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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보리 채플 이야기(하)

등불지기 2012. 2. 20. 17:07

 

 

갈보리채플 이야기 (하)

 

 

 

  -척 스미스 목사의 설교철학, 그리고 그의 영성 연구-

                                                                                                                          김 광 락 목사

 

“비와 눈이 하늘에서 내려서는 다시 그리로 가지 않고 토지를 적시어서 싹이 나게 하며 열매가 맺게 하여 파종하는 자에게 종자를 주며 먹는 자에게 양식을 줌과 같이 내 입에서 나가는 말도 헛되이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고 나의 뜻을 이루며 나의 명하여 보낸 일에 형통하리라.”(이사야 55:10-11절)

 

들어가는 말

I. 설교자로서의 척 스미스

1. 척 스미스의 설교의 조력자

(1) 성령의 역사

(2) 중보의 기도

(3) 찬양의 능력

(4) 친근한 분위기 조성

2. 척 스미스의 설교의 일반적 특징

(1) 상당히 편하다는 느낌이다.

(2) 설교보다는 가르침이다.

(3) 요구보다는 주는 것이 많다.

(4) 그의 설교는 여행 가이드와 같다.

(5) 그의 설교는 본문의 핵심을 쉽게 파악하게 한다.

(6) 단순하며 자연스럽다.

(7) 생활 속에 진리를 연관시킨다.

(8) 계속 탐구하는 자세

3. 척 스미스의 설교의 해석학적 원리

(1) 역사적 배경에 대한 정확한 지식 추구

(2) 본문의 그림에 대한 초점

(3) 구원의 초청으로서의 본문해석

(4) 자연스런 흐름을 중시한 문맥적 해석

(5) 신본주의에 입각한 해석

(6) 영분별의 원리를 제공하는 본문해석 추구

(7) 성령의 조명(영감)을 의지함

4. 척 스미스의 설교 준비 방법

(1) 순서대로 성경을 통독하는 일과 연구하는 일에 동참하라.

(2) 성경을 펴기 전에 반드시 성령의 조명하심을 간구하라.

(3) 본문의 뜻을 바로 이해하도록 노력하라.

(4) 주제를 결정하라.

(5) 시퀀스를 개발하라.

(6) 설교구조를 개발하라.

(7) 설교원고를 작성하라.

5. 척 스미스의 설교의 방법

(1) 최대한 부드럽고, 편안한 자세로 청중에게 부담을 주지 않음

(2) 중요한 부분은 천천히 또박또박 강조함

(3) 대화하듯이 서로 주고받는 참여적 설교

(4) 청중에게 대언 하는 메시지라기보다 공동체를 대표자로서 신앙고백 하는 자세

(5) 설교를 조직하지 않으나 핵심을 파악하게 하고 핵심을 중심으로 본문을 훑어 갊

(6) 말씀이 어떻게 적용되는가를 예화로써 보여준다.

6. 척 스미스의 신학

(1) 성경의 무오와 권위에 대한 실제적인 확신

(2) 균형을 추구하는 신학

1) 성경의 권위와 성령의 역사의 균형

2) 하나님의 은혜교리와 믿음교리의 균형

3) 현실과 종말의 균형

4) 복음사역과 문화사역의 균형

(3) 척 스미스의 교리적 신학이 배격하는 것들

7. 갈보리채플의 주일설교의 방식

II.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척 스미스

1. 척 스미스의 영성

2. 척 스미스의 인격

(1) 섬기는 지도자의 모습

(2) 균형감각과 포용력

(3) 온유와 겸손의 사람

3. 척 스미스의 교회비전

4. 척 스미스의 사역자관

5. 척 스미스의 미래관

III. 척 스미스 설교와 갈보리채플운동에 대한 평가

1. 긍정적 평가

2. 발전적 제언

IV. 한국교회의 영적 갱신을 위한 제언

V. bibliography

부록: 갈보리채플의 믿음의 신조

갈보리 채플의 비전선언문

들어가는 말

주의 말씀에 신실한 한 설교자를 관찰해보면 참으로 하나님의 임재와 은혜의 신비를 느끼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하루아침에 되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서 오랜 세월 동안 말씀 사역자로서 혹독한 연단을 받은 결과이다. 그의 성장배경, 그의 소명, 그의 연단 받는 과정, 그리고 신학교에서가 아니라 삶과 사역의 현장 속에서 배우는 교회에 대한 이해, 목회에 대한 이해, 그리고 성령에 대한 이해가 서로 함께 조화를 이루며 성경 안에서 온전해졌을 때 비로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설교할 준비가 된 것이라고 하겠다. 신학교에 입학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졸업하자마자 위대한 말씀의 종이 될 것처럼 생각하기 쉽지만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실로 오랜 세월 동안 참고 기다리시면서 한 사람을 준비시키신다. 척 스미스 목사는 분명 설교자로서 잘 준비된 하나님의 종임에 틀림이 없다.

