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회복학교

회복(48)-그리스도인의 재정원칙 III

등불지기 2012. 3. 10. 22:35

 

 

아프리카에서 흑인 목회자들을 신학훈련하면서 확고하게 드는 확신이 하나 있는데..

재정원칙을 가르치고 훈련하는 데서 성공하지 못하면 아프리카 선교는 절대로 성공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영성이 깊은 흑인목사라 할지라도 아무리 기도를 많이 하는 현지인이라 할지라도

돈 앞에서 다 쓰러지고 무너지고 믿음을 저버립니다.

맘몬의 위력이 이렇게 무서운지 아프리카에서 새롭게 느끼고 있습니다.

물론 그들을 바라보며 제 자신을 먼저 돌아보아야 하겠지요..

나는 얼마나 이 부분에 있어서 하나님이 신뢰하실만한 종인지 하나님 보시기에 재정에 관해 얼마나 유혹에 흔들리지 않을 수 있는지

그렇게 하나님 앞에서 제 자신을 돌아보기 위해 제가 했던 제 설교문을 다시 끄집어 내어서 읽으며 스스로 도전을 받곤 합니다.

아프리카에서는 아무도 선교사의 영성을 위해 애써주지 않으니..

여러분의 기도가 그래서 필요합니다.

부디 제 자신이 가르치는 대로 살아낼 수 있도록, 살아내는 모습을 현지인들에게 보여줄 수 있도록 꼬옥 중보기도해주십시오.

김광락 선교사 올림.

 

그리스도인의 재정원칙(3)

 

본문: 마25:14-30

 

