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연구

여호와의 전쟁(4)

등불지기 2012. 3. 22. 01:11

 

VI. 여호와 전쟁의 종말론적 재해석: 카리스마 공동체

그러면 구약의 여호와 전쟁 개념이 신약에 이르러서 어떻게 되었는가? 신약의 공동체는 구약의 전쟁개념을 어떻게 이해하였으며 어떻게 받아들였는가? 오늘날 크리스챤들이 얼핏 신약성경을 볼때에 신약성경은 철저한 평화주의로 가득차 있으며 그것은 구약의 살벌하고 냉혹한 전쟁논리와 대치된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신약의 공동체와 저자들은 구약의 종말론적인 전쟁개념을 포기하였다는 말인가? 그러한 논리가 정당화된다면 우리는 초대교회의 이단인 말시온의 경우처럼 구약의 하나님과 신약의 하나님을 구별하게 될 것이고 결국 구약의 계시를 부정하게 되고 마는 결과를 초래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과연 구약의 전쟁개념이 신약에서 발견되어지는가 아니면 발견할 수 없는가의 여부를 확인하는 가를 살펴볼 것이다. 여기서는 신약의 성령공동체(교회)가 구약의 종말에 있을 전쟁개념을 성취 한 것으로 재해석하고 있다는 것을 주장할 것이다.

 

A.예수 그리스도: 종말의 戰士 ( eschatological warrior )

그러면 예수님은 여호와 전쟁 에 대하여 어떤 태도를 가지셨는가? 한 마디로, 예수님께서는 구약의 선지자들이 자신들의 메세지 선포의 예언-해석적 도구로 삼았던 여호와 전쟁 개념을 자신의 전 생애에 (성취의 의미로) 적용하셨으며 그▹을 자신의 사역과 하나님 나라 선포의 중요한 이미지로서 채택하셨다. ▹예수님께서는 종말의 전쟁 을 치룰 하나님 나라의 대리자인 인자 (the Son of Man)로서 자신을 이해하시고 늘 전투적 인 자세로 사역하셨다. ▹우리는 사복음서에서--특히, 마가복음서--▹수님께서 자신의 전 생애 동안에 걸쳐서 어떠한 세력과 다투시고 긴장과 갈등관계 속에 계셨음을 쉽게 공감할 수 있게 된다. 예수님께서는 어디에서나 어떤 적대세력을 늘 감지하고 계셨다. 즉 예수님의 메시야적 사역은 구약에서의 여호와의 이미지인 전투자(Warrior)의 이미지를 가지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마 10:34 에서 예수님은 자신이 온 목적을 검을 주는 것 즉, 전쟁을 목적으로 오셨음을 밝히고 있다.

예수님은 사람들로 하여금 사단의 쇠사슬과 압제에서 벗어나게 하시어 하나님의 평화의 나라에로 초청하는 것을 자신의 메시야적 과업으로 인식하셨다. ▹예수님께서는 그러나 하나님 나라에로 사람들을 초청하시기 위해서 먼저 사단의 세력들과 일전의 전투를 벌이지 않을 수 없으셨다. ▹그러기에 항상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 선포는 치유 혹은 이적의 사역과 동반하였다. 예수님께서 병자를 고치시고 귀신을 쫓아내시는 모습은 악의 세력에 대한 전투적인 모습이 아닐 수 없다. 이와 같이 죄악과 고난과 압제의 근본 유발자인 사단의 세력들과의 전투를 ▹수님께서 벌이시는 이유는 그들과 싸워 승리를 거둠으로써 비로소 평화의 나라를 사람들에게 수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병자를 고치시고 평안히 가라 고 말씀하심으로 자신이 이스라엘의 원수에 대한 승리를 선포하신 것이다(눅 8:48; 7:50). ▹수님께서는 자신의 공생애 동안 사단의 시험을 이기고 사단의 나라와 정면 대적하며 귀신을 꾸짖으시며 그리고 축출하시는 사역을 하심으로 사람들을 평화의 나라에로 들어올수 있도록 하셨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는 거라사의 군대귀신 을 호수로 몰살하게 하심으로 출애굽 전통의 승리를 (그 남은 자들에게) 종말론적으로 재적용(再現, re-realization)하셨다. 출애굽 때 하나님이 애굽군인들을 홍해바다에 몰살시키신 것 같이 예수님 자신이 귀신들의 무리를 지금 몰살하고 있으며 또 이 승리를 위해서 자신이 오셨다는 사실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예수님의 이러한 승리에 의해서 사람들이 구원받게 되는 것이며 하나님 나라의 평화에 참여하게 되는 은총을 받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또한 복음서에서 여러번 나오는 풍랑을 잠잠케 한 說話들은 한결같이 출애굽 때 나타나신 勇士의 하나님 으로서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예수님은 종말의 戰士로 오셨음을 보여주는 사건들이다.

