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법]이란 제목보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삶]이라고 한 데에는 다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방법]의 측면으로 접근하면 크게 오해할 가능성이 많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와 무당종교가 다른 것은 방법이 아니라 삶을 강조하기 때문입니다.
부디 이 중요한 주제에 관해 오해와 편견이 없기를 바랍니다.
김광락 선교사 올림.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삶(2)
본문: 대하18:4-27
계속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삶에 대해서 말씀을 나누기 원합니다. 지난 시간에 함께 나누었던 말씀은 이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면, 그리고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양이라면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고 또 자연스러운 삶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한다면 놀라운 기적입니다. 교회 나오는 많은 사람들이 성령님을 모시고 살아간다고 믿고 있지만 그러나 성령의 음성을 듣는 것에 대해서는 거의 믿음이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더 나아가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현상에 대해서 거부반응을 보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는 말에 이상한 눈초리를 보냅니다. 그리고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나는 이상한 신비주의와 상종하지 않을거야!” 하지만 제가 말씀드린 것은 그렇게 말하는 사람이나 그렇게 듣고 생각하는 사람이나 세계관에 있어서 심각한 문제가 있을 수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에 대해 심각한 편견이 작용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샤마니즘의 영향이 우리 사고방식에 영향을 주고 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삶에 대해 오해하게 만드는 또 다른 요소가 있는데 그것은 믿는 대로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믿음과 생각이 제각기 따로 작동합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살아계셔서 믿는 자들 가운데서 말씀하신다고 믿고 있지만 실제 생활에서는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또 다른 이유가 있다면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고 이야기하는 어떤 사람들의 삶에 대해서 실망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이런 경우 어떻게 분별하는가에 대해서 살펴볼 것입니다. 아무튼 이러한 이유 등으로 인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에 대해 편견과 오해와 부정적인 인식을 갖게 됩니다. 그러나 성경은 말합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음성을 그 백성들이 듣기를 원하시는 분이십니다. 그 이유는 우리와 인격적으로 교제를 나누기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라고 명령하기까지 합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이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니란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계시록에도 그 명령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이사야 55:3절에도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귀를 기울이고 내게 나아와 들으라. 그리하면 너희 영혼이 살리라. 내가 너희에게 영원한 언약을 세우리니 곧 다윗에게 허락한 확실한 은혜니라.” 또 우리가 사도행전을 읽어보면 하나님께 순종했던 믿음의 사람들은 한결같이 주님의 음성을 들었다는 것을 여러 번 확인할 수 있습니다. 베드로, 바울, 빌립과 같은 분들이 성령이 하시는 음성을 직접 들었습니다. 우리가 복음서를 읽어보면 우리 예수님께서 무엇보다 하나님 아버지의 음성을 들으셨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의 음성을 듣지 않고는 아무 것도 행하지 않기로 결심한 분이셨습니다. 요한복음 12:49,50절을 보세요. “내가 내 자의로 말한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나의 말할 것과 이를 것을 친히 명령하여 주셨으니 나는 그의 명령이 영생인 줄 아노라. 그러므로 나의 이르는 것은 내 아버지께서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이르노라 하시니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신앙생활에 있어서 기본이자 본질적인 경험이 바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삶인데도 불구하고 오늘날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삶에 대해서 교회들마다 가르치지 않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사단이 훼방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삶을 살지 못하도록 온갖 편견과 오해를 갖게 하기 때문입니다. 구더기 무서워서 장 못 담그랴는 속담이 있습니다. 사단이 가장 훼방하고 혼란시키는 영역이라고 해서 피해갈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정면으로 돌파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삶을 제대로 살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교회의 원수인 사단은 이토록 중요한 영역에서 어떻게 혼란을 일으키고 있는 것인지 알 필요가 있습니다. 지피지기면 백전백승이라고 했듯이 원수의 전략을 간파하는 것은 원수의 속임수에 넘어가지 않고 영적으로 승리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입니다. 좀 더 쉽게 말해서 우리가 하나님의 음성인지 아닌지 어떻게 분별할 것인가에 대한 문제입니다. 이것이 내 소리인지, 아니면 하나님의 음성인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이 소리가 사단의 소리인지, 아니면 하나님의 음성인지 어떻게 분간할 수 있을까요? 이 분별의 문제는 매우 간단하고 쉽습니다. 하나님과 인격적인 사귐을 갖는 사람만이 하나님의 음성을 알게 됩니다. 우리가 어떤 사람과 사랑에 빠졌다면 그 사람의 목소리만 들어도 그 사람인지 아닌지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진정 하나님과의 사귐을 맛보았다면 하나님의 음성인지 아닌지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저의 아이들은 제 목소리를 금방 알아차립니다. 제가 목소리를 아무리 변조해도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저를 알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나님을 알아가면 갈수록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은 보다 쉬워질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 하나님과 사귀는 것, 이것이 가장 기본적인 분별의 원칙입니다.
