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회복학교

회복(44)-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삶 III

등불지기 2012. 3. 10. 22:13

 

 

거듭 말씀드리지만 이 중요한 주제, 사단이 왜곡하기 잘하는 이 주제에 관해

[방법]으로 접근하지 말고 [삶]으로 접근해야 함을 강조 또 강조합니다.

굳이 방법으로 말하자면..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방법을 배우는 것보다

하나님의 음성을 분별하는 방법을 배우는 것이 중요합니다.

왜냐면 양의 탈을 쓴 늑대가 양떼를 헤치려고 은밀히 다가오기 때문입니다.

광명한 천사로 가장한 천사가 하나님의 음성인양 흉내내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것 때분에 방법보다는 삶이 중요한 것이며

이것 때문에 분별해내는 훈련이 필요한 것입니다.

축복합니다.

김광락 선교사 올림.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삶(3)

 

본문: 유1:3,4

 

지난번에는 하나님의 음성을 분별하는 문제에 관해 함께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오늘은 분별의 문제를 중심으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삶에 대해 전체적으로 정리해보도록 하겠습니다. DTS를 하게 되면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에 대해 먼저 다루게 되는데 보통 묵상 강의나 예배 강의 이후에 음성 강의를 하게 됩니다. 그런데 저는 이 문제를 제일 나중에 나루기 위해서 미뤄온 것입니다. 특별히 내적치유와 사고방식을 다루기 전에는 하나님의 음성에 대해서 다루지 않기로 결심했습니다. 사실 묵상시간이 바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시간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이 가장 자연스러운 경건의 생활입니다. 그러나 묵상이 힘들고 어렵고 잘 되지 않는 이유는 내적치유와 사고방식, 그리고 정체성의 문제와 긴밀하게 연관이 있습니다. 마음의 깊은 상처는 하나님의 음성을 온전히 듣지 못하도록 방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사고방식과 세계관의 문제와도 연관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성령론과도 연관이 있습니다. 내가 성령의 존재와 역할에 대해서 어떤 이해를 하느냐? 와도 연관이 좀 있습니다. 이런 이유로 저는 하나님의 음성을 처음부터 다루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삶에 대해서 직접적으로 여러분을 도전하고 싶습니다. 여러분은 올해 초부터 저에게 묵상에 대해서, 예배에 대해서, 중보기도에 대해서, 치유와 사고방식에 대해서, 영적전쟁에 대해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에 대해서, 영적 성숙과 성장에 대해서 기본적인 메시지를 들어왔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제 저는 자신 있게 이 중요한 주제를 다룰 수 있다고 믿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 아버지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우리는 양으로서 선한 목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우리 안에 보혜사 성령께서 거하신다면 성령께서 하시는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그것은 특별한 소수의 사람이 누리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마땅히 누려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은 방법이 아니라 삶이 되어야 합니다.

