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AMP 이야기

가난해지는 10 가지 방법

등불지기 2012. 3. 22. 19:00

 

 

가난해지는 10가지 방법

 

아프리카에서 제가 살고 있는 나라는 세계에서 빈부격차가 제일 심한 나라입니다. 얼마전까지만 해도 브라질이 빈부격차율이 1위였는데 2년전부터 순위가 바뀌었습니다.

 

아프리카의 흑인 목회자들을 대상으로 사역하면서 떨치지 못한 물음이 한 가지 있습니다. 그것은 아프리카는 지하자원으로 따지면 세계에서 제일 부자대륙입니다. 그러나 현실은 반대로 제일 가난한 대륙입니다. 저의 고민은 제일 부유한 자원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어째서 제일 가난한 것일까 하는 것입니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을 예로 들어볼까요? GNP 수치로 볼 때 아프리카에서 6위 경제대국입니다.(1위가 아닙니다^^) 세계경제를 주름잡는 미국과 유럽의 경제를 대항할 수 있는 제3의 경제권으로서 소개되는 브릭스(브라질, 러시아, 중국, 인도, 남아프리카공화국) 중에 하나입니다. 얼마전에는 아프리카에서 최초로 월드컵을 성공적으로 개최하기도 했지요.. 많은 분들이 생각하기에는 잘 사는 나라라고 생각하겠지만 실제로 보면 잘 사는 사람들은 극소수에 지나지 않습니다. 대부분은 기술을 독점하고 있는 아프리카너(화란계 백인의 후손)입니다. 비록 흑인 정부가 정권을 잡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경제권은 여전히 전체 인구의 6% 채 안 되는 백인의 수중에 있습니다. 물론 흑인정부가 들어선 이후 부유한 흑인층이 생겨나고 있습니다만 전체 인구의 90%에 달하는 흑인에 비하면 아주 적다고 하겠습니다. 제가 만나는 흑인들의 마음을 들여다보면 그들은 언제나 불만에 가득 차 있고 자신들이 항상 가난하다고 생각합니다. 가끔 휴일이 되어 가족들과 함께 근처에 있는 유원지에 놀러가보면 겉으로 보기엔 멋진 잔디밭인데 가까이 가보면 깨진 유리병 조각이 넘치고 있습니다. 흑인들이 술을 마시고 깨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렇게 그들은 자신들의 분풀이를 하는 것이지요. 유원지에 놀다 가면서 술병을 깨뜨리고 가는 나라가 아프리카에 이 나라 말고 또 있을까 싶습니다. GNP가 아닌 심리적 만족도 혹은 행복지수로 놓고 보면 전체 아프리카 국가들 중에서 이 나라가 제일 가난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나라보다 GNP가 낮은 나라들이 훨씬 행복지수가 높은데 그 이유는 빈부격차율이 낮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잘 사는 사람 옆에서 살면 상대적으로 더 빈곤을 느끼는 것입니다. 비교하지 않으면 더 행복함을 느낄텐데 비교하면서 불행을 느끼는 것입니다. 이 나라 흑인들보다 더 가난한 인근 나라에서 사는 흑인들의 행복지수가 더 높다는 것이 참 아이러니합니다.

 

그러나 세계의 모든 대륙을 놓고 보면 아프리카는 세계에서 제일 잘 사는 곳이 되어야 하는데 제일 못 하는 곳이 되어 버린 이유가 무엇일까요?  자신들의 잠재력을 활용하기는 커녕 잠식당하고 착취당하고 여전히 가난의 굴레를 벗어던지지 못하는 특별한 이유가 있을까요? 저는 이곳에서 사역을 그만두고 은퇴할 때까지 그러한 물음은 계속될 것 같습니다.

 

지금 이 글을 쓰는 것은 확실한 결론은 아니지만 지금까지 고민하면서 나름 정리한 것들을 기록으로 남겨보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제목을 "가난해지는 방법"이라고 붙여본 것입니다. 아프리카에서 살면서 '가난해지는 방법'을 배웁니다. 재미있지요? 부자되는 법을 배워야 하는데 말입니다. 제가 유럽이나 미국에 살았으면 '부자되는 법 10가지'란 제목으로 글을 쓸 수 있었을텐데요..부자되는 법에 대해 말할 능력은 못되지만 아프리카에서 살다보니 가난해지는 법에 대해서는 자신있게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저의 이 글은 재정문제로 고민하고 힘들어하고 몸부림치는 고국의 형제 자매 그리스도인들에게 반면교사로 약간의 도움을 줄 수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면 아프리카가 제일 부유한 자원을 가지고 있으면서고 제일 가난할 수밖에 없는 이유 혹은 원인들이 무엇일까요? 흑인들의 삶을 보면서 제가 생각하는 '가난해지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1) 나무 심는 방법을 모른다.

