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삶에 대해 설교를 하거나 강의를 하면 많은 (특히 장로교 배경에서 자랐거나, 이 주제에 관해 배우지 못한) 이들이 이상한 눈빛으로 바라보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성경을 읽어보면 하나님의 사람들은 모두 하나님과 친밀하게 교제하며 하나님의 음성을 듣던 사람들이있고,
실제로 하나님과 친밀하게 동행하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경험하는 삶입니다.
아이러니한 사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교회에서는 한번도 이 주제에 대해서 명확하게 가르쳐지지 못했던 것일까요?
가르칠 수 없었던 것인지, 아니면 가르치기 두려웠던 것인지요..
이제 잃어버린 메시지를 다시 되찾아와야 합니다.
축복합니다.
김광락 선교사 올림.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삶(4)
본문: 롬12:1,2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삶이 너무나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에 다시 한 번 이 주제에 관해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이란 자신을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따라가는 삶이라고 정의한다면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문제를 결코 소홀히 할 수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 문제가 매우 중요하기 때문에 우리의 원수 사단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도록 온갖 수단을 다 동원하여 방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시는 인격적인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교제하고 싶으셔서 우리를 당신의 형상으로 만드셨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인간만이 갖고 있는 놀라운 특권이자 축복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되면 우리가 살아나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되면 우리가 성장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음성은 우리를 살리고 변화시키고 새롭게 하는 놀라운 힘이 있습니다. 요한복음 5:25절에,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냥 듣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음성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아야 우리가 성장하게 됩니다. 골로새서 1:6절에, “이 복음이 이미 너희에게 이르매 너희가 듣고 참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은 날부터 너희 중에서와 같이 또한 온 천하에서도 열매를 맺어 자라는도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의할 한 가지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믿는 대로 생각하는 것, 생각하는 대로 믿는 것이 중요합니다. 믿음과 생각이 일치해야 우리가 변화가 있고 성장이 있습니다. 수 십 년 교회생활을 하여도 아무런 변화도 성장도 없다면 그 원인은 여기에 있습니다. 믿음과 생각이 일치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삶도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인격적인 분이란 사실을 아는 것과 믿는 것이 일치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음성을 경험할 수 없습니다. 알기는 아는데 실제로는 믿지 못한다면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없습니다. 우리의 삶을 살펴보면 믿음과 생각이 일치하지 않는 부분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머리로는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분이란 사실을 아는데, 실제로는 하나님이 내게 말씀하실 수 없다는 신념으로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믿음이 없음! 바로 이것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신다는 것을 믿지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위해서 믿음을 가져야만 합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없습니다. 그러면 믿음으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이란 어떤 것일까요?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믿음이란 어떤 믿음일까요? 오늘 몇 가지 단계를 생각해볼 것입니다. 이 단계는 시간적인 순서가 아닙니다. 논리적인 순서입니다. 다섯 가지로 나누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첫째, 회개를 통해서 우리 마음을 정결케 하여 주님의 음성을 들을 준비를 하는 것입니다. 구원받은 이스라엘 백성은 광야에서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 자기 옷을 빨아야 했습니다. 출애굽기 19:10,11절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백성에게로 가서 오늘과 내일 그들을 성결케 하며 그들로 옷을 빨고 예비하여 제 삼 일을 기다리게 하라. 이는 제 삼 일에 나 여호와가 온 백성의 목전에 시내 산에 강림할 것임이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죄와 허물을 주님 앞에 자백할 때 우리는 비로소 주님의 음성을 들을 준비가 되는 것입니다. 요한일서 1:9에,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자백해야 할 죄는 행위로서의 죄만을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온전한 회개, 회개의 열매를 맺을 수 없게 됩니다. 우리가 자백해야 하는 것은 죄의 뿌리가 되는 정욕과 욕심입니다. 야고보서 1:15절에,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고 했습니다. 우리 마음 깊은 곳에 자리 잡고 있는 욕심들을 주님 앞에 자백할 때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최고의 준비가 갖추어지게 됩니다. 그러면 우리 안에 있는 욕심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그것은 말씀을 묵상할 때, 성령께서 내 마음을 조명해주실 때 우리는 알게 되는 것입니다. 만일 이러한 욕심을 처리하지 않게 된다면 하나님의 음성을 온전히 들을 수가 없게 됩니다. 욕심이 소리를 만들어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 욕심을 이용하여 사단이 내게 거짓말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내 안에 있는 욕심을 다루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음성 대신 사단의 음성을 듣게 될 가능성이 높은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회개함으로 우리 마음을 정결케 하는 것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일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단계인 것입니다. 언제까지 회개해야 할까요? 회개한 심령의 상태는 우선순위를 하나님께 둔 상태입니다. 우리가 언제까지 회개해야 하는가? 내 안에 있는 주님께로부터 오지 않은 모든 기대감을 내려놓고 어떤 대가를 지불하고서라도 주님의 뜻을 온전히 이루어드리려고 자신을 온전히 드릴 때까지 계속 회개해야 하는 것입니다. 회개는 내 마음을 조사하는 시간입니다. 그리고 조금이라도 어두운 그늘이 발견된다면 그것을 빛 되신 주님 앞에 자백함으로써 정결케 되는 시간입니다. 이 회개는 마음을 깨끗하게 하는 시간입니다. 회개는 마음을 청결하게 하는 시간입니다. 회개는 하나님 앞에서 어린아이같이 낮아지는 시간입니다. 높아진 마음으로서는 하나님의 음성을 제대로 들을 수 없습니다.
