙생활의 가장 중요하면서 가장 기본적인 것 한 가지에 대해서 여러분과 함께 나누기 원합니다. 그것은 신앙생활의 본질에 관한 것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인의 삶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삶이란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날 스스로 그리스도인이라고 생각하는 많은 분들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에 대해서 오해와 편견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합니까? 우리는 누구입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아닌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아버지의 음성을 듣지 못하고 살아간다면 도대체 무엇이 문제일까요? 또 우리는 어떤 사람들입니까? 우리는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을 따라가는 양떼들입니다. 그런데 목자의 음성을 듣지 못한다면 이것은 기적이 아니고 무엇일까요? 또 예수님을 믿는 우리 안에 어떤 분이 계십니까? 우리 안에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이 거하신다는 것을 믿고 있다지만 성령께서 내 안에서 하시는 말씀을 듣지 못한다면 도대체 무엇이 문제일까요? 오늘 저와 여러분을 향하신 우리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은 당신의 인자하시고 부드러운 음성을 그분의 사랑하는 자녀가 된 우리가 듣기를 우리보다 더욱 원하시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당신의 음성을 듣기를 간절히 원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오늘 우리가 헤아리기를 진정 원합니다.
먼저 우리는 우리가 믿는 하나님을 바로 알기를 원합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우리는 진정 어떤 하나님을 믿습니까? 우리는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믿습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인격적인 하나님을 믿습니다. 우리는 팔공산의 돌부처와 같이 불러도 불러도 아무 대답도 없는 그런 하나님을 믿지 않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엎드려 절하는 모든 우상들은 듣는 귀도 없고 말하는 입도 없습니다. 그러나 오늘 많은 교회의 신자들이 하나님을 대할 때 마치 듣지도 말하지도 못하는 하나님인 양 느끼고 생각하면서 신앙생활하고 있는 것같은 생각이 드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들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삶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요? 그것은 매우 특별한 사람, 영적으로 유별난 사람, 혹은 정신적으로 이상한 사람이 듣는 것이 아닌가? 아니면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은 신비주의가 아닌가?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오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불행하게도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삶에 대해서 오해와 편견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여기서부터 시작해볼까요? 오늘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 하는 점입니다. 여러분 자신의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아니, 성경에서 하나님을 어떤 분으로 계시하여 주고 있습니까? 저는 여러분이 창세기 1장부터 읽어보기를 권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어떤 분인가? 이렇게 물어보면서 읽어나가기를 권면합니다. 우리가 창세기 1장부터 계시록 22장까지 두드러지게 발견할 수 있고 그래서 깜짝 놀라야 할 한 가지 사실은 이것입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온 세상을 창조하신 분입니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우리를 구원하신 분입니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온 세상을 새롭게 하실 분입니다. 그리고 지금도 살아계시며 당신의 자녀들에게 사랑으로 말씀하고 계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만약 우리가 말씀하시는 하나님, 인격적인 하나님을 믿는다면 더구나 자녀된 우리가 그분의 음성을 듣는 것은 당연하지 않을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당연하지 않고 이상한 것처럼 인식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 이유를 생각해보기 전에 충분히 확인해봅시다.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이 당연한 일이며 또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란 사실에 대해서 말입니다. 먼저 요한복음 10장 3절에서 5절까지 읽어봅시다. “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 자기 양을 다 내어놓은 후에 앞서가면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 고로 따라오되 타인의 음성은 알지 못하는 고로 타인을 따르지 아니하고 도리어 도망하느니라.” 요한복음 10장 26절과 27절은 또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가 내 양이 아니므로 믿지 아니하는도다.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저희를 알며 저희는 나를 따르느니라.” 예수님께서 여러분의 선한 목자이심을 믿으십니까? 여러분은 주 예수님의 인도하시는 양임을 믿습니까? 그렇다면 그분의 음성을 듣는 것이 삶 속에 있느냐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양이라면 예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이 일상적이어야 당연하지 않습니까? 우리가 그의 양이라면 그의 음성을 듣는 것은 결코 특별한 일이 될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이 ‘기적’이라면 무엇인가 문제가 있다고 봅니다. 우리가 그의 양이므로 그의 음성을 듣는 것은 당연한 것이며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그것이 정상적입니다. 그렇다면 그분의 음성을 듣지 못한다는 것은 분명 정상적인 것이라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그분의 양이 아니라면 그분의 음성을 듣지 못하는 것이 오히려 정상적이고 자연스러울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분의 양이란 것이 사실이라면 그분의 음성을 듣지 못하는 것이 불가능할 것입니다.
