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연구

에스겔 선지자의 메시지

등불지기 2012. 3. 22. 01:38

 

 

예전에 신대원 다닐 때 신학공부 외에 하루에 한 시간씩 성경을 묵상하고 연구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았습니다.

그때 쓴 글들이 지금까지 제게 자양분이 되고 있습니다.

이번에는 에스겔 선지자의 메시지를 올려볼까 합니다.

에스겔 선지자가 목격한 상황은 오늘 현대교회가 보고 경험하는 것과 같습니다.

김광락 선교사 올림.

에스겔 선지자의 메세지

에스겔서의 문학적 文體나 기타 문제들은 에스겔서의 메세지를 이해하는 데 어려움을 준다. 또한 저자의 위치와 기능에 대해서도 역시 골치아픈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그럴찌라도 에스겔서 전체가 그 당시 독자들에게 어떤 인상(IMPRESSION)을 주었는 가를 살펴보는 것은 중요하다. 여기서 살펴보고자 하는 것은 에스겔서의 문학적, 정경적 스타일을 검토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에스겔서가 포로사건과 회복(RESTORATION)에 대하여 어떤 태도와 이해를 하고 있는 가를 살펴보는데 그 목적이 있다.

1. 에스겔서의 메세지 개관

여기서 먼저 우리는 에스겔서가 전체적으로 어떤 의미를 주는 가를 살펴보고자 한다. 구약 성경에 있어서 에스겔서의 위치가 어떠한 가를 연구하는 시도는 증가하여 가고 있다. 그것은 에스겔서가 선지자의 계열이 아니라 제사장의 계열로 이해하여야 한다는 비판을 의미없게 만들고 있다. 에스겔서를 얼핏 볼 때는 언어의 조야함(CRUDENESS)과 다듬어지지 않은 것 같은 인상을 받는다. 언어가 과격하게 표현되고 있는 것은 그의 격화된 감정을 보여준다. 즉, 자기 백성의 절망적인 運命에 대한 에스겔 선지자의 감수성 때문인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운명은 곧 에스겔 선지자 자신의 운명이기도 했다는 것을 기억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대한 심오한 그의 認識이 그의 人格과 메세지로 하여금 이해하기 어렵게 만든 요인이 아닐까 한다.

에스겔 선지자가 그 이전의 선지자들과 우선적으로 다른 점은 처음으로 예루살렘과 성전의 실제적 파괴와 포로 受難의 경험이 핵심적인 현실이라는 점이다. 물론 이것은 예레미야서에서도 부분적으로는 사실이다. 초기의 선지자의 사역에 대한 수정과 재해석이 이사야에서도 역시 그러한 재난들을 반영하고 있기는 하다. 그러나 이들에게는 재난에 일관된 메세지를 갖고 있는 것이 아니다. 에스겔의 의도는 전적으로 재앙의 實際에 집중하고 있다. 에스겔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인간을 향하신 방법들을 정당화하는데 관심이 있다.

이스라엘을 징계하심이 하나님의 義로우신 행동임을 입증하기 위해 에스겔 선지자는 심판과 약속의 모티브를 사용한다. 에스겔 선지자에게 있어 심판이란 전체 백성에게 내린 행위가 절대 의로움을 나타내는 용어로 이해되어져야 한다. 에스겔 선지자는 그러한 재난(DESTRUCTION & EXILE)이 하나님의 계획과 목적에 얼마나 잘 부합되는 가를 증명하고, 따라서 이스라엘의 형편이 너무나 심각하기에 다른 치유의 방안은 생각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데 관심이 집중되어 있다. 사실, 이 점에서의 그의 감수성은 그로 하여금 비논리적인 것 처럼 보이게 한다. 그는 완전한 타락을 선포한다. 동시에 사람이 죄약의 길에서 돌이킬 경우 살게하시는 하나님의 意圖를 선포하고 있다.

따라서 그는 하나님의 행위에 대하여 사람은 반드시 반응해야 한다는 이해와 죄의 냉혹한 본성에 대한 이해를 결합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러한 완전 타락은 재앙들을 여러번 연기하신 하나님에 의해서만 終結될 수 잇다는 진리를 말하고 있다. 사람으로 하여금 살게 하도록 의도하시는 하나님의 의도는 재앙에서 피하여 남겨진 소수의 ‘남은 자’에게 적용된다. 타락에 대한 에스겔 선지자의 인식은 완전한 파괴의 상징으로 나타난다. 그리하여 남은자 역시 죄에서 해방된 것으로 묘사되지는 않는다. 그리하여 그들이 혹시라도 자신들이 의롭기 때문에 재난에서 피하게 된 은총을 입었다는 생각을 막는다. 이것과 함께 약속은 단지 하나님의 의로우신 행위에만 달려 있음을 선포하게 된다. 자기들이 재난에서 피하여 남았기 때문에 자신들이 의롭다고 생각하는 포로백성들은 자신의 義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 자기들은 역시 흉악한 죄인들이며 자기들이 살아님은 것은 오직 하나님의 本性으로부터 비롯된 것임을 알아야 했었다.