두 번째로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위해서 우리는 원수 사단을 대적해야 합니다. 사단은 하나님의 음성을 모방하여 우리를 넘어뜨리려고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주님의 음성을 들으려고 한다면 반드시 사단이 아무런 영향력을 발휘할 수 없도록 방어벽을 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큰 소리로 외칠 필요까지는 없습니다. 단호하게 선언하면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령한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게 하고 거짓말을 하는 모든 어둠의 영은 가만히 있으라.” 우리가 가진 권세는 놀라운 권세임을 기억하십시오. 나의 권세가 놀라운 것이 아닙니다. 내가 가진 예수 그리스도 그 이름의 권세가 놀라운 것입니다. 그 권세를 담대하게 사용하십시오. 야고보서 4:7절에, “그런즉 너희는 하나님께 순복할지어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고 했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마귀를 물리치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냥 대적하기만 하면 마귀는 피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원수 사단을 대적하십시오. 회개와 영적전쟁! 기본적으로 이 두 가지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위해 기본적인 준비단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두 가지는 필수적인 준비과정입니다. 이 과정을 소홀히 하게 되면 내 욕심에 따라 들리거나 사단이 거짓말을 하게 되어 미혹을 받을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세 번째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위해서 우리는 하나님을 예배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높이기 시작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준비를 하게 됩니다. 예배가 회복되면 하나님의 음성을 들리기 시작합니다. 그러면 참 예배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오늘 읽은 말씀에서 잘 보여줍니다. 로마서 12장 1절,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고 했습니다. 참 예배란 내 몸을 하나님의 소유로, 하나님의 도구로, 하나님의 제물로 드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없다면 오늘 우리가 많은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고 즐거워하는 것은 우리의 만족과 유익을 위한 것일 뿐이지 예배라고 할 수 없습니다. 예배를 잘 드렸는지 여부는 결코 외형이나 형식으로 판단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오직 예배를 받으시는 하나님만이 판단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는 것은 어떤 것일까요? 예배는 단지 입술로 하나님을 높이는 것만 아닙니다. 예배는 내 몸을 드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내 몸을 어떤 의미로 드리는 것인가? 하나님께 구별된 제물로 드리는 것입니다. 이것은 말로만 “내 몸을 드립니다!”라고 고백하는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내 삶을 통해 하나님의 뜻만이 온전히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열망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당신의 형상과 모양으로 만드실 때 하나님의 의도가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통해 온 세상에 나타나는 것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셨습니다. 나 자신을 그런 목적을 위해 하나님께 구별하여 바쳐드리는 것이야말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십니다. 왜냐면 그것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만드신 당신의 목적과 일치하기 때문입니다.