여러분, 가난은 하나님의 뜻일까요? 어떤 분들은 목회자들은 무조건 가난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가난이 미덕이라는 것이지요. 그러나 저는 다르게 생각합니다. 빈곤은 결코 미덕이 될 수 없습니다. 성도들은 부유하게 살아야 하고 목회자들은 가난해야 한다는 것은 모순입니다. 우리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요? 그분은 최고의 부자이십니다. 그분은 모든 우주만물을 소유하신 분입니다. 그리고 그분의 성품은 자비와 긍휼로 충만하신 분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빈곤을 원하신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습니다. 분명 부에 대해 성경에 근거하지 않은 편견과 오해가 많습니다. 오늘 저는 그런 편견들을 다 다루기보다는 빈부가 왜 발생하는가에 대해서 한번 살펴보려고 합니다. 하나님은 부자이시며 하나님의 자녀 또한 하늘과 땅의 모든 부를 누리며 살기를 원하신다고 저는 믿습니다. 그럼에도 왜 누구는 부하게 살며 누구는 가난하게 사는 것일까요? 나라와 민족을 보세요. 왜 어떤 나라는 잘 살고 어떤 나라는 못살까요? 여기서 부자와 가난한 자를 구분하는 절대기준이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자신은 부유하게 살면서 가난하다고 생각할 수 있고, 또 가난하게 살면서도 부유하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석유가 많이 나는 사우디아라비아의 경우 돈을 물 쓰듯이 쓰지만 우리는 진정 부유한 나라라고 보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그 나라의 일부 상류층만이 거의 모든 부를 독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중국이 가지고 있는 달러 보유액은 세계적으로 최고의 수준이지만 우리가 중국을 부유한 나라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개인도 그렇습니다. 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이 보기에도 참 어렵게 살아갑니다. 하지만 본인은 어느 누구보다 행복하고 기쁘게 살아간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저는 겉으로는 어떨지 모르지만 속으로는 가장 부요하다고 자처하는 사람 중에 하나입니다. 제가 필요하다고 생각한 것 중에 공급받지 못한 것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내 욕심에 따라 모든 것을 가질 능력은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부자와 가난한 자를 구분하는 객관적인 기준이 없다고 봅니다. 하지만 물질에 끌려 다니거나 혹은 필요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공급받지 못한다면 혹은 필요와 욕구를 혼돈하면서 욕구에 따라 살아간다고 한다면 그 삶은, 혹은 그 나라는 가난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많은 것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그 가진 것을 효과적으로 사용하지 못하거나 다른 사람에게 선한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한다면, 그리고 그 가진 것을 자기의 욕구를 만족시키기 위해서 사용하는 것이라면 그는 가난하다고 생각합니다. 반대로 상대적으로 가진 것이 적다고 할지라도 가진 것을 효과적으로 사용할 줄 알고 또 가진 것을 가지고 다른 사람에게 나눠주며 섬기며 선한 영향을 끼친다면 저는 그가 부자라고 생각합니다. 통장에 많은 금액을 저축한 사람이 결코 부자가 아닙니다. 아무 것도 가지고 있지 않더라도 내 필요에 따라 재정을 공급받을 수 있다면 결코 가난한 자라고 할 수 없습니다. 비록 많은 것을 가졌지만 자신의 필요를 채우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지 못한다면 그는 분명 가난한 자입니다. 비록 가진 것이 없어도 자신의 필요가 있을 때 언제든지 채우며 또 다른 사람의 필요까지 채워줄 수 있다면 이 사람이 진정한 부자가 아닐까요? 여러분에게 묻고 싶습니다. 여러분은 부자입니까? 아니면 가난한 자입니까? 물질을 부립니까? 아니면 물질에 부림을 당합니까? 재물에 휘둘림을 받습니까? 아니면 재물을 지배하고 다스리고 있습니까? 저는 이것이 부자와 가난한 자의 차이라고 믿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성경은 우리에게 재정에 관한 하나님의 원칙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부자와 잘 사는 삶은 분명 다릅니다. 부자라고 다 잘 사는 것이 아닙니다. 몇 년 전 카타르에 간 적이 있습니다. 천연가스 덕분에 얼마나 돈이 많은지 모릅니다. 