전통적으로 흑인들의 삶은 농부의 삶이라기보다 목축의 삶입니다. 땅이 넓고 자원이 풍부하기 때문에 굳이 힘들게 씨를 뿌릴 이유를 알지 못했습니다. 한국의 경우 좁은 땅을 얼마나 효과적으로 사용할 것인지 고민합니다. 그래서 한국에서 처음 여행오시는 분들은 "이렇게 넓은 땅을 그냥 내버려두고 있다니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다들 말합니다. 수천년 동안 농부의 마음을 배우지 못했습니다. 삶이 힘들면 좋은 환경을 찾아 옮기면 그만이었습니다. 그러니 씨를 뿌리고 거두는 자연법칙을 잘 알지 못합니다. 심는 법을 배우는 것은 아주 중요한데요..이 나라에는 백인들이 모여서 사는 타운이 있고(물론 그 가운데 흑인들도 끼여서 삽니다) 흑인들만이 모여서 사는 마을이 따로 있고, 무슬림이나 인도인들이 사는 마을이 따로 있습니다. 백인타운에 가면 곳곳에 많은 나무가 심겨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는 반면에, 흑인 마을에 가면 나무를 거의 볼 수 없습니다. 제가 흑인 목회자들에게 '왜 흑인 마을에는 나무가 잘 보이지 않느냐?'고 물었더니 땔감으로 쓰기도 하고 범죄자들이 나무 그늘에 잘 숨는다고 대답을 하더군요..나무를 많이 심으면 지하수가 많이 고이는데 반해 나무가 없으면 땅이 황폐해지게 되는 것을 잘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저는 흑인 목회자들에게 항상 "나무를 심으라"고 말해줍니다. 나무를 심으면 잘 살게 된다고 이야기를 해 줍니다. 그러나 흑인들에게는 이것을 잘 깨닫지 못합니다. 언제 심어서 언제까지 기다리느냐고 말합니다. 나무 심기를 하여도 다 자라기도 전에 땔감으로 베어버리거나 옮겨버립니다. 흑인마을에 나무심기가 성공적으로 정착한 경우가 거의 없습니다. 한국이 625 전쟁을 거치면서 전국이 나무가 없이 황폐하였었지요..그러나 전쟁이후 30년 앞을 내다보고 나무심기운동을 크게 벌였지요.. 제가 볼 때 나무심기를 잘 하는 나라가 잘 사는 나라입니다. 심을 줄 아는 백성이 많은 나라가 경제적으로 풍요한 나라입니다.

 

(2) 투자하는 방법을 모른다.

나무를 심는 것과 같은 원리입니다. 심는 것은 나무만이 아닙니다. 돈을 심을 수 있고, 사람을 심을 수 있고, 심지어 자동차를 심을 수 있습니다. 넓게 보면 심는 행위는 투자행위입니다. 전통적으로 목축업이 몸에 배인 흑인들에게는 '거래행위'는 익숙합니다. '주고 받는 행위'는 잘 합니다. 흑인들이 게으르다고 비난하는 사람들은 흑인들에 대해서 잘 모르는 사람입니다. 새벽부터 저녁 늦게까지 얼마나 열심히 일하는지 모릅니다. 백인들은 틈만 나면 가족들과 여행을 떠납니다. 백인들을 보면 레저를 위해 돈을 버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흑인들을 보면 레저를 즐기는 것을 어색해합니다. 가까이 보면 게으르다고 비난할 수 없습니다. 급료만 확실하면 얼마나 열심히 일하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급료가 없다면 아무 일도 하지 않습니다. 주고 받는 '거래행위'는 잘 하는데 비해서 심고 거두는 '투자행위'는 잘 못합니다. 왜냐면 거래행위는 목축업자에게 익숙한 것이고, 투자행위는 농부들에게 익숙한 것이니까요. 흑인들은 한 달 동안 열심히 정말  열심히 일을 해서 번 돈으로 하루만에 다 써버리는 데 익숙합니다. 멋진 가발, 좋은 구두와 옷을 사는데 월급을 다 써버리는 흑인들이 많습니다. 일단 좋은 것을 구입해놓고 보자는 것입니다. (화란계 백인들은 주로 농부들이 많은데 그들은 의외로 소비성향이 적습니다. 그래서 사업을 하는 한인들에게는 지갑을 잘 열지 않으려는 백인들을 타깃으로 삼지 말고 흑인들과 인디언이나 무슬림을 타깃으로 삼으라고 이야기해줍니다.) 일단 무리를 해서라도 최고의 것으로 구입을 해놓은 그 다음에는 그때 가서 생각하자는 식입니다. 다분히 어떻게 되겠지 라고 낙천적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내일일을 염려하지 말라는 주님의 말씀은 흑인들에게는 아주 잘 맞는(?) 말씀입니다. 저축하는 것도 약하고 투자하는 것은 더욱 약합니다. 그들의 눈에는 미래는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보입니다. 흑인들의 세계관에 의하면 거래행위는 익숙하여도 투자행위는 어색한 것입니다. 어디에다 어떻게 심어야 할 지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일단 '필요한 것'부터 해결하는 것입니다. 흑인들에게는 '필요한 것needs'과 '원하는 것wants'가 명확하지 않습니다. 더우기 과감히 '심어야 할 곳investments'은 더욱더 모호해보입니다. 예전에 한국이 가난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은 '심어야 할 것'에 대한 그림이 명확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심어야 할 것'을 위해 '원하는 것'도 절제하고 심지어 '필요한 것'까지도 아꼈기 때문입니다. 어디에 어떻게 심어야 할지 배우지 못하면 가난해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3) 재정을 플로잉하는 법을 알지 못한다.