따라서 이스라엘이 유일하게 의지해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장차 행하실 일에 대한 것이다. 에스겔서의 강조는 하나님의 본성에 대한 것이다. “나는 여호와이다(I AM YHWH)" 라는 선언은 모든 사건들의 절대적인 根據이며 유일한 희망의 源泉이기도 하다. 에스겔 선지자는 이스라엘이 ‘--인 척’하는 자기 위선을 경계하고 있으며 모든 것을 꿰뚫어 보시는 하나님의 심판의 눈을 의식하게 되기를 바란다. 하나님 만이 어떤 결과가 될 것인 지를 결정할 수 있으시다. 그 재난을 참으로 충분하게 이해할 때 비로소 하나님께서 행하신 놀라운 구원행위를 받아들이는 것이 가능하게 된다.

2. 에스겔과 재난에 대한 메세지

에스겔은 선지자로서 바벨론에서 활동하기 전에 먼저 팔레스틴에서도 활동하였다. 그의 관심은 초기에는 주로 예루살렘에 관한 것이었다. 예루살렘 도시는 성전과 다윗 언약에 관계하여서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따라서 에스겔의 초기 사역은 이러한 재난의 사건( 예루살렘 市의 파괴)에 대해서 포로 공동체에게 설명해주는 것에 집중되었을 것이다. 이 점에 있어 그의 메세지는 팔레스틴 및 바벨론 공동체 모두에게 연관성이 있었다. 예루살렘에 있었던 유대인들에게는 심판이 자기들이 확신하는 믿음에 대한 해석으로 보여진다. 바벨론에 살고 있었던 유대인들에게는 다시는 최악의 재난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희망이었을 것이다. 에스겔 선지자는 이미 일어났던 재난의 사건에 대한 자세한 관심을 집중시킨다. 그 이유는 이미 발생한 사건에 대한 이유, 즉 올바른 이해 없이는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이해는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에스겔서를 해석하는데 있어서 에스겔 선지자 자신이 팔레스틴과 바벨론 두 지역에서 활동하였다는 사실이 그의 幻想을 구분하는 것을 가능하게 한다. 즉, 재난에 대한 성격과 곧 일어날 하나님에 대한 새로운 경험을 설명해준다. 에스겔 선지자는 한 가지 위대한 발견을 했는데 그것은 바벨론이라는 ‘깨끗지 못한(UNCLEAN)’ 땅에서도 하나님이 現存해 계시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그러나 구약 전통에 있어 전혀 새로운 思想은 아니었다. 하나님은 우주적인 통치자이시기 때문이다. 포로된 상태와 깨끗지 못한 땅(4장)에서 살아가고 있음은 에스겔에 있어서는 반작용을 일으켰다. 여호와께서 모든 민족들의 운명을 統制(CONTROL)하신다는 믿음이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어디서든지 여호와를 만날 수 있다는 지식을 가져다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실제 경험한 것은 믿음에 대한 試驗이었던 것이다.

성전과 예루살렘 도시의 (그것은 하나님의 攝理에 의한 것이었다) 파괴는 에스겔서의 전반부에 있어 보여지는 환상들, 상징들, 그리고 講和에 분명하게 그 배경으로 나타나고 있다. 재난에 대한 반복적인 강조는 그 중요성--성전과 도시의 파괴가 가지는 구속사적 의미--를 분명하게 한다. 그 재난을 명하신 분이 여호와 자신이시다!!! 이스라엘 백성들 편에서의 죄와 실패는 중요한 모티브이다. 그리고 다시 한번 더 에스겔 선지자는 그 실패가 너무나도 뿌리깊기 때문에 어떤 치료로 불가능함을 강조하고 있다. 이 점에 있어서 신명기적 특징과 연관되어 있다. 그들이 재난에서 벗어났기 때문에 그들의 믿음에 대한 정당성이 인정된 것은 아니다. 어쨌든 간에 하나님의 행하심에 대하여 이스라엘은 어떻게든지 반응을 보여야 한다. 이 재난은 심판의 최후 최종적인 사건으로 보여지기 때문에 인간의 능력이 아니라 행하시려 하는 하나님의 意志에 依存하는 미래에 대한 희망을 제공해준다. ‘책임’에 대한 강조는 그것을 받아들여야만 하는 자들에게는 심판을 의미한다. 에스겔 선지자의 주된 청중은 바빌로니아에 있는 포로백성들이었다. 그들은 다음과 같은 사실을 認識하여야 했다.(그러나 그들은 그 메세지에 순종하지 못했다): “예루살렘에 임한 심판은 그들 자신들에 임한 심판이다. 그들의 선조들로부터 책임이 전가되어 내려온 것이 아니다.”