자, 그러면 이 문제를 어떻게 풀어가야 할까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각자의 신실한 목자로 여기고 있고, 또한 우리 자신이 그분이 돌보시는 양들임이 분명한데도 우리가 그분의 음성을 듣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 복잡한 문제는 몇 가지로 분석해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우리가 그분의 양이 아니거나, 둘째는 우리가 그분의 양이 맞거나 둘 중의 하나입니다. 전자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양이 아니기 때문에 듣지 못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나 후자의 경우는요? 우리가 그분의 양임에도 그분의 음성을 듣지 못한다면 무엇이 문제일까요? 아마도 그것은 그분의 음성을 듣고 있음에도 우리가 듣지 못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거나 아니면 그분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지 않거나 둘 중에 하나일 것입니다. 여기서 제가 꼭 지적하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음성에 대해 깊고 깊은 오해를 갖게 하는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첫째로 그것은 바로 세계관입니다. 미국의 경우는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조차도 기독교적 세계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서양의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에 대해 그리 어려움을 느끼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고 말하는 것을 들을 때에도 별로 어려움을 느끼지 않습니다. 그러나 동양의 그리스도인들, 특히 한국교회의 그리스도인들의 경우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에 대해서 많은 오해와 편견과 어려움을 갖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샤마니즘적 세계관 때문에 생기는 오해입니다. 무속주의적 세계관, 다시 말해서 무당의 사고방식이 우리 한국 사람의 사고방식의 밑바닥에 깔려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고 말하면 마치 무당을 대하듯이 대합니다. 한국교회 그리스도인들은 무속적 세계관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무당의 사고방식은 문화와 전통과 습관을 통해 나의 무의식 속에 들어와서 자리잡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수 천 년 전부터 무속신앙의 영향을 받아왔습니다. 그래서 무당의 사고방식이 매우 강합니다. 이런 상태에서 복음을 받아들이고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여도 그 전에 무속신앙의 영향을 받은 세계관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것입니다. 무속신앙에서 ‘신의 음성’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한국인이라면 다들 느끼고 인식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한국교회의 성도들은 하나님의 음성에 대해서 마치 무속신앙적인 오해를 갖고 있는 것입니다. 특히 믿지 않은 가정에서, 혹은 나이가 들어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된 사람의 경우, 믿는 가정이라도 친척과 환경이 무속적인 배경이 강한 경우 하나님의 음성에 대해서 오해를 갖게 됩니다. 바로 이것 때문에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에 대해 오해를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살아가면서도 자신은 정작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적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무속적인 방식으로 하나님의 음성을 기대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면서도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삶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세계관의 치유가 먼저 이루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무속적인 세계관을 벗어버리지 못한다면 하나님의 인격적인 음성을 제대로 듣는 것은 평생 연습하고 노력해도 어려울 것입니다. 지금 내 안에 샤마니즘적 영향이 있지 않는지 살펴보십시오. 그렇다면 무속적인 세계관을 어떻게 벗어버릴 수 있을까요? 하나님의 인격성에 대해서 깊이 알아가야 합니다. 인격적인 하나님에 대해서 알아가면 알수록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은 쉬워질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품에 대해 배우십시오. 특히 하나님의 인격성에 대해서 배우십시오. 또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을 방해하는 것 중에 하나가 마음의 쓴뿌리입니다. 마음의 쓴뿌리를 캐내십시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에 대해 오해하는 가장 큰 이유 중에 하나가 마음의 쓴뿌리 때문입니다. 특히 권위자로부터 받은 상처는 하나님의 인격성에 대해 오해하게끔 원수들이 잘 사용하는 도구입니다. 아버지에 대한 상처, 어머니에 대한 상처, 혹은 권위자에 대한 상처가 크면 클수록 하나님에 대해서 오해하게 될 것이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삶은 힘들다고 느껴지게 될 것입니다. 내 안에 무속적인 세계관이 있다는 것은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이렇게 점검해보십시오. 만일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에 대해서 내가 만일 “야, 대단하다!” “오, 놀라운 경험인데!”라는 생각이 든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음성에 대해 무속적인 사고방식을 갖고 있는 증거입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의 사람들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에 대해 결코 대단한 경험인 것처럼 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양이 목자의 음성을 듣는 것은 특별한 일이 아니라 일상적인 삶입니다.