계속 (1)번 내용의 반복입니다. 흑인 목회자들에게 재정원칙을 가르치다보면 이구동성으로 대답하기를 "심어야 할 것이 없는데 어떻게 심을 수 있습니까?"라고 합니다. 그들에게 말해주는 것은 이것입니다. 여러분은 일단 돈이 생기면 일단 필요한 것에 우선 지출합니다. 그런 다음 남는 것을 가지고 저축을 할 지 말 지에 대해서 생각합니다. 그러니 항상 가난해질 수밖에 없는 것이라고 대답해줍니다. 그러면 그들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재정을 주실 때에는 항상 '심어야 할 재정'과 '먹어야 할 재정'을 함께 주신다고 가르칩니다.(이에 대한 근거구절은 고후9:10절입니다. "심는 자에게 씨와 먹을 양식을 주시는 이가 너희 심을 것을 주사 풍성하게 하시고 너희 의의 열매를 더하게 하시리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심어야 할 재정까지 포함하여 주시는데 우리는 먼저 심어야 할 것을 심지 않고 배고프다는 이유로 일단 먹고 보자고 한다면 결과는 항상 가난뿐이라고 가르칩니다. 그제서야 그들은 무엇을 깨달은 듯 심각한 표정을 짓지요. 돈이 생겼을 때 우선 필요한 곳부터 지출하는 습관을 고쳐야 하다고 말해줍니다. 필요한 것보다는 심어야 할 것부터 심어야 한다고 말해줍니다. 이것은 주고받는 거래행위가 아님을 명심하라고 이야기해줍니다. 수천년 동안 거래행위에만 익숙해진 그들에게 이것은 이해하기 어려운 개념같아 보입니다. 참고로 흑인들은 장례식에 참석하여 조의금을 내는데 조의금을 내는 그들의 마음은 자신이 나중에 돌려받을 것이라는 계산이 깔려 있습니다. 그러니까 언젠가는 받을 것이기 때문에 전혀 아깝지 않은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조의금으로 월급의 몇 배까지 기꺼이 냅니다. 그러나 헌금이라든지, 구제라든지, 재정을 흘려보내는 플로잉(선교단체에서 배운 용어입니다만 인정받음이나 혹은 도로 돌려받을 것이라든지 하는 그 어떤 대가를 바라지 않고 무명으로 은밀하게 재정으로 도움을 베푸는 행위를 말합니다.)에 관해서는 얼마나 아깝게 생각하는지 모릅니다. 그러한 플로잉은 아주 어리석은 '낭비'처럼 인식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수천년 동안 이어온 목축업 세계관에 의하면 그것이 그렇게 보이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플로잉하는 데에 인색함으로 스스로를 가난의 굴레에 가두어버리는 줄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4) 구제하는 일을 모른다.

