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9년 신대원에 입학하면서 목회사역의 길을 접어들었을 때 목회의 모델에 대한 갈급함이 늘 있었습니다.
나름대로 목회의 모델을 찾던 중 완벽하지는 않지만 이것이다! 라고 하면서 찾은 것이 미국 갈보리 채플 교회였습니다.
자료를 모으고 조금씩 정리해두기 시작했는데 2005년 출파내주겠다는 분을 만나서 공개되게 되었지요..
책을 구하기 어려운 분들을 위하여 제 원고를 상/하로 나누어서 올려봅니다.
목회의 본질, 교회의 본질에 대해 나름 고민하는 분들에게 도움이 되길 바랍니다^^
갈보리채플 이야기 (상)
-척 스미스 목사의 목회철학, 그리고 갈보리 채플운동 연구-
김 광 락 목사
“비와 눈이 하늘에서 내려서는 다시 그리로 가지 않고 토지를 적시어서 싹이 나게 하며 열매가 맺게 하여 파종하는 자에게 종자를 주며 먹는 자에게 양식을 줌과 같이 내 입에서 나가는 말도 헛되이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고 나의 뜻을 이루며 나의 명하여 보낸 일에 형통하리라.”(이사야 55:10-11절)
목 차
서문
I. 척 스미스 목사의 설교와 목회철학을 연구하게 된 동기(연구의 필요성)
1.실패에서 성공으로
2.오순절과 개혁주의의 중간노선
3.방법이 아닌 본질로써 승부 함
4.단순성의 묘미
5.제자목회의 진수
II. 목회자로서의 척 스미스
1 척 스미스의 생애와 신앙배경
(1) 가정배경
(2) 회심과 소명
(3) 영향
(4) 경력
(5) 17년간의 영적 가뭄기에서 배운 영적 교훈들
1) 초교파 사역의 비전을 얻다.
2) 믿음목회의 원리를 배우다
3) 성경적 목회철학을 재정립하게 되다.
4)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 재정립하게 되다
5) 성령 안에서의 자유함에 대해서 배우다.
2. 척 스미스의 목회철학
(1)소명론
(2)교회론
(3)조직론
(4)성령론
3. 척 스미스의 목회철학과 방향과 방법
(1) 척 목사의 목회에 초석을 놓은 3가지 성경구절
(2) 척 목사가 받은 하나님의 추수약속
(3) 척 스미스 목회철학의 5가지 특징
1)비전목회(Vision Ministry)
2)본질목회(apostolic ministry)
3)믿음목회(faith ministry)
4)말씀목회(teaching ministry)
5)제자목회(diciple-making ministry)
맺는 말
서문
이제는 본질로 승부를 할 때가 왔다! 본질에 충성하는 자가 성공한다! 이것은 모든 시대에도 통하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특별히 요즘과 같이 급변하는 세상에 살아야 하는 그리스도인들이 견고하게 붙잡아야 할 삶의 공식일 뿐만 아니라 고민하는 목회자들에게도 통하는 공식입니다. 오늘날 변화하지 않는 기업은 망한다고 합니다. 교회 역시 변화무쌍한 세상의 흐름에 적응하려고 무진장 노력하고 있습니다. 목회자들은 이런 저런 세미나를 뛰어 다니면서 새로운 방법을 찾아다니고 있습니다. 때론 눈물겹기도 합니다. 그러나 문제의 핵심은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는 데 있습니다. 아니 변하기를 싫어하는데 있습니다. 목회자 자신이 변하지 않은 채 다른 사람이나 조직을 변화시키려고 노력한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변하지 않는 한 결코 남을 변화시킬 수 없습니다. 개혁교회는 부단히 스스로를 개혁해야 한다는 이 원리는 부단히 새로운 행사나 기발한 프로그램을 적용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과 성령 앞에서 자신이 부단히 변화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부단히 본질과 원리에 충성하며, 비본질과 원리 없는 방법에 대한 거부권을 행사하는 것입니다.
사실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는 문제는 어떻게 구원받느냐는 문제와 동일하게 중요합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너무 많은 사람들이 천국으로 가는 쉽고 편하고 넓은 길을 찾는데 열심이었습니다. 이제는 본질로 돌아가야 한다고 봅니다. 어느 세대나 적용될만한 원리를 찾아야 합니다. 그것은 어쩌면 너무나 잘 알고 있는 것이며, 너무 많이 들어온 것이어서 우리가 대단하게 여기지 않는 것들인지 모릅니다. 그 보배는 우리가 늘 밟고 지나다니는 밭에 감추어져 있을 지 모릅니다. 이제 밭에 감추인 보배를 발견하기 위해 구하고 찾고 문을 두드려야 합니다. 주께서 눈을 열어주셔서 밭에 감추인 보화를 발견할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발견한 것은 다시 잃어버리거나 빼앗기지 않기 위해서 견고하게 붙잡아야 합니다. 그것이 완전히 내 것이 되기까지 품고 또 품어야 합니다. 본인은 목회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있는 젊은 목사로서 이 문제를 가지고 씨름해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저의 마음속에 정말 중요한 것은 훌륭한 이론이 아니라 실제적인 모델을 소유하는 것입니다. 모델을 보지 못하고 이론만 가지고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요즘 배우고 있습니다. 사실 목회철학을 정립하고 목회방향을 정하는 데 있어서 도전과 영감을 준 많은 분들이 계셨습니다. 그러나 내 마음에 안식과 평화를 가져다 준 경우는 매우 드물었습니다. 도전을 준 분들을 닮아가려고 노력하면 할수록 점점 힘들게 느껴지곤 하였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부르심의 소망과 거리가 멀기 때문이라는 것을 나중에서야 알게 되었습니다.
저는 이 시대에 참으로 건강한 사역자와 바람직한 교회의 모델이 어디 있을까 고민하며 나름대로 노력하면서 찾아보았습니다. 그러던 중 우연히 갈보리 채플과 척 스미스 목사에 대해 주목하기 시작한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 부족한 책을 통해 나누고 싶은 것은 귀한 교회를 주목하면서 받은 은혜들을 함께 나누고자 하는 것입니다. 교회를 사랑하며 섬기는 모든 신실한 동역자들에게 척 스미스와 그의 목회, 그리고 그의 교회에 대해 소개하면서 무조건 모방하기보다는 변함없는 원리를 발견하기 바랍니다. 그래서 스스로 목회관을 정립하고 그 목회관에 입각한 방법론을 스스로 발견하는데 작으나마 이 책이 일조 했으면 합니다. 이 부족한 책에서 저는 척 스미스 목사님과 그가 섬기는 갈보리 채플, 그리고 갈보리 채플이 20세기 현대교회사에 미친 영향들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1965년 척 스미스 목사의 목양을 받는 25명의 교인을 가진 하나의 초교파 교회로 시작한 코스타 메사(Costa Mesa)의 갈보리 채플은 현재 30,000여 성도가 출석하고 있으며, 갈보리 채플의 출판사인 [오늘의 말씀](The Word for Today)은 성경 공부 책자들과 말씀 테이프들을 전세계에 펴내고 있으며, 갈보리 채플의 F.M.방송국인 케이웨이브(KWVE,107.9MHz)는 남가주 전역에 방송을 보내고 있으며, 갈보리 채플 성경 대학은 캘리포니아 트윈 픽스(Twin Peaks)의 캠퍼스와 전세계에 확산되어 있는 20여 개의 결연 학교들을 통하여 많은 헌신된 사역자들을 양성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의 영향을 받아 나가서 목회 하는 제자들이 약 3,000여명이 넘으며, 개척한 갈보리 채플만도 600여 개가 넘고 있다고 합니다. 척 스미스 목사의 설교를 듣고 읽으면서 저는 그가 풍부하고 신선한 영감의 말씀뿐만 아니라 청빈, 영성, 인격이 조화된 목회자상을 보여주고 있는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분의 목회를 닮고 싶은 마음이 강하게 들었습니다. 또한 척 스미스 목사는 20세기 미국 교회사에 있어서 큰 획을 그은 목회자로서, 미국의 70년대 히피들을 중심으로 한 '예수운동'(Jesus Movement)를 주도한 인물이지만 한국에는 늦게 소개된 목회자입니다. 갈보리 채플은 쓰러져가는 미국의 도덕성을 회복하는데 크게 쓰임 받았으며, 은사중심 교단과 말씀중심 교단 모두에게 지지받고 있습니다. 하지만 척 스미스 목사와 갈보리 채플 운동에 대해 한국교회에 제대로 소개된 적이 없었다고 생각됩니다. 사실 70년대 미국의 많은 히피들을 변화시켜나간 갈보리 채플 운동은 80, 90년대 한국교회에도 알게 모르게 큰 영향을 준 것이 사실입니다. 예를 들면, 경배와 찬양운동, 제자훈련, 강해설교, 등등입니다. 어쩌면 갈보리 채플 운동에 대해 잘 몰랐던 것은 자신을 알리는데 소극적인 척 스미스 목사의 성격을 증명하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척 스미스 목사님은 교회를 홍보하는 일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우연히 저는 1988년도 신학대학원 입학을 준비하는 가운데 [세계20대교회](엘머 타운즈 저) 라는 책을 통해 처음 그를 알게 되었습니다. 저는 성경해석과 특히 강해설교에 신학교에 입학하기 전부터 큰 관심이 있었는데 그의 단순하면서 실제적인 강해설교에 큰 도전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설교보다는 그의 목회철학과 원리들이 여타 다른 목회자들과는 여러 가지 점에서 특이한 점이 많았고 그래서 필자의 관심을 끌었는데 그의 목회철학과 설교방법에 대해 자세히 소개해 줄만한 책들을 뒤졌지만 아쉽게도 너무나 자료가 빈약했습니다. 하지만 구하고 찾는 자만이 얻을 수 있다고 했습니까? 우연히 1998년도 서울 갈보리채플에서 배포하는 척 스미스의 목회자료를 통해 그분의 목회철학과 목회방법에 대해서 보다 깊이 나름대로 연구하기로 결심하게 되었고 국내외 모든 자료들을 모으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단순한 호기심으로 자료들을 모으기 시작하면서 점차 진지한 태도로 자료들을 검토하기 시작했습니다. 목회의 현실에 적응하기 시작하는 젊은 목사로서 저는 앞으로의 목회의 패러다임과 모델을 얻고자 하는 열망이 강렬했었는데 척 스미스에게서 찾을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모은 자료들은 순전히 그의 설교집, 오디오, 그리고 비디오, 인터넷이 고작이었습니다. 그를 직접 만나 본 것도 아니었고, 그에게서 직접적인 영향을 받은 관계도 아니어서 굉장히 아쉽지만 그러나 최선의 노력으로 그와 그의 목회를 이해하려고 함으로써 나름대로 유익을 얻었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정보화시대에 살고 있는 덕분(?)입니다. 그래서 98년도에 자료들을 정리하면서 받은 유익을 잘 정리하여 두었는데 5년의 시간이 흘렀는데도 그때 정리해둔 자료들은 아직까지도 내게 큰 힘과 영감을 제공받고 있습니다. 사실 5년 동안 저는 갈보리 교회에 대해 체계적으로 소개해줄 책이 나오기를 간절히 기대했지만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마침 주위의 격려도 있었고, 또한 이 자료들을 혼자서만 간직하기보다는 다른 분들을 위해 공유하는 것이 더욱 의미가 있으리라는 확신으로 칠삭둥이를 출산하는 심정으로 어설프지만 내어놓기로 하였습니다.
이제, 이 책을 그리스도의 몸을 사랑하는 모든 그리스도인들과, 교회를 주님의 뜻 가운데 건강하고 성숙한 교회 되도록 섬기기를 열망하고 자신을 기쁘게 드리려는 모든 사역자들에게 드리기 원합니다. 부족한 졸저를 깊은 애정과 관심으로 살펴준 서울 갈보리 채플의 김요나 목사님께 참으로 감사드립니다. 목사님은 모든 필요한 자료들을 아낌없이 제공해주셨을 뿐만 아니라 진심 어린 조언을 해주셔서 저는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아울러 격려해주신 김명수 목사님과, 격려를 아끼지 아니한 애클레시아 동역자들에게 감사를 드리고, 기도로 내조한 아내에게 감사드립니다. 또한 필자가 섬기는 교회의 청년들에게 감사하고 싶습니다. 마지막으로 모든 영광을 나의 주님께 돌려드리기 원합니다. 이 부족한 책을 통해 교회를 사랑하며 충성하는 모든 주의 종들에게 힘과 격려가 되며, 이 땅에 있는 그리스도의 몸이 더욱 강해지는 은혜가 있기를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2002년 5월
갈현동에서
김광락 목사.
I. 척 스미스 목사의 설교와 목회철학을 연구하게 된 동기(연구의 필요성)
침체된 교회에 신선한 생기의 바람을 불어넣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한 사람을 불러 사용하신다. 그렇게 쓰임 받은 한 사람에 대해 살펴보는 것은 교회를 사랑하고 섬기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매우 재미있는 과제가 아닐 수 없다. 그의 사역철학과 사역방법론을 연구하면서 도전과 격려를 받을 뿐만 아니라 실제 현장에 모방할 수 있는 귀중한 원리들을 발견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행동지침을 얻는 것보다 더욱 더 흥분시키는 것은 무엇보다 그를 어떻게 연단 하시고 준비시키셨고 그를 인도하셨는지에 대해 생존하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지혜를 발견하기 때문이다. 사람의 실패와 넘어짐, 그리고 완고한 고집과 불순종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께서 친히 다스리신다. 그분의 놀라운 지혜는 우리의 마음을 새롭게 하여 다시금 그분 자신을 신뢰할 수 있도록 격려해주며, 사역자로 하여금 현장에서 답답하게 느끼게 만드는 장애물의 정체를 발견하게 해주며 그러한 견고한 요새를 정면으로 돌파하기에 넉넉한 믿음과 소망과 사랑을 심어 준다. 바로 이것 때문에 모든 그리스도인들, 특히 헌신된 사역자일수록 하나님에 의해 크게 쓰임 받았던 신앙의 선배들의 전기를 늘 가까이 하게 되는 것이다. 깨어 있어 그리스도의 몸을 강하게 하며 견고하게 세워나가야 할 그리스도인이라면 교회가 지나온 발자취를 더듬어보면서 그곳에 충성된 일군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었던 하나님의 사람을 주목하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을 것이다.
먼저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사역의 주인공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라는 사실이다. 따라서 한 목회자의 설교와 목회철학을 학문적으로 체계화한다는 것은 사실 그를 들어 쓰신 하나님보다 개인에게 초점을 맞추게되는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즉,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강조하기 보다 한 사람의 사역을 통한 인본적인 요소의 틀(frame)을 만들어 이 사람이 이처럼 위대한 일을 했기 때문에 이런 놀라운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게 되었다는 식으로 이야기하는 오류를 범하게 된다. 그러한 이야기는 낙심한 자에게 잠시 희망과 용기를 불어넣어 줄 지 모르지만 하나님께 돌려야 할 영광을 사람에게 돌리는 엄청난 잘못을 자초하는 것이다. 또한 그들의 사역은 필경 교회를 향하신 그리스도의 뜻보다는 사람의 방법을 추구하기 때문에 실패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명백한 사실 속에서도 오늘날 교회 속에 유행하는 풍조들 즉 간증집회, 교회성장을 위한 상담학, 임상목회, 치유목회 세미나 등이 속출하고 있는 것은 참으로 가슴 아픈 일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역자를 조명하는 데 있어서 사람의 방법이나 인품이나 행동에 초점을 맞추지 않도록 조심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며 교회를 향하신 그분의 신실하신 말씀을 강조해야 한다. 하나님이 높임 받는 것보다 사람이 영광을 더 받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하나님이 사용하신 개인이나 교회를 살펴보면서 그 안에 어떤 ‘비밀’이 있는지를 살펴보는 것은 어쩌면 위험한 일일 수 있다. 왜냐면 그 ‘비밀’이란 바로 하나님 자신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보다 위대하신 하나님 한 분의 영광을 바라보며 감탄해야 마땅하다. 한 목사의 영성, 목회철학과 설교론에 대해 책을 쓰는 것은 다분히 위험하다. 그러나 이러한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체계적으로 연구할 필요가 있는 것은 ‘도전’과 ‘각성’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지금 교회의 현실은 타성과 구습을 깨뜨리고 영적 각성으로 인도해 줄 하나님의 충성된 종들을 필요로 하고 있다.
우리는 하나님의 교회를 위해 신실하게 섬겼던 수많은 사람들이 있음을 인정한다. 그러나 유명해졌다고 반드시 성공한 것은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하고 싶다. 그러나 이름 있는 목사 개인을 조명할 때 우리가 바른 동기를 가지고 접근한다면 많은 유익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의 사람을 조명하면서 창조적이며 혁신적인 패러다임을 발견하게 되고 결국 우리는 신선한 도전과 감동을 받으며 열심을 낼 수 있다. 물론 그 열심은 하나님을 향한 것이 되어야 한다. 혹시 어떤 경영자들이 하는 것처럼 경쟁목표로 정하고 ‘벤치마킹’하지 않기를 바란다. 오히려 한 개인의 삶과 사역을 연구하면서 그리스도를 목표로 삼게 된다면 더할 나위 없이 바람직한 것이다. 이 책에서 시도하려는 것은 척 스미스 목사와 그가 섬기는 갈보리 교회를 소개함으로써 또 다른 ‘대안’을 소개하려는 것이 결코 아니다. 이 책의 목적은 목사를 부르신 하나님의 소망과 교회를 세우신 하나님의 거룩하신 뜻을 발견하도록 도와주는 일이다. 다시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열심을 발견하고 하나님의 열심으로 다시 불붙게 하는 일이다. 본인은 그의 설교를 읽고 들으며 그의 목회에 관련된 원서들을 읽어나가면서 방법이상의 원리를 발견하게 된 것이 너무나 기뻤고, 그 원리를 나누고자 하는 것이다. 우선, 필자가 그의 설교와 목회철학에 대해 연구하기로 결심하게 된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작용하였다. 나를 매료시켜 연구에 임하게 한 그의 매력이 무엇인지 먼저 간략하게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1.실패에서 성공으로
그는 갈보리채플을 담임하여 본격적인 하나님의 사역에 쓰임 받기 전까지 17년 동안 목회임지를 여러 곳을 전전긍긍했다. 이 17년간의 기간은 한 목회자에겐 상당히 긴 기간으로서 척 스미스 목사 자신이 ‘열심히 해도 안 되는’ 실패의 연속을 경험한 기간이었다. 이 기간 동안 영적, 재정적으로 매우 힘들었었는데 그는 이 기간을 필연적인 ‘사막기간’이라고 진술하고 있다. 즉, 출애굽한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에 들어가기 전에 40년간 광야에서 연단을 받았던 것처럼 척 스미스 목사 자신도 미래의 사역을 준비시키는 하나님의 연단과정을 경험했다는 뜻이다. 사실 이런 점에서 그는 모든 탈진한 목회자, 오랫동안 사역의 열매가 없음으로 절망해 가는 ‘평범한’ 목회자들에게 희망을 주고 있음이 분명하다. 필자는 그의 영성과 믿음목회에 있어 결정적인 뿌리는 이 ‘영적 가뭄기간’에서 비롯된다고 확신한다. 그가 오랜 기간 동안 쓰라린 실패의 연속을 경험한 경력이 있다는 사실은 다른 모든 목회자들에게 하나님의 은혜를 소개해준다. 이런 점에서 그의 목회와 설교를 연구하는 것은 대단히 매혹적인 부분으로 필자에게 다가왔다.
2.오순절과 개혁주의의 중간노선
그는 온건한 오순절주의(soft pentacostal) 노선을 취하고 있다. 그는 성경말씀의 권위를 강조하는 근본주의와 성령의 자유로운 역사를 강조하는 체험주의의 균형을 이루려고 노력하고 있는데 이는 본인의 취향과 맞아떨어진다. 또한 그는 칼빈주의와 알미니안주의의 ‘중도노선’을 걸어야 할 것을 강조하고 있다. 이는 교리적 치우침이 교회의 분열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판단하고 있기 때문이다. 척 스미스 목사는 오랫동안 교회에서 전수된 정통교리를 비판하기보다는 정통교리를 잘못 이해함으로써 파생되는 ‘그리스도의 몸의 분열’을 우려하고 있다고 보여진다. 교리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부족하다고 그를 혹평할 수 있겠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몸의 일치에 대한 그의 열정과 애정을 무시할 순 없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의 설교나 가르침이 교리적이지 않다는 것이 아니다. 그의 설교는 다분히 교리적이다. 실제로 매주 목요일 저녁마다 교리강해를 직접 하고 있다. 요즘 다른 교리를 비판하는 목회자는 많아도 바른 교리를 가르치는 목회자는 찾아보기 힘들다. 매주 교인들에게 바른 교리를 가르치는 목회자가 몇이나 있는가? 필자가 살펴본 바에 의하면 그의 목회와 설교는 다분히 교리적이라는 점을 간과할 수 없었다. 그러나 교리에 대한 그의 강조는 교리의 보존이 목적이 되어버린 신학교의 강의와는 전적으로 다르다. 그의 가르침은 겉으로는 강해설교로 유명하지만 속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다분히 교리적인데, 그의 교리는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기 위한 것이라는 점에서 신학교에서의 교리 강의와 차별을 이룬다고 하겠다. 그런 의미에서 그의 신학은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는 길’ 즉, ‘중용의 도’를 따르고 있다. 이는 요즘 사역자들 간에 입에 오르고 있는 새들백교회에서 주장하는 ‘균형목회’도 갈보리채플의 노선과 맥락을 같이한다고 생각된다. 건강한 교회는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아야 한다. 아무리 좋은 목적이라 할지라도 어느 한쪽만 강조한다면 건강한 교회가 될 수 없다. 아무리 좋은 교리라 할지라도 전반적으로 골고루 강조되지 않고 어느 한가지만 강조한다면 기형적인 교회가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최근 교회성장학에서 이와 같은 ‘균형’이 강조되는 것은 바람직한 현상이라고 볼 수 있다. 큰 교회라고 다 건강한 교회는 아니다. 건강한 교회는 균형 잡힌 교회이다. 건강한 교회는 지성과 체험의 중용, 교리적 중용, 하나님의 은혜와 인간의 자연스런 반응의 중용을 취해야 한다. 건강한 교회의 목회자는 반드시 이 ‘균형감각’을 소유해야만 한다. 이런 점에서 척 스미스(Chuck Smith)의 가르침은 사역자 지침의 모델이 되고 있다.
3.방법이 아닌 본질로써 승부 함
21세기 목회는 방법이 아니라 ‘본질’로 승부해야 한다. 수많은 세미나를 전전긍긍하면서 ‘더 나은’ 프로그램을 찾아다니는데 시간을 낭비하는 목사들은 본질이 무엇인지 알고 있는지 궁금하다. 지금까지 한국교회는 부흥운동, 찬양과 경배운동, 선교운동, 강해설교운동, 제자훈련운동, 공동체운동, 그리고 새들백교회의 과정목회운동, 윌로우크릭 교회의 열린 예배운동, 그리고 최근에는 NCD와 셀(sell)운동으로 이어지는 물결을 경험해오고 있다. 이제 또 어떠한 변화의 바람이 한국교회에 몰아칠지 사뭇 궁금하다. 그러한 모든 운동은 모두 지역과 시대에 국한되어 있는 것들이다. 모든 물결 배후에 살아 계신 하나님이 계신다. 하지만 이제 어느 시대에나 변함없이 적용되어야 할 교회의 모델을 제시함으로써 또 새로운 물결을 찾아다니려는 시도를 끝내야 한다. 즉, 이제는 방법이 아니라 원리로 승부해야 한다는 사실이 점점 명확해지고 있다. 물론 독특한 시대와 문화에 복음을 적응하려는 노력을 무시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교회는 그 지역사회의 문화적 옷을 입어야 한다. 언제나 철 지난 옷을 고수해서는 안 된다. 하지만 역시 언제 어디서나 교회가 붙잡아야 할 하나님의 부르심의 소망을 잊어서는 안 된다.
교회의 본질이 무엇인가? 하나님은 교회를 왜 부르시고 세우셨는가? 이런 점에서 척 스미스 목사의 사역은 다분히 본질 목회라고 할 수 있다. 사실, 주의 일을 힘쓰는 사역자치고 나름대로 본질을 강조하지 않는 사람이 누가 있는가? 그러나 대부분은 자신만이 가진 독특한 은사와 인격과 재능을 강조한다. 은사와 인격은 매우 중요한 부분이지만 ‘본질’은 아니다. 어떤 이는 ‘신유의 은사’를 목회의 본질로 주장한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다 신유의 은사를 받은 것이 아니다. 어떤 이는 조직적인 시스템을 개발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어떤 교회에 적합한 시스템이 모든 교회에 적용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여기서 ‘본질’이란 단어를 쓰기 위해서는 모든 사람이 본받을 수 있는 원리를 말한다. 척 스미스 목사는 종종 ‘원리’를 강조한다. 그리고 원리에 충실하고자 노력한다. 척 스미스 목사로부터 배운 제자들이 600여 개의 새로운 갈보리채플을 개척할 수 있었던 것은 누구나 쉽게 이해하고 공감하며 적용할 수 있는 원리를 가르쳤기 때문이다. 어느 시대나 크게 쓰임 받았던 사역자나 교회는 항상 있어 왔다. 하지만 다른 교회들이 쉽게 배우고 적용할 수 있는 원리를 제시하는 것은 매우 드문 현상이다. 독특한 은사와 독특한 인격, 혹은 독특한 재능 때문에 성장한 교회는 결코 닮은꼴을 만들 수 없다. 이것이 오늘날 목회자 계승이라는 리더십 공백기에서 생겨나는 교회의 혼란과 어려움이다.
누구나 어떤 교회나 본받을 수 있는 원리를 바람직한 교회를 생각할 때 척 스미스 목사는 특히 사도행전에 나오는 초대교회의 모델을 바람직한 교회 상으로 삼고 있다. 현대의 시류에 따라 유행하는 목회패턴이 아니라 성경이 제시하는 ‘사도적 목회상’을 따르고자 한다. 이것은 ‘본질목회’요 ‘사도적 목회(apostolic ministry)’라고 부를 수 있다. 그가 강조하는 목회의 본질은 하나님과 그의 말씀에 대한 변함없는 사랑과 영혼들에 대한 애정을 바탕으로 성경과 성령의 권위를 적극적으로 인정하며 순종하는 것이다. 그는 무엇보다 성경을 체계적이고 순서적으로 해설(exposition)하는 것과 성령의 역동적인 능력을 의지하는 것의 균형을 추구하려고 한다. 또한 본질목회라고 이름 붙인 이유는 사역의 본질이 아닌 것은 과감하게 버릴 줄 아는 개혁적 자세 때문이다. 교회는 부단히 개혁되어야만 한다. 그는 여러 가지 현대조류에서 발생하는 인본적 프로그램을 거부한다. 그래서 교회를 성장시키고자 하는 특별한 전도 프로그램이나 세미나 행사 등을 일체 거부하고 있다. 그렇다고 갈보리채플 안에 교회 행사나 전도 프로그램이나 교회 조직이 없다는 뜻이 아니다. 다만 그러한 것들이 영혼을 섬기기 위해 존재하도록 하는 것이지, 그러한 교회 조직이나 행사를 위한 사역을 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래서 항상 ‘억지스러움’을 거부하고 ‘자유스러움’을 만들어내려고 노력한다. 사실 어떤 점에서 이것이 갈보리채플 교회의 성장의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고 보는 시각이 갈보리채플 출신 사역자들의 지배적인 생각이다. 사실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는 이러한 자유스러운 성령의 역사로 출발되었지만 점점 인본적으로 조직화하려는 시도들에 의해서 오늘날의 교회와 같이 숨이 막히게 될 정도로 경색되어 버렸다. 목회자의 의무는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육체로 마치지 않기 위하여 끝까지 인위적인 시도를 감시하고 자유스러운 성령의 흐름을 원활하게 하는 것이다. 척 스미스 목사는 이러한 교회의 모습을 성경에서 찾으며 그 결과 성경적인 모델을 지향한다. 그는 사도행전 2장에 기록된 ①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②교제하며 ③떡을 떼며 ④기도하기를 힘쓰는 초대교회의 모습을 본받고자 노력한다. 따라서 그는 여러 가지 현대적 사상에 근거한 인위적 목회프로그램을 배격하는 것이 성공적인 목회의 중요한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척 스미스 목사의 목회를 연구하면서 우리는 무엇이 목회의 본질인지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되는 축복을 얻을 수 있다.
4.단순성의 묘미
그에게 가장 매력적인 강점은 ‘단순성의 묘미’(beauty of simplicity)에 있는 것 같다. 그는 온건한 ‘오순절주의’(soft pentacostal) 목사였지만 갈보리채플 사역 이후 오순절주의 하면 흔히 연상이 되는 그러한 카리스마적 액션을 강단에서 취하지 않는다. 그는 매우 편하고 인간적인 모습으로 강단에 서고 또 성도들을 대한다. 그는 설교할 때도 ‘자연스럽게’ ‘편안하게’ ‘부드럽게’ ‘대화하듯이’ 말하려고 한다. 과장된 제스처나 화려한 수사학적 기교는 찾아보기 어렵다. 그는 수천의 청중을 대하고 있지만 수천의 청중을 의식하기보다 마치 한사람과 대화하듯이 설교한다. 그의 설교는 웅변을 듣는 것이 아니라 편안한 대화에 참여하는 듯한 인상을 준다. 그의 설교는 설교라기보다는 대화형 가르침이다. 그러나 그의 모습과 가르침 속에는 무시 못할 영적 권위와 풍부한 영감이 묻어 나온다. 또한 그는 목회자의 ‘티’를 전혀 내지 않는다. 심지어 그는 강단에서 목회자의 가운을 입지 않는다. 그렇다고 많은 갈보리채플의 젊은 사역자들처럼 캐쥬얼 복장으로 강단에 서지 않는다. 그는 양복을 입고 주일 강단에 선다. 그러나 그에게서 권위적인 인상이나 외모나 몸짓은 찾아보기 어렵지만 참된 권위에 압도당하는 것이 무엇인지 잘 보여준다. 친근한 아저씨와 같은 인상과 편안한 복장과 외모, 그리고 특별할 것이 없는 스타일, 그러나 그러한 단순함 속에 성령의 후광적 위엄과 영감이 나타난다. 바로 이 점이 나를 매료시켰다.
또한 그의 인격성에 있어서의 단순성뿐만 아니라 그의 목회사역에 있어서도 단순성이 단연 돋보인다. 그의 목회철학과 방법에 대해서 누가 물으면 항상 대답하는 것은 “성경을 처음부터 끝까지 가르치라”는 말이다. 매우 단순한 대답이다. 척 스미스 목사는 자신의 목회철학과 방식에 대해서 ‘성경에 다 있는 것이고’ 적용하기 쉬운 것이고 결코 어려운 것이 아니라고 한다. 그가 다른 제자들과 목회자들에게 가르치는 목회의 원리는 매우 간단하고 단순하다. 복잡하면 적용하기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원리가 단순할수록 사역 속에 적용하기 쉽다. 척 스미스 목사의 목회는 이러한 단순성의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좋은 사례이다. 그는 특별한 행사나 프로그램이나 복잡한 방법론을 가르치지 않는다. 그가 가르치는 것은 매우 단순한 목회의 원리일 뿐이다. 하지만 그 원리는 매우 단순해서 지나치기 쉽다. 나는 그의 설교를 읽고 듣고 비디오로 들으면서 한 가지 교훈을 깨달았다. 가장 중요한 원리는 가장 가까운 곳에 있으며 가장 가까운 곳에 있기 때문에 사람들이 잘 찾지 않으며 또 잘 찾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척 스미스 목사의 목회철학은 매우 심플하다. 그러나 침체된 목회자들의 ‘원기를 단번에 왕성하게’ 해줄만한 그런 획기적인 아이디어나 프로그램은 없다. 그러나 매우 단순 명료한 그의 원칙들은 충분히 모든 목회자들이 공감할 수 있는 것이며 새 힘을 불어넣기에 충분할 정도로 영감이 넘친다.
5.제자목회의 진수
그의 목회에서 가장 큰 장점은 그에게 영향을 받았던 제자들의 성공이다. 서울 갈보리채플에서는 척 스미스 목사의 목회의 특징을 성공적인 제자목회에 있다고 말하고 있다(이요나 목사-서울 갈보리채플). 세상에는 수많은 강해 설교자들이 있었지만 똑같은 성경적 원리를 강해 설교로 가르쳐 600여 교회를 개척, 3,000여 제자와 함께 미국 최대 교회 25개 중 12개를 석권한 강해 설교자는 갈보리채플 척 스미스 목사뿐입니다.” 보통 대형교회를 목회 하는 목사라 할지라도 자신의 목회를 그대로 본받아 목회 하는 다른 제자들을 길러내는 것은 거의 드물다. 대부분 중대형 교회를 목회하는 목사들은 고독한 사자처럼 으르렁거리며 사역한다. 그들의 권위는 너무 무서워서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 감히 흉내를 낼 엄두를 내지 못한다. 생각해 보라. 목회자 개인이 다른 목회자를 3,000여명 길러낸 경우가 교회 역사상 또 있는가? 그는 어떻게 이 일을 해낼 수 있었는가? 그는 분명 카리스마적인 사역을 하고 있지만 대단한 카리스마적 인물은 아니다. 그를 아는 사람은 그를 매우 평범한 크리스천으로 본다. 본인이 비디오를 통해 그의 설교를 분석한 결과 그는 마치 사귀고 싶은 이웃집 할아버지 같은 인상을 준다. 이것이 그의 가장 큰 매력이다. 그는 특별히 탁월한 능력을 행사하는 사람으로 인식되지 않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감화력을 받은 많은 제자들이 수많은 곳에서 개척하여 사역의 열매를 거두고 있다는 사실은 그의 목회가 은사 중심의 목회라기보다는 원리 중심의 목회임을 보여준다. 사역자 개인의 특성에 맞춘 목회는 교회를 매우 위험한 지경으로 몰아갈 수 있다. 내 발에 맞는 구두를 남에게 선물하는 법은 없다. 그러나 자기 발에 맞는 신발을 남에게 물려주려는 시도는 오늘날 교회의 현실을 풍자하고 있다. 사실 사역자 개인의 은사와 인품과 독특한 스타일에 오랫동안 맞춰진 교회가 차세대 목회자를 찾는 과정에서 겪는 고통은 매우 심각한 수준에 와 있다. 모든 목회자는 리더쉽 교체를 염두에 두고 준비하면서 목회 해야 한다. 이것은 이윤을 추구하는 기업의 CEO들에게도 적용된다. 목회자 자신의 은사와 경험과 스타일에 의존적으로 정형화된 교회는 필연적으로 리더십 교체 시 고통을 겪게 마련이다. 그래서 척 스미스 목사는 인품으로 목회하지 말고 원칙으로 목회 하라고 권유하고 있다. 즉, 목회철학과 방향과 방법을 전수할 수 있는 방식으로 목회 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그의 목회는 제자 삼는 목회에 있어서 대표적인 모델이라고 할 수 있다. 최근 과정목회의 진수를 보여준 새들백 교회의 다이어몬드형 목회모델 역시 제자 삼는 목회의 한 실례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러면, 새들백 교회와 갈보리채플이 어떻게 다른가? 1980년에 개척한 새들백 교회의 릭 워렌 목사의 목회철학과 1965년에 시작한 갈보리채플의 척 스미스 목사의 가르침과는 공통점이 있지만 그 강조점에 있어서 다른 점이 많다. 우선 공통점은 똑같이 교회의 본질을 추구하는 데 있어 균형성을 추구하는 것이다. 척 스미스와 릭 워렌은 똑 같이 균형감각을 매우 중요한 리더십의 본질로 간주하고 있다. 또한 그들이 목회를 인품이나 개인적 은사에 의존하여 하기보다는 어떤 목회적 원칙 내지 원리에 따라 해야 한다고 강조하는 점에서 비슷하다. 그래서 새들백이나 갈보리채플이나 똑 같이 원리에 입각한 목회에서 성공했기 때문에 많은 목회자로 하여금 개척에 성공하도록 도움을 주었다. 그러나 그들이 각각 무엇을 본질로 생각하고 강조했는가는 서로 다르다. 우선 릭 워렌 목사는 신약성경 전체에서부터 예배, 전도, 교제, 제자훈련, 그리고 봉사를 교회에 주어진 다섯 가지 명령이라고 본다. 이 명령을 교회가 추구해야 할 본질 혹은 목적으로 간주하고 이에 맞추어서 모든 프로그램을 편성하고 조정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반면, 갈보리채플은 사도행전 2장에 기록된 사도들이 목회한 교회를 모델로 삼고서 사도적 가르침, 교제, 기도, 떡을 떼는 것을 교회가 추구해야 할 본질 내지 본보기라고 가르치고 있다. 또 새들백 교회가 목적에 맞추어서 현대감각에 맞는 각종 프로그램을 개발하는 것을 중요시하는 프로그램 중심적이지만 갈보리채플은 프로그램 개발보다는 성령과 말씀에 계속 주안점을 두려고 한다는 점에서 갈보리채플이 좀더 사도적 가르침이라고 할 수 있다. 또 갈보리채플은 믿음목회(faith ministry)의 모델을 제시한 점, 신구약 성경 전체와 강해설교와 전교인 성경읽기운동을 통합한 목회모델을 제시한 점, 미국 역사상 정치적, 사회적 혼란 시기였던 1960년대에 예수운동을 통해 기독교사회운동의 선구자 역할을 한 점과, 사역자 양성을 위해 신학교가 아닌 오직 신구약 성경만을 심도깊게 가르치는 성경 대학(CCBC)을 세운 것과 현대교회의 음악발전에 크게 공헌한 점, 그리고 새들백이 따라오지 못할 정도로 600여개 소 이상의 개척성공의 사례(1995년도 집계), 미국의 20대 교회에서 상위권 12개를 석권한 교회를 배출한 점 등, 역사성을 보나 그외 여러모로 보나 갈보리채플은 새들백 교회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차별성을 주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가장 두드러진 차이점은 설교의 차이점으로서 릭 워렌이 주제별로 문제를 다루는 이른바 실용적인 상담설교자라고 본다면 척 스미스는 본문을 성경 순서에 따라 연속적으로 다루는 실용적인 성경교사라고 할 수 있다. 나는 이러한 관점에서 목회를 연구하는 사역자들에게 감히 “본질에 입각한 목회를 위한 프로그램을 얻기 원한다면 새들백으로 가라. 그러나 어떤 교훈이나 가르침을 원한다면 갈보리채플로 가라”고 조언하고 싶다.
나는 이러한 동기로 그의 설교와 목회철학을 연구하기로 결심하게 되었다. 단순 모방하자는 차원이 아니라 그를 통해서 어느 상황 어느 지역에도 적용할 수 있는 영원한 목회원리, 보편적인 사역원리를 찾아보고 적용하는 길잡이로 삼기 위함이다. 실제로 그의 목회원리를 열심히 본받고자 노력하여 모범적인 교회를 이룩한 개척의 열매들이 이 연구가치를 입증해주고도 남는다. 척 스미스 목사 자신도 많은 다른 사역자들에게 효과적인 목회원리를 가르쳐주는 것을 자신의 중요한 사역의 일부로 보고 있다. 그러나 사실 많은 성장한 교회들이 교회성장의 원리를 가르쳐주려고 하지만 대부분은 자기 교회의 문화적 성격이나, 목회자 개인의 개성이나 은사에 뿌리를 두고 있는 것들이었다. 예를 들어, 교회성장의 원리로서 신유의 은사를 강조하는데 필자 역시 신유목회에 관심을 가지고 열심히 연구하고 자료도 정리해보았지만 자꾸만 내 몸에 맞지 않는 옷을 억지로 입으려는 생각이 들었다. 신유목회를 통해서 인간과 인간의 상태를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을 받았고 또한 그 사역의 필요성에 대해서 깊이 동감하면서도 필자 자신에게 그 원리를 적용하기에는 너무나 무리라는 느낌을 받았다. 믿는 자는 누구나 병 낫기를 위해 기도할 수 있지만 신유를 교회의 중심사역으로 삼기에는 너무 거리가 멀다는 느낌을 받았다. 성공적인 목회자와 그의 목회를 보면서 배우고 본받으려는 마음은 자연스러운 것이지만 거기에 자신을 맞추려는 시도는 매우 자신을 힘들게 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나님의 부르심의 소망에서 출발하는 것이 가장 현명한 일인데도 사람들은 거기서 출발하지 않는다. 이외에도 필자는 많은 교회 성장학 책들과 여러 성장 교회에 대해 나름대로 자료를 모으고 연구했지만 나름대로의 성장원리를 찾아낼 수는 있었으나 그것을 보편적으로 적용하기에는 너무나 특수성이 강하다는 느낌 때문에 만족하지는 못했었다. 중요한 것은 특별한 체험이나 은사가 없는 ‘평범한’ 복음 사역자로 부름 받은 나 자신이 현장 속에 붙잡고 적용할만한 사역원리를 찾는 것이었다. 그런데 척 스미스의 설교와 목회를 연구하면서 ‘아, 바로 이거다!’라는 아르키메데스적인 발견의 기쁨을 얻을 수 있었다. 무엇보다 반가운 것은 그가 제시하는 목회원리가 내가 모방할 수 있겠다는 자신감을 심어준 점이다. 이에 필자가 발견한 것을 나누고자 한다. 그러나 거듭 강조하지만 이 모델 역시 보편적이라고 보지는 않는다. 다만 필자 자신에게 어울린다는 뜻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어떤 모양으로 부르셨는가를 정확하게 인식하고 거기서 출발해야 한다.
또 한가지 갈보리채플의 역사와 철학과 말씀의 흐름을 연구하는데 있어서 필자가 염두에 둔 것은 목회철학과 설교철학을 함께 접목시키는 일이었다. 필자 역시 나름대로 교회성장학과 설교학에 대한 많은 책들을 가지고 있지만 교회론에 입각한 설교학 저서를 발견하지 못했다. 대부분의 교회성장학 저서들은 목회자 개인의 목회철학만 소개한다든지, 혹은 여러 목회자들의 목회철학의 짜집기 식이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목회철학에서 설교로 이어주는 책들을 발견하기가 어려웠었다. 또한 상당히 성공적인 열매를 가지고 동기를 부여하는 많은 책들이 있지만 그것이 오고 오는 모든 세대에 동일하게 적용될 만한 지 의심이 가는 책들도 많았다. 특히, 필자는 새들백교회, 윌로우크릭 교회, 그리고 최근에 유행하는 셀교회의 목회철학과 목회방법론이 장로교회가 많은 한국교회에 어떻게 적용될 수 있을는지 매우 의심스럽기도 하였다. 그런 면에서 필자는 척 스미스 목사의 목회철학과 설교론이야 말로 한국교회에 가장 적합한 모델이 되지 않는가 생각하게 되었고, 척 스미스의 목회철학과 설교방법론을 함께 엮어서 책으로 내게 되었다.
그러나 한 가지 아쉬운 점은 필자는 그를 직접 만나본 것도 아니었고 국내에서 연구하는 관계로 자료의 한계가 있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서울 갈보리채플(이요나 목사 시무)의 도움을 받아 그의 설교 테이프, 갈보리채플 비디오, 설교원고, 설교집, 기타 국내 발행한 자료들을 최대한 수집해서 꼼꼼히 분석하고 나름대로 체계화하여 실제 목회와 설교에 적용하기 쉽도록 패러다임을 만들어보고자 노력했다. 원래 이 자료는 출판을 목적으로 한 것이 아니고, 필자와 같이 동역 하게 될 분들과 함께 비전을 나누기 위한 자료로써 활용하기 위함이었다. 거듭 밝히지만 아래에 소개하는 모든 자료들은 필자 개인의 것이 아니라 척 스미스 목사의 설교집과 간증집, 그리고 그와 갈보리채플을 소개하는 비디오, 그리고 래리 테일러가 쓴 갈보리채플 목양지침서에서 거의 모든 자료를 뽑았다. 그리고 하나님이 부르신 나의 목회에 ‘중요한 참고서’로 삼기 위해서 개인적으로 준비한 것뿐이다.
앞으로 척 스미스를 묘사하려고 할 때 필자는 크게 세 가지 범주 안에서 살펴보고자 할 것이다. (1) 목회자로서의 척 스미스, (2)설교자로서의 척 스미스, (3)그리스도인으로서의 척 스미스이다. 모든 사역자는 이 세 가지 범주로의 부르심을 받았다고 본다. 사역자는 사역으로 부르신 하나님의 소망을 확실히 이해해야 하며(목회철학), 그 소망을 교인들이 공감할 수 있도록 의사소통할 수 있어야 하며(설교), 그것을 자신의 인격과 삶을 통해 입증해 보일 수 있어야 한다. 교회를 사랑하고 사역하는 자로 준비시키는 많은 책들이 있지만 대부분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는 것이 사실이다. 따라서 이 책은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는 것을 피하고 그러한 흐름을 따라가려고 노력한다. 하나님의 종은 목회자로 부름 받은 사람이다. 목회자의 사명은 양들을 돌보고 양들을 인도하는 것이다. 그리고 동시에 설교자로 부름 받았다. 설교자로서 목회자는 양들에게 풍성한 꼴을 먹여야 한다. 말씀을 가르치고 지키게 함으로써 살지게 해야 한다. 그리고 목회자와 설교자 이전에 한 그리스도인으로 부름 받았다. 사역자로서 활동하기 이전에 그리스도를 닮아 가는 인격으로서의 모습을 보여야 한다. 이 세 가지 부르심에 대한 확신이야말로 모든 사역자가 갖추어야 할 기본 확신이다.