또 한 가지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삶에 대해서 오해하는 이유가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인격성을 알지 못하고 오해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인격적인 분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각 사람에게 말씀하실 때 인격적으로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그 사람에게 맞게 말씀하십니다. 그 사람의 개성과 기질에 따라 적절하게 말씀하십니다. 시각적인 사람에게는 시각적으로 말씀하십니다. 청각적인 사람에게는 청각적으로 말씀하십니다. 직관적인 사람에게는 직관적으로 말씀하십니다. 지성적인 사람에게는 지성적으로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이유는 인격적인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당신이 세우신 영적 권위의 질서를 무시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실 때 스스로 영적질서를 무너뜨리지 않으시는 분입니다. 영적질서를 무시하면서 하나님의 음성이라고 주장하는 것에 현혹당하지 말기를 바랍니다. 또한 사람들이 하나님의 음성에 대해서 오해하고 있는 것은 육신의 소리로 들으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은 육신의 귀로 들을 수 있는 형태로 말씀하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그런 경우는 일반적이지 않습니다. 그런 경우는 초신자의 경우나 매우 특별한 상황에 국한됩니다. 하나님께서 일상적으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방법은 우리의 귀에다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에 말씀하십니다. 더 정확하게 말씀드려서 하나님은 우리의 영이 감지할 수 있도록 영으로 말씀하십니다. 왜냐면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다른 동물과 달리 영을 가진 피조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영으로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음성을 감지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창조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사람에게 생기를 불어넣으시고 생령, 다시 말해서 살아있는 영이 되게 하셨습니다. 그 말이 무엇을 뜻할까요? 사람은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는 존재란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사람은 하나님과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존재입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도록 지음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려면 영으로 하나님 앞에 반응할 줄 알아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내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하여 하나님께 집중할 때 하나님께서는 내 마음에 말씀하심을 경험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특별한 일도, 놀라운 일도, 대단한 일도 결코 아닙니다. 만일 어느 누가 자신이 신령한 사람, 영적인 사람인 것처럼 말하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을 대단한 것인 양 말한다면 그는 무속인의 사고방식을 벗어버리지 못한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것이 특별한 일이고 대단한 체험인 양 말하는 사람을 주의하십시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여러분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원합니까?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을까요? 먼저 내 영이 주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함으로써 살아나야 합니다. 에베소서 2장 1절부터 보시면 허물과 죄로 죽었던 우리를 하나님께서 살리셨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영이 죽은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의 영이 죽었기 때문에 하나님께 대하여 전심으로 집중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의 영이 살아날 때 우리는 비로소 전심으로, 마음으로, 영으로 하나님께 집중할 수 있습니다. 내 영이 살아나야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둘째, 우리가 주님을 섬겨야 합니다. 지난번에도 말씀드렸듯이 섬긴다는 것은 필요를 채운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의 욕구나 필요에 집중하면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없습니다. 내가 하나님이 아닌 다른 어떤 것에 집착하고 있다면 결코 하나님의 음성을 제대로 들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고 해도 그것은 대부분 자기의 생각이지 하나님의 음성이 아닌 것입니다. 우리가 전심으로 하나님의 필요에, 하나님의 뜻에, 하나님의 나라에 집중한다면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우리의 생각인지 하나님의 생각인지 구분하기란 쉽지는 않지만 의외로 간단합니다. 내가 집착하는 것을 내려놓는 것입니다. 만일 내가 하나님보다, 아니 하나님 아닌 다른 것에 집착하는 그것을 내려놓지 않으면 하나님의 음성이 아니라 내 자신의 소리를 듣게 됩니다. 내 소리를 하나님의 음성으로 착각하게 됩니다. 분별의 문제에 관해서는 다음 주에 더 자세하게 다루도록 하지요. 셋째로 우리는 겸손히 하나님께 여쭈어야 합니다. 그리고 경청해야 합니다. 우리는 성경을 읽을 때 하나님의 음성을 잘 들을 수 있습니다. 물론 기도할 때에도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들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을 읽으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연습을 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으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간단합니다. 이렇게 하십시오. 성령을 초청하고, 성령께서 내 옆에 계신 것을 의식하고서, 마치 성령께 질문하는 마음으로 성경을 읽어 내려가는 것입니다. 가장 기본적인 질문의 형태는 이것입니다. “하나님은 어떤 분이실까?” “하나님은 어떤 일을 하시는 분이실까?” 이렇게 질문하는 마음으로 성경을 읽어 내려갈 때 하나님께서 자유롭게 말씀하여 주시는 것을 경험할 것입니다.