계속 반복되는 말입니다. 잘 사는 나라를 보면 가진자들의 책임noblesse oblige이 강조되면서 사회환원이나 구제기금이 활성화되어 있음을 봅니다. 그러나 가난한 나라들은 사회적 신분에 상응하는 도덕적 의무가 간과되고 있는 것을 쉽게 봅니다. 이것은 국가만의 문제가 아니라 개인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잘 사는 사람(수입의 크기와 상관이 없습니다. 한달에 30만원을 버는 사람이 한달에 3천만원 버는 사람보다 더 잘 사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은 받는 것보다 주는 것에 즐거움을 느끼는 사람입니다. 주는 일을 즐기는 사람입니다. 흑인들도 '주는 일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흑인들은 언제나 받기 위해서 줍니다. 줄 때에는 언제나 받을 것을 기대하고 또 계산합니다. 반면 그저 주는 것에 관해서는 '낭비'라는 생각이 강하기 때문에 구제하는 일에 있어서 교회마다 매우 약한 모습을 보입니다. 물론 교회가 구제를 한다면 그것은 받기 위한 것입니다. 그들이 받을 수 있다면 얼마든지 통 크게 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받을 수 없다고 한다면 얼마나 인색한지 모릅니다. 여기에 아주 큰 도전이 있습니다. 구제하는 일에 힘쓰는 아프리카 전통교회는 찾아보기 힘듭니다. 자신들과 아무 상관이 없는 이들에게 주는 것은 비효율적인 일, 즉 낭비와 같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왜냐면 돌려받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생각에 아주 큰 함정이 있습니다. 돌려받기 위해 주는 것은 진정한 의미의 구제도 아니고 플로잉도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의 투자방법은 하나님만 바라보고 하는 것이지 사람에게 인정을 받거나 회수할 수 있을 계산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전도서11:1,2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너는 네 떡을 물 위에 던지라. 여러 날 후에 도로 찾으리라. 일곱에게나 여덟에게 나눠 줄지어다. 무슨 재앙이 땅에 임할는지 네가 알지 못함이니라." 내가 먹을 양식을 '물 위'에 던지는 행위는 비효율적인 일이요 낭비인 것입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이것이 하나님 나라의 투자방식입니다. 낭비하는 것같아 보이는 그 일이 사실은 가장 효과적인 투자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적인 투자는 '계산'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믿음을 '계산'과 혼동합니다. 세상적인 관점에서 보면 하나님 나라 투자방식은 가장 덜 계산적이며 가장 비효율적이며 가장 낭비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또한 "일곱이나 여덟에게" 나눠주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대상에 대한 어떤 편견을 가지고 주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내가 아는 사람이기 때문에, 나중에 나를 도와줄 사람이기 때문에, 나와 특별한 관계에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하는 행위는 기독교적 구제행위라고 볼 수 없습니다. 대상에 대한 편견과 관계를 넘어서는 구제행위가 진정한 구제행위인 것입니다. 아프리카 교회들로 하여금 성경적인 구제사역을 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5) 후원하는 것을 알지 못한다.

아프리카 독립교회가 선교사를 파송하고 선교사를 후원하는 일을 하는 것을 보기란 거의 불가능합니다. 흑인들은 선교를 하기 위해 돈이 많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선교사를 파송하고 후원하는 것이 물질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돈이 없이 선교를 못한다는 생각에 갇혀 있는 것이 더욱 심각한 문제입니다. 한국교회는 복음을 받은 초창기부터 선교사를 파송하는 일에 관심을 가졌습니다. 제가 볼 때 한국교회가 복을 받은 이유가 바로 그것이라고 믿습니다. 받기 위한 것이라면, 회수할 수 있다는 계산에 의한 것이었다면 결코 선교할 수 없습니다. 세상의 관점에 의하면 선교사를 보내고 후원하는 일은 가장 큰 낭비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정반대입니다. 제가 한국에서 목회할 때 선교에 힘쓸 때 하나님께서 재정적으로 더욱 풍성하게 채워주시는 그런 교회들을 많이 보았습니다. 우리는 이만큼 선교한다고 자랑하는 그런 선교가 아니라 진정으로 선교에 관심을 가지고 물질을 가지고 투자하는 것을 아깝게 생각하지 않는 그런 교회가 재정적으로 풍요한 것을 많이 보았습니다. 제가 선교단체에서 전임간사로 사역할 때 단체로부터 일체의 급료를 받지 않고 사역했는데 함께 신학교에서 동문수학한 목사님들이 저를 얼마나 이해하지 못하는 눈으로 바라보았는지 모릅니다. 그분들처럼 풍성한 사례를 받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러나 그분들이 경험하지 못하는 '세계'속에 살고 있었습니다. 한 푼도 받지 않으면서도 풀타임으로 주의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을 경험한 것도 축복이었지만, 아무 것도 없는 가난한 선교단체의 간사이지만 큰 생활비를 받는 그런 대형교회 목회자들보다 더 풍성하게 후원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경험한 것도 큰 축복이었지요. 매달 하나님의 은혜만 바라보고 까마귀의 은혜를 의지하여 사는 분이 헌금해주시는 적은 금액이 하나님 보시기에 천문학적인 가치가 있습니다. 제가 선교지에 나오기 전에 후원자들을 찾아야 했습니다. 목회만 하다 선교지로 가려니 제일 힘든 것이 후원자를 만나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찾아보면서 경험한 것은 재정이 풍성한 분이라고 다 좋은 후원자는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기대했던 분이라고 다 좋은 후원자가 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었습니다. 오히려 가난하고 그래서 전혀 기대하지 않은 분들이 푼돈으로 후원해주시는 일이 많았습니다. 심지어 제가 잘 모르는 분들도 많았습니다. 액수가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액수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메시지였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이 땅으로 보내셨구나' '하나님께서 나의 공급자이시구나' '하나님을 더욱 신뢰해야겠구나' 등등.  저는 후원을 받으면서 살아가는 선교사이지만 선교지에서도 후원을 하면서 살아가려고 애씁니다. 선교사라고 다 받기만 하고, 다 가난에 찌들려 살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습니다. 후원을 받으면서 저는 힘들게 살아가면서 5천원씩 혹은 만원씩 매달 헌금해주시는 그런 분들을 생각하면 주님께 저절로 기도가 나옵니다. 저희 가족은 저녁마다 예배드리는데 언제나 항상 후원교회와 후원자들을 위해 간절히 축복하는 기도로 예배를 마무리합니다. 바꾸어 생각해보면 후원하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모릅니다.