사실 많은 그리스도인들과 만나서 상담을 하거나 대화를 하게 되면 의외로 하나님이 자신에게 말씀하신 것에 대해서 고민하는 부분을 많이 봅니다.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기 위해서 고민하는 그리스도인들을 만납니다. 그리고 어떻게 분별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고민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작년에 대구에 왔을 때 옛날 고3때 옆에 앉아서 같이 공부하던 친구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 친구는 지금 시내에 있는 어느 은행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교회에서도 신실하게 봉사를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친구에게 한 가지 고민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기 전에는 세상적으로 꽤나 잘 나가는 친구였습니다. 그런데 주님을 만나고 신앙생활을 하면 할수록 점점 어려움을 겪고 있는 자신을 발견합니다. 자신은 재정을 많이 벌어서 주님의 교회나 선교를 위해 헌신하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주변에서 나름대로 기도를 한다고 하는 분들이 자신을 위해 기도해준다고 하면서 자신이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신학교에 가야 한다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더라는 것입니다. 이 친구는 신학교에 가서 신학을 공부하는 것에 대해서는 마음이 열려 있습니다. 그러나 목회에 전념하는 것에 대해서는 전혀 마음이 없는 친구입니다. 그래서 저를 만나서 가장 먼저 물어보는 것이 이것입니다. “도대체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모르겠다.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가?” “하나님께서 구체적으로 일러주시면 좋겠다.” “친구인 네가 날 대신 좀 들어줄 수 없니?” 여러분에게는 이런 고민이 있지 않습니까? 고민하고 있는 나에게 하나님께서 속 시원하게 이렇게 혹은 저렇게 말씀해주시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무엇이 하나님의 뜻인지 알고 싶어 하는 나의 답답한 마음을 누가 좀 시원하게 해주었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이시라면 내가 고민하는 이 부분에 대해서 왜 속 시원히 말씀하여주지 않으십니까? 이런 점에서 모든 크리스챤들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에 대해서 나름대로 고민을 안고 있다고 믿습니다. 여러분들도 예외가 아닐 것입니다. 자신이 그리스도인이라고 여기는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에 대해서 고민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시간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에 대해서 정리를 해보아야 하겠습니다. 먼저 하나님의 음성이란 어떤 형태인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고 할 때 어떤 형태로 듣게 될까요?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에 말씀하십니다. 마음으로 인식하는 하나님의 음성은 소리의 형태를 가질 수 있고 혹은 그림, 혹은 확신, 혹은 느낌 혹은 생각의 형태를 가질 수 있습니다. 그 사람의 성향과 기질에 따라 다르게 들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영으로써 하나님의 음성을 인식하게 됩니다. 사람은 동물과 달리 영을 가지고 있습니다. 영은 하나님을 인식하는 기관입니다. 그래서 영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과 대화를 나누며 교제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영이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영이 인식할 수 있게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음성은 우리의 마음에서 들리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은 소리의 파동을 통해서 말씀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경우는 흔치 않습니다. 대게 그런 경우는 영으로 하나님의 음성을 인식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주시는 경우입니다. 여기서 매우 어려운 문제가 있습니다. 내 마음에서 들리는 소리가 하나님의 음성만 있는 것이 아니란 것이지요. 내 생각도 있고, 사단이 주는 생각이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음이 청결한 사람만이 하나님의 음성을 제대로 들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마음이 청결하다는 것은 어떤 상태를 말할까요? 그것은 “두 마음을 품지 않은 상태” 혹은 “이중적이지 않은 상태”를 의미합니다. 사람은 자신의 마음을 제대로 알 수 없습니다. 자신은 진실하다고 생각하지만 의외로 주님 보시기에 마음이 분리되어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많은 경우 자기가 자기 마음을 제대로 모릅니다. 예를 들어, 주님을 사랑한다고 말은 할 수 있지만 실제로 그 마음은 사랑하기 보다는 사람들에게 칭찬과 인정을 받고 싶은 마음이 강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는 가장 강력한 이유가 바로 두 마음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마음을 청결하게 하기 위해서 우리는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 앞에서 조사해야 합니다. 그리고 말씀으로 조명해야 합니다. 그리고 성령의 임재 안에 깊이 들어가서 잠잠히 머물러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 성령께서 내 마음을 조명해주실 것입니다. 