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아프리카에서 흑인 목회자들을 대상으로 사역을 할 때 몇가지 방향과 원칙을 세우고 하는데 그것에 대해 나누어보려고 합니다.
1) 주류신학교에서 줄 수 없는 것을 주는 학교
2) 목회자의 열정을 일깨우는 학교
3) 신학적 자립, 토착화 신학교
4) 건물없는 학교, 찾아가는 모바일 학교
5) 학생이 수업시간과 장소를 준비하는 학교
6) 강사를 세우기 위한 학교
7) 묵상훈련, 제자훈련으로서의 목회자 훈련학교
등이 제가 생각하는 아프리카에서의 신학훈련사역입니다. 엄밀히 말해 '건물이 있는 신학교 운영사역'이 아니라 '건물없는 모바일 신학훈련사역'으로 새로운 모델을 모색하고 있습니다.
신학적 자립의 최우선성..토착신학교..찾아가는 모바일 신학교..목회자를 키워내는 흑인신학자 양성..지식전달이 아닌 제자훈련의 장으로서의 신학교..위임이 이루어지는 신학교..비전을 심어주는 신학교..멋진 이름과 건물은 없지만 주님이 교장이 되시는 신학교..이것들은 제가사역하면서 제 마음을 떠나지 않는 사역의 가치들입니다. 방법이 가치보다 앞서게 하지 않도록 늘 조심합니다..
신학 수업이면 딱딱하고 지루한 모습이 떠오르겠지만 일방적인 수업은 아무런 영향력이 없고요..학생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수업이 가장 효율적입니다..이것은 제가 영어가 딸리기 때문에 시도하기 시작했는데 훨씬 효과적임을 알게 되었습니다..말문이 막히면 책 내용에서 이슈를 찾아 질문을 던지면 학생들이 자기들끼리 막 토론을 벌입니다..그리고 강사가 학생들에게 가르치려는 태도를 버리고 오히려 학생들에게 배우려는 태도로 강의하는 것도 효과적이고요..어떻게 생각하느냐 가르쳐달라고 하면 신나게 말합니다. 저는 들으면서 속으론 결론을 준비하면 되고요..하루 종일 강의할 때 제일 힘든 시간이 식사 후 강의타임인데 눈이 반짝이며 입에 침을 튀기도록 적절하게 질문을 던지고 토론도 하게 하다보면 강의가 수월하고 재미가 있지요.
흔히 신학교 강의라고 하면 특정 건물 안에서 과목별로 담당교수가 정해져 있어서 커리큘럼을 따라 수업을 진행하는 것을 연상합니다만 그것은 인격적인 친밀감이 떨어지고요 강사역시 반복되는 수업으로 인해 매너리즘에 빠지기 쉽지요..그래서 저는 과목별로 강사를 돌리는 대신 2명이 학생들이 졸업할 때까지 끝까지 모든 과목을 책임지는 것이 더 효율적이라고 봅니다..인격적인 친밀감도 물론이지만 신학적 통일성을 견지할 수 있다는 것이 가장 큰 장점이 됩니다..강사가 여럿이면 신학적 이견으로 인해 여러 문제가 발생하는데요 분열되거나 심지어 깨어지는 경우도 많지요..
전통적으로 선교지에서 신학교 사역을 한다고 한다면 건물을 세우고 라이브러리를 만들고 패컬티를 갖춘 뒤 학생들을 모집하는 형태입니다만 미래의 신학교 사역은 찾아가는 모바일 형태가 될 것입니다..건물은 유지도 힘들뿐더러 현지인에게 이양하기 힘든 부분이 있지요..그래서 건물을 세우고 오라는 식이 아니라 모이면 찾아가겠다는 식으로 전환해야 합니다..목회 역시 목자가 양떼에 찾아가야 하고요..교수도 학생에게 찾아가야 합니다..