 

(6) 손님 대접을 할 줄 모른다.

제가 선교지에 와서 재정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었을 때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주님이 지혜를 주신 것 중에 하나가 '손님대접하기를 힘쓰는 선교사가 되라'는 것이었습니다. 손님을 대접하려면 물질이 필요합니다. 음식이나 기타 물질이 들어갑니다. 그러나 제가 경험한 것은 적은 것으로 최고의 결실을 맺을 수 있는 것이 손님 대접하는 것입니다. 단지 물질만이 아니라 마음도 들어가고 시간도 들어가고 애정도 들어가기 때문입니다. 단순히 물질로 후원하는 것이상으로 큰 것을 주는 것입니다. 일단 믿음없는 이들의 눈으로 보면 비효율적이고 낭비입니다. 며칠 지내다 가버리는 손님들이 감사하다고 저를 기억하며 후원해주는 일은 기대하지 않습니다. 손님으로 머물 때는 좋아도 가버리면 잊어버립니다. 그러니 잘 대접했으니 나중에 후원해줄 것이라고 생각하면 오히려 마음만 어려워집니다. 사람을 기대하여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도 자신을 누군가에 의탁하지 않으셨습니다. 기쁘게 대접하여도 마음 상하지 않으려면 마음을 바로 먹어야 합니다. 사람에게 대접하지만 사실은 천사에게 대접한다 이렇게 생각하면 됩니다. 그냥 주님께 대접한다 이렇게 생각하면 속 시원합니다. 그러면 대접 받은 사람이 대접한 우리 가족을 잊어버렸다고 해도 하나도 속상할 일이 없는 것입니다. 오히려 주님께서 나를 어떻게 상주실 것인지 기대감이 커집니다. 흑인교회들을 돌아다니다보면 손님대접이 참 약한 것을 종종 봅니다. 제가 목회자 학교에 강사로 가더라도 물 한 잔 대접받는 일이 거의 없습니다. 선교사가 현지인들에게 대접하는 일은 많아도 대접받는 일은 매우 드문 현상입니다. 그러니 몇 시간 강의한다고 고맙다고 물 한 잔 내어놓는 그런 교회를 가면 정말 감동이 됩니다. 물 한 잔에 눈물이 나올려고 합니다. 그리고 저절로 축복이 나옵니다. 그러나 그런 경우는 만에 하나 있을까 말까 합니다. 아예 기대도 말아야 합니다. 한번은 3시간 자동차로 가야하는 어느 흑인 마을에 주일설교를 부탁받아 주일설교를 했습니다. 예배가 4시간 가량 진행되었는데 끝나니 오후 1시가 훨씬 넘었습니다. 예배 후 헤어지고 인사를 나누었는데 같이 식사라도 하자는 제안은 커녕 물 한 잔도 없었습니다. 한국적인 상황에서는 이해할 수 없겠지만 아프리카에서는 한국상황은 잊어버려야 합니다. 사람들에게 무엇인가 기대를 하면 상처만 받게 되지요. 흑인들은 원래 그러려니 하고 생각했기에 아무 생각도 없었습니다만 한편으로 어떤 교회를 세워야 할 지에 대해 고민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한 번 왔다가 가는 그런 손님, 정성껏 대접을 잘 해도 잊어버리고 말 그런 손님이라 할지라도 주님을 대접하듯 천사를 대접하듯 그렇게 잘 대접하는 교회들이 아프리카에 많이 일어나도록 기도해야겠다 생각합니다.  아무튼 가난한 교회, 가난한 나라의 특징 중 하나는 손님대접이 약하다는 것이었습니다. 가난하기에 마음의 여유가 없어서겠지요. 하지만 가난함에도 불구하고 손님 대접을 잘 하는 교회나 개인을 보면 가난의 굴레를 벗어던지는 것은 시간문제라 짐작되어집니다. 한국을 보면 아무리 가난하고 어려웠어도 손님대접은 잘 했지요. 제가 볼 때 손님대접은 돈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하는 것입니다. 가난하다는 이유로 손님대접을 소홀히하면 스스로 가난의 굴레를 더욱 강화시키는 것입니다. 재정적으로 어려울수록 손님대접을 잘 해야 합니다. 한국의 초대교회사를 보면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제가 어릴적 교회생활하던 때를 생각해도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심방오신 목사님과 전도사님을 대접하기에 아무 것도 없었지만 정성껏 국수를 말아 대접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집에 꼬옥 숨겨둔 커피를 타서 내놓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대접하지 못하고 보내드리면 가슴 아파하던 그런 시절이 있었습니다. 제가 볼 때 손님대접 잘 하는 것만으로 충분히 가난의 굴레를 깨뜨릴 수 있다고 믿습니다. 재정의 풍성한 축복을 받기 원하는데 심을 재정이 없다고 생각하면 손님대접이라고 최선을 다해 잘 해보십시오. 받을 것을 기대하지 말고, 호의를 기억해줄 것이라고 기대하지 말고 천사를 대접한다 생각하고 잘 해보십시오. 성경을 보면 아브라함이 손님대접을 잘 한 사람으로 나오는데요 아브라함은 손님대접 잘 해서 100세에 아들도 낳았지 않습니까? 손님대접 잘 해서 사라는 불임도 치유되지 않았습니까? 손님 대접 잘 하면 롯과 같이 불시에 찾아오는 재난에서도 구원을 받습니다. 손님대접은 재정의 굴레를 깨뜨리는 권세가 있습니다. 어려울수록 호의를 베풀어야 합니다.