그럴 때 비로소 나는 내 마음을 정하게 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내 정욕이 하나님의 음성 같은 소리를 만들어낼 수 있습니다. 내가 집착하는 생각이 하나님의 음성을 흉내 낼 수 있습니다. 정욕이 소리를 끌어올 수 있다는 것입니다. 구약의 발람이나 시드기야같은 사람이 그랬습니다. 신약의 많은 거짓 교사들이 그랬습니다. 우리도 그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자기 마음을 청결하게 하기 위해 준비단계를 거쳐야 합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야고보는 이 문제에 대해서 분명히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 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로다.”(약1:6-8) “그런즉 너희는 하나님께 순복할지어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 하나님을 가까이 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 하시리라. 죄인들아 손을 깨끗이 하라.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케 하라. 슬퍼하며 애통하며 울지어다. 너희 웃음을 애통으로, 너희 즐거움을 근심으로 바꿀지어다. 주 앞에서 낮추라. 그리하면 주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약4:7-10) 우리 마음을 청결케 하는 작업 중에 가장 대표적인 것이 회개하는 것입니다. 주님 앞에 회개하면서 주님의 임재로 가까이 나아갈 때 우리는 하나님의 음성을 바로 들을 수 있는 준비를 하게 됩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요일1:9)라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가슴을 치면서 통회하는 마음으로 자백해야 할 것은 우리 안에 있는 욕심입니다.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약1:14,15)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중적인 마음은 청결한 마음의 반대인 것입니다. 회개와 자백과 통회하는 것은 이중적인 마음을 청결한 마음을 바꾸는 거룩한 방법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청결한 마음을 갖게 될 때 비로소 내 소리가 아닌 하나님의 소리를 바로 들을 수 있게 됩니다. 또 우리가 자백해야 할 것은 우리의 기대감이나 우리가 집착하고 있는 어떤 생각까지도 주님 앞에서 내려놓아야 하는 것입니다. 가룟 유다를 보세요.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따르면서도 자기 생각에 집착한 전형적인 인물입니다. 자기 생각에 집착하는 것만큼 무서운 것은 없습니다. 사단은 바로 그런 사람을 좋아합니다. 하나님의 진리보다는 자기 생각을 더 붙드는 사람은 사단이 가장 좋아하는 밥인 것입니다. 가룟 유다에 사단이 자기 생각을 집어넣어주게 된 배경을 보면 300데나리온의 값비싼 향유옥합을 깨뜨려 예수님께 부어드린 여인을 예수님이 칭찬해주신 사건이 그 계기가 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가룟 유다는 예수님이 자기가 생각한 그런 메시아가 아니었기 때문에 예수님을 배반하기로 결정합니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어떤 생각이 찾아왔습니다. 요한복음 13:2에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가룟 유다는 아마도 자기 마음에 찾아온 이 생각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굳게 믿었을 것입니다. 그 어떤 사람도 사단이 주는 생각이라고 확신하고 실천에 옮기는 사람은 없습니다. 자신은 하나님의 뜻대로 행동한다고 굳게 믿습니다. 유대인들이 바로 그런 사람들이었습니다. 롬10:3절에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느니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선교지에서 선교사님들이 현지인들을 수 년 동안 돌보고 양육했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배신할 때 허탈감을 느낀다는 이야기를 많이 듣습니다. 왜 그럴까요? 자기 생각을 내려놓지 않기 때문에 결정적인 순간에 배신하는 것입니다. 자기 기대감을 내려놓지 않으니까 결국 배신하고 마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음성을 듣기 위해서는 우리의 기대감을 내려놓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내 생각을 하나님의 음성으로 혼동하지 않기 위해서, 내 마음에 사단이 자기 생각을 집어넣어주어서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거짓말하는 일이 발생하지 않기 위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오직 진리의 말씀을 마음에 새기는 것 외에는 달리 없는 것입니다. 시119:9절에, “청년이 무엇으로 그 행실을 깨끗케 하리이까 주의 말씀을 따라 삼갈 것이니이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시19:7,8에, “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성케 하고 여호와의 증거는 확실하여 우둔한자로 지혜롭게 하며 여호와의 교훈은 정직하여 마음을 기쁘게 하고 여호와의 계명은 순결하여 눈을 밝게 하도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때로는 우리 스스로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할 힘이 없음을 아시는 주님께서 고난을 통해서 말씀을 깨닫게 하시고 결국 우리 마음을 정결케 하시는 때가 종종 있습니다. “고난당하기 전에는 내가 가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시119:67)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시119:71) 고난과 역경을 통해서 우리는 비로소 우리 마음을 제대로 들여다 볼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고난을 통해 연단을 받게 된 그리스도인들은 보다 쉽게 주님의 음성을 분별하게 되는 것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내 마음에 나는 것이 내 소리인지, 아니면 하나님의 음성인지, 아니면 사단이 집어넣어주는 소리인지 어떻게 분별할 수 있을까요? 