II. 목회자로서의 척 스미스
1 척 스미스의 생애와 신앙배경
한 개인과 상담할 때에나 혹은 개인의 사역을 추적할 때에 그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 먼저 그가 어떤 가정배경을 가지고 자랐으며, 또 어떤 배경에서 신앙을 가지게 되었는지, 또 어떤 계기로 목회자로 부름 받게 되었는지, 그 뿌리를 살펴보는 것은 기본이다. 왜냐면 원인을 분석하지 않고 현상에 대해 처방을 내리는 시도가 환자에게 위험하듯이 그에게 영향을 준 배경과 뿌리를 이해하지 못하고 단지 그의 현재 모습 속에서만 어떤 원리를 찾아내어 무작정 적용하려고 할 때 우리는 어려움에 봉착하게 되기 때문이다. 개인의 특수한 인품과 은사에 근거한 사역원리가 모든 사역자에게 적용될 원리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어느 교회가 성장했다고 할지라도 언제나 독특한 역사와 시대환경과 지역문화로부터 완전히 벗어날 수 없으므로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를 제외한 어떤 이론과 방법만을 그대로 답습하는 것은 매우 어리석은 시도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한 개인의 과거의 경험을 조사하면서 일반적인 원리와 특수한 원리를 구별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1) 가정배경
척 스미스(Chuck Smith)는 1927년 대공황이 미국에 불어닥치기 직전 캘리포니아 밴츄라시에서 태어났다. 그의 출생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일화가 알려져 있다. 7개월 째 된 아이를 가진 모드 스미스라는 여인이 죽어 가는 어린 딸 버지니아를 안고서 울면서 기도하고 있었다. 다 죽어 축 늘어진 딸아이를 안고서 뛰어 집에서 가까운 오순절 교회의 목사관에 도착하여 아이를 위해 기도해달라고 간청했다. 그러면서 그 여인은 아이를 하나님이 살려주시면 평생 하나님을 위해 헌신하겠다고 말했다. 소식을 듣고 달려온 남편도 그 자리에 엎드려 부르짖기 시작했다. 이에 하나님의 은혜로 그 딸은 기적적으로 살아났고 모드와 찰스 부부는 하나님께 남은 생애를 헌신하면서 살기로 서원 했으며, 두 달여 지난 후 척 스미스가 태어나게 되었다. 부모는 장남 척 스미스를 통해 서원을 이행하리라고 결심하게 되었고, 태어난 날부터 부모는 척 스미스에게 하나님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그의 어머니는 척 스미스가 어릴 때부터 하나님의 말씀으로 양육하기 시작했다. 어릴 때부터 성경구절과 성경 각 권 제목 등을 암송하도록 가르쳤고 글읽기도 성경으로 알파벳을 가르쳤다. 이러한 서원기도에 대해서는 척 스미스가 목회 하면서 15년이 지났을 때 알게 되었다. 그의 어머니는 무엇보다 기도의 사람이었다. 척 스미스 목사는 어릴 때 잠들기 전에 들은 소리도 어머니의 기도소리였고, 아침에 잠에 깰 때도 기도소리였다고 한다. 그의 어머니가 조용한 성격으로서 전도보다는 조용히 성경을 가르치고 기도하기를 좋아한 반면 아버지는 세일즈맨으로서 개방적인 성격으로서 일대일 전도에 능했다. 어디에 가든 무엇을 하든지 그리스도를 전했다. 이와 같이 모드와 찰스 부부는 장녀 버지니아, 장남 척 스미스, 그리고 척 스미스의 두 동생 폴과 빌에게 신앙적으로 큰 영향력을 주었다. 이런 가정 배경은 그가 나중에 목회 하면서 그의 인품을 특징 지우는 안정감 있는 심리적 요소로 작용했음이 분명하다. 척 스미스 목사가 안정감 있는 인품의 소유자로 성장하게 된 데는 어릴 적 특히 어머니로부터 많은 영향이 컸다.
“저의 아주 어린 시절부터 어머니는 하나님의 말씀을 제 마음속에 심어주셨습니다. 마당에서 그네를 타고 있는 동안에도 성경구절을 외우도록 도와주시곤 했습니다. 제가 네 살이 되었을 때는 성경을 가지고 책 읽는 법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발음을 못하는 단어도 철자는 말할 수 있었습니다. 나중에 어머니는 제가 어렸을 때 모르는 알파벳 글자를 설명하려고 애쓰던 저의 모습을 얘기해 주시면서 웃으셨는데 제가 "V" 자를 설명할 때는 ‘뒤집어진 텐트’라는 식으로 했다는 것입니다. 어머니는 인내와 사랑을 가지고 저를 기르시며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을 가르치셨습니다. 일곱 살이 되었을 때는 성경의 모든 책의 이름들을 말할 수 있고 쓸 수 있게 되었지요. 저는 잠자기 전에 침대 머리맡에 동화를 들어본 적이 없고 성경 이야기만을 듣고 자랐습니다. 곰 세 마리 대신에 다윗과 모세의 이야기를 들었지요. 저의 어머니는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아무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고 두려워할 것도 없다고 하시면서 거인도 대적할 수 있다고 가르치셨습니다.”-[은혜의 비밀],pp.58,59.
(2) 회심과 소명
주님의 일을 하기 위해 부름 받은 주의 종은 일찍이 회심하는 경향이 있는데 척 스미스도 예외가 아니었다. 주의 종은 사역하기 전에 두 가지 확실한 체험이 있어야 한다. 하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세주로 영접하고 거듭나는 중생의 체험이고, 또 하나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목회로 부르시는 소명의 체험이다. 이 두 가지 체험의 확신이 있을 때 그는 가장 기본적인 자질을 갖추었다고 말할 수 있다. 척 스미스를 비롯한 4남매가 자랄 때는 오순절 계통의 포 스퀘어 교회에서 거의 살다시피 했다고 한다. 척 스미스 목사는 어릴 때 아버지를 따라 토요일 기도회에도 참석했다. 어릴 때부터 신앙생활을 시작했지만 그가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난 것은 17세 되었을 때였다.
17세 때에 여름 수련회가 있었는데 수련회 가운데 주님의 도전을 받게 되었다. “의사가 되면 육신의 병은 고치겠지만 그것은 일시적인 치료에 불과하다. 세상에는 모든 사람들을 죽게 하는 병이 있는데 바로 죄라고 한다. 이 병을 고쳐야 영원한 치료가 되는 것인데 너는 일시적인 것을 구하겠느냐 아니면 영원한 치료를 하는 것을 구하겠느냐?”고 도전하셨을 때 척 스미스는 자신의 생애를 주님의 사역에 바치기로 결심하고 집에 돌아와서 의사가 되지 않기로 어머니 모드에게 고백했다. 이때 척 스미스의 어머니는 미소를 지으면서 격려했다고 한다. 척 스미스 목사는 자신의 어머니가 보여준 반응에 대해 다음과 같이 회상하고 있다.
“저는 제 일생에 있어서 하나님을 모른 적이 없었고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은 적이 없었습니다. 저에게는 구원 간증 같은 것이 없습니다. 공개적으로 저의 신앙을 고백하고 침례를 받은 적은 있지만,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을 위하여 구별되었던 것 같습니다. 나이가 들면서 신경외과 의사가 되기로 결심하고 필요한 과정을 시작했습니다. 저의 포부를 말씀드릴 때마다 어머니는 빙그레 웃으시며 격려해주셨습니다. 어머니는 제가 태어날 때에 제 삶을 하나님께 바치겠다고 서원하신 것을 제게 말씀해 주신 적이 단 한번도 없습니다. 그런데 제가 청소년 시절에 여름캠프에서 하나님께서 제 삶을 변화시켜주셨고, 거기서 저는 주님이 온전히 저의 삶의 주인이 되셔서 다스려주시도록 헌신하고 결단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제 마음을 감동시키시고 사람에게는 육체적인 것보다 더 필요한 것이 있는데, 육체적인 일을 돕는 것은 일시적이고 영적인 일을 돕는 것은 영원한 것이라고 말씀하시면서, 저를 사람의 영혼을 치료하는 목사로 부르셨습니다. 저는 어머니가 당신의 아들이 의사가 되지 않겠다고 하면 굉장히 실망하실 줄 알았고, 저의 인생의 장래에 대해 방향을 바꾼 얘기를 들으면 가족들이 어깨가 축 늘어져서 실쭉한 얼굴이 되리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어머니에게 하나님께서 저를 목사로 부르셔서 성경대학에 가기로 결심했다고 말씀드렸을 때 어머니는 환한 미소로 “잘했다. 아들아!”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우시거나 속상해하시지 않는 것이 참 이상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성경대학에 입학하고 모든 훈련과정을 마치고 케이와 결혼 후에 함께 사역을 시작했습니다. 그 후 어머니는 돌아가시기 얼마 전에 누나의 갑작스런 죽음에 관한 이야기와 그때 하나님께 서원한 것을 저를 통하여 갚기로 하나님께 약속한 이야기를 처음으로 해주셨습니다. 저의 어머니는 제가 아는 사람 중에 가장 아름답고 경건한 분이셨고, 성령이 충만하여 모범적인 신실한 믿음의 삶을 사신 분이셨습니다.”-[은혜의 비밀], pp.59,60.
보통 중생의 체험과 소명의 체험은 동시에 오는 경우가 많다. 그것이 정상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처음 만나주시고 우리를 진리의 말씀으로 거듭나게 하실 때 이미 소명을 주신다. 예수님이 베드로를 처음 만나주실 때, 그가 하나님을 체험하여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고백할 때, 주님은 그에게 말씀하시기를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너를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고 하셨다. 척 스미스는 17세의 나이에 중생과 소명의 체험을 동시에 하게 됨으로써 주의 종으로써 연단 받는 ‘광야 신학교’에 입학하게 된 셈이다.
(3) 영향
척 스미스는 학창시절에 운동과 공부를 함께 잘 했으며 로스앤젤레스의 라이프 성경대학을 졸업했는데 이 학교를 다니면서 밴 클리브와 가이 더필드라는 두 스승을 만나면서 많은 영향을 받게 되었다. 두 스승은 척 스미스 목사에게 성경해석과 강의에 있어서 큰 영향을 주었다. 척 스미스는 이렇게 말한다.
“원래 제 성격이 오순절 틀에 잘 맞아떨어지지 않는 고로 주로 생각을 많이 하시는 이 두 분들을 따르게 되었지요. 당시 우리 학교에는 열정적으로 설교하시는 교수들이 많았는데 한참 흥분해서 듣다보면 나중에는 무슨 내용의 설교였는지 잘 기억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 두 분은 강의 내용이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주는 내용들이었기 때문에 제가 본받아야겠다고 결심하게 되었답니다”(믿음의 모험)
신학교에서나 혹은 신학교 졸업 후에 내가 어느 분야에 관심이 끌려 공부하게 되는 것은 성령의 인도하심 때문이다. 특정 주제를 가지고 연구하는 데도, 책을 선택하는 데도 하나님의 섬세한 손길은 미치고 있다. 또한 하나님은 적절한 사람을 만나게 하심으로 그를 준비시키신다. 사실 철이 철을 날카롭게 하는 것같이 주의 종으로 부름 받은 사람은 목회 사역을 하기 이전에 누구를 만났는가가 매우 중요하다. 하나님은 책을 통해 배우게 하시지만 그보다는 사람을 통해 목회의 중요한 원리를 배우게 하신다. 따라서 이제 막 신학교에 입학한 사람은 하나님께 자기를 바르게 인도해 줄 스승을 만나게 해 달라고 기도해야 할 것이다. 아무튼 신학교의 강의 프로그램이 아니라 주님의 교육 훈련 커리큘럼에 의해서 세밀하게 인도하심을 받는다. 그러나, 주의 종으로 부름 받은 후에 신학교에 입학하여 신학을 공부하는 것은 하나님의 훈련과정 중에 지극히 작은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하나님의 광야 신학교에서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은 신학교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신학교에서 가르치는 것은 가장 최소한의 것을 배우게 된다. 신학교에서의 신학훈련은 매우 중요하지만 그것은 시작에 불과하다. 중요한 것은 목회철학과 사역방법론인데 이것은 신학교가 아닌 사역의 현장 속에서 배우게 되는 것이다. 갈보리채플의 수많은 제자들은 대부분 현장 속에서 훈련받은 검증된 사역자들이다. 갈보리채플의 경우 크게 쓰임 받는 대다수 목회자들이 예일이나 하버드 또는 훌러에서 체계적인 학문으로 학위를 받은 자들이 아니라는 사실은 그 점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이처럼 척 스미스 목사는 오랜 목회 경험을 통해 하나님의 많은 진리를 터득해나갔는데 현장 속에서 배운 교훈들이 그를 하나님이 쓰시기에 합당한 도구로 만들어갔던 것이다.
(4) 경력
성경대학을 막 졸업한 척 스미스는 열정을 가지고 동부로 건너가 잠시 부흥사로서 사역했으나 얼마 후 고향이 그리워서 캘리포니아로 되돌아오고 말았다. 장래 목회방향을 두고 기도하던 가운데 척 스미스는 케이 존슨이라는 아가씨와 사랑을 하게 되었고 한 달 반 교제한 뒤에 결혼하게 된다. 결혼 후 척 스미스와 케이는 아리조나와 남캘리포니아를 오가면서 여러 목회지를 옮겨 다니게 되는 포 스퀘어 교단의 목사생활을 17년 간 동안이나 하게 된다. 이 교단은 오순절 계통의 교단으로서 약 2년 간 목회 하다가 다시 새로운 부임지로 발령 받아 떠나야 하는 생활을 반복하곤 했다. 열심히 해서 자리를 정하고 집중적으로 목회를 크게 하려고 하면 곧 전출가게 되는 생활이었다. 이 기간 동안 척 스미스 목사는 자신의 무능함을 배우게 되었고, 생활의 연단 속에서 믿음으로 살아가는 법을 배우게 되었으며, 기존 교회의 형식적이고 생명력이 없다는 데 마음의 고통을 겪으면서 동시에 어떻게 목회 해야 하는 지에 대한 중요한 통찰력을 배우게 되었다.
(5) 17년간의 영적 가뭄기에서 배운 영적 교훈들
척 스미스 목사의 설교와 목회를 연구할 때 가장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 “위대한 추수를 앞둔 가뭄기”라고 그가 말한 바 17간의 오랜 기간에 무엇이 그에게 일어났는가 하는 점이다. 이 기간에 그의 사상에 그의 삶에 어떤 변화가 일어 났는 지를 아는 것은 그와 그의 사역을 이해하는데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그가 배운 영적 교훈들을 정리해 보자.
1) 초교파 사역의 비전을 얻다.
이 17년간의 기간은 척 스미스 목사에게 있어서 ‘연단의 기간’ ‘영적 추수기를 준비하는 영적 가뭄기’로서 하나님이 원하는 그릇으로 만들고자 하신 기간이라고 스스로 말하고 있다. 이 기간 동안 앞으로 수행할 목회를 위한 비전과 실무를 익히는 목회수업기간이었다. 포 스퀘어 교단에서의 사역은 교단 중심으로 짜여진 목회방식, 인간적인 목회방법들과 프로그램들과 씨름하는 기간이기도 했다. 그는 이 기간 동안 자신은 오순절 계통에 안 맞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기존 교단의 형식적인 목회 프로그램의 틀에 적응하기 어려워했다. 자신을 무슨 교단 사람이라고 제한하는 것을 어려워했다. 무슨 형식과 틀에 자신을 맞추는 것에 익숙하지 않았다. 이 점은 나중에 그와 그의 갈보리채플이 자유분방한 히피들을 중심으로 예수 운동이 일어나게 된 중요한 배경을 제공한다. 즉, 형식에 얽매이는 것에 어려움을 겪었기 때문에 나중에 히피들을 이해하고 수용하는 것이 가능했다는 것이다. 이 점에서 우리는 우리의 단점과 한계가 하나님 편에서 장점과 기회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이 시기에 척 스미스는 교단적인 목회자가 되는 것에 상당히 거부감을 가지고 있었으며 자신의 비전은 교단을 초월하여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 전체를 바라보는 시각으로 목회하기를 원했다. 즉, 교단에 머물러 교단을 위해 교단에 맞는 목회를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 전체를 위해 삶을 바쳐 사역하기를 원했다. 실제 갈보리채플은 초교파 교회로서 정치형태나 예배형태 그리고 신조에 있어서 독자적인 길을 걷고 있다. 척 스미스 목사는 초교파 사역의 중요성을 이렇게 설교한 적이 있다.
“예수님은 유대교를 개혁하시려고 오신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생베조각을 낡은 옷에 대고 기우려는 것과 같이 소용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예수님의 이 말씀이 오늘날에도 적용될 수 있음을 강하게 믿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새로운 일을 하실 때는 이미 조직화되고 화석처럼 굳어버린 옛 종교 체제의 테두리를 벗어나서 전혀 새로운 사람들을 쓰시는 경우를 많이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역사도 증명합니다. 전체 인류 역사를 통해서 어떤 교단이나 종파가 진정한 내부적 개혁을 일으켜 재건되었던 일이 있었습니까? 저는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대게 위대한 부흥은 완전히 새로운 교단이나 교파가 생김으로써 가능했습니다. 새 술을 위해서 하나님은 반드시 새 부대도 예비하신다는 말씀입니다. 낡은 가죽 부대는 너무도 단단하게 굳어져서 새 술을 담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시고자 계획하는 일을 위해서 새 가죽부대를 오래 전부터 준비하신다는 사실을 저는 믿습니다. 많은 사람이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부대에 넣으려고 애쓰는 헛수고를 되풀이합니다. 그것은 제대로 될 리 없습니다. 왜 우리는 모두 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가 하나님의 말씀만을 따르지 못합니까?”(마태복음 강해, p.112)
척 스미스 목사는 전통과 형식과 규칙을 강조하는 분위기 속에서 성령의 자유로운 역사를 경험하는 것이 매우 어렵다는 사실을 배웠다. 나중에 큰 성령의 역사를 이룰 수 있었던 것은 이러한 깨달음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2) 믿음목회의 원리를 배우다
이 17년의 기간은 척 스미스 목사가 잰, 쥬니어, 제프, 샤론 4남매를 낳은 기간이면서 동시에 그가 경험을 통해 살아 계신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순수한 신앙으로 만들어지는 ‘풀무불의 시련기’이기도 했다. 이 기간 동안 척 스미스 부부는 목회사역을 위한 믿음을 배워나가기 시작했다. 월 45달러의 집에서 살면서 주급 15달러를 받는 목회를 하면서 믿음으로 사는 법을 배웠다. 이 때 척 스미스 부부는 죠지 뮬러의 책을 읽으면서 ‘믿음의 삶’과 ‘믿음의 사역’에 대해서 배우기 시작했다. 죠지 뮬러가 했던 것같이 그들 부부도 믿음으로 살기로 작정했고, 실제로 하나님이 역사 하시는 놀라운 증거를 보면서 믿음을 키워나갔다. 여러 번 기적적으로 필요를 공급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체험하였던 것이다. 이때부터 돈 관리는 전적으로 척 스미스 목사 자신이 하기 시작했는데 40여 년 목회 하면서도 마찬가지로 교회예산의 책정과 집행을 척 스미스 목사 자신이 직접 주도하고 있다.
이 17년간의 재정적 궁핍 속에서 척 스미스 부부는 어떤 상황에도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법을 배우기 시작했다. 필요를 늘 신실하게 채워주시고 공급해주시는 하나님을 체험하면서 두 가지를 배웠다. 첫째는 적은 물질로 살림을 꾸려나가는 지혜를 배웠고, 둘째는 소박한 의식주 생활을 배우기 시작했다. 지금도 갈보리채플의 유급직원들은 평균이하의 소박한 생활을 원칙으로 사역하고 있는 것도 척 스미스 목사의 이러한 체험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믿음목회의 원리는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이 공급하신다는 말씀에 기초하고 있다. 척 스미스 목사의 경험을 한번 들어보자.
“2년 동안 나는 열심히 기도하고 가가호호 가정방문 전도를 하며 광고문을 인쇄 배포하는 등, 교회발전을 위한 지도서에 실린 온갖 프로그램을 다 시도했다. 그러나 2년간 갖은 고생을 다하여 노력하였는데도 우리 교회의 교인 수는 25명에서 17명으로 줄어들었고, 그것도 남은 17명중에 5명은 우리 가족이었다. 이것은 ‘코로나’의 어느 교회에서 목회 할 때의 이야기이다.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하는 수없이 일자리를 구해야 했다. 하나님의 은혜로 어느 식료품상에 취직을 했지만 얼마 후 장모의 장례식을 2주간 치르고 와서 실직하고 말았다. 각종 미납통지서가 쌓이기 시작했다. 빚은 자꾸만 늘어만 가고, 목회생활은 열매가 없고, 교회는 기울어지고만 있으니 앞이 캄캄했다. 이때 하나님은 나에게 혹시 사업가가 되라고 하시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깨끗이 목회에서 손을 떼고 사업에 전념하는 것이 현명한 것 같았다. 교회를 그만두기로 결심한 그 밤에는 거의 뜬눈으로 지새었다. 그 다음날 아침에 나는 전화 한 통을 받게 되었다. 상대방이 누구인지 알 수 없었지만 그 남자는 부드럽게 이런 말을 했다. ‘주님의 사랑을 통하여 당신을 잊지 않고 있었데 어제 적은 금액을 속달로 부쳤습니다. 426불입니다.’ 수화기를 내려놓은 척 스미스 목사는 부엌으로 뛰어 들어가 아내 케이와 함께 춤을 덩실덩실 추었다. 내야만 하는 세금이 416불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주님 감사합니다. 주님은 정말 멋쟁이십니다.’ 한 시간 쯤 지났을 때 나의 흥분이 가라앉을 무렵이 되었을 때 하나님이 내게 물으셨다. ‘무엇 때문에 그리 흥분해 있지?’ 그때 나는 그저 ‘주님 감사합니다’는 말만 되풀이 할 뿐이었다. 하나님은 물으시기를 ‘그가 그 돈을 꼭 보낼지 어찌 믿느냐?’고 하셨다. ‘주님, 놀라지 마십시오. 그는 좋은 사람으로, 오랫동안 나를 아는 다정한 형제임에 틀림없습니다. 나는 믿어요. 돈을 안 부친다면 그런 전화를 걸 리 없죠. 나는 그의 말을 믿어요, 주님’ 이렇게 말했다. 이때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왔다. ‘너는 어젯밤 잠을 이루지 못하고 몸부림치며 괴로워했지. 네가 필요한 것을 내가 다 충족시켜 주겠다고 벌써부터 약속하지 않았느냐? 그런데도 네가 부엌에서 그렇게 좋아하며 아내를 안고 춤추는 것을 나는 한번도 못 보았는데, 그리고 너는 지금껏 그렇게 유쾌하게 나를 찬양하지도 않았었는데, 이제 어떤 한 인간의 말을 듣고는 그렇게 좋아하며 날아갈듯이 수선을 떠는구나. 너는 누구의 말을 더 믿느냐?’ 이 무슨 청천 벽력같은 질책인가! 그 순간 나는 엎드려 자복하며 회개하였다. ‘주여, 주님의 말씀을 거역했으니 회개하오니 용서하여 주십시오.’ 내가 진실로 주의 말씀만을 믿고 의지했다면 새벽에 케이에게 빌립보서 4:19을 보여주며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의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 하신 그 약속을 지켜 주셨으니 주님을 찬송하자’고 했어야만 했다. 하나님은 항상 부드럽고 풍성하시며 한없는 사랑으로 나의 인생의 길을 바꾸어 놓는 교훈을 주셨다.”(위대한 추수, p.40-42)
이때 척 스미스 목사는 베드로가 단순한 믿음으로 물위를 걸어갔듯이 작은 일에도 단순한 믿음으로 순종하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 지 깨닫게 되었다. 작은 일에도 믿음으로 행하는 법을 배운 것이다. 작은 일에도 신앙적으로 성실해야 함을 배웠다. 작은 일에도 살아 계신 하나님을 의지하고 바라보아야 함을 배웠다. 바로 이것이 앞으로 다가올 위대한 영혼의 추수사역을 위해 하나님이 그를 준비시키신 내용이었다. 고통과 시련 속에서 하나님을 바라보는 법을 체험적으로 배우게 된 것이다. 척 스미스 목사는 이렇게 고백하고 있다.
“나의 눈이 하나님을 떠나 내 자신의 걱정거리만을 보고 있는 동안, 그 문제의 걱정거리는 날마다 더 커져만 갔다. 그러나 내 눈이 하나님께로 옮겨지는 순간부터 걱정은 날마다 줄어들었다. 아브라함의 믿음은 그가 확실한 증거가 보이지 않을 때에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는 데 있었다. 이것은 나에게 참으로 중요한 교훈이다.”(위대한 추수, p.42)
이러한 죠지 뮬러식 믿음생활은 척 스미스 목사의 갈보리채플의 재정운용에도 중요한 원칙을 제공한다. 즉, 재정적 필요가 있을 시에 결코 사람에게 손을 벌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갈보리채플의 재정원칙은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곳에는 하나님의 공급이 따른다”는 것이다. 그래서 모든 재정은 광고나 작정서에 의해서 충당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공급하심을 바라고 믿는 믿음에 의해서 자체적으로 해결하고 독립하는 것이 원칙이다. 척 스미스 목사의 이런 연단의 기간은 나중에 그가 ‘믿음목회’(faith ministry)를 하는 데 중요한 힘이 되었다. 사실 척 스미스 목사는 목회를 시작할 때 하나님께 이것을 서원 하였다. 척 스미스 목사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목회를 시작할 때 하나님과 굳게 약속한 일이 있다. 그것은 어느 누구에게도 구걸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또 교회가 돈이 필요하다고도 말하지 않고 타의에 의한 억지 헌금을 꾀하지도 않겠다는 것이었다. ‘주여! 나는 돈 문제를 일체 거론하지 않겠습니다’ 나는 이렇게 서약을 했던 것이다.(위대한 추수,p.40)
실제로 갈보리채플에서 ‘재정’과 사람들의 ‘도움’을 요청하거나 광고하는 것은 금기시 되어 있다. 예배당건축이나 프로그램운용을 위해 재정이 필요하더라도 돈이 필요하다는 말은 결코 하지 않는다. 재정적 공급은 철저하게 하나님만 의지하는 것을 목회원칙으로 하고 있다. 이것은 갈보리채플 출신의 모든 목회자들이 재정에 관해서 이와 같은 영적 자긍심을 가지고 있다. 동시에 그들은 대다수 교회가 재정문제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모든 면에서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신앙에서 멀어진 점을 슬퍼하고 있다. 프로그램이나 건축이나 다른 사역을 고상하고 세련되게 효과적으로 잘 해내려 하는 생각에만 급급한 나머지 순수하고도 우직하게 하나님만 의지하는 순전한 믿음을 찾아보기 힘들다고 말한다. 여러 번에 걸쳐 많은 헌금을 걷는 교회에서 양들이 힘들어하고 상처받는 것을 보면서 척 스미스 목사 부부는 오직 믿음으로 목회 해야 하겠다고 결심했다. 그래서 고백적 차원이 아니라 실제로 교회를 운영하는 모든 면에서 하나님만을 의지하려는 것이 갈보리채플의 중요한 특징이 되었다. 갈보리채플에서는 사람들에게 도움을 요청하거나 헌금을 요구하는 것은 하나님의 교회로서 마땅한 바가 아니라고 가르친다. 척 스미스 목사의 목회방침은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이 친히 공급하신다’는 것이다. 만약 하나님이 공급하지 않으신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시키신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갈보리채플은 헌금을 강요하기보다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풍성하게 배불리게 먹이고 감동 받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가르친다. 척 스미스 목사는 이렇게 말한다.
“이 모든 목회철학의 요지는 하나님이 주관자이시며 시발점이라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입니다. 주신 것도 하나님이시오 우리를 부르신 것도 다 하나님이시므로 하나님이 모든 사역의 출발점이라는 겁니다. 내가 시작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시작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내가 불순종의 아들이었을 때에 벌써 당신의 독생자를 보내주셔서 이 일들을 시작하셨습니다. 내가 하나님과 아직 원수 되었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은혜와 사랑을 베푸셨고 그것을 발견한 순간 나는 그저 하나님이 시작하신 일에 뒤늦게 응답한 것뿐입니다.”(믿음의 모험)
3) 성경적 목회철학을 재정립하게 되다.
이 기간 동안 척 스미스 목사가 개인적으로 고민한 것은 열심히 설교하고 사역했음에도 불구하고 왜 사람들의 삶이 변화되지 않는가 하는 점이었다. 고민하던 척 스미스 목사는 자신의 무능함을 발견하면서 그 이유를 ‘하나님의 말씀을 먹이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고백하고 있다. 그는 엡4:11,12절 말씀을 통해서 목회의 개념을 말씀을 먹이고 교회를 세우는 것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이 기간 동안 척 스미스 목사가 어떻게 고민했는지 그의 이야기를 직접 들어보자.
“제가 목회 초창기에 가졌던 실망은 사람들의 삶에 변화를 주지 못하는 나의 무능함 때문이었습니다. 사람들이 교회에 오서 설교를 듣고 돌아가는데 그것으로 그만입니다. 저는 도무지 변화를 볼 수 없었습니다. 거듭남의 열매를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나는 크게 실망하고 있었습니다. 이제 돌아보니 모두 제 잘못이었는데 전도지상주의를 주장하던 교단에 소속해 있다보니 전도에 치중한답시고 설교도 전도를 주제로 하는 설교만 주로 했습니다. 예배 때마다 죽은 행실의 회개라든가 손을 얹고 기도하는 거나 세례를 주는 의미 따위만 설교했습니다. 성도를 믿음 생활 안에서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까지 성숙시키는데는 전혀 신경을 쓰지 못했습니다. 그러면서도 왜 그들이 성숙하지 않은 가를 늘 궁금해했습니다. 왜 전도하지 않는가, 왜 주님을 위해 열심을 내지 않는가를 의아해 했습니다. 그것은 제 잘못으로서 제가 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먹이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먹이지는 않고 요구만 하니 어떻게 튼튼하게 자랄 수 있겠습니까?”(믿음의 모험)
즉, 목회자의 일은 양떼들에게 풍성하게 먹이는 일이 전부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나머지 해야 할 일은 양떼들이 알아서 하도록 내버려두어야 한다는 점이다. 저술가이면서 변증론자인 단 스튜어트는 이렇게 갈보리채플 운동의 성공비결을 소개하고 있다.
“목회는 성도들을 가르쳐 하나님의 일을 하게 하는 것인데 많은 교회들은 목사를 고용하여 일을 맡기고 뒤에서 구경만 하려고 합니다. 갈보리채플에서는 주로 평신도가 영적인 일들을 합니다. 목사는 성도들을 가르치고 성도들은 나가서 일을 하므로 목회는 실질적으로 성도들의 몫인데 목회자는 여기에 말씀을 공급하는 역할을 합니다. 저는 이것이 중요하다고 보고 바로 이같은 역할분담이 갈보리채플의 성공비결이라고 봅니다. 양들이 다른 양들을 불러오는 겁니다.”(믿음의 모험)
이러한 마음의 연단 가운데 척 스미스 목사는 성경강해(Bible exposition)의 중요성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에 의하면 성경은 사람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계시로서 성경전체를 통해 하나님이 나타나 계신다는 것이다. 구약도 신약만큼 하나님을 알고 체험하는데 있어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척 스미스 목사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아는 것은 오직 하나님께서 당신 자신을 나타내신 이 성경을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확신한다. 하나님을 온전히 알려면 하나님의 온전한 계시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척 스미스 목사는 성경 전체를 온전히 가르쳐야 한다고 주장한다. 코스타 메사의 갈보리채플의 부목사인 L. E. 로메인은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전부 다 가르치지 않고 무엇을 하겠다는 말입니까? 우리 교회를 방문해 교회성장의 비결을 가르쳐달라고 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라고 대답합니다. 그러면 늘 그들이 하는 말이 성경을 가르치지 않는 교회가 어디 있느냐고 합니다. 그러면, 정말로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 순서대로 빼지 않고 다 가르치고 있냐고 물어봅니다. 그러면 그들은 입을 못 열고 쳐다보기만 합니다. 성경전체를 전부 다 가르치게 되면 이상한 교리들이니 이론들을 극복할 수 있게 됩니다. 제일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부 다 가르치되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포장해서 전해주는 겁니다.”(믿음의 모험)
갈보리채플 운동의 중요한 특징 중에 하나가 바로 성경을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 순서대로 전부다 가르치라는 것이다. 따로 상담프로그램을 두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가르치면서 자연스럽게 심신의 치유를 경험하게 된다고 한다. 즉, 사람들이 말씀에 몰두하게 될 때 자연스럽게 각양각색 문제들을 강단에서 상담하게 되는 효과가 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성경을 순서대로 배움으로써 교인들은 균형 있는 신자로 자라게 되고 결국 전도자의 사명을 저절로 감당하게 되어진다는 것이다. 모든 갈보리채플에서 공통된 점은 성경을 이곳 저곳으로 순례하는 것이 아니라 순서대로 문맥을 따라 자연스럽게 가르친다는 점이다. 갈보리채플에서는 주제설교나 제목설교가 없다. 오직 성경순서대로 강해설교(expositary preaching)만 있다. 그 결과 갈보리채플의 교인들은 웬만한 신학교 학생들보다 더 수준 높은 성경지식을 소유하고 있다. 말씀의 능력과 성경의 영감을 믿고서 성경을 순서대로 꾸준히 알차게 가르친다는 것은 갈보리채플이 낳은 중요한 전통이다.
척 스미스 목사는 처음부터 이 목회의 본질을 깨닫고 사역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오랜 기간 동안 믿음의 연단을 받으면서 목양(牧羊)의 중요한 원리를 광야 신학교에서 하나님으로부터 배운 것이다. 이 17년 동안 척 스미스 목사는 믿음의 연단을 받는 동안 이와 같이 목양(牧羊)의 본질에 대해서 배우게 되었는데 그가 아직 포 스퀘어 교단에 소속되어 목회하고 있을 때 몇 명이 모여서 기도회를 가지게 되었는데 그 기도회에는 누구든지 의자에 앉으면 다른 사람들이 모두 머리에 손을 얹고 기도하곤 했는데 척 스미스 목사가 앉았고 다른 사람들이 그를 위해 기도하고 있을 때 그에게 예언이 전해졌는데, “주께서 너의 이름을 ‘목자’(shepherd)로 고친다”는 말씀이었다. 즉, 주님은 척 스미스를 많은 양을 치는 목자로 만들어,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구름 떼처럼 몰려드는 많은 사람들을 다 수용할 수 없으리 만큼 큰 교회당을 그에게 맡기시는 계획을 세우셨다는 것이었다. 그 후 또 다른 예언의 말씀이 오렌지 카운티에 있는 코스타메사 갈보리채플의 존속 여부를 놓고 고심하던 16명의 교인들이 척 스미스 목사를 청빙할 것인지 아니면 교회를 문 닫아야 하는 지에 대해서 결정하기 위해 기도하는 모임 가운데 주어졌다. 이 예언은 아직 척 스미스 목사가 아직 갈보리채플 사역을 시작하지 않았을 때 주어진 것이다. 그 예언의 내용은 척 스미스 목사가 부임하게 될 것이고 그가 오자마자 교회당을 우선 개조하게 된다는 것이었다. 그는 와서 강단을 뜯어고칠 것이고 그후 교회당을 찾아오는 사람을 다 수용할 수 없을 정도가 될 것이며, 그 다음에는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높은 곳으로 예배당을 옮기고, 또 라디오 선교를 위한 방송국이 세워져서 전 세계에 이름이 나게 될 것이라는 것이었다. 여기서 중요한 사실은 목회의 본질에 대해서 17년 동안 고민하던 그에게, 그리고 드디어 목회의 본질이 말씀으로 양떼들을 풍성하게 먹이는 것임을 깨닫게 된 그에게 하나님은 ‘목자’(shepherd)라고 부르시는 말씀을 주셨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척 스미스 목사는 자신을 ‘목자’라 부르신 하나님의 말씀을 잊지 않고 사역했다. 이러한 체험을 통해서 척 스미스 목사는 더욱 더 목회자의 사명이 목양(牧羊)에 있음을 더욱 확신하게 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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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 재정립하게 되다.
17년간의 기간동안 가장 중요한 변화는 척 스미스 목사가 하나님의 은혜가 무엇인지 새롭게 깨닫게 되었다는 점이다. 척 스미스 목사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목회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목회가 이래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과 목회가 더 잘 되는 길이 있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던 중에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뭔가 부족한 것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게다가 그 당시 들려오는 소식들은 전국을 순회하며 부흥회를 여는 부흥사들의 집회에는 복음을 듣고 예수를 믿고 구원을 얻는 사람들이 천막을 가득 메우고, 많은 사람들이 기적적으로 병 고침을 받는다고 야단법석이었습니다. 저는 저의 삶과 목회에서도 그러한 능력이 나타났으면 좋겠다는 생각에서 턱슨(-아리조나주 소재, 필자주)의 사막에서 금식기도를 통해 하나님께 간절히 매달려 보기로 했습니다. 물 한 병과 성경과 노트 한 권만 가지고 하나님 앞에 부르짖기 위해 혼자 길을 갔습니다. 저는 하나님께 축복해 주실 것과 능력 주실 것과 제 삶에 기름 부어 주실 것을 간구했습니다. 이렇게 영성훈련을 한 바탕 치르고 나니까 기분도 삼삼해지고 흥분도 되면서, 금식기도를 이만큼 했으니 이제 하나님께서 틀림없이 우리 교회를 축복해주실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다음 주일예배에 하나님께서 어떻게 역사하실 지 기다려졌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저는 금식으로 인해 너무 지치고 쇠약해져서 강단에 겨우 설 수밖에 없었고, 마음이 복잡하고 머리가 뒤숭숭해 조리 있는 설교를 도무지 할 수 없었습니다. 사람들은 졸기 시작했고, 저는 당황해서 어쩔 줄을 몰랐습니다. 저는 하나님의 어마어마한 역사를 기대하고 있는데, 사람들의 코고는 소리가 합창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낙심이 된 나머지 화가 났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내가 얼마나 열심히 금식하며 기도했는지 보지 못하셨습니까? 우리 교회와 저를 축복해주셔야지요. 보셨다면 그럴 책임이 있으시잖아요?” 라고 따졌습니다. 그때는 제가 잘못 알고 있었던 것이지요. 저는 제가 금식기도를 하면 하나님께서는 의무적으로 축복해주셔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내가 원하는 것을 하나님이 하시도록 강요하는 도구로써 금식기도를 사용했습니다. 또한 저는 사람들이 사도행전의 기적과 같은 기적이 일어나는 것을 보게 되면, 예수 그리스도의 실체에 대해 분명히 믿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나중에 제가 깨달은 것은 우리가 세상에 전도하기 위해 보여줄 수 있는 것은 오직 서로간의 사랑이며, 이 사랑은 하나님의 마음으로부터 흘러나오는 사랑이라는 사실이었습니다.”-[은혜의 비밀],pp.9,10.
목회 사역을 하면서 척 스미스 목사는 무거운 짐을 진 것 같은 괴로움 가운데 신음하는 자신을 보면서 하나님과 사랑으로 관계를 맺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발견하게 되면서 목회에도 점점 자유하기 시작했다. 자신의 결단과 노력과 약속을 이행하는 성실함에 대해 하나님께서 반드시 보상해주셔야 한다는 생각을 포기하고 사랑의 하나님과 동행하는 기쁨을 누리기 시작하면서 척 스미스 목사가 목회하는 목회에도 큰 변화가 생기기 시작한 것이다. 하나님은 척 스미스 목사 스스로 자신을 강권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발견했고, 스스로 의로워지려는 노력과 더 나은 의로 하나님께 나아가려는 행위로부터 자유할 때까지 오랜 세월 동안 길이 참고 기다리셨던 것이다. 척 스미스 목사는 자유를 얻는 이 획기적이고 혁명적인 사건이 척 스미스 목사 자신에게서 일어나게 된 것은 로마서를 공부하고 있을 때였다고 회상한다.
“어느 날 제가 이 로마서를 공부하고 있을 때 하나님은 다름 아닌 하나님과 저와의 관계에 일대 혁명을 일으키셨습니다. 간단하고도 우리가 자주 사용하는 말이면서도 그 뜻을 분명하게 알지 못하고 있는 말의 의미를 분명하게 깨닫게 해주셨는데, 그 말이 바로 ‘은혜’라는 단어였습니다. 저는 그때 이후 지금까지 자유롭고 사랑으로 가득한 하나님과의 관계를 누리게 되었으며, 목회에 있어서도 과거에 보지 못했던 어마어마한 하나님의 기적을 체험하게 되었습니다.”-[은혜의 비밀], p.12.
성경을 진지하게 연구하면서 척 스미스 목사는 하나님의 은혜가 무엇인지 새롭게 발견하게 되었고, 그것은 척 스미스 목사 자신뿐만 아니라 목회 현장에도 현저한 변화를 낳기 시작했다. 하나님에 대한 새로운 깨달음 이후 척 스미스 목사는 힘들게 목회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전혀 새로운 차원의 교제에서 나오는 기쁨과 평강을 누리면서 목회의 ‘열매’를 저절로 맺기 시작했다. 하나님이 자신을 위하신다는 사실 위에 하나님과의 참된 사랑의 관계를 확립하고 더 이상 불안이나 염려에 떨지 않을 때 비로소 맡겨진 양떼들을 온전히 사랑할 수 있게 된 것이다.
5) 성령 안에서의 자유함에 대해서 배우다.
척 스미스 목사의 목회 사역에 중요한 변화를 일으킨 것은 하나님의 성령의 임재에 대해서도 새롭게 발견하게 된 것이었다. 목회 17년이 다 되어 갈 무렵 그는 새로 부임한 교회에서 놀라운 부흥을 체험하게 되었다. 그러나 계속되는 장로들과의 마찰로 인하여 척 스미스는 사표를 제출하여야겠다는 생각에 사로잡히게 되었다. 그 생각을 지워버리고 적당히 타협하면 나름대로 안정된 목회를 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떠나지 않는 그 생각은 그를 또 다시 ‘믿음의 모험’(A Venture in faith)을 감행하게 만들었다. 17년 간의 기간 동안 그에게 가장 큰 변화를 만들어 내는 계기를 제공한 것이 “나는 삯군이 아니다. 하나님은 나를 하나님의 교회의 목자로 부르셨다”는 생각이었다. 17년간의 목회 사역 중에 척 스미스 목사가 느낀 것은 다름 아니라 전통적이고 형식적인 교회 봉사의 틀 속에서 질식할 것 같은 답답함이었다. 틀에 박히고 형식적인 분위기에서 성령이 창조적으로 활동하실 수 없다는 사실을 발견했던 것이다. 그는 17년째에 참된 봉사 활동과 창조적인 사역의 숨통을 틀어막는 질식 상태에서 벗어날 때가 이제 다 되었음을 직감적으로 알게 되었다. 척 스미스 목사는 그날 밤을 이렇게 술회하고 있다.
“바로 그날 밤 주일 저녁예배는 처음으로 기쁨이 넘치고 생기를 띠었다. 나는 또 한번의 모험을 한 셈이다. 전통적인 절차를 떠나, 이제 모두가 한결같이 참여할 수 있는 무엇인가를 시도했다. 우리는 찬송, 광고, 기도, 그리고 설교라는 전통적인 순서를 어기고 형식에 구애되지 않는, 좀 색다른 모임으로 바꾸도록 했다. 그래서 그날은 근처에 있는 ‘아메리칸 레죤 홀’에서 모임을 갖게 되었다. 평소보다 좀 일찍 나와서 아내와 함께 직렬로 놓여 있는 의자들을 옮겨 원형을 이루도록 고쳐 놓았다. 그리고 예배는 성가대 대신 전원 합동의 찬양으로 시작했고 곧 이어 통성 기도로 들어갔는데, 갇혀 있던 심령들이 모두 해방된 듯 저마다 기도의 문이 열려 열심히 기도했다. 참으로 새로운 경험이 아닐 수 없었다. 나는 또 나대로 딱딱한 형식을 벗어나 자유로이 앉아서 하나님 말씀을 나누고 가르쳤는데, 이는 가까운 가족끼리 허물없이 드리는 다정한 가정예배의 분위기였다. 실로 전격적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생기를 되찾은 것 같았다. 그러나 교회 간부들은 이러한 갑작스런 변화과정을 보고 심히 못마땅하게 여긴 나머지 예배가 끝나자마자 간부회의를 열었다. 그런데 아이러니 하게도 새로운 교회를 시도한 사람은 나인데 내게는 발언권이 없었다. 나를 단지 삯군의 한 사람으로 취급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그들은 한결같이 철저한 교파적 교회 배경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기에 교회 활동은 일체, 교파 교회답게 그들이 갖고 있는 교회법 내지 규율을 따라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처럼 열띤 예배가 있은 얼마 후 그들은 나에게 더 이상 그런 식의 예배는 용납할 수 없다고 경고해 왔다.”(믿음의 모험)
성경의 말씀보다는 인위적 전통과 형식과 규율에 얽매이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뭉친 형제 자매로서가 아니라 목사를 그저 고용된 일군 정도로만 인식하는 교회의 모습을 보고 척 스미스 목사는 적잖이 실망했다. 세상에서 성공했다는 사람들이 교회의 장로자리에 앉아서 교회를 지탱한다고 자부하지만 그들 속에 참된 복음의 능력을 보지 못한 것이다. 그들은 진정 그리스도와 그의 말씀인 성경대로 살려는 열의가 없었다. 그는 이러한 분위기 속에 교회의 생명력은 식어져 간다고 생각했다. 척 스미스 목사는 이때의 심정을 이렇게 털어놓는다.