그러나 결코 잘 사는 나라라고 할 수는 없었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우리가 돈이 많은 부자가 되기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잘 사는 사람이 되기를 원하신다고 믿습니다. 세상은 얼마나 많이 가졌는가를 중요하게 생각하지만 정작 얼마나 가진 것을 누리고 사는가에 대해서는 생각을 못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누리는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가 참으로 부요한 삶을 살기를 원하시며 또 그런 삶을 살도록 하시려고 당신의 성품과 원칙을 계시하여 주셨습니다. 우리가 그분의 성품과 원칙을 알고 삶 속에 적용시켜나간다면 분명 재물은 우리의 종이 되는 것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 원칙을 지키는 자는 재정을 자유롭게 부리는 삶을 살게 됩니다. 즉, 잘 사는 삶을 살게 됩니다. 세상의 많은 사람은 은행에 많은 돈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부자라고 생각합니다. 일면은 맞는 말입니다. 그러나 전부 맞는 말은 아닙니다. 많은 자산을 가지고 있어도 그 가진 것을 활용하지도 못하고 누리지도 못한다면 결코 부자라고 할 수 없습니다. 또 지상은행에는 아무 것도 없어도 하늘은행에 많은 것을 저축한 사람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거지왕자의 이야기를 잘 알 것입니다. 어느 날 실수로 거지가 왕자와 옷을 바꿔 입고 궁궐에서 살게 되고 왕자는 뒷골목에서 살게 됩니다. 그러나 누가 진정한 부자입니까? 궁궐에서 살아도 그 마음이 여전이 부족의 심리에 눌려서 살아가는 사람과 비록 뒷골목에서 곰팡이 핀 빵으로 끼니를 떼우지만 그 마음은 풍요의 심리로 가득하여 살아가는 사람 주에 누가 진정한 부자입니까? 부자를 결정하는 기준은 그가 가진 소유가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부자를 결정하는 기준은 그의 신분, 그의 정체성이 결정하는 것입니다. 전도서를 보면 많은 재물을 받았지만 누리지 못하고 죽는 헛된 인생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반면 사도 바울은 가난한 것 같지만 사실은 많은 것을 가진 자요 많은 사람을 부요케 하는 자라고 자신을 이해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쪽을 선택하며 살겠습니까? 많은 사람들은 많이 소유하고 살아가는 사람이 부자가 아니냐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많이 소유하는 사람이 아니라 많이 누리며 살아가는 사람이 부자입니다. 많은 것을 가져도 누리지 못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스위스란 나라는 자원도 인구도 별로 가진 것이 없는 나라입니다. 그러나 얼마나 부요한 나라인지 모릅니다. 자원이 많은 나라가 다 부자나라가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아프리카의 어떤 가난한 나라는 세계 어떤 나라보다 자원이 풍부합니다. 문제는 그것을 누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개인도 마찬가지입니다. 많은 가져도 누리지 못하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러면 왜 많은 것을 가져도 누리지 못하고 죽을까요? 그 이유는 그 마음에 하나님이 계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그 마음이 부족의 심리에 사로잡혀서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그 마음이 풍요의 심리로 가득 차 있다면 그 사람은 그 소유가 어떠하든지 간에 그는 부자입니다. 그 풍요의 심리를 누가 주십니까?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입니다. 풍요의 심리를 가졌기 때문에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많이 가진 자가 부자가 아니라 주는 자가 부자라고 믿습니다. 잘 사는 삶은 몇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첫째, 빚이 없습니다. 둘째, 주는 일이 많습니다. 셋째, 인색함이 결코 없습니다. 많이 가진 부자라고 다 잘 사는 것이 아닙니다. 많이 가지고 있어도 빚이 있다면, 또 주는 일이 없다면, 인색하다면 결코 잘 사는 것이 아닙니다. 남보다 많이 가진 것이 기준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얼마나 누리는가가 기준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이러한 기본적인 개념에 대해 바르게 이해해야 합니다.

