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I. 여호와 전쟁의 현대적 의의: 그리스도인의 세계관의 중심
지금까지 證明하고자 애쓴 것은 구약과 신약의 여호와 전쟁 개념이 서로 통일성을 이루고 있다는 단순한 論理에 불과한 것이다. 이제 중요한 것은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 크리스챤들에게 그것이 어떤 意味를 주고 있는지 생각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성경의 종말적 전쟁개념을 倫理的 차원에까지 확대하고자 하는 이유는 신학이 현대의 地平線을 상실하지 않기 위함이다.
우리는 앞에서 구약의 여호와 전쟁 개념이 신약에 와서 예수 그리스도의 使役으로 말미암아 더욱 尖銳化되었으며 신약의 카리스마 共同體의 주요한 信仰觀과 世界觀이 되었음을 말했다. 이러한 전쟁의 시각으로 이 세계를 바라보는 이른바, 戰爭-世界觀 은 聖經만의 특징이 아니라 敎會史的으로 초대교부들에게서도 특징적인 思想으로 나타나고 있다. 예를 들어, 오리겐(Origen) 에게 있어서 사탄과의 전쟁 은 그의 신학에 있어 중심사상을 형성하고 있는데, 그는 사탄과의 전쟁을 그리스도의 사역 뿐만 아니라 그의 몸된 교회의 주된 사역 이라고 이해하고 있으며, 리스도의 십자가를 항상 하나님 나라의 반역세력에 대한 勝利 로 설교했다. 또한 져스틴 마터나 이레니우스,시프리안, 터툴리안, 그리고 개혁자인 루터와 요한 칼빈의 著述에게서도 전쟁은 핵심적인 세계관으로 나타나고 있음을 관찰하게 된다.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요지는 성경의 여호와 전쟁 이 오늘의 복잡한 時代를 살아가고 있는 크리스챤의 핵심적인 世界觀이 될 수 있으며 또한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문제로 떠오르는 것은: 성경의 거룩한 戰爭槪念이 오늘날의 크리스챤들을 위한 윤리적 根據를 가지고 있는가? 世界史에서 기독교의 전쟁관은 어떻게 發展되어 왔는가? 또한 현실적으로 세계의 무대에서 일어나고 있는 戰爭을 어떻게 解釋하고 받아들여야 하는가? 그리고 多元化된 이 세계에 惡의 實體를 발견할 구체적인 方法은 무엇인가? 전쟁에 대한 기독교의 倫理的 패러다임은 무엇인가? 등 에 대한 물음이다. 그런데 이 모든 문제를 상세히 다루는 것은 본 논문의 주제( 여호와 전쟁 개념의 통일성과 그 윤리적 근거를 규명함) 를 과도히 벗어나는 것이라고 판단된다. 따라서 여기서는 나중의 연구를 돕기 위해서 이러한 문제들의 방향과 그 가능성의 측면만 간략하게 제시하고 본 글을 마무리 하고자 한다.
A. 성경의 전쟁개념이 갖는 윤리적 근거
성경에 나타난 여호와 전쟁 의 이미지 혹은 개념이 오늘날 크리스챤들이 크리스챤으로서 살아가야 하는 기독교 윤리적 근거를 제시하고 있는가? 그것이 아니라면, 성경의 여호와 전쟁 개념은 R. Bultmann의 주장처럼, 비신화화 (demytholozising) 되어야만 하는 비과학적이고 비현대적인 迷信에 불과한 槪念인가? 만약, 성경에 나타난 여호와 전쟁 개념이 성경저자들의 하나님 나라 선포의 효과적인 선포의 도구로만 사용하였고 구속사의 本質自體로서 선포하지 않았다면 성경의 전쟁은 그 倫理的 根據를 잃어버리게 되고 만다. 따라서 성경의 전쟁사관이 신명기적 史觀 , 신앙고백적 歷史 혹은, 神話 의 차원에 갇혀버리는 저속한 계시개념이 아니라, 啓示와 球束史의 本質이라는 우리의 주장을 正當化시키려면, 성경에 나타난 여호와 전쟁 개념이 단순한 이미지의 次元이 아닌 구속사의 本質이라는 證據를 제시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먼저 앞에서 언급한 여호와 전쟁 의 특징을 몇가지로 要約보아야 하겠다. 여호와 전쟁 은 하나님의 의, 또는 하나님의 王權만이 강조되고 인간의 참여(synergism)를 許容하지 않는 방식의 전쟁이다. 여호와 전쟁 은 그 택하신 백성을 악의 세력에서 떼어놓으시는 하나님의 구원사역이다. 그것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자기 곁을 떠나버린 인간들과 다시 和睦케하시는 사역이다. 여호와 전쟁 은 거룩한 言約 을 통하여 열방가운데 (律法준수의 방법으로) 하나님의 왕되심만을 선전 (demonstration)해야 하는 거룩한 윤리를 부과하게 되었다. 여호와 전쟁 은 비록 핍박과 압제의 고난 속에서도 選民으로 하여금 이미 와 아직 의 終末論的 勝利를 선포하게 만든다. 여호와 전쟁 은 아담의 타락이후 나타나서, 족장들에게 반복적으로 약속되었으며, 출애급 구원사건에서 歷史化되었고, 이스라엘의 대외민족들과의 접촉으로 再經驗되었으며, 신약에서 그리스도의 사역과 십자가에 의해 成就되었고, 성령에 의해 지금도 再經驗되고 있다.