그러나 가장 절정을 이루는 예수님 자신의 전쟁사역은 십자가 위에서 대속적인 죽음의 사역을 수행하시는 것이었다. 자신의 대속죽음은 온 인류를 구원의 나라에로 부르기 위한 최종적인 전쟁이었다. ▹그리하여 평화의 하나님 나라를 세우시고자 하신 것이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역은 그야말로 온 인류를 위한 최후의 전쟁 즉, 아마겟돈 전쟁이 아닐 수 없다. 예수님은 구약이 예언한 종말의 여호와 전쟁 을 사람들이 예기치 못하는 섬김 과 죽음 의 방식으로 홀로 수행하신 것이다. ▹예수님의 이 전쟁행위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들이 평화를 얻을 수 있게 되었다.

산상수훈을 비롯한 예수님의 모든 교훈 또한 마치 군 지휘 사령관이 병사들에게 전투방법과 경계사항을 알리는 모습을 연상케 한다고 해도 무방하다. 제자들에게 뱀처럼 지혜로운 것 을 권면하심은 사람들에 대한 주의를 기울일 것을 가르치는 말씀이다. 또한 하나님 나라를 증거하게 하기 위해 제자들을 파송하실 때에도 이리들 가운데 어린 양을 보내는 것 같다 고 말씀하셨다. 그 이유는 제자들의 하나님 나라 증거는 사단의 왕국이라는 흑암의 세력과 싸우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 싸움의 이미지가 가장 잘 나타난 것은 예수님의 비유의 가르침에서▹다. 예수님이 가르친 하나님 나라의 비유는 모두 싸우고 갈등하는 관계를 묘사하고 있다. 정훈택 교수는 알곡과 가라지의 비유를 설명하면서 세상이 끝날 때까지 역사는 알곡과 가라지의 투쟁의 장으로 계속되는데, 열매맺음 즉 윤리문제가 이 거룩한 싸움의 본질임을 강조하고 있다.

제자들의 복음전파 혹은 하나님 나라 증거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전쟁에 동참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신 목적은 바로 자신의 구속전쟁에 제자들을 참여하게 하신 것이다. ▹지금도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전쟁에 제자들로 하여금 참여하기를 부르시는 것이다.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를 이루시기 위한 구속전쟁에 참여하는 것, 그것이 곧 우리의 구원이요 또 복음전파인 것이다. 그 나라의 증거는 악령들과의 치열한 전쟁을 전제하는 것이다. 제자들이 돌아와 전도보고를 예수님께 드릴 때, 예수님께서는 사단이 하늘에서 번개같이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 고 말씀하시면서 제자들이 자신의 전쟁에 성공적으로 참여하여 사단의 세력을 이기고 하나님의 통치를 확립하였음을 언급하셨다.

예수님께서는 당시 만연하고 있었던 유대 민족주의--문자적인 구약전쟁의 인간적인 방식의 전쟁수행으로 하나님 나라를 이룬다는 왜곡된 구약전쟁신학--사상을 철저히 배격하셨다. ▹예수님께서는 인간이 수행하는 인간주권적인 전쟁을 도무지 인정하지 않으셨다. 그것을 자신이 주도하는 사단의 세력과의 전쟁에만 적용하셨으며 인▹들로 하여금 단지 예수님 자신 주도의 싸움에 의한 혜택을 입을 것을 권면하셨으며 더 나아가 적극적으로 예수님 자신의 전쟁에 하나님 나라의 증거자로서 참가할 것을 명령하셨을 뿐이다. 무엇보다 빌라도 권력 앞에서 예수님이 베드로의 무력사용을 막으시면서 검을 가진 자는 검으로 망할 것 을 말씀하심으로(Mt. 26:52) 결국 모든 형태의 인간나라의 전쟁, 인간중심적이고 이기적인 인간주도의 전쟁을 부인하셨다. ▹결국 진정한 전쟁, 의로운 전쟁은 오직 하나님 주도의 전쟁 뿐임을 분명히 하시였다.