일단 그것이 분명하지 않다면 하나님의 음성이 아닐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음성은 명확합니다. 혼돈 가운데 들려오지 않습니다. 결코 불분명하게 다가오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은 듣는 사람에게 ‘많은 물소리’와 같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은 하나님을 아는 사람에게는 그 어떤 소리나 생각보다 명확합니다. 제가 제 목소리를 아무리 변조해서 전화를 해도 제 아내를 분별할 수 있을 거라고 확신합니다. 그렇다면 다른 남자가 제 목소리를 흉내 낸다고 하면 저의 아내는 더 잘 분별할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알면 알수록 하나님의 음성을 분별하는 것은 더욱 쉬워질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음성을 잘 듣기 위해 힘써야 하기보다 하나님 그분을 아는 일에 힘써야 하는 이유가 바로 거기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음성인지 아닌지 분별하는 기준과 원칙이 있다면 그것이 무엇일까요? 일곱 가지로 여러분과 함께 나누겠습니다. 첫째, 하나님의 성품과 일치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음성이 아닙니다. 두려움이나 염려나 정죄감으로 다가온다면 결코 하나님의 음성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근신하는 마음이니”(딤후1:7)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성품으로 사랑을 꼽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은 언제나 인자하시며 부드러우시며 인격적인 방법으로 다가옵니다. 하나님의 음성은 그것이 내게 책망으로 다가와도 언제나 사랑과 평강의 열매를 맺습니다. 사단의 음성은 결코 그런 열매를 맺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 열매를 가지고 진위를 분별하십시오. 이것은 매우 중요한 분별의 원칙입니다. 그 열매는 성품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은 언제나 사랑과 평강입니다. 하나님의 성품과 일치하지 않는 것은 무조건 거절하십시오. 둘째 하나님의 진리와 일치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음성이 아닙니다. 예를 들어 성경에는 함부로 맹세하는 것을 금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쉽게 맹세할 것에 대해서 말씀하실 수 있을까요? 어떤 사람이 하나님이 맹세하라고 말씀하셔서 내가 맹세했다고 한다면 무엇이 문제일까요? 하나님은 당신이 기록하여 주신 말씀에 위배되는 방식으로 말씀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따라서 우리는 성경을 읽고 연구하고 묵상하는 것을 게을리하지 말아야 합니다. 셋째,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방식은 감추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하시는 보편적인 방식은 비유적인 가르침이었습니다. 직접적으로 말씀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방식과는 거리가 멉니다. 예를 들어, 우리는 어느 과를 선택할 것인지, 이 사람과 결혼할 것인지 말 것인지, 등등 직접적으로 말씀해주실 것을 기대하지만 하나님에게서 직접적인 응답을 들을 것을 기대하지 마십시오. 우리 안에서 말씀하시는 성령 하나님은 매우 인격적인 분이십니다. 제가 몇 년 전에 목회사역을 그만두어야 할 것인지에 대해서 매우 심각하게 고민하면서 기도한 적이 있었습니다. 주님이 하라고 말씀하지 않으시면 저는 다른 직업을 선택할 것이라고 다짐했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이 저에게 말씀하시는 방식은 하라 하지 말라는 방식이 아니었습니다. 다만 이 복음사역이 얼마나 영광스러운지 깊이 느끼고 보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주님이 말씀하시는 방식이었습니다. 제가 결혼할 때도 그랬습니다. 나는 하나님께서 이 사람이다 아니다 라고 속 시원하게 말씀해주기를 원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결코 저에게 이 사람이다 아니다 이런 식으로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은 저에게 매우 인격적이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음성을 잘 듣지 못하는 이유 중에 하나가 되기도 합니다. 우리는 직접적인 대답을 듣는 것에 집착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사람은 대게 점쟁이를 찾아가서 묻습니다. 답답하기 때문이지요. 속 시원하게 듣기를 원하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영적으로 음란한 사람이 표적을 추구하는 법입니다. 여러분, 소위 예언기도하는 사람을 찾아가는 것과 점쟁이를 찾아가는 것이 무엇이 다릅니까? 하나님이 아닌 다른 사람에게 찾아가서 묻는 것은 불신앙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직접 찾아가서 물어야 합니다. 그러나 내가 원하는 그런 ‘시원한 방식’으로 대답해주실 것을 기대하면 안 됩니다. 대게 하나님께 보편적으로 말씀하시는 방식은 우리의 관점을 바꾸시거나 우리의 사고방식을 변화시켜주심으로써 우리가 새로운 시각으로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을 스스로 발견하도록 도와주시는 것입니다. 내가 그분의 뜻을 발견하는 것을 도와주는 방식으로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사도행전 16장을 보세요. 