이러한 결론 속에서 단순히 이미지의 차원이 아닌 구속사적 본질을 추출할 수 있는가? 본인은 추출해낼 수 있다고 본다. 그 이유로서, 하나님 나라를 위한 무력사용의 무효화를 선언한 선지자들의 선포와, 그 선포의 성취로서, 예수님의 가르침과 사역의 본질이 단순히 전쟁 의 이미지가 아닌 전쟁 그 자체이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는 점, 사도들과 신약의 크리스챤들의 삶과 世界觀(Christian spirituality)이 본질적으로 전쟁 으로 설명하지 않고는 무의미하다는 점. (4) 특히, 성령세례의 역활이 전쟁 의 세계관을 소유하게 한다는 점. 敎會의 歷史가 여호와 전쟁 을 떠나서는 설명될 수 없다는 점. 오늘날의 현지 선교사역에서 여호와 전쟁 은 불가피한 現實이라는 점. 등에서이다. 그러므로, 성경의 전쟁개념은 오늘날의 크리스챤들이 선택해야 할 성질의 것이 아니라, 본질적인 삶 자체이며 필연적 세계관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그러면, 이러한 윤리적 가능성만으로 이 世界에서 활동하는 악의 실체를 파악하게 하는 윤리적 규준들(規準 criteria)과, 더 나아가서 윤리적 指針을 제시할 수 있는가? 이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그리 쉽지 않지만 지금까지의 토의를 근거로 몇가지 유익한 해석적 범주(範疇,categorie)들을 제시할 수는 있을 것이다. 그것들을 제시하면:
두 왕국 개념 ( KOG over KOS, not KOG against KOS ): 하나님 나라와 사탄
의 나라와의 갈등으로 세계를 바라보는 원리. 그러나 사탄의 영향은 하나님
의 주권 아래 있다는 것이 성경적 세계관이다.
자기주장의 원리 ( principle of self-assertiveness ): 하나님의 자기주장
인가 아니면 인간의 자기주장인가를 판단하는 윤리적 원리.
힘의 구조 원리 ( principle of power-structures ): 이 세계의 구조는 본질
적으로 힘(powers)에 의해 지배받는 구조라는 묵시문학적 판단원리.
참된 평화(안정)와 거짓 평화(안정): 어느 힘이 보다 영속적인 안정과 평화
를 가져다 줄 수 있는지를 판단하는 선지자적 판단 원리.
우리는 이와 같은 세계분석 기준에 근거하여 기독교 역사상 여호와 전쟁 이 어떻게 이해되어져 왔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B. 세계사에 나타난 기독교의 전쟁페러다임
예수님은 폭력과 보복의 정신을 배격하셨다. 초대교회는 이러한 모범을 따라 폭력을 혐오했다. 그러나 예수께서 힘의 철저한 거부로서의 절대평화주의(absolute pacifism)를 가르치셨는가? 여기서 문제가 발생한다. 예수님은 위에서 부터 위임된 권세를 가르치셨으며 또 십자가에 죽기까지 세속권세에 저항하지 아니하셨다. 많은 이들은 이러한 말씀과 십자가에 죽으심을 철저비폭력 의 象徵으로 이해하여 많은 크리스챤들이 平和主義者 가 되어야 한다는 倫理的 입장을 고수하기도 했다. 그러나 현대의 평화주의는 초대교회에서의 평화주의와는 그 狀況이 다르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초대교회는 적은 소수였으며 정치적으로 매우 미약한 존재였다. 또한 오늘날의 세계는 로마시대와는 달리 문화적 정치적 多元主義 속에 있다. 따라서 초대교회와 현재 세계를 동등하게 간주하는 것은 公平하지가 않다. 그러므로 우리의 입장을 일방적으로 제시하기 전에 교회가 역사적으로 전쟁에 대하여 어떤 立場들을 취해왔었는가를 살펴보는 것이 현명할 것이다.
기독교 역사상 전쟁에 대한 윤리적 입장들은 크게 세가지로 나타났었다: 十字軍戰爭(the Crusade), 正當戰爭(the Just War), 反戰思想(rejection of war)이다:
1. 십자군 전쟁 (the Crusade): 여호와 전쟁의 종교세속화.
십자군 전쟁은 성경에 나타난 聖戰 (holy war) 개념에 대한 오해로서 빚어진 결과로서, 구약의 여호와 전쟁 을 현실에 문자적으로 적용하려고 한 시도라고 할 수 있겠다. 이러한 類型의 전쟁은 흔히 義 , 하나님 나라 , 하나님의 義 , 기독교 文明 을 수호하기 위한 전쟁이라는 大義名分을 내세운다. 이러한 견해에 따르면, 기독교가 싸워야 할 대상인 악 을 어떤 불신단체나 국가에 적용하여 그것을 제거 하여 기독교 문명(christian civilization)을 이룩 하는 것이 기독교의 궁극적 사명으로 이해된다. 이 경우 흔히, 구약과 계시록의 戰爭槪念을 그 신학적 根據로 제시한다.
그러나 이러한 십자군 전쟁모델은 여호와 전쟁 의 世俗化 내지 이데올로기화 현상의 결과로서, 그것은 다음과 같은 誤謬를 안고 있음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첫째로, 그것은 성경의 전쟁개념에 대한 해석적 오류를 안고 있다. 위에서도 살펴보았지만 신구약 성경에 나타난 여호와 전쟁 은 칼과 창에 의한 인간의 전쟁이 아닌 기적과 선지자적 말씀에 의해 수행되는 하나님 주도적인 구속의 전쟁이다. 더구나,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들을 통해서 인간들이 칼과 창 에 의하여 샬롬王國을 建國하려는 시도를 불가능한 것으로 선포하셨다는 것을 이미 살펴보았다. 둘째로, 십자군 전쟁은 성경에서 말하는 거룩한 땅 에 대한 오해의 所致이다. 팔레스틴 땅을 聖域으로 간주하였기 때문에 십자군 전쟁이 발발하였던 것이다(AD. 11--12c). 그 결과 그 땅을 장악한 모슬렘을 쉽게 사탄과 同一視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예수님의 사역에 의한 신구약 사이의 구속사적 進展關係을 이해하지 못한데서 비롯된 것이다 . 예수님은 자신의 육체로 이러한 聖俗의 구분을 철폐하셨다고 성경은 보고하고 있다. 셋째로, 복음의 보편성을 망각한 利己主義的 信仰 때문이다. 유럽의 강대국가들이 제 3 세계로 진출하던 시기에 유럽교회는 쉽게 토착인들을 異邦人 으로 매도하게 된 것이 그 實例이다. 복음의 보편성에 대한 망각은 교회로 하여금 민족주의, 국수주의, 전체주의, 혹은 제국주의적 희망을 게 하는 촉매역활을 하여왔다.