많은 분들이 묻습니다. 스쿨이름이 뭐냐고..굳이 말하면 주님의 학교..목회자 트레이닝..현재형으로 표현하는 정도..그러나 저는 거창한 학교이름을 만들지 않기로 결심했습니다. 건물도 없고..가정집에서 하기도 하고 나무 그늘에서 하기도 하고 좋은 건물을 빌려서 수업하기도 합니다..멋진 이름을 가지고 사역하는 것을 주님이 기뻐하지 않음을 느낍니다..멋진 이름과 건물은 실패를 향해 내달리는 것입니다..다른 학교와 다른 점은 여러 강사가 담당과목별로 수업하는 것과 달리 학생들이 졸업할 때까지 2인 1조가 인격적 관계 속에 함께 하는 것입니다..그리고 관건은 최대한 빨리 끝내고 가능한 빨리 강사를 세워 맡기는 것입니다..선교는 위임의 기술임을 믿습니다..
물론 모든 클라스에서 주강사를 배출하는 것은 아닙니다. 러스텐버그 클라스의 경우처럼 한 분 한 분 다 귀하고 소중하지만 이 지역에는 아직 주강사를 세우지 못했습니다..그런데 전혀 예상하지 않은 곳에서 주강사를 세우기도 합니다..모든 것이 내 뜻이 아니라 주님의 뜻대로 되는 것입니다..열매없는 모습을 계속 보면은 힘빠져서 사역을 지속할 수 없고요..예상치 못한 곳에서 주님께서 주시는 열매를 바라보면서 즐겁게 사역하고 있지요..
사역에 건물은 전혀 필요없습니다..시원한 그늘과 의자만 있으면 됩니다..책은 모두 10권이며 책값을 받으나 모두 식비로 되돌려줍니다..그외 수업료는 받지 않고요..자기들도 졸업하면 가르칠 수 있다는 소망때문에 열심히 경청하고 또 질문합니다..물론 졸업후에 지속적으로 관계를 유지하며 1년에 1, 2차례 얼룸나이 세미나를 열어주고, 때로는 강사들만을 다 불러모아서 컨퍼런스를 열기도 합니다. 교단차원에서 요청이 점점 늘고 있어서 학생모집은 전혀 어렵지 않습니다. 오히려 갈 데는 많고 시간은 부족한 상황입니다..
건물은 교사가 준비하는 것이 아니라 학생이 준비하도록 합니다. 학생들이 스스로 수업시간, 장소를 준비하고, 식사도 준비하게 합니다. 일반 신학교의 경우 정반대로 학교에서 모든 것을 학생들에게 준비해주지요..아래 사진에 보시다시피 때로는 차고에서 수업을 진행하기도 합니다.
엄밀히 말해 신학교는 지식전달의 장이 아니라 변화의 마당, 제자훈련의 장이 되어야 합니다..제가 추구하는 방향은 1)건물없는 신학교, 흑인들의 집으로 찾아가는 모바일 신학교 2)1년 안에 모든 커리큘럼을 끝내는 단기 신학교 3)졸업후 우수생을 곧바로 주강사로 세우는 파격적인 신학교 4)주강사가 개원강사가 되어 함께 협력하는 2인 1조의 강사시스템 5)주강사로 세워지게 되면 고향을 떠나 타지에서 새로운 스쿨을 개척할 것 6)새로운 주강사가 스쿨 운영권을 전적으로 갖고 책임질 것 7)객원강사는 신임 주강사가 온전히 신학자립을 할 수 있도록 1년간 함께 하며 도울 것..이런 방침으로 작년 5개 스쿨에서 2011년에는 최대 15개 클라스까지 확장할 수 있었습니다..
흑인목회자들을 신학훈련하면서 그들이 열광하는 부분은 바로 이것입니다..1)말씀을 묵상하는 훈련을 시켜달라는 것..2)성경에 대한 지식도 필요하겠지만 본문 자체에 대해 배우게 해달라는 것..3)섬기는 교인들로 하여금 어떻게 세상을 대할 것인지 예를 들어 에이즈환자, 이단, 정치인, 시골지역에서의 개척..에 대해 구체적으로 훈련시켜달라는 것입니다..이러한 요청에 얼마나 구체적으로 반응하느냐가 이 나라에 최초의 토착신학교를 세우는데 넘어야 할 관문이 될 것입니다..