우리가 예수님의 사역과 교훈에서 결론내릴 수 있는 것은 구약의 선지자들이 예고하였던 종말에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려고 직접 전쟁을 수행하시리라는 기대를 예수님 자신의 사역에 적용하셨다는 것이다. 구약의 예고된 전쟁은 종말론적인 샬롬의 나라를 이루기 위한 전초전으로서 하나님 자신이 수행하실 것이라는 예언이었는데 예수님 자신이 바로 모든 인간 주도의 전쟁을 거부하고 하나님의 거룩한 대리자(인자, 기름부음 받은 왕, 종말의 통치자)로서 하나님의 전쟁을 수행하셨던 것이다. 즉, 예수님은 종말의 戰士로서 구약의 여호와 전쟁 을 성취하신 새이스라엘의 왕이시다.

B. 누 가

여기서 누가의 역사관을 중요하게 다루지 않을 수 없는데 그 이유는 첫째로, 신약성경에서 누가문서의 분량이며, 둘째로, 누가의 사관은 세속사와의 관계를 진지하게 다루고 있다고 보여지기 때문이다. 여기서 본인은 누가서신에 나타난 성령의 역활 과 여호와의 전쟁 과의 관계만을 제한적으로 취급하고자 한다. 그 이유는 성령이 누가의 역사관에 중요한 역활을 담당하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앞에서 언급하기를, 신약에 나타난 여호와의 전쟁은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홀로 수행된 것이라 하였다. 그러면, 예수께서 그의 제자들에게 약속하신 성령은 자신이 수행하신 사탄과의 종말적 전투와 어떠한 관계에 있는가?

구약에서 여호와의 전쟁은 하나님이 역사와 정치에 어떻게 관여하시는 지 보여주는 말로서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지상에서 활동하시는 능력으로 이해하는 말이었다. 구약에서 이 능력은 성령의 카리스마적 활동에서 확증되었다. ▹구약시대에서 성령이 사람에게 강림하신 때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나라를 위해 열방의 신과 대항하여 싸우며 하나님의 왕권을 드러낼 군사로 부르실 때이다. 이것은 특히 사사들의 활동에서와 다윗과 사울과의 갈등관계에서 두드러진다. 선지자들에게 성령이 임하여 하나님 나라를 증거하게 하신 것도 마찬가지이다. 성령은 그들로 하여금 과거 출애굽 때에 나타나셨던 용사이신 하나님 을 선포하게 하고, 또한 기적을 행하게 하여 그것을 確證(application)하게 하는 것을 가능하게 하신다. ▹러므로, 성령은 勇士이신 하나님의 能力을 現存케하시는 분이시다.

그런데 이 성령이 메시야와(사 11:2), 여호와의 종에게(사 42:1, 61:1f.) 주어질 것이라고 성경에 약속되어 있다. 이 점에서 눅 4:18 이하에서 예수님의 첫 설교의 본문이 되었다는 점은 매우 의미심장한 것이다. 개인 혹은 집단을 가리키는 순교자적 구원자인 여호와의 종 또는 메시야(=기름부음 받은 자) 가 종말에 성령을 받을 것이라는 구약의 예언이 예수께 성취되었다. 예수께서 水洗時 聖靈을 받으신 것은 여호와의 종 으로서 거룩히 任命된 것이었다. 그 성령은 용사이신 여호와의 능력을 행하게 하여 출애굽 구원과 같은 새 구원을 재적용하게 하신다. 예수께서 축사하시고 치유하시는 사역, 심지어 십자가에서의 죽음의 사역까지도 성령의 능력과 밀접하게 관계되어 있는 것이다. 그것은 예수께서 기적 을 행하여 새이스라엘의 구원을 이루기 위해 종말의 여호와의 전쟁을 성취할 戰士로 오셨음을 입증하는 것이다.