좀 더 이 문제에 관해 생각해봅시다. 우리의 눈을 들어서 세계의 나라들과 민족들을 한번 바라봅시다. 현실을 보면 대체로 하나님을 믿는 나라가 잘 산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삶을 살수록 부요하게 살아갈 가능성이 높습니다. 왜냐면 하나님은 당신을 신뢰하는 자들에게 마음의 평안과 기쁨과 함께 물질을 비롯해서 온 세상을 다스릴 지혜와 권세를 주시기 때문입니다. 세상 나라들을 보세요. 대체로 볼 때 하나님을 믿는 나라가 잘 삽니다. 여기서 잘 산다는 것은 다른 나라에 대한 의존도가 낮고 오히려 다른 나라에 원조함으로 영향력을 준다는 말입니다. 개인도 그렇습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 대한 의존도가 낮고 다른 사람들을 도와주면서 산다면 우리는 정말 부자가 틀림없습니다. 미국과 영국과 유럽의 나라들을 보십시오. 복음이 들어간 나라들을 보십시오. 복음이 들어간 곳마다 사람들은 성경적인 세계관을 갖게 됩니다. 그리고 성경적인 세계관을 가질수록 세상을 다스릴 수 있는 지혜와 힘과 권세를 가지게 됩니다. 그런데 여기서 여러분 중에 누가 예외가 있다고 이야기할 것입니다. 맞습니다. 아프리카를 보세요. 아프리카에서 절반 이상의 나라들이 기독교 국가입니다. 그리고 기독교 국가들은 대부분 50% 이상의 복음화율을 보이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왜 가난할까요? 다시 말해서 다른 나라에 대한 의존도가 높고, 다른 나라에 원조하기는커녕 원조를 바라는 것일까요? 이유는 매우 간단합니다. 복음이 들어간 지 오래되었지만 사람들의 생각이 성경에 따라 바뀌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읽기는 하여도 성경적인 세계관이나 사고방식으로 살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자동적으로 잘 산다고 생각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우리의 생각이 성경에 입각해야 합니다. 성경적인 세계관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열심히 믿기는 하여도 여전히 세상적인 세계관으로 생각하면서 살아간다면 결코 세상을, 그리고 물질을 다스리며 정복할 수 없는 것입니다. 겉으로는 기독교 국가라고 하지만 여전히 탐욕과 부정부패와 불의가 그 나라를 지배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성경이 세계관과 사고방식에까지 영향을 미쳐야 합니다. 그럴 때 비로소 빈곤의 문제를 해결할 지혜와 능력과 권세가 생기게 됩니다. 우리나라가 정말 잘 사는 나라가 되려면 예수 믿는 사람들이 더 많아져야 함은 물론이지만 더 중요한 것은 성경적인 세계관이 모든 정치 경제 사회 문화에 골고루 스며들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는다면 신자들이 더 늘어난다고 한들 아프리카의 많은 기독교 국가들과 같이 경제적으로 속국이 되고 말 것입니다. 아프리카의 많은 가난한 기독교 국가들은 오늘 우리에게도 많은 교훈과 도전을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노라고 자랑하지만 그들은 부족주의 정령숭배, 부정부패, 온갖 뇌물을 비롯한 부정부패, 독재자들의 독점, 정직하지 못함 때문에 여전히 물질적으로 노예생활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아프리카에 복음을 전한 선교사들과 나라들도 책임이 있습니다. 복음을 전했지만 가정을 돌아보고, 회사를 경영하고, 정부를 어떻게 운영할 것인지에 대한 하나님의 원칙을 가르치지 못한 것입니다. 왜 성경적인 원칙을 가르치지 못했는가? 아프리카 원주민들을 미개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전했지만 성경적인 원칙으로 사람들을 가르치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 우리에게 큰 도전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저 기도를 열심히 하거나 믿기만 한다고 내 삶의 문제가 저절로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성품과 원칙을 알고 순종해야 실제적인 축복이 임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또 다른 예외를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바로 일본입니다. 바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제가 매우 궁금해 했던 부분이기도 합니다. 일본의 복음화율은 1%에 미치지 못하지만 일본은 왜 경제적으로는 잘 사는 것일까? 일본의 경제수준은 한국보다 낫다는 것을 다들 인정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 문제에 대해 고민하다가 YWAM 창설자인 로렌 커닝햄이 저술한 책 [열방을 변화시키는 하나님의 책]을 읽다가 그 이유를 알게 되었습니다. 여러분이 이 책을 꼭 한번 읽어보기를 권하고 싶습니다. 이 책에서 로렌은 이렇게 말합니다. “일본이 앞서 가는 이유는 그들의 문화가 정직하게 재물을 다뤄야 한다는 성경의 원칙을 따르고 있기 때문이다. 그 정직성은 문화적 관습 때문이기도 하고, 일본 역사의 결정적인 순간에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서 작용한 기독교의 영향이기도 하다.” 재물에 대한 정직도를 일본에 가면 알 수 있다고 합니다.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혼잡한 거리에서 지갑을 흘려도 아무도 가져가는 사람이 없다고 합니다. 참으로 놀라운 이야기입니다. 정직이란 성품에 있어서 우리나라보다 훨씬 나은 것 같습니다. 물론 그 정직함은 경제적인 영역에만 해당합니다. 다른 영역에서는 정직하지 않습니다. 일본사람들은 재정에 관한 성경적인 원칙에 순종했지만 다른 생활에 대한 성경적인 원칙에는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경제적으로 축복을 받았지만 교육이나 사회적인 문제에서는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이 책에서 로렌은 일본이 재정에 관한 한 성경적인 원칙을 받아들이게 된 데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 한 사람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윌리엄 메럴 보리스란 사람입니다. 그는 1905년 건축가로서 일본에 도착했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고자 하는 비전이 있었습니다. 많은 핍박과 방해가 있었지만 기도하는 중에 보리스는 건축회사를 세우기로 결심하게 됩니다. 자신이 성경공부를 인도하면서 생겨난 새신자들로 하여금 이 회사를 운영하도록 합니다. 일본에 자주 발생하는 지진을 견딜 수 있는 건축술을 개발했습니다. 그래서 얼마 지나지 않아서 이 회사는 일본 전역에서 유명하게 됩니다. 그래서 전국에 2,800개의 건물을 설계하게 됩니다. 그들을 통해 일본사회는 정직하고 검소한 생활을 보고 배우게 됩니다. 그들은 많은 돈을 벌었지만 꼭 필요한 것만 썼습니다. 직급에 상관없이 모두 한 달에 62달러만 쓰면서 살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아낀 돈을 모두 전도와 구제사역에 썼고, 교회와 주일학교를 세웠습니다. 그 회사에서 나온 제품 중에 여러분도 잘 아는 맨소래담이 있습니다. 그들이 보여준 경영모델은 일본 사회에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뇌물을 용납하지 않았고, 주일에는 노동을 금지했고, 사원들의 복지를 최우선으로 삼고, 정직하게 일하는 모습은 일본 사람들의 뇌리에 강하게 박힌 것입니다. 그런 그에게도 위기는 찾아옵니다. 제 2 차 세계대전 때 보리스는 미국의 첩자란 오명을 쓰고 쫓겨 다니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전쟁이 끝난 후에는 상황이 역전된 것입니다. 일본을 재건하는 일에 더글라스 맥아더 장군은 보리스를 적극 세워주고 밀어주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보리스는 가는 곳마다 강연을 통해서 기독교 정신을 가르쳤고, 기독교 정신에 입각한 기업들을 일으키도록 일본을 도왔습니다. 여기서 저는 한 가지 중요한 원리를 발견합니다. 비록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모른다 할지라도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을 순종할 때 축복을 받는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을 알지 못하여도 지상에서는 재정적인 축복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그러한 재정적인 축복은 하늘나라에까지 연결되지 못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축복은 하나님의 원칙에 순종하는 자들에게, 나라에게 임하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공평하신 분이시며 의로우신 분이시며 지금도 세상나라를 다스리고 계십니다. 할렐루야!