“이런 장로급들이 교회 활동을 규율과 짜여진 틀 속에 가두어 넣기를 일삼는 동안, 신약의 초대교회에서 보여준 폭발적인 신앙의 능력과 사랑의 불길은 차차 질식되어 쇠하여 갔던 것이다. 20세기라는 세월이 지나는 동안 우리는 교회에서 그 무엇인가를 놓치고 있다. 그리고 불행하게도, 이는 교리적인 면에서 보수적이며 안전하다는 교회에도 해당된다. 나는 그날 저녁 벌받는 어린아이처럼 장로들 앞에 앉아서 침착함을 잃지 않고, 내가 왜 그렇게 했는지에 대한 변론도 없이 묵묵히 그들의 요구를 수긍해주는 것으로 매듭을 지었다. 그러나 마음속으로는 하나님이 나를 목자로 불렀지 삯꾼이나 어느 돈벌이 장사치의 봉급을 받는 품팔이 목사로 버려 두지 않으리라는 확신을 갖고 돌아왔다. 이곳은 내가 발붙일 곳이 못된다고 자위하면서, 아쉽지만 급속히 성장하는 이 모임을 하루 속히 떠나서 내가 아는 뉴 포트(New Port)지역에서 성경 공부반을 만들어 조용히 새 출발을 해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렇지 않아도 갈보리채플에서 나더러 하루 속히 와달라고 청빙이 와 있었다. 내가 이들의 요청에 끌린 것은 새롭게 시작함으로써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책임감 있는 목자답게 활동할 수 있도록 교회 규칙과 조건을 붙일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된다는 것이었다. 어쨌든 나는 다시는 품팔이나 삯꾼 목회를 하지 않아야겠다고 다짐했다.”(위대한 추수, p.35,36)
척 스미스 목사는 교회가 성경과 성령 안에서 자유해야 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형식과 규율에 속박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목회자는 오직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야 하지 사람의 눈치를 보고 사람이 주는 봉급에 매여서는 안 된다. 참 목자가 되어야지 삯을 바라보는 고용인이 되어서는 안 된다. 그러나 당시 사임하기로 한 결정은 당시 매우 어려운 것이었다. 17년간의 어렵고도 힘든 긴 광야의 방랑 끝에 겨우 발견한 ‘오아시스’와 같은 곳이었기 때문이었다. 이제 활짝 필 날을 기다리고 있는 봉오리 꽃과 같은 교회였기 때문에 문을 닫기 직전의 작은 교회로 가기로 한 결정은 실로 모험이 아닐 수 없다. 이것은 말없이 순종으로 따르는 아내에게도 잔인한 결정이 아닐 수 없었다. 이제 막 정을 붙이고 안정을 취할 시기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척 스미스 목사는 그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확신하고서 아내 케이에게 말했다. 이것은 마치 하란을 떠나 기약 없이 머나 먼 이국 땅으로 갈 곳을 알지 못한 채 길을 떠나자고 사래에게 말하는 아브라함의 심정이었을 것이다. 케이 사모는 실망한 표정이 역력했지만 이내 한참동안 기도한 후 순종하겠다는 의지를 보였다. 척 스미스 목사는 “당신이 가는 곳이라면 세상 끝까지라도 따르겠습니다”라고 말하는 듯한 아내의 시선을 통해서 하나님이 주시는 힘을 느낄 수 있었다. 어떤 대가를 지불하더라도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순종하는 절대 원칙을 다시 한번 배울 수 있었다. 이와 같은 척 스미스의 결정을 보면 하나님은 항상 최선을 주시기 전에 차선으로 믿음을 시험하시고 연단 하신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러나 믿음은 아브라함이 약속을 바라보고 안주하고 싶은 하란 땅을 떠나 모험을 감행하는 길을 떠나는 여정이다. 상식과 편안함을 깨뜨리고 개척자의 길을 떠나는 모험이다. 척 스미스 목사가 이런 믿음의 모험을 감행하고서 부임한 오렌지 카운티의 코스타메사 갈보리채플은 문을 닫기 직전이었으나 그곳은 바로 20세기 교회사에 남을 엄청난 대추수(great harvest)를 준비하고 척 스미스 목사를 기다리고 계신 곳이었다.
이 17년간의 기간은 척 스미스 목사에게는 괴롭고 힘든 기간이었지만 하나님의 관점에서 볼 때 그는 훗날 갈보리채플에 부임하여 놀라운 추수사역을 감당하게 만들어준 축복의 기간이었다. 첫째, 그는 교단의 형식과 전통과 낡은 규율에 얽매이지 않는 교회관을 가지게 되었다. 둘째, 그는 하나님이 공급하신다는 사실을 믿음으로 실천에 옮겨서 매순간마다 그분을 의지하는 법을 배우게 되었다. 셋째, 그는 목회철학을 확실히 정립하는 축복을 받게 되었다. 넷째, 그는 성경과 성령 안에서 자유하는 것이 무엇인지 배우게 되었다. 척 스미스 목사가 갈보리채플의 청빙을 받아들일 때 이미 그는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을 깨닫기 시작했다. 그때를 회상하며 말하는 척 스미스 목사의 고백을 직접 들어보자.
“나는 그때, 하나님이 미리 계획하여 이런 일들을 준비하시고 진전시키고 계셨음을 깨달았다. 내가 주님의 인도하심을 좇아 주님만을 바라볼 때, 주님은 내 삶의 일거수 일투족을 살피시고 바로잡아 주신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이따금씩 이해할 수 없는 어려운 문제에 부딪쳤을 때 나는 믿음의 눈으로 봐야 했다. 우리는 믿음을 통해서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 함을 이해해야 한다. 돌이켜 보면, 하나님은 나를 여러 면으로 인도하고 지도해 주셨다. 내 과거를 돌이켜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손길을 더듬어 보면 얼마나 아름답고 감격스러운 일인지 모른다. 하나님은 때로는 나를 어렵고 불편한 입장에 처하게도 하셨지만, 이 모두가 나를 단련시키기 위한 교훈적인 일이었다. 때때로 내가 내 마음대로 움직이면, 하나님은 당신의 지시 없이는 나를 조금도 움직이지 못하게 하셨다. 간혹 내 마음대로 움직이도록 내버려두실 때도 있었는데 그때마다 주님은 당신의 인도 없이 행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경험하게 하셨다. 그러나 그런 때일지라도 나를 통하여 완전하신 계획을 진행시키고 있는 하나님의 그 따뜻한 손길을 느낄 수 있었다. 하나님은 내가 하나님께 완전하게 헌신할 수 있게 하는 조건이 무엇인지를 감안하시고 길을 열어주셨다. 하나님은 내가 나를 도저히 의지할 수 없는 지경까지 왔을 때에 자포자기와 더불어 옛날의 나는 없어지고 새 삶을 이루게 해 주셨고, 나의 일생에서 이러한 전환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깨우쳐 주셨다. 하나님은 이제 옛날의 내가 아닌 새로운 나를 통해 다른 사람에게 손길을 펼 수 있도록 의도하시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사명을 내게 감당케 하심으로 세계 방방곡곡에 그 영광의 물결이 파급되게 하실 것이다. 나를 쓰시기 위하여 주님의 형상에 부합하는 그릇으로 빚어주시고 그리스도를 닮은 인격으로 키워주신 후, 내 안에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시사 나를 통해 원하시는 일을 이루어 가실 것이다. 나는 하나님이 나에게 맡기신 일에 대해서 완전히 터득했다고 믿지 않으며, 또 내 안에서 하나님이 하신 일이 완성됐다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내가 그리스도의 형상을 충분히 반영할 수 있기까지는 아직도 갈 길이 요원하다. 그래도 하나님은 나를 영광에서 영광으로 변형시키는 작업을 쉴새없이 계속하시니 감사함을 금할 길 없다.”(위대한 추수, p.43,44)
주님이 맡기신 사역에 만족스러운 열매가 없음으로 조바심을 내는 모든 사역자들에게 해당하는 의미심장한 말을 남기고 있다.
“성경에는 작은 일을 불평하는 자의 얘기가 있다. 마찬가지로 지난날 나는 준비중인 일이 제대로 진행되지 않고 부진하자 곧 잘 실망했었다. 하나님을 탓하며 조급해하기도 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앞으로 다가올 일의 완수를 위해 나를 성장시켜 주셨다. 하나님은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우리 앞에 놓은 다음 단계의 일에 적응할 수 있도록 어제도 오늘도 꾸준히 일하고 계신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한 편의 시(詩)요, 작품(作品)이요, 예술품(藝術品)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통하여 하나님 자신을 표현하고 나타내기를 원하신다. 결국 우리는 세상에 하나님의 성품과 인격을 표현해 주는 존재인 것이다. 즉 우리는 예술가이신 하나님의 작품이다. 하나님은 나를 통하여 또 모든 신실한 성도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실상을 보여주고자 하신다. 하나님의 은총이 함께 할 때 못 이룰 것이 없다.”(위대한 추수,p.45)
또한 척 스미스 목사는 자신을 사용하신 하나님의 역사를 회고하면서 지난 날 자신의 생애 동안 배운 위대한 교훈을 가지고 다른 모든 사역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격려하면서 희망을 주고 있다.
“하나님은 이제 수문들을 활짝 열어놓고 잇따른 추수 광경을 보여주셨다. 여기서 우리는 또 한 가지 배운 것이 있다. 그것은 우리가 장벽을 쌓지만 않는다면, 그리고 그리스도의 목적을 위해 우리의 삶을 맡기기만 하면 주님의 은혜는 한없이 임한다는 사실이다. 나는 이 일을 목격하며 그저 경탄할 뿐이다. 하루하루가 기쁘기만 하고 진심으로 하나님께 감사할 뿐이다. 지나간 광야 생활이 이렇게 시시각각으로 귀한 주옥 같이 되었으니, 사도 바울과 같이 나도 말할 수가 있다.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아브라함과 같은 큰 인물도 더 큰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살았으나 생전에 그 완성을 다 보지 못했는데, 나는 나의 생전에 이토록 큰 결실을 보게 해주셨으니 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모르겠다. 다시 말하지만 하나님은 내가 거의 절망에 빠져 몸부림치던, 지나간 광야 생활에서 그렇게 괴롭던 시간마다 얼마나 고귀한 결실의 기초를 이루어 주셨던가? 하나님은 하나님 자신의 시간표와 논리에 따른 풍족한 추수를 위해 꾸준히 나를 가르치시고 준비시켜 주셨다. 진실로 하나님의 길은 우리 인간의 길이 아니오, 하나님의 생각은 우리의 생각과 다름을 나는 감사한다. 하나님은 우리가 우리의 꿈을 이루는 것 이상으로 우리를 통하여 큰 일을 이루신다.”(위대한 추수, p.60)
척 스미스 목사의 목회철학은 이러한 영적 훈련을 통해서 자연스럽게 정립되었다. 이제 여기서 우리는 한 사람을 연단 하셔서 사용하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훈련방식을 보면서 감탄을 금치 못한다. 하나님은 쓰시고자 하는 사람을 반드시 연단 하신다. 믿음을 단련하신 후에 그를 사용하신다. 믿음의 강한 연단 없이 쓰임 받는 사람을 성경 안에서도 밖에서도 보지 못했다. 쓰시고자 연단 하시고 필요한 것으로 준비시키시는 하나님을 생각할 때 우리는 어떤 형편에 있든지 하나님의 선하심과 신실하심을 노래할 수 있을 것이다. 다음에는 척 스미스 목사의 목회철학에 대해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자.
2. 척 스미스의 목회 철학
목회자의 목회철학은 교회의 모습이 어떻게 나타나는 지를 결정짓는 가장 중요한 요인이다. 목회의 성공은 그가 가진 분명한 목회철학에 달려 있다. 열매 맺는 목회철학은 다음과 같은 특징이 있다. 첫째, 성경적이어야 한다. 성경에 근거를 두어야 할뿐 아니라 생명력 있는 교회를 위해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이어야 한다. 둘째, 명확해야 한다. 교인들이 이해해야 하며, 공감하며, 본받으려는 동기를 부여해야 하며, 남에게 쉽게 전수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소위 '성공한' 몇몇 목회자들이 가지고 있는 목회철학은 모호하며, 동기부여도 약할뿐더러, 너무 개성적이고 특정 은사에 집중한 것이어서 남에게 전수할 수 없는 것이다. 셋째, 신실해야 한다. 목회자 자신이 목회철학에 충성해야 한다. 또한 자신의 목회철학에 변함없어야 한다. 시류에 따라 흔들리는 모습을 보여서는 안 된다. 성경에 기록된 명령에 근거하고 있는 '목회원리'에 대해 시종일관된 모습을 보여주어야 비로소 자신을 닮으려는 '제자'를 얻을 수 있다. 척 스미스 목사는 자신의 목회철학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는 항상 갈보리채플의 철학이라고 말한다. 그런 점에서 척 스미스 목사는 위에서 열거한 요건들을 다 충족시키고 있다고 하겠다. 나름대로 철학과 소신을 갖지 않은 목회자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교회의 철학이라고 당당하게 말하는 목회자는 별로 없을 것이다.
(1) 소명론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은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자이며, 세상에서 가장 성공적인 사람은 하나님의 부름대로 사는 자이다. 그 어느 누구도 부름 받은 사람만큼 행복할 수 없고, 부름 받은 대로 사는 사람만큼 성공할 수 없다. 하나님께서 나를 어떻게 부르셨고, 왜 그런 모양으로 부르셨는가에 대해 아는 지식 만큼 복된 것은 없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이 ‘이러이러한 사람이 되고 싶다’고 생각하면서 그것이 소명이 아닌가 말한다. 그러나 그것은 진정한 소명이 아니다. 소명이란 부르심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나를 어떤 사람으로 부르셨다는 것과 내가 어떤 사람이 되고 싶다는 희망과는 다르다. 혹은 어떤 사람들은 어떻게 해서 하나님 위해 이런 저런 일을 하고 싶다고 말하면서 그것이 자신의 비전이요 소명인 것처럼 말한다. 하지만 그것도 소명과 거리가 멀다. 참 소명은 하고 싶어서 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부르셔서 하게 하시는 것이기 때문이다. 성경이나 교회사를 볼 때 언제나 소명을 받은 사람은 자신이 능력이 없고 무가치한 존재임을 잘 알고 있으면서 부르신 대로 행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강력한 손길에 대해 잘 알고 있다. 그 손을 거슬러서 행하는 것만큼 힘든 것이 없다는 사실을 일찍이 배운 자들이다. 참 소명을 가진 사람은 하고 싶어서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지 아니하면 자신에게 화가 있을 것이기 때문에 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힘들어서 포기하고 싶을 때 그렇게 할 수 없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안다. 왜냐면 그것이 하나님의 명령이고 또한 하나님의 성령이 그렇게 섬기는 능력으로 붙들고 계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포기하고 싶을 때 사실 그 심령이 불붙게 마련이다. 이 소명은 특히 목회자들에겐 매우 중요하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목회자로 부르셨는지 분명하지 못하면 아무리 의미 있는 목회를 시도하더라도 결국 실패할 수밖에 없다.
반드시 목회자는 소명이 분명해야 한다. 하나님이 자신을 어떤 사람으로 부르셨는지를 알지 못하면 결코 목회사역에 성공할 수 없다. 어떤 일이든 소명이 없이 성공할 수 없고, 소명감이 없이 사역의 행복과 만족을 얻을 수 없다. 이 소명은 언제나 은사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이 부르심을 발견하는 것은 곧 부름 받을 때 자신에게 어떤 은사가 주어졌는지에 대해서 아는 것을 의미한다. 왜냐면 하나님께서 자신의 거룩한 목적을 위해 한 사람을 부르실 그 때에 그에게 은사도 부여하시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갈릴리 바닷가에서 어부 베드로를 부르실 때에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로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사람을 부르신다. 그리고 부르실 때 부르심의 소망을 계시하여 주신다. 자신의 은사는 하나님의 부르심의 소망을 실현하기 위해 성령께서 주권적으로 나눠주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목회자가 자신의 소명을 발견하는 것은 곧 자신의 은사를 확인하는 것을 의미한다. 자신의 마음 눈이 밝아져서 하나님의 부르심의 소망을 발견하는 것은 신학교 책상에서 배울 때가 아니라 신학교 졸업 후에 뛰어드는 현장에서 발견하게 된다. 삶과 사역의 현장에서 비로소 자신의 부르심에 대해 배울 수 있는 것이다. 척 스미스 목사는 자신의 소명을 재발견하기 위해 겪었던 과정을 ‘광야 학교’라 부르면서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내가 신학교에 다닐 때, 전세계에 선교지향적인 교회인 People's Chuch(토론토, 캐나다)를 목회하는 오스왈드 J. 스미스는 해외선교에 대해 매우 강조하였다. 내가 다닌 신학교에서 나는 그가 교회의 주된 목적은 세계를 복음화하는 것이라고 거듭 강조하는 것을 여러 번 들었다. 그래서 목회사역을 시작할 때 나는 세계를 복음화하기 위해 노력했다. 내 설교는 항상 전도설교였다. 나는 항상 설교를 마치고 죄인들을 초청했다. "머리를 숙이고 눈을 감으십시오. 그리고 오늘밤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기를 원하는 사람은 손을 들었다가 내리십시오." 모든 것이 전도에 초점을 맞추어졌다. 나는 교회의 주된 목적이 세계를 복음화하는 것이라고 느꼈기 때문에 나는 전도자가 되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곧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것이 하나님이 의도하지 않는 어떤 사람이 되려고 노력하는 것임을 깨닫게 되었다. 바울은 모든 사람이 사도나 선지자나 전도자가 아니라고 말했다. 모든 사람이 전도자로 부름 받은 것이 아니다. 모든 사람이 목사와 교사로 부름 받은 것이 아니다. 모든 사람이 선지자로 부름 받은 것이 아니다. 나는 사실 하나님이 부르시지 않은 어떤 것이 되려고 노력하고 있었던 것이다.
바울은 에베소서를 시작하면서 “하나님의 뜻대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사도 된 바울"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나는 그것을 나에게 적용할 때,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목사와 교사로 부름 받은 척 스미스”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하나님의 뜻에 의해 우리가 어떤 사람이 된 것인지를 발견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수년동안 나는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전도자가 된 척 스미스"가 되고자 원했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었다. 사실 나는 내가 섬기는 교단의 틀에 내 자신을 맞추려고 노력했었다. 내가 속한 교단은 강조점이 전도에 초점을 맞춘 교단이었다. 그 교단은 목사와 교사의 역할에 대해서는 별로 장려하지 않았다. 그들은 모든 목사들이 전도자가 되기를 기대했다. 그래서 나는 전도자가 되도록 노력했다. 그러나 나는 전도자로서 비참한 실패자가 되었다. 이때 내 아내는 나를 도와주려고 했다. 그녀는 내가 좌절하고 있음을 발견하고 "여보, 당신은 역동적이지 못한 것 같아요. 빌리 그레함을 보세요. 그는 당신처럼 강단 뒤에서 그저 서있지 않아요. 그는 강단에서 왔다 갔다 하잖아요? 당신도 역동적으로 움직여 보세요."라고 말했다. 나는 아내의 말대로 노력을 해 보았다. 그러나 나의 시도는 잘 되지 않았고 결국 좌절되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의도하지 않은 어떤 사람이 되려고 노력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연구하면서 성경에서 교회의 주된 목적이 세계 복음화라고 말하는 것을 찾을 수 없었다. 지금도 찾을 수 없다. 그러나 나는 에베소서 4장에서 교회의 목적이 무엇인지 발견하게 되었다.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엡4:11,12) 이것은 교회의 목적에 관하여 내 인생에 엄청난 철학적 변화를 가져왔다. 교회의 주된 목적은 성도들을 완전하게 하며, 믿는 자들을 강하게 하며, 그들을 성숙하게 하고, 그들을 먹이고, 그들을 사랑하고, 그들을 강하게 하여 그들로 하여금 사역에 동참하게 하는 것이다. 나는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를 그의 몸으로 부르셨고, 우리 모두를 향한 계획과 목적을 가지고 계신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바울 사도는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니니,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궤술과 간사한 유혹에 빠져 모든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치 않게 하려 함이라.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고 말했다.(엡4:1315) -The Pholosophy
우리는 척 스미스 목사의 고백을 통해 매우 중요한 원리를 발견하게 된다. 하나님은 모든 주의 종들을 획일적으로 부르시지 않으셨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몸을 이루기 위해 매우 다양한 방식과 모양으로 부르셔서 다양한 일을 하게 하신다. 그러므로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부르심의 목적을 분명히 발견하게 되는 것은 성공적인 목회의 기본이요 첫 출발점이다. 열심히 뛰어다니는데도 열매도 없고 마음의 평안도 없이 점점 탈진하게 된다면 대부분 이 점을 놓치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부르신 뜻대로 충성해야 한다. 그러나 그 뜻과는 별개로 다른 어떤 사람을 부르신 뜻대로 충성하려고 할 때는 노력하면 노력할수록 더욱 피곤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자신을 발견해야 한다. 하나님의 부르심의 소망(엡1:18)을 발견하는 것이 곧 자신을 발견하는 것이다. 사람들의 기대에 어울리는 모습으로 자신을 그려보는 것을 포기해야 한다. 또한 소위 성공한 사람의 이미지로 자신을 그려보는 것도 내려놓아야 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의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는 것이다. 척 스미스 목사는 17년이라는 오랜 세월을 통해 자신을 어떤 모양으로 부르셨는지 비로소 마음 눈이 밝아지게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척 스미스 목사는 자신이 전도자로 부름 받은 것이 아님을 깨닫게 되었고, 그래서 더 이상 전도설교를 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척 스미스 목사는 자신이 전도설교를 계속 고집했을 때 느꼈던 좌절감을 다음과 같이 고백하고 있다.
내가 전도자가 되려고 애쓰고 있었을 때 나는 모든 사역에서 가장 절망스러운 것은 주님으로 하여금 당신의 가슴에 정열적인 전도설교를 하도록 했으나 그것을 설교해야 할 교회 안에 아무런 죄인도 없을 때이다. 때론 주님께서 내게 주신 몇몇 위대한 복음전도설교에 대해 내 자신이 매우 흥분하곤 했다. 그것들은 논리적으로 매우 강력하여서 어떤 죄인이라도 그 설교를 통해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고는 가만히 앉아 있지 못할 설교들이다. 나는 주께서 내게 주신 역동적인 메시지에 대해 가슴 벅찬 심장으로 교회에 가곤 했다. 나는 그 설교를 전하고자 간절히 열망했고 전하고 싶어 견디지 못했었다. 그러나 종종 내 가슴에 불타오르는 이러한 종류의 설교를 가지고 강단에 서서 성가대의 찬양이 울려 퍼지는 동안 회중을 둘러보면 그곳에 죄인이 하나도 없다는 것을 발견했다. 나는 당황해서 내 설교에 대해 몇 가지 멘트를 하곤 했다. "여러분은 비참한 실패자들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이 그분을 전하지 않는 것에 대해 신물이 나 계십니다. 만약 여러분이 하나님이 원하는 사람들이라면 오늘밤 당신의 친구들을 교회에 데리고 오십시오. 여러분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게 하기 위해서 믿지 않는 이웃을 이 자리로 데려오십시오."(인용부문??)
나는 복스럽고 사랑스러운 성도들에게 이러한 부담을 안겨 주었다. 왜냐면 그곳에는 어떤 죄인도 없었기 때문에 화가 났기 때문이다. 나는 채찍을 들어 성도들의 등에다가 마구 내려치기 시작할수록 그리고 그들은 그렇게 확신이 들수록 의자에 더 깊이 움츠러들었다. 그리스도를 영접하라는 초청을 하는 대신 나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증인의 삶을 살기 위해 헌신할 것인지 요구하곤 했다. 왜냐면 나는 누군가가 강단 앞으로 나와서 엎드려 기도하지 않는다면 그 설교는 실패한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제는 더 나은 증인이 되고자 하는 열망이 부족한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주님을 섬기고자 했다. 문제는 그들이 배우지 못했기 때문에 그들은 어떻게 해야 할지 정말 모른다는 것이었다. 그들이 가진 것은 젖병이 전부였다. 그들이 들은 것은 죄를 회개해야 한다는 것과 예수님께서 죄로부터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죽으신 것이었다. 그들이 들은 것은 전도에 관한 것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어디로 가야 성숙하며 성장할 수 있는지 전혀 말씀 안에서 배우지 못했다.(인용부문??)
그러나 성도들이 영적으로 성숙해지고 완전해지기 시작하면서 그들은 "봉사의 일을 하며" 목회의 사역현장에 나서기 시작했다. 그들은 자신들의 친구들을 데려오기 시작했다. 전도는 건강하고 성숙한 교회의 열매요 부산물이 되었다. 말씀 안에서 강한 교회는 자동적으로 전도하는 교회가 된다. 건강한 양들이 생산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그것이 자연스러운 것이다. 당신은 그들에게 방법을 가르칠 필요가 없다. 당신이 그들에게 좋은 꼴을 지속적으로 먹임으로써 그들을 건강하게 만들 때 그들은 자연스럽게 또 다른 양들을 생산하게 된다.(인용부문??)
척 스미스 목사는 전도설교를 그만두는 대신 믿는 자들의 영적 성장을 위해 계시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특정 주제별로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본문이 말하는 대로 가르치기로 결심했다. 이런 결심을 어떻게 목회현장에 적용하게 되었는지 독특한 경험을 소개하고 있다.
내가 처음 목회를 시작했을 때 내 설교는 모두 전도에 초점을 맞춘 주제설교였다. 나는 2년간의 설교를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2년마다 나는 교구장에게 교회를 바꾸어 달라고 요청했다. 그래서 새로운 지역으로 이사하여 2년간의 설교를 다시 시작하곤 했다. 나는 이것을 네 교회에서 했고, 결국 캘리포니아에 있는 헌팅톤 해변에 마지막으로 정착했다. 그곳은 당시 6,000명의 주민들이 모여 사는 작고 아름다운 해변마을이었다. 나는 정말 그들을 알기 원했고 그들을 좋아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주제설교가 다 고갈되기 시작했다. 매주일 성경 전체에서 설교할 본문을 찾는다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었다. 하지만 나는 본문이 정말 나를 사로잡을 때까지 계속 읽곤 했다. 물론 나는 매주 세 편의 설교를 준비했는데 언제나 그것은 전도의 영역에서 시도했기 때문에 설교준비하기가 매우 어려웠다. 일단 본문을 발견하면 그것을 설교문으로 발전시킬 수 있었지만 그러나 언제나 본문을 발견하는 것이 어려웠다. 그때 나는 그리피스 토마스(Griffith Thomas)가 쓴 [사도 요한]이란 책을 만나게 되었는데 저자는 그 책의 중반부에서 요한 일서에 대한 연구개요를 보게 되었다. 나는 요한 일서에 대한 그의 요약된 연구를 읽기 시작했고, 그것이 요한 일서에 대한 위대한 강해설교 요약이란 사실을 발견했다. 그 책에는 모두 43개의 요약을 제시하고 있었다. 나는 "와~ 만약 내가 요한 일서를 설교한다면 헌팅톤 해변에서 1년은 더 보낼 수 있겠는걸~"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주일 아침에 교인들에게 다음 주일부터 요한 일서를 공부하게 될 것이라고 광고했다. (인용부문??)
척 스미스 목사가 주제설교를 포기하고 강해설교를 하기로 마음먹게 된 데는 교인들을 향한 사랑 때문이었다. 즉, 교인들과 오래 동안 함께 하고 싶었고, 그들을 진심으로 좋아했다. 척 스미스 목사는 장기목회를 위해 가장 좋은 방법이 성경을 쭉 가르치는 것이라고 판단했다. 그리고 이 일을 하기 시작하면서 척 스미스 목사는 점점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을 체험하기 시작했다. 성경을 가르치면서 성경의 권위에 대해 눈으로 보며 확신하는 것은 얼마나 축복된 일인지 모른다. 그리고 더욱 강한 확신을 가지고 이 일을 계속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자신만의 스타일을 가지게 되었다.
나는 교인들로 하여금 본문을 읽게 했다. 그리고 나는 본문에 대해 주해 연구를 시작했다. 요한일서 1장 1절부터 시작해서 1년을 그 책과 함께 보냈다. 그 해에 가장 흥미로웠던 것은 교회에 출석하는 교인이 두 배로 증가되었다는 것이다. 나는 예배 때마다 그리스도를 영접하라는 초청을 한 적도 없었지만 교회는 더 많은 회심자들을 얻게 되었고 전년도에 비해서 더 많은 사람에게 세례를 베풀게 되었다. 나를 더욱더 흥분시킨 것은 교인들이 이전에 알았던 것보다 주님과 동행하는데 있어서 더 큰 기쁨을 누리고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그들은 죄를 이기는 실제적인 능력을 경험하고 있었고, 그들을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이사야 선지자는 "비가 하늘로부터 내려서 다시 그리로 돌아가지 않는 것처럼, 내 말도 한번 나가서 이루기까지는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만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충만한 기쁨과 죄로부터 자유, 그리고 구원의 확신을 주시기 위해 이 작은 요한 일서라는 말씀을 주셨다면 그것은 이 책을 교인들에게 가르치면서 교인들에게 일어난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결코 헛되이 돌아오지 않는다. 사람의 말은 아마 그럴지 모른다. 그러나 그분의 말씀은 결코 그렇지가 않다. 만약 당신이 그분의 말씀을 가르치는 일에 신실하다면 그 말씀은 하나님이 의도하신 목적을 반드시 성취할 것이다. 그것이야 말로 당신이 성경을 읽을 때 언제나 스스로 물어야 하는 것이다. "이 책의 목적이 무엇인가? 왜 이것이 기록되었는가?" 목적을 찾으라. 그러면 당신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삶 속에서 일하시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발견할 것이고, 성경을 실제적으로 연구하면서 당신이 일어날 일들에 대해 기대할 수 있는 것이 무인인지 깨닫게 될 것이다.
나는 헌팅톤 해변에서 또 한 해를 보냈다. 그 교회는 이전보다 더 크게 성장했다. 나는 요한 일서를 끝냈을 때 나는 이미 강해설교에 대한 나만의 스타일을 갖게 되었다. 나는 생각했다. "요한 일서와 같은 방식으로 다룰 만한 다른 성경은 무엇이 있을까?" 신학교 다닐 때 나는 어느 교수님으로부터 로마서는 어떤 교회라도 변화시킬 수 있다는 것을 배운 적이 있다. 나는 로마서가 매우 영광스러운 책이라는 것을 수없이 들었지만 솔직히 고백하지만 나는 그 책을 수없이 읽고 했건만 그것은 실제로 내게 호감을 주는 책이 아니었다. 그러나 나는 그 교수님을 매우 신뢰했기 때문에 일단 시도하기로 결심했다. 그래서 나는 교인들에게 요한 일서를 끝마칠 즈음에 "이제, 다음주부터는 로마서를 공부할 것입니다"라고 광고했다. 나는 서점에 나가서 로마서에 간한 모든 주석서들을 샀다. 그리고 내가 요한 일서에서 발견했던 것과 비슷한 개요연구를 하기 시작했다. 나는 로마서를 가지고 2년을 보냈다. 그 교회는 다시 두 배로 증가했다. 우리는 그전보다 더 맣은 사람들이 구원받고 세례 받는 것을 경험했다. 그것은 정말 영광스러웠고, 또한 흥분된 일이었다.(인용부문??)
그러나 사실 성경을 가르치는 사역을 통해 목회자 자신이 변화되는 것이 정상이다. 성경을 가르치면서 교회가 변화되지 않는 이유는 목회자 자신이 변하지 않기 때문이다. 말씀을 자신에게 적용시키지 않고 교인들에게만 적용시키려고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척 스미스 목사는 말씀을 가르치기 전에 먼저 자신에게 적용하려고 노력하였다. 특별히 요한일서에 이어 로마서를 강해하면서 교인들뿐만 아니라 척 스미스 목사 자신에게 일어났던 엄청난 변화를 소개한다.
나는 로마서가 교회를 변화시켰는지는 잘 모른다. 그러나 그 책은 정말 나 자신을 변화시키고 말았다. 나는 이전과 전혀 다르게 주님과의 새로운 교제의 관계를 누리고 있다. 로마서는 나의 영적 경험을 전반적으로 변화시켰다. 하나님은 나를 완전히 뒤집어 놓으셨다. 또한 나는 로마서를 통해 매우 중요한 진리를 발견했다. 즉,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강하여지고 성숙해질수록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보다 효과적으로 증거하기 시작한다는 점이다. 그리스도는 그들의 삶이 되셨다. 우리는 초청의 밤이나 전도 프로그램을 더 이상 가질 필요가 없었다. 예수님을 증거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역할이 되었다. 증인이 되는 것은 당신이 하는 어떤 일이 아니다. 그것은 당신이 어떤 사람이 되는 것이다. 당신의 삶이 그리스도 안에서 성숙해질 때 자연스럽게 당신의 성숙한 영적 삶이 다른 사람에게 증인이 되게 할 것이다.(인용부문??)
그러나 척 스미스 목사는 한 책을 강해하고 그 다음으로 다른 책을 선택하여 강해하는 방식에서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 쭉 강해하는 방식을 선택하게 된 경위를 소개하고 있다.
나는 서점에서 [할레이 성경 핸드북](생명의 말씀사에서 번역되고 출판되었음)을 집어들었다. 사실 나는 새로이 회심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이 책을 선물로 주는 습관이 들었다. 나는 언제나 “당신이 성경 외에 책장에 가장 먼저 두어야 할 책이 할레이의 성경 핸드북”이라고 말했다. 그 책은 귀중하고 훌륭한 배경정보와 문화적 고고학적 역사적 자료들을 많이 담고 있었다. 작지만 다른 어떤 책보다 중요한 사실들을 많이 제공한다. 이 책의 표지에 이런 글이 씌여 있다. “이 책에서 가장 중요한 페이지는 867쪽입니다.” 나는 할레이 박사를 존경했기 때문에 생각했다. “그가 이 책에서 정말로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무엇일까?” 그래서 867페이지를 펼쳐서 그가 말하는 부분을 보았다. 그 책에서 저자는 말하기를 “모든 교회는 회중으로 하여금 성경 전체를 체계적으로 읽도록 권장하는 방법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리고 저자는 계속해서 말하기를, “목사의 주일 오전 설교가 회중이 지난주간 읽었던 본문에서 나오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다.” 나는 그의 제안에 따라 성경을 2년 동안 살펴보기로 했다. 매주 10장을 읽고, 시편은 15장을 읽을 때 우리는 전체 성경을 2년 동안 공부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스스로에게 말했다. “척, 네가 만일 성경 전체를 가르치기 시작한다면 네 남은 평생을 이 교회에서 머물 수 있을거야”(인용부문??)
나는 주제에 맞게 적은 부분에 국한시켰을 때보다 훨씬 쉽게 설교를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리고 내가 성경 전체에서 방황하며 설교본문을 찾았던 때보다는 내가 말하려고 하는 본문에 대해 더욱 깊이 연구하는데 시간을 보내면서 내 자신의 설교의 질은 점점 나아지기 시작했다. 당신이 성경의 특정 부분에서 본문을 발견해야 할 때 당신은 정말 깊이 있고 귀중한 연구를 할 수 있도록 동기를 부여받게 될 것이다. 그래서 나는 할레이의 제안을 받아들여 교인들로 하여금 처음부터 끝까지 성경을 보게 했고, 지금까지 그것은 나의 습관이 되어오고 있다.
지금 우리는 코스타 메사의 갈보리채플에서 성도들과 함께 일곱 번째 성경을 살펴보고 있다. 나는 주의 깊게 속도를 늦추어 오고 있다. 나는 매주 2장씩, 때로는 3장식 진도를 나가고 있다. 그러나 내가 점점 많이 배우고 있기 때문에 점점 그러한 방식(진도를 점점 줄이는 것)을 좋아하고 있다. 지난번에는 매주 5장씩 살펴봄으로써 성경 전체를 설교했었다. 이제 나는 한 주에 두 장 혹은 석 장으로 줄여서 시작하고 있다. 이런 체계적인 가르침을 할 때마다 우리는 성경 전체에 대해 매우 철저한 주석을 보게 된다. 나는 매번 성경을 한번 살펴볼 때마다 새로운 주석을 읽는 습관을 들였다. 때로는 두 세 권의 새로운 주석을 읽기도 했다. 그래서 결국 나는 성경에 대해 대부분의 중요한 주석을 모두 읽을 수 있게 되었다.
내가 배운 귀중한 교훈은 배울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직접 가르치는 것이라는 사실이다. 일단 가르침을 시작하면 당신은 배우기 시작할 것이다. 왜냐면 당신이 줄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자료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당신이 줄 수 있는 양의 열 배는 아마 얻게 될 것이다. 따라서 가르치기 시작하는 것이 가장 잘 배우는 길이다. 17년 동안 몸부림치면서 힘들게 사역했던 나의 지난 날 목회사역을 뒤돌아볼 기회를 가지게 되면서 나는 지난 23년 동안 해왔던 것과 비교해볼 때 몸부림치면서 힘들게 사역했던 기간은 다름 아니라 내가 전도자가 되려고 노력했으며 주제설교를 했던 때였다. 그러나 이제 현저한 변화가 일어났다. 나는 실제적으로 가르치기 시작했으며 가르치는 일을 하면서 40년의 목회동안에 점점 편안함을 느끼고 있다. (-The Philosophy)
척 스미스 목사는 자신의 소명과 은사와 관련된 목회철학, 아니 갈보리채플의 철학을 다음과 같이 요약하고 있다.
본질적으로, 갈보리채플의 철학은 성도들에게 말씀을 가르쳐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도록 함으로써 그들 스스로 목회사역을 할 수 있도록 성도들을 완전하게 하는 것이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것이다.
(2) 교회론
목회자에게 교회론은 매우 중요하다. 교회에 대해 어떤 신학을 가지고 있는가 하는 것은 그가 사역하는 교회에 활기를 불어넣을 수도 있고 침체의 늪으로 몰아갈 수도 있다. 척 스미스 목사의 교회론은 매우 단순한데 몇 가지로 요점을 지적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교회는 그리스도의 것이다. 교회는 개인이나 특정 집단에 의해 사유화될 수 없다.
주님은 자신의 기쁨과 영광을 위해 교회를 창조하셨다. 교회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존재한다고 믿는다. 교회는 그의 것이다.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이 반석 위에 내가 내 교회를 세우리라” 나는 그의 교회의 일부이다. “내 교회”라고 말할 수 있는 분은 오직 한 분, 예수님이시다. 교회는 그의 것이다. 그의 교회에 관해 흥미로운 사실은 당신이 그 교회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이다. 당신은 그 교회 안으로 태어나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성령에 의해 거듭나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로 들어오게 되었다. 그러므로 교회는 그의 것이다. 따라서 교회의 목적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 그의 도구로 쓰임 받는 것이다.
둘째로, 교회는 성령의 전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성령의 능력과 임재에 대해 열려 있어야 하며 항상 성령의 능력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쳐야 한다. 척 스미스 목사는 성경을 가르치는 일과 성령의 기름 부으심과 능력을 인정하는 일을 병행해야 한다고 주장하다. 하나님의 말씀을 강해하는 매우 유능한 설교자들이 많이 있지만 성령의 기름 부으심과 능력을 부인할 때 ‘죽은 교리’를 전하는 것이 된다고 경고한다. 왜냐면 교회는 성령의 전이기 때문이다.
갈보리채플은 하나님의 백성들의 삶을 변화시키는 것은 성령의 능력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것이라고 믿는다. 만일 말씀이나 말씀에 대한 기초가 없이 단지 성령에 대해서 강조한다면 여러분은 단지 깊이가 없는 체험적인 사람들만을 인도하는 것이다. 만일 성령 없이 하나님의 말씀만 가지고 있다면 여러분은 죽은 정통교리로 사람들을 인도하고 있는 것이다. 변화를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성령의 능력이 필요하다. 그러나 실체와 기초를 제공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이 필요하다. 사람들에게 변화를 가져다주는 것은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이 능력을 통해 가르치는 것이 서로 조화를 이루는 것이다. 갈보리채플은 성령의 능력에 대한 필요성을 늘 인정한다. 그러나 또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것과 말씀에 대한 견고한 기초를 함께 인정한다. 말씀을 효과적으로 가르치기 이해서 성령의 기름부음과 능력이 필요하다. 그래야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사람이 지혜의 말씀의 은사와 지식과 예언의 말씀의 은사를 사용할 수 있다. 이러한 은사들은 목사의 삶 속에서와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칠 때 작용해야 한다.
셋째로,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다. 그리스도의 몸이란 단어가 함의하는 바는 여러 가지가 있다. 우선 척 스미스 목사는 교회의 다양성과 통일성을 인정해야 한다고 말한다.
여러분이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를 살펴본다면, 매우 넓은 범위가 있음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여러분이 우리 사회를 돌아본다면 많은 사람들이 많고 다양한 취향을 가진 사람들의 폭이 존재한다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그래서 이 범위의 한 쪽에는 매우 형식적이고 의전적인 교회가 있다. 그 교회에서는 기도문, 가운, 성가대, 촛불, 서고 앉고 무릎 꿇고, 화답하는 등등의 형식이 있다. 그것은 매우 형식적이며, 제의적인 형식이 예배 형태이다. 그런데 다른 한쪽에서는 아무런 형식도, 프로그램도 없고, 많이 소리치고, 부르짖고 많이 방언하고, 사람들은 돌아다니며, 모든 사람들이 이곳 저곳에서 서 있으며, 순서도 없고, 형식도 없고, 다음에 무엇이 일어날 것인지 단지 기다리면서 앉아 있으면 된다. 매우 의전적인 방식에 의해서만 하나님과 관계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가운이나 성가대나 향이나 촛불을 좋아한다. 그들은 예배드리기 위해 앉았을 때 그러한 것들을 통해 예배드리는 분위기를 느낀다. 그들이 밖으로 나갔을 때 그들은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있다는 느낌을 가지고 있으며 그런 방식으로 주님께 예배하는 것을 좋아한다. 나는 몇몇 사람들은 실제적으로 그러한 환경 속에서 진정한 예배를 드리고 있으며 주님을 사랑하고 있다고 확신한다. 또 한편으론, 아주 감정적인 사람들이 있는데, 그들은 감정적인 자극을 받지 않으면 적절하게 하나님께 예배드렸다고 느끼지 않는다. 사실 그들은 가르치는 교회에서 나오면서 “이 교회는 내가 출석한 교회 중에 가장 생명력이 없어. 그런 노인들로부터 무엇을 어떻게 얻을 수 있는지 모르겠어. 그 교회는 죽은 교회야. 왜 그들은 방언을 하지 않지? 왜 그곳에는 기적이 없지?”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의 모든 것은 감정적인 충동(kick)이다. 그들은 감정의 고양을 위해 살고, 또한 감정적으로 고양되어 있는 상태에서 그들은 하나님께 예배드린다는 느낌을 받는다. 감정적인 방식으로 그들은 그렇게 하나님과 관계를 맺는 것이다. 하나님은 감정적인 사람들도 있다는 것을 아신다. 하나님께서는 또한 의전적인 측면에 의존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도 아신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들 모두를 사랑하신다. 하나님은 의전적인 방식으로 그분과 관계할 수 있는 몇몇 사람들이 있음을 아시기 때문에, 그분은 의전(liturgy)을 필요로 하는 그들을 목회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그런 교회를 세우신다. 또한 매우 감정적인 방식으로 하나님과 관계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알고 계시기 때문에 하나님은 사람들이 감정적인 경험을 통해 하나님과 관계할 수 있도록 하는 매우 감정적인 교회를 세우시기도 하신다. 나는 이러한 교회들이 있다는 사실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하고 있다. 나는 그들 역시 그리스도의 몸 안에 있다고 본다. 따라서 교회의 추는 한족에는 매우 의전적인 측면으로, 다른 한 족으로는 전적으로 형식에 구애받지 않는 경험으로 기울어지기도 한다.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할 때 우리는 건강한 교회와 성숙한 교회를 생각해볼 수 있겠다. 건강하지만 성숙하지 못할 수 있고, 또한 성숙하지만 건강하지 못할 수 있다. 건강한 몸은 말씀으로 교인들의 영적 필요를 채우는 것을 의미하며, 성숙하다는 것은 다양성을 인정할 줄 아는 포용성을 의미한다. 또한 덜 의존적이라는 뜻이다. 특히 교회는 성숙함에 이르는 원리를 알아야 하며 목회자는 교인들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워야 한다. 척 스미스 목사는 우선적으로 다음과 같은 그림으로 교회의 성숙도를 설명한다.