현대에서도 역시 이러한 성전모델(holy-war paradigm)은 兩次世界大戰과, 미국의 베트남 전쟁, 유럽의 테러리즘 등의 경험에서 여호와 전쟁 의 세속적 이데올로로기화 현상을 지켜볼 수 있다.
2. 정당전쟁 (the Just War): 호와 전쟁의 관료주의화 내지 정치화 현상.
이 견해는 거의 모든 크리스찬의 입장으로서, 사실 타락한 세상에서는 전쟁이 必要惡(regrettable necessity 혹은 lesser-evil) 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현실적인 삶의 영위에 필요하기에 holy 는 아니더라도, just 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견해는 사실 도나투스파를 대항하여 박해의 폭력을 행사하기로 결정한 어거스틴이 그 원조라고 할 수 있다. 어거스틴의 정당전쟁 이론을 칼빈 등 개혁자들이 이어받았다. 그러나 이 이론을 보다 잘 다듬은 사람은 Thomas Aquinas이었다. 이퀴나스는 정당전쟁의 근거를 세가지로 提示했는데 그는 이 조건이 충족되면 戰爭은 감소하게 될 것이라고 보았다: 전쟁은 하급장교가 아니라 통치자에 의해 수행되어야 한다. 그 大義名分이 분명하고 정당할 것. 선의 보장과 악의 회피 라는 올바른 목적을 가질 것 등이다. 이것은 나중에 많은 학자들에 의해 수정되었지만 必要惡 이라는 점에서는 모두 동의한다.
그러나 위의 정당전쟁의 근거는 첫째로, 군주의 便宜를 위해 제정되었다는 官僚主義的 한계가 있고, 둘째로, 대의명분과 전쟁수행방법에 있어 善惡의 기준이 상당히 모호하며 시대변화에 따라 적당하게 수정하는 변이성을 가지고 있으며, 셋째로, 그것은 상황윤리적이며 상대주의적 義 의 개념으로서 기독교의 절대진리의 정신과는 맞지 않는 점이 있다. 즉, 모든 평화로운 수단이 모두 동원된 이후에 마지막으로 시행될 조치가 戰爭이라는 견해는 매우 이성적인 듯하나 사실은 그 기준이 매우 모호하고 가변적이며 현실의 전쟁들이 그러한 이성의 원칙에 반대하여 발생한다는 것이다. 오늘날 기독교 사회윤리학에서 정당전쟁에 대한 논의는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므로 이 문제는 나중에 다시 언급하도록 하겠다.
3. 평화주의 (Pacifism)
궁극적으로 여호와 전쟁이 교회에 요구하는 바는 십자군전쟁도 아니고 정당전쟁도 아니다. 그러면, 전쟁에 대한 기독교의 윤리적 입장은 평화주의적 反戰思想인가?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평화주의적 입장이 매우 다양한 傳統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여야 한다. 여기서는 다양한 평화주의적 立場들을 간략히 요약 소개만 하려 한다.
理想的 純粹主義: G. Fox(재세례파), Quakers, C.Tolstoy, Francis of
Assisi 등에게서 살펴볼 수 있는 견해로서 예수의 가르침--특히, 원수사랑의
계명--을 문자적으로 지켜야 한다는 원칙론적 입장이다.
修道院主義: 중세의 수도원운동, 메노나이트, 모라비안 교도들에게서 살펴
볼 수 있는 입장으로서 현실세계에서의 도피적 성향을 가진다.
反戰主義: 모든 전쟁을 무조건적으로 반대하는 입장
先知者的 示威運動: 베트남파병시 미국의 예수회가 행한 행동으로서 구약의
선지자들과 같은 행동을 보여야 한다는 입장.
極端的 政敎分離主義: 여호와의 증인에게서 두드러지는 견해로서 기독교에게
의무를 부과하는 국가를 악으로 간주하고 징병의무나 납세의무를 완강히 거
부한다. 이 견해에 의하면 국가는 사탄적 실체이다. 따라서 교회는 국가의
권위를 전혀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
殉敎者的 犧牲主義: 전쟁을 감행하려는 국가의 권력 앞에 개인이 희생함으로
평화를 가져오게 할 수 있다는 이해.
非暴力 抵抗主義: 간디와 루터 킹의 운동모델으로 비폭력시위로써 압제군주
에 대항하는 행위.