우리는 지금까지 세상 나라들을 살펴보면서 가난한 자와 부자가 어떤 기준으로 보아야 할 것인지에 대해 생각해보았습니다. 그러면서 중요한 것은 ‘믿음’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믿는 대로 사는 것이 중요합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성품을 알고 하나님의 원칙에 순종하여야 축복을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가정,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매스컴, 예술, 등 모든 영역에서 당신의 성품과 원칙이 드러나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성경을 기록하여 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보고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하나님의 길이 무엇인지 배워야 합니다. 그리고 순종해야 합니다. 재정에 관해서 하나님의 축복을 받기 원한다면 재정에 관한 하나님의 성품과 원칙을 배워야 합니다. 재정에 관한 하나님의 원칙을 다시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맘몬의 영을 끊어버리는 삶입니다. 맘몬의 영을 끊어버리지 못할 때 아프리카의 가난한 기독교 국가들처럼 겉으론 기독교 국가이지만 속으론 온갖 미신과 부정부패와 불의와 부정직이 가득하게 되는 것입니다. 둘째, 우리는 심고 거두는 법칙을 알고 적용해야 합니다. 부자가 되려고 하면 결코 부자가 될 수 없습니다. 진정한 부자가 되려면 심는 법을 적용해야 합니다. 주는 것을 즐거워해야 합니다. 지난 주일에 제가 강조한 것이 이 두 번째 원칙에 관한 것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 재정원칙으로서 성품의 원칙을 알아야 합니다. 성격(personality)은 처세술에서 나오지만 성품(character)은 하나님에게서 나옵니다. 성격은 쾌활하고 유머가 있고 적극적이고 재치가 있고 등등입니다. 그러나 성품은 겸손, 온유, 성실, 정직, 인내, 절제, 사랑, 관대함 등등입니다. 성격의 원리로 재정적인 축복을 기대하면 안 됩니다. 우리가 재정적인 영역에서 축복을 누리려면 반드시 성품의 원칙을 알아야 합니다. 성품이 뒷받침 되어야 심는 것이 완전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보세요. 어떤 나라는 가난한 것 같지만 실제로는 부자이고,, 어떤 나라는 부자인 것 같은데 실제로는 가난한 것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요? 부를 일부 특권층이 독점하게 될 때 그 나라는 아무리 많은 돈을 벌어도 가난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정직과 공의와 같은 성품이 없고 심는 일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결국 중요한 것은 부자나라의 기준은 돈 자체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소유 자체가 아닙니다. 부자나라와 가난한 나라의 차이는 결국 성품의 차이입니다. 잘 사는 나라와 못 사는 나라의 차이는 성품이 결정합니다. 독점과 부정부패와 불의가 많을수록 가난해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정직하고 근면하고 성실하며 관대할수록 부요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맘몬의 영에 끌려 다니면 결코 부를 지배할 수 없습니다. 맘몬의 영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부정부패와 불로소득과 불의에 대해 관대하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그러나 부를 지배하려면 맘몬의 영을 끊어버리고 하나님의 성품을 본받아야 합니다. 공의로우시며 정직하시며 성실하시며 관대하신 하나님의 성품에 많이 참여하면 할수록 재물을 지배하고 다스릴 수 있는 권한이 더 많이 주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자, 그렇다면 오늘 우리나라는 어떻습니까? 우리는 잘 살고 있습니까? 요즘 다들 경제침체라고 아우성들이지 않습니까? 왜 그럴까요? 지금까지 우리나라가 잘 살 수 있었다면 그것은 근면 성실이란 성품에 기초해서 심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 민족은 다른 나라보다 지혜로움도 있습니다. 또 옛날부터 주는 것을 좋아하는 관대함이란 성품도 있습니다. 그런데 왜 IMF가 왔습니까? 성품의 원칙을 잃어버리고 심을 생각을 잊어버렸기 때문입니다. 더 많이 가지기 위해서 빚을 내기 시작했습니다. 이 시대 경제문제의 본질은 우리 민족에게 부어주신 근면 성실이란 성품을 잃어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로또산업이나 경매 혹은 도박산업, 그리고 부동산투기가 성행하는 것은 이 시대가 근면 성실함이란 성품을 결여하고 있다는 단적인 증거입니다. 손쉬운 방법으로 부자가 되려고 눈이 먼 것입니다. 그런 방법으로 돈을 버는 것은 모두 거품과 같습니다. 진정한 축복이 아닙니다. 거품이 꺼지는 날은 반드시 옵니다. 거품이 꺼지면 모든 사람들이 고통을 당하게 됩니다. 거품을 제거하는 것은 성품입니다. 우리나라가 다시 경제가 회복하려면 이 성품을 회복해야 합니다. 그리고 농부의 마음을 가지고 심는 일을 해야 합니다. 여러분, 주는 자가 복이 있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은 받는 자보다는 주는 자에게 은혜를 베푸십니다. 재정적인 축복을 누리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주는 자가 되십시오. 우리가 어떻게 주는 자가 될 수 있을까요?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것입니다. 많이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주기를 좋아하시는 분이심을 더 많이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아갈수록 우리는 마음이 넓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성품을 관대함이라고 합니다. 관대하게 주십시오. 하나님이 우리에게 복을 주시는 이유는 우리가 주는 행위 때문이라기보다는 우리가 줄 때 우리 안에서 하나님의 성품인 ‘관대함’ 혹은 ‘은혜로움’을 보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만약 우리가 주었는데도 하나님의 복을 경험하지 못한다면 내가 관대함으로 주었는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받기를 기대하는 마음으로 주었다면 이것은 재정적인 축복을 받는 삶과는 거리가 먼 것입니다. 관대함이란 성품 때문에 우리에게 복을 주시는 것이지 우리의 행위 자체 때문에 복을 받는 것이 아니란 사실을 꼭 기억하십시오. 인색한 마음은 하나님의 복을 가로막는 최대의 장애물이란 사실을 꼭 기억하십시오. 인색함으로 주거나, 인색함으로 드리는 자가 되지 말고 관대함으로 주는 자, 관대함으로 드리는 자가 됩시다. 가난한 나라들을 가보면 이 관대함이란 성품을 거의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잘 사는 나라들을 보면 이 관대함이란 성품을 쉽게 느껴볼 수 있습니다. 맘몬의 영에 사로잡힌 사람의 두드러진 성품은 바로 인색함인 것입니다.