아무리 불가능하더라도 이스라엘로부터의 반응에 대한 책임은 전적 排除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동시에 그 응답은 사실 인간의 노력에 관한 문제가 아니라 전적으로 거룩한 문제에 관한 것이라는 방식으로 표현되고 있다. 왜냐면 사람이 죽어야 한다는 것보다 살아야 한다는 하나님의 의지(WILL)위에 본문의 강조점이 놓여 있기 때문이다. 에스겔서의 후반부에 나타나는 회복(RESTORATION)의 메세지는 삶을 위한 하나님의 이러한 의지가 정확하게 무엇을 의미하는 가를 설정함으로써 이에 대한 文脈을 제공하고 있다. 거룩한 신적 행동의 문맥에 있어 (그것은 전적으로 자기 동기적이다, SELF-MOTIVATED), 올바르게 질서잡힌 삶의 가능성이 提示되고 있다. 하나님의 뜻(WILL)은 삶(또는 생명)이다. 그러나 특징적으로 에스겔서의 후반부는 파수병 설화가 반복됨으로 시작하고 있다. 그것은 회복에 대한 이해에 교육적인 통찰력을 제공하는 것이다.

3. 에스겔과 회복에 대한 메세지

회복의 소망에 대한 메세지는 심판의 선언에도 이미 나타나 있다. 심판을 받아들이는 자--즉, 그들에게 심판을 행하신 하나님의 義(JUSTICE)를 인정하는, 심판의 정당성을 인정하는 자들--은 약속(PROMISE)을 받아들이는 자들이다. 20:32--44을 보면 그들이 흩어졌던 땅에서 백성들을 다시 모으는 것에 대한 主題(THEME)는 ‘새로운 출애급 經驗(NEW EXODUS EXPERIENCE)’의 용어(MOTIF)로 묘사되고 있다. 백성들은 약속의 땅에로 새롭게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시온산(TEMPLE MOUNTAIN)으로 가기 위해서 ‘列國이라는 광야’에서 시험(혹은 심판)을 받기 위해 하나님과 다시 만나게 될 것이다. 회복에 대한 주제는 40--48장에 걸쳐서 상세하고 분명하게 明示되어 있다. 심판과 약속 간의 상호연관성은 메세지에 분명히 나타나 있다. 외국의 통치--거기에서 모든 적대적인 세력들에 대한 여호와의 主權이 중명된다--이후에 하나님의 회복의 계획에 대한 다양한 局面들이 시작되고 있다. 33--37은 회복에 대한 일반적인 원칙들을 제시한다. 곡과 마곡의 戰爭記事는 회복의 충만한 시작이 상세히 묘사되기 전에 끼어들고 있다(38--39장). 그것은 악의 세력들을 전복시키는 상징(EPITOME) 역활을 한다. 그러나 그것은 회복에 대한 넓은 背景을 提供하는 역활을 하고 있다. 40--48장은 회복을 유효하게 하는 신적 활동을 상세히 묘사한다. 여기서 우리는 성전, 예배(혹은 제사), 그리고 땅과 백성이라는 세 가지 주제를 살펴보는 것이 편리할 것이다. 이것은 에스겔 선지자가 이스라엘의 미래를 묘사하는 데 있어 중요한 모타브이다.

A. 성전(TEMPLE)

하나님께서 취하시는 행동은 하나님 자신의 性品에 근거한다. 그래서 회복에 있어서 중심이 되는 것은 하나님의 居處(DWELLING-PLACE)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임재를 특징지우는 것이다(37:26--27을 보라). 그들중에 하나님의 거하심에 있어서 言約 公式이 새롭게 되고 있다:

“내가 그들과 和平의 언약을 세워서 영원한 언약이 되게 하고

또 그들을 견고하고 번성케하며

내 성소를 그 가운데 세워서 영원히 이르게 하리니

내 처소가 그들 가운제 있을 것이며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되리라

내 성소가 영원토록 그들의 가운제 있으리니

列國이 나를 이스라엘을 거룩케 하는 여호와인줄 알리라

하셨다 하라”