이와 같이 기독교평화주의는 여러가지 행동유형으로 관찰될 수 있으며 각각의 主義 및 行動類型들은 제각기 미묘한 신학적 견해의 차이를 나타내고 있다. 이러한 각각의 類型이 발생하게된 근본적인 배경은 대부분 국가의 권위 에 대한 교회의 다양한 해석전통때문이라고 하겠다. 즉, 전쟁에 대한 國家와 敎會의 권한소유의 정도는 어떠한가? 에 대한 견해가 각기 다르기 때문이다. 이 문제에 대한 立場을 暫定的으로 確立하는데 있어 지금까지의 論議되어온 바를 土臺로 몇가지 原理들을 설정하자면, 로마서 13장 해석을 보았듯이, 교회는 국가의 권세가 위로부터 주어진 것임을 자각해야 한다. 이점에서 기독교는 敎會에 대한 國家의 권위행사를 惡으로 간주하는 여호와의 증인 및 극단적 재세례파의 견해를 인정할 수 없다. 武力에 의한 샬롬획득이 결코 효과적이고 永續的이지 못함을 깨우쳐야 하는 任務가 있다. 따라서, 폭력과 전쟁에 대한 기독교인의 태도는 戰士로 오신 예수그리스도께서 구약의 여호와 전쟁 을 성취하셨다는 사실 ( 戰爭終熄戰爭 )에 根據해야 한다. 여호와 전쟁 의 窮極的 목표가 궁극적 악에 대한 승리 와 동시에 그에 따른 和解와 一致 라는 이중측면이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 어느 한쪽 측면만 강조하다보면 다같이 오류에 빠질 수 있다. 그것은 惡에 대한 저항과 함께 인간과 인간, 인간과 세계, 인간과 하나님사이의 화해라는 총체적 구원에 관심을 두어야 함을 의미한다.
그러면, 우리의 立場은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이것을 提示하기 전에 먼저 최근 현대사에 있었던 한 전쟁을 위에서 제시한 원리들을 가지고 分析해 봄으로 더욱 더 우리의 결론을 結束시키고자 한다.
C. 미국-이라크 전쟁의 의미: 힘의 이데올로기의 국제적인 지배
최근의 역사에 있었던 이란-이라크 전쟁, 아랍-이스라엘 전쟁, 그리고 미국-이라크 전쟁을 성경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오늘날의 시대구조를 분석해야 한다. 오늘날의 세계는 폭력적인 힘의 구조, 힘의 논리 속에서 움직여가고 있다. 힘의 이데올로기가 현대에 들어와서 새로운 현상이 아니다. 이전에도 사람들 사이에 지배하여 왔으나 이번 전쟁을 통하여 국제사회에까지 지배적인 요소로 부상하게 된 것이다. 지금 그것은 강대국의 정치가들 뿐만 아니라 국내 정치가들의 정치논리 속에서도 그러한 힘의 논리(power game)가 지배하고 있다. 인간전쟁은 오로지 힘의 논리의 현상적인 결과일 뿐이다. 많은 사람들은 힘 이 모종의 평화 를 보장하고 유지시켜줄 것이라고 믿고 있으며 또 그 확신 속에서 삶을 영위하고 있다. 그 일례로 미-소 간의 군비증강과 핵무기 감축 협정등이 그러한 신념을 잘 보여주고 있다.
최근에 있었던 미국 대 이라크의 전쟁 역 중동지역에서의 힘의 균형 내지 힘의 자기주장이었다는 점에서 미국이 비록 정전 (just war)이라고 주장하고 또, 이라크가 성전 (holy war)이라고 주장해도 그것은 모두 힘의 논리를 숭배하는 행위에 불과한 것이었다. 그들이 벌인 전쟁은 힘의 논리를 정당화하는 세속 이데올로기에서 빚어진 인간나라의 산물인 것이다. 특히 미국은 이라크에 대한 무력조치가 세계평화를 위한 윤리적 도구로 간주하였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이 과연 하나님나라를 위한 하나님의 자기주장의 표현이라 할 수 있는가를 물어보아야 한다. 오히려, 미국과 이라크 양자 모두 자국의 샬롬 을 보호하기 위하여 군대의 세력에 호소하려는 것으로 보여진다. 지금 이 새로운 군대귀신 이라는 세력 앞에 세계의 정부들이 절하며 섬기고 있다. 그들의 논리는 평화주의로 교묘하게 채색되어 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이번 이라크 대 미국의 중동전쟁이 미국의 일방적 군사우위로 종결됨에 따라 미국은 1 차 세계대전 이후 윌슨 대통령이 국제연맹의 창설을 제의함으로써 꿈꾸워 왔던 강력한 힘의 시대, 즉 세계 신질서 의 구축에 보다 한걸음 다가섰다. 이번 전쟁을 수행하면서 미국 부시 대통령은 걸프전쟁을 정당화하기 위하여 이 신질서에 대하여 계속 언급하였다. 는 냉전 이후 새로운 국제적 행동규범이 마련되어야 하고 세계 도처에 새로운 의미의 공동체가 창설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침략자를 국제사회가 응징함으로 세계평화를 룩할 수 있다고 밝혔다.
여기서, 바르트의 전쟁관을 잠시 언급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이 신질서 개념 이 세계무대에 본격적으로 등장하게 된 2 차세계대전 때의 (Von Rad와 동시대적 인물임) 신학자이기 때문이다. 바르트는 戰爭을 국가의 本質에 속하지 않는 것으로 보았고 최선을 다한 후에 취해질 최후의 수단(한계상황) 으로 간주함으로 정전모델(Just War)에 가까운 입장을 보인다. 그러나 K. 바르트는 이 신질서 개념이 구약의 샬롬의 世俗的 표현으로서, 히틀러에게 나타났다고 보았다. 즉, 히틀러는 이 新秩序 개념을 가지고 자신의 전쟁을 正當化 시키고 있다고 지적하면서, 히틀러와 독일이 이러한 세속적 환상이 루터의 두왕국론의 곡해라는--즉, 복음의 기초가 올바르게 심어지지 않은 데서 기원한다고 믿었다. 이점에서 바르트는 복음과 세속이데올로기와의 관계를 잘 이해하고 있다고 보인다. 결국, 미국이 주창한 新秩序 는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라, 로마, 히틀러, 등 세계지배자들의 이데올로기의 재현인 것이다.