네 번째 우리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위해서 우리의 생각을 점검해야 합니다. 사고방식을 점검해야 합니다. 내 사고방식이 하나님의 사고방식과 일치하는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이것은 세 번째 단계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세 번째 단계로서 우리는 하나님을 높이는 예배, 영적인 예배를 회복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높이는 예배란 하나님이 나를 통해 온 세상에 나타나도록 나 자신을 드리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내가 만일 하나님의 생각으로 살아가게 된다면 내 삶 속에서 하나님의 영광과 아름다우심이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사람을 만드신 목적과 일치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기뻐하신다고 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사고방식이 중요합니다. 내가 내 삶을 하나님께 구별하여 바쳤다고 할지라도 실제로 내 사고방식이 하나님의 생각과 일치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영광이 나를 통해 세상에 나타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게 하는 가장 큰 장애물이 여기서 등장합니다. 그것이 바로 내 생각인 것입니다. 내 생각이 너무 강하기 때문에, 내가 집착하는 바로 그 생각 때문에 하나님의 음성을 제대로 들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우리의 생각을 어떻게 점검해야 할까요? 먼저, 내 안에 세상적인 사고방식이 있는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라고 했습니다. ‘이 세대’란 하나님으로부터 떠난 사고방식을 의미합니다. 세상적인 사고방식이 우리의 사고체계에 자리 잡고 있는 부분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세상적인 사고방식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을 기준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서 외모나 외관, 형식을 따르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보이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좋아보이는 것을 선택하려고 합니다.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는 한 우리는 결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없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 원수 사단이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사단은 하나님을 감히 대적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은 내 안에 있는 견고한 사고방식입니다. 내 안에 경직된 생각이 하나님의 음성을 방해하고 있습니다. 진정한 능력은 여기 있습니다. 내 안에 있는 견고한 요새인 세상적인 사고방식을 깨뜨리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10장 4,5절에, “우리의 싸우는 병기는 육체에 속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 앞에서 견고한 진을 파하는 강력이라. 모든 이론을 파하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파하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케 하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데 가장 큰 장애물이 바로 내 생각인 것입니다. 내 생각 때문에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세상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고서는 결코 하나님의 음성을 제대로 들을 수 없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음성과 부딪히는 부분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은 세상적인 사고방식과는 다르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사람들의 사고방식과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은 다르다는 것입니다. 전에 말씀드렸듯이 하나님은 내 생각을 바꿔주고 관점을 변화시켜주는 방식으로 들립니다. 고3 자녀를 둔 부모들의 생각은 어떻게 하든지 자녀를 좋은 대학에 보내야겠다고 생각하며 수능일은 온종일 교회에서 기도합니다. 만약 자기 자녀가 대학진학에 실패하면 자기가 제대로 기도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생각은 그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생각은 반드시 좋은 대학에 들어가야만 한다고 생각하지 않으신다는 사실입니다. 결혼을 앞둔 청년들이 세상적인 사고방식을 점검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경험할 수 없습니다. 세상은 외모를 중시합니다. 안정된 직장을 가졌는가를 중시합니다. 그런 사고방식으로는 결혼을 위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세상적인 사고방식을 점검하기 위해서는 성경묵상이 가장 좋은 방법인 것입니다. 그런 다음 우리는 하나님의 관점을 받아들일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관점을 받아들이는 것이 오늘 본문에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라는 말씀의 참 뜻이라고 믿습니다. 하나님의 사고방식을 받아들일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태도를 받아들일 필요가 있습니다. 이렇게 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음성을 온전히 들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마지막 다섯째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단계는 하나님께 묻고 경청하며 기다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구체적으로 말씀해주실 것을 충분히 신뢰하면서 기다리는 것이 필요합니다. 