이것은 40:1 부터 43:12 까지의 ‘새 聖殿(NEW TEMPLE)’의 상세한 묘사에서 잘 나타나 있다. 에스겔 선지자는 ‘도시가 건축되는 것’을 환상으로 본다(40:2). 그 표현의 모호성은 1:26 에서 하나님의 나타나심을 묘사하는데 있어 에스겔이 주의를 기울인 것을 연상케 한다. 그 구조는 그것을 測量하는 과정에 의해서 상세히 나타닌다. 그리고 동쪽으로부터 오는 하나님의 榮光의 나타나심에서 끝마친다. 심판의 메세지에서와 같이(1, 10장), 성전과 도시를 파멸에 맡기신 그 하나님께서 이제 같은 모습으로 바벨론에서 선지자에게 나타나셔서 ‘성전에서’ 말씀하신다. “이곳은 내 보좌의 장소이며.....이 곳에 영원히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거하겠다(43:7)” 이것은 성전 개념에 대한 획기적인 변환이다. 그 곳은 하나님만의 거처이다. 깨끗하지 못한 손에 의해 접촉되지 않고 엄격하게 분리된 성전이다. 새로운 성소를 건립하는데 있어서 어떠한 인간의 참여도 언급되지 않는 사실에 주의할 필요가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단순한 거하심이 아니라 그의 백성 가운데 거하시는 ‘영원한 성소’에로 여호와의 영광이 오는 사건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자유로운 意志이지 인간의 意志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다. “여호와께서 거기 계신다” 즉, 여호와 삼마는 예루살렘의 고대 이름을 재해석한 것을 나타내는 말(PUN)이다.

B. 제사

제사장 사역은 정결(PURITY)을 유지하는데 집중되어 있다. 이것은 성전에서부터 흘러나오는 생명을 주는 능력에 강조점을 두는 것과 연관되어 있다. 인간의 실패에 의해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契約에 방해가 된 것이 이제는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의 의도에서 나타난다.

C.땅과 백성

에스겔 선지자는 땅과 백성의 淨化와 再組織을 말한다. 악한 통치자와 그들의 타락에 대한 비판의 용어로 정부의 재조직은 다윗적인 왕의 이상(IDEAL)으로 인도한다(34장). 37장의 후반부에서는 ‘새 백성’ ‘새로운 연합(통일)’ ‘새로운 언약’은 자연적으로 새 이상(NEW IDEAL)인 다윗적인 목자(DAVIDIC SHEPHERD)의 思想으로 연결된다. 여기서는 신정통치는 제사직분에 종속하게 된다. 땅은 정화되고 풍성한 열매의 축복이 주어진다! 그 땅은 올바른 관계가 확립된 회복의 질서가 이룩한 땅이다. 새롭고 영적인 지도가 지파들을 적당한 순서대로 그러나 位階秩序에 따라 배열될 것이다.

정결(PURITY)과 義는 그 백성의 필수적인 특징이다. 과거처럼 불순좋하는 곧은 마음이 아니라, 돌비를 대신하여 마음의 근본적인 변화가 있을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나온다. 새 땅, 새 성전, 하나님의 선물이요 이스라엘만의 것이 아니다. ‘곡과 마곡’의 적대 세력들을 정복함은 회복 환상(RESTORATION VISION)의 序幕이다. 이러한 승리는 이스라엘의 재조직을 위한 것이며(이것은 에스겔의 주된 관심사였다) 이스라엘의 재조직(REORGANIZATION)은 여호와의 이름이 列國 중에서 더렵혀지지 않고 거룩히 나타나기 위해서이다. 여호와의 이름은 모독되어져서는 않된다. 마치 바로왕을 위시한 온 애굽이 이스라엘의 출애급을 통해서 여호와의 참된 本性을 알게 된 것처럼 ‘곡’으로서 대표되는 모든 세계도 하나님의 새 출애급 역사를 통해 여호와 그가 누군지 알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즉,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의 새로운 출애급 경험을 과거의 애급이라는 나라가 아니라 세계의 열국의 상황 가운데 두셨다.

에스겔의 확신은 이렇게 표현할 수 있다: 이 포로 사건을 통해서만, 모든 것을 잃어버렸다는 것을 받아들임으로서만이 하나님의 이름과 본성에 대한 辯護(VINDICATION)가 성취될 것이다! 파괴 그 자체는 “나는 여호와다”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한다. 회복 역시 그와 동등하게 그 사실을 선포한다. 그의 사상의 중심은 ‘여호와의 영광을 이스라엘과 온 세계에서의 이스라엘 밖에 보여주는(MAKING VISIBLE)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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