이제부터는 그의 설교를 통해 그의 신학, 그의 설교원리들, 그리고 그의 영성과 인격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한다. 분명 설교는 목회의 꽃이다. 한 송이의 아름다운 꽃을 피우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연단과 눈물과 기도와 헌신이 있었는지는 지난번 이미 살펴보았다. 분명한 소명과 함께 성경적인 목회관이 정립되었다면 이제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자로 훈련받아야 할 차례다. 그래서 이번에 시도하려고 하는 것은 척 스미스 목사의 설교를 통해 그의 설교원리와 신학과 영성에 대해서 간략하게나마 소개를 하는 것이다.

I. 설교자로서의 척 스미스

지금까지는 설교자가 아닌 목회자로서 척 스미스와 그가 목회 한 갈보리채플을 살펴보았다. 그러면 이제부터 우리는 여기서 척 스미스 목사를 한 사람의 목회자이기 이전에 설교자로 조명해보고자 한다. 물론 그의 설교는 그의 인격과 영성과 목회철학과 따로 떼어서 살펴볼 수는 없다. 그러나 아무리 목회철학이 성경적이라 할지라도 그것을 교인들과 의사소통 할 수 있어야 하며, 또한 설교의 능력으로 뒷받침되어야 한다. 설교는 끌어주고 목회철학이 밀어주어야 한다. 설교는 목회철학을 드러내주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훌륭한 목회철학 그 자체로는 아무런 소용이 없다. 많은 교회성장 세미나나 혹은 책에서 말하고 있는 것을 보면 이 두 가지가 서로 분리되어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즉 목회철학과 방법론만 가르친다든지 혹은 설교원리와 방법만 가르친다든지 하기 일쑤다. 목회철학과 설교는 서로 밀어 주고 끌어주는 동역자이다. 따라서 지금까지 우리는 설교자이기 이전에 목회자로서의 척 스미스를 조명해보았다면 이제부터는 목회자이기 이전에 설교자로서의 그를 살펴보고자 한다. 척 스미스의 설교의 특징에 대해서 그리고 그의 설교에서 우리가 본받을 수 있는 원리가 있는 지 살펴보도록 하자.

일반적으로 척 스미스 목사의 설교는 단순하며 실제적이며 영감을 주는 것으로 유명하다. 사실 척 스미스 목사 자신도 설교라는 단어보다 가르침이란 단어를 더 선호할 정도로 그의 설교는 ‘설교’라고 보기에는 너무 평범한 수준으로 거의 ‘대화’에 가깝다. 그러나 그의 가르침에는 풍성한 영감으로 가득 차 있다. 그의 설교를 들어본 사람들은 테잎이나 직접 들어보았든 간에 한결같이 지식이 있고, 지혜가 있으며, 기쁨이 있고, 평강을 주는 힘이 있고, 하나님께 시각을 맞추게 하는 능력이 있고, 하나님의 은혜가 명확하게 기술되어지고, 삶의 희망과 소망이 보여진다고 한다. 그의 설교는 평범함 속에 위대함이 감추어져 있는 것이 특징이다. 그리고 그의 설교는 매우 실용적이어서 실제 생활 속에서 ‘활용하기 쉬운’ 말씀의 검으로 다가온다. 그래서 그의 설교에 한번 빠져들게 되면 다른 설교가 귀에 들어오지 않게 된다고 얘기를 한다. 그리고 그의 설교는 하나님에 대한 이야기로부터 시작해서 삶에 대한 이야기로 나아간다. 그의 설교는 삶에 대한 영감 어린 통찰력으로 가득 차 있다. 그는 구체적인 삶의 자리로 본문을 끌어내리는데 자주 성공한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그의 설교를 ‘실용적인 가르침’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 말은 그의 설교가 ‘고상하지 못하다’는 의미로서 평가 절하하는 말도 되지만 도리어 그의 설교의 위대함을 드러내는 말도 된다. 예수님께서 그러하셨듯이 교회 역사상 언제나 위대한 설교는 하나님에 대한 위대한 이야기와 함께 삶에 대한 시장 언어가 절묘하게 조화를 이루는 것이기 때문이다.

앞으로, 그의 설교에 대해서는 (1)설교의 동역자들 (2)설교의 일반적 특징 (3)설교를 위한 본문해석원리 (4)설교준비방법 (5)설교전달의 특징 (6)설교를 위한 신학적 특징 (7)갈보리채플의 주일설교의 방식에 대해서 살펴볼 것이다.