 

(7) 주는 것에 있어서 인색하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흑인들의 세계관은 주고 받는 거래행위입니다. 받을 것이란 기대감이 있거나 혹은 그런 계산이 있다면 아까워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받을 것이란 계산이 서지 않으면 얼마나 아까워하고 인색한지 모릅니다. 자신들은 '준다'라고 말하겠지만 성경이 말하는 '주는 행위'는 '받기 위해 주는 것' 혹은 '계산적으로 주는 것'이 아니라 '거저 주는 것'입니다. 재정적으로 궁핍한 삶을 사는 흑인들의 삶속에는 '거저 주는 것'에 대해 대단히 인색한 모습이 있습니다. 물론 '거저 주는 행위'가 있을지 모르겠지만 행위보다 더 중요한 것은 성품입니다. 주님은 행위를 보시지 않고 성품을 보시는 분이십니다. 마음의 동기를 살펴보시는 분이십니다. 인색함으로 주는 것은 아무리 큰 재정이라도 주님의 마음을 감동시킬 수 없습니다. 재정적인 굴레를 깨뜨리고 풍성한 축복을 누리기를 원한다면 내면의 인색함을 어떻게 다스려야 할지 잘 배워야 합니다. 사람마다 인색함이란 성품이 있습니다. 그것은 제한된 자원을 가지고 살아가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연약한 육신의 성품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성품을 다스리지 못하면서 가난의 굴레를 벗어버릴 수 있는 길은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인색함을 다스릴 수 있을까요? 성경은 이에 대해서 매우 실제적으로 가르칩니다. 첫째, 내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내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면 줄 때에 인색한 마음을 갖지 않을 수 있게 됩니다. 십일조의 경우만 아니라 헌금의 경우, 구제행위의 경우, 그 어떤 주는 경우든 내 것을 주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내 것을 준다고 생각하니까 아까운 것입니다. 둘째, 주님께 드리는 것이라 생각하는 것입니다. 사람에게 주어도 주님께 드리는 것이라 생각하면 전혀 아깝지 않을 수 있습니다. 받는 이는 사람이 아니라 주님이라고 생각해보십시오. 셋째, 천국은행에 입금한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천국은행 이자는 매우 높다는 것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세상은행의 이자는 3%이지만 천국은행의 이자는 최소한 3000%입니다. 이 얼마나 수지맞는 장사입니까? 성경은 가난한 자에게 꾸이는 행위는 하나님께 꾸이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후한 이자로 되갚아주실 것을 생각하면 하나도 아깝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이름으로 줄 수 있다는 것이 황송할 정도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최소한 이자가 3,000%입니다!! 넷째, 주고 재빨리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자꾸만 생각하면 할수록 아까운 마음도 더 들 수 있습니다. 세상은행은 통장에 기록이 남습니다. 그러나 줄 때는 기억에서 지워버리는 것이 좋습니다. 다섯째,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내가 줄 수 있다는 것이 사실은 다행입니다. 내가 줄 수 있는 기회가 있다는 것이 축복입니다. 서울 온누리 교회를 섬기셨던 고 하용조 목사님이 한 때 그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지요. 가난한 성도가 오지 않는 우리 교회가 진정 좋은 교회라고 볼 수 없다고. 베풀 수 있는 기회, 섬길 수 있는 기회가 없는 교회는 사실은 가난한 교회입니다. 라오디게아교회처럼  말입니다. 마지막으로, 가난할수록 '나는 부자다'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인색한 마음이 들수록 '나만큼 잘 사는 사람은 없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심령이 가난한 것과 '나의 자원은 결핍되어 있어. 나는 자원이 얼마 남지 않은 가난한 사람이야'라고 생각하는 '가난심리'와는 다른 것입니다.