그러나 좀 더 구체적으로 이 분별의 문제를 다루어봅시다. 오늘 읽은 본문 말씀을 여러분이 유심히 읽어보고 묵상해보기를 권면하고 싶습니다. 본문은 특별히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삶을 살기를 원하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읽고 묵상해야 할 말씀입니다. 이 본문에는 하나님의 음성을 분별하는 매우 중요한 원칙들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자, 4절을 볼까요? “여호사밧이 또 이스라엘 왕에게 이르되 청컨대 먼저 여호와의 말씀이 어떠하신지 물어 보소서.” 지금 상황은 큰 전쟁에 나가기 전에 두 왕이 서로 대화를 나누는 장면입니다. 북이스라엘 왕인 아합왕이 남 유다왕인 여호사밧에게 동맹을 제안합니다. 아합은 하나님을 알기는 했지만 지식적으로만 알고 실제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조금도 없는 악한 왕이었습니다. 반면 여호사밧 왕은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알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을 가진 선한 왕이었습니다. 아합이 제안할 때 여호사밧은 흔쾌히 수락합니다. 그러나 여호사밧 왕은 아합왕의 제안을 받을 때 먼저 하나님께 물어보아야 했습니다. 그렇지 못했기 때문에 나중에 여호사밧 왕은 곤란한 일을 겪게 됩니다. 이런 일은 오늘 우리 중에도 있지요. 하나님께 묻지 않고 결정해버리는 일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내 생각대로 결정해버리고 하나님께서 도와주실 것을 기대하는 것입니다. 결혼의 경우도 그렇습니다. 자기가 좋아하는 대로 배우자를 선택해놓고는 행복한 결혼생활을 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 나중에 하나님께 원망을 하게 되는 경우를 종종 보게 됩니다. 아무튼 우리가 무슨 일을 결정할 때 하나님께 먼저 물어보는 것을 습관으로 삼는 것은 중요한 경건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다행히도 여호사밧 왕은 전쟁에 나가기로 결정했지만 전쟁에 나가기 전에 먼저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를 원합니다. 신약시대에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왕같은 제사장으로 부름받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지만 예수님 오시기 전인 구약에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이 선지자들에게 국한되었습니다. 그래서 왕은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선지자들을 찾았던 것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삶의 중요한 원리 한 가지를 짚어야 합니다. 오늘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 찾아가서 하나님께 물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하나님께 직접 나아가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나를 대신해서 하나님께 묻는 것을 허용하는 것은 중대한 실수란 것입니다. 왜냐면 우리가 하나님의 왕같은 제사장이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나를 두고 하나님의 음성을 이렇게 저렇게 들었다는 말에 대해서 조금도 영향을 받지 말기를 바랍니다. 내가 직접 듣기 전에는 믿지 마십시오. 바꾸어서 그 사람이 들어야 할 하나님의 음성을 내가 대신 들을 수 있겠지만 내가 하나님 역할을 해서는 결코 안 될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부분에서 실수하고 있습니다. 자신이 그 사람에게 하나님 역할을 하는 실수를 범하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들어야 할 하나님의 음성을 내가 가로채어서 들려주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구약시대에는 누구나 자유롭게 선지자들에게 나아가서 하나님께 대신 묻도록 요청할 수 있었습니다. 문제는 어떤 사람이 참 선지자였는가? 인 것입니다. 참 선지자와 거짓 선지자를 잘 분별해야 했습니다. 이것은 오늘날 하나님의 음성을 어떻게 분별하는가의 문제와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이라고 말하는 모든 사람이 참 선지지가 아니듯 오늘날 하나님의 음성이라고 하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음성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는 세심하게 분별할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오늘 읽은 본문은 분별에 대해서 중요한 통찰력을 주고 있습니다.