이러한 국제적 힘의 세계에 한국도 끌려갈 수 밖에 없었다. 지어 이러한 힘의 흐름을 틈타서 국내 정치가들은 자기들의 힘의 정치를 정당화하는 최적기로 삼고자 한 것을 부인할 수 없다. 그야말로 이 세계는 힘이 없이는 낙오할 수 밖에 없는 운명이다. 국내기업 역시 이러한 힘의 균형에 편승하려고 안간힘을 기울이고 있는 실정이다. 사실 오늘날 많은 교회 역시 이러한 물결에 휩쓸려가고 있는 실정이다. 우리의 교회 안에 이러한 힘이 지배하며 또한 거짓된 샬롬에 눈이 멀지는 않았는가라고 자문해보아야 할 것이다.
미국이 전쟁을 결심한 것은 소위 신질서 즉 세계평화질서를 위해서이다. 그러나 우리 교회가 물어보아야 할 것은 과연 국제사회에서 무력사용 을 통하여 얼마나 참된 평화 가 보장될 수 있는가 하는 선지자적 물음(prophetic question)이다. 러한 의미에서 하나님 나라에 소망을 두는 크리스챤은 어느 한편을 지지하는 경솔함에 빠지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진정한 세계평화가 그러한 방식의 전쟁을 통하여 이루어지지 않을 것임을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명백하게 알고 있기 때문이다.
D. 크리스챤의 전쟁윤리: 비폭력 화해주의
그러면 힘의 논리가 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 이 때에 우리 크리스챤들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우리가 힘의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다면 먼저 진정한 힘 이 무엇인가를 찾아야 할 것이다. 하나님은 과연 이 세상의 논리에 끌려다니면서 살기를 원하시는가? 분명히 그것은 아닐 것이다. 그러면 주께서 원하시는 힘의 삶 또는 능력의 삶 은 어떠한 것인가? 앞서서 살펴본 구약의 여호와 전쟁 개념, 아니 성경전체가 주장하는 여호와 전쟁 개념이 그것에 대하여 답변해주고 있다. 그러기에 우리는 성경에 나타난 전쟁개념을 새롭게 인식해야 할 뿐만 아니라 우리의 世界觀(world-view)과 삶의 체계(life-style)에 있어서도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입증해보여야 할 것으로 보인다.
본인은 그것을 범포괄적인 비폭력 화해주의 라고 주장하고자 한다. 화해의 윤리는 원수를 사랑하라 하신 예수님의 말씀에 가장 잘 표현되고 있다. 원수사랑은 철저한 화해를 요구하는 것이다. 그 이유는 戰士이신 예수께서 여호와 전쟁 을 성취하는 마지막 전쟁을 치루셨으므로 더이상 원수라는 개념자체가 예수에게 존재할 수 없게 만드셧기 때문이다. 원수사랑의 계명은 이러한 여호와 전쟁 의 성취가 요구하는 종말의 윤리라고 보여진다. 따라서 세계 속의 기독교회는 이러한 성취의 관점에 근거하여 극단적 화해를 지향하는 거룩한 공동체가 되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교회의 화해의 사역은 궁극적으로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 그리고 인간과 하나님 사이의 깨어진 관계를 회복하는 일에 앞장서는 것이라고 본다. 이 화해의 사역은 여호와 전쟁 의 논리와 같이 오직 하나님의 能力 을 의지하는 것으로만 가능하다. 여기서 전쟁에 대한 크리스챤의 입장을 몇가지로 제시하고자 한다.
1. 인간과 인간 사이의 중재사역
크리스챤은 하나님 중심의 전쟁이 아닌 모든 인간주도의 전쟁형태를 궁극적으로 거부해야 할뿐더러 전쟁의 최소화를 위해 갈등세력 간의 중재 를 모색하여야 한다. 회는 인간과 인간사이의 평화를 위해 힘써야 할 의무가 있다. 여기서 궁극적인 전쟁의 거부란 Anabaptist처럼 절대적 평화주의 의 의미도 아니며 수도원적 도피주의 도 아닌 궁극적 평화주의 의 志向로서, 武力 이라는 수단에 의하여 모종의 永續的 平和 를 얻고자 하는 모든 시도(세속적 성전이데올로기)를 포기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이 말은 법에 의한 무력사용 이 정당방위를 인정하지만 그러한 것도 궁극적인 샬롬 을 가져다 주지 못하는 잠정적인 것임을 인정하며 따라서 궁극적인 크리스챤의 희망으로서는 거부되어야 함을 말한다. 이점에서 국가와 교회와의 관계문제는 기독교의 전쟁관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연구과제가 된다. 전통적으로 교회는 국가의 권세를 인정해왔으나 그것은 위임된 권세 로서 인정되어야 할 것이다.
교회는 국가가 그 권세를 가지고 전쟁을 행사하려 할 경우 어떻게 해야 하는가? 여기서 정당전쟁의 문제가 대두된다. 정부는 자국이 발동한 전쟁에 정당성을 부여하려고 안간힘을 쓴다. 그러나 교회가 그러한 전쟁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것이 타당한가 하는 문제이다. 우리가 앞에서도 언급하였듯이 正當 戰爭 (just war)을 인정하는 기독교 내의 평화론자들은 체로 두가지 경향의 전쟁윤리를 제시하고 있다. 첫째의 유형은 힘의 균형과 평화유지를 위해서는 국지전과 같은 소규모의 전쟁이나 강력한 힘의 적용으로써 무력사용을 필요하다고 인정하고 있다. 둘째의 유형은 전쟁은 언제나 분명히 하나님의 뜻에 위반된다고 말하면서, 또한 국제적인 논쟁을 전쟁으로 결정짓는 방식은 예수 그리스도의 교훈과 어긋난다고 말하면서도 자국의 방어를 위한 군대나 치안의 힘을 정당하다고 말하는 평화론자들이다.