 

(8) 사람에게 받을 것을 기대한다.

앞서 말한 바이지만 흑인들은 장례식에 참석하면 큰 돈을 조의금올 냅니다. 한국인의 경우 장례식에 참석할 때 조의금으로 평균, 3만원, 혹은 5 ~ 10만원 정도 낸다고 한다면  흑인들은 최소한 수 십 배의 조의금을 냅니다. 그러면서도 아까워하지 않습니다. 흑인들의 수입에 비하면 엄청난 액수입니다. 굉장하지요? 그럼에도 아까워하지 않는 이유가 있습니다. 왜냐면 자신이 나중에 죽을 때 다 돌려받을 것이라고 굳게 믿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 장례식에 내는 조의금은 훗날 자신의 장례식을 준비하는 것입니다. 그들의 이해관계와 계산방식을 모르면 '굉장하다'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받을 것을 기대하면서 주는 행위는 가난의 굴레를 깨뜨릴 권세가 없습니다. 받을 것을 기대하는 것이 나쁜 것이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가난을 극복할만큼 충분한 능력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후원을 할 때에도 나를 알아주기를 기대하거나 혹은 나중에 나에게 적어도 같은 내용으로 도와줄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은 효과를 떨어뜨리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께 기대를 거는 것이 중요합니다. 사람에게 기대하지 않되 하나님께 기대를 거는 것이 필요합니다. 창세기 14장에 아브라함은 소돔왕이 제안하는 천문학적인 재정을 일언지하에 거절합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무엇을 상주실 것인지 하나님께만 기대를 걸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의 믿음에 따라 15장에 들어가서 하나님은 그에게 하나님 자신을 방패와 상급으로 주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아브라함은 가장 큰 축복으로 돌려받았습니다. 물질을 포기하고 하나님을 상급으로 받은 것입니다. 이것은 가장 큰 수지입니다. 히브리서에서도 믿음은 상 주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만 바라보고 하나님만 의지하고 하나님께만 기대를 거는 것이 재정의 굴레를 깨뜨리는 가장 중요한 믿음의 비결입니다. 흑인들과 함께 사역하다 보면 이 믿음을 보고 싶을 때가 간절해집니다. 흑인 목회자들인데, 스스로 목사라고 자처하는 사람들인데, 틈만 나면 제게 와서 자신들에게 무엇이 필요하다고 이야기를 합니다. 사람에게 무엇인가를 기대를 하는 것입니다. 제가 경험한 바이지만 사람에게 기대를 해서 만족한 적이 한번도 없었습니다. 등불 선교를 위해 하나님이 일으켜주신 후원자들은 제가 기대하지 않은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방식으로 제가 하나님만을 의지하기를 바라셨던 것입니다.

 

(9) 하나님께 매달리지 않는다.

재정적인 문제에서 온전히 자유로운 사람은 아마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선교사의 경우는 더욱 더 그렇습니다. 한국에 계신 분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들도 많이 있습니다. 재정적인 어려움이 있었을 때 초창기에는 기도편지에 그런 부분을 언급하기도 했습니다. 선교사의 삶을 이해해주고 공감해주는 분들이라면 최소한 기도라도 해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나중에 제가 배운 것은 하나님께서 그런 것을 원하지 않으신다는 것이었습니다. 재정적으로 어려움이 있으면 사람에게, 가장 가까운 친구나 가족에게도 말하지 말고 하나님께만 말하고, 하나님께만 매달리는 것이 필요함을 알게 되었습니다. 금식하면서 하나님께 간절히 매달리다보면 재정적인 굴레를 깨뜨리고 풍성함으로 나아갈 수 있는 돌파구를 열 수 있도록 주님께서 말씀을 주시는데 조용히 순종하면서 나아가다보면 어느새 주님이 해결해주시는 것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대체로 주님이 주시는 지혜란 내 손에 있는 것이 무엇인지 보여주시면서 그것을 가지고 어떻게 어디에 '심어야 할지' '주어야 할지' '플로잉해야 할지' 등에 대해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을 의지하는 것은 큰 유혹이 아닐 수 없습니다. 유학생들을 받아서 홈스테이하는 방식으로 재정을 충당하는 주변의 선교사님들을 보면 솔직히 '유혹'이 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면 유학생들을 돌보느라 사역에 집중하지 못하는 한계가 있기 때문에 접어야 합니다. 이처럼 사람에게 매달리는 것은 너무나 쉬운 유혹이 아닐 수 없습니다. 흑인들은 오랜 세월 동안 사람을 의지하는 것에 익숙해져왔습니다. 흑인 목회자들도 선교사들을 의지하여 집도 얻고 교회건물도 얻고 자동차도 얻는 일에 익숙해져 있습니다. 필요가 있을 때 너무나 쉽게 사람에게 자신이 무엇이 필요하다고 쉽게 말합니다. 자신의 필요를 사람에게 알리지 않겠다고 죠지 뮬러는 굳게 결심했는데 그러한 결심이 흑인 목회자들에게 매우 큰 도전이 되어 다가갑니다. 사람을 쉽게 의지하는 한 재정적인 자립은 요원한 것처럼 보입니다.