사도 바울이 성령의 음성을 듣는 과정을 잘 볼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하나님의 뜻을 스스로 발견하기까지 성령께서 어떻게 말씀하시는지 보면 정말이지 감탄이 나옵니다. 바울이 소아시아에서 마게도냐로 사역지를 옮기는데 있어서 성령께서 하신 것은 겨우 마게도냐 한 사람이 바울의 꿈에 나타나 건너와서 도와달라는 그림을 보여주신 일입니다. 물론 사도행전의 다른 곳에서는 성령께서 직접적으로 말씀하시는 장면을 볼 수 있지만 그런 경우에서도 성령께서는 듣는 사람의 인격이나 결정을 무시하거나 일방적으로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넷째,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말씀하실 때에 듣는 사람의 수준에 맞게 말씀하십니다. 사람의 성향과 기질은 매우 다양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다양한 방법으로 말씀하십니다. 그 이유는 그 지으신 사람과 교제하기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보세요. 어떤 사람은 영적으로 매우 어린아이와 같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시각적으로 민감하지만 생각하고 판단하는데 민감하지 못할 수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직관력은 뛰어나지만 감각은 무딜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말씀하시는 방식으로 내게도 말씀하실 것이라고 생각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내가 잘 들을 수 있는 방식으로 말씀하기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다른 사람이 아닌 나 자신에게 관심이 많으신 분이십니다. 그것은 나와 인격적으로 친밀하게 교제를 나누기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일에 어려움을 느끼는 이유가 자신을 잘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이 그렇게 들으니 나도 그렇게 들을 것이라고 집착하기 때문입니다.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은 내게 맞는 방식으로 말씀하시기 원하십니다. 다른 사람에게 말씀하신 방식대로 나에게 말씀하실 것이라고 기대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내가 가장 잘 들을 수 있는 방식으로 말씀하십니다. 문제는 내가 어떤 방식으로 잘 듣는지에 대해서 잘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적치유나 정체성이나 사고방식에 대한 점검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일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준비과정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다섯째 하나님은 이미 우리가 들어야 할 모든 말씀을 기록된 말씀으로 담아 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말씀을 묵상하는 일을 힘써야 하는 것입니다. 기록된 말씀을 통해서도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한다면 어떻게 다른 방법을 통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자 합니까? 그것은 아니라고 믿습니다. 하나님의 기록된 말씀을 묵상할 때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연습이 신앙의 기본기입니다. 이것이 안 된 상태에서 다른 방법으로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보려고 시도하지 마십시오. 묵상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가장 기본적인 방법이란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여섯째, 하나님의 음성을 ‘방법’이나 ‘테크닉’으로 접근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교제하기 원하셔서 말씀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이 방법이 되지 않도록 하십시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이 필요할 때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려고 합니다. 문제가 생겼을 때 해결하기 위해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자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음성을 방법으로 취급하는 태도입니다. 지난 시간에 여호사밧과 아합왕을 통해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태도에 대해서 말씀드린 것을 기억합니까? 어떤 중요한 제안이 들어왔을 때 내가 주님께 묻지도 않고 결정해버리고 나서 그 다음에 어떻게 하면 그 결정한 것이 좋은 결과가 나올까 하여 주님께 묻는 방식이라면 이것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을 삶이 아니라 방법으로 취급하는 태도인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문제해결이나, 성공의 한 방법으로서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매우 낮아져야 합니다. 먼저 주님과의 친밀한 교제 안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역설적인 이야기이지만 방법으로서의 음성을 듣기 위해서는 주님과의 교제를 더욱 사모해야 합니다. 철저히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기로 한다면 가능합니다. 그러나 그렇게라도 했는데 들리지 않는다면 조급하지 마십시오. 들리지 않는다고 답답해하고 조급해한다면 내가 주님의 음성을 삶이 아니라 방법으로 취급하고 있다는 증거인 것입니다. 