여호사밧왕의 요청에 따라 아합왕은 마지못해 선지자들을 불러 모읍니다. 아합왕 자신이 데리고 있던 선지자 400명을 집합시킵니다. 이들은 모두 거짓 선지자들입니다. 이들은 모두 어용 선지자들입니다. 그들은 모두 권력에 아부하는 사람들이었고, 권력을 비호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여기서 거짓 선지자들의 특징이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거짓 선지자들의 특징은 힘 있는 자 편에 서서 일하기 좋아하는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공의의 지식이 결코 없는 사람들입니다. 힘이 있는 사람들에게 아부하는 사람들입니다. 재물이 많고 능력이 많은 사람들을 좋아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권력자의 편에 서서 권력자의 비위를 맞추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입니다. 아합왕은 그런 선지자들을 400명이나 데리고 있었습니다. 거짓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소유가 아니라 사람의 소유가 된 사람들이었습니다. 힘이 있고 돈이 많고 잘 생기고 인기를 끌고 능력이 많은 사람들 주위에는 사람들이 모입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지지 않습니다. 우리가 공의를 아는 지식을 잃어버리면 하나님의 음성을 잘 듣지 못한다는 사실을 잘 알아야 합니다.
보십시오. 거짓 선지자들은 한결같이 말합니다. 전쟁에 나가면 승리할 것이라고 장담합니다. 그러나 조금만 양식이 있고 판단력이 있다면 그들의 말이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왜냐면 그들은 아합왕의 심기를 북돋우는 데 한 마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여호사밧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 외에 우리가 물을 만한 여호와의 사자가 여기 있지 아니 하니이까?” 여호사밧은 권력자에 붙어 있는 선지자가 아니라 하나님께 붙어 있는 선지자를 찾고 있습니다. 사람에게 붙어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음성을 제대로 들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 붙어 있을 때만이 하나님의 음성을 제대로 들을 수 있습니다.여기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삶에 있어서 중요한 또 한 가지 원리를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분별하기 위해서는 한 번이 아니라 여러 번 분별을 시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올 봄에 저에게 선교에 대한 마음을 부어주셨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저의 아내에게도 동일하게 부어주실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만약 아내가 아니라고 말한다면 저도 아니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선교하는 것은 하나님의 생각이 아니라 나만의 생각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제가 발견한 놀라운 사실은 하나님께서 내게 말씀하시기 훨씬 오래 전에, 결혼하기도 전에 아내에게 말씀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저는 또 확인하고 싶었습니다. 만약 하나님의 뜻이 확실하다면 저의 큰 아이에게도 말씀해주실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제 생애에 있어서 큰 아이의 입을 통해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확인하는 것보다 더 짜릿한 순간은 아마 없을 것입니다. 저의 이야기를 하는 것은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고 느껴질 때에 그것을 이중 삼중으로 확인해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도 그것을 원하신다고 저는 믿습니다. 하나님은 진리를 증거할 때에 두 세 사람의 증인을 세우라고 하셨습니다.