만일 하나님의 음성을 더 잘 들으려면 이렇게 하십시오. 하나님과의 거리를 좁히십시오. 하나님과 나 사이에 다른 소리가 끼어들지 않도록 하십시오. 차들이 왔다 갔다 하는 길 건너편에 친구가 큰 소리로 외쳐도 잘 들리지 않는 것은 다른 소음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마음에 여러 가지 소음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음성이 잘 들리지 않습니다. 이것을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지 않는다고 하나님이 내 안에 계시지 않는가? 그건 아니란 것입니다. 하나님은 내 안에 늘 계십니다. 다만 내가 듣지 못할 뿐이지 들리지 않는다고 하나님이 안계시다고 할 수 없습니다. 단지 하나님과 나 사이에 거리가 멀고, 또 온갖 소음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에 내가 듣지 못하는 것이지 하나님은 끊임없이 우리를 향한 당신의 사랑으로 말씀하고 계십니다. 내가 듣지 못한다는 이유로 하나님을 말씀하지 않는 분으로 오해하지 말기를 바랍니다. 많은 분들이 자신이 듣지 못하는 이유로 하나님께서 왜 침묵하시는지 이해하지 못하고 불평하고 원망하고 있는 모습을 봅니다. 하나님과의 거리를 좁힐 생각을 하지 않고 말이죠. 들리지 않는다고 불평하기 전에 먼저 마음의 시끄러운 소음을 잠잠하게 하고 그분과의 거리를 좁히는 것이 우선이 아닐까요? 내 마음에 소음이 가득하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방에 혼자 가만히 앉아서 눈을 감고 있으면 내 마음에 온갖 소음이 들리기 시작할 것입니다. 그래서 그 소음이 싫어서 많은 사람들은 침묵하는 것을 무지 싫어하는 것입니다. 제가 제주 열방대학에서 DTS 훈련을 받을 때 밤 9시부터 10시까지는 침묵의 시간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시간이 되면 무조건 침묵해야 합니다. 그 전까지는 큰 소리로 기도해도 그 시간만 되면 침묵해야 합니다. 기도하지 않는 아이들도 침묵시켜야 합니다. 이와 같은 침묵의 훈련은 참 힘들고 어렵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내 마음의 소리를 잠잠케 하기 위해 꼭 필요한 것입니다. 내 마음의 소리가 잠잠해야만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기 때문입니다. 두 마음을 품고 있는 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 읽은 말씀을 함께 보실까요?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감추었던 만나를 주고 또 흰 돌을 줄 터인데 그 돌 위에 새 이름을 기록한 것이 있나니 믿는 자밖에는 그 이름을 알 사람이 없느니라.” 교회의 머리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몸된 교회들에게 나타나셔서 각각 그 상황과 필요에 따라 말씀해주셨습니다. 모든 교회의 상황은 다르고, 각 교회마다 주신 말씀도 각기 달랐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공통된 말씀을 주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귀 있는 자는 들으라.”는 말씀이었습니다. 모든 교회들에게 주님께서 공통으로 명령하신 유일하신 말씀이 바로 “들으라.”이었습니다. 에베소 교회에게도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라고 하셨습니다. 그럴 때 생명나무의 과실을 주어서 먹게 하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서머나 교회를 향해서도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라고 하셨습니다. 그럴 때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않게 할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두아디라 교회를 향해서도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라고 하셨습니다. 사데교회를 향해서도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라고 하셨습니다. 빌라델비아 교회를 향해서도, 라오디게아 교회를 향해서도 동일하게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라고 명령하십니다. 오늘 버가모 교회를 향해서도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라고 하셨습니다. 그럴 때 약속하신 것이 무엇입니까? 감추었던 만나와 흰 돌을 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고대 그리스 세계에서 검투사들은 자기 이름이 없는 노예였습니다. 그런데 경기장에서 승리하게 된 검투사들은 평생 신분이 보장된 자유인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편안하게 먹고 살 수 있는 양식이 주어졌습니다. 승리한 검투사에게는 자유인이란 신분의 증거로 메달이 주어졌습니다. 바로 새로운 이름이 기록된 흰 돌이었습니다. 그래서 검투사들은 승리하기 위해 피 흘리기까지 싸웠던 것입니다. 승리는 검투사들의 유일한 희망이었습니다. 