그러나 위의 두 유형들은 모두 힘의 論理와 聖戰의 정치이데올로기화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정당성의 絶對的 基準을 찾지못하고 있다는 점에서 다같이 矛盾을 안고 있다. 국내의 治安을 위해 법적으로 정당한 무력사용(예를 들어, 법적 집행으로서 사형제도나 구금같은 경우)을 인정하지만 국외적 무력사용을 반대하는 것은 모순이다. 또한 국내의 법적 적용의 문제(이 문제는 본 논고에 상당히 빗나가는 것이지만)나 국제사회 내에서의 응징으로서의 전쟁(일를테면 최근의 미국이 이라크를 대항하여 벌인 전쟁)이 과연 어느 기준에서 정당성이 인정되고 그 타당성이 과연 절대적인가는 상당히 모호한 상태에 있다. 예를 들어 이라크는 자신의 전쟁을 聖戰(holy war)이라고 일컫고 있으며, 미국은 쿠웨이트를 침공한데에 대한 응징의 조치라고 자국의 전쟁행위를 각각 正當化하고 있다. 각기 정의를 명분으로 내세우고 있다. 또한 국내의 치안을 위해 법적제제가 가능하다면 미국이 이라크를 대상으로 전쟁을 벌인 것이 정당하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결국, 양자 모두 샬롬의 세속화 이데올로기라는 한계점을 안고 있기에 그 절대적 기준 을 상실하고 있는 셈이다.
그러면 과연 성경은 무엇이라 답변하는가? 분명한 것은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전쟁만을 정당하며 의로우며 타당하다 고 여기신다는 점이다. 앞에서 제시한 두 유형의 전쟁윤리는 모두 인간나라의 윤리인 힘의 논리 를 신봉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증명하고자 한 것은 성경은 힘의 논리 가 아니라 성령의 능력 에 의한 섬김 과 순종 과 그리고 화해 의 논리로서 전쟁을 묘사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세력다툼 또는 헤게모니 爭奪戰이라는 힘의 논리 속에서 수행되는 모든 전쟁형태(또는 그와 유사한 무력행사)는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
하나님이 모든 인간들의 피흘리는 전쟁을 의롭지 못한 것으로 간주하신다면 우리는 정부를 상대로 모든 국가방위를 포기하고 외국의 침략에 대비하여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하도록 촉구해야 할 것인가? 여기에 크리스챤의 고민과 갈등이 놓여져 있다. 하나님 나라의 시민인 동시에 이 세상나라에 속한 시민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국가의 권세를 인정해야 하지만, 또한 더 높으신 하나님의 권세를 두려워해야 한다. 사회의 시민으로서 화평하고 단정한 생활을 강구하는 것은 성경적인 삶이다. 그러나 우리의 궁극적인 삶의 의미와 목표는 하나님 나라에 놓여져 있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의 윤리를 세속 정부에 적용하여 강요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 그러나 이 문제에 관한 크리스챤의 최대의 임무는 그러한 하나님 나라의 삶이 어떠한 것인지를 세속 정부에 대항하여 과시해보이며 화해의 가능성를 모색하여야 할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전쟁이 영속적이지 못함을 깨우치는데 앞정서야 할 의무가 있다.
이점에서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전쟁을 무가치한 것으로 간주하시듯이 우리의 삶의 방식에는 거룩한 저항정신 이 요구되는 것이다. 그러나 전투적인 교회는 반전 시위를 거리에서 펼치는 식의 형태로 먼저 인식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그것은 또다시 힘의 논리에 빠져드는 작업이다. 그것은 궁극적으로 하나님 나라의 시민으로 하나님의 전쟁을 나타내는 삶의 문제이다. 예수님의 거룩한 시위가 제도에 대한 도전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그 제도 넘어 자리집고 있는 악의 세력들에 대하여 도전한 것이다.
크리스챤은 힘의 이데올로기를 경계하고 하나님 나라의 중요한 윤리인 섬김의 도를 실천하는가를 스스로 진단할 수 있어야 한다. 화해는 참된 의미에서 섬김이다. 그 섬김은 성령의 능력에 의한 것이어야 하며, 인간과 인간 사이의 형제됨과 일치를 위한 것이어야 하지 섬김을 받고자 하는 권위주의적 높임받음이 그 목적이 아니다. 반면, 모든 인간주도의 전쟁은 힘의 논리를 숭배하고 있다. 그들은 서로에게 자신들의 세력우위를 주장하며 입증하여 섬김을 받고자 한다. 그러한 행위가 국제적으로 나타날 경우를 전쟁이라고 할 수 있다.
오늘날 많은 크리스챤들이 이 세속주의 우상인 힘의 논리 앞에 방황하고 있으며 크리스챤으로서 자기정립을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힘의 논리는 인간나라의 윤리이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의 윤리는 그러한 힘의 주장이 아니라 그 반대로 힘의 철저한 기 또는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고 자신은 섬기는 종이 되는 섬김의 윤리이다. 참으로 정당한 전쟁(righteous war)은 원수까지도 섬기는 그러한 방식으로 수행되어지는 것 뿐이다.
기독교인의 화해를 위한 거룩한 전쟁방식은 악으로 악을 이기는 것이 아니라 선으로 악을 이기는 것이며 모든 악의 모양과 방법을 버리는 것이다. 성경은 악을 대적하는 것을 크리스챤에게 요구하면서 그 방법은 항상 악의 모습이 아니라 선의 모양을 띄어야 할 것을 요구한다(롬 12:17--21). 또한 악을 대적하는데 있어서 하나님을 의지하라고 촉구하고 있음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엡 6:10--12).