상위 세계관 (형식적/의존적) 대부분의 교회들 ? (미국교회의 90%) ? 의존적 -------------------------------- + ---------------------------------- 비의존적 ? 갈보리채플 ? (미국 국민의 90%) (느슨한/비형식적인) 하위 세계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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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는 부모에게 의존적이며 성숙해지면 부모로부터 독립한다. 이 그림을 통해 척 스미스 목사는 성숙한 교회는 비의존적이라고 말한다. 이 그림에 대해 척 스미스 목사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우리 사회는 지난 25년 동안 엄청나게 변화해오고 있기 때문에, 가장 위에 “상위 세계관”(High World View)이란 이름으로, 그리고 가장 밑에는 “하위 세계관”(Low World View)란 이름을 붙인 어떤 수직선을 가진 교회의 범주(spectrum)로 구분할 필요가 있다. ‘상위 세계관’은 고도로 조직화되고 체계적이며 고도로 개발된 프로그램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다. 모든 것이 사소한 규정을 지켜야 하며, 주의 깊게 준비된 패키지에 맞아야 하는 것이다. 반면, ‘하위 세계관’은 매우 캐쥬얼하며(kick-back), 자유스러운 태도이다.(take-it-as-comes)
상위 세계간과 하위 세계관에 의존적인 사람들과 비의존적인 사람들이 있다. 의존적인 사람들은 기댈 수 있는 무엇인가 혹은 누군가를 필요로 하고 있다. 그들은 교회에 대한 그들의 의존성과 그들에 대한 교회의 의존성을 강조하는 교회를 필요로 한다. 매우 조직적이고 의존적인 사람들이 있다. 또한 매우 조직적이지만 비의존적인 사람들이 있다. 캐쥬얼하면서 의존적인 사람들이 있고, 캐쥬얼하면서도 비의존적인 사람들이 있다. 오늘 미국의 대부분의 교회는 의존적이며, 매우 조직적이며, 체계적이며, 잘 준비된 프로그램적이며, 모든 사람이 어떤 위원회에 소속되어 있거나 모든 사람이 자기들의 의무를 아는 그런 범주에 맞추어져 있다. 그러한 교회는 말하기를, “우리는 여러분에게 의존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여러분의 헌금과 헌신과 여러분의 출석에 의존합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여러분의 구원과 영적 생활을 위해 우리에게 의존하고 있습니다.” 예배를 빠지게 되면 그 다음날 임명된 어떤 사람이 그에게 전화를 걸어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살펴보고, 왜 예배에 빠지게 되었는지 그 이유를 발견하려고 할 것이다. 그 교회를 떠나 다른 교회로 가지 못할 것인데 왜냐면 그것은 주님을 떠나는 것으로 인식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언제나 그것을 말할 것이며, 우리의 구원은 그 교회에 신실하게 남아 있느냐에 달려 있다고 믿게 될 것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갈보리채플은 캐쥬얼하며, 자유스러우며, 비의존적인 형태에 가깝다. 우리는 사람들에게 더욱 캐쥬얼하며 더욱 비의존적인 사람들이 되라고 호소하고 있다. 사람들은 대체적으로 다른 어떤 사람에게 의존할 필요가 없으며, 그들에게 의존하고 있는, 즉, 그들이 없이는 안될 어떤 일을 해야 할 필요도 없다. 그들은 자신들이 원한다면 티셔츠를 입을 수 있으며, 넥타이를 매지 않아도 되고 쓰리피스 슈트를 입지 않아도 된다. 누가 어떻게 옷을 입었는지에 대해 어떤 사람도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지난 몇 십 년 동안 꽤 많이 변화하게 되어 오늘까지 이르게 된 미국의 사회적 구조는 점점 고도로 기술적인 사회(technical society)를 향하여 나아가고 있으며 , 미국의 90%가, 특히 남부 캐리포니아의 경우 더욱 그러한데 즉, 다소 비의존적이며 캐쥬얼한 삶의 방식에 맞추어져 있다. 결과적으로 90%의 교회가 10%에 해당하는 사람들이란 작은 연못에서 그물을 던지면서 작은 연못에서 자기들의 영역을 확보하기 위해 서로 치열하게 경쟁하고 있는 셈이다. 한편, 몇몇 소수의 교회가 그러하듯이 갈보리채플은 90%의 연못에서 그물을 던지려고 한다. 90%의 교회들이 와서 우리를 보고는 이렇게 말한다. “당신들은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그들은 우리 교회를 조사하면서 우리가 어떤 프로그램을 가지고 있는지 연구한 후에 이렇게 말한다. “글쎄요, 이 교회가 성장할 수 있었던 이유는 아마도 어린아이들이 맨발로 교회에 올 수 있도록 했기 때문인 것 같아요. 그게 핵심인 것 같아요.” 그리고 그들은 왜 사람들이 갈보리채플 교회에 대해 매력을 느끼고 모여들고 있는지에 대해 몇 가지 프로그램이나 다른 비결들을 찾으려고 한다.
그러나 그들이 그 비결을 찾으려고 하지만 실패하는데 그것은 비결은 어떤 프로그램이나 형식에 맞추려는 다른 전통적인 교회와 달리 하나님이 사람들의 삶에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역사하시는 성령이 우리가 가진 비결이기 때문이다. 우리 교회에서는 사람들이 ‘위협받지’ 않는다. 그들은 쇠뇌 당한다(collared)고 느끼지 않으며, 또한 주일학교 공과에 던져져서 “오, 형제님, 형제님께서 세 번 출석하신 것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우리는 지금 당신이 주일학교에서 교사로 섬기기를 원하고 있습니다.”라는 말을 들을 필요도 없다. 여러분은 압박을 받을 필요가 없으며, 여러분의 예배는 여러분이 주님께 정직하게 반응할 때 여러분의 마음에서부터 우러나오는 어떤 것이 될 것이다.-The Philosophy.
건강한 교회로서 성숙하지 못한 교회가 있다. 성숙한 교인, 성숙한 교회의 특징은 ‘비의존성’이다. 목회자는 교인들을 말씀을 가르치면서 ‘비의존성’을 요구해야 한다고 말한다. 척 스미스 목사는 교인들로 하여금 갈보리채플에 ‘비의존적’이 되도록 가르친다.
“이단들은 엄청나게 많은 개인 행동지침을 내리면서 구원은 이러한 권위에 절대적으로 무조건 복종하는 데서 오는 것이라고 가르칩니다. 그런데도 그러한 절대 조직 안에 들어가서 생활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들은 자기의 자유를 희생하며 그렇게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그 단체가 보장하는 구원만 알고 그 법의 기준을 어길 때에 따르는 형벌이 얼마나 큰 것인가를 깨닫지는 못합니다. 그런 조직에 노예가 되었던 많은 사람들은 말하기를, 그들이 그 단체를 떠나는 것은 하나님을 떠나는 것과 같은 것으로 믿었다고 말합니다. 단체에 대해 의문을 가지기 시작하거나 다른 곳으로 가기를 원하면, 그것은 지옥으로 가는 위험한 길이라는 말을 들었다고 합니다. 이런 종류의 협박 수단과 독선적인 난폭한 주장들은 사람들을 노예로 삼는 단체들의 상투적인 수법입니다. 다른 한편으로 사람들에게 주님과 동행하면서 성장할 수 있는 좋은 교회를 찾으라고 권면 해주는 교회가 영적으로 건강한 교회입니다. 우리 갈보리채플에서는 언제나 사람들에게 잘 둘러보고 가장 은혜를 받을 수 있는 교회를 찾으라고 일러줍니다. 우리 교회에 와서 좀 더 감정적이고 떠들썩한 예배를 사모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분들에게는 본인들에게 맞는 교회를 찾아 자유롭게 예배드리라고 권면합니다. 어느 누구도 우리 교회에 억지로 얽매여 있기를 원치 않기 때문입니다.”-[은혜의 비밀], pp.205,206.
또한 성숙한 교회는 받는 교회가 아니라 주는 교회라고 척 스미스 목사는 말한다. 받는 것에 의존하고 받는 것 때문에 존재하게 된다면 참된 의미에서 ‘성숙한 교회’라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갈보리채플의 철학은 받는 것이 아니라 주는 것이며, 돌봄을 받는 것이 아니라 돌아보는 것이다. 많은 교회에서 여러분은 많은 사역들이 사실 돌봄을 받기 이해 존재한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들은 기꺼이 당신에게 다음과 같이 말할 것이다: “우리는 이 사역이 진행되기 위해 당신의 협력이 필요합니다. 이 일은 당신에게 달려 있습니다.” 나는 그 자체의 존재와 운용을 위해 사람에게 의존하는 그 어떠한 사역이나 일도 죽어야 하며,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최선의 일은 그것이 죽어버리도록 내버려두는 것이라고 나는 결론을 내렸다. 갈보리채플은 섬기기 위해 존재하며, 우리는 주는 것을 강조한다. 즉, 교인들에게 주는 것과 교인들을 섬기는 것을 강조한다.
주는 교회에 대해 척 스미스 목사는 유명한 실례로 들고 있다.
우리는 석유사업에도 몸담고 있을 뿐만 아니라 어느 공구회사의 부사장이며 텍사스로부터 이사온 매우 부유한 남자가 있었다. 그는 갈보리채플을 정기적으로 출석했으며, 우리는 그뿐만 아니라 그의 아내와 매우 친하게 되었다. 그런데 계속 그는 자기 아내에게 이렇게 말하곤 했다고 한다. “언제쯤 그들이 우리에게 돈을 내라고 요구할까?” 그는 우리가 그에게 헌금하도록 언제 호소할 것인지 계속 기다렸던 것이다. 추수감사주일이 다가오기 일주일 전에 나는 우리가 하나님께서 지난 일년 동안 우리에게 얼마나 선하셨는지에 대해 감사할 것이 너무 많다고 광고했다. 나는 말하기를, “그러나 불행하게도,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이 있으며 그들은 감사할 만큼 많은 것을 가지고 있지 못합니다.” 내가 몇몇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문제들과 그들이 직면하고 있는 재정적인 어려움에 대해서 말하기 시작할 때 그 남자는 그의 아내에게 고개 짓을 하면서 말했다. “드디어, 올게 왔구려. 나는 이때가 언젠가 올 줄 알았지.” 그러나 나는 그가 기대한 것과 정반대로 결론을 내렸다. 나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래서, 만일 여러분 중에 이번 추수감사절에 도움을 받기 원하고 경제적인 어려움에 시달리고 있다면 예배 후 우리 교회 부목사들에게 말해주십시오. 그러면 교회는 칠면조를 드릴 것이며 추수감사절 만찬에 필요한 모든 것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우리는 여러분이 영광스러운 추수감사절을 맞이하도록 기도하겠습니다.” 그 남자는 엄청나게 충격을 받고 말문이 막혀 한동안 입을 열지 못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주는 자가 받는 자보다 복되다고 하신 주 예수님의 말씀처럼 성경에 기록된 진리대로 단순하게 행동했을 뿐이다. 이것이 우리의 철학이다: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거저 주는 것, 그리고 사람들을 섬기는데 있어서 우리 자신을 거저 주는 것, 그리고 5리를 같이 가자고 청하면 10리를 가는 것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척 스미스 목사는 주는 교회란 바로 목회자의 생활에서 증명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목회자가 먼저 주는 사람이 되어야 교회가 주는 교회가 될 수 있다. 만약 섬기기보다 섬김을 받기 원하는 목회자가 일하는 교회는 결코 성숙한 교회라고 할 수 없다. 척 스미스 목사의 말을 계속 들어보자.
같은 예로, 목사는 돌봄을 받는 것보다 돌보아야 한다. 언제부턴가 목회사역이란 단어와 개념이 원래의 뜻에서 엉뚱하게 벗어나기 시작했다. 문자적으로 ‘목회자’라는 단어는 여호수아가 모세의 ‘목회자’이었듯이, ‘종’을 의미한다. 여호수아는 모세의 종이었다. 즉, 그는 모세의 필요를 섬기던 사람이었음을 의미한다. 그는 모세의 심부름꾼이었다. 그것이 바로 ‘목회자’(minister)란 단어가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회중의 필요를 섬기기 위해 어떤 사람들이 목회자에게 도움을 요청할 때 그 목회자들이 얼마나 화를 내는지 보고 놀라움을 금할 수 없다. 그들은 이렇게 불평한다. “그가 나더러 차에 태워달라고 요청한 것을 믿을 수 있겠어? 그는 내가 이곳의 목회자라는 것을 모른단 말인가?” 만일 당신이 목회자가 아니라면 그는 차를 태워달라고 요청하지 않았을 것이다.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너희 중에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목회자는 종이다. 수건을 두르시고 돌아다니시면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분은 예수님 자신이시다는 것을 기억하기 바란다. 먼지 많은 길과 신발, 그리고 발은 항상 더럽다. 어떤 사람이 당신의 집에 왔을 때, 집안의 가장 낮은 종이 와서 입구에서 손님의 신발을 벗기고, 세숫대야에서 그 발을 씻길 책임이 있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마지막 만찬에서 친히 모범으로써 우리에게 보여주신 역할이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을 너희가 아느냐 너희가 나를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말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요13:12-14절) 다른 말로 하면, 우리가 종이 되어야 하는 것이고, 우리는 ‘목회사역’을 ‘종되는 일’로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다. 게일 어윈(Gayle Irwin)이 쓴 [예수 스타일](The Jesus Style)이란 책은 여러분에게 그리스도인의 진정한 섬김이 무엇이며, 목회사역이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해 잘 보여주고 있다. 목사로부터 온 성도에 이르기까지 전 교회는 다른 사람들의 필요를 섬기기 위해 존재한다. 우리가 섬김을 받기 위해 여기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섬기도록 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오히려 그들을 섬길 수 있는 길을 찾아야 한다.
갈보리채플의 철학은 그리스도의 모든 몸을 살펴보면서 하나님께서 채우라고 부르신 아주 적은 분야에서 채우는 것이며 우리는 그러한 부르심에 충성하기 원하는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전체 몸과 그 전체 몸의 목적을 바라보도록 노력한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에 있어서 다른 사람들과 갈등을 빚는 유일한 자리는 그들이 사람들을 예수 그리스도와의 개인적인 관계로 이끌지 않는 곳이다. 이 말은 몇몇 사람들에게는 이상한 말로 들릴지 모른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들이 더 이상 사람들을 예수 그리스도와의 개인적인 교제로 이끌지 않는 곳에 와 있는 교회들이 있다. (-The Philosophy)
또한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할 때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모시고 섬기고 있는 다른 교회를 향한 열린 마음을 가지는 것을 의미한다. 다양성을 끌어안을 줄 아는 넓은 마음이 성숙도의 기준이다. 그러나 모든 것을 다 포용하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갈보리채플은 다원주의 세계관을 배격한다. 척 스미스 목사가 생각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것이다. 다른 교단에 대한 열린 태도는 복음전도에 힘쓰는 교회임을 전제로 해야 한다. 척 스미스 목사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는 사람들을 예수 그리스도께 인도하는 교회들과 경쟁하지 않는다. 우리는 그들과 싸우지 않는다. 우리는 그들과 다투기 위해 존재하지 안는다. 우리는 마귀와 싸우며 예수 그리스도를 선포하기 위해 존재한다. 예수님은 그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행1:8)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것은 예루살렘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했으며, 그것은 예루살렘에서는 매우 효과적이었다. 교회가 태어난 지 몇 달 후 제자들은 법정에 서게 되었고, 그곳에서 그들이 받은 고소장은 이것이었다: “너희는 이 도시를 이 사람(예수)의 교리로 가득 채웠다.” 이제 예루살렘 교회는 매우 성공적인 교회였다. 우리가 법정에 끌려가서 우리가 전 도시를 예수 그리스도의 교리로 가득 채우게 되었다는 고소장을 받게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나는 주님을 찬양할 것이다.
핍박은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를 온 유대에 흩어지게 하였으며 그들이 간 곳마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전파했다. 그때 빌립이 사마리아로 가서 사마리아인들에게 그리스도를 설교했으며 많은 사마리아인들이 빌립이 행하는 기적을 보았고, 또한 믿고 세례를 받았다. 그때 성령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행13:2절)고 하셨다. 그들은 금식하며 기도했고, 그들에게 안수하였으며 바울과 바나바는 “성령의 보내심을 받아 실루기아에 내려가 거기서 배타고 구브로에 갔다.”(행13:4절) 나중에 바울은 복음을 소아시아, 로마, 그리이스, 그리고 마게도냐에 전했다. 도마는 인도로 복음을 가져갔다. 교회가 탄생한지 단지 30년만에 바울은 골로새 교회에게 편지하기를 “이 복음이 이미 너희에게 이르매 너희가 듣고 참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은 날부터 너희 중에서와 같이 또한 온 천하에서도 열매를 맺어 자라는도다.”(골1:6절)라고 썼다. 단지 30여년 만에 제자들은 복음의 메시지를 전 세계에 전했다.
또한 척 스미스 목사의 교회론의 근간은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말씀 위에 세워져 있다.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할 때 그것은 공동체성의 회복을 의미하는 것이다. 목회자는 온 교회가 말씀 안에서 하나될 수 있도록 힘써야 한다. 척 스미스 목사는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기 위해 자신이 어떻게 노력했는지를 고백하고 있다.
우리가 1965년도에 불과 25명의 교인들과 함께 갈보리채플을 시작했을 때 나는 그들 25명을 그 지역에서 하나님에 대해 가장 잘 아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들 것이라고 결심했다. 나는 일주일 동안 오일은 저녁시간 그들에게 말씀을 가르쳤다. 이틀저녁은 교회에서, 사흘저녁은 집에서 성경공부 모임을 토해 가르쳤다. 일주일에 토요일 저녁은 그들과 함께 기도회를 가졌다. 우리는 사도행전 2장을 우리의 패턴으로 삼았다. “저희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쓰니라”(행2:42절) 우리는 이것이 우리의 예배와 교제에 필수적인 요소가 되도록 하자고 결심했다. 강조점은 사도들의 가르침, 즉, 말씀을 가르치는 것이었다. 우리는 그들에게 분명한 교리, 즉 성경이 말하는 교리를 가르쳤다. 우리는 그들에게 하나님에 대해 가르쳤다. 우리는 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에 관해 가르치곤 했다. 우리는 그들에게 성령에 관해 가르치곤 했다. 우리는 그들에게 인간에 대해 가르치곤 했다. 우리는 그들에게 구원에 관해 가르치곤 했다. 그리고 우리는 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에 관해 가르치곤 했다. 이러한 가르침은 분명하고 확실한 교리였다. 즉, 사도들의 가르침이었다.
우리는 교제, 즉 코이노니아를 발전시키기 시작했다. 서로를 위해 기도하고 기도로써 우리의 삶을 서로 결합시키며, 또한 실제적으로 서로를 돕기 시작하면서 우리는 정말로 한 몸이 될 수 있었고, 육체적으로나 영적으로나 서로를 섬기기 시작했다. 만일 우리 중에 어떤 사람에게 어떤 필요가 있을 때 우리는 전부 함께 힘을 합하여 그를 도우면서 강력한 펠로우쉽을 형성했다. 우리는 또한 성경공부모임에 함께 참석하여 떡을 떼기도 하였다.
사도행전을 보면 그들이 이러한 일들을 할 때 주께서 날마다 구원얻는 자들을 교회에 더하셨다고 말하고 있다. 우리가 사람들에게 말씀을 가르치면서 이러한 교제가 점점 성장하여 기도와 사랑과 섬김으로 하나됨을 이루었을 때, 그리고 우리가 함께 보여 떡을 떼며 함께 주님을 경배하며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셨음을 기억할 때, 그리고 우리가 함께 기도하기 시작했을 때 교회는 성장하기 시작했다. 내 아내는 주중에 이웃에 사는 부인들을 위한 기도회를 인도했었고, 나는 토요일 저녁에 이웃의 남자들을 위한 기도회를 인도하고 있었다. 우리는 또한 병자들을 방문하고 그들을 위해 기도해주는 장로로 임명한 한 그룹의 남자들이 있었다. 우리가 이러한 일들을 신실하게 하기 시작했을 때, 우리는 주께서 날마다 교회에 구원 얻는 자들을 더하여 주시는 것을 발견했다.
이렇게 주님의 말씀을 따라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기 시작했을 때 교회는 폭발적으로 성장하기 시작한다. 척 스미스 목사는 자신이 경험한 부흥을 다음과 같이 고백하고 있다.
6개월 후 우리는 50명으로 증가했다. 일년만에 우리는 10명이 되었다. 18개월만에 우리는 우리가 모이는 그 작은 교회가 너무 좁아서 다른 장소를 찾아보아야 했다. 우리는 새로운 예배당을 짓고 있는 그 지방의 루터교회를 사용할 수 있는 약속을 받았으나 그들의 건축계획이 지연되었다. 그래서 우리는 그 교회에서 주일 오후에 모임을 시작하면서 그 교회가 우리 것이 될 때까지 인내심으로 기다렸다. 우리는 2년을 기다렸지만 계속 성장하여 그 교회건물 역시 가득 차게 되었다. 그때 우리는 그 루터 교회로 이사할 수 있었지만 우리는 이미 그 교회건물이 수용할 수 없을 정도로 커져버렸다. 대신 우리는 우리만의 건물을 지었다. 그런데 2년도 안되어서 우리는 다시 가득 차게 되어 천막으로 옮길 수밖에 없었다. 우리들의 새로운 성소를 지을 동안 우리는 세 번이나 계획을 바꾸어야만 했다. 우리는 너무 빨리 성장하고 있었고, 건축가는 우리의 성장을 수용할 만큼 충분히 빨리 계획을 세울 수 없었다. 우리는 설계도가 그려지고 있는 동안 세배나 증가했다. 우리는 문을 열고 주일날 두 번의 오전예배를 드려야 했는데, 그 계획은 세배로 증가하기 전까지 겨우 2주동안만 지속되었을 뿐이다.
우리가 성장하고 예루살렘을 채우면서 우리는 유다로 뻗어나가기 시작했다. 내 아들 척 주니어, 그렉 로우리, 제프 존슨, 마이크 메킨토쉬, 라울 리스, 그리고 존 커슨은 캘리포니아 전역에 성경학교와 교회를 시작했다. 유다로부터 우리는 사마리아로 다른 효과적인 갈보리채플들을 확장하기 시작했다. 워싱턴, 오레곤, 플로리다, 캔자스, 뉴욕, 펜실베니아, 일리노이스, 뉴 멕시코, 그리고 워싱턴 D.C.로 확장해나갔다. 이제 우리는 영국, 헝가리, 유고슬라비아, 체코슬로바키아, 독일, 스위스, 일본, 싱가폴, 홍콩, 대만, 필리핀, 대만, 인도, 이집트, 우간다, 페루, 칠레, 산살바도르, 과테말라, 그리고 그 밖의 땅 끝 지역으로 가고 있다.
(3) 조직론
이렇게 교회론이 분명해지면 교회의 조직 및 정치구조에서도 반영될 것이다. 성경적인 교회론은 또한 성경적인 조직론으로 연결되어야만 한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목사가 가진 교회론과 목회철학과 전혀 상관없는 조직과 정치구조가 서로 조화를 이루지 못하기 때문에 좌절하고 있는 목회자가 얼마나 많은가? 이런 점에서 척 스미스 목사가 밝히는 갈보리채플의 조직론과 정치구조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자. 교회가 어떤 기관인지 이해했다면 그 다음으로 중요한 질문이 이것이다: 교회의 조직을 어떻게 인도해야 하는가? 우선 척 스미스 목사는 모든 목사들에게 교회를 너무 조직화하려고 노력하지 않도록 권면하고 있다.
만약 주님께서 지체하신다면(tarries) 우리가 이러한 폭발을 계속적으로 볼 수 있을까? 만일 우리가 단지 느슨해지고(hang loose) 성령으로 하여금 리드하게 하고, 성령이 움직이도록 내버려둔다면 가능할 것이다. 너무 조직화하려고 노력하지 않기를 바란다. 하나님이 그 일을 친히 하시도록 하라. 단지 사람들을 예수 그리스도와 서로에 대해 사랑의 관계로 이끌면서 그분의 말씀을 가르치라. 그리고 그들과의 교제를 경축하라.
갈보리채플의 독특한 정치형태에 대해서 래리 테일러는 다음과 같이 소개한다.
“갈보리채플은 많은 일반 교회들과 교회 정치의 형태를 달리한다. 대부분의 교파 교회들은 회중 중심 혹은 감독 정치로써 그들의 교회를 운영하고 있다. 서로 다른 교단의 교회들이 같은 정치 형태를 공유하고 잇는 경우도 있으므로 이 세 가지 형태들은 같은 이름을 가진 교파와 혼동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회중 정치 형태는 미국인이 창안한 것이며, 우리 미국인들의 민주주의 정서를 나타내고 있다. 기본적으로 이 교회들은 모든 회중이 투표를 통해서 중요한 일들과 일상적인 교회의 기능을 관리하기 위하여 서열을 따라 위원회를 구성하는 일들을 결정하는 것이다. 대다수의 회중 교회, 침례 교회, 오순절 교회, 형제 교회와 무교파 교회들이 이 형태로 조직되어 있다. 회중이 목사를 고용하거나 재정을 사용하거나 그 외의 중요한 다른 일들을 위하여 투표를 한다. 민주적인 사람들이 이 형태를 선호하긴 하지만 회중 형태의 교회 정치는 목사로 하여금 자주 양들에게 감독을 받게 하며, 그로 하여금 피동적이 되게 하고, 최악의 경우는 목사를 일개 고용인으로 전락시키는 주요 원인이 되게 하기도 한다. 반면, 감독파 교회나 성공회, 카톨릭, 정통파와 감리교 교회들에 의하여 사용되고 있는 교회 감독 정치 형태는 그 이름은 서로 다를 수도 있지만 하나의 교회 계급에 의하여 통제되는 정치 형태이다. 기본적으로 이 형태는 교회를 돌보며, 강단에서는 목사를 임명하고, 규칙을 정하며, 지역 교회 회중의 안목을 지도하는 감독, 혹은 이름은 다를지라도 유사한 위치의 어떤 사람이 있다. 유럽의 군주들로부터 유래된 이 정치 형태는 불행하게도 지역 교회의 목사들과 회중으로 하여금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갈 자유를 제한한다. 장로교회와 개혁주의 교회들의 전형인 장로 형태는 교회 정치의 결정들을 교회에 따라 여러 가지 다양한 방법으로 선출된 장로들의 모임(장로회, 당회)에 일임하는 것이다. 이 장로들은 도리어 회중 위에 있어야 할 목사들의 위에 있는 것이다. 여기에도 하나님께서 지도자로 세우신 목사로 하여금 그가 지도해 나가야 할 사람들의 밑으로 들어가게 하는 문제가 있다. (그러나) 갈보리채플은 달리 조직되었다. 갈보리채플의 교회 정치는 매우 단순해서, 복잡한 관료 제도가 아니며 위원회나 부위원회 등은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 기본적으로 갈보리채플에서 우리는 목사가 교회에 대하여 책임을 가지고 있으며,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양들을 먹이며, 하나님의 백성들을 신실히 사랑해야 할 책임이 있다고 믿는다. 큰 교회에서 목사가 회중의 영적인 필요를 돌보는 일을 돕기 위하여 장로가 임명되며, 또한 목사가 교회의 물질적인 면을 돌보는 것을 돕기 위하여 집사들이 임명된다. 덧붙여서 우리 교회들은 대부분 교회의 규모에 따라 다양한 크기와 형태의 운영회(board)를 가지고 있다. 이것은 보통 시설 관리 혹은 투자를 교회의 사업적 기능과 결정에 있어서 존경심으로써 목사에게 조언해 줄 수 있는 성숙한 크리스천 사업가들로 구성이 된다. 갈보리채플에서 교회 조직은 그리 강조되지 않으며, 오직 교회를 운영하는 데 필요한 조직만이 강조된다. 목사는 성령의 인도에 의해서 교회를 이끌어 가며, 우리는 하나님께서 목사들을 주께서 필요로 하시는 곳으로 인도해 가실 것을 믿는다.”(아름다운 목양의 샘터, pp.164~170)
척 스미스 목사는 이스라엘의 정치구조가 신정이었듯이, 영적 이스라엘로서 교회의 구조 역시 신정이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국가를 세우실 때 정부의 형태는 신정(theocracy)이었다. 즉, 다시 말해서 그들은 하나님에 의해서 다르심을 받는 백성이었다. 그들은 그들을 다스리는 왕이 있는 다른 나라들과는 달랐다. 그들은 하나님에 의해 통치를 받는다는 점에서 다른 나라들과 구별된 민족이어야 했다. 그러나 그들이 사무엘에게 와서 “우리는 당신이 다른 나라들과 같이 우리 위에 왕을 세워주기를 바란다”고 말했을 대 그들의 역사에 있어 참으로 슬픈 날이었다. 신정(theocracy)으로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세우셨으나 하나님은 그 나라에 모세라는 지도자를 세우셨다. 모세를 통해 하나님은 백성들을 인도하셨다. 모세는 그 백성을 인도하는 하나님의 도구로 인정되었다. 일이 모세에게 너무 힘들게 가중되어 책임이 커졌을 때 그는 이스라엘 중에서 각 지파를 대표하며 하나님의 성령을 받은 70명의 장로들을 모았다. 모세에게 임하신 분이 그들에게도 오셨다. 그리고 그들은 모세와 함께 통치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사람들이 어느 한 장로에게 문제를 해결해달라고 가져왔을 때 그가 해결할 수 없을 때가 있었다. 그럴 경우 그 문제는 모세에게로 가져오게 되었고 모세는 하나님께 가져갔고, 하나님은 그 문제에 대한 해답을 모세에게 주셨다. 이제 과정을 거꾸로 하여 모세는 그 해답을 그 장로들에게 주었고, 그들은 그것을 그 백성들에게 주었다. 또한 모세의 책임 아래는 아론이 있었고, 아론은 그 민족의 영적 측면을 총괄하는 레위지파로부터 제사장직을 책임지고 있었다. 장로들이 법적인 분쟁이나 사업적인 사안들을 다룰 때, 제사장들은 그 민족의 영적 측면을 살펴보고 있었다.
척 스미스 목사는 다음과 같은 그림으로 도식화하면서 이스라엘에게 주신 정부의 형태와 함께 갈보리채플이 교회를 위한 하나님의 정부로서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 그려주고 있다.
“우리는 이것이 그의 교회를 향해 하나님이 바라시는 정치 형태라고 생각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몸, 즉 교회의 머리가 되신다. 그는 episkopas와 bishop을 세우셨는데 우리는 그들을 ‘목사’(pastor)라고 부르며, 목사는 예수님과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직접적으로 인도하심을 받는 지역 교회의 사역과 인도에 책임을 지는 사람이다. 어떤 경우엔 목사 아래 부목사들이 있는데 그들은 모세의 통치 아래 있는 제사장들과 같다.”(-The Philosophy)
척 스미스 목사는 특히 ‘당회’('Board' 위원회로 번역될 수 있다-필자주)의 역할에 대해 매우 자세하게 가르치고 있다. 많은 교회가 시험에 들거나 혼란에 빠지는 이유는 목사와 당회의 역할에 대한 이해가 분명치 않기 때문이다. 척 스미스 목사는 당회의 역할에 대해 어떻게 가르치고 있는가?
또한 많은 장로들로 구성된 당회가 있다. 이 장로들의 모임은 교회의 예산이나 다양한 선교그룹과 사역단체로부터 온 후원요청을 검토하는 등 교회의 사업적 측면을 토론하고 결정한다.
당회는 언제나 기도로 시작한다. 투표할 상황이 생기게 되면 투표하기 전에 먼저 기도해야 한다. 주님이 무엇을 원하는지 물으며 주님의 뜻을 가르쳐달라고 간구해야 한다. 주님의 인도하심과 지도하심은 모든 문제들에 있어서 필요하다. 부목사들은 영적인 측면에서 전 교회의 다양한 측면, 이를테면, 고등학교, 청년, 결혼한 커플들, 특수한 형태의 이해그룹 등을 살펴본다. 만약 그들이 스스로 해결할 수 없을 정도의 문제들을 만났을 경우 그들은 담임목사에게 자문을 구해야 하며, 그들과 같이 담임목사는 주님으로부터 자문을 구해야 한다.
만일 누군가가 교회가 마땅히 해야 된다고 느끼는 어떤 사안에 대해 당회원에게 제기하게 된다면 정식 당회(board meeting)에 제출되어진다. 당회는 그것에 대해 토론할 것이며, 함께 그것에 대해 기도할 것이다. 그리고 가끔 당회는 다음과 같이 말하게 될 것이다. “척, 당신은 이 문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합니까?” 당회는 하나님께서 그 교회의 목사와 목자로 부르셨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다. 갈보리채플에서 목사는 결코 고용인(hireling)이 아니다. 많은 교회가 목사를 고용하고 있다. 목사는 위원회에 의해서 고용되며, 그 당회에 의해서 해고당할 수도 있다. 그는 고용인이 되었기 때문에 전적으로 교회를 다스리는 당회의 뜻에 항상 따라야 할 책임이 있다. 그러나 당회에 모인 이들은 종종 사업가들이며, 교회 내에서 영적인 사람들이 아니다. 그런 경우에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다스림을 받기보다는 사람에 의해 다스림을 받게 된다.
하지만 모든 사람의 종이 되는 자가 으뜸이 된다고 말씀하신 주님께 불순종하는 몇몇 목사들이 있기 때문에 신정형태에 위험이 있기도 하다. 간혹 목사들 중에는 권력을 남용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교회의 재정에 대해 당회에 투명하게 설명하지 않는다. 그들은 교회의 역할에 관련된 중요한 결정을 내림에 있어서 당회의 충고와 자문을 구하지도 않는다. 그들은 원맨쇼를 시도한다.
어떤 문제들이 우리 당회에 제기될 때 당회는 그 특별한 문제에 대해 어떻게 느끼는지 물어볼 것이다. 왜냐면 그들은 하나님이 이 교회에서 사역하기 위해 나를 부르셨다는 사실을 존중하고 있으며 나를 하나님의 도구로 사용하신다는 사실을 믿기 때문이다. 그러나 많은 경우에 있어서 나는 의견을 제시하지 않는다. 나는 이렇게 말한다. “친애하는 여러분, 나는 정말 의견이 없습니다. 함께 기도하고 주님의 뜻을 찾아봅시다.” 그리고 나는 그들로 하여금 앞으로 나아가 전혀 나로부터 어떤 영향을 받지 않고 결정을 내리게 한다. 때론 매우 강한 느낌을 가지고 그들에게 다음과 같이 표현할 때가 있다. “나는 이것이야말로 주님께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이라고 느낍니다. 나는 이것에 대해 기도해왔으며, 나는 이것이 하나님이 우리가 행하기를 원하는 바라고 정말 느낍니다.” 이들은 내 삶 속에 임한 하나님의 기름 부으심을 인정하기 때문에 투표결과는 그런 방향으로 가게 될 것이다. 나는 그들에 대한 영향력을 장악하려고 하지 않는다. 나는 원맨쇼를 시도하지 않으려고 한다. 우리는 제기되는 사안에 대해 자유롭게 토론하며 그들은 주께서 내 삶 속에 두신 지도력과 은사를 존중하고 있다. 하지만 의심할 바 없이 주님께서 교회의 머리가 되신다. 나는 단지 그분의 명령을 수행하는 사환(servant)일 뿐이다.
척 스미스 목사는 특히 당회의 조직을 신중하게 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교회에 당회가 있는 것이 중요하지만 당회를 너무 빨리 조직하지 않는 것도 중요하다. 새로운 사역을 시작함에 있어서 성경은 아무에게나 갑자기 안수하지 않을 것을 말하고 있다. 먼저 그 사람을 잘 알아야 한다. 새로운 당회 멤버를 찾을 때마다 나는 항상 토요일 밤 기도회에서 수년동안 나와 함께 기도했던 사람들을 찾는다. 나는 그들을 신뢰할 수 있다. 나는 그들이 기도의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가 하나님의 자문과 인도하심을 구하는 것처럼 그들도 역시 하나님의 자문과 인도하심을 간구할 것이다. 그들은 토요일 밤 기도회에 신실하게 나와 함께 한 자들이다.
척 스미스 목사는 이것의 중요성을 실례를 들어 설명하고 있다.
우리 교회에서 한국인 모임을 담당하고 있는 사역자가 있었는데 그의 직업은 의사였다. 그는 한국인들에 대한 사역에 대해 어떤 사례도 받지 않았다. 그는 의사로서 자기 생계를 꾸려가고 있었다. 그런데 한국인 모임이 점점 커지게 되자 한국인들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는 정말 한국인 모임을 위해 임명된 당회를 가지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그 사람은 당회 멤버들을 임명한 다음 내가 그 예배에 참석해서 그가 선택한 당회 위원들에게 안수해주기를 요청했다. 나는 그렇게 했다. 우리가 그들에게 안수하여 그들을 위해 기도하고 그들을 당회 멤버로 임명한 바로 그 주에 그들은 모임을 가졌고, 자신들을 이끌어 온 목사로 하여금 사임할 것을 요구했다. 그들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당신의 의사직을 포기하든지 아니면 목사직을 사임하시오. 우리는 전임 목사를 원하고 있으며 당신의 의사직은 당신이 이곳에서 사역하기에 적합하지 않소.” 그 사람은 고민에 빠졌다.(davastated), 그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그 일에 대해 내가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물어 왔다. 나는 대답했다. “그 당회를 해산하시오. 하나님은 당신을 그 모임의 목사로 부르셨지, 그 당회가 그 모임의 목사로 당신을 부르지 않았습니다. 그들을 내 보내십시오.” 그래서 우리는 먼저 일주일 동안을 근신시키고(ordained), 다음주 당회를 해산시키고 말았다. 만일 정말 서로 함께 기도하지 않고 당신과 함께 당회(위원회)를 섬길 사람들을 정말로 잘 알지 못할 때 당신이 만날 수 있는 문제들 중 하나일 뿐이다.
다른 한편으로, 척 스미스 목사는 당회의 역할은 담임목사를 보호하기 위해 존재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다시 말해서 모든 사람이 환영하지 않지만 이루어져야 할 결정들, 즉 만약 목사가 스스로 그러한 결정을 내릴 때 교회 전체에 분열을 야기할 수 있는 그런 결정들이 있기 때문에 당회는 필요한 것이다. 담임목사를 보호해주기 위한 목적으로 의존적인 사람들로 구성된 당회(위원회)가 필요할 수가 있다. 당회의 존재를 불필요하거나 혹은 무시할 경우 목사와 교인들 간에 큰 괴리감이 생길 수가 있다는 것을 다음의 실례를 들어 설명하고 있다.
수 년 전 나는 아리조나의 턱슨에서 목회하고 있었는데 그곳에서는 매년 7월 4일 레먼 산에 연례 야유회를 가졌었다. 그곳에는 아름다운 공원이 있었다. 거기에는 야구장과 축구장 같은 시설이 있었다. 우리는 언제나 거기 가서 경기를 하고 즐거운 시간(potluck)을 가지곤 했다. 그것은 정말 굉장한 친목을 도모할 수 있는 기회였다. 그런데 우리 가운데는 아주 영적인 타입의 신자가 많은 무리들을 데리고 우리 교회에 오게 된 경우가 있었다. 그는 레먼 산에 한 에이커에 해당하는 땅을 가지고 있었고, 그는 자기 땅에서 교회 야유회를 가지는 것이 좋겠다고 느꼈다. 그러나 그의 땅에는 화장실이나 수돗물과 같은 시설이 없었으나 그가 자기 땅에서 야유회를 가지자고 제안했고, 우리는 하루종일 그 문제 때문에 기도했다. 야구놀이와 같은 사소한 것들을 하는 대신 온 종일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하나님을 기다리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 이 사람은 몇몇 사람들에게 7월 4일로 결정될 것이라고 말해두었다. 우리는 모두 그의 땅으로 가서 기도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말하기를, “만일 당신이 그의 땅으로 간다면 우리는 가지 않겠습니다. 우리는 물도 나오지 않는 그런 곳에 우리 자녀들을 데리고 가지 않을 겁니다. 만약 그곳으로 간다면 우리는 가지 않을 겁니다.” 이에 대해 그 ‘초-영적인’ 그룹은 대답하기를, “만일 당신이 그 공원으로 간다면 우리는 가지 않겠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자녀들이 그 공원의 향락시설(riff-raff)에 노출되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들이 내게 와서 말하기를, “좋아요, 척,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건 정말 난처한 상황(catch-22)이 아닐 수 없었다. 어떤 쪽을 선택하든지 나는 다른 그룹을 적으로 만들 수밖에 없었다.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글쎄요. 이 문제에 대해 기도합시다. 그리고 당회에서 어디로 가야할 지 결정할 것입니다.”
우리는 당회를 소집했다. 그리고 위원들은 한결같이 이렇게 말했다. “시설이 없는 곳에 가는 것은 어리석은 것입니다. 우리는 화장실이 없는 곳에서 150명이나 되는 교인들을 데리고 갈 수 없습니다. 우리는 공원으로 갈 것입니다.” 그때 당회는 교회가 공원으로 가기로 결정했다. 나는 그것이 현명한 결정이었다고 생각하지만 당회가 그것을 기술적으로 결정했다. 당회가 공원으로 가기로 결정했다는 것을 내가 선포했을 때, 이들 초-영적인 유형의 사람들이 엄청나게 화가 난 상태로 내게 전화를 걸었다. 나는 그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여러분들도 아시다시피, 하루종일 기도를 가지게 된 것이 굉장하지 않나요? 우리는 다시 언젠가 그 계획을 의존해야 합니다. 그러나 당회가 그렇게 결정했습니다.” 나는 아직도 그들을 섬길 수 있었다. 그들은 내게 반항적이지 않았다.(polarize) 그들은 당회에 반항적이었다. 그래서, 당회가 목사를 보호하기 위해 있는 것이다. 그래서 매우 어려운 결정이 내려지고 언제나 모든 사람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을 때 목사와 교인들 사이에 완충역할을 하는 것이다. 위원회는 회중으로부터 목사가 단절되지 않도록 지켜줄 수 있으며, 계속 그들을 목회 할 수 있도록 도와줄 수 있다. 그것은 모든 교회에 아주 중요한 기능이라고 믿는다.
결론적으로 척 스미스 목사의 교회론과 목회철학 그리고 교회의 역할과 기능에 대한 갈보리채플의 철학은 에베소서 4:9-13에 그 근거를 두고 있다. 교회는 성도들을 세우고 온전하게 하기 위해, 성도들이 하나님의 사역에 임할 수 있도록 성숙해지도록 인도하는 것이다. 척 스미스 목사는 자신이 아니라 자신이 섬기는 교회 전체가 건강하고 성숙한 교회론과 목회철학을 가지고 있고 또 공감하고 있다고 당당하게 말하고 있다.
나는 갈보리채플은 교회가 무엇이냐에 대해 성경적이고 균형 잡힌 관점으로 이해하고 있다고 믿는다. 교회는 하나님의 성령의 인도하심과 지도하심에 전적으로 의존하면서 오직 하나님 한 분만을 통해 구원의 희망이 주어지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된 소식이 있다는 사실을 신실하게 선포하는 것이다.
(4) 성령론
교회를 섬기라고 부름 받은 사람은 언제나 자신을 부르신 하나님의 소망을 정확히 알며(소명론), 또한 섬기라고 부르신 교회가 어떤 곳이며(교회론), 그분께서는 몸 된 교회가 어떤 모습을 갖게 되기를 바라시는 지(조직론) 분명히 알아야 한다. 그러나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의 모습으로 움직여 가시는 성령에 대해서 또한 잘 알지 않으면 안 된다. 여기에서 성령론이 또한 정립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고 하겠다. 척 스미스 목사의 목회철학에 있어서 결코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 바로 성령론이다. 그의 성령론은 철저히 성경의 권위에 입각하고 있으며 목회원리의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왜냐면 교회는 성령의 전이며, 성령의 능력이 없이는 결코 교회가 교회다울 수 없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갈보리 채플의 성령론의 특징은 오순절 계통에 있으면서도 철저히 성경의 권위에 의존하고 있다는 것이다. 신비한 체험이나 방언을 비롯한 각종 은사들을 인정하지만 최종적 권위인 성경 아래 있어야 함을 강조한다. 그래서 갈보리 채플은 오순절주의자와 근본주의자들 사이에 균형을 잡으려고 노력한다. 오순절주의자들은 체험을 강조하지만 성경의 권위 아래 자신들의 체험을 두려고 하지 않는다. 반면, 근본주의자들은 성경을 강조하지만 성령의 역동적인 은사와 임재를 인정하지 않으려고 한다. 갈보리 채플의 성령론에 있어서 특이한 점은 이러한 균형을 잡는 것과 함께 건전한 은사와 잘못된 은사주의를 구별하는 데 있다. 척 스미스 목사는 ‘성령의 은사’(charisma)와 ‘광신적 은사 추구’(charismania)를 구분하고 있다.
“카리스마는 성령께서 어떤 사람의 삶에 은혜롭고도 자연스럽게 임하셔서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이것은 성령으로 말미암는 특별하고도 역동적인 힘으로서, 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영광과 사랑을 발산하는 것처럼 보이게 한다. 반면, ‘카리스매니아’란 성령의 은사를 흉내내기 위해서 육으로 하는 노력이다. 이것은 육, 즉 이기적인 옛 성품이 갖는 힘과 능력으로 일을 하려고 하는 모든 노력을 일컫는 말이다. 다시 말해 성령의 영감을 땀으로 대체시킨 영적인 속임수인 것이다.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 대신에 인간의 두뇌, 힘 그리고 전략들을 이용하는 것이다. 이 현상은 아주 다양한 형태로 나타날 수 있는데, 이를테면 계획과 전략을 세우는 당회, 교회 성장을 위해 고안된 프로그램들, 교회 재정을 위해 다양한 방법으로 기금을 조성하는 일, 혹은 주일 예배를 방해하며 무질서하게 튀어나오는 방언들이 그런 것들이다. 온전한 성경적 기초를 결여하고 인간의 전략이나 능력을 앞세우고 교회 안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는 성령을 의지하지 않는 일이라면, 무엇이건 육에 속한 일에 지나지 않는다.”(진짜 성령의 은사, 가짜 성령의 은사, p.14.)