노예의 신분을 벗어버리고 자유인이 되려면 승리해야 했습니다. 버가모 교회가 위치한 곳은 군사도시로서 이러한 검투사들이 많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시 상황에 맞게 말씀해주신 것입니다. 교회가 영적 전쟁에서 승리하려면 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십시오. 그것이 곧 승리의 비결입니다. 여호수아가 여리고성을 무너뜨리고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주님께 물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승리감에 도취한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묻지 않고 조그만 성 아이성으로 진격해들어갔습니다. 그 결과 이스라엘은 참담한 패배를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묻지도 않고 듣지도 않고 자기 생각대로 행동했다가 실패하고 나서 어떻게 반응합니까? 회개하기는 커녕 오히려 하나님이 왜 안 도와주시냐고 불평하고 원망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의 모습이 아닙니까? 이것은 오늘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큽니다. 들으면 승리하고 듣지 못하면 패하는 것입니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동하고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기대하는 것은 어리석은 것입니다.
오늘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을 너무나 오해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은 “특별한” “대단한” “놀라운” 그리스도인만이 하는 것이거나 “신비한” 그리스도인이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은 일상적으로 듣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또 하나님의 음성은 들을 수도 있고 안들을 수도 있으며 언제나 들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은 내가 중요한 결정을 내릴 시기에, 예를 들어 배우자를 선택하는 문제와 같이 특별할 때 특별하게 기도해야만 들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모두 오해인 것입니다. 이것이 왜 전부 오해일까요? 예, 그렇습니다. 오늘 읽은 본문 말씀에 “들으라!!”고 명령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승리하려면, 우리가 생명나무의 과실을 먹으려면, “들어야만” 한다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신실하신 목자이시고, 우리가 그분의 양이라면 그분의 음성을 듣는 것은 결코 특별한 일이 아니며, 매우 일상적이고,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성경이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그분의 양이 맞습니까? 그렇다면 우리가 그분의 음성을 듣는 것은 결코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그것은 일상적인 것입니다. 결코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놀라운 일인 양 자랑하고 다닐 필요도 전혀 없습니다! 일상적인 일이 특별한 일이 되도록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이 ‘기적’이 되도록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것이 특별한 ‘간증’이 되도록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사랑하고 따르는 우리는 그분의 음성을 듣는 것이 ‘방법’이 되어서는 결코 안 될 것입니다! 예! 그렇습니다! 그것은 너무나 일상적인 일이어서 ‘삶’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분의 음성을 듣는 것은 우리가 마땅히 누릴 특권입니다. 특별한 그리스도인이 누리는 대단한 것으로 생각하지 마십시오. 우리 모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인격적인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이 그리스도인에게는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그것은 기적이나 간증하고 다닐만한 체험이 아닙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목자로 모시고 따라가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항상 일어나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이 일상적인 삶이 되기를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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