경청하는 기도가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듣기 위해서 기도하는 법을 배울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너무 조급하기 때문에 듣지 못하거나 너무 믿음이 없기 때문에 듣지 못합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말씀하여주실 것을 사모하는 마음으로 물으십시오. 겸손하게 물으십시오. 간절하게 물으십시오. 내가 결정한 일을 어떻게 처리해주실 것인지 묻기보다 내가 결정하기 전에 어떻게 할 것인지 물으십시오. 하나님은 인격적인 분이시기에 우리가 믿음으로 반응하면 인격적으로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또한 영이시기에 영으로 말씀하실 것을 기대하고 물으십시오. 성령을 초청하고 의지하십시오. 성령의 충만을 구하십시오. 성령은 하나님의 깊은 것을 통달하시는 분이시며 계시하시는 분이십니다. 이렇게 구하며 경청할 때 하나님께서 말씀해주시는 것을 내 영이 감지하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음성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음성인지 아닌지 의심이 든다면 하나님의 음성이 아니라고 믿으십시오. 앞에서 충분히 회개하고 대적하고 예배하고 생각을 점검하고 겸손히 간구하고 경청하고 기다릴 때 내 마음 깊은 곳에 들리는 소리, 혹은 떠오르는 느낌, 혹은 생각나는 말씀, 혹은 강력한 부담감이나 확신 같은 것이 사람의 성향과 기질에 따라 주어질 것입니다. 아무 의심과 두려움이 없이 주님이 주시는 음성으로 받으셔도 안전합니다. 만일 더 깊은 확신이 필요하다면 이중 삼중으로 확인을 구하여도 주님은 기뻐하십니다. 이 단계에서 분명한 싸인을 구하셔도 좋습니다. 여기서 하나님께 이중 삼중으로 확인해주기를 구하는 것은 의심이나 불신이 아닙니다. 이때 하나님이 주시는 음성은 반드시 의와 평강과 희락이 있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의 음성은 하나님의 성품을 반영해줍니다. 사단이 하나님의 음성을 모방할 수 있을지라도 하나님의 성품은 결코 모방할 수 없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그리고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나님의 음성은 우리를 살립니다. 하나님의 음성은 우리에게 기쁨과 평강을 줍니다. 하나님의 음성은 우리를 위로하고 격려합니다. 하나님의 음성은 무엇보다 우리의 관점과 사고방식을 변화시켜줍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되면 즉시 기쁘게 온전하게 순종해야 합니다. 순종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억지로 하지 말고 감사와 기쁨과 믿음으로 순종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될 때 몇 가지 주의사항이 있습니다. 먼저, 감사함으로 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남을 판단하고 비판하는데 사용하면 안 됩니다. 그리고 주님이 나누라고 말씀하기 전에는 나누지 말아야 합니다. 만약 나누게 될 때에는 매우 주의해야 합니다. 아주 겸손하게 나누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고 위협하거나 혹은 조종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고 주장하면 안 됩니다. 자기 생각이나 자기 의견을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는 표현으로 주장하는 어리석은 사람들을 보았습니다. 자기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고 주장하지만 사실은 자기 생각이요 자기 욕심인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어떤 사람은 지난 밤 TV에서 보고 느낀 것을 가지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고 합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고 하면서 다른 사람들의 마음에 상처를 주는 것을 주의해야 합니다. 사랑이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믿음은 덕으로 포장되어야 아름다운 것입니다. 사랑으로 행하지 않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 죄를 짓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만 생각하고 하나님의 성품과 뜻대로 사는 것을 놓쳐버리면 결코 안 되는 것입니다. 거짓 선지자와 거짓 선생이 그렇게 해서 생겨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보다 하나님의 마음을 품고 살아가는 것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놓쳐버리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덕을 세우기 위해서 하십시오. 사랑으로 섬기기 위해서 하십시오. 주님의 몸을 살리기 위해서 하십시오.
그러나 만일 이렇게 구하고 기다려도 아무런 음성을 듣지 못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런 경우가 사람마다 다르지만 종종 있습니다. 무작정 기다릴 수도 없을 때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 앞에 기한을 정하고 기다리십시오. 기한이 지나도록 아무런 말씀이 없다면 이렇게 생각하십시오. 하나님께서 내가 어떻게 하는지 보기를 원하신다고 생각하십시오. 오늘 본문 2절을 보실까요?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저는 개인적으로 이 말씀을 매우 좋아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전에는 아무 것도 행동하지 말라고 말씀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저는 감사를 드립니다. 저의 아이들이 제게 나아와서 “아빠, 이것은 어떻게 할까요?”라고 의논하는 것 자체는 저를 기쁘게 하는 행동입니다. 그러나 어떨 때는 제가 이렇게 대답합니다. “응, 그것은 네가 마음대로 해보렴.” 그렇습니다. 모든 행동을 내가 결정하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전체적인 태도에 있어서 나에게 묻는 것은 기쁘고 감사한 일이고 저의 자녀들에게 항상 기대하는 일이지만 저는 저의 아이들이 창조적으로 행동하는 것을 또한 보고 싶은 마음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마음도 그렇습니다. 우리가 모든 일에 있어서 하나님께 묻는 태도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이 틀림없다고 확신합니다. 잠언 3장 5,6절에,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의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 잠언 16장 3절에, “너의 행사를 여호와께 맡기라. 