갈보리 채플의 성령론의 특징은 체험이나 은사를 인정하되 철저히 성경의 권위에 복종해야 하며, 성경이 무엇을 말하는지 성경을 연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성경의 권위에 복종하지 않으려 할 때 교회는 분열의 위험에 빠질 것이며, 체험이나 은사를 인정하지 않고 성경의 교리만을 추구할 때 생명력 없는 죽음의 위험에 처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갈보리 채플은 철저히 성경이 말하는 성령과 은사에 대해 항상 열려 있다. 기본적으로 갈보리 채플의 성령론은 복음주의 노선을 걷고 있다. 삼위 하나님을 믿으며, 성령의 신성과 인격성을 믿는다. 성령은 창조사역에 능동적인 역할을 하셨고, 생명을 주고 유지하시는 일을 하신다. 또한 성령으로 감동된 성경이 곧 하나님의 말씀임을 믿고 고백한다. 성부 성자 성령은 서로 분리하여 생각할 수 없으며 우리는 항상 성령을 통해 살아 계신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다. 즉, 하나님과 교제를 나누기 원한다면 성령을 인정해야 하며 의지해야 한다. 성령의 도우심이 없다면 진정한 의미의 섬김의 열매를 맺을 수 없다. 성령은 그리스도인들을 돕기 위해 보내겠다고 약속된 진리의 영, 그리스도의 영이시다. 이에 대해 척 스미스 목사는 자신이 성령을 의지하고 있음을 다음과 같이 고백한다.
“나는 아직까지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이 쉽다는 것을 발견하지 못했다. 나는 나의 육신이 항상 나와 대적하고 있음을 안다. 베드로에게서처럼 나도 또한 마음은 원리로되 육신이 연약한 모습을 내 자신에게서 자주 발견해 왔다. 바울이 갈라디아서 5장에서 영과 육 사이에 있는 싸움에 관해서 말한 그 의미가 무엇인지 나는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만일 하나님께서 나를 도우신다면 나는 기꺼이 무슨 일에나 대처할 수 있다. 정말이지 나느느 내가 얻을 수 있는 모든 도움을 필요로 한다. 나는 하나님께서 내게 주시길 원하는 것, 혹은 그분이 내 삶을 통해 행하시려는 것을 결코 제한하고 싶지 않다. 나는 광야에서의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하나님을 제한하는 죄를 범하고 싶지 않다. 또한 나는 체험을 위한 체험도 원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서 나는 성령이 하시는 참된 사역만을 원한다. 그것이 내가 원하는 전부이다.”([진짜 성령의 은사, 가짜 성령의 은사], pp.51,52)
성령은 하나님에 관한 것들, 그리고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은혜로이 행하신 일들을 깨닫는 일을 하신다. 따라서 성령을 의지하지 않고 대신 자신의 힘과 두뇌로 하나님의 백성다운 삶을 살려고 하는 것은 실패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성령은 그리스도인을 그리스도의 충성스러운 증인이 되도록 돕는 분이시다. 그러므로 갈보리 채플은 항상 자신을 포기하고 하나님께 전적으로 자신을 맡겨서 그분에게서 오는 역동적인 능력을 항상 의지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자신의 능력과 힘으로 하나님의 일을 하려고 하는 것을 포기하고 하나님께 전적으로 굴복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그 결과 척 스미스 목사는 항상 이렇게 고백하곤 한다.
“그렇게 했을 때 일어나는 일에 대해 나는 도저히 침묵하고 있을 수 없다. 즉, 내가 얼마나 멋진 사람이 되었으며 주님을 위해 얼마나 훌륭한 증인이 되었는지, 그리고 어려운 상황을 내가 얼마나 기막힌 방법으로 대처해 나갔는지 자랑하지 않을 수 없다. 이제 내가 하는 모든 자랑은 성령을 통한 하나님의 사역에 대한 것이다. 나는 여전히 곤고한 사람이지만, 성령의 권능을 통하여 나의 곤고함을 이겨낼 수 있었음에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나를 압박하는 상황에 처해 있을 때, 사방에서 여러 일들이 밀어닥칠 때 나는 그 압박감이 더 이상 내게 엄습해 오지 못하는 데 대해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문제에 말려들기보다는 마치 내가 그 상황 밖에 앉아서 성령께서 어떻게 일하시는지 지켜보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그럴 때 나는 ‘하나님 감사합니다. 제가 일하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나서는 것은 하나님의 방법이 아닙니다’라고 고백하게 된다”(진짜 성령의 은사, 가짜 성령의 은사, pp.75,76)
그러면, 성령께서 역사하시는 방법은 무엇인가? 척 스미스 목사는 성령의 방법은 우리가 내적으로 변화되도록 하시는 것이라고 가르친다. 사람은 외부에 변화를 일으키려고 애쓰지만 성령은 정반대로 일하신다. 성령은 내부로부터 변화를 일으키신다. 그럴 때에야 비로소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신다고 가르친다.(위의 책, p.78) 내 능력은 그 변화에서 제외되었기 때문에 결코 자랑할 수 없다는 것이다. 순간마다 성령의 능력을 경험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연약함을 인정하고 자신의 힘으로 모든 일을 하려는 것을 포기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우리 자신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결코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위의 책, p.81)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성령의 능력을 통해 우리가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가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 이에 대해서 척 스미스 목사는 여타 오순절 주의자들과 달리 복음적인 관점에서 대답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내 생애를 통해 이루시고자 하는 이상을 내가 이룰 방법은 없다. 그래서 그 사실을 아시는 하나님께서는 나를 위해 대책을 마련하셨다. 내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이상을 실현할 수 없음을 아시고 하나님은 나의 모든 잘못과 죄악 그리고 단점들을 대신하고 그런 것들에 대한 책임을 지고 내 대신 죽게 하기 위해 독생자를 보내셨다. 내가 그분의 이상을 실현할 수 없다는 것을 아시고 한 가지 대책을 마련하신 것이다. 따라서 이제 하나님께서 내게 요구하시는 것은 단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다. 이제 나는 할 수 있다! 비록 내가 하나님께서 이상적으로 내게 원하시는 바대로 온전할 수는 없을지라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수는 있다. 그런데 바로 그것이 하나님께서 실제로 내게 원하시는 것이다.”(진짜 성령의 은사, 가짜 성령의 은사, p.83)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실제적으로 성령의 능력을 의지하는 것인데 구체적으로 내 힘으로 하나님의 원하시는 것을 이루려는 것을 포기하고, 자신의 무능함과 연약함을 인정해야 한다. 그리고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인 태도를 버리고, 정직하게 주님의 영광을 바라보아야 한다는 것이다.(위의 책, p.90) 복음과 성령으로 내 마음의 태도와 자세가 변화되도록 하는 데까지 이르러야 한다. 척 스미스 목사는 그것은 오직 말씀 속에서 주님을 바라볼 수 있고, 성령께서는 그 말씀이 우리 심령 속에서 살아 역사하도록 해주신다고 가르친다.(위의 책, p.92) 주님을 바라보는 것은 계속 되어야 하고, 계속 말씀 속에서 주 예수를 바라보면 볼수록 내면의 변화는 계속 진행된다고 가르친다.(p.96) 그래서 척 스미스 목사는 실제적으로 그리스도인들이 주님의 영광스러운 얼굴을 바라보기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오래 믿어도 성장하지 못하는 주된 원인이라고 강조한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하나님의 말씀을 진지하게 연구하면서, 말씀이 우리 속에 들어오도록 해야 하며, 성령이 주님에 관한 것들을 가르칠 수 있도록 허락해야 하며 성경 속에서 예수님의 영광을 바라보아야 한다고 가르친다.(위의 책, p.98) 성령을 받았다고 하면서 성경을 읽지 않거나 연구하지 않는다면 그는 한참 잘못된 것이다. 왜냐면 성령은 우리가 하나님께 관한 것을 깨닫게 하시기 때문에 성령의 인도를 받는 사람에게는 성경은 전혀 새로운 책으로 다가오는 것이다.(위의 책, p.105) 그리스도께 나아가서 자신의 삶을 그분께 완전히 맡긴 후에 우리가 특별히 말씀을 읽기 시작하면서 말씀이 살아 움직이기 시작하는데 하나님의 성령이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 마음에 가득 채우시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고 가르친다.(위의 책, p.105) 성령론에 관한 척 스미스 목사의 가르침에서 가장 주목할만한 점은 사랑에 대한 강조이다. 성령의 사역은 확신을 주시는 것과 함께 그리스도의 완전한 사랑을 부어주시는 것이다.(위의 책, p.118) 척 스미스 목사의 성령론에서 가장 중요한 가르침이 성령의 열매로서의 사랑에 대한 것이다. 이러한 관점은 진정한 성령의 은사와 거짓된 은사주의를 구별시켜주는 중요한 기준이 되고 있다. 이런 점에서 척 스미스 목사는 그리스도인의 충만한 경험에 대해 어떤 용어를 쓰는가는 중요하지 않다고 말한다.
“이 말씀이 단지 회심할 때 신자의 삶 속에 성령이 내주하시는 것뿐만 아니라 그 이상의 것을 묘샇는 것임을 의심없이 받아들려야 한다. 성령이 당신 삶 속에 거하시게 하는 것과 그 영광스럽고 역동적인 하나님의 영의 능력이 생수의 강처럼 당신의 삶에서 솟아나게 하는 것은 별개이다. 하나님께서는 단지 성령이 당신 속에 내주하는 것보다는 당신과 좀더 완전한 관계를 맺기 원하신다. 그 성령이 삶에서 생수의 강처럼 솟아나는 일이야말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다. 당신이 그것을 뭐라고 부르든 그것은 별로 중요치 않다. 어떤 사람은 그것을 ‘성령세례’라고 부르고, 또 어떤 이들을 ‘성령충만’이라고도 한다. ‘성령을 통해 능력 입는 것’이라고 말하는 이들도 있다. 당신이 그것을 무엇으로 부르든 상관없다. 중요한 것은 바로 당신이 삶에서부터 성령의 능력이 철철 넘쳐흐르는 영광을 누리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위의 책, pp.182,183)
그러면, 방언이나 기타 다른 은사에 대한 갈보리 채플의 관점은 무엇인가? 갈보리 채플은 방언을 무조건 악한 것으로 규정하거나, 혹은 방언을 하지 못하면 성령 충만하지 않거나 성령 세례를 받지 못한 것으로 간주하는 사람들의 중도에 서 있다. 척 스미스 목사는 고린도전서 13장 1절을 근거로 방언 그 자체가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성령이 역사한 여부를 판단하는 최종 근거가 아니라고 주장한다.(위의 책, p.187) 대신 척 스미스 목사는 갈라디아서 5장 22절을 근거로, 방언이 아니라 아가페 사랑이 신자의 삶 속에 성령이 충만하다는 참된 증거라고 주장한다. 사랑이 없는 방언은 의미 없는 소리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갈보리 채플은 방언을 인정하고 있는데, 개인의 덕을 세우는 것과 찬양과 기도에 있어서 유익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위의 책, pp.189-192) 그러나 방언은 철저히 개인적으로 해야 하며 공예배에서는 허락될 수 없다고 가르친다. 개인기도에서만 행해야 한다는 것이다. 방언이 남용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철저히 성경의 권위 아래 통제되어야 한다고 강조한다.(위의 책, pp.195,196) 척 스미스 목사는 고린도전서 14장 2절을 근거로 방언은 하나님께 하는 것이며, 사람에게 말씀을 선포하는 것이 아니라고 분명히 가르친다.(위의 책, p.198) 방언은 우리가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것이며 교회에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위의 책, p.198) 갈보리 채플은 방언이 종결되었다는 일부 주장을 일축한다. 방언이 종결되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고린도전서 13장 8절을 가지고 그렇게 주장한다. 그런데 문맥은 방언도 그칠 뿐만 아니라 예언도 지식도 폐한다고 했기 때문에 만약 방언이 종결되었다면 말씀으로 교회에 덕을 세우는 사역이나 지식도 함께 종결되었다고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본문에서 말하는 ‘온전한 것’이 정경의 완성으로 이해된 적이 없었다. ‘온전한 것은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심으로써 이루어질 모든 만물의 온전한 상태를 가리킨다.(위의 책, p.207,208) 요컨데 갈보리 채플의 성령론은 성령의 역동적인 임재와 능력을 항상 강조하고 의지하면서 여전히 방언이 유효하다고 인정하지만 사랑의 중요성과 성경의 권위에 항상 중점을 둔다는 데에 그 특징이 있다고 하겠다.
그러면, 성령의 능력과 은사를 추구하려는 몸부림이 왜 광신적으로 되는가? 이에 대해 척 스미스 목사는 성경의 권위와 가르침을 의존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분명히 말한다.(위의 책, p.215) 즉, 하나님의 말씀보다는 체험을 더 중시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 결과 은사주의는 비성경적인 교훈들이 우후죽순처럼 자라날 수 있는 토양을 제공하게 된다고 가르친다.(위의 책, p.215) 갈보리 채플의 특징은 체험에 대해 열려 있지만 그러나 체험보다는 말씀이다. 성경이 그리스도인들의 신앙과 삶에 궁극적인 권위가 되어야 한다고 강조한다.(위의 책, p.215) 그렇지 않으면 혼란만 야기할 뿐이라고 경고한다.
“당신이 어떤 교리가 진리인지 아닌지를 체험으로 알아볼 시도를 하기 시작하면, 그것은 판도라의 상자를 여는 것과 같다. 그 결과 상충되는 여러 체험들 속에서 진리는 모습을 감추고 혼란에 빠지고 만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혼란의 하나님이 아니시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지 않은가?”(위의 책, p.216)
척 스미스 목사는 ‘넘어지는 체험’에 대해 부정적이다. 또한 신자들끼리 귀신을 내어쫓는 일에 대해서도 부정적이다. 성경의 가르침이 아니라 귀신들의 말을 근거로 해서 그런 일을 정당화시키는 자신들의 교리를 세우는 위험성에 대해 엄중히 경고한다. 귀신들이 불신자들의 몸을 사로잡을 수는 있어도,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을 그렇게 할 수는 없다고 성경은 분명히 가르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가 욕심이나 미움이나 시기와 같은 육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귀신을 내어쫓는 방법을 사용하는 것은 부당하다는 것이다.(위의 책, p.221.) 또한 척 스미스 목사는 성경의 기록된 말씀보다 성령의 직접 계시를 주장하는 사람들에 대해 부정적이다. 성경을 정직하게 가르치는 사역보다 더 우선된 사역은 없다.(위의 책, p.221.) 또한, 말씀을 가르치는 것보다는 감정의 흥분에 따라 성령의 기름부음을 판단하려는 것에 대해서도 부정적이다. 성령이 너무나 강력하게 역사하셔서 설교자가 말씀을 전할 기회조차 없었다고 말하는 것에 대해 부정적이다.(위의 책, p.222) 또한 예배시에 감정에 호소하는 것에 대해 부정적이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이 중요하다. 비성경적인 것을 허용해서는 안 된다. 척 스미스 목사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인간의 신앙 체험 가운데 상당 부분은 영적이라기보다는 감정적일 때가 많다. 전형적인 교회 예배 가운데는 인간의 감정적 속석에 호소하는 면이 많다. 하려한 성의, 성가대 찬양, 촛불과 향, 이 모든 것들을 볼 때 마음이 절로 숙연해진다. 한편, 감정을 억제하지 않고 다 드러내며 소리치고 박수치고, 몸을 흔들어 대는 것을 볼 때 마음이 몹시 흥분된다. 그러나 이 두 가지 중 그 어떤 것도 나의 영혼을 감화 감동시킬 수 없다. 인간 영혼의 필요를 채워주고 인간 영혼을 살찌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따라서 만일 목회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함께 나누는 기회를 제공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마땅히 그 예배에서 인간의 감정이 역사하고 있는지 아니면 하나님의 성령이 역사하고 있는지 의심해보아야 한다.”(위의 책, p.223)
척 스미스 목사는 무엇보다 육신을 높이는 일에 경고하고 있다.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않고, 영적인 삶을 사는데 가장 큰 장애물이 육신이다. 육신은 늘 남들로부터 존경을 바고 주목을 받기를 원한다. 그래서 예배시에 많은 사람들의 주목을 끌기 위해서 하는 모든 행동과 말들에 대해 부정적이다. 왜냐면 그렇게 함으로써 하나님께 진정으로 경배드리는 사람들의 주의를 산만하게 하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사람 앞에서 의를 행하지 않도록 조심하라고 가르치셨다. 사람들의 주목을 끌면서 점점 그리스도에게서 멀어지는 것이다.(위의 책, p.225) 그래서 헌금을 드릴 때도 육신에게 영광을 돌리는 방식으로 하는 것에 대해 부정적이다. 특히 척 스미스 목사는 헌금을 강요하는 목사나 부흥사에 대해 분노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들이 얼마의 헌금을 하게 될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사람들을 속이는 것이다.(위의 책, p.226) 하나님의 일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억지로 모금하기 위해 사용하는 방법에 대해 역겹다고 말한다.(위의 책, p.227) 척 스미스 목사는 거짓 선지자들의 특징은 사람들에게서 이익을 얻기 위해 말을 하는 것이라고 가르친다. 사실 하나님의 응답이니, 하나님의 은혜니 라고 말은 하면서 자기들의 욕망을 채우기 위한 음녀의 수작에 불과하다.(잠7:14) 복을 받기 위해 험금하라고 하면서 정작 자신은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이 거짓 선지자들의 모습이다. 기도응답을 받기 위해, 혹은 하나님의 복을 받기 위해 헌금해야 한다는 말은 결국 하나님의 은혜를 돈으로 사려는 수작에 불과하다는 것이다.(위의 책, p.228) 헌금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일이 파산할 것이라고 위협하는 것이 거짓 선지자의 수작이다. 그런 점에서 척 스미스 목사는 적극적 사고방식에 대한 가르침과 ‘축복의 교훈’에 대해 부정적이다. 하나님은 병든 것을 원하지 않기 때문에 모든 질병은 믿음이 없거나 부족한 증거라고 가르치는 것에 부정적이다. 또한 축복을 과시하기 위해 하려한 옷을 입고 사치스런 자동차를 몰고 다니며 엄청난 규모의 대저택에서 사는 것을 자신이 믿음이 있음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가르치는 사람들에 대해서 부정적이다.(위의 책, p.230) 가난한 과부의 헌금을 모아서 자가용 제트기를 몰고 다니며 사치스런 콘도를 다니며, 호화스러운 식당에서 식사를 하는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 앞에 얼굴을 들고 설 수 있겠는가 라고 척 스미스 목사는 반문한다.(위의 책, p.231) 척 스미스 목사는 디몯를 향한 바울의 가르침을 통해 경건을 물질 축복의 한 수단으로 생각하는 그런 사람들을 멀리 하라고 가르친다.
요컨데, 갈보리 채플의 성령론의 특징은 성령의 초자연적인 은사들을 인정하고 있으며 성경의 권위와 성령의 열매인 사랑을 변함없이 강조하고 있으며, 항상 성령의 능력을 사모하며 삶 속에서 믿음으로 그것을 항상 구할 것을 강조하고 있다. 성령의 은사와 능력은 하나님께서 이미 이루어놓으셨기 때문에 언제나 믿음으로 그것을 구해야 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성령의 능력을 통해 열매 맺는 삶을 사는 것이다.
3. 척 스미스의 목회의 방향과 방법
우리는 척 스미스의 목회에 영향을 준 성경구절을 살핀 후, 그가 가지고 사역했던 목회철학의 특징을 다섯 가지 범주로써 나누어 살펴보려고 할 것이다. 그리고 그가 제시하는 10가지 부흥의 원리를 소개할 것이다.
(1) 척 스미스 목사의 목회에 초석을 놓은 3가지 성경구절
1)슥4:6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신으로 되느니라.”
척 스미스 목사는 성경을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 전체적으로 또 순서적으로 가르치지만 그의 사역의 본질은 성령의 역동적인 역사를 의지하고 기대하는 믿음이다. 이 믿음은 교회가 성령의 전이라는 확신에 근거하고 있다. 사실상 갈보리채플 운동은 본질적으로 성령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 목사의 주된 임무는 교회의 모든 사역에 있어서 성령의 능력을 의지하는 일이다. 갈보리채플의 모든 목회자들은 이 일에 실패하게 되면 교회는 행사와 프로그램 위주로 움직이는 생명력 없는 기계처럼 전락하게 될 것이라고 경고한다.
여러 가지 사역과 행사와 프로그램에 의존하는 것은 교회를 하나님의 것으로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목회자 개인의 것으로 인정하는 태도라는 것이다. 목회자의 의무는 매일의 사역을 위해 주님의 뜻과 인도하심을 간구하고 자신의 무능력을 고백하며 결코 자신의 능력을 의지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성령의 능력을 의존하는 것 외에 다른 무슨 행사나 프로그램 등 모든 방법론에 의존하는 경향을 완전히 무시하는 것이 갈보리채플의 방법이다. 방법을 구하기보다는 성령의 직접적인 인도를 구하며, 매 순간마다 기도하면서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자 하며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의지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교회이므로 하나님이 자신의 일을 하시도록 그냥 내버려두라는 것이다. 목회자는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그냥 구경하면서 휴식을 취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기 때문에 목회의 성공이나 열매에 대해서 목회자는 영광을 하나님께 돌려야 하며 자기가 그 영광을 가로채서는 안 되는 것이다. 목회자는 다만 성령의 인도하심에 민감하게 반응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그리고 매 순간마다 자신을 죽이고 자신의 지혜를 버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기다리며 성령의 인도하심을 의지하기만 하면 나머지 일은 하나님이 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의 일은 사람이 노력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하실 때 가장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이 하시도록 내어 맡기는 일이 목회자가 해야 하는 일의 전부이다. 척 스미스 목사는 이러한 사역의 중요한 원리를 발견했고 이를 사역 속에 실천하기로 했을 뿐이다.
2)행2:47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갈보리채플이 지향하는 교회상은 본질적으로 사도적 교회상이다. 즉, 사도행전에 나타난 오순절 직후 성령으로 충만한 예루살렘 교회의 모습이야말로 오고 오는 모든 세대의 모든 교회가 지향해야 할 참 교회의 모습이라는 것이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다. 건강한 몸은 균형을 이룬 몸이다. 균형을 상실한 교회가 건강하다고 말할 수 없다. 초대교회는 본질적으로 사도의 가르침, 기도, 교제가 균형을 이루었다. 또한 교회는 성령의 전이다. 초대교회는 언제나 성령의 강력한 역사가 함께 하는 권위 있는 가르침이 있었다. 그래서 척 스미스 목사는 사도행전의 교회상을 현대 교회가 추구해야 할 모습이라고 주장하면서 균형의 도, 중용의 도를 강조하고 있다. 그것은 성령의 권위와 말씀의 권위에 대한 균형을 통해 그리스도의 몸을 세워나가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다. 그래서 성령의 전으로서의 교회가 갈보리채플이 지향하는 교회의 모습이다. 이런 점에서 최근 유행하는 셀 교회 운동 역시 사도성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비슷하지만 갈보리채플은 성령의 권위 못지 않게 말씀의 권위를 더욱 강조한다는 점에서 다르다.
3)엡4:11~16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궤술과 간사한 유혹에 빠져 모든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치 않게 하려 함이라.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머리를 통하여 도움을 입음으로 연약하고 상합하여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
척 스미스 목사의 목회철학은 무엇보다 양떼들에게 풍성한 말씀의 꼴을 먹이는 일이다. 그래서 몸을 세우고자 한다. 그의 주된 관심은 어떻게 하면 양들이 나가서 온전한 그리스도의 삶을 살며 그리스도를 삶의 자리에서 증거 하는 증거자로 온전히 세울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그래서 그는 교인들에게 ‘전도하라’고 강요하지 않는다. 그의 고민은 어떻게 하면 자발적으로 나가서 그리스도를 증거 하도록 풍성한 말씀으로 먹이고 무장시키느냐? 하는 것이다. 풍성하게 먹이면 절로 나가서 그리스도를 증거 하게 되리라고 믿는 것이 그의 기본적인 목회 확신이다. 이 세 번째 말씀을 통해 척 스미스 목사는 목회가 여러 가지 일을 성공적으로 해내는 것이 아니라 바로, 목양(牧羊), 즉, 하나님의 말씀으로 풍성하게 꼴을 먹임으로 건강한 몸으로 세우는 것임을 발견한 것이다. 그리스도의 몸을 세움, 즉 모든 교인들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닮게 하여 그리스도의 충만한 분량까지 이르도록 양육하고 훈련하는 것이다. 이것은 최근 새들백 교회가 강조하는 바 목적이 이끌어 가는 교회상(Image of a purpose-driven church)의 원조라고 할 수 있다.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교회론에 있어서는 같은 목적과 노선을 걷는다. 그러나 새들백 혹은 윌로우 크릭과 갈보리채플의 차이점은 성령에 대한 이해, 그리고 의존성의 차이에 있다. 갈보리채플은 새들백 교회보다 훨씬 오순절적이다. 즉, 성령과 말씀에 대한 의존성을 강조하는 대신 프로그램과 행사에 대해 의도적으로 비의존적이다. 새들백 교회에 비하면 갈보리채플은 성령의 역사를 매우 강조하는 편이며, 프로그램과 행사에 훨씬 덜 의존적이다.
(2) 척 스미스 목사가 받은 하나님의 추수약속
이와 같이 필요한 깨달음으로 무장하기에 이르자 하나님은 그에게 놀라운 추수에 대한 확신을 심어주셨다.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역사를 보면 하나님은 믿음의 조건이 충족되었을 때에 “적군을 네 손에 드디어 붙였노라”고 승리의 확신을 주시는 말씀을 종종 보게 된다. 척 스미스 목사는 17년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배우고 훈련받았으며 때가 되어 그에게 ‘약속’을 주셨다. 이와 같이 모든 부름 받은 하나님의 사역자들은 이 ‘약속’을 받기 위해 오랫동안 인내하고 기다릴 필요가 있다.
이제, 우리는 다시 한번 그의 목회철학과 방법을 하나님이 인을 치셨음을 이해하기 이전에 먼저 그가 어떤 목회여정을 걸어왔는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위에서 언급한 대로 척 스미스 목사는 17년간 기성교단에서 고민하다가 결국은 포 스퀘어 교단과 완전 결별하게 되고 L.A. 근교에 있는 코로나에 있는 한 초교파 독립교회를 담임사역 하게 된다. 그 교회에서 척 스미스 목사는 삶에 실제적으로 적용하는 성경강해로 1년도 안 되어 예배장소를 옮겨야 할만큼 큰 성장을 하게 된다.
이 즈음에 1965년 척 스미스 목사는 코스타 메사에 위치한 약 25명으로 구성된 갈보리채플에서 담임목사로 와 달라는 청빙에 응하게 된다. 이 교회는 담임목사의 은퇴를 앞두고 교회가 계속 존속해야 할지의 여부를 두고 열띤 논란을 벌이며 기도회를 열고 있던 때였다. 척 스미스 목사는 이 교회를 담임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며, 그 자신이 하나님의 인도를 받고 있다고 확신하게 되었다. 이 청빙을 받기 전에 척 스미스 목사는 두 가지 예언을 받았다고 회상한다. 첫째는 하나님이 척 스미스 목사의 이름을 ‘목자’(shepherd)로 고쳐주시고 그의 목회를 크게 복 주실 것이라는 것이고, 둘째는 교회존속의 여부를 앞두고 기도하던 갈보리채플의 기도회에 주신 예언으로서 하나님이 보내시는 종을 보내는데 그가 오면 강대상이 바뀌게 되고 교회는 크게 성장하게 될 것이라는 말씀이었다. 그래서 척 스미스 목사는 자신이 지금까지 해온 믿음목회를 통해 하나님이 크게 복을 주실 것이라는 확신 때문에 흥분하였다. 그의 여정은 믿음의 모험(Venture of Faith)이라고 부른다.
척 스미스 목사가 부임하여 가정 성경공부를 인도하면서 놀라게 된 일은 한 시간 이상을 계속해서 앉아 있는 데도 계속해서 주의를 집중하며 적극적으로 질문하여 성경공부에 참여하는 반응을 보게 된 일이다. 이때 척 스미스 목사는 강의식으로 성경공부 하는 것보다 편하고 부드럽게 대화하는 스타일로 하는 것이 더 효과적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마음대로 질문하게 만들고 중도에 가로막고 말하는 것도 괜찮다고 일러주고 공부하는 자세도 편하게 하라고 한 뒤부터 성경공부의 효과가 대단히 극적으로 나타나게 되었다고 회상한다. 이 때부터 척 스미스 목사는 가정성경공부의 중요성을 발견하게 되었다. USC 종교학과 교수인 밀러는 다음과 같이 가정성경공부의 중요성을 언급하고 있다.
“갈보리채플이 교인들을 잃지 않는데 성공한 데는 그 원인이 일부 가정성경공부에 있다고 볼 수 있는데 내가 아는 갈보리채플은 모두 다 매우 적극적이고 활동적인 가정 펠로우쉽 프로그램을 가지고 있습니다. 15~20명 정도의 소그룹으로 모여서 3, 4천명이 모인 곳에서는 느낄 수 없는 친밀한 분위기를 이루며 성경공부와 기도모임을 갖는다는 것은 단체의 일원이 되는 과정에서 꼭 필요한 것이라 봅니다.”
척 스미스 목사 자신도 가정성경공부의 중요성을 역설하고 있다.
“가정성경공부는 성경을 공부하거나 가르치기에는 더없이 좋은 방법입니다. 그뿐 아니라 성경대로 사는 삶이라는 성경공부의 실생활 적용을 위해서도 꼭 필요한 방법인 것입니다. 집에서 성경을 공부하다보면 실생활에의 적용에 대한 관심을 저절로 높일 수 있고 또 아주 쉽게 연관지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에서 배울 때는 교회에 나온 나와 집에 있는 내가 따로 느껴지게 될지 몰라도 집에서 성경을 공부하면 그럴 염려가 없고 늘 생활하는 가정이라는 환경 속에서 하나님에 대해 배우고 하나님을 찬양하며 하나님을 경배하다 보면 하나님이 집안에 거하시게 되는 것은 당연하지요”
이러한 가정성경공부의 원리는 사도행전에 나오는 초대교회의 원리에 근거하고 있는 것이며 오늘날 많은 한두 교회들에서 소위 ‘구역모임’을 교회성장의 요인으로 간주하고 있는 것과 맥을 같이 하고 있다.
또한 가정성경공부를 장려하면서 계속적인 교회개척이 가능하게 되었다. 즉, 가정성경공부 모임을 독립시키면서 정식 사역자를 임명하여 파송하는 과정으로서 300여 이상의 갈보리채플을 개척하는데 성공한 것이다. 척 스미스 목사는 이러한 개척과정을 통해서 그의 비전과 목회철학과 목회방법과 목회지도력을 나눠주는 데 중요한 몫을 담당하게 되었다. 이러한 지도력 분배작업은 오늘날 한 교회만을 크게 키우려는 대부분의 목회자의 야망에 일침을 가하고 있다고 본다.
이와 같이 척 스미스 목사는 교인들에게 올바른 믿음을 심어주기 위해서 온전한 하나님의 말씀을 충실히 들려주기 위해 노력했다. 그의 말대로 말씀을 충실히 ‘먹이기’ 시작했다. 일주일에 평균 10장씩 강해하면서 2년만에 성경전체를 완파했다. 이 2년 간 교회는 예배당을 옮겨야 할 정도로 크게 부흥하게 되었다. 이렇게 20세기 현대교회사에 있어 전례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놀라운 성령의 부으심을 체험하게 된 것은 끝까지 믿음으로 인본적인 요소들을 거부하며 끝까지 믿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기 위해 차선을 포기하는 길을 선택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하나님은 가장 완벽한 때를 척 스미스 목사를 위해 준비해 놓으신 것이고 척 스미스 목사는 아내 케이와 함께 믿음으로 계속 모험을 하면서 순종했던 것뿐이다.
우리는 척 스미스 목사의 생애를 통해 중요한 교훈을 배울 수 있다. 부흥의 역사가 필요한 때를 위해 하나님은 그를 오랫동안 연단 하시고 준비시키시고 때를 기다리신 것이다. 모든 부름 받은 사역자는 이와 같이 하나님이 준비하시는 놀라운 때를 믿어야 한다. 그분의 때에 쓰임 받도록 그분이 주실 최선의 약속을 위해 계속 차선의 유혹을 포기하며 믿음으로 자신을 준비해야 한다. 선하신 하나님을 계속 바라보는 믿음으로 자신을 준비시켜야 한다.
(3) 척 스미스 목회철학의 5가지 특징
흔히 어떤 교회를 탐방하거나 어떤 목회자의 사역을 배우고자 할 때 목회방법을 모방하는데 그치는 것을 종종 보게 된다. 그러나 사역방법만을 배우면 항상 실패하기 마련이다. 도입한 방법론은 오래가지 못한다. 그러한 사역방법론을 가능하게 만든 사역철학을 배워야 한다. 원리와 방법을 같이 배워야 한다. 어떤 면에서는 방법보다 중요한 것은 원리이다. 원리가 방법을 결정짓기 때문이다. 이것은 수많은 세미나를 통해 방법을 배우지만 실패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말해준다. 우리가 척 스미스 목사의 목회여정을 깊이 이해하려면 갈보리채플의 특징인 성경 강해 설교나 성경통독프로그램에 있다기보다는 그것은 수단으로서, 척 스미스 목사가 어떤 비전과 목적과 어떤 신앙적 특징을 가지고 사역에 임했는지를 살펴보아야 한다. 갈보리채플의 외적인 사역형태만 본받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을 것이다. 갈보리채플이 있기까지 척 스미스 목사의 비전과 믿음이 어떻게 작용했는지를 우리는 이해할 때 우리는 그의 사역방법들을 보면서 취사선택할 수 있는 지혜가 생길 것이다. 척 스미스 목사의 목회원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패러다임을 설정하는 고전적인 연구방법을 채택하고자 한다.
패러다임이란 가치체계를 묶어주는 틀을 의미하는 용어로서, 패러다임(paradigm), 혹은 범주(category)를 설정하는 것은 우리의 사고체계를 바꾸는 데(paradigm-shifting) 매우 유익하다. 세계관이 바뀌면 태도가 바뀌게 되고 결국 행동이 변하게 된다. 세계관이 바뀌기 위해서는 가치체계(value-system)를 바꿔주어야 한다. 가치체계를 바꾸는 일은 기존의 패러다임을 대체할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대체함으로써 가능하다. 이 작업을 가리켜서 패러다임 변화(paradigm-shift)라고 일컫는다. 모든 학문이나 심지어 매주 강단에서 설교를 하는 데에도 이 ‘패러다임 쉬프트’ 작업은 매우 중요한 목표가 되고 있다. 기존 교회의 체질을 바꾸는 데 있어서도 반드시 이 ‘패러다임 쉬프트’를 통해서 가능하다. 모든 개혁의 공식은 이것이다: “기존의 가치체계를 분석하고 새로운 가치체계로 대체하라. 그리고 새로운 가치체계에 맞는 그릇을 준비하라” 주님이 하신 말씀과 똑 같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이에, 필자는 그의 목회를 (1)비전목회 (2)본질목회 (3)믿음목회 (4)말씀목회 (5)제자목회, 이 다섯 가지의 패러다임을 설정하여 그의 목회철학을 이해하고자 한다.
1)비전목회(Vision Ministry)
비전목회라 함은 그는 방황하고 있는 히피청년들의 영혼에 대한 깊은 애정을 갖고 기도하며 예수 운동을 주창했기 때문이고 특히, 음악사역에 있어서 중요한 문화적 이해를 제공했다. 그의 비전은 새 물결을 창조하는 힘이 되었다. 그에게서 마라나타 프레이즈 아삽 레코드 뮤직, 그리고 빈야드 찬양사역의 시초를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척 스미스 목사는 다른 갈보리채플의 개척에 지대한 관심을 갖고 제자를 길러 파송하는 일에 힘썼다. 자신의 교회 부흥만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다른 갈보리채플의 성장도 그에게 중요했다. 히피 문화에 대한 그의 견해, 찬양음악에 대한 그의 견해, 개척에 대한 그의 견해 등은 그를 비전목회자라 부르기에 충분하다.
비전은 현재를 분석하고 미래를 예측하고 변화를 극복하는 원리와 방향을 제공하는 능력을 가리키는 말이다. 척 스미스 목사는 당시 창궐하는 히피문화에 대해 회피하고 도망가기보다는 성경적 원리를 가지고 적극적으로 대처함으로써 많은 영혼들을 추수하는 하나님의 사역에 동참할 수 있었다. 그의 비전은 많은 히피청년들을 포용할 수 있었고 회심한 그들을 중심으로 새로운 교회음악문화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래서 그의 목회는 그가 시무 하던 갈보리채플만의 부흥에 그치지 않고 사회계층 구조를 변화시키는 이른바 ‘운동’(movement)의 차원으로 이르게 되었다. 흔히 개교회의 부흥 성장에만 머무르고 사회계층구조나 사회 도덕 풍조를 바꾸지 못하는 ‘무능력한 교회부흥’으로 자만하는 현대 많은 목회자들에게 이것은 중요한 도전을 주기에 충분하다.
당시 갈보리채플 운동이 태동하던 1960년대는 영적으로 뿐만 아니라 사회적으로도 미국사회 전반에 큰 영적 혼란의 시기였다. 당시 미국인들은 세 명의 지도자들이 암살되는 정치적 공황을 목격했고 그 자녀들은 환각제와 마약, 주술과 기타 신비사상에 탐닉하여 평화를 추구하고자 하는 모습과 전통적인 가치기준을 거부하고 자기 안에서 자기 스스로 가치기준을 만들어내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영향력에 포로가 되는 것을 그냥 무기력하게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미국인들은 지지하지 않았던 월남전의 참혹한 모습을 보고서 전쟁의 공허함에 지쳐 있었고 젊은이들은 영적 기근 속에서 방황하는 몸부림이 극에 다다랐다. 아마도 이 방황하는 젊은이들의 몸부림을 하늘의 하나님이 보시고 긍휼히 여기셔서 척 스미스 목사를 예비하여 예수운동을 주도하게 하셨는지 모른다. 당시 1960년대의 사회 정치 문화 도덕적 영적 상황은 오늘날 1990년대 한국의 그것과 유사하다는 점에서 오늘 한국교회의 목회자들은 척 스미스 목사의 목회철학과 방향과 사역방법에 대해서 깊이 생각하고 연구해볼 가치가 있다고 본다.
1960년대 젊은이들은 2차 세계대전에서 돌아온 아버지 밑에서 양육 받았고, 산업화로 급속도의 발전이 이루어지기 시작한 사회 속에서 과학기술이 급성장하고 번영하는 시대 속에서, 존경하던 정치지도자들이 차례로 암살 당하고, 전통적인 가치기준이 무너지는, 이른바 모더니즘에서 포스트모더니즘으로 변화하는 과도기에서 영적 공허감으로 방황하던 영혼들이었다. 이 때 하나님은 척 스미스 목사의 아내 케이 여사에게 먼저 저 젊은이들의 영적 방황에 대해 눈을 뜨게 해 주시고 그들을 긍휼히 여기는 마음을 충만하게 주셨다. 케이는 히피들을 비난하기보다는 그들의 영혼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기도하기 시작했다. 그들의 영적 공허감을 강하게 느꼈고 그들이 주님을 필요로 하고 있다는 사실을 느끼기 시작했다. 이렇게 잃어버린 영혼들을 위해 긍휼과 사랑으로 기도하기 시작한 것은 하나님의 비전을 받을 충분한 토양을 일구는 것이었다.
이러한 케이 사모의 마음은 척 스미스 목사에게도 전달되었다. 척 스미스 목사의 마음에도 아내와 같이 히피들을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생기게 되었고 그들을 위해 간절히 기도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게 되었다. 그리고 하나님께 매달리기를 그들과 나 사이의 깊은 세대 차(generation gap)의 골을 극복하고 기성세대와 신세대라는 높은 장벽을 허물 수 있는 길을 열러 달라고 간구하기 시작했다. 시대를 바라보고 영적 문제를 발견하고 그것에 대해 하나님께 지혜를 간구하기 시작한 것이 척 스미스 목사의 삶과 사역을 근본적으로 전환시킨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척 스미스 목사가 어떻게 이렇게 위대한 비전을 품게 되었는지 자세한 경위를 살펴보자. 척 스미스 목사 부부는 60년대 반문화 운동으로부터 생긴 히피족들을 바라보면서 ‘무언가’를 느꼈다고 진술한다. 다음의 진술은 척 스미스 목사의 목회여정에 있어 일대 변혁을 가져다 준 중요한 사건, 즉, 70년대 히피들의 영혼을 구원한 “예수운동”(Jesus Movement)이라 일컬어지는 위대한 영혼 추수를 위한 비전을 받는 사건이었다. 이 진술 속에는 잃어버린 영혼들을 하나님이 어떤 과정으로 추수하시는 지에 대한 부흥의 원리들을 잘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 우리(척과 케이)가 서서 이 이색적인 모임을 바라보고 있을 때 하나님은 우리에게 무엇인가를 느끼게끔 해주셨다. 그것은 우리 세대와 자녀 세대 사이에 벌어진 문화적, 사상적 차이에서 비롯되는 문제점 해결이 시급한 과제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급진적인 아들 히피족의 반항 기질과는 대조적으로 우리 세대는 구 세계의 경건을 바탕으로 자라났기 때문이다. 우리 부부가 이제, 과연 이 장벽을 어찌 넘을 것인지 처음에는 앞이 캄캄했다. 주님은 분명히 우리 마음에 명령하셨다. ‘사랑으로 맞이하라!’ 그러나 그토록 날카롭고 민감한 히피족에게 사랑의 손길이 도대체 먹혀 들어갈 것 같지가 않았다. 그래서 케이의 표현 그대로 하자면 ‘우리는 온 공기를 기도로써 가득’ 채웠다. 케이는 철야 기도회와 새벽 기도회를 조직하여 사랑의 손길을 위한 기도를 멈추지 않았다. 나는 또 나대로 교회 장로들과 제직을 모아 합동 기도회를 가졌다. 그 얼마 후 우리 부부는 표면 하에 동요가 생기고 전체 분위기가 변하고 있음을 현저하게 느낄 수 있었다. 케이와 나는 우리의 노력과는 상관없이 속에서 강하게 자라나는 힘을 느꼈는데, 이는 이색 시대의 젊은이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과 관심에 대한 우리의 책임감을 말해 주는 것이었다. 사랑만 충분하다면 서로에게 필요한 상호이해는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우리는 믿었다. 사랑이 충만하면, 이 길 잃은 젊은이들을 선도할 힘이 우리에게 주어질 것이다. 우리는 이 믿음을 가졌다. 그리고 이 믿음을 지켰다. 바로 이 사명을 이루기 위해 하나님이 우리를 단련시켜 왔단 말인가? 이제 부처건 그리스도건, 어디라도 몸을 내맡기려는 실향족의 무르익은 영혼을 걷어들일 대 추수밭을 우리가 지금 바라보고 있단 말인가? 우리와 그들 세대 사이에서 문화적인 변천은 급속도로 진행되었다. 갈릴리 벌판에서 느닷없이 야생화가 피었듯이...그러나 그들을 이제 어떻게 뚫고 들어갈 것인가? 케이와 나는 자주, 헌팅톤 비치에 있는 커피숍으로 나가 차를 세우고, 차안에 앉은 채 그들을 보고 열심히 기도하곤 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추잡한 긴 머리의 기형아들을 꺼리고 미워했지만, 우리는 예수만이 충족시켜 줄 수 있는 인생의 답을 구하고 있기에 한결같이 마약에 투신하게 된 그들 마음의 큰 공백 상태를 볼 수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어떻게 해야 이들에게 접근할 수 있는지 전혀 몰랐다.”(위대한 추수, p.50,51)
척과 케이 부부는 정말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들에게 접근하고 싶었지만 어떻게 접근할 줄 몰라하고 있었다. 넘치는 긍휼과 사랑으로 계속 기도하는 중 우선 케이 사모에게 용기가 생기게 되었다. 케이 사모는 이렇게 회상하고 있다.
“저는 한 번 그 아이들을 만나서 이야기해봐야겠다는 욕망을 갖게 되었지요. 그래서 아이들한테 히피들을 집에 데리고 올 수만 있으면 한 명 데려와 보라고 했지요. 그때 우리 큰딸이 헤이대쉬 애쉬베리의 히피로 지낸 적이 있었던 젊은이와 데이트를 하고 있었는데 그 아이를 집으로 데리고 왔습니다. 이것으로 우리 부부와 전직 히피와의 만남이 시작되었습니다.”
척 스미스 목사도 그때를 이렇게 회상하고 있다.
“그래서 그 친구가 어느 날 집으로 찾아왔는데 보니 정말로 틀림없는 히피더라구요. 정말 신이 났습니다. 그래서 그 친구에게 우리 집에서 같이 지낼 것을 부탁했더니 그 젊은이가 우리 집에 묶으면서 친구들을 있는 대로 불러모아 갑자기 15~20명의 히피들이 침낭을 각기 가지고 와서 우리 집으로 모여들었습니다. 얼마 안 가서 그 아이가 우리 집 뒷뜰 수영장에서 다른 아이들에게 세례를 주고 했습니다. 당시 우리 집 뒤뜰에는 세례담당 히피청년이 한 명 있었는데 이 아이는 세례뿐만 아니라 노방전도에도 열심이었지요.”