현대신학교의 가장 문제는 신학은 있는데 신학자립을 시켜주지 못하는데 있다고 하겠습니다. 말씀을 객체화하여 분석하는데 치우쳤으며 커리큘럼의 일관성을 상실한 채 무엇보다 말씀을 주체화하여 전인격으로 분석당하는 묵상훈련의 부재야 말로 가장 크다고 하겠습니다. 목회현장에서 부딪히게 될 관계훈련또한 부족하고, 무엇보다 세상을 다스리고 정복할 교인들에게 경세관을 어떻게 가르칠 것인지 신학교에서 손을 놓고 있다는 것입니다..토착신학교란 말씀을 분석할 뿐 아니라 말씀에 분석당하는 묵상의 대가, 그리고 세상을 변혁해나가는 세계관의 대가를 길러내는 곳이어야 합니다..쏟아지는 정보와 지식은 있으나 세상을 진동시킬 사상은 없다는 것..
토착신학교는 앞으로 세계선교계에 화두로 떠올라야 합니다. 모든 종족과 민족 안에 신학적 자립을 외치는 토착신학교가 세워지는 것..이것이 세계선교의 방향이 되어야 합니다. 교회의 자립 역시 재정자립이나 NCD의 몇 가지 문구가 아닌 바로 이것으로 평가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신학자립을 이루지 못한 사람이 교회를 이끌어가는 것은 마치 모래위에 건물을 짓고 있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이 나라에 개혁주의 후손이라 자부하던 유럽인들이 정착한 지 수백년이 지났지만 흑인사회에 개혁주의 신학이 어떤 긍정적인 영향을 주었다는 증거를 찾을 수 없다는 것은 참 아이러니입니다. 그 원인을 곰곰히 생각해보면 이 땅의 보석을 강탈하러 온 식민지배에 대해 개혁주의 신학자들은 항거하기는 커녕 오히려 인종차별을 지지하는 신학적 해석을 내렸다는 것입니다. 한 흑인 목사의 말에 의하면 백인들은 자기들에게 성경을 주고 보석을 가져갔다고 합니다. 백인의 탐욕과 부당한 토지법에 항거하여 흑인들은 독립교단을 자처하게 된 것입니다. 다행한 것은 흑인들이 기독교를 배척하지 않고 자기들 스스로의 힘으로 토착화하려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토착신학교는 하나도 세워지지 못했습니다..백인목사나 교회는 흑인 마을에 들어가기를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건물을 세워 오라고 하지만 돈 없고 자존심 센 흑인 현지인들은 찾아가지 않습니다. 돈을 준다고 해도 말입니다.
이제 아프리카에서의 신학교 사역은 새로운 돌파구를 마련하기 위해 새로운 패러다임, 혁명적이고 급진적인 방법으로 전환해야 할 때입니다. 건물을 세우고 돈을 주면서 "오면 가르쳐주겠다"는 식의 과거 신학훈련 방법으로는 더 이상 아프리카에서 신학적 자립이란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아프리카 기독교의 95% 이상이 서구 기독교와 별개임을 선언한 독립교단입니다..이런 토착화의 문제는 수많은 교단난립과 이단과 사이비의 공격에 노출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더 심각한 문제는 토착신학교는 전무하다는 사실입니다. "신학자립"이 안되어 있는 것입니다. 아프리카의 사활은 재정자립보다 신학자립입니다. 그래서 토착신학교 설립이야말로 아프리카뿐만 아니라 모든 세계선교의 최종 목적지라고 감히 말하고 싶습니다..여기서 "토착신학교"란 현지인 스스로 신학자임을 자처하여 현지인들을 신학훈련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말합니다..목회도 마찬가집니다..스스로 말씀을 묵상하여 먹을 뿐 아니라 먹일 수 있는, 그래서 말씀 안에서 자립할 수 있는 교회만이 진정으로 교회다운 교회인 것입니다..
예배가 없기 때문에 선교한다고 존 파이퍼 목사님은 말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곳에 토착신학교가 없기 때문에 선교한다고 생각합니다. 신학자를 키우고, 목사를 길러내는 목회자를 키우는 것이야말로 선교의 진정한 이유입니다. 이 땅에 신학적 자립이 이루어지는 것, 제대로 토착화된 신학교가 세워지도록 기도해주십시오..
바켄사 무쏘 와모디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