그리하면 너의 경영하는 것이 이루리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모든 행동을 언제나 듣고 결정할 수는 없습니다. 항상 그런 태도를 유지하되 삶의 많은 부분들은 주님께 맡기고 과감하게 나아가는 것이 필요할 때도 있습니다. 그럴 때 요구되는 것이 ‘지혜’인 것입니다. 이 단계에서 음성이 들리지 않는다면 우리는 주님께 지혜를 구해야 합니다. 주님이 침묵하시는 것처럼 느낀다면 그것은 우리가 지혜를 배울 때라는 것입니다. 야고보서 1장 5절에,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 읽은 본문에서 “분별하라”고 하신 말씀은 바로 지혜가 필요하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모든 행동을 듣고 할 수는 없습니다. 주님이 주시는 지혜로 할 때도 많습니다. 기억하십시오. 우리는 우리 행동에 대해서 책임을 져야 할 책임감 있는 존재들입니다. 내가 결정하고 선택한 행동에 대해서 내가 책임을 지는 것이 당연합니다. 만약 그 책임을 하나님께 떠넘기기 위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려고 한다면 결코 하나님의 음성은 들리지 않을 것입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은 질서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럴 때는 하나님께서 침묵하셔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책임감 있게 분별하고 행동해야 하는 것입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결혼할 때 “하나님, 이 사람과 결혼하는 것이 주님의 뜻입니까? 아닙니까?” 이런 식으로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려고 하다면 아마 평생 독신으로 살게 될 것이라고 저는 확신합니다. 배우자를 선택하는 문제와 같이 어떤 부분에 있어서는 주님의 음성을 듣고 결정하기보다는 내가 지혜롭게 분별하고 책임감 있게 행동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영적으로 정서적으로 어린아이의 단계에 머물러 있는 사람들이 자주 놓치는 부분이 바로 그것입니다. 자신이 책임감 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삶”과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삶”는 결코 분리될 수 없는 것입니다. 어느 하나만 있어서도 안 되는 것입니다. 듣는 것과 분별하는 것이 같이 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려고 할 때 그것이 하나님의 뜻인지, 내 뜻인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앞서 충분히 나의 태도와 생각의 영역을 점검했다면 하나님의 뜻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만약 이것인지 저것인지 모르겠다면 자기 뜻이라고 생각하십시오. 하나님의 뜻은 명확하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명확할까요? 오늘 본문에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분별해내는 것은 마치 광산에서 금을 캐내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발견한 사람에게는 황량한 땅에서 금맥을 발견한 사람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발견한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선하심과 기쁨과 온전하심이란 성품들이 반드시 나타나게 됩니다. 만약 하나님의 그러한 성품들이 내 안에 나타나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뜻이라고 여기는 것을 보류하여도 안전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그러한 성품들은 행하려고 할 때 내 안에서 나타난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어제 저와 저의 가족들은 제가 주례한 어떤 가정에 심방을 가서 교제하였습니다. 집을 떠나기 전에 집에 있던 과일을 좀 꺼내서 좋은 것을 골라서 바구니에 넣고 예쁘게 포장하고 또 예쁜 쟁반세트와 함께 가족들과 함께 준비를 했습니다. 그럴 때 내 마음에 얼마나 기쁨이 밀려오는지를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제가 깨닫게 된 것은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 복이 어떤 복인지 조금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마음을 느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느끼는 것이 복입니다. 요한복음 7장 16,17절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 교훈은 내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것이니라.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하면 이 교훈이 하나님께로서 왔는지 내가 스스로 말함인지 알리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그 뜻을 행하려고 하는 자만이 온전히 알 수 있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지는 행하는 본인의 심령이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마음을 느끼는 것으로, 하나님의 기쁨과 선하심과 온전하심을 경험하는 것으로 이미 충분히 만족하고 즐거워하고 있는 것입니다. 만일 내가 하나님께서 따로 어떤 재정적인 혹은 환경적인 혹은 어떤 관계적인 축복을 기대하면서 행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어쩌면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사실 내 뜻대로 행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삶에 대해서 네 번에 걸쳐서 여러분과 함께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일과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는 일에 있어서 성장과 진보를 이루기를 소원합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평생 동안 이 부분에 대해 가르쳐주시고 훈련시켜주시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그래서 주님과 자유롭게 교제하며 자유롭게 마음을 나누며 자유롭게 동역하며 자유롭게 쓰임받는 그런 삶이 되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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