당시 히피들은 사회적으로 ‘더럽고 추하며 비난받는’ 자들이었다. 이러한 문화적 장벽을 뛰어넘어 집을 개방하여 그들을 초청하고 그들에게 숙소를 제공하는 일을 통해서 복음이 급속도로 그들에게 전파되게 되었다는 사실은 오늘날 비전 있는 사역을 하고자 하는 모든 교회들이 배워야 할 부분이다. 교회는 과연 문화적 장벽을 스스로 허물고 마음의 문과 집의 문을 활짝 열고서 사회적으로 비난받고 욕먹는 자들을 초청하여 그들과 복음으로 교제할 수 있는가? 이것이 바로 요한복음 6장에 기록된 오병이어의 표적이 나타내는 참된 메시지라고 확신한다. 교회의 일은 돈을 많이 모으거나 무슨 특별한 구제프로그램을 갖추어야 그들을 돕는 것이 아니다. 먼저 우리 마음 문을 활짝 열어야 한다. 대문을 열어야 한다. 우리가 솔선 수범하여 문화적 장벽을 허물어야 한다. 그리고 사회적으로 소외된 영혼들을 초청하여 그들과 복음으로 교제를 나누어야 한다. 그러면 나머지는 주님이 배불리 먹이시는 일을 하시는 것이다. 이것이 복음의 능력을 맛보는 비결이다. 나와 같은 스타일의 사람들만 모여서 벽을 높이고 자기들끼리만 떡을 떼고서는 주님이 행하시는 풍성한 오병이어의 축복을 경험하지 못할 것이다. 장벽을 허물고 그들과 떡과 잔을 나눌 때 차고 넘치는 역사는 주님이 친히 일으키신다. 척 스미스 목사는 오병이어의 역사를 행하시는 주님을 체험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런데 비전을 품는 것과 그것을 실행에 옮기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비전을 실행하는 지도자는 사람들로부터 비난과 오해를 감수할 각오를 해야 한다. 그러나 비전을 실행에 옮기고 마는 지도자의 특성은 자신이 분명한 가치관을 확신하고 있다는 점과 영혼을 향한 말할 수 없는 사랑을 소유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 두 가지 사실이 비전 있는 지도자를 인내하게 만들고 끝까지 비전을 밀어 부칠 수 있는 힘을 공급한다. 비전을 실행하고자 하는 지도자는 우선 내부의 적과 직면할 것을 각오해야 한다. 비전의 사람들은 항상 이 위기를 잘 극복한 경험을 이야기해준다. 척 스미스 목사의 경우는 우리에게 좋은 사례를 제공한다. 그는 히피들을 교회 안으로 과감하게 초청하는데 있어 가장 큰 장애물은 다른 곳이 아니라 교회 안에 있었다고 술회한다.
“아이러니 하게도 우리가 부딪친 유일한 반발은 바로 우리 교회 자체에서 나왔는데, 이는 정통 교회의 배경을 자랑하는 그리고 소위 곧은 사회 출신의 중견 인물의 반향이었다. 그런 반역적인 젊은 부랑아들의 갑작스런 유입은 예측할 수 있었던 일이지만 곧 적지 않은 파문을 불러일으켰다. 우리의 도전은 대개의 교회가 갖고 있지 않은 그 무엇을, 즉 어떤 기준의 이탈을 존중과 이해와 판단으로 그리고 넓은 아량으로 이겨나가는 것이었다. 많은 교인들이 이 도전에 합세하여 히피 전향자들을 따뜻하게 맞이했다. 그러나 일부에서는 교회의 새 멤버가 된 이 장발족들, 미국 본토 원주민, 또는 아시아 어느 부족의 옷차림을 흉내내고 무질서하게 얽힌 야생화와 같이 울긋불긋 제멋대로 치장한 히피족들이 옷깃에 달린 방울소리를 내며 맨발로 교회 문을 드나드는 모습을 보고 적지 않게 반발하고 멸시했다. 이런 옷차림이 부러워 혹시 흉내내지나 않을까 염려하는 자식 가진 부모들에게는 더욱 위협적이 아닐 수 없었다.”(위대한 추수, 54)
그러나 이러한 심각한 교회 내부의 반발을 척 스미스 목사가 스스로 잘 무마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기적적으로 역사 하신 몇 가지 일로 말미암아 반대하는 자들이 적극 옹호하고 찬성하는 자로 변화하게 됨으로써 해결되게 되었다. 이때 척 스미스 목사는 하나님이 위대한 정치가이심을 깨닫게 되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척 스미스 목사는 몇몇 전통적인 교회 분위기에 익숙한 노장급 교인들의 “기”를 꺾어 놓지 않으면 비전을 실행에 옮기고자 하는 노력이 수포로 돌아갈 위험이 있다고 판단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다.
“여러분들, 나는 우리 갈보리채플에서 안일한 크리스천 전도만을 일삼는다는 말을 듣고 싶지 않습니다. 그러나 홀리니스 교회(Holiness Church)가 30년 전에 저지른 과오를 오늘 이 시점에서 답습하고 싶지도 않습니다. 그들은 그저 아무 생각 없이 영화 구경 가면 안 되고 춤추면 안 되고 담배를 피워도 안 된다는 식의 부정적인 전도 방식을 취했기 때문에 자라나는 젊은 층을 모두 교회 밖으로 몰아내어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우리 갈보리채플은 그런 과오를 범하는 일이 없어야겠습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을 믿고, 우리 안에서 일하는 성령의 업적을 강조할 때가 왔다고 봅니다. 모든 변화를 성령께서 주관하시도록 맡기는 태도가 그 얼마나 흥겹고 실질적이며 자연스러운 처사입니까? 단정한 머리, 깨끗한 옷차림이라는 서구적 단정 문화를 어느 누구에게도 강요하면 안되겠습니다. 나는 모든 변화가 속에서 밖으로 나오기를 원합니다. 마약 인생이건, 백만장자의 꿈을 좇는 노력이건, 또는 온갖 인생을 조롱하는 그 무엇이건 간에 이 모든 것이 참다운 완성과 궁극적인 인생의 의의를 갖다 주지는 못한다함을 한마디로 선언합니다. 왜냐하면 이 모든 목표의 결말은 허무요 실망이기 때문입니다.”(위대한 추수, p.56)
그런데 어느 날 예배당 바닥에 깐 새 카펫 때문에 문제가 하나 생기게 되었다. 속으로 히피를 싫어하는 사람들이 많은 돈을 들여 깐 새 카펫을 더럽힌다고 불평을 토해놓기 시작한 것이다. 그들은 일방적으로 어느 주일 아침 일찍 ‘맨발 출입금지’(No barefeet allowed)란 간판을 교회당 입구에 매달았다. 그날 마침 가장 일찍 교회를 찾아간 척 스미스 목사는 그 간판을 제거하고서 간부회의를 소집했다. 그리고 삯군의 입장이 아니라 분명한 양심을 가지고 하나님의 일군답게 행동하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단호하게 말했다.
“어떤 면으로 보면 젊은 사람들 앞에서 심판을 받을 사람들은 우리 같은 노장인 기성 크리스챤들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들에게 야고보서 2장과 요한1서 4장 7절을 인용하여 말한 대상은 바로 우리가 아닙니까? 오늘 아침에 있었던 그런 처사는 야고보가 말했듯이 우리의 신앙 전체를 의심받게 합니다. 이런 일이 있을 때 우리는 그러한 동기를 조종 내지 선동하는 자가 누구이며 그가 무엇을 원하는 지를 자문해 봄이 마땅하다고 봅니다. 호화로운 카펫 때문에 맨발로 찾아오는 단 한 명의 젊은이라도 받아들일 수가 없게 된다면, 그런 카펫이라면 나는 이 자리에서 그것을 말끔히 걷어내고, 콘크리트 바닥 그대로를 쓰자고 건의하고 싶습니다. 옷차림이 남루하다는 이유로, 찾아온 단 한 명의 젊은이에게 ‘미안해요. 오늘 당신은 교회에 들어오지 못합니다. 젊은이 옷이 왜 그리 더럽소?’라고 말한다면 나는 역시 안락의자의 천을 모조리 뜯어내도록 건의하겠습니다. 언제라도 씻을 수 있는 나무의자나 철제 의자도 많이 있으니까요. 여하튼 어느 누구라도 옷이나 겉모양을 보고 교회문을 닫는 일이 결단코 있어선 안되겠습니다.”(위대한 추수, p.57,58)
비전을 실행에 옮기고자 하는 모든 사역자는 반드시 이와 같은 장애물들을 여러 번 만나게 된다. 척 스미스 목사는 이렇게 말씀을 가지고 단호하게 대처함으로써 마지막 장애물을 지혜롭게 잘 뛰어넘을 수 있게 되었다. 이후부터는 그의 앞에는 영혼의 대추수를 거두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그저 감탄하는 눈으로 바라보기만 했을 뿐이다. 이렇게 장애물을 극복하는 힘이 어디에서부터 나왔을까? 그것은 오직 사랑이다. 영혼을 향한 깊은 긍휼이다. 하나님은 바로 그것을 사용하셨다. 오늘날 많은 목사들은 원리 없는 방법을, 긍휼 없는 권위를 마구 도입함으로써 그리스도의 몸에 상처를 입히고 있다. 사실 척 스미스 목사는 비전에 대해 배운 것도 아니고 문화에 대해 연구한 적도 없다. 다만 그는 잃어버린 영혼들, 방황하는 젊은 영혼들을 바라보고 그들을 긍휼히 여기는 마음으로 그들에게 접근할 수 있는 길을 열어달라고 겸허하게 주님께 간청했다. 그리고 주님이 길을 열어주시는 대로 자신의 인생을 과감하게 바치기로 결심한 것뿐이다. 나머지는 주님이 다 하셨다. 하나님은 이렇게 항상 자신의 인생을 하나님의 뜻과 인도하심에 전폭적으로 내어 맡기기로 작정한 사람을 들어 쓰신다. 척 스미스 목사는 외모를 판단하고, 문화적 기준을 따지고 하는 것을 영혼을 바라보는 복음의 능력을 강조함으로 극복하고자 했고 실제로 잘 극복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위대한 추수사역(God's great harvest)에 쓰임 받을 수 있었다. 척 스미스 목사는 이렇게 말한다.
“외적인 변화를 강조하는 것보다 우리는 내면적 변화를 강조했습니다. 외모는 세상이 따지는 것이요 주님은 사람의 중심을 보십니다.”
척 스미스 목사의 이러한 비전이 없이 어떻게 히피들을 중심으로 한 ‘예수 운동’(Jesus Movement)이 가능했을까? 이일은 하나님이 인도하신 일로서 급속도로 확산되기 시작하여 얼마 지나지 않아 500여명씩 떼를 지어 코로나 델 마의 태평양 바닷가에서 침례 받는 광경이 벌어지게 되었다. 이러한 척 스미스 목사의 비전은 하나님의 새로운 역사에 마음을 열고 기대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이들을 중심으로 새 음악과 새 세대들의 새로운 물결이 시작되었다. 전적으로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믿음으로 전폭적으로 내어 맡기는 역사가 시작되었다. 이렇게 히피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심어준 ‘예수 운동’의 선봉장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척 스미스 목사가 기도하면서 받았던 비전 때문이었다. 척 스미스 목사 부부와 그의 갈보리채플의 교인들은 이 비전에 믿음으로 맡기며 순종하기로 했을 때 하나님은 그들을 통해서 놀라운 사회치유의 물결을 흐르게 하셨던 것이다. 갈보리채플을 중심으로 일어난 예수운동은 갈보리채플이 의식전환(paradigm-shift)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척 스미스 목사는 이렇게 말한다.
“유대인들이 복음을 자기들만의 독점물로 여길 것이 아니라 멸시받는 이방인들에게도 고루 나누어져야 하는 것으로 깨달았듯이 우리 갈보리채플도 이 같은 의식의 전환이 있었다. 이 기쁜 복음의 종소리는 미국의 정통파 신앙인을 대표하는 애초의 이십 오 명에게만 머물지 않고 반문화 체제 그룹의 젊은이들에게도 울려 퍼졌다. 물론 이러한 손길에는 사랑과 포용의 기적적인 역량이 뒷받침되었다. 상호 이질적인 그룹 사이에서 따뜻한 손길을 주고받는 화합이 있을 때 자연히 그 수는 늘어나기 마련이다. 그러나 이 일의 성사에는 오늘도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섭리가 절대적으로 있었고, 이로써 많은 사람들이 새로운 삶을 찾게 되는 과정에서 저마다 이적에 참여하고 싶은 의욕은 요원의 불길처럼 타올랐다.”(위대한 추수, p. 24)
모든 공동체에서 이 비전이 회복될 때 그 공동체들은 활기를 띄게 된다. 이 비전이 없을 때 백성(공동체)은 방자히 행한다고 잠언 29장에서 말하고 있다. 이 비전은 인본적인 프로그램에 의한 것이 아니다. 비전은 신적 묵시로서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신적 계획으로서 하나님의 위대한 추수를 위한 계획을 의미한다. 비전은 어떤 인본적인 계획이 아니다. 사람이 인위적으로 교묘하게 만들어놓은 계획서나 프로그램이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가 비전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지만 사실 그것은 진정한 의미의 비전은 아니다. 그것이 참 비전인지 아닌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공동체의 멤버에게 물어 보라. 사역자가 제시하는 비전이 정말 그의 것인지 물어 보라. 자신은 그가 제시하는 비전에 진정으로 공감하는지 물어 보라.
참 비전은 공동체를 위해 주신 것이지 사역자 개인의 야망을 이루기 위한 것이 결코 아니다. 참 비전은 하나님을 위한 나의 계획이 아니라 은혜가 절실히 필요한 공동체를 위해 나를 통해 역사 하실 하나님의 계획이다. 참 비전은 하나님이 성령으로 주시는 위대한 추수계획이다. 이 비전이 있을 때 공동체는 생명력을 가지고 흥분하게 된다. 하나님이 그 공동체를 통해 이루실 위대한 영혼추수사역을 믿음으로 바라보고 예측하게 되기 때문이다. 수 천 명의 교인들이 예배실에서 가득 메우고 앉아서 선포되는 하나님의 말씀을 문자 그대로 완전히 하나님의 살아 있는 말씀으로 믿고 받아들이면서 하나님이 자기들을 통해 무엇인가 이루시고 있다는 확신을 모두가 가지고 있을 때 찾아오는 흥분은 하나님의 비전이 주는 매력이 아닐 수 없다. 이 비전은 사람을 문화장벽을 뛰어 넘어 그 영혼을 하나님의 추수계획의 관점에서 바라보게 만들어주는 힘이 있다. 이 비전은 차별의 장벽을 넘어 누구나 하나되게 하고 서로 사랑하고 서로 차이점들을 용납하게 만들어주는 힘이 있다. 이 힘은 하나님이 주시는 비전에서부터 비롯된다.
참 비전의 자연스러운 결과로서 갈보리채플은 새로운 찬양 스타일이 도입되기 시작했다. 비전은 새로운 분위기, 혁신적인 분위기와 흥분을 만들어내고, 그것은 다시 새롭고도 역동적이며 혁신적인 찬양과 경배의 음악 스타일을 낳게 만들었다. 은혜 받은 청년이 월요 청년 성경공부 모임에서 자신이 작곡한 노래라고 가져오면 척 스미스 목사는 그것을 전체 집회에서 부르게 했다. 새로운 찬양은 전체 분위기를 돋우는 역할을 하기에 충분했다. 자신이 직접 체험한 은혜를 작사 작곡한 것이기 때문이었다. 이와 같이 비전을 가진 목회자와 교회는 새로운 음악 스타일에 대해서 개방적이게 된다. 새로운 찬양스타일이 자연스럽게 도입되게 된 데는 척 스미스 목사의 강력한 비전이 결정적인 동인으로 작용하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찬양스타일은 나중에 미국 전역에 확산되기 시작하였다. 갈보리채플의 음악은 현대적 복음성가 운동에 큰 획을 그었다. 다양한 찬양스타일이 만들어지게 되었고, 마라나타 프레이즈 팀과 아삽 레코드사를 통하여 제한된 교회 음악의 장르를 허물고 경배와 찬양 운동, 열린 예배 등 많은 교회운동에 중요한 초석을 제공하게 되었다.
그러면, 이 비전목회를 하려면 어디서 어떻게 시작해야 하는가? 참 비전은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사람이 시작하는 것은 참된 비전이 될 수 없다. 위원회를 구성하고 열띤 토론을 벌인다고 비전을 얻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주시도록 그리고 하나님이 친히 시작하시도록 전적 내어 맡겨야 한다. 그래서 척 스미스 목사의 생애와 사역을 통해서 한 가지 배우게 되는 귀중한 원리가 있다면 하나님이 시작하도록 했다는 점이다. 즉, 비전목회를 시작하려면 그것은 “잃은 자들”을 위해 기도하라는 것이다. 잃은 자들을 사랑과 긍휼로 바라보라는 것이다. 잃은 자들을 위해 함께 하나님께 기도하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보내주시도록 간구 하라는 것이다. 무슨 선교나 전도프로그램을 세우려고 노력하지 말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그들을 보내주실 때 다만 하나님의 가장 좋은 꼴을 그들에게 먹이기만 하라는 것이다. 잃은 자들에 대한 관심과 사랑이야말로 척 스미스 목사와 갈보리채플의 비전의 근간을 이루고 있음을 발견해야 한다. 갈보리채플 성경대학 학장이었던 래리 테일러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갈보리채플의 전반적 사역의 물결은 척 스미스 부부가 허링톤 해변 근처에 앉아 주위에 어슬렁거리는 길 잃은 젊은이들을 위해 열심히 기도할 때 시작되었습니다. 우리가 주님과 함께 걷고 있다면 전 세계에 퍼져 있는 길 잃은 자들을 위해 끊임없는 전도와 사역을 하려는 열망에 불타야 합니다. 사역과 전도에 대한 열정은 깊어야만 합니다. 우리 성도들은 길 잃은 자들에게 다가가야 한다는 비전을 가져야 하며 이러한 일에 직접 동참해야 합니다.”(아름다운 목양의 샘터, p.66)
2)본질목회(apostolic ministry)
한 목회자가 어떤 교회관을 가지는가에 따라서 그의 목회도, 사역철학이나 방법론도 크게 달라지게 된다. 스스로 진지하게 물어 보라. 나는 교회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가? 어떤 사람은 ‘이 교회는 내가 세웠으니 내 교회다’라고 생각한다. 또 어떤 이들은 말로는 주님의 교회임을 인정하면서 실제로는 모든 것을 내 권한에 종속하도록 함으로써 교회의 생명력을 빼앗아가고 있다. 또, 어떤 이들은 교회는 유기적 생명체임을 인식하지 못하고 명령과 지휘계통으로 움직여지는 기계라고 생각하여 마치 군대를 연상시키는 듯한 꽉 짜여진 조직으로 만들고자 한다. 그 조직을 돌리기 위해서 안간힘을 쓰지만 얼마 가지 못해서 지쳐서 중도에 하차하고 만다. 또, 어떤 이들은 교회를 여러 가지 보고서류와 위원회 조직과 행정계통이 잘 정리되어야 좋은 교회라고 생각하여 숨막히는 행정조직으로 만들려고 하는 공무원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다. 실로 어떤 교회관을 가지고 있느냐는 매우 중요하다. 올바른 교회관이 올바른 목회철학과 목회방법론까지 결정한다. 비극적인 사실은 입으로는 교회가 어떻다고 설교하면서 실제 자기 목회현장에는 전혀 그것이 반영되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목회자의 교회관이 투철하지 못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목회자는 교회관에 투철해야 한다. 그 교회관에 자신의 생명을 걸어야 한다. 바른 교회관에서 바른 목회철학이 나오고 바른 목회철학에서 바른 목회방법론이 나오기 때문이다. 그 교회관이 투철한 지 여부를 어떻게 알 수 있는가? 그의 평상시 설교와 대화에 얼마나 종종 언급되고 있는 가로서 알 수 있다. 교회에 대해 평소에 그리는 이미지는 자연스럽게 그의 설교와 상담과 대화에 스며들게 되어 있다. 교인들이 도전 받는 부분은 바로 그가 어떤 말씀을 전하는 가가 아니라 어떤 교회관을 가지고 있는가에 달려 있다.
필자가 척 스미스 목사의 목회를 본질목회라 한 것은 그는 사도행전에 나타난 사도적 교회(apostolic church)를 표방하며 기도와 말씀에 전무하리라 하던 사도들의 고백을 따르고자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본질목회를 또한 사도적 목회라고 할 수 있다. 사도행전 6장에 사도들이 고백한 것은 사도적 목회의 원리다. “...열 두 사도가 모든 제자를 불러 이르되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놓고 공궤를 일삼는 것이 마땅치 아니하니 형제들아 너희 가운데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듣는 사람 일곱을 택하라. 우리가 이 일을 저희에게 맡기고 우리는 기도하는 것과 말씀 전하는 것을 전무하리라...” 사도들은 사도가 전무해야 할 일을 위해 다른 일은 다른 일군에게 위임하는 모습을 보였다. 사도들은 기도와 말씀 외에 다른 프로그램이나 행사에 시간을 뺏기지 않는다. 사도적 목회란 사도행전에 나오는 바 사도들이 목회한 교회를 교회의 바람직한 모습임을 확신하고 그것을 추구할 때 다른 인위적인 프로그램이 아니라 사도들이 했던 방식을 취하는 것이다. 척 스미스 목사는 사도행전 2장에 나타난 초대교회의 모습이 현대교회 안에도 그대로 구현될 수 있다고 믿는다. 오늘날 많은 교회를 보면 실제로 사도행전적 교회상을 교회의 모델로 삼고 있는 교회가 거의 드물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대부분의 교회는 ‘종교개혁자들의 교회’나 혹은 ‘20세기의 어느 교회’를 모델로 삼는다. 지금 우리가 갈보리채플을 연구하지만 갈보리채플조차 우리의 모델이 될 수는 없다. 갈보리채플을 그대로 닮고자 노력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모델로서의 교회상은 이미 성경에 나와 있기 때문이다. 모든 지상교회가 추구해야 할 교회의 모델은 사도행전에 기록된 예루살렘과 안디옥 교회이다. 물론 완벽하게 닮을 수 있다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지향하는 목표점이 되기에 충분한 모델로서 성경에 기록되었다는 것이다.
벤치마킹(bench-marking)은 목회하는 데 있어 매우 중요하다. 즉, 어디를 경쟁목표로 삼는가 하는 점이다. 벤치마킹 하지 않는 사람이나 단체는 거의 없다. 심지어 바울 사도는 예수 그리스도를 벤치마킹 했다. 모든 교회는 지향하는 교회의 이상이 있는데 그 이상을 완벽하지는 않더라도 만족스럽게 투영한 특정 교회를 염두에 두고 있다. 대부분의 목회자들은 성경에 근거한다고 말하지만 사실은 대도시의 어느 대형교회를 염두에 두고 있다. 그 교회의 행정조직이나 설교 기타 프로그램과 속으로 비교한다. 그러나 벤치마킹 해야 하는 참된 모델은 성경에 있다. 다른 교회의 철학과 프로그램과 행사를 본받는 것은 남이 입고 있는 옷을 내 몸에 억지로 입으려는 시도와 같다. 그러나 성경에 기록된 교회를 본받는 것이 훨씬 안전하다. 예루살렘 교회와 안디옥 교회가 바로 그것이다. 물론 가장 완벽한 교회는 아니지만 그래도 성령강림 이후 첫 열매이기 때문에 가장 순수하고 가장 본질적인 교회라고 할 수 있다. 지상의 모든 교회는 바로 그러한 초대 교회를 바라보아야 한다. 어느 큰 도시의 대형교회를 벤치마킹 해서는 안 된다. 우리가 성경에 있는 초대 교회를 벤치마킹 할 때 우리는 비교의식이나 열등감에 빠져들지 않는 축복을 얻을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지역사회에 맞게 적응해나가는 지혜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사도행전적 교회상을 구현하기 위해서는 어떤 목회프로그램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인도하심에 의존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듣고 순종”(Listen and Obey)하는 단순한 방식으로 목회 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사도행전에서 우리는 교회 탄생 첫날에 삼천 명의 새 신자가 불어났으며 주님이 그 수를 나날이 늘려주셨음을 배웠다. 교회가 주님 뜻하신 대로 자라면, 주님은 그 교회를 통하여 항상 원하시던 일을 이루심을 우리는 확신한다. 사람이 아무리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다. 치밀하고 세부적인 목회 계획을 세운다 할지라도 그것이 인간적이고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지 않는다면 오히려 실패하고 만다. 그러므로 목회자가 교회는 주님의 몸이요 주님의 것이라는 생각과 마음으로, 그분 뜻대로 목회 한다면 하나님은 우리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영혼의 대 수확(great harvest)을 걷어 주신다. 그러므로 목회에서 중요한 것은 주님의 음성을 듣고 순종하는 것이다.”(위대한 추수, p. 9)
물론 기도와 말씀을 소홀히 하는 교회는 없을지라도 그는 특히 기도 즉 성령사역과 말씀 즉 성경교수사역의 균형을 강조하고 있다는 점에서 본질목회의 노선을 추구하고 있다. 그리고 소그룹의 친교와 소그룹의 분위기를 강조하는 점에서 초대교회의 교제를 본받고자 애쓰고 있다. 다른 교회의 목회자들도 본질을 추구한다고 하지만 사실 본질목회란 본질 이외에 형식이나 기타문제를 자유 해야 한다는 점에서 온전한 본질목회라기보다는 현실과 타협하는 방식이 많다. 현대교회의 흐름에서 뭔가 유행하는 것이 있으며 그것을 도입하고자 하면서 본질목회를 한다고 할 수 있는가? 정말 기도와 말씀에 전무하는 것이 중요하며 교인들도 이를 위해 협력해야 한다.
큰 교회를 담임하는 목회자들의 일주일 스케쥴을 보면 기도와 말씀에 전무 하는 모습을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주로 비본질적인 일들, 이를테면, 회의를 주재한다든지 혹은 돈을 센다든지 일을 계획한다든지 혹은 회의에 참석한다든지 하는 비본질적인 일들에 매달리는 모습을 많이 볼 수 있다. 사역 초기에는 본질에 매달리다가 사역이 왕성해지고 비대해질수록 비본질적인 일들을 과감하게 맡기거나 구조조정하지 못하고 계속 거품을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교회가 커질수록 사람의 힘으로 유지하려고 무슨 위원회나 어떤 조직과 행사를 인위적으로 만들어내기 때문에 결국 날이 갈수록 지치게 된다. 위임하거나 혹은 구조 조정함으로써 계속 본질을 지켜나가는 일이 계속적인 성장에 있어 성패의 갈림길이 된다. 목회의 본질은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이 일을 하시게 만드는 것이다. 예수님을 담임목사로, 성령을 당회장 되심을 실질적으로 인정해 드리는 것이다. 목회자는 계속 그 인정해드리는 일을 하는 것뿐이다. 지속적인 성장을 원한다면 지속적으로 거품을 제거하고 본질을 회복하고 계속 유지해야 한다.
또한, 초대교회처럼 떡을 떼고 서로 친밀하게 교제하는 소그룹이 강조되는가? 위에서 아래로 일방적으로 지시하는 이른 바 낙하산(top-down)방식으로 조직이 형성되고 그 조직을 유지하기 위해서 임원을 선출하고 예산을 책정하는 것이 과연 본질목회인가? 가장 바람직한 조직구조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은혜 받고 분명한 목적과 비전을 가진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형성하는 소그룹의 형태이다. 위에서 지시하는 형태로 구성된 조직은 오래가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 분명한 목적을 기술하지 못하는 모든 조직은 구조조정 되어야 한다. 대게 교회의 민첩성과 역동성을 제한하는 치명적인 장애물이 소그룹이 아닌 관료주의적 중간그룹 때문이다. 그리고 목적이 없는 모든 소그룹 역시 이러한 장애물로 작용한다. 그래서 교회를 참으로 개혁하고자 한다면, 목적이 없는 모든 소그룹을 폐지하든지 혹은 제한해야 하며, 중간 그룹이나 중간관리자의 권한을 폐지하거나 대폭 축소해야 한다. 거품을 빼지 않으면 재빨리 움직일 수 없다. 급변하는 상황에 긴급하게 대처하는 구조로 만드는 것이 조직갱신에 매우 중요한 작업이다. 교회 조직의 개혁을 위해 공식이 있다면 이것이다. “목적이 분명한 소그룹과 전체 집회만 남기고 나머지는 과감하게 잘라내어라.” 이것은 교회 직분에도 적용되어야 한다. 교회의 생명력을 약화시키는 주범이 누군가 하면 바로 섬기지 않고 직분을 가지고 있는 자들이다. 봉사하지 않고 가르치지 않고 소그룹을 섬기지 않는 자가 장로가 되고 권사가 되기 때문이다. 봉사하지 않는 모든 직분자는 구조조정의 대상 리스트에 올라가야 한다. 비전과 목적을 상실하면 구조나 위원회나 직분도 상실되어야 하는데 원래의 비전과 목적을 상실했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구조나 직분을 유지하려는 경향이 있는데 바로 이것이 교회가 제거해야 할 영적 거품인 것이다. 예를 들면, 목사는 강단을 섬기지 않으면 직분을 내어놓아야 하고, 장로는 소그룹을 섬기지 않거나 봉사하지 않으면 직분을 내놓아야 한다. 무슨 선교회나 위원회도 마찬가지다. 원래의 취지와 비전과 목적을 상실했으면 임원제도나 조직구조도 과감하게 폐지해야 한다. 어떤 조직에 있어서도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기 위해 기도하고, 말씀을 가르치고, 서로 친밀하게 교제하는 이 목적이 분명해야 한다. 이 목적 또는 본질에 철저함이 기본 감각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 본질목회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자질은 ‘균형감각’이다. 기도와 말씀, 즉, 성령과 성경을 동시에 강조하고 추구하되, 성령의 역동적인 역사에만 치우치지 않고, 또 성경의 지적인 강해 에만 치우치지 않도록 세심하게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요즘 많은 현대교회들이 프로그램이나 전도행사를 통해 교회성장을 꾀하는 것을 본다. 그러나 갈보리채플에서는 찬양과 성경강해 이외에 다른 프로그램을 환영하지 않는다. 교회 주관으로 하는 총동원주일이나 태신자 초청행사 등의 프로그램이 없다. 척 스미스 목사는 전도의 중요성을 인식하지만 전도행사에 대해서는 아무 걱정을 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전도할 수 있도록 먹이는 일과 준비시키는 일을 걱정하고 있다. 전도할 수 있도록 준비시켜 놓으면 전도는 절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오늘날 많은 교회가 인위적 프로그램을 가지고 교인들에게 전도의 부담을 지우는 것과 대조를 이룬다. 교인들이 나가서 전도하지 않는 이유는 목회자 자신이 교인들을 전도할 수 있는 전도자로 먹이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무슨 과도한 전도행사를 개최하여 교인들로 하여금 억지로 전도하게 하는 것은 목회자의 책임을 회피하는 것이다. 자연스럽게 그리고 저절로 전도가 이루어지도록 하는 일이 중요하다. 교인들이 나가서 전도하지 않으면 견디지 못할 정도로 말씀으로 풍성하게 먹이기만 하면 된다는 것이다. 교인들은 나가서 세상사람들에게 하나님과 복음에 대해서 무엇을 말해야 할 지 모른다. 마땅히 증거 할 말씀을 집어 넣어주지 않고 나가서 전도하라고 하면 무책임한 행동이 아닌가? 내가 먼저 말씀으로 변화되기만 하면 나가서 다른 사람들에게 나의 변화를 이야기하게 될 것이다. 내가 배불리 먹게되면 다른 사람들도 초청하여 같이 배불리 먹도록 할 것이다. 이렇게 특별행사나 프로그램에 의존하지 않기 때문에 갈보리채플의 목회사역은 본질목회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척 스미스 목사가 이해한 목회의 본질은 “풍성하게 먹이는 것”이다. 행사를 기획하거나 프로그램을 개발하는 것은 본질목회와 동떨어진 것이다. 행사나 프로그램이나 무슨 위원회나 무슨 조직을 편성하는 것은 인간적인 노력으로 열매를 맺으려 하는 시도들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무슨 행사나 프로그램이나 조직이 전혀 나쁘다는 것이 아니라 순서에 있어서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즉, 그러한 것들은 철저하게 ‘잘 먹은 다음에’ 나타나야 한다는 것이다. 말씀공부와 가르침의 결과로서 자연스럽게 따라나와야 하는 성질이다.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잘 먹이지는 않고 무슨 행사, 무슨 프로그램, 무슨 기관을 만드는 것은 목회의 본질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면 먹이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들에게 하나님을 말씀을 깨우치는 것이다. 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알게 하는 것이다. 그들에게 하나님에 대해 더 가까이 나아가도록 말씀으로 돕는 것이다. 그들에게 하나님을 더 사랑하도록 돕는 것이다. 그들에게 활용할 수 있는 말씀의 검을 쥐어 주는 것이다. 그들에게 이웃에게 자신의 신앙을 소개할 수 있는 확신을 집어넣어 주는 일이다. 그들에게 마땅히 ‘할 말’을 입에 집어넣어 주는 일이다. 그들이 목숨 걸만한 ‘말씀’을 가르치는 것이다. 그들이 붙잡고 살 수 있는 하나님의 은혜의 약속들을 그들의 가슴에 손에 쥐어 주는 것이다. 그들의 가슴이 말씀으로 희망에 부풀고 용기에 사기충전 하도록 돕는 일이다. 오직 하나님이 그 백성에게 주시는 은혜와 소망의 말씀으로 가능한 것이다.
척 스미스 목사가 이해한 목회의 본질은 목사는 몸을 잘 먹여야 한다는 것이다. 몸을 잘 먹이면 전도는 열매로 저절로 맺혀진다는 것이다. 갈보리채플에서 중요한 사역의 공식이 “양이 양을 낳는다”는 말이다. 즉, 건강한 양이 나가서 잃어버린 자들을 찾아 올 것이다.
“강건한 양은 어떤 인위적 프로그램 없이도 자연적으로 새로운 양을 낳게 될 것입니다. 강건한 양은 믿음을 나누고 선교에 대한 짐을 지고 잃어버린 양을 찾아 나설 것입니다. 우린 이들을 부추기거나 밀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될 것입니다. 양에게 먹이를 먹이면 이들은 성장하여 아름답고 건강한 다른 양들을 낳을 것입니다. 선교계획 전도활동, 사회적 구제사업 등 모든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이것들은 모두 착실한 성경경부에 따른 그냥 얻어지는 부산물이며 열매입니다. 평화를 찾아다닌다고 찾을 수는 없습니다. 오직 예수님 안에서만 찾을 수 있습니다. 그분을 찾으면 평화도 자연스럽게 얻게 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선교 전략 프로그램도 하나님이 없다면 직접적으로 세울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올바른 말씀을 먹인다면 선교는 자연스럽게 이루어질 것입니다.”(아름다운 목양의 샘터, pp.68,69)
척 스미스 목사가 이해한 목회의 본질은 성령과 동행하는 것이 바로 목회의 본질이라는 것이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구하고, 그것에 민감하며, 그것에 즉각적으로 순종할 수 있는 유연성 있는 자세가 매우 중요하다는 것이다. 갈보리채플의 성경대학 학장인 래리 테일러는 다음과 같이 목회의 본질을 설명한다.
“만약 여러분이 자신의 왕국을 세운다면 그 일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휴식을 취하며 하나님의 은혜와 영광 속에서 성령님의 전능하심을 의지한다면 모든 일이 즐겁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일을 하는데 지칠 수도 있겠으나 결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예수님을 의지한다면 일에 지쳐서 ‘녹초’가 된다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성령의 ‘감화’(inspiration)로 사역하기를 원하시지 땀 흘리는 것(perspiration)을 원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여러 가지 프로그램으로 사역을 하려고 한다면, 그것은 예배를 과장하는 것이 되거나 감정주의로 나가게 되어 결국에 가서는 우린 완전히 지쳐 버리게 될 뿐 아니라 그 동안 우리가 만든 것(행사, 프로그램, 조직, 규칙)을 지켜 나가기 위해 온갖 노력을 해야 합니다. 진실한 성령 감화는 완전히 하나님께 순종할 때 마음으로부터, 그리고 끊임없이 주시는 시편, 찬양과 영적 음악 등으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성령 충만한 상태의 생활로부터 나옵니다. 척 스미스 목사님은 사울 왕의 아들 요나단처럼 믿음의 모험을 즐깁니다. 하나님이 어떤 일을 원하시는지 알아보는 것을 좋아합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어떤 길로 움직이기를 원치 않으시면 그대로가 좋습니다. 여러분은 한 발 물러나서 따르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나 때로는 하나님께서 강하게 역사 하시며 누군가 베드로처럼 배 밖으로 나와 물위를 걷기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책임이 있고 예수님께서 자신의 교회를 (우리의 도움 없이) 세우신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는 여러분들은 힘들이지 않고 걱정 없이 휴식을 취할 수 있습니다. 때로는 하나님이 어떤 특별한 사역에 개입하지 않으므로 그 일에서 거두어야 할 열매가 부족한 것을 통해 하나님의 능력을 깨닫게 됩니다.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괜찮습니다. 만일 하나님이 개입하지 않으신다면 그냥 내버려두십시오. 이것이 바로 척 스미스 목사님 사역의 각 분야가 재정적으로 독립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으로 축복하시게 하는 길이며 함께 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을 함께 하시도록 하게 하는 것입니다. 모든 교회의 사역들이 같을 필요는 없습니다. 하나님은 어느 교회와 같이 이곳에도 서점을 만들든 가 또는 저곳에 순회 음악 사역 등을 원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것을 그냥 두십시오. 다만 그와 함께 하십시오”(아름다운 목양의 샘터, pp.24~29)
성령의 능력을 의지하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구하고, 성령과 동행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유연성이 있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유연성이 없으면 이 원리를 실행할 수 없습니다. 유연성의 결여로 우리는 종종 미리 계획된 프로그램에 이끌려 이느덧 우리 생활이 엄격히 조직화되고 예정된 것을 선호하게 됩니다. 그래서 언제 무엇을 해야 하는지 자신이 미리 알고 있습니다. 코스타 메사를 비롯한 수많은 갈보리채플들은 어떤 사역이든지 유동적으로 성령의 인도하심에 대처해 나갑니다. 즉, 하나님이 언제 어느 때 어떤 일을 지시하셔도 ‘즉각적으로’ 대처할 수 있게 준비되어야 합니다. 여러분도 이렇듯 유동적이지 않다면 끝내는 부러지고 말 것입니다. 사역에 있어 방해란 있을 수 없습니다. 오직 다른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행할 기회뿐입니다. 우리 생활이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살아간다면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 그 음성을 잘 듣고 순종해야 합니다. 계획을 세우는 것이 반드시 나쁜 것은 아니나 대부분의 경우 결국에 가서는 그것의 노예가 되고 말아 버립니다. 하나님께서는 다른 계획이 있을지도 모르는데 나는 오늘 편지를 쓴다든지 행정적인 일을 처리할 계획을 고집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나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은 병원을 심방 하거나 상담이 필요한 사람과 예수님의 사랑을 함께 하는 일인지도 모릅니다. 이와 같이 성령과 함께 한다는 것은 언제든지 나의 계획을 변경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어찌되었든 하나님이 원하시는 모든 것은 잘 될 것입니다. 물론 우린 부지런해야 하며 시간을 잘 관리하는 청지기로서 유동적이어야 합니다. 준비된 상태에서 하나님이 어디로 이끌어 가든지 기꺼이 갈 수 있도록 계획의 변동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유동적이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축복하시는 커다란 사역 속에는 여러분에게 성경 공부를 가르치거나, 누군가와 함께 기도하거나, 상담을 해 주게 하는 일도 있습니다만 에어컨을 고치라는 등의 순간적 부르심이 있기도 합니다. 우리가 그의 지시에 따라 유동성을 가질 때 결코 실패하지 않습니다.”(아름다운 목양의 샘터, pp.32~36)
전도행사를 개최하여 모인 사람들에게 전도하라고 설교하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안는다고 한다. 전도하라고 전도하는 것이 아니라 전도는 열매이기 때문에 전도되어지도록 해야 하는 것이다. 전도되어지도록 하려면 양떼들은 강건하게 먹여야 하는 것이다. 몸이 자라기 위해서는 매주일마다 성경말씀을 잘 먹이고 제자훈련 과정으로 리더십 과정을 두어 집중적으로 제자를 가르치면 성숙한 크리스천들이 나오게 되고 그들은 나가서 저절로 증거자의 삶을 살게 된다는 것이다. 전도하라고 하기 이전에 먼저 풍성하게 먹이고 준비시키는 작업을 하라. 목회자의 사명은 전도행사를 기획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을 온전하게 하며 성도를 풍성한 말씀으로 먹이는 것이다. 척 스미스 목사는 갈보리채플의 본질을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사도행전에서 우리는, 교회가 태어나니 믿는 자들은 성실하게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를 계속했다 함을 배웠다. 이 네 가지 요소야말로 초대교회를 특징지어 주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네 가지는 우리 갈보리채플의 특징이기도 하다. 이러한 본보기를 우리는 꾸준히 그리고 성심껏 강조하고 추구하며 실천에 옮기도록 해왔는데, 초대교회에서 그랬듯이 주님은 날마다 우리의 수를 늘려 주셨다.”(위대한 추수, p.253)
척 스미스 목사의 첫 열매 중 하나인 제자 라울 A. 리스 목사는 다음과 같이 본질목회를 설명한다.
“사람들은 선교지에 가서 보통 대량 전도에 목표를 두고 거기 열중하지만 우리는 그렇게 안하고 거꾸로 합니다. 나는 어디 가든 소규모 성경공부를 시작하고 거기서 구원받게 되는 그곳 사람 중 몇 명을 선택하여 제자훈련으로 준비시키고 성경을 가르쳐 그곳에 교회를 세우게 한 후, 그 교회를 맡기는 식으로 했습니다. 그렇게 하니까 저절로 전도도 괴고 전도 받은 사람이 나가는 교회는 양들을 먹으려 하지 않고 먹여주며, 때리려 하지 않고 사랑해 주는 교회가 됩니다. 이게 바로 척 스미스 목사의 목회철학이었는데 세상에서 가장 많은 사랑을 먹고 자란 양을 키우는 것이지요. 그건 또 우리의 철학이기도 합니다.”(믿음의 모험)
따라서 본질목회를 하려면 무슨 위원회, 무슨 조직 같은 것을 축소해야 한다. 성경에 근거한 교회의 본질에 부합하지 않는 모든 관료적 모임이 구조조정 되어야 한다. 본질에 입각하지 않는 모든 모임들이 교회의 영적 거품현상으로서 교회의 생명력을 빼앗아 가는 저해요소들이다. 따라서 본질에 입각해서 목회 하고자 하는 사람은 무엇보다 교회가 관료화되어 가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 교인들의 영적 필요에 즉각적이고도 적극적으로 대처할 수 있도록 조직의 유연성을 유지하도록 하는 일에 세심한 배려를 기울여야 한다. 일반 교회를 보면 수많은 위원회, 중간조직, 복잡한 행정절차, 관료주의적 요소들이 교회의 생명력을 약화시키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 본질 이외의 것, 즉 “조직이나 활동” 등을 강조하느라 본질에 집중할 에너지를 모두 낭비하고 마는 것이다. 갈보리채플은 이러한 관료주의적 행정주의적 비효율성을 매우 싫어한다. 그래서 기계적인 조직이 아닌 생명력이 약동하는 유연한 조직, 유기적인 조직이 되기 위해서 본질을 추구한다. 한 두 가지 핵심을 추구하고 집중할 때는 몇 가지 비본질적인 요소를 덜 강조하는 모험을 감수해야만 하는데 갈보리채플은 이런 점에서 효율적인 사역의 모델을 제공해주고 있다. 갈보리채플은 프로그램에 의한 인위적인 교회 성장운동을 비판하고 있다. 또한 조직의 관리 위주로 엄격하게 움직이는 그런 교회 분위기도 배격하고자 한다. 이에 대해 척 스미스 목사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오늘날 대부분의 미국 교회들은 고도로 조직화되어 있고, 또 고도로 프로그램화되어 있다. 이는 교회가 철저하게 교인들에게 의존하고 있으며, 따라서 교인은 교회에 의존한다는 뜻이다. 우리 갈보리채플은 전적으로 하나님에게만 의존하고 있기 때문에 조직 면에 있어서 그러한 긴박감을 찾아볼 수가 없다. 오늘날 미국 사람들의 대부분이 조직에서 벗어난 자유롭고 부담 없는 부서에서 안정을 찾고 있다는 사실에 착안함을 흥미로운 일이다. 그러므로 많은 교회가 메마르고 비좁은 연못에서 고기를 찾느라 애쓰는 동안, 우리는 그 광활한 호수에서 제멋대로 뛰노는 고기떼(형식에 얽매이기 싫어하는 현대인들을 지칭하는 표현--필자주)들을 무더기로 혼자서 건져내고 있는 것이다.”(위대한 추수, p.253)
그러나 다른 모임이나 행사들을 무조건 제한해야 한다는 말은 아니다. 갈보리채플에는 여러 가지 다양한 모임이 있다. 알콜 중독자를 위한 모임, 대학생 모임, 소수민족 모임, 여 선교회, 특강모임, 독신부모모임, 등 많은 소모임(small group)들이 활동한다. 또, 영아구제사업이나 낙태반대사업, 극빈자 구제사업 등 적극적인 사회사업활동도 많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러한 모임과 사회사업활동이 자발적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교회가 전체적으로 강조해서 되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자원하는 자들이 자발적으로 하도록 내버려두는 것이다. 갈보리채플의 수많은 소그룹모임과 다양한 사역활동은 상부 지시적(top-down) 방식에 의해 형성된 것들이 아니다. 억지로 하게 하는 것들이 없다. 갈보리채플에서는 오직 열매보다도 자연스러운 열매를 가능하게 만드는 본질을 추구하고 있다.