2. 인간과 하나님 사이의 중재사역
크리스챤은 인간주도의 전쟁보다 이미와 아직이라는 하나님 주도의 전쟁을 믿으며 소망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화해의 전쟁은 이미 결정적으로 치뤄졌고 지금 치뤄지고 있으며 앞으로 치뤄질 것이다. 크리스챤은 이미 최후의 전쟁에 참여하였으며 지금도 사단의 나라와의 전쟁에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간에 참여하고 있다. 이제 크리스챤이 기대하는 전쟁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마지막으로 그의 원수들과 싸워 이기심으로 자신의 나라를 회복하여 하나님께 돌리실 것이라는 기대이다. 이 기대는 오늘을 살고 있는 크리스챤에게 삶의 의미를 주는 요소가 된다. 그러나 우리의 기대는 일부 세대주의자들이 기대하는 인간 주도의 전쟁과 구별되어야 한다. 성경이 말하는 아마겟돈, 즉 최후의 전쟁은 미소-전쟁이나 이란-이라크, 또는 이스라엘-아랍 등의 인간주도의 전쟁이 아니라 예수님만이 만군의 주 로서 홀로 수행하실 그러한 종말의 전쟁인 것이다.
크리스챤은 하나님 주도의 전쟁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한다. 하나님 주도의 전쟁은 복음전파에서 현실화된다. 기독교의 복음전파는 인간과 하나님과의 화해를 중재하는 것이다. 그것은 오늘날 인간들이 자기들의 경제적 혹은 정치적 패권다툼의 일환으로써 벌이는 모든 형태의 갈등과 이간과 질투와 전쟁의 형태와는 다른 것으로서 오히려 크리스챤이 참여하는 하나님의 구속 전쟁은 인간이 자기의 모든 자랑과 힘이 철저하게 거부되어지는 순종적 의지의 형태로 수행되어지는 것으로서 하나님 자신과 죄인인 인간들을 화목하게 하시는 것이다. 인간은 오직 성령의 능력에 의한 순종의 형태로서만이 이러한 화해를 위한 투쟁에 참여 하게 된다.
크리스챤은 공동체적으로 하나님 나라의 종말론적인 전쟁을 위해 합당하도록 기도해야 한다. 많은 크리스챤들이 사회 속에서의 의의 실현을 위해 그저 기도하는 것은 무책임한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사실은 그 반대임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나라가 이 땅에, 가정에, 사회에, 국가에 임하기를 위해 기도하는 것보다 하나님의 전쟁에 참여하는 방법은 없다. 만일 누가 이 사회 속에서 하나님의 의로운 질서를 구축하는 능력이 자신에게 없음을 깨닫는다면 참으로 하나님의 현재적인 그리고 미래적인 전쟁을 위해 참으로 기도하지 않을 수 없다. 참으로 하나님 나라가 임하기를 기도하는 사람은 자신의 부족과 무능력을 깨닫을 뿐 아니라 용사이신 하나님의 지시에 전적 순종하기를 결심한다.
느헤미야의 기도가 바로 그 나라를 위한 기도를 드린 대표적인 사람이다(느 1 장 참조하기 바람). 참으로 세상에서 빛과 소금이 되는 사람은 느헤미야와 같이 기도하는 사람이다. 페르시아 왕궁에서 술관원으로서 높은 지위와 안정한 생활을 영위하였을 것으로 보이는 느헤미야는 유다의 남은 자들이 당하는 환란을 듣고 먼저 그 환란이 자기의 죄인양 회개하는 기도를 먼저 드렸다. 그리고 나서 하나님의 인도하시는 손을 따라 높은 지위와 안정한 생활을 포기하고 남은 자와 고난을 당하는 일에 자신의 몸을 드렸던 것이다. 올바른 실천을 위해서는 이와같이 올바른 기도가 우선되는 것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오늘날 이러한 하나님 나라를 의식한 기도가 공동체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주님께서 교회를 세우심은 이것을 위한 것이라고 볼수 있다. 바울은 은사를 자기의 것이라고 주장하는 고린도 교회를 향하여 이러한 공동체성을 일깨워주었다. 또한 바울은 자신의 달려갈 길과 싸움을 위해 많은 교회에게 기도를 요청하였다. 참된 중보기도는 대제사장왕이 되신 그리스도의 천상의 중보기도에 참여하는 것이다. 미국이 승리하도록 기도하는 것이 아니다. 그의 나라가 이 땅에 승리의 모습으로 도래하기를 기도하는 것이다. 또한 그의 나라가 공동체를 통하여 충만히 나타나고 증거되며 그 나라의 소식이 세계각국에까지 이르기를 위해 기도하여야 한다.
3. 인간과 자연 사이의 화해사역
크리스챤의 전투적 삶 은 개인의 차원 뿐만 아니라 교회공동체, 더 나아가서 사회문화와 국가에까지 확대되어 적용될 수 있으며 그렇게 되어야 한다. 하나님이 벌이시는 전쟁은 한 개인의 깊은 내면에서 부터 교회와 사회와 국가의 모든 세부적인 부분까지 포괄하고 있기 때문이다. 심지어 그것은 우리의 모든 환경에까지도 포괄하는 우주적인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현대 크리스챤의 삶에 있어서 전포괄성 또는 통합적인 세계관은 매우 중요하다.