 

(10) 예산을 세우지 않는다.

흑인들의 세계관에는 '미래'는 존재하지 않는 듯 보입니다. 미래에 대해 생각하니 두려움과 걱정 뿐이기 때문에 과거와 현재에 집중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미래를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미래관이 없기 때문에, 그들은 예산 budget plan이 필요없습니다. 흑인 교회를 돌아다니면서 제가 관찰해본 결과 예산을 세우는 교회가 하나도 없다는 사실에 놀랐습니다. 결산 보고는 있습니다. 그러나 예산 심의나 예산을 위한 공동의회 같은 것은 없습니다. 흑인 목회자 훈련을 할 때 이 부분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가르칩니다. 믿음으로 예산을 세우고, 지출계획을 세우고, 금전출납부를 기록해나가고, 수시로 재직회를 열어서 과정을 보고하고 교회가 함께 지켜보는 것이 아프리카 교회에 필요한 훈련입니다. 계획을 세우지 않으니 필요가 생기는대로 지출하고 그러다보니 구제와 선교와 같이 하나님 나라를 위해 투자하는 일에는 여력이 생기지 않는 것입니다. 예산을 세울 때 꼭 심어야 할 '구제'와 '선교'와 같은 영역을 최우선적으로 항목을 배정하고 우선적으로 지출해나가야 합니다. 교회가 그런 모습을 교인들에게 보여주어야 교인들이 개인적으로 재정원칙을 적용해나갈 것입니다. 구제와 선교 다음으로 중요한 예산항목은 '교육'입니다. 교육에 투자를 많이 해야 합니다. 그것은 결코 낭비가 아닙니다. 사람을 키우는 일에 투자하는 것은 미래를 위한 가장 확실한 투자입니다. 한국의 경우 집과 땅을 팔아서 자녀들 교육에 투자했다는, 그래서 세계경제대국이 되었다는 이야기를 흑인 목회자들에게 이야기해줍니다. 제가 도전하는 것은 자녀교육을 위해 부모에게 받은 집과 땅이란 유산을 팔 수 있는지 물어보면 다들 고개를 젓습니다. 지식에 대한 투자는 가난의 굴레를 깨뜨리기 위해 필요한 것입니다. 배우기 위해 예산을 세워야 합니다. 자기 개발을 위해 나는 얼마의 예산을 세우고 있습니까? 나는 수입예산과 지출계획을 세우고 우선순위를 따라 지출하고 있습니까?

 

이상 아프리카 흑인목회자들을 섬기면서 나름대로 그들이 세계 최대의 자원을 가졌음에도 세계에서 제일 가난한 상태에 머물러 있는 이유에 대해 나름 생각한 것을 10가지 정도로 정리해보았습니다. 중복도 많고 반복도 많습니다. 10가지 중에 한 가지만 꼽으라면 (1)번입니다. 흑인 목회자들에게 늘 강조하는 것이 "나무를 심으라"입니다. 교회가 나무심기에 앞장서야 한다고 말합니다. 나무를 심으면서 농부의 마음도 얻고 또 심는 일을 하면서 그 속에 담긴 영적 교훈도 배울 수 있을 것입니다.

 

재정적인 풍성함을 누리는 삶을 살기 위해 우리는 성경이 말하는 재정원칙으로 돌아가 그 원칙을 적용하는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재정원칙은 '주고 받는 거래행위'가 아니라 '심고 거두는 농작행위'입니다.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주리라.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눅6:38)" 주는 것이 낭비가 아니라는 것을 경험하는 삶, 줌으로써 받는 삶, 행복하게 함으로써 행복해지는 삶, 풍성히 줌으로써 풍성히 누리는 그런 삶을 사는 선교사가 되고 싶습니다!! 이 글을 읽는 형제 자매 그리스도인들도 그렇게 살게 되기를 기원드립니다.

 

우리를 부요하게 하기 위하여 가난하게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김광락 선교사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