또한 갈보리채플이 사회운동에 대해서 무관심하다는 오해 역시 갈보리채플의 본래 면모를 잘못 파악한 것이다. 원래 갈보리채플은 히피들의 영혼구원을 목표로 70년대 예수 운동의 선봉장이 된 것은 순전히 영적인 것에만 관심이 있다고 볼 수 없는 것이다. 갈보리채플 운동은 당시 6,70년대의 미국 히피문화에 다른 교회들이 회피하고 비난하고 있던 반면에 적극적으로 대처하고자 했다. 라디오 방송인인 존 스튜어트는 갈보리채플의 사회성을 다음과 같이 평가하고 있다.
“목회는 바로 당신이 속한 그곳입니다. 그곳이 방송이 될 수도, 언론이 될 수도, 텔레비전, 라디오, 기타 인쇄매체가 될 수도 있습니다. 혹은 의학, 법률, 윤리, 교육이 될 수도 있기 때문에 이 모든 분야, 한때 세상 사람들에게 주고 떠나왔던 모든 분야를 교회가 다시 차지해야 할 것입니다. 어째서 세상이 이렇게 어두우냐고 개탄하면서도 우리들은 사회변화를 가져올 전략을 토의하는 데만 많은 시간을 보내고 실제로 밭에 나가서 추수하는 일은 소홀히 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이 일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한 세대가 적극적으로 나서서 문제의 원인을 분석하고 그 원인을 그리스도와 더불어 생각하려 하고 신앙을 그곳에 적용하려는 운동이 생겨나고 있는데 갈보리채플에서도 이 일을 하고 있습니다.”(믿음의 모험)
척 스미스 목사 자신은 이에 대해 어떻게 설교했는지에 대해서 한번 들어보자.
<인본주의적 프로그램에 의한 교회운영에 대한 비판함>
“그러나 불행하게도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욕심을 좇아 행함으로써 하나님께서 그들을 떠나셨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여전히 하나님께서 자기들과 함께 하고 있다고 생각하면서 스스로를 속이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 옛날 삼손도 그랬습니다. 성경에 보면 삼손은 들릴라에게 속고 나서 ‘내가 전과 같이 나가서 몸을 떨쳐 저 블레셋 사람들을 다 해치워 버리리라!’고 했지만, 여호와께서 이미 자기를 떠나신 줄을 미처 깨닫지 못했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나서 자기 힘만 믿고 뛰어나갔던 삼손을 블레셋 사람들은 붙잡아 그 눈을 빼고 감옥에 가둔 뒤 맷돌을 돌리게 하였습니다.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들이 한 때 성령의 능력에 의지하여 했던 일들을 이제는 그와 같이 육신의 힘에 의지하여 이루어 보려는 노력하는 모습들을 볼 때 우리는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 길이 없습니다. 오늘날 우리 주변의 교회들이 하나님께서 함께 해주시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그 전에 하나님께서 친히 역사 하셨던 일들을 인간의 힘으로 계속해 보려고 애쓰는 경우를 우리는 얼마나 자주 볼 수 있습니까? 이것은 참으로 딱하고도 슬픈 광경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겉모습은 아직도 옛 모습을 유지하고 있으되, 그 안에는 성령께서 친히 이루어 내셨던 살아있는 생명의 능력이 결핍되어 있기 때문입니다.”(기도와 치유, pp.34,35)
<행사보다는 성령의 임재를 더 소중히 여기라는 권고>
“요한계시록에서 예수님은 일곱 교회에 편지를 쓰셨는데 그 중 첫 번째로 에베소 교회에 이르시기를 ‘내가 네 행위와 수고를 안다’고 하셨습니다. 그렇게 시작하였으나 곧 이어 예수께서는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네가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그러므로 이제 네가 어디서 그것이 떨어졌는가를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임하여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그 자리’란 1장에 나와 있듯이 ‘인자 같은 이가 일곱 촛대 사이를 걸어다니시는 곳’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더 이상 교회와 함께 해주시지 않을 것이라는 경고를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분명 ‘내가 네 행위와 수고를 안다’고 하셨습니다. 요즘 말로 하자면 네게 있는 모든 위원회들과 그들의 분주한 행사들을 안다는 말씀입니다. 오늘날 이와 마찬가지로 육신의 열기 속에서 분주하기 짝이 없게 돌아가고 있는 교회가 우리 주변에 너무도 많이 있다는 것은 참으로 슬프고 비극적인 사실입니다. 이들에게는 분명 ‘행위와 수고’는 있다 하겠으나, 성령의 역사하심이 없는 것이 문제입니다. 주님이 이미 떠나버리신 것입니다. 그런 교회의 정문 위에는 커다란 글씨로 ‘이가봇’이라 쓰여져 있습니다. ‘주님이 이미 떠나셨도다!’ 하나님께서 친히 함께 하시지 않는다는 것은 차라리 교회가 문을 닫은 것만도 못합니다. 일곱 교회 중 마지막 교회인 라오디게아 교회에 쓰신 편지에서 예수님은 ‘볼지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제는 예수님께서 교회 밖에 계신다는 말씀입니다. 교회문 밖에 서 계시면서 안으로 들어오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예수님을 교회 밖으로 내쫓아 버린 것입니다.”(교회와 치유, pp.35,36)
<행사보다는 성령을 의지하라는 권고>
“우리들이 어떻게 잘 해보면 사람의 노력과 능력으로 그것을 해낼 수 있을 것 같지만 성령께서 이루셨던 역사는 결코 사람들의 힘으로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함께 해주시지 않는다면 교회 안에서의 참된 발전이란 그 어떤 방법으로도 이루어질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 사람들에게 쓰기를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진리가 너희 눈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고 질책하였습니다. 교회사를 살펴볼 것 같으면 큰 부흥운동과 같은 참된 하나님의 역사는 언제나 사람들 사이에 하나님의 성령이 직접 역사하심으로써 시작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가면서 사람들은 자신들의 행위나 생각, 혹은 자신들이 속한 단체의 힘 따위로 하나님의 성령을 대신하려고 합니다. 그리하여 결국은 육신의 능력과 열기로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계속하거나 흉내내려고 하게 됩니다. 그러다 보면 머지않아 교회는 죽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삶 속에서 하나님이 함께 해주시는 것을 얼마나 소중하게 여기고 있습니까? 하나님 없이는 앞으로 나아가고자 하지 않을 만큼 하나님께서 함께 해주심이 여러분들에게 소중한 일입니까?”(기도와 치유, pp.36,37)
<프로그램보다는 성령을 의지하라는 권고>
“하나님께서는 오늘날 뭇 교회들에게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주마고 약속하신 땅으로 들어가 그것들을 점령하라는 도전을 주고 계십니다. 우리는 그것을 어떻게 이뤄내야 합니까? 가장 똑똑한 사람들만 골라 모아서 한 위원회를 만들고 그것으로 씽크탱크(think tank)를 삼으면 되겠습니까? 아니면 우리가 속해 있는 지역 사회의 인구분포와 사회적 성향 등을 면밀히 조사하여 주민들이 필요로 하는 것들을 채워주면 되겠습니까? 그 필요에 따라 여러 위원회들을 세우고 그에 걸맞는 프로그램들을 개발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그들에게 전하는 저 위대한 ‘사업’을 벌이면 되겠습니까? 우리들의 육신과, 우리들의 지혜와, 우리들의 능력을 총동원해서 말입니다. 글쎄요? 차라리 문을 닫고 모둔 집으로 가버리는 편이 더 나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아예 계시지 않으면 반드시 실패하고 말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해주시지 않는다면 그것은 에너지의 낭비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여호와께서 집을 세워주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는 헛된 것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친히 우리와 함께 가주시지 않는다면 아무 데도 가려고 해서는 안될 것이요, 있는 그 자리에서 꼼짝 안하고 그대로 있는 것이 최상책일 것입니다.”(기도와 치유, pp.39,40)
<하나님을 형식으로 제한하지 말라는 권고>
“저는 모든 사람의 개성과 필요에 따라 역사 하시는 주님의 섭리를 생각할 때 더욱 감사하게 됩니다. 모든 사람을 개인적으로 만나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각 사람의 개성을 알고 계십니다. 그분은 우리 각자에 대해서 이렇게 개별적인 방법으로 역사 하시는데 어떻게 우리가 하나님의 역사를 어떤 규격화된 유형에 맞추겠습니까? ‘하나님이 나에게 이렇게 역사 하셨으니 당신에게 이와 똑같은 방식으로 역사가 일어나지 않는다면 당신의 하나님은 내가 믿는 하나님이 아닐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당신은 당신대로 따로 교단을 만들고 나는 나대로 교단을 만듭시다.’ 이렇게 자기 생각대로만 하나님을 규정하는 사람들이 오늘날 얼마나 많습니까?.....기독교는 우리들이 서로 다른 만큼이나 다양함이 허용될 수 있는 공간을 갖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각자에게 각각 다르게 역사 하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일정한 형식으로 묶지 마십시오. 다른 사람이 겪었던 똑같은 경험을 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는 가장 적합하고 독특한 형태로 우리를 만나주십니다. 하나님과 이러한 개인적인 교제를 누리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 속에서 역사 하시는 방법들은 그 다양성에 있어 무한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사랑과 성령의 놀라운 역사에 대해 감사드립니다. 날마다 하나님의 선하심과 축복 속에 거하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너무도 좋으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과 함께 있는 특권을 주신 것을 감사드립니다.”(마태복음 강해, pp.115,116)
분명 복음의 본질을 진정으로 추구하는 목회는 반드시 사회가치기준과 도덕풍조까지 변화시키게 될 것이다. 복음의 본질은 사람의 깊은 내면을 변화시킬 뿐만 아니라 사회의 정신구조까지 변화시키는 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교회가 사회의 정신구조를 변화시키지 못하는 이유는 자체 조직을 관리하느라 에너지를 낭비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상교회는 좀더 복음의 본질을 회복하기 위해 비(非)본질을 제거하는 개혁을 더 심오하게 수행해 나갈 필요가 있다. 사회에 소외되고 천대받고 비난받는 이웃들에게 접근하여 그들과 친교를 나누며 그들과 복음의 떡을 서로 나누는 이 일을 교회가 아니면 그 어느 누가 할 것인가?
지금 한번 냉철하게 자신과 자신의 목회를 돌아보자. 무엇이 과연 본질인가? 성경에 근거해서 본질이 무엇인지 한번 찾아보자. 내가 생각했던 그 ‘본질’이 혹시 성경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사회관습이나 교회전통이나 내 경험이나 상식 등에 근거한 것이 아니었는가? 내가 추구할 본질이 무엇인지 다시 한번 성경을 통해서 정립하고, 내가 버려야 할 비본질적 요소가 무엇인지 살펴보고 과감하게 거품을 빼도록 하자. 이를 위해 사역자들이 말씀 앞에서 서로 허심탄회하게 그리고 겸손하게 대화를 나누어보자. 담임목회자의 목회철학이 과연 성경에 철저하게 근거하고 있는지 정직한 조언을 듣도록 해보자. 본질에 관해서 밤새도록 토론하고 고민하는 것은 결코 시간 낭비가 아니다. 복음의 본질, 목회의 본질, 교회의 본질에 대해서 숙고하라.
3)믿음목회(faith ministry)
믿음목회라 함은 하나님의 일을 하는데 있어서 발생하는 어떤 필요를 채우기 위해 사람이나 조직에 의존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허드슨 테일러나 죠지 뮬러가 했던 것 같이 그는 사람들에게 절대로 재정을 언급하지 않는다. 돈을 요구하지 않는다. 그는 목회 하면서 이것을 하나님과 약속했다고 한다. 하나님이 궁핍하지 않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요구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왜냐면 하나님의 뜻대로 하나님의 일을 한다면 필요 역시 하나님이 당신의 방식과 능력대로 채우실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어떤 일이 진행되기 위해서 사람에게 도움을 호소해야만 한다면 그것이 하나님의 일이 될 수 있는가? 척 스미스 목사는 아니라고 분명히 대답한다. 그는 철저하게 하나님의 공급하심 가운데 거하고자 한다. 그래서 그는 목회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 중에 하나가 재정의 투명성이라고 강조한다. 또한 그는 교인들에게 다른 목회광고를 하지 않는다. 그가 인도하는 집회시간에는 성경을 읽어오라는 말 이외에는 다른 광고를 일체하지 않는다. 이것은 그가 믿음목회를 하고자 하는 증거이다. 이 믿음목회의 철학과 정신이 그의 제자들이 급속도로 성공하는데 중요한 요소로 작용했음이 분명하다. 갈보리채플의 믿음목회는 재정에 있어서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척 스미스 목사는 이렇게 말한다.
“갈보리채플은 성도들에게 일체 돈을 요구하지 않는다. 우리 교회는 일체 신앙 서약 또는 연례 서약을 통해 교인들의 돈을 강요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라디오나 텔레비전을 통해서도 기금에 대해 전혀 호소하지 않는다. 교회에서 돈을 구걸함은 하나님에 대한 모독이다. 그래서 이것을 우리의 불문율로 삼고 있다. 그러므로 재정적인 결백성은 이 교회의 중심을 이루고 있다.”(위대한 추수, p.28)
교회가 해야할 사역을 해내기 위해 당연히 도움의 손길이나 재정의 공급이 필요하다. 재정의 공급이 전혀 없이 할 수 있다는 말이 아니다. 그러나 갈보리채플은 필요를 채우는 방법으로서 전적으로 하나님만 의지하고자 한다. 그래서 각 사역 파트는 예산의 지원이 없이 자체적으로 독립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다. 하나님이 시작하신 일이라면 하나님이 공급하실 줄 믿고 기다려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재정의 모금이나 기타 필요에 대해 일체 언급하지 않는다. 이것은 갈보리채플이 믿음사역을 하려는 몸부림이다. 하나님이 친히 공급하신다는 이 믿음으로 목회 하려는 그의 열정이 당연히 그의 설교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믿음목회를 하려면 우선 하나님을 막지 않으려는 신념이 있어야 한다. 이러한 믿음사역의 원리를 가르쳐주는 그의 설교를 들어보자.
“...이런 일들만 보아도 하나님을 막으려 했던 사람들은 보통 그로 인해 큰 고난을 겪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일반적으로 우리들의 삶을 통해 역사 하시고자 원하시는데, 그 하나님을 우리들이 막으려고 해 볼 수는 있습니다. 한 예로, 하나님께서는 요나를 통해 역사 하시기를 원하셨으나 요나는 하나님을 막아보려 하였습니다. 그래서 다시스로 도망치려 했지만, 하나님께서 그를 통해 이루고자 하셨던 일을 막으려고 했을 때 요나는 얼마나 큰 고통과 고난을 겪어야 했습니까? 저는 종종 이런 표현을 사용하곤 합니다. ‘일을 쉽게 만드는 방법과 일을 어렵게 만드는 방법이 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대로 맡겨드리면 그분의 뜻에 따르면 복을 받고, 우리들의 삶 속에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시고자 하시는 복과 인도가 무엇인지를 알 수 있게 되지만, 반대로 하나님께 저항하면 점점 더 일을 어렵게 만들뿐이라는 말입니다.”(기도와 치유, pp.166,167)
믿음목회란 하나님이 토기장이이시므로 그가 빚어 가는 대로 맡기는 것이라고 말한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대로 온전히 하나님의 뜻에 따르며,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을 통해 무엇이든 하실 수 있도록 맡겨드린다는 것, 이 얼마나 엄청난 복입니까? 그럼으로써 우리는 우리를 위해 예비해 두셨던 하나님의 위대한 계획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위대한 토기장이이신 하나님께서는 그 마음속에 우리 각자의 인생에 대한 계획을 가지고 계십니다. 우리 인생 속에서 그 계획을 실현해나가시면서, 하나님은 우리 인생의 목적과 결과를 하나씩 이루어나가고 계시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이것을 두고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신 선한 일’이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계획 속에는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 안에서’ 그리고 나서는 ‘우리를 통하여’ 이루고자 하시는 일이 있으며, 그 일이 무엇인지를 하나님께서는 잘 알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의 인생에 개입하시고, 그것을 빚어나가시며 하나님께서 원하는 형태로 만들어 가시는 것이며, 그러면서 또한 우리를 위해 예비해 두신 저 하나님의 일에 적합하도록 우리들을 준비시키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과정이 진행되는 동안 우리들은 때로 토기장이의 마음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여 그분의 뜻에 저항하기도 합니다. 하나님이 하시려는 일을 막으려는 셈입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만들고자 하시던 그릇은 예레미야가 토기장이의 집으로 내려가서 보았던 광경에서처럼 토기장이의 손에서 일그러지게 되고, 그러면 토기장이는 다시 그 만들던 그릇을 으깨어 형체 없는 진흙덩이로 뭉쳐버립니다. 그리고 나서 한참동안 손으로 주물러 딱딱해진 부분을 없앤 후, 그것으로 자기 마음에 맞는 그릇을 새로 만들게 됩니다. 그 광경을 보여주시고 난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에게 말씀하시기를 ‘나는 토기장이요, 이스라엘은 진흙이니, 진흙이 토기장이의 손에서 일그러지게 되었으므로 내가 그것을 다시 뭉쳐 내 마음에 드는 그릇을 새로 만들겠노라’고 하셨습니다. 바로 이러한 일들이 우리 인생에서도 종종 일어나곤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 인생을 빚어나가실 때에 우리들은 때로 그 하나님의 손길을 막으려고 하고 그 때문에 하나님께서 빚으려 하시던 그릇이 일그러지게 되면 사랑과 인내심이 많으신 하나님은 처음부터 새로 시작하시곤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렇게 새로 시작하실 때, 우리들은 저 일그러진 그릇을 뭉쳐 다시 주물러 주시는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우리에게 억센 손맛을 보게 하시는 것도 다 저 딱딱해진 부분을 없애서 진흙반죽을 부드럽게 만들기 위한 것이지요. 하나님은 참으로 인내와 사랑이 넘치는 분이시므로 우리들은 새로 빚어서라도 원래 하나님의 마음속에 갖고 계시던 계획을 우리들에게 이루어 주시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의 마음속에 어떤 계획이 있는지 우리가 알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대로 따르는 길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뜻을 버리고 하나님의 뜻에 항복하는 것이요, 하나님을 막으려 하거나, 하나님과 싸우려 하거나, 하나님께 저항하려 하지 않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하시는 대로 따르려 함으로써 우리는 토기장이의 마음속에 있는 계획을 발견할 수 있게 됩니다. 하나님의 마음속에 항상 있어 왔던, 나를 향한 하나님의 선하신 계획을 말입니다. 오, 하나님의 일을 막으려 하지 않고, 우리를 빚으시는 저 손길에 모든 것을 맡긴 채 하나님께서 하시는 대로 따르며, 온전히 하나님 앞에 항복한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입니까?”(기도와 치유, pp.168-170)
갈보리채플의 중요한 사역공식이 바로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곳에는 하나님의 공급하심이 따른다”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일은 모든 필요한 것을 하나님이 준비시켜 주신다”라는 말이다. 그 근거 구절이 빌립보서 4장 6절, 12절, 19절 등이다. 래리 테일러 학장은 갈보리채플의 믿음사역의 원리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교회의 재정을 늘리기 위해 성도들에게 요구하거나 교묘하게 속이는 것은 어떠한 이유이든 결코 옳은 것이 아닙니다. 통상적으로 그렇게 할 때에는 우리 자신의 뭔가를 유지하려 하거나 세우기 위해 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인도하시는 곳에는 언제나 모든 것을 공급해 주십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많은 교회의 목사님이나 사역자들이 교회 사역에 필요한 많은 재정적 부담을 어떻게 하면 성도들에게 충당시킬 것인가에 대하여 머리를 짜내고 있습니다. 그러나 갈보리채플에서는 그러한 일에 시간을 낭비하지 않습니다. 얼마 전 한 부인이 돈 많은 남편에게 갈보리채플에서 열리는 추수 감사 예배에 가자고 설득했습니다. 그날 척 스미스 목사님은 ‘우리 모두 물질적으로 어떻게 축복 받은 것을 생각하며 함께 나눕시다’라고 역설하였습니다. 이 말을 들은 이 남자는 여기도 돈을 달라고 하는 자가 있군 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때 척 스미스 목사님은 우리 가운데 누군가가 가난하여 가족들과 함께 추수 감사절을 즐길 수 없는 분들을 위하여 최고의 칠면조를 무료로 나누어주고 있으니 교회 사무실로 연락하라고 사람들에게 격려했습니다. 이 말을 듣던 돈 많은 남자는 자신을 부끄러워하며 회개했습니다. 사실 그는 자기의 돈을 달라고 요구하지 않는 교회를 한번도 본 적이 없기 때문에 교회 나가기를 꺼려했었습니다. 그러나 척 스미스 목사님의 말씀으로 이 부자는 하나님 품으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돈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그는 가난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왕국은 파산으로 흔들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어떤 분들은 사람들을 도와주라는 성경적 원리를 배워 이를 행할 때 이들은 축복 받을 수 잇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고 항거할 것입니다. 물론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원리들은 소선지서나 사도 바울 서신을 가르칠 때 성경 구절에서 자연스럽게 가르치십시오. 단지 부족한 재정으로 인해 특별한 말씀이 아닌 것으로 말입니다. 가르치는 동기가 성도들에게 진실로 축복하기 위해서입니까? 아니면 돈을 모으기 위해서입니까? 성경 속에서 우리는 ‘부끄럼 없는’(blameless) 사람으로 배우고 있습니다. 이 단어의 뜻은 순수한 동기를 뜻하는 것이지 죄가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재정은 아주 중요합니다. 우리는 ‘부지런하여’야 합니다.(롬12:11) 절약하고, 부지런한 청지기로서 하나님의 작은 돈을 소중하게 다루어야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목사로서 나는 누가 무엇을 헌납했는지 알고 싶지 않습니다. 사람들을 차별하기 원치 않으니까요. 또한 헌금의 입출금을 정확히 기록하고 십일조를 저축하는 헌금 도난 방지 시스템의 설치와 돈이 올바르게 지출되었는지 확인하고 보다 효과적인 절약을 위해 가장 싼 가격으로 가장 좋은 물품을 구입하는 상품 구매 제도를 채택해야 합니다. 갈보리채플에서는 아무리 작은 돈이라도 자세히 기록되며 오직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 절약하여 사용됩니다. 비록 작은 소품을 살 때조차도 정말 이것이 필요한 것인가, 이것이 가장 좋은 구매 방법인가를 위해 항상 하나님께 지혜를 구해야 합니다.”(아름다운 목양의 샘터, pp.38~45)
모든 갈보리채플은 “하나님의 일에 필요한 것은 하나님이 준비하시고, 공급하신다.”는 원리를 가지고 사역에 임하고자 애쓴다. 그러한 노력은 믿음의 싸움이다. 우리는 과연 하나님의 일을 할 때 이 진리를 믿고 순종하는가? 하나님의 준비와 공급하심을 믿고 일하는가? 혹시 사람에게 손을 벌리거나 혹은 사람에게 도움을 기대하지 않는가? 하나님이 그 영광 가운데 풍성한 대로 공급하신다는 약속을 실제로 삶 속에서 사역 속에서 의지하고 있는가? 재정의 공급과 기타 사역의 필요를 위해 사람을 어떻게 동기부여 할 것인가 고민하지 않는가? 전적으로 하나님의 공급하심을 믿고 의지하면서 사역한다는 증거가 있는가? 설교할 때는 하나님을 믿으라고 말해놓고 나서는 광고시간에는 헌금하라고 혹은 전도하라고 혹은 봉사하라고 말함으로써 스스로 모순에 빠지지는 않는가? 교인들에게는 주는 것이 복되다고 설교하면서도 정작 설교자 자신은 주는 것보다 받는 것을 더 좋아하지는 않는가? 설교할 때는 하나님을 믿으라고 하면서 실제 사역 속에서 정말 하나님을 믿고 일한다는 증거를 교인들에게 보여주고 있는가?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이 친히 공급하여 주신다”는 사실을 과연 믿고 적용하고 있는가?
4)말씀목회(teaching ministry)
갈보리채플의 사역의 가장 중요한 특징이 가르치는 사역(teaching ministry)이다. 성경을 처음부터 끝까지 한 절 한 절 모두 다 가르치는 사역을 모든 교회 사역 중에서 제일 으뜸으로 꼽는다. 이러한 말씀목회는 그의 목회와 갈보리채플의 사역의 중요한 트레이드 마크이다. 그는 이 말씀목회로 청중을 말씀으로 무장시켜 그들을 개척하게 하여 수백 개의 갈보리채플을 개척하게 하는데 성공했다. 그는 말씀을 잘 가르치는 것만으로 교회가 충분히 건강하고 성장할 수 있다고 확신한다. 대다수의 목회자들은 가르치는 사역이 중요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믿는다. 무슨 프로그램이나 행사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척 스미스 목사는 가르치는 사역이 주된 일이고 나머지 활동은 가르치는 데서부터 자연스럽게 시작되는 열매로 간주한다. 가르치는 것은 말씀으로 양떼들에게 잘 먹이는 것이다. 이 ‘먹이는 것’을 대체하는 것은 없다고 확신한다. 특별한 프로그램이나 행사로서 양떼들이 건강해지는 것이 아니라고 확신한다. 행사나 프로그램이 없어도 잘 가르치는 것만으로 충분히 교회가 건강해질 수 있다는 확신이 갈보리채플의 사역의 기본 정신이다.
척 스미스 목사는 우선 전 교인으로 하여금 성경통독프로그램에 참여시킨다. 그가 전 교인에게 참여하기를 강조하는 프로그램은 성경통독프로그램이다. 한 주에 성경 5장-10장을 읽도록 권유하고, 주일설교는 교인들이 읽은 범위 내에서 본문을 강해한다. 주일 저녁에는 앞에 설교한 것을 집중 주해하고 목요일 저녁에는 심층연구의 시간으로서 교리적이고 신학적인 부분을 깊이 다룬다. 이렇게 함으로써 청중을 말씀으로 철저하게 무장시키는 일에 힘쓴다. 또한 수요예배는 부목사인 세계적인 성경학자 데이빗 호킹 목사가 담당한다. 그 외에도 매일 저녁 집회가 있는데 월요일 밤은 청년들 중심의 소그룹성경공부가 있고, 또 여성들의 집회, 등 각종 소그룹 모임이 있다. 또 가정 성경공부를 갈보리채플 초기부터 시작했는데 가정 성경공부 모임이 확장하면 그 리더들로 하여금 새로운 교회를 개척하게 하여 독립시켜서 스스로 자립하여 나가게 하는 것도 그의 말씀 목회사역에 있어서 중요한 한 방법이다. 그는 성경통독의 흐름 속에 절기설교가 없이 연속적으로 창세기에서부터 요한계시록까지 강해한다. 그는 설교조로 설교하기보다는 이야기식으로 대화하듯 편안하고 부드럽게 가르치고 설명하도록 노력한다. 대체로 3년의 주기로 성경을 한번 강해함으로써 2-3년 이상 그의 집회에 열심히 참석하면 고학력자가 아니라도 유능한 신학교 졸업자 이상의 수준이 되어 말씀의 애정과 열정과 지식을 갖출 수 있게 한다. 이처럼 성경에 대한 깊은 지식과 사랑을 가지도록 도와주는 일이 목사가 해야 할 기본 사역인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성경말씀을 가르쳐야 하는가? 갈보리채플의 말씀사역의 원칙은 이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 할 수 있는 것을 주장하기 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행하신 일을 강조하라” 래리 테일러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죽어 마땅할 우리에게 아무 대가 없이 주신 하나님의 크신 사랑, 즉 은혜(GRACE)가 복음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가 가르쳐야 할 것 우리가 사역 안에서 행해야 할 것이 바로 은혜(GRACE)입니다. 많은 목회자들은 하나님을 위해 해야 할 일들을 계속 강조하고 있습니다. 좀더 많은 돈을 헌납하고, 좀더 기도하고, 좀더 공부하고, 좀더 많이 봉사할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척 스미스 목사님 사역의 특이한 점은 오히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하신 일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죽음에서 부활하셔서 하늘에 오르사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셔 그곳에서 우리를 위해 날마다 중보기도 하고 계십니다. 우리를 향하신 주님의 생각은 언제나 우리를 향한 축복과 사랑입니다. 그는 우리의 죄를 다 사해 주셨고, 우리를 돕고 인도하기 위해 우리와 늘 함께 계시며, 성령으로 우리에게 능력을 부어 주시고, 우리의 영원한 처소를 준비하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우리를 위해 행하신 일을 사람들에게 가르치십시오. 그러면 그들의 마음이 사랑과 감사로 넘칠 것이며, 감사는 사랑의 봉사와 헌신된 기도로 더욱 명백히 나타날 것입니다. 여러분의 성도들은 여러분 자신의 사람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품안으로 인도하십시오. 그들은 당신이 아닌 예수님을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나의 한 가지 사역에 비추어 볼 때 난 너무 많은 상담으로 지쳐 있었습니다. 그때 난 깨달았습니다. 나는 사람들에게 예수님보다 나에게 의지하라고 가르치고 있었구나 하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곧 회개했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크신 은혜를 강조하며 그들 스스로 예수님을 분명하게 볼 수 있도록 인도하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을 분명히 안다는 것이 모든 예배에 있어서나 성경 공부 각종 모임에 있어서 목표가 되어야 합니다. 갈보리채플 성경 대학의 목표는 처음 시작할 때보다 끝났을 때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에 대해 더 많이 알게 하는 것입니다. 컨퍼런스 센터의 목적도 이곳에 참석한 모든 사람들이 야영지를 떠날 때는 처음보다 예수님에 대해 좀더 알게 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모든 학생이나 수련회에 참가한 사람이나 스텝, 방문객들이 우리를 통해 비쳐지고 있는 예수님을 확실히 바라보며 그의 사랑과 은혜를 알게 하고 주님에 대해 더 많이 알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아닌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하신 일을 강조하십시오.”(아름다운 목양의 샘터, pp.80~85)
나중에 척 스미스 목사의 설교를 분석하면서 더 자세히 보게 되겠지만 갈보리채플의 모든 가르침은 형식보다 내용을 중요시하고 있다. 어떤 수사학적 방식으로 가르치느냐는 중요하지 않다. 무엇을 가르치느냐가 매우 중요하다. 어떻게 가르치는가는 매우 단순하다. 특별한 수사학이나 웅변에 의지하기보다는 가장 나답게 가르치라는 것이다. 그리고 인격적으로 가르치라는 것이다. 일방적으로 쏟아 붓지 말고 대화하듯이 가르치라는 것이다. 즉 편하고 부드럽게 가르치라는 것이다. 그래서 갈보리채플의 설교는 인위적인 웅변 기교는 거의 찾아볼 수 없다. 반면 무엇을 가르치는 것인지는 분명하다. 따라서 가르칠 내용에 대해서는 시간을 더 많이 들여서 준비해야 한다.
그 내용이란,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에 대해서 가르치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며, 어떤 일을 하셨는지 가르치라]는 것이다. 본문에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약속하는 바를 가르치라]는 것이다. [본문에 계시된 하나님이 오늘 우리와 어떤 관계에 있는지 가르치라]는 것이다. 성경본문을 기록하게 하신 분은 하나님이시다. 따라서 모든 성경본문을 가르칠 때, 본문에 계시된 하나님의 성품, 하신 일들, 계획과 약속들을 가르치라는 것이다. 하나님에 대해서 좀더 잘 알게 될 때에 양들은 강건하게 성장할 수 있게 된다. 그래서 말씀사역의 목표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게 하는 일이다. 하나님을 알게 되면, 하나님을 믿고 신뢰하게 되고 또 감사하게 된다. 하나님을 알고 그를 믿고 신뢰하며 감사하도록 성경을 가르치라는 것이다. 그래서 척 스미스 목사의 설교를 들어보면 하나님의 성품과 하신 일과 계획, 약속에 대해서 풍성한 영적 지식을 얻을 수 있게 된다.
갈보리채플의 말씀사역은 목양사역(shepherding ministry), 즉, 양들을 먹이는 것이다. 그래서 말씀사역의 중요한 또 다른 사역원리는 이것이다: “양들을 때리지 말고 꼴을 먹이라”(요21:15~19) 래리 테일러는 다음과 같이 목양사역을 하라고 권면하고 있다.
“젊은 시절 목사로서 나는 예수님께서 ‘베드로야 네가 날 사랑한다면 나의 양들을 치라(때리라)’고 말씀했다고 생각하곤 했습니다. 그리고 그 대로 행하여 왔었습니다. 나는 성도들의 잘못된 모든 것들을 책망하고 구약 선지자의 불과 같은 말씀으로 단 위에서 모든 사람들을 책망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것을 좋아했습니다. 성도들은 이 같은 목사의 채찍에 익숙해져서 이런 짜릿하고 아픈 감정 없이 예배를 마치고 돌아간다는 것은 자신들을 영적으로 깨우칠 수 없는 비참한 상태로 방치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었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을 잘못 대변했기 때문에 약속된 땅에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백성들에게 화를 내지 않으셨으며, 설령 우리가 그렇게 느꼈다면 하나님의 손길을 다시 느껴야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영의 양식을 먹이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사랑 안에서 진리를 나누며, 사랑 안에서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나누십시오. 젊은 목사로서 나는 종종 참석하지 않은 성도들을 향해 설교합니다. 주중 예배에 4명의 성도가 참석하면 근면과 헌신에 대해 고래고래 고함쳤습니다. 많은 성경구절을 예로 들면서 말입니다. 나는 예배에 참석한 4명의 신실한 양들이 아닌 그곳에 참석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척 스미스 목사님은 내게 그곳에 없는 자들은 잊어버리고 참석한 성도들을 사랑으로 말씀을 먹이라고 가르쳤습니다. 그렇게 했을 때 그 사역은 성장하기 시작했습니다. 여러분의 마음을 지키십시오. 모든 것에서 가능성의 동기를 찾으십시오. 오직 있을 수 있는 하나의 가능성은 사랑뿐입니다. 이것을 위해 우리가 가르치고, 설교하고, 예배드리고 또한 봉사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한다면 그의 양들에게 먹이를 주십시오.”(아름다운 목양의 샘터, pp.88~92)
양들을 먹이는 중요한 두 가지 방법은 사랑과 성경이다. 즉, 성도들을 꼴이 필요한 양들로 보고 그들을 긍휼과 사랑으로 바라보면서, 그들에게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에 대해서 이야기해주는 것이다.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가르치고, 사람의 말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으로 가르치라는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사랑하며, 또 어떻게 가르쳐야 하는가? 이에 대해서 래리 테일러는 다음과 같이 권면 하고 있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잠을 자게 하거나 아니면 호통치는 설교를 들으면서 성장했습니다. 나와는 상관없는 말씀이라고 생각할 때 그 설교는 내게 자장가였습니다. 때로는 그리스도의 사랑과 자유함이 없이 나는 야단맞았습니다. (그리고) 성경 ‘한 줄 한 줄 배우는 것’이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에게 말씀하시는 방법입니다. 주제설교는 균형 잡히지 않은 산만한 설교입니다. 양들은 주제별 설교로는 잘 자라지 못합니다. 척 스미스 목사님은 양들에게 성경 한 줄 한 줄, 귀절 귀절을 가르치라고 하셨습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균형 잡힌 양식으로 우리를 살찌울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선호하는 말씀에서 벗어나 하나님 말씀의 전반적인 것을 다루어야 합니다. 성도들은 양식을 먹고 성장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열매를 거둘 것이며 하나님께서는 성경을 더하지도 말고 빼지도 않은 성경 한 줄 한 줄을 자녀들에게 가르칠 목회자를 찾고 계십니다. (그리고) 정치적 흐름을 알고 이와 관련된 공부를 하십시오. 성경공부에서 예언, 정치적 사건, 사회적 문제, 창조 등등을 광범위하게 다루십시오. 정보를 주는 잡지나 신문을 읽으십시오. (그리고) 종파나 연령이 틀리더라도 누구나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느낄 수 있도록 유동성 있게 행동하십시오. 왜 많은 히피족들이 갈보리채플로 모이는지 궁금해할 것은 없습니다. 단지 이곳이 자기 모습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유일한 곳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들을 (그들 모습 그대로) 영접해 들이고 이들은 예수님을 영접합니다. 최근에 나는 편지 한 통을 받았습니다. 그것은 갈보리채플이 거지같은 자를 받아들여서 수준이 내려가는 것이 부끄러운 일이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오! 하나님, 저는 오직 주의 이름을 찬양합니다. 우리의 이러한 사역은 모든 종류의 사람을 구원하고 죄인들을 받아들이기 위해 수준을 아직 더 낮추어 가고 있습니다.”(아름다운 목양의 샘터, pp.94~99)
말씀을 먹이는 목자로서 반드시 갖추어야 할 자질은 특별한 자격증이나 신학훈련이 아니다. 목자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랑”이다. 그래서 갈보리채플에서는 모든 사역자들에게 “돈을 받고 일하는 고용인이 되지 말고 양들을 사랑으로 먹이는 목자가 되라”고 가르친다. 맡겨주신 영혼들을 진심으로 사랑하기 시작할 때 목사는 고용인이 아니라 하나님이 교회를 섬기라고 세우신 사람임을 나타내는 것이다. 래리 테일러는 사역자에게 사랑이 얼마나 중요한지 다음과 같이 강조하고 있다.
“여러분의 양들을 세상에서 가장 잘 먹이고 많은 사랑을 베푸십시오. 모든 것 중 가장 중요한 은사는 사랑입니다. 언젠가 척 스미스 목사님은 사역을 위해 가장 필요한 큰 은사인 사랑의 은사를 이미 주셨음을 알려 주셨습니다. 대제사장은 이스라엘의 열 두 지파를 상징하는 돌을 가슴속에 지녔었습니다. 바울은 믿는 자들을 마음속에 담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을 여러분 가슴속에 품으십시오. 그들을 사랑하고 그들을 위해 봉사하십시오. 모든 일에 있어서 가장 좋은 것을 그들 품안에 안기게 하십시오. 목자는 양떼를 위해 목숨을 버립니다. 자신을 희생하십시오. 육신의 욕망을 죽이십시오. 성도들에게 사랑으로 헌신하십시오. 봉사하고 모든 것을 드리고 사역하며 사람들을 돌보십시오. 사랑하십시오. 사랑하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의 진실한 말씀을 먹이십시오. 고용된 자는 자신의 안락만을 찾습니다. 그는 자기 마음대로 행합니다. 그리고 일이 어려워지면 도망하고 그만 두고 포기하게 됩니다. 그만 두지 마십시오. 포기하지 마십시오. 물론 때때로 힘들기도 합니다. 척 스미스 목사님과 부인 케이 사모님은 조그마한 교회에서 17년을 목회하며 보냈습니다. 이들은 실내에 수도관이 없어서 뒷마당에서 양치질을 했습니다. 척 스미스 목사님과 그의 아우 바울은 설교와 간증을 위해 이곳 저곳을 다닐 때 차안에서 잠을 잤습니다. 그곳에 머무르십시오. 인내하십시오. 하나님은 당신을 부르셨습니다. 하나님을 위해 일하십시오. 자신을 죽이고 성경공부를 통해 양들에게 사랑으로 한 줄 한 줄 가르침으로써 영의 양식을 먹이십시오. 그리고 그들을 사랑하십시오. 하나님의 양이니까요. 가장 좋은 것을 먹이십시오. 지상에서 가장 사랑 받는 양을 만드십시오.”(아름다운 목양의 샘터, pp.130~135)
이처럼 양떼들을 잘 먹이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양떼들을 진심으로 사랑할 줄 알아야 한다. 양떼들은 진심으로 사랑한다면 그들을 있는 그대로 영접할 수 있는 그릇이 되어야 한다. 그들에게 젖을 요구해서는 안 된다. 그들에게 무거운 짐을 지워서는 안 된다. 그들을 호통치기만 해서는 안 된다. 그들이 젖을 내도록 하기 위해 그들의 등에 채찍을 휘둘러서는 안 된다. 자기 몫을 챙겨서 방탕의 길로 떠나는 아들을 그 아버지가 붙잡지 않고 내버려두신 것은 아들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그들을 사랑한다면 그들에게 자유를 주어야 한다. 그들을 여러 가지 규율과 조직과 의무조항으로 얽매지 않도록 해야 한다. 일단 그들을 있는 그 모습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은 그들에게 어떤 형식이나 규칙으로 제재를 가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양떼들을 사랑한다는 말은 그들을 위해 봉사하지만 그들에게 봉사하라고 요구하거나 설득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혹은 목회자를 섬기라고 교묘하게 설득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섬김을 요구하는 목회자는 더 이상 목회자가 아니다. 돈을 요구하는 목회자는 결코 신실한 목회자가 아니다. 래리 테일러는 다음과 같이 권면하고 있다.
“오늘날 사역하는 데 있어서 많은 사람들은 특히 라디오나 텔레비전에 나가서는 사람들을 위해 봉사하기 보다 자기들을 위해 봉사하도록 시키기 위해 많은 시간을 소비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보다 많은 돈을 가져오게 하려는 시도이거나 사역자인 자기를 돌보지 않았다고 주위 사람,(주위 스텝들)에게 심하게 꾸짖거나 사람들로 하여금 목사를 찬양하고 격려하게끔 교묘한 방법을 쓰는 것이 될 수 있습니다. 목회자로서 우리 자신을 위해 무엇인가 구하는 것은 우리의 책임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돌보아 주실 것이니까요. 그는 재정적인 것뿐 아니라 우리에게 정서적, 감정적으로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시켜 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자아를 죽이고 다른 사람들을 돌보는 것이 우리의 책임입니다. 구세군 창시자인 윌리엄 부스 장군은 임종이 가까워오자 ‘다른 사람들’(OTHERS)이라는 단어만 적힌 편지를 동료들에게 보냈습니다. 이것이 그의 인생에 가장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자기 자신이 아닌 남을 위해 산 삶이었습니다. 그는 일생 동안 하나님께서 그에게 보낸 사람들의 선한 모습을 찾고 축복하며, 돌아올 축복을 생각하지 말고 사랑하며, 조건 없는 사랑으로 돌보아 주되 타인의 도움을 구하지 말고, 그들을 위해 봉사하며, 자신을 위해 봉사해 줄 것을 구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순전한 하나님의 말씀을 먹이며, 사랑으로 돌보고 도와주며, 양들을 위해 살고, 필요하다면 그들을 위해 죽어야 하는 사람들이 참 목자들이며, 이러한 일들이 목자가 해야 할 일들입니다. 사역 중에 여러분 자신의 욕구가 충족된다면 회개하거나 포기하십시오. 예수님께서는 양들을 사랑으로 돌보아 줄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흩어져 매맞고 피 흘리며 죽어 가는 늑대에게서 상처받고 있는 자녀들을 보고 계시며, 이들로 인해 마음 아파하고 계시며, 이들을 여러분이 하나님의 사랑으로 감싸주기를 바라고 계십니다. 이러한 일들을 위해 목사로서 사역자로서 이들을 예수님의 사랑의 팔로 양들을 감싸주라고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나는 개인적으로 척 스미스 목사 부부를 20여 년을 알고 지냈습니다. 이들은 나를 항상 예수님의 품안으로 인도하였습니다.”(아름다운 목양의 샘터, pp.56~62)
양떼들을 사랑한다는 말은 구태의연한 형식에 연연하지 않음을 의미한다. 형식에 얽매이는 것은 많은 양들을 잃어버리는 길이다. 그러나 이 말은 갈보리채플의 예배가 무질서하고 자유분방하다는 말은 아니다.
“예배를 드림에 있어 형식에 묶이지 말아야 할 것이나 동시에 예배를 경건하게 지켜나가야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경건과 질서 속에서 근엄하게 이루어져야 합니다. 여러분이 살고 있는 지역 사회의 풍습 때문에 정장과 넥타이를 매야 한다면 그것을 따르는 것이 질서일 수도 있습니다. 척 스미스 목사는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아름다운 목양의 샘터, p.100)
그들을 있는 모습 그대로 받아들인다는 말은 그들을 영접하는 데 있어 특별한 조건을 달지 않음을 의미한다. 예배 드리려면 옷을 어떻게 입어야 하고 머리 단장을 어떻게 해야 하고 신발은 슬리퍼를 신어서는 안 된다느니 하는 제재를 가하지 않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일단 그들을 받아들인 후에는 그들에게 먹여야 한다. 그들에게 젖을 요구하기보다는 그들에게 꼴을 먹여야 한다. 그들이 찾고 있는 꼴이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하나님에 대해서 무엇인가 발견하고자 하는 것이 그들의 영적 필요이다. 그들에게 성경을 가지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심어줄 때 양들은 성장하기 시작할 것이다.