오순절에 임한 성령강림은 교회로 하여금 세상 가운데서 여호와의 종 으로서 여호와의 거룩한 싸움을 증거하게 만드는 사건이었다. 성령은 교회에게 예수님의 종말적 전쟁의 효과를 적용시키고, 교회는 이제 율법이 아닌 성령의 법에 따라 예수께서 이루신 새구원을 세상에 매개하는 역활을 담당하게 되었다. 사도행전의 기록은 성령이 교회로 하여금 예수께서 홀로 수행한 구속 전쟁의 효과 를 전하게 하심으로 교회를 전쟁의 장으로 몰아넣고 계심을 말해준다. ▹즉, 신약의 성령강림은 교회를 전투적인 존재로 만들었으며, 하나님의 종말론적 통치에 대한 교회의 선표와 행위는 이 세상신의 적대적 힘을 더욱 자극했다. ▹그것은 교회가 필연적으로 세상 속에서 고난받는 것을 의미했다. 여기서 사도행전은 교회의 투쟁기 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종말적 통치의 징조인 성령은 세상신이 통치하는 영역 가운데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역사 속에 나타났으며 성취된 여호와의 용사되심 을 드높이게 하심을 알 수 있다.

C. 바 울

바울은 구약의 종말론적인 전쟁개념을 어떻게 이해하고 수용하였는가? 바울은 하나님의 마지막 전쟁을 이미 와 아직 으로 이해하고 있었다. ▹그는 신약의 그리스도인들이 예수께서 이미 이루어 놓으신 최종 전투에서의 승리에 참여하고 있다고 말하면서도(롬 8:31), 평화의 하나님께서 사단을 속히 너희들의 발 아래 쳐부숴버릴 것이다 (롬 16:20)라고 말함으로 아직 의 전쟁을 기대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창조주 하나님과 피조물의 화해를 위한 전쟁의 수행자로 이해하였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은 하나님께 반역하는 영적 세력들을 무장해제시키는 구속전쟁이라고 말하고 있다.(골 2:14f; 고전 2:6--9) 에베소서와 골로새서는 그리스도인들이 이미 의 전쟁승리의 혜택을 충만히 누리고 있음을 선포하고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궁극적 전쟁은 여전히 미래에 놓여져 있다고 바울은 이해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때, 하나님께 반역하는 모든 세력들을 평정하여 온 우주에 하나님의 주권을 회복할 때 그 하나님의 계획은 완전히 실현되고 온 우주에 하나님의 샬롬이 이루어질 것이다(고전 15:24--28). ▹리스도인들은 이 전쟁에서의 승리를 믿음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구약의 종말론적 전쟁개념을 바울이 어떻게 재해석하게 되었는가를 다음과 같이 도식화할 수 있겠다.

this age(KOS) coming age(KOG)

< >

창조( ) V-day( )

[구약/묵시문학적 종말론 구조: 도표 6]

coming age(KOG)

>

this age

(KOS)

<

D-day(이미) V-day( , 아직)

[신약의 종말론 구조: 도표 7]

이미 의 전쟁과 아직 의 전쟁 사이에 살고 있는 신약의 그리스도인들은 환란과 시련이라는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의 현재진행적인 전쟁에 참여하고 있다고 바울은 간파하고 있다(빌 1:30). ▹ 누구든지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 는 바울의 경고(딤후 3:12)는 그리스도인들이 아직도 그리스도의 구속전쟁에 참여하고 있으며 그리스도의 최종적인 전쟁은 아직도 남아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온 우주적으로 벌이는 사단의 세력들과의 전쟁을 외적인 핍박의 형태로 받을 뿐 아니라, 그들의 몸 (존재) 자체가 성령이 육신과 그 연합세력들인 죄, 율법과 죽은과 벌이는 싸움의 형태로 전개되는 전장(war field)이다. ▹리스도인이 살아가는 이 세상은 하나님의 구속적인 우주전쟁이 진행되고 있는 거룩한 격전장이다.