여기서 하나님의 전쟁수행에 있어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 공동체의 역활을 인식해야만 한다. 성령의 공동체 또는 제자 공동체 는 예수 그리스도의 싸움을 위한 전쟁도구로 부름을 받았다. 그러므로 교회와 각 신자들은 첫째 아담의 실패가 영향을 준 모든 범위에 걸쳐서 그리스도의 주되심 을 선전하는 전쟁을 수행하여야 한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몸된 교회는 세상 안에서 전투적인 교회가 되어야 한다. 만약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그리스도를 머리로서 모셔야 할 교회가 세상 안에서 전투적인 모습을 잃고 방황한다면 거룩한 촛대는 옮겨지고 말 것이다. 개인의 삶이 이웃과의 관계 속에서 섬김의 방식으로 전쟁을 벌여야 하며 더 나아가 교회가 공동체적으로 세상 속에서 섬김의 전쟁 을 치루어야 하는 것이다.
교회가 세상 안에서 전투적이기 위해서는 먼저, 세속주의의 모든 제도적 권위나 소유의식, 힘의 구조, 패권의식, 개인중심주의의식을 철저하게 거부하는, 이른바 사회학적인 용어로 반대문화 (counter-culture)를 형성하는 모든 시도를 경주해야 한다. 두번째로는, 그리스도의 전쟁도구로서 쓰여지도록 부름받은 제자와 제자모임인 교회는 보다 넓은 안목으로 개인의 깊은 곳과 아울러 세계전체를 포용할 수 있어야 한다. 하나님의 전장이 아닌 곳은 그 어디에도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크리스챤의 전투적 삶은 모든 생명을 귀중히 여기는 것이어야 한다. 교회는 자연의 생명이 파괴되는 생태계문제와 환경오염문제 등에 무관심할 수 없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아직까지 버리지 아니하셨듯이 우리도 세상을 버리지 않아야 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전쟁은 인간구원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세계가 에덴동산의 아름다움을 회복하게 되는 우주적인 회복이 그 궁극적인 목적이 있다 할 것이다.
VI. 맺는 말
지금까지 우리는 성경이 말하는 여호와 전쟁 (Yahweh's War) ,그리고 그 윤리적 意義(ethical meaning)에 대하여 살펴보았다. 우리는 여기서 다음과 같이 본 연구를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여호와의 전쟁은 하나님의 주권사상으로 충일해 있다.
여호와의 전쟁은 신구약에 나타난 하나님의 구원계시의 일관된 통일구조를 이루고 있으며, 과거와 미래에 예속될 성질이 아닌 현재적 측면을 내포하고 있다. 따라서 여호와의 전쟁은 현대 크리스챤의 윤리적 삶과 불가분리의 관계에 있다.
여호와의 전쟁은 인간의 자기주장적 전쟁과 구별되어야 할 성질의 것이다. 이것 역시 현대의 전쟁의 현실과 그 위기에 직면한 크리스챤의 세계관을 구성한다.
이러한 여호와의 전쟁 이 요구하는 크리스챤의 윤리적 입장은 다음과 같이 요약해볼 수 있다.
교회는 모든 생명을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귀중히 여겨야 할 책임이 있다.
교회는 위임된 국가의 권세에도 순종하여야 하지만 더 높은 권세를 가지신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한다.
교회는 화목케하는 일에 앞장서야 한다. 교회의 화목케하는 사역은 인간과 인간, 인간과 하나님, 인간과 세계, 라는 전포괄적인 범위를 내포한다.
교회는 힘 또는 권세의 오용을 막는데 앞장서야 한다. 여기서 참된 힘과 참된 평화가 무엇인지 보여주어야 한다.
교회는 여호와 전쟁 의 문자적 적용과 정당전쟁을 주장함으로 여호와의 전쟁 을 세속화시키고 군주의 이데올로기로 만드는 오류에서 벗어나서 특권층이나 권세자보다 고난받고 압제받는 자들을 구체적으로 사랑하여야 한다.
참으로 거룩한 전쟁은 하나님만이 주도하시는 전쟁이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은 오직 복종과 섬김과 예배의 행위로 하나님의 전쟁에 참여하게 된다. 성경은 신/구약 동일하게 하나의 전쟁 즉 여호와의 전쟁을 말하고 있다. 죄의 사슬에서부터 인간들을 자유케 하는 하나님의 최후 전쟁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로 말미암아 이미 시작되었다. 현재 그리스도인들은 믿음으로 이 종말의 전쟁에 참여하고 있다. 그리스도인의 이 현재적 전쟁은 세상 가운데서 세상의 방식인 힘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방식인 섬김, 화목케 함, 그리고 자기희생으로 나타나게 된다. 그것은 궁극적으로 하나님 나라의 능력으로서 복음전파이며 선교활동으로 귀결된다.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의 자기 우상인 힘의 이데올로기에 굴복하지 않아야 하며 참된 하나님 나라의 윤리를 적극 나타내는 삶으로 살아가야 할 것이다. 힘과 소유를 최고의 가치로 삼고 있는 이러한 세속 이데올로기를 비롯하여 모든 불법 배후의 궁극적 세력에 하나님 나라의 능력을 현재적으로 과시함으로 지속적인 저항을 하는 것이 오늘날 교회의 신령한 전투임을 확신한다.
오직 너 하나님의 사람아 이것들을 피하고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쫓으며 믿음의 선한 싸음을 싸우라. 영생을 취하라. 이를 위하여 네가 부르심을 입었고 많은 증인들 앞에서 선한 증거를 증거하였도다.
(딤전 6:11,12)
아무에게도 악으로 악을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할 수 있거드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하라.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롬 12:17--21)
종말로 너희가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고 마귀의 궤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 (엡 6:10--12)
'성경연구' 카테고리의 다른 글
모세오경개관 강의안 (0) | 2012.03.22 |
---|---|
에스겔 선지자의 메시지 (0) | 2012.03.22 |
여호와의 전쟁(4) (0) | 2012.03.22 |
여호와의 전쟁(3) (0) | 2012.03.22 |
여호와의 전쟁(2) (0) | 2012.03.2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