우리 공동체를 한번 돌아보자. 오직 말씀을 가르치는 것만으로 교회가 건강할 수 있고 성장할 수 있다는 원리에 대해서 과연 동의하는가? 혹시 가르치는 사역에 자신이 없기 때문에 그것을 변명하기 위해서 다른 행사나 프로그램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그것들에 의존하려고 하지 않는가? 가르침의 실패를 행사의 성공으로 만회하려고 하지 않는가? 말씀을 가르칠 때, 그 말씀이 진정 성도들의 영혼을 풍성하게 살 지울 수 있다고 확신하는가? 문제의 핵심이 혹시 말씀사역자 자신이 그 말씀의 능력과 효과에 대해서 확신을 가지지 못한 것에 있지 않은가? 우리는 과연 진정한 예수님의 사랑으로 풍성한 꼴을 먹이는 일에 충성하고 있는가? 우리는 어떤 문화적 형식이나 제재를 가함으로써 양들에게 거부감을 주지는 않는가? 우리는 과연 우리에게 찾아오는 이들을 진심으로 영접하고 있는가? 그리고 그들에게 신령한 꼴을 풍성하게 먹이고 있는가? 예배와 말씀 가운데 진정 그들이 배부름을 체험하는가? 우리에게 사랑이 부족하지 않는지, 아니면 말씀을 먹이는 데 부족하지 않는지 돌아보자. 먼저, 우리에게 나아오는 모든 영혼들을 불쌍히 여기도록 기도하자. 잃어버린 자들을 향해 끊임없이 기도하자. 기도하는 중에 주님은 우리 마음속에 그들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마음과 능력을 주실 것이다. 그리고 그들에게 먹일 꼴을 달라고 간구 하자. 하나님이 내게 주시는 꼴을 내가 먼저 받아먹자. 나를 성장시키고, 나를 배부르게 만든 그 꼴을 그들에게 아낌없이 나눠주자.
양떼들을 잘 먹이기 위해서 척 스미스 목사는 매우 구체적으로 본받을 수 있는 원리를 제시한다. 척 스미스 목사는 특별히 성경을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 쭉 가르치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많은 유익이 있다고 가르친다. 가장 중요한 것이 하나님의 은혜에 입각해서 진리를 온전하게 가르칠 수 있다는 점이다.
나는 성경을 관통하면서 가르침으로써 치우치는 것을 피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다른 것들보다 나의 흥미를 끄는 주제들이 성경에 분명히 있다. 내가 설교하기 꺼리는 것들도 있으며 또한 다른 것보다 내가 가르치기 좋아하는 것들이 분명 있다. 내가 설교하기 꺼리는 것들은 설교하지 않음으로써 회피하곤 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성경을 처음부터 끝까지 쭉 가르치기 시작할 때 당신은 그러한 것들을 회피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그러면 교인들에게 꼭 필요하지만 그것들이 요즘 인기 있는 주제가 아니라는 이유로 교회에서 들어보지 못한 그러한 이슈에 대해 말할 수 있게 된다. 만약 당신이 성경을 쭉 가르치게 된다면 당신은 하나님의 전체적인 말씀을 선포하게 되는 것이다. 만약 당신이 성경을 처음부터 끝까지 가르친다면 당신의 강조점은 성경적인 강조점이 될 것이다. 나는 수년간 내 설교가 진정한 성경적인 강조점에 부응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나는 당신이 성경을 연구할수록 당신은 성경의 강조점이 하나님이 사람을 위해 행하신 일이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리라고 굳게 확신한다. 즉, 하나님은 시작하게 하시는 분이고, 사람은 거기에 반응하는 자들이다. 하나님은 당신의 크신 사랑으로 우리의 관계를 시작하셨고 나는 단지 그분의 사랑에 반응할 뿐이다.(-The Philosophy)
척 스미스 목사는 주제설교야 말로 하나님의 온전한 진리를 전하는데 적절한 방법이 아니라고 말한다.
지난날에 했던 내 주제설교들을 돌아보면 나는 항상 사람이 하나님을 위해 무엇인가를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 설교들은 신자들의 행동, 즉 우리가 어떻게 더 많은 기도를 해야 하며, 어떻게 더 많은 것을 주어야 하며, 어떻게 더 많이 증거해야 하며, 어떻게 하나님을 더 많이 찬양해야 하는지에 대한 것들이다. 항상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 무엇인가 해야한다는 식이었다. 그것이 특별히 회중들에게 좌절을 안겨다 주었었다. 회중들은 늘 “그래, 맞아, 나는 하나님을 위해 이런 것들을 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아. 그러나 어떻게 하는지 몰라.”라고 생각하면서 좌절하곤 했던 것이다. 만일 당신이 본문이 시작되는 부분이 아니라 중간쯤 되는 어느 본문에서 설교하려고 할 때 예를 들어,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는 본문을 설교본문으로 선택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당신은 우리가 서 있는 하나님의 은혜로 되돌아가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약속하시고 행하신 모든 것을 망각한다면 우리의 모든 헌신은 순간적이고 감정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나는 왜 그렇게 해야 하는지 전혀 근거도 없이 내 몸을 드리도록 도전 받기 때문이다.(-The Philosophy)
척 스미스 목사의 말씀목회는 언제나 ‘온전한 진리’ 즉, 균형 잡힌 진리에 대한 강조이다. 욥이 고난 당했을 때 친구들이 해준 말들은 모두 부분적인 진리였다. 부분적인 진리는 자칫 온전한 진리를 대적할 수 있다. 그러므로 척 스미스 목사는 부분적인 진리를 피하기 위해서 언제나 전체 문맥과 흐름을 중시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성경에서 헌신에 대한 요청은 언제나 “그러므로”라는 말로 시작한다. “그러므로”란 단어는 어떤 사상의 시작이 아니라 오히려 앞서 말했던 진술과 주장에 대한 반응임을 말하는 것이다. 바울은 로마서를 12장부터 시작하지 않았다. 그는 1장부터 시작했다. 당신은 12장에 이르기까지 로마서를 통해 사상의 자연스러운 발전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께서 당신을 부르셨고, 당신을 의롭다고 하셨고, 당신을 영화롭게 하셨기 때문에 “당신의 몸을 거룩한 산 제사로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고 호소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에베소서를 보라. 바울은 첫 번째 장에서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을 주셨다”고 말함으로써 시작하고 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복을 주셨고, 바울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가지고 있는 이러한 영적 축복들에 대해 무려 석 장을 할애하고 있는 것이다. 4장에 들어가서야 비로소 “그러므로” 즉, “하나님께서 당신을 위해 행하신 일들 때문에 너희가 부르심을 입은 부름에 합당하게 행하라”고 권면하는 것이다. 바울이 5장에서 가정, 아내, 종들, 고용주와의 관계에 대해 말하는 것은 하나님이 이미 우리를 위해 이루신 일들에 대한 기초를 받은 이후인 것이다. 만약 우리가 사람들이 하나님을 위해 무엇인가 해야만 한다고만 강조한다면 그것은 성경적인 강조가 아닌 것이다.(The Philosophy)
척 스미스 목사는 균형 잡힌 진리는 언제나 하나님으로부터 시작한다고 말한다. 그것은 언제나 본문을 하나님 중심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미 앞서 강조했듯이, 성경은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시작하는 분이라고 가르친다. 요한복음 3:16은 말한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한 당신의 사랑을 시작하셨다. 하나님이 내게 먼저 다가오셨다. 하나님이 그분과의 교제를 시작하게 하셨다. 하나님께서 창세 전에 그리스도안에서 나를 택하셨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시작하셨다. 따라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 반응하는 것이다. 당신이 이러한 견고한 성경적 관점에서 가르친다면 당신은 사람들이 하나님과 하나님이 그들을 위해 행하신 일들을 진정으로 이해하기 시작할 때 그들은 하나님께 반응하기를 원한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당신은 그들로 하여금 그러한 일을 하도록 간청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들은 그들 스스로 자원하려고 할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께 반응하기 원한다. 그들이 하나님이 어떤 분이며, 하나님이 그들을 위해 어떤 일을 행하셨는지 진정 알게 되는 그때에 그들은 하나님께 반응한다.(-The Philosophy)
척 스미스 목사는 찬양에 대한 설교를 예를 들어 온전한 진리가 무엇인지 설명한다.
나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찬양하도록 도전 받는 어떤 예배에 참석하곤 했는데, 사람들은 하나님이 그들을 축복하기 원하시며 그 백성의 찬양 중에 거하신다는 말을 듣는다. 그런 경우 당신은 사람이 시작하는 자(initiator)임을 말하고 있는 셈이다. 당신이 해야 할 일은 단지 그를 조금 찬양하기만 하면 된다는 식이다. 그러면 그분이 반응할 것이고 당신을 축복하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참된 찬양은 축복을 얻기 위한 동기로 내 마음에서 일어나는 어떤 것이 결코 아니다. 축복을 얻기 위해서 내가 주님을 찬양한다면 그것은 진정한 찬양이 아니다. 그것은 자기중심적인 태도이다. 그런 경우 찬양의 대상은 하나님이 아니라 내가 되는 것이다. 참된 찬양은 하나님이 내게 베푸신 은혜에 대해 내 마음에서 일어나는 자동적인 반응이다. 비록 내가 비참하게 실패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 놀라운 일을 행하셨을 때, 그리고 나에게 풍성한 축복을 베푸셨을 때, 내 마음이 반응하는 것이다. “오 하나님, 당신은 너무 하십니다. 나는 당신의 사랑과 선하심을 도저히 믿을 수 없나이다.”라고 말이다.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의 찬양이다. 그것은 내 삶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발견함으로써 내 마음으로부터 자동적으로 솟아나는 것이다. 나는 하나님께서 강림하셔서 축복하시는 분위기를 만들기 위해 주님을 찬양하지 않는다. 나의 찬양은 하나님께서 베푸신 복에 대한 반응이다. 하나님은 시작하시는 분이고, 사람은 반응하는 자이다.(-The Philosophy)
말씀목회는 척 스미스 목사의 목회에 가장 중요한 특징이다. 그는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 쭉 강해하는 것으로 전세계적으로 유명하다. 그는 1960년대 중반부터 이러한 방식으로 설교를 해오고 있다. 이러한 방식으로 설교함으로써 척 스미스 목사는 자연스럽게 ‘온전한 진리를 설교하는 것’에 대해 몸으로 체득하였다. 그의 설교는 매우 성경적이며, 또한 하나님 중심적이다. 그는 언제나 하나님이 어떤 분이며,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어떤 일을 행하셨는가에서 시작한다. 그의 설교는 다분히 신본적이고 교리적이지만 그러나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말하는 것에서 그치는 그런 설교가 아니다. 많은 설교자들이 성령의 능력도 없이 다만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말하는데서 멈추어버림으로써 죽은 교리를 가르친다. 그것은 삶을 변화시킬 수 없다. 하나님이 시작하시고 인간은 반응한다. 하나님으로부터 시작하는 그의 설교는 언제나 청중의 삶에 정확하게 정곡을 찌르는 데까지 나아간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그의 설교를 ‘실용주의 강해’라고 평가할 수도 있을 지 모른다. 그의 설교론은 매우 중요하기 때문에 다음에 다시 자세히 살펴보기로 할 것이다.
5)제자목회(diciple-making ministry)
제자목회란 목회를 하면서 다른 목회자를 양성해내는 목회를 말한다. 사역자는 단지 양들만 돌보아야 할 뿐 아니라 양들을 돌보는 목자를 길러내어야 하는데 이것이 제자목회인 것이다.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 갈릴리에서 제자들에게 이러한 제자목회를 할 것을 당부하셨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태28:18~20) 예수님의 이 말씀의 핵심 동사는 ‘제자를 삼으라’는 말씀이다. 세례를 주거나 가르치거나 혹은 훈련시키는 것 등, 다른 것은 제자 삼기 위한 방편이다. 사도바울이 그 제자 디모데에게 권면 한 것도 제자 삼으라는 것이다. “내 아들아 그러므로 네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은혜 속에서 강하고 또 네가 많은 증인 앞에서 내게 들은 바를 충성된 사람들에게 부탁하라. 저희가 또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으리라”(딤후2:1,2) 아무리 큰 교회를 담임하고, 또 큰 교회로 성장시켰다고 할지라도 제자들을 키워놓지 못했다면 담임 사역자가 물러난 뒤에 그 교회는 오래 가지 않아 많은 양떼들을 잃어버리게 되든가 아니면 머지 않아 교회 문을 닫고 말 것이다. 교회가 내 것이 아니요 주님의 것임을 분명히 알고 있다면 당연히 사역자는 무엇보다 제자, 즉, 목회자를 많이 길러내는 일에 힘써야 한다. 어쩌면 사역자를 키워내지 않는 사역자는 주의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일을 하는 것이다. 사역자의 성공 여부는 그가 사역하면서 길러낸 제자들의 질과 양에 따라서 측정될 것이다. 어떤 제자를 얼마나 키워 냈느냐 하는 기준으로써 목회지도력을 평가해야 한다.
서두에서도 언급했듯이 필자가 그에게 가장 크게 도전 받은 부분은 그가 시무 하는 교회의 모습 때문이 아니라 그에게서 영향을 받은 제자들이 나가서 거둔 성공의 모습이다. 즉, 척 스미스 목사의 목회의 특징은 자신보다 남을 성공시키는 목회, 복의 근원으로서의 목회라는 점이다. 오늘날 개교회를 개척하여 대교회로 성장시킨 목회자 가운데 600여 개(1995년도 집계) 이상 성공적인 교회를 개척한 목회자가 있을까? 또 3,000여 목회자를 배출한 이가 있는가? 나는 과연 이러한 사역자를 배출할 자신과 비전이 있는가? 대형교회를 시무 하는 대부분의 목회자는 사자형 목회자로서 큰 힘과 권세를 가지고 목회 할 때는 수많은 사람들의 추앙을 받지만 정작 그가 물러날 때는 쓸쓸히 목회현장을 떠나는 외로운 자가 되지 않는가? 자기의 성공에 집중했기 때문이다. 대형교회의 후유증은 대부분 남의 성공에 기여하기보다는 나의 성공에 치우쳤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척 스미스 목사의 목회는 진정한 목회의 모습이 무엇인지 보여주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사실 척 스미스 목사는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대형교회의 카리스마적인 목회자 상이 아니라 그저 평범하고 언제든지 다가갈 수 있는 그런 목회자 상을 보여준다. 그러나 척 스미스 목사에게 목회를 배운 많은 제자들이 미국의 전역에서 수천 수만 명의 교인들을 이끄는 대형교회의 목회자가 되었다는 사실이 척 스미스 목사의 목회의 특징이다. 그러면 대체 무엇이 척 스미스 목사로 하여금 이렇게 놀라운 제자들을 성공적으로 배출할 수 있게 만들었는가? 이에 척 스미스 목사는 인품으로 목회하지 말고 원칙으로 목회 하라고 권유하고 있다. 즉, 목회철학과 방향과 방법을 전수할 수 있는 방식으로 목회 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많은 교회들이 목사의 인품을 바탕으로 세워지는데, 그 결과로 이루어진 업적은 모방과 전수되기가 어렵다. 타인의 인품을 모방한다는 것은 절대로 불가능한 일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 각 개인에게 특유한 개성을 주셨으며, 각자의 개성에 따라 하나님이 뜻하실 때 사명을 부여하시기 때문이다. 흔히 있는 일로, 방문하는 교회의 목사들이 교회의 부흥을 꾀한 나머지 큰 교회를 찾아가서 그들의 목회 프로그램은 물론, 목사의 대인 관계에서 있을 법한 묘책까지 물어 이를 답습해 보려는 과오를 범하고 있다. 그러나 이 일은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다. 모방이 절대로 안 되는 것이다. 하나님이 사람의 인품을 통하여 일을 하시는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이 인품이란 대인관계에서 대단히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러나 우리 갈보리채플은 인품이 아니고 원칙을 바탕으로 하고 있는데, 이 원칙은 전수가 가능하며 갖고 있는 인품과 더불어 적용이 가능한 것이다. 이처럼 간단한 절차를 밟음으로써 갈보리채플 목사들은 여러 지역에서 대단히 성공적인 목회를 인도할 수가 있었다.”(위대한 추수, p.239,240)
이렇게 제자들을 길러내기 위해서는 목회자 개인의 탁월한 인품이나 은사만으로는 절대 불가능하다. 제자 삼는 목회를 하려면 무엇이 필요한가? 가장 필요한 것은 다른 사람들에게 전수해줄 수 있는 강력한 가치체계(value-system)가 있어야 한다. 즉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모방하게 만들 수 있는 가치와 사역방법이다. 분명한 가치관을 가지고 있는 어떤 원칙 같은 것이 있어야 한다. 그 원칙(principle)을 열심히 따르고 모방할 때 성공할 수 있음을 증명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 원칙은 반드시 개인의 인품이나 카리스마나 기타 재능이 아니라 오직 성경에 근거하는 말씀에 근거를 두어야 한다. 한번 자신을 돌아보자. 나는 과연 남을 모방하고 있는가? 아니면 남들이 나를 모방하게 만드는가? 다른 사람이 나를 모방하게 만들만한 창조적 원리와 사역방법을 가지고 있는가? 내가 가지고 있는 원리와 사역철학이 너무 독특한 것이어서 남들이 모방하려고 시도하는 것을 마치 초보 산행자가 에베레스트산을 대하는 것처럼 느끼게 하지 않는가? 사도 바울이 말한 것처럼 다른 사람에게 부탁할 수 있는 사역원리와 방법이 있는가? 다른 사람이 또 다른 사람을 가르칠 수 있도록 부탁하는 일을 하고 있는가?
그러면 척 스미스 목사 자신이 제시하는 갈보리채플의 부흥원칙은 무엇인가? 척 스미스 목사는 자신이 목회 하면서 깨달은 몇 가지 교훈을 그의 제자들과 함께 나누고 있다. 아래에 소개하는 12가지 원리와 방법들은 그가 ‘충성된 사람들에게 부탁하는 것들’이다.
첫째, 요구하는 말씀이 아니라 배불리 먹여주는 말씀을 하라는 것이다.
척 스미스 목사 자신도 처음에는 전도를 강조하는 교단의 영향을 받아 전도 중심의 설교를 많이 했다고 한다. 교단의 주 관심사는 과연 몇 명을 구원했으며 몇 명에게 세례를 주는가 이었기 때문에 설교할 때마다 전도를 강조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라고 호소했다. 그러나 그가 당혹스럽게 생각한 것은 정작 전도설교를 준비하고 강단에 섰을 때 그의 눈에는 죄인들이 보이기는커녕 모두다 아는 사람, 이미 예수님을 믿고 있는 사람들이라는 사실이다. 그래서 기도할 때는 죄인들을 교회로 보내달라고 기도했고, 죄인들이 보이지 않을 때는 주로 기존 교인들을 나무라고 꾸짖는 설교가 되곤 했다. 그들이 진실로 주님을 섬기지 않는다고, 주님이 원하는 증인이 못된다고 나무랐다. 그리고 만약 진실한 마음으로 주님을 섬긴다면 당연히 믿지 않는 이웃을 데려와야 한다고 말했다. 죄 없는 양들을 책망하는 설교만 했다. 척 스미스 목사는 자신이 많은 교인들을 죄의식에 사로잡고 책망한 것에 대해서 후회하고 있다. 그는 목사들이 ‘그리스도의 몸’을 말씀으로 먹여서 키워주지는 못하고 오직 믿어야 하고 믿으면 살고 전도를 해야만 하고, 또 축복 받으려면 어떻게 해야만 하고 등등 요구하기만 하는 목사들에게 전적 책임이 있다고 주장한다. 교인들은 설교자의 설교를 들으면서 자기들이 승리하는 생활을 하여 훌륭한 증인이 되고 싶지만 어쩔 줄 몰라하며 안타까워하고 있을 뿐이었다. 무엇인가 해야만 된다는 식으로 요구만 하는 설교는 양들을 영적 어린아이의 상태에서 더 이상 자라게 하지 못했다. 척 스미스 목사가 권면하는 첫 번째 목회의 원리는 이것이다. 책망하거나 요구하는 소위 “때리는” 설교를 하지 말고 배불리 “먹이는” 설교를 하라는 것이다.
둘째, 주제설교가 아니라 강해설교를 하라는 것이다.
이 때 척 스미스 목사는 강해설교의 중요성을 발견하게 되었다. 전에는 제목설교로서 이곳 저곳을 마구잡이 식으로 본문을 선택하고 설교를 하곤 했는데 2년이 지나면 다른 제목이 생기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척 스미스 목사는 좀더 교회를 오래 시무하기 위해서 고안한 방법이 한 책을 가지고 연속설교를 하기로 한 것이다. 처음에는 요한 1서를 가지고 40개 정도의 설교 제목을 작성할 수 있었다. 그래서 서점에서 요한 1서에 대한 주석서를 여러 권 구입해서 철저하게 연구하고 종합해서 1년간 설교했다. 이때 그가 체험한 것은 전례 없이 교회가 부흥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새 교인들이 늘기 시작했고, 세례 받는 자들이 급증했다. 교인들은 전에 몰랐던 기쁨을 얻었고, 죄를 이기고 승리하는 힘을 얻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래서 척 스미스 목사는 제목설교나 주제설교가 아니라 성경본문을 순서대로 해설하는 가르치는 식의 설교가 더 힘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 것이다. 그 이듬해에는 로마서를 다루기로 작정하고 먼저 관련 도서와 주석을 다 구입하고 심층연구를 한 뒤 2년을 가르쳤는데 교회는 2배로 성장하게 되었다. 그러는 동안 교인들과 척 스미스 목사 자신은 하나님의 은혜를 발견하고 체험함으로 하나님과 새로운 관계를 누리게 되었다. 제목설교나 주제설교보다는 본문이 말하는 바를 직접 다루는 강해설교가 먹이는 설교에 가장 적합하다는 것이다.
셋째, 교인들을 성경 통독하게 도와주라는 것이다.
가장 바람직한 목회는 설교자의 설교에 의존하는 수동적인 교인들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교인들로 하여금 직접 성경을 읽고 그 말씀에 기록한 대로 순종할 줄 아는 능동적인 그리스도인들로 키우는 것이다. 오늘날 대부분의 대형교회 목사들의 설교는 교인들로 하여금 수동적인 그리스도인으로 만들고 있다. 참 목회는 능동적인 그리스도인들을 만드는 것이다. 이것을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이 온 교회가 성경을 함께 읽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래서 교회의 머리가 어떤 사람이나 집단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말씀이 되도록 하는 것이다. 그래서 척 스미스 목사는 전 교회적으로 성경을 독파하고 설교는 거기에 맞추어서 하기로 결심했다. 그래서 매주마다 성경을 10장씩 전 교인이 읽고 공부해오기로 하고 척 스미스 목사 자신은 그들이 지난 주 읽은 내용 중에서 설교본문을 정했다. 즉 성경통독을 위한 공부로서 설교를 한 것이다. 이것을 통해서 전 교인이 성경을 통독할 수 있었다. 척 스미스 목사의 강해 설교는 모든 교인이 성경을 읽을 수 있도록 동기부여를 주일마다 하고 있는 것이다. 그의 설교를 이해하기 위해서 미리 주간에 성경을 읽어와야만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날 많은 강단에서 성경 읽기를 권하지만 강단에서는 이곳 저곳을 왔다 갔다 하면서 설교본문을 선택하고 있다. 강단의 흐름과 교인의 성경 읽기 흐름이 일치하도록 하는 것은 중요한 방법이 아닐 수 없다. 척 스미스 목사의 설교는 영감이 넘치고 영향력이 있지만 그 비밀은 척 스미스 목사 자신을 비롯한 온 교회가 사실상 성경의 권위 아래 복종하고 있다는 것이다. 갈보리채플의 교인들은 다음 주일에 어떤 본문을 가지고 어떤 내용으로 설교할 것인지 거의 짐작할 수 있다. 그래서 교인들은 한 사람의 탁월한 설교의 은사에 주목하는 것이 아니라 본문이 자신에게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지에 대해 주목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넷째, 균형 있는 가르침을 주라는 것이다.
성경을 통독하면서 성경 전체를 가르치면서 척 스미스 목사 자신은 균형감각의 중요성을 배웠다. 즉, 예전에 자신이 행한 설교는 균형을 상실했음을 발견했다. 성경에 근거한다고 하지만 하나님의 은혜보다는 사람의 행위에 더 강조했다는 것이다. 척 스미스 목사는 균형감각을 성경을 통독하면서 설교할 때 배웠다고 말한다.
“우리가 성경을 펴서 처음부터 정신차려 통독해 가다보면, 사람이 하나님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한다는 것보다도 하나님이 인간을 위해 하신 일을 더 크게 강조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그런데 나는 제목 설교 기간 중에 하나님의 응답을 얻기 위해서 우리가 어떻게 봉사해야 하는가를 강조했다. 나는 사람이 제안자요 하나님을 이에 대한 응답자로 만들었다. 예컨대 ‘당신이 하나님께 바치면 그것을 받은 하나님은 더 많은 것을 넘쳐흐르도록 주신다. 당신이 찬양하면 하나님은 찬양하는 자기 백성들과 계시기를 좋아하시므로 하나님이 당신과 같이 하심을 실감하는 축복을 주실 것이다. 당신이 이웃을 구원하면 당신은 영원토록 별과 같이 빛나게 될 것이라’ 시종 이런 식이었다. 그러나 이제 깨달았다. 하나님이 시작하는 분이고, 하나님 편이 항상 먼저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에베소서에도 보면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모든 신령한 복을 이미 다 주셨다고 했다. 하나님이 창시자이시니, 사람은 모름지기 하나님 부르심에 응답해야 함을 바울은 가르친 것이다. 나는 사람들이 과연 하나님이 누구이시고 무엇을 하셨는지 깨닫기 시작했을 때, 그들은 열성껏 하나님 부르심에 답하고 섬기려 했으며 더 이상의 기도나 봉사를 위한 강요가 불필요함을 알았다. 이제 그들은 자진하여 그리고 자발적으로 봉사와 시간을 아끼지 않게 되었으며, 주님이 그들을 위해 하신 일에 보답하고자 가진 것 이상으로 헌신하려고 노력함을 볼 수가 있었다. 이러한 교훈들을 통하여 내가 또 배운 것은 복음전도란 건실한 교회의 자연적인 부산물이라는 사실이다. 일찍이 목회를 통하여 나는 각자가 거리로 나가 전도를 하여 많은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알리도록 시종 강요했었는데, 그로 인하여 교회로 찾아오는 사람의 수는 극히 적었다. 그러다가 하나님 말씀으로 그리스도의 몸(교회공동체)을 키우기 시작하자, 첫 해만도 예수를 영접하고 세례 받는 인원수는 예전의 여러 해 동안의 그 수보다도 훨씬 많았다. 사람들의 신앙이 자람에 따라 해를 넘길수록 사람수도 늘어났고, 또 이들 모두의 신앙이 두터워지고 건실해짐에 따라 우리 교회는 급속도로 성장했다.”(위대한 추수, p.245,146)
다섯째, 장년예배와 유년, 주일학교 예배를 같은 시간대에 하라는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갈보리채플은 어른들의 예배 참석률이 좋아졌고 성경말씀이나 기타 행사에 더욱 집중할 수 있었다. 어른들이 교회에 올 때에 가장 고민하는 부분이 자녀들 문제이다. 자녀들과 같이 교회에 올 때 고민하는 것은 주차장 문제 혹은 집회시설 등인데, 자녀들과 같이 교회에 와서는 자녀는 유년주일학교로, 어른들은 장년예배로 흩어져서 각기 예배를 드리다가 예배 후에 같이 집으로 가는 것이다.
여섯째, 2부, 3부 예배를 두라는 것이다.
2부, 3부 예배를 둠으로써 여러 봉사자들의 손길 활용의 폭이 넓어졌고, 예배참석자들도 늘어났다. 또 예산활용에도 도움이 되었는데 예를 들어 2부 예배 가운데 걷혀지는 헌금은 내부운용과 외부 선교활동으로 나눌 수 있었다. 또 3부 예배 시에는 삼분의 일은 자체 재정에 삼분의 2는 외부활동에 사용할 수 있었다.
일곱째, 가정성경공부(Family Bible Study)를 하라는 것이다.
건전한 교회를 세우기 위해서는 반드시 가정성경공부의 중요성을 배워야 한다고 말한다. 목회자는 가정성경공부를 장려할 뿐만 아니라 직접 가정에서 성경을 가르쳐야 한다고 말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목회자는 자연스럽게 교회개척을 시킬 수 있고 또 자신이 대화식으로 가르치는 스타일을 개발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오늘날 설교자들이 강단에서 성도들의 삶과 거리가 먼 설교를 하는 근본 이유는 그가 가정 성경공부 소그룹을 인도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소그룹에서 대화와 가르침으로 단련되지 않으면 강단에서도 먹여주기 어려운 딱딱한 말씀이 되기 쉽다. 교회가 커질수록 설교자는 더욱더 소그룹 성경공부에 참여해야 한다. 소그룹 영성이 큰 회중을 향해 설교할 때 생동력과 신선함을 유지할 수 있게 도와준다. 또한 가정에서 성경공부하는 유익은 교회를 개척하는 데도 상당히 중요한 방법이 된다. 가정 소그룹 성경공부의 중요성에 대해 척 스미스 목사의 말을 들어보자.
“나는 이러한 가정 성경공부를 전적으로 새로운 방식으로 가르치기 시작했다. 주일 예배시의 연설조가 아닌 앉아서 지극히 자연스럽게 대화식으로 가르치기 시작했더니, 좀 이해가 안 되는 구절이 나오거나 해석이 이상하다고 느껴지면 자유로운 질문을 서슴지 않았고 그로부터 생기 있는 토론이 이루어져 산 공부가 되곤 했다. 그들의 주의집중력의 한계가 증가했음을 알 수 있었다. 교회에서는 보통 30분을 넘으면 사람들이 초조해지기 시작한다. 그러나 가정에서는 한 시간 반에서 두 시간을 앉아 공부하기 보통이고 내가 끝을 맺으려 하면 어느 때는 실제로 좀 더 했으면 하고 아쉬워하기도 했다. 후일 우리가 갈보리채플을 짓기 시작했을 때, 몇 개의 가정 성경 공부반을 동시에 시작했다. 월요일 밤은 젊은이들을 위한 날이었는데 코스타 메사의 어느 넓은 집에 모이면, 나는 대체로 그들과 같이 쭈그리고 앉아 계속 대화식으로 성경공부를 이끌어 나갔다. 모두 차가운 콘크리트 바닥 위에 앉았다. 물론 나도 그들 틈에 끼어 함께 앉아 성경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그리고 시간이 좀더 흘러 교회당 벽이 세워졌는데 이때가 바로 히피 문화의 소굴에서 뒹굴던 수백 명의 젊은이들에게 우리의 따뜻한 손길을 내밀었을 때다. 그들은 격식을 안 차리고 밖에 아무렇게나 앉을 수 있는 것이 좋았고, 또 선생이 설교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과 같이 어울려 앉아서 따뜻하게 얘기를 나눌 수 있는 것이 무척 좋았다.”(위대한 추수,p.248,249)
여덟째, 가식 없이 할 수 있는 한 쉽게 가르치라는 것이다.
최대한 쉽고 편하게 가르치라! 이것은 척 스미스 목사의 가장 중요한 사역원리다. 척 스미스 목사는 이와 같이 가정 성경공부반을 인도하면서 자연스럽게 효과적인 성경교수법을 찾을 수 있었다고 말한다. 즉, 어떤 모임에 가더라도 그저 하나님에 대해서,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인격에 대해서, 그리고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가식 없이 얘기해 준다고 말한다. 30분간 설교하는 것보다 1시간 동안 대화식으로 가르치는 것이 더 효과적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그래서 척 스미스 목사는 목회 하는 다른 이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쉽게 가르치라고 권면한다. 전통에 얽매여서 설교의 딱딱한 형식을 따르지 말라고 권면한다. 영혼을 수확하는 것이 목표라면 형식에 구애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일방적인 강의식보다는 서로 주고받는 식의 쌍방간 대화식의 성경공부가 훨씬 효과가 있다.
아홉째, 하나님의 말씀을 풀이할 때 성령의 능력을 의지하라는 것이다.
척 스미스 목사는 성령의 도움이 없이는 진리를 바르게 깨닫는 것이 불가능함을 믿는다. 성령이 역사하지 않고서 자연인은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한다. 오직 성령이 성경말씀을 통하여 주의 백성들을 변화시키도록 힘쓰는 일이 그와 갈보리채플이 추구하는 일이다. 이 점에서 척 스미스 목사는 성경을 가르치는 사역과 성령사역의 균형감각을 강조하고 있다.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철저한 균형만이 교회를 견고하게 만들뿐만 아니라 꾸준히 성장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오늘날 성경을 훌륭하게 가르친다고 자처하는 교회가 많이 있지만 이들은 한편으로는 성령의 역사 하심을 소홀하게 다루고 있다. 이는 바로 죽은 정설을 조작하는 행위다. 그런 사람들은 성경구절에 능통할지라도 실생활 방식을 그렇게 바꾸지는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의 겉 형상은 그럴 듯하지만, 사실 위에서 오는 힘은 부정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 반대로, 또 어떤 교회는 성령을 지나치게 받들다보니 하나님 말씀을 소홀히 하는 데가 있다. 이는 감정주의로 흐르고 불안정한 상태로 이끌어가기 때문에 색다른 교리의 바람이 불 때마다 그쪽으로 쏠리고 또 주위에서 항상 기회를 엿보는 사이비 종교인과 단체의 계략에 붙들릴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다.”(위대한 추수, p.250)
열 번째, 절대로 돈을 거론하지 말라는 것이다.
갈보리채플의 엄격한 원칙 중의 하나는 재정의 필요가 생겼을 때 하나님이 공급하심을 믿고 일체 사람들에게 그것을 알리지 않는 것이다. 하나님은 절대 궁핍하지 않으시며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곳에는 하나님의 공급하심이 반드시 따른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기부나 작정에 대해서 말하지 않는다. 대부분의 갈보리채플에서의 예배시 헌금은 헌금바구니를 돌리지 않고 입구에 헌금함을 갖다 놓는다.
“우리의 하나님은 원하시는 일의 완성을 위한 어떠한 필요도 빈틈없이 충족시켜 주시는 완전하신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우리 교회의 목사들은 배워왔다. 하나님은 하나님 사업을 지탱해 나감에 있어서 하나님 백성의 뒷받침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사람이 하나님의 도움을 필요로 할뿐이다. 교회 자금 염출을 위한 갖은 호소와 수법에 못 이겨 사람들이 교회를 떠나는 모습을 보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남들처럼 바칠 돈이 없다보니 때때로 난처해지고, 그래서 자진하여 그 교회를 떠나고 마는 것이다. 그러나 돈을 바치라거나 헌금을 위한 계약을 요구하는 일이 없는 우리 갈보리채플에서는 그런 비극을 용납하지 않는다. 사도 바울은 말하기를 ‘압력과 강제에 의해서 바치지 말 것이며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진심 어린 바침이 되어야 할진저, 하나님은 기쁘게 바치는 것을 사랑하기 때문’이라고 했다”(위대한 추수, p.251)
열 한번째, 음악의 다양성을 인정하는 것이다
갈보리 채플의 가장 큰 특징 중에 하나는 찬양사역에 있다. 갈보리 채플의 찬양은 마라나타 음악을 필두로 해서 한국에까지 경배와 찬양의 운동이라는 영향을 끼쳤다는 점에서 20세기 현대교회사에 있어서 매우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척 스미스 목사는 음악의 형태에 대해서는 관대하다. 그는 록 형식이나 랩 형식도 교회가 수용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음악의 스타일보다는 그 속에 전달되는 진리가 중요하다고 본다. 듣는 청중에게 편한 스타일의 음악으로 진리를 전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히피들에게 접근하기 위해 히피들에게 편한 음악스타일을 수용했는데 이것은 당시 상당히 혁신적인 방식이었다. 당시에는 이런 형식의 교회음악이 전무한 상태였기 때문에 젊은이들 가운데서 인기가 매우 좋았다. 척 스미스 목사는 갈보리채플의 음악을 이렇게 자랑한다.
“갈보리채플의 음악은 새로워 생기에 넘치고 경배의 합동 찬양으로 가득 차 있다. 이러한 경배 때마다 우리의 찬송은 기타와 북 그리고 전자올갠 등의 기악이 뒷받침된다. 애초의 코러스 음악은 대체로 교회 찬양단 리더들이 직접 작사 작곡한 것으로, 다른 갈보리채플로 곧 전달해 준다. 이러하니 생기 발랄한 새 감흥을 줌도 당연하다. 어떤 젊은이는 독창 끝에, 바로 그날 주님께서 주신 노래였다고 고백하기도 했다.”(위대한 추수,p.252)
그러나 형식은 청중의 스타일에 맞추더라도 내용은 철저하게 진리에 입각해야 하기 때문에 열광적인 찬양이나 자기중심적인 찬양이 되지 않도록 균형을 강조하고 있다. 즉, 찬양은 철저하게 겸손하고 하나님께 초점을 맞추어야 하며 심령의 중심에서 우러나오는 진실한 찬양이 되어야 함을 거듭 강조한다. 찬양은 하나님의 임재를 가능하게 하는 방법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자연스러운 반응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균형감각이 갈보리채플의 경배의 찬양에 중요한 핵심원리이다. 이와 같이 갈보리채플은 영감 있는 찬양과 자유로운 형식의 음악스타일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체적으로 가르치는 것에 상당히 중요한 일조를 하고 있다. 찬양과 말씀, 이외에 다른 프로그램이나 조직, 기타 행사는 거의 없다. 아니 그런 것들은 하나님을 향한 집중도를 떨어뜨린다고 보기 때문에 오히려 권장하지 않는다. 이러한 단순성이야말로 갈보리채플의 중요한 힘이 되는 것이다.
래리 테일러는 갈보리채플의 예배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많은 사람들이 (갈보리채플에서 제작된) ‘마라나타’와 ‘아삽 레코드’에 의해서 대중화된 부드러운 현대적인 음악으로 갖추어진 갈보리채플이 강조하는 독특한 스타일의 경배(worship)에 감화를 받고 있다. 대부분의 갈보리채플 교회들이 현대 스타일의 경배를 이용하고 있지만 실상 우리 갈보리채플 교회들에서는 음악 스타일에 있어서 대단한 다양성이 있다. 어떤 경우에 전자 기타나 드럼을 사용하는가 하면 다른 경우에는 피아노와 올갠, 그리고 합창 등의 전통적이며 보수적인 음악을 사용하기도 한다. 갈보리채플을 독특하게 만드는 특정한 스타일의 경배 형태는 없다. 대신 표현의 폭넓은 허용이 있다. 물론 어떤 형태의 경배이든 우리의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오는 것이기를 우리는 소원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갈보리채플에서 어떤 예배는 보다 현대적인 반면, 다른 경우에는 전통적인 형태를 가지고 있다. 우리의 어떤 교회들은 정장과 타이를 갖춘 나이든 사람들로 꽉 차있고, 어떤 교회들은 청바지나 티셔츠를 입은 젊은이들로 꽉 차 있으며 많은 경우에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며 주님을 더욱 자세히 알고자 소원하는 하나의 공동 초점으로 모여 온 많은 다른 세대들과 스타일들, 그리고 모든 부류의 사람들이 조화를 이루고 있다.”(아름다운 목양의 샘터, pp.194~196)
열 두 번째,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기도를 드리는 것이다
갈보리 채플에서 기도는 가장 중요한 일이다. 언제나 성령의 도움을 통해 살아 계신 하나님과 동행하며 하나님의 뜻을 항상 추구하며 하나님의 뜻대로 간구하는 것은 갈보리 채플의 가장 중요한 우선순위이다. 척 스미스 목사는 기도에는 경배, 간구, 중보기도라는 세 가지 형태가 있는데, 특히 중보기도는 노동이자, 영적 전투와 같다고 가르친다.
“당신이 중보기도에 들어갈 때는 치열한 전쟁에 뛰어드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있는 힘을 다하여 싸우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 이유는 당신이 흑암과 지옥의 권세를 대적하는 싸움에 임해 있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기도함으로써 원수의 요새에 대항하여 서 있게 됩니다. 당신은 주위에 있는 사람들의 생활 속에서 사탄이 권세를 쥐고 있는 것을 뚜렷이 보아가면서 기도를 통하여 사탄이 개인의 삶을 장악하고 있는 강한 요새를 파괴해 나가기 시작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사탄의 권세 아래 포로 되어 있는 자들을 자유롭게 해 주는 것입니다.”([하나님이 원하시는 기도],척 스미스, 선한 목자 세계선교회, p.19
사탄이 끈질기고 악착같기 때문에 우리의 기도 역시 끈질겨야 한다는 것이다. 교회를 섬기는 자에게 인내하는 기도는 대단히 필요한 무기다. 응답이 없더라도 하나님의 더 좋으신 뜻을 믿고 계속 기도해야 한다. 하나님은 언제나 세상을 향해 좋은 뜻을 가지고 계시며, 그 뜻을 이루기 위해서 인간을 선택하신다. 갈보리 채플이 가르치는 기도의 특징은 언제나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뜻에 맞추는 것이다.
“여기 제가 발견한 효과적인 기도의 몇 가지 법칙을 제시하고자 합니다. 무엇보다도 먼저, 하나님의 뜻을 당신의 기도로 정하십시오.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의 뜻을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발견하십시오. 하나님은 당신을 향한 그분의 뜻과 목적과 계획을 성경에서 제시하고 있습니다. 당신의 기도 속에 성경 말씀이 차지할 수 있는 자리를 내어드리십시오. 많은 경우 기도는 독백일 경우가 많습니다. 내내 당신의 말만 할뿐입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교제가 아닙니다. 교제란 대화이며, 하나님께서는 그의 말씀을 통하여 당tls에게 말씀하시고 또한 귀기울여 들으시는 것입니다.”-[하나님이 원하시는 기도],p.32
하나님은 언제나 하나님의 뜻과 일치되는 사람을 찾고 계신다. 그래서 가장 위대한 기도는 하나님의 뜻에 자신의 뜻을 일치시키는 기도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기 욕심을 버려야 하며, 사람에게 자기 의를 드러내려고 하지 말아야 하며, 사람들을 설득하거나 감동시키려고 애쓰지 말아야 한다. 다만 성경이 가르치는 대로,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기도를 힘써 나갈 때 하나님께서 그를 귀하게 사용하시는 것이다. 갈보리 채플은 이러한 기도에 헌신함으로써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을 누릴 수 있었다.
“저를 위해서도 능력 없는 종이 되지 말고 성령으로 충만한 목회자가 되도록 기도해 주십시오. 사람의 말을 너무 많이 하지 않게 기도해 주십시오. 사람을 기쁘게 하고 흥분시킴으로써 인기를 누리는 목회자가 되지 않도록 하나님께 기도해 주십시오. 말씀을 온전히 공급해 주지 못하는 그런 게으른 목회자가 되지 않도록 기도해 주십시오. 차갑고 냉정하여 교인들에 대한 감응이 둔한 목회자가 되지 않도록 기도해 주십시오. 그리스도의 신비에 대해서 말하고, 그의 사랑을 나타내며, 양떼 앞에서 하나의 본보기가 되어, 하나님께서 제게 하시고 싶은 일들을 하나님과 겸손히 동행하며 행하는 그러한 신실한 목회자가 되도록 기도해 주십시오. 당신의 목사님들을 위해서도 기도하십시오. 우리는 여러분의 기도를 얼마나 사모하는지 모릅니다. 반면에, 우리도 또한 여러분을 위해 기도할 것입니다.”([하나님이 원하시는 기도], pp.56,57)
맺는 말
갈보리 채플의 목회철학은 척 스미스 목사의 소명과 진리와 교회에 대한 헌신과 같이 하고 있다. 이제 척 스미스 목사의 목회철학은 갈보리 채플의 목회철학이 되었으며,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그의 목회철학을 사랑하며 닮고자 하며 실제 사역에서 열매를 맺고 있다는 것이 증명되고 있다. 개인의 목회철학이 교회의 영광스런 유산이 되었다는 것 자체가 얼마나 큰 축복인 지 모른다.
갈보리 채플의 목회철학은 철저하게 성경말씀의 권위에 입각하여 성령의 임재와 능력을 적극 인정하는 데 있으며 더 나아가서 젊은이들의 영혼에 대한 깊은 애정과 사랑으로 다가서고자 하는 데 그 특징이 있다고 하겠다. 척 스미스 목사 자신은 분명한 소명에 대한 확인에서부터 목양이 무엇이며 또 교회가 무엇인지에 대한 성경적인 관점을 확실하게 다졌을 뿐 아니라 성경에 대한 사랑, 주님에 대한 사랑, 성령에 대한 전적인 의존, 그리고 영혼에 대한 깊은 사랑으로 무장함으로써 갈보리 채플을 독특한 형태의 운동이 되기에 가능하도록 했다. 갈보리 채플의 강점은 매우 성경적이고도 분명한 목회철학에 있다고 하겠다.
갈보리 채플의 목회철학은 척 스미스 목사라는 한 개인의 개성과 인격에 의존하는 독특한 것이 아니라, 철저히 성경의 권위에 의존하는 것이어서 성령으로 거듭나서 교회를 섬기는 자로 부름 받은 자라면 누구나 본받고자 하는 마음을 불러일으키는 제자훈련의 거목이라 평하지 않을 수 없다. 삶과 사역으로 직접 증명하고 몸소 실천하는 그의 목회철학에 깊은 감명을 받고 목회자로 헌신한 청년들이 수없이 많을뿐더러, 실제로 그의 단순한 목회원리를 적용함으로써 많은 열매를 거둔 제자들이 그의 편지들이다.
“우리가 다시 자천하기를 시작하겠느냐 우리가 어찌 어떤 사람처럼 천거서를 너희에게 부치거나 혹 너희에게 맡거나 할 필요가 있느냐 너희가 우리의 편지라 우리 마음에 썼고 뭇 사람이 알고 읽는 바라. 너희는 우리로 말미암아 나타난 그리스도의 편지니 이는 먹으로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살아 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한 것이며 또 돌비에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육의 심비에 한 것이라.”(고린도후서 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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