또한, 바울은 자신의 삶 자체를 하나의 전쟁 과 같이 간주하였다(딤후 4:7). 또한 자신이 그리스도의 군사로 부름받았다고 말하고 있다(딤후 2:3--4; 빌 1:30). 우리는 바울이 자신의 복음을 전하는데 있어서 상당히 많은 전쟁의 이미지들을 사용하였다는 것을 그의 서신서에서 발견할 수 있다(엡 6:10--12; 고전 9:25,26; 롬 12:17--21). 바울은 매우 호전적인 메세지를 전하였다(딤전 1:18; 롬 6:13). 이러한 의미에서 오늘날의 강단에서는 전쟁의 이미지들을 복음선포의 수단으로 적절하게 사용하는 것은 매우 유익하리라고 본다. 그러나 기억해야 할 것은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이 이해한 전쟁은 불트만의 지적처럼 비신화화 혹은 재해석되어야하는 추상적 우주관이 아니라 우리가 실제로 체험하는 구속사적 경험의 本質으로 이해했다는 사실이다.

바울은 영 을 어떻게 이해하였는가? 우리는 흔히 바울의 이해를 헬라적 영육이원론적 경향으로 이해하기 쉽다. 그러나 바울의 영 에 대한 이해는 헬라적 이원론이 아닌 구약의 영 과 육 에 대한 이해와, 구약의 인간관에 근거해 있다. 구약에서 영 (ruah)은 생기 혹은 능력 으로서 용사이신 하나님의 창조와 구원의 능력을 가리키고 있으며, 육 (flesh)은 그러한 능력을 대적하는 연약한 인간 인간의 무능함 마병 등에 적용된다(사31:3 참조). ▹헬라적 혹은 플라톤적 영육이원론은 인간의 무능함 對 하나님의 능력이라는 개념이 아니라, 사후불멸의 혼과 유한한 육체라는 이원론으로서 하나님의 주권적 능력에 대해서는 침묵한다. 여기서 바울은 사후불멸의 혼을 가르치지 않음을 기억해야 한다. 오히려 군대를 의지하지 말고 용사이신 하나님을 의지하라 는 구약 선지자의 전통을 따라서 육을 쫓지 말고 하나님의 능력 인 성령을 쫗으라 고 권면하고 있는 것이다. ▹성령에 의존하는 것이 율법을 이루는 방법임을 강조하고 있다(갈 5:16ff.). 그러므로 바울의 가르침은 헬레니즘적 이원론이 아니라 구약의 성령론과 인간론에 근거를 두고 있다.

마지막으로 바울의 국가관을 잠시 검토해보고자 한다. 로마서 13 장 이하에 나오는 바울의 국가관은 지금까지 많은 사람들에 의해 관료주의적으로 해석되어 온 것이 사실이다. 만일 바울의 이 국가관이 세상나라의 제도를 옹호하는 식의 관료주의적으로 해석하는 것이 타당하다면 여호와 전쟁 이 어떠한 무력사용도 정당화하지 않는다는 우리의 지금까지의 논의는 矛盾을 일으키게 된다. 왜냐면 국제사회 속에서의 정당한 전쟁 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국가라는 제도가 거의 신적인 권위를 소유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울의 논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국가는 하나님의 종 모든 권세는 위에서 받은 것 위의 권세에 복종하라 는 등의 구약전통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바울은 구약의 선지자들이 강대국의 압제 속에서 언급한 예언자적 심판의 메세지를 그대로 수용한 것이다. ▹구약에서 선지자들이 모든 권세는 위로부터 났으니 위의 권세에 복종하라 는 말을 한 것은 사실 잘못 통치하고 있는 제국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의 권세를 더 두려워하고 그 권세(국가의 권셰가 아니라)에 순종하라는 의미의 소위, 경고의 메세지였다. ▹그러므로 바울은 사실 국가의 제도적인 권세가 아니라 그 보다 더 무서운 국가보다 위에 있는 하나님의 권세를 두려워 할 것을 가르친 것이다. ▹바울은 오히려 로마의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우상숭배를 강요하는 로마제국의 권세를 두려워하지 말라고 가르치는 것이다.

D. 요 한

여기서 요한서신에 나타난 여호와 전쟁 개념을 다루는데 있어 보다 신중을 기하고자 한다. 그것은 요한서신에서 빛과 어둠 및 제자들과 세상 과의 갈등을 묘사하는 부분이 공관복음서나 다른 서신들에 비해 다소 두드러지게 나타난다고 보여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먼저 쿰란문서 중의 하나인 전쟁두루마기의 종말의 전쟁개념을 소개하고 그것을 요한의 그것과 비교하여 보고자 한다.