저는 이 성품이 얼마나 중요한지 강조하고 또 강조하고 싶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마태복음 25장에서는 말세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이 반드시 가져야 할 세 가지 성품에 대해서 비유로 가르쳐주시는 말씀입니다. 재정원칙에서도 마찬가지로 꼭 필요한 성품들입니다. 1절에서 13절까지는 열 명의 처녀들에 대해서 이야기해주십니다. 이 비유의 핵심성품은 ‘지혜로움’입니다. 여기서 지혜는 요령과 전혀 다른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지혜는 예측하지 못할 앞날을 준비하는 것입니다. 재정을 어떻게 지혜롭게 사용할 것인가? 미래를 위해 어떻게 준비할 것인지 잘 생각해보십시오. 내년을 위해 재정을 저축하는 사람보다는 20년 후를 내다보는 사람이 더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만약 영원을 위해 준비한다면 더더욱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둘째, 14절에서 30절까지 말하는 핵심성품은 ‘충성스러움’입니다. 여기서 한 절 한 절 다 다룰 수는 없습니다. 다만 충성이란 맡겨준 분의 의도에 따라 사용하는 것임을 기억합시다. 내 것이라고 여기고 내 마음대로 사용하는 것은 충성이 아닙니다. 재정도 그렇습니다. 주님의 것이라고 여기고 주님의 의도대로 사용해야 합니다. 셋째, 31절에서 46절까지는 ‘사랑’이란 핵심성품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재정을 사용할 때는 사랑으로 사용해야 합니다. 이기적인 마음으로 재정을 사용하는 것은 결코 나에게 유익을 주지 못합니다. 갚을 능력이 없는 사람을 위해 재정을 사용해보십시오. 감옥에 있고 나그네가 된 형제들에게 써보십시오. 복음을 위해 자비량으로 헌신하는 분들을 위해 재정을 써보십시오. YWAM에는 자비량으로 헌신하는 풀타임 사역자들이 많습니다. 그들에게 여러분이 후원자가 되어보십시오. 이것이 여러분에게 어떤 축복이 되어 돌아오는지 여러분이 반드시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주위에 가난한 자가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축복임을 기억하십시오. 또 여러분 자신이 가난하다고 생각한다면 여러분의 필요에 하나님께서 놀라운 사랑과 능력으로 응답하실 것임을 기대하십시오. 우리가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의 원칙을 알기 시작할 때 우리는 재정을 다스리고 더 나아가 세상을 다스리고 정복할 힘과 권세를 얻게 됨을 기억하십시오.