계속해서 본문을 보세요. 이스라엘 왕이 여호사밧에게 말합니다. 7절을 보세요. “오히려 이믈라의 아들 미가야 한 사람이 있으니 저로 말미암아 여호와께 물을 수 있으나 저는 내게 대하여 길한 일은 예언하지 아니하고 항상 흉한 일만 예언하기로 내가 저를 미워하나이다. 여호사밧이 가로ㅗ디 왕은 그런 말씀을 마소서.” 여기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삶에 대해 중요한 원리를 발견하게 됩니다. 아합왕은 자기에게 좋은 말만 해주는 사람을 사랑하였습니다. 그렇게 할 때 아합왕은 자신이 듣고 싶은 말만 듣게 되었습니다. 만일 우리가 듣고 싶은 말만 들으려고 한다면 결코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할 것입니다. 아합왕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는 왕이 아니었습니다. 아합왕은 자기 나라와 자기 의를 구하는 왕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기에게 좋은 말만 해주는 사람만 가까이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일에 대해서 여호사밧왕이 보여준 태도를 유심히 보십시오. 여호사밧왕은 자기에게 듣기 싫은 말이라도 하나님의 음성이라면 들을 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음성을 제대로 듣기 위해서는 듣기 좋은 말만 기대하면 결코 안 되는 것입니다. 자기 목표, 자기 계획, 자기생각에 집착할 경우에는 결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가 없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라면 나의 좋은 생각이라도 기꺼이 내려놓을 수 있다는 생각, 내가 원하지 않아도 하나님의 뜻이라면 기꺼이 순종할 수 있는 사람만이 하나님의 음성을 바로 들을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오늘 많은 사람들은 자기가 듣고 싶은 것을 듣고자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음성을 잘 듣지 못합니다. 사람들은 자기에게 좋은 말을 해주는 사람을 좋아하고 따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음성을 잘 듣지 못합니다. 이것이 주님 오시기 전에 더욱 심해질 것이라고 성경은 예언하고 있습니다.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좇을 스승을 많이 두고 도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좇으리라.”(딤후4:3,4절)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듣고 싶은 말만 들으려고 합니까? 아니면 듣기 싫은 말이라도 하나님의 뜻이라면 기꺼이 들으려고 합니까?
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려고 할 때에 가장 먼저 살펴보아야 할 것이 바로 자기 마음입니다. 자기 생각입니다. 내가 어떤 것에 집착하고 있다면 하나님의 음성을 바로 들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바로 듣기 위해서는 먼저 내 생각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내가 집착하는 것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만일 내가 집착하는 것을 내려놓지 않게 되면 어떤 일이 생길까요? 그렇게 되면 내 생각이 하나님의 음성처럼 들리게 됩니다. 자신은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고 확신하지만 사실은 자기 생각인 것입니다. 오늘 읽은 본문에 나오는 거짓 선지자들이 바로 그런 경우였습니다. 그들의 대표격인 시드기야란 사람이 바로 그런 경우였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생각을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으로 듣고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으로 매우 강력하게 확신하고 있지만 그러나 사실은 자기들의 생각이었습니다. 사단이 노리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집착하는 사람에게 사단이 잘 틈타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말합니다. “누구든지 다른 교훈을 하며 바른 말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경건에 관한 교훈에 착념치 아니하면 저는 교만하여 아무 것도 알지 못하고 변론과 언쟁을 좋아하는 자니 이로써 투기와 분쟁과 훼방과 악한 생각이 나며 마음이 부패하여지고 진리를 잃어버려 경건을 이익의 재료로 생각하는 자들의 다툼이 일어나느니라. 그러나 지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이 큰 이익이 되느니라.”(딤전6:3-6) 사람들이 왜 서로 싸우고 다투고 시기하고 비방하고 판단합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자기 생각에 집착하기 때문입니다. 시드기야를 필두로 한 400여명의 어용선지자들은 모두 자기 생각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확신하고 있는 겁니다. 얼마 전 어떤 형제가 어떤 자매에게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우리 교회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 형제가 그 자매에게 다가가서 이렇게 이야기했다는 것입니다. 자기가 기도하는데 하나님께서 자매와 결혼하라고 하셨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 자매는 그 형제가 너무 싫다는 겁니다. 그런 경우가 바로 자기 생각에 집착할 때 하나님의 음성으로 확신하는 대표적인 경우입니다. 그 형제는 그 자매에 대해서 집착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상태에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하나님께 물었을 때 자기 생각이 하나님의 음성인 것처럼 들리는 것입니다. 이런 일들은 오늘 우리 주변에도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 것입니다. 