1. 전쟁두루마기(the Scroll of War Rule, 1QMilh):

이 문서는 와▹ 쿰란의 제 1 동굴에서 발견된 사해문서로서, 쿰란회중의 신학과 영성을 가장 잘 나타내보여주는 문헌이라 할 수 있다. ▹이 문헌은 종말의 때에 어둠의 아들들과 대항하여 빛의 아들들이 어떻게 싸울 것인가에 대한 구체적인 전술을 담고있다. ▹이 문서에서 빛의 아들들이 싸워야 할 원수는 Kittim 으로 나타나고 있으며, 그는 모든 이방나라들을 대표한다. 반면 빛의 아들들은 언약의 자손 으로 불리우고 있다. ▹방나라들과의 최종전쟁은 다니엘서와 에스겔서에도 나타나고 있는데, 이 최후전쟁 사상은 쿰란 종파의 사상에 핵심이 되고 있다. ▹이 종말의 전쟁을 통하여 자기들은 (Qumran sects) 세계를 다스리게 될 것이라고 믿는다. 이 전쟁두루마기는 단순한 상상이나 허구의 이야기가 아니라 앞으로 있을 종말의 전쟁을 위해 자기 회중(the Essene)을 모두 군사가 됨(warriors)을 강조하며 또 예비시키고자 하는 목적을 가지고 있다. 엣센파의 이런 종말 전쟁관은 성경의 종말론적 전쟁과 유사하게 보이지만 사실은 페르시아의 조로아스터교의 이원론적 전쟁개념에 더 가깝다. 즉, 이 세계는 및과 어둠, 선과 악, 그리고 참과 거짓 사이로 나뉘어져 싸우고 있다는 획일적 세계관이다. 이 싸움이 계속되나 종말의 때에 하나님이 간섭하실 때 악은 영원히 파멸될 것이라는 사상이다. 즉, 그것에는 이미 성취된 것이라는 현재성이 결여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두루마기(War Scrolls)에 나타나는 Kittim의 군대 는 어둠의 천사인 벨리알(Belial)의 군대 로도 불려진다. 이 종말의 전쟁의 결과는 어둠 즉, 사악한 세력들이 영원히 파멸되고 영원한 빛과 공의의 통치가 시작된다는 것이다. 쿰란에서 발견되는 이 전쟁문서는 회중으로 하여금 종말의 전쟁을 대비시키기 위한 것으로 아주 구체적이며 상세하게 씌여져 있다. 그러면 이 두루마기에 나타나는 Kittim 은 누구를 가리키는가? Dupont-Sommer는 하박국 문서 를 비교하면서 빛의 아들들이 싸워야 할 Kittim을 로마제국으로 간주하고 있다. 전쟁문서는 엣센파의 핵심사상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으로 열심당의 사상과도 동일한 맥락을 형성하고 있다. ▹이 것은 더 나아가 구약의 사울전통과 여호와 전쟁의 정치적 종교적 세속화 이데올로기와도 같은 맥락을 소유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2. 요한문서와 쿰란문서(War Scroll)과의 비교:

요한서신을 ▹면 빛과 어두움 또는, 하나님의 아들과 악한자의 아들 이라는 이원론적 투쟁이 ▹타나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 ▹그러면 이것은 쿰란문서에서 발견되는 전쟁개념과 어떤 관계가 있으며 어떤 차이가 있는가? 두 문서에는 동일하게 두 영들 의 갈등과 투쟁이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을 가지고 몇몇 학자들은 요한문서가 그노시스주의적 배경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노시스적 이원론은 물질적인 차원인 반면에, 쿰란과 요한문서의 이원론은 윤리적이고 종말론적인 차원을 가지고 있다. 그러면 쿰란문서와 요한문서의 이원론은 동일한가? 이점에 대해서 오병세 박사는 설명하기를, 쿰란문서들에게서 나타나는 두 영들 (빛의 영과 어두움의 영) 의 적대관계와 투쟁이 하나님의 결정적 개입과 심판을 기다리고 있는 미래적인 사건으로만 묘사되고 있는 반면에 요한문서에서는 비록 빛과 어둠의 전쟁이 나타나지만 그것은 이미 그리스도에 의해 이미 절정에 도달했고 승부는 이미 결정이 난 것(현재성)으로 묘사되고 있다. ▹, 쿰란 문헌에 나타난 이원론은 모든 사람은 반드시 어느 한 편에 서게 된다는 지배적 이원론 혹은 절대적 이원론 인 반면에, ▹한문헌은 일종의 수정된 이원론 으로서, 우상을 숭배하는 열국들 가운데서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하며 율법을 지키고자 하는 투쟁을 가리킨다.