말씀을 맺습니다. 청부가 될 것인가, 청빈이 될 것인가? 이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재물에 끌려가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면 우리는 맘몬이 아니라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재물을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재물을 사용하면서 하나님을 위해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위해 재물을 노예로 부리도록, 하나님의 뜻이 온 세상에 이루어지기 위해 재물을 사용하도록 하기 위해 부름 받은 자들입니다. 부자가 되려고 애쓰지 마십시오. 재물을 추구하지 마십시오. 재물이 여러분을 따르게 하십시오. 재물이 여러분을 섬기게 하십시오. 재물이 여러분을 섬기고 싶어 애걸하게 하십시오. 우리가 하나님을 섬길 때 재물은 기꺼이 우리를 섬기려고 할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자랑은 재물의 많고 적음에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후히 주시고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있는 것입니다. 어떤 상황 속에서도 자족하게 하시는 하나님께 우리의 자랑이 있습니다. 재물을 마음껏 부리는 권세를 주시는 하나님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필요에 신실하게 응답하시는 하나님, 그리고 모든 것을 후히 주시고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십시오. 그리고 선한 사업과 나눠주는 일에 인정받는 사람이 되십시오. 이것이 여러분의 장래에 진정 견고하고 안전한 집을 짓는 것입니다. 성경적인 재정원칙을 여러분의 삶속에 적용함으로써 주님이 약속하신 대로 잘 사는 삶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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