가만히 보면 분별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분별하기 어려운 사람은 바로 그 생각에 집착하는 사람 본인입니다. 자신이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고 확신이 들더라도 자신의 감정을 조금만 살펴보아도 쉽게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럴 때 쉽게 나서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고 말하는 것은 오늘 시드기야와 400여명의 선지자들과 다를 바가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또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음성에 대해 부정적인 편견과 오해를 갖고 있는 상황에서 매우 겸손하고 지혜롭게 말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고 하면서 조종하거나 억압하거나 위협하는 것은 거짓 선지자들의 특징인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사람들은 어때야 하겠습니까? 분명히 말씀드리는 것은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사람들은 자신이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고 자랑하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에 하나님의 음성을 제대로 들은 한 사람 미가야 선지자의 말을 보십시오. 어떤 특징이 있습니까? 먼저 미가야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미가야를 부르러 간 사람이 미가야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선지자들의 말이 여출 일구하여 왕에게 길하게 하니 청컨대 당신의 말도 저희 중 한 사람처럼 길하게 하소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란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는 마음입니다. 미가야는 400여명의 선지자들이 한결같이 말했다고 해서 전혀 위축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대답합니다. “여호와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내 하나님의 말씀하시는 것 곧 그것을 내가 말하리라.” 우리가 하나님의 음성을 제대로 듣기 위해서는 먼저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부터 회복해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사람들의 생각, 사람들의 말에 전혀 영향을 받지 않겠다고 결정해야 합니다. 미가야가 아합왕에게 하는 말을 보세요. “올라가서 승리를 얻으소서. 저희가 왕의 손에 붙인바 되리이다.” 5절에 거짓 선지자들이 한 말과 비교해보십시오. 지금 미가야는 하나님을 말하지 않습니다. 다시 말해서 미가야는 아합왕을 향해 빈정대고 있는 것입니다. 아합왕을 두려워하고 있지 않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삶을 살기 원한다면 미가야의 마음에 있었던 이 마음, 곧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회복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음성을 제대로 들은 사람과 자기 생각을 하나님의 음성이라고 착각하는 사람의 차이가 무엇일까요? 본문을 계속해서 읽어보면 그 중요한 차이를 볼 수 있을 겁니다. 미가야의 예언을 보면 매우 구체적입니다. 그러나 시드기야의 예언을 보면 다분히 충동적이고 웅변적이며 과장되어 있습니다. 시드기야는 선동적으로 행동하고 있습니다. 미가야의 예언을 보십시오. 18절부터 22절까지 보세요. 얼마나 구체적입니까? 미가야의 예언은 마치 하나님의 어전회의에 참석하고 돌아온 사람같지 않습니까? 그러나 시드기야의 예언은 다분히 감정적이고 충동적입니다. 또 한 가지 중요한 차이가 성품의 차이입니다. 시드기야의 행동을 보세요. 미가야의 예언을 듣자 시드기야는 혈기를 폭발시킵니다. 23절을 보세요. 시드기야는 미가야의 뺨을 칩니다. 자기 생각을 하나님의 음성이라고 잘못 확신하고 있는 사람들의 성품은 교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기 생각과 다르다고 여겨지는 것에 대해 분노를 터뜨립니다. 하나님의 음성인지 아닌지는 이렇게 분별하십시오. 그 성품을 가지고 분별하십시오. 하나님의 음성은 하나님의 성품과 일치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성품을 많이 알면 알수록 하나님의 음성을 분별하는 것은 쉬워집니다. 여러분, 참 선지자인 미가야의 성품을 보십시오. 하나님의 음성을 제대로 들은 사람의 성품은 온유함입니다. 이 얼마나 다른 성품입니까? 그래서 하나님의 음성을 분별하는 가장 중요한 기준은 바로 성품인 것입니다. 예수님도 그 열매로 그 나무를 분별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바로 들은 사람은 언제나 겸손과 온유의 열매를 맺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는 사람은 언제나 교만과 분노와 시기와 미움의 열매를 맺습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여러분은 하나님의 음성을 어떻게 듣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삶을 살고 있습니까? 혹시 내 생각을 하나님의 생각으로 착각하면서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내 생각대로 결정하고 살면서 하나님의 뜻이라고 그래서 하나님을 위한 결정이라고 그래서 하나님이 도와주셔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그러다 결국 전쟁에서 패하고 나면 하나님을 원망하면서 하나님을 떠나가는 삶을 살 것입니까? 아니면 내가 내 생각대로 결정하기 전에 먼저 하나님의 뜻을 겸손히 물어보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움직이는 믿음의 삶을 살 것입니까? 선택은 저와 여러분의 몫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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