물론 들을려고 하면 들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왜 들으려고 하는지 내 마음의 동기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주님과 교제하기를 원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자 하는 동기가 되어야 합니다. 마지막 일곱째, 하나님의 음성을 모방하여 말하는 거짓 선지자들의 말에 속지 않도록 하십시오. 마귀는 모방의 천재입니다. 그래서 적그리스도, 거짓 선지자들, 거짓 교사들을 일으켜서 하나님의 진리에 거하지 못하도록 방해합니다. 고후11:14,15절에, “이것이 이상한 일이 아니니 사단도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나니 그러므로 사단의 일군들도 자기를 의의 일군으로 가장하는 것이 또한 큰 일이 아니라 저희의 결국은 그 행위대로 되리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유다서 말씀은 교회 안에 있는 거짓 교사들에 대해서 경고하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흉내 내는 사람들에게 속지 않는 일은 우리의 책임입니다. 저는 주님이 하라는 대로 했는데 이런 결과가 나왔다고 나중에 원망하며 불평하는 사람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분별은 우리의 몫이지 하나님의 책임이 아니란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사단은 우리가 단번에 받은 믿음의 도에 대해서 너무나 화가 나고 우리를 향해 시기하며 질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든지 모조품으로 우리를 유혹하여서 진품에게서 멀어지도록 합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음성도 그렇습니다. 진품이 있고 모조품이 있습니다. 분별은 우리의 몫입니다. 우리는 책망과 정죄의 경계를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진짜와 사이비를 구분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진품과 짝퉁을 구분하는 법을 알아야 합니다. 짝퉁을 구분하기 위해서는 진품을 알면 됩니다. 가짜를 분별하려고 노력하지 마십시오. 진짜를 알기 위해 노력하십시오. 그러면 짝퉁을 구별해내는 일은 쉬워질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도전입니다. 분별은 우리의 몫입니다. 우리는 대충 대충 넘어가서는 안 됩니다. 세상은 짝퉁으로 대충 살 수 있지만 영적인 일은 우리의 운명이 걸린 문제이므로 결단코 대충 넘어가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믿음의 도”를 위해 힘써 싸워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정리해봅시다. 오늘 우리는 매우 큰 도전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일에 있어서 어떻게든 도전을 받고 있습니다. 이토록 중요한 문제를 결코 대충 넘어갈 수는 없습니다. 성경은 이 문제에 대해 대충 넘어가지 말라고 가르칩니다. 그리고 성경은 하나님의 진리를 모방하여 하나님의 진리인 양 가르치는 사람들에 대해서 여러 가지로 보여주면서 경고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은 합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안다고 말은 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고 말은 합니다. 그러나 사실 그들은 자기 욕심에 끌려다닙니다. 그들은 진리의 기반이 약합니다. 그들은 마음의 상처 때문에 하나님의 음성에 대해 왜곡된 경험을 합니다. 그들은 잘못된 사고방식과 세계관 때문에 하나님의 음성을 온전히 듣지 못합니다. 그들은 자기 생각을 하나님의 음성으로 착각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진리라고 주장하면서 가르치지만 사실은 자기 생각을 가르치는 것뿐입니다. 얼마전 다른 교회에 다니는 어떤 자매님이 저에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그 교회에서 어떤 청년부 목사님이 청년들에게 돈을 많이 벌어야 한다고 설교를 했는데 그것이 자신에게는 큰 상처가 되더라는 이야기였습니다. 자신은 한 푼도 주지 않는 자비량 선교단체에서 전임간사로 섬기고 있는데 교회에 가면 청년부 지도교역자는 돈을 많이 벌어야 하나님의 뜻대로 살 수 있다고 하니 상처가 되지 않을 수 없지요. 이처럼 자신은 하나님의 뜻이라고 가르치는데 사실은 자기 생각을 가르치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런 사람은 자신이 그런 말을 하면서도 자신은 하나님의 진리대로 전한다고 굳게 확신하고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의 말에 여러분이 영향을 받지 않기를 바랍니다. 분별은 우리의 몫이란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분별하는 일에 실패할 땐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을 하루아침에 잃어버릴 수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이것이 하나님의 음성이라고 말하면서 다가오는 사람들을 주의하십시오. 여러분이 다른 사람에게 말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이것이 너를 향한 하나님의 음성이라고 말할 때 조심하십시오. 겸손하게 말하십시오.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주신 마음을 겸손하게 나누기만 하고 그 사람을 조종하거나 제어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이러한 성품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성품이 바로 그러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말씀하고 계십니다. 어떻게 듣고 말하는가는 우리의 몫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이 우리를 온전히 연단하여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고자 하시는 것을 온전히 제대로 듣는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