각 이원론의 구조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Qumran 이원론: 윤리적/종말적, 미래적

요한 이원론: 윤리적/종말적, 현재적(요한복음),

현재-미래적(요한계시록)

그노시스 이원론: 물질적/현세적, 현재적

< 도 표 8 >

3. 요한계시록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성경이 말하고 있는 여호와 전쟁 에 대하여 혼동하고 s있는 부분이 바로 이 요한 계시록이다. 요한 계시록 역시 구약의 종말론적 전쟁개념을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전쟁에 집중하면서 재해석 또는 재적용하고 있는 책이다. 앞에서도 강조한 바지만 신약의 저자가 구약을 재해석한 것이 비평가들이 말하는 후대의 역사재구성과 다름을 알아야 하겠다. 즉, 전자는 성취의 선포라는 의미에서 역사적 해석인 반면에, 후자는 역사의 재구성이라는 차원에서 해석적 역사라고 일컫을 수 있겠다.

신약에서 요한계시록 만큼 여호와 전쟁 개념이 풍부한 책은 없다. 그러나 요한계시록의 진정한 전쟁개념은 거의 올바르게 이해되어지지 않고 있다. 그 이유는 구약의 종말론적 전쟁개념에 대해 무지하거나 그것을 오해하기 때문이다. ▹요한 계시록은 현대의 아랍과 이스라엘 전쟁이나 가능한 미/소 전쟁 같이 인간주도적인 전쟁을 말하고 있지 않다. 그것은 아담의 죄를 정복하고 범죄 이전의 상태와 같은 새하늘과 새땅의 창조를 위하여 싸우시는 하나님 주도의 전쟁, 하나님 자신의 구속전쟁을 선포하고 있다. 오로지 하나님의 전쟁(Jesus the Warrior)만이 고난당하는 자기 백성들에게 의미가 있을 뿐이다.

요한계시록 역시 다른 신약성경과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의 현재적 승리와 미래적 승리를 장엄하게 묘사하고 있다. ▹이 책은 단순히 미래의 모든 사건에 대한 각본이 아니다. 그것은 오고오는 시대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하나님이 승리하리라는 확고한 믿음을 가지고 고난많은 이 세상에서 인내 하라고 강력하게 호소하는 말씀이다. ▹시록은 미래의 승전만을 전하지는 않는다. 계시록 역시 하나님의 현재적 승리를 놀랍게 선포하고 있다. 전쟁은 이미 갈보리에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승리를 거두었다. ▹의 희생의 피로 말미암아 모든 나라 백성들을 불러모아 하나님 나라 백성이 되게 하였다고 말한다(계 5:9--10). 그러나 그것은 결정적 승리(D-day)이지 최후의 승리(V-day)는 아직 아니다. ▹악의 세력은 이미 파멸되었으나 치열한 전투는 계속된다(계 12:17).

E. 요약 및 의의

신약성경을 얼핏보면 신약의 저자들이 구약의 전쟁개념을 거부한 것처럼 보인다. 많은 사람들이 주로 구약은 공의의 하나님을 신약은 사랑의 하나님을 묘사하고 있다고 말하는 이유는 그러한 현상적인 관찰에서 비롯하기 때문이다. 즉, 신약의 원수까지 사랑하라 는 절대평화의 논리와, 구약은 눈에는 눈, 이에는 이 라는 절대보복의 논리를 서로 상충되고 조화되지 않는 것으로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그러나 소위 신약의 절대평화주의와 구약의 공의의 응보사상은 여호와께서 싸우신다 는 종말론적인 시각 안에 수용될 수 있다고 본다. 예수께서 여호와 전쟁을 성취하실 戰士로서 평화의 나라를 얻기 위한 전쟁방식을 철저히 독점화하셖고 세상의 무력전쟁에 의한 샬롬획득을 완전히 무력화하시는 전쟁을 벌이셨기 때문에 누구든지 영속적 안정을 얻기 위하여 무력을 행사하는 것은 실패로 끝날 수 밖에 없다. 사실 신약에서 평화논리와 전쟁논리는 모두 동전의 두면과 같이 하나이며, 구약의 전쟁개념이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근거로 재해석되고 재적용된 것이다. 즉, 예수께서 종말의 戰士로 오셔서 샬롬의 나라를 위한 마지막 전쟁(eschatological war)을 치루셨기 때문에 세상의 모든 전쟁은 무효화가 선언된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이미 승리하셨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은 믿음과 성령으로 그 승리의 결과에 참여하고 있으며 이제는 칼과 창으로서가 아닌 성령의 능력으로써 화해를 향한 투쟁의 길에 참여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신약의 여호와 전쟁 모티프는 구약의 그것과 다른 것이 없으며 오히려 구약의 聖戰이 종말적으로 성취된 것이다.

여기서 만일 우리가 신약과 구약의 전쟁개념을 구분하여 구약의 계시를 신약의 그것보다 열등한 혹은 원시적인 것으로 간주하게 된다면 구약계시의 불완전성을 인정하게 되고 말것이며 더 나아가서 하나님을 불완전한 분으로 주장하는 꼴이 되고 만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이 어제나 오늘이나 변함이 없으신 신실한 분이심을 믿는다면 신약성경이 구약성경의 전쟁개념을 그대로 훌륭한 유산으로 물려받았다고 해야 합당하다. 그러나 오히려 신약은 예수님의 새언약적 사역으로 말미암아 구약의 종말론적인 전쟁개념을 보다 철저화하고, 첨예화되고, 극적인 것으로 승화시켰다. 신약성경은 우리에게 보다 철저하고 보다 완전한 전쟁의식을 우리에게 요구하고 있다.

하나님이 정하신 때에 하나님 자신이 남은 자의 구원을 위해서 주권적으로 직접 전쟁을 수행하실 것이라는 구약의 종말론적 전쟁개념은 주로 포로기의 구약 선지자들에 의해 형성된 것인데 신약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것을 자기 자신에게 적용하시고 자신이 수행하신다고 주장하셨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작업은 구약의 종말론적인 전쟁개념을 없애신 것이 아니고 더욱 완전하게 하신 것이다.

그의 제자 공동체가 예수님의 승천 직전에, 당신의 나라(하나님의 죄후전쟁을 통하여 이룩될 샬롬의 나라)가 임할 때가 지금입니까? 라고 물었을 때 그들은 하나님의 최종 전쟁에 대하여 물은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복음전파를 우선으로 지적하심으로 제자들은 구약의 최후 전쟁개념이 아직도 끝나지 않았음을 알게 되었으며 구약전쟁개념의 재해석과 재적용이 필요함을 알게 된 것이다.

성령의 오심과 더불어 비로소 신약의 그리스도인들은 이미와 아직이라는 하나님 나라의 시간 구조 속에서 구약의 전쟁개념을 이해하게 되었다. 즉, 하나님의 최종 전투는 이미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과 십자가 위에서 치뤄졌다. 그들에겐 승리는 이미 확보된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예수 그리스도의 최종전투를 미래에 남아 있다는 것이다.

교회의 복음전파 곧 하나님 나라의 증거사역은 바로 그 전투의 긴장되는 현장 속에서 이루어졌고 이해되어졌다. 신약의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의 종말론적이고 묵시적인 전쟁 즉, 구속과 새창조를 위한 하나님의 우주적 전쟁에 현재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하나님의 전쟁에 참여하고 있음은 고난과 핍박의 형태로 확인될 수 있다. 그리스도인의 전쟁은 예수 그리스도의 전쟁에 참여하는 것이며 그 참여는 미래에 있을 하나님의 최후전쟁에 이르기까지 지속될 것이다. 요약하자면, 성경이 말하는 전쟁은 종말의 戰士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Jesus the Warrior)의 사역으로서, 과거,현재, 미래의 구속전쟁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따라서 현재적 전투인 것이다.

이제 마지막으로, 이러한 戰爭槪念이 우리의 현실에 구체적으로 어떻게 윤리적인 의미로서 적용될 수 있는지를 간략히 살펴보고 본 논고를 마무리 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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