1. 척 스미스의 설교 동역자

척 스미스 목사의 설교의 특징을 살펴보기 이전에 그의 설교를 돕는 조력자가 있음을 상기해야 한다. 척 스미스 목사 자신이 중요하게 여긴 설교의 조력자들이 있다. 이 조력자들이 설교를 설교되게 만들어 주는 중요한 요소들이다. 목회란 설교를 설교되게 하기 위해 하는 준비과정이다. 대부분의 목회자들이 목회와 설교를 별개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예를 들어 목회란 상담하고 심방하고 조직을 관리하고 예산을 편성하는 등의 활동 정도로 생각한다. 그리고 설교는 여러 가지 목회사역 중의 하나일 뿐이며 목회활동 중에 가장 중요한 부분이 바로 설교라고 생각하는 정도이다. 그러나 척 스미스 목사의 목회활동은 목회와 설교가 따로 구별해서 생각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목회활동은 설교를 돕기 위해 존재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생명력 있는 가르침이 있을 때 다른 목회활동이 열매로 맺혀지게 되고, 다른 목회활동은 또 가르침을 돕기 위해 존재해야 한다. 그러면, 설교가 설교되게 하기 위해서 무엇을 준비해야 효과적일까? 척 스미스 목사의 목회는 설교와 관계없거나 설교를 돕지 못하는 프로그램에 시간과 에너지를 낭비하는 목회자가 되지 않도록 도와주고 있다. 그런 점에서 그의 목회사역은 설교를 중심으로 단순하게 돌아가게 되어 있으며 목회자가 다른 일들로 탈진하지 않도록 막아주는 장치들이 있다. 그것들은 척 스미스 목사의 설교의 동역자들이며 다음과 같다.

(1) 성령의 역사

척 스미스 목사는 성령의 역사를 의지한다. 그러나 그가 설교할 때에 전혀 은사주의나 오순절 교단에서 볼 수 있는 바 감정주의를 찾아볼 수 없다. 겉으로만 본다면 그의 설교는 다분히 지적이어서 생각하게 만들어준다. 그러나 그렇다고 그가 성령의 역사를 과소 평가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성령의 도움이 없이 바른 설교를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리고 성령의 능력을 전적으로 의지하는 믿음으로 강단에 서고자 한다. 척 스미스 목사는 성령의 역사가 과장된 몸짓이나 어떤 감정적인 요소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말씀을 신실하게 가르치는 데 있다는 것을 확신한다. 성령의 능력을 사모하며 의지하면서 성경의 권위를 확신하는 것이 척 스미스 목사의 설교의 중요한 특징이다.

기본적으로 척 스미스 목사는 성경을 전체적으로 가르치려고 노력한다. 즉, 창세기부터 시작하여 계시록까지 계속 가르치는 것이다. 하지만 척 스미스 목사의 주된 관심사는 딱딱한 교리를 심어주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이 하시는 일에 전적으로 맡기고 하나님이 역사 하시는데 초점을 맞추려고 한다. 속으로 성령의 강력한 능력을 의지하는 믿음이 없다면 그가 성경을 가르치는 것이 지적으로 차갑게 보여질 것이다. 이것은 모든 가르치는 목회(teaching ministry)하려는 목사들에게 중요한 도전을 준다. 가르침의 은사를 받았다 하더라도 성령의 능력과 역사에 전적으로 내어 맡기지 않으면 그저 차가운 개념이나 사람을 변화시키지 못하는 논리의 말잔치에 불과할 것이다.

척 스미스 목사는 인간의 신앙 체험가운데 상당 부분은 영적이라기 보다는 감정적일 때가 많아서 전형적인 교회 예배 가운데는 인간의 감정적 속성에 호소하는 면이 많다고 말한다. 그로 인하여 화려한 성의, 성가대 찬양, 촛불과 향 등을 설치함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숙연하게 만든다. 또 오순절 계통에서는 성령충만한 예배를 강요하며 큰소리로 할렐루야를 연발하며 손뼉을 치고 몸을 흔들어 대고 뛰기도 하는 흥분을 조성하는데, 나는 이들의 그 어떤 것도 우리의 영혼을 감화 감동시킬 수 없다고 생각한다(참조 진짜성령은사 가짜성령은사, p. 223)

서울 갈보리채플의 이요나 목사는 말씀 사역자로 부르심을 받은 사역자라면 먼저 그가 성령의 기름부음을 받아야 한다고 강조하며, 요한일서에도 “너희 안에 기름부음이 있으면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수 없다”고 기록함과 같이 성령의 기름부음 없이 설교자가 자신의 준비만으로 또 어떤 인위적인 감정과 분위기를 조성하여 예배를 이끈다면 그것은 자신의 맡은 직분을 기만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그의 성도들을 위하여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엡 4:11-12)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또 초대교회 설립 당시 목회의 방향에 대하여 사도들은 “우리는 기도하는 것과 말씀 전하는 것을 전무하리라”(행 6:4)고 강조했듯이, 갈보리 채플은 모든 인본적인 요소들을 배제하고 오직 성령의 능력을 의존하기를 원한다. 이렇게 성령의 역동적인 능력을 적극 의지함으로써 설교에 대한 설교자의 부담감은 훨씬 줄어들게 될 것이다.

(2) 중보의 기도

성령의 강력한 역사를 위해 꼭 필요한 것이 바로 기도사역이다. 갈보리채플의 목회자들이 항상 간직하고 있는 사역의 중요한 원리가 이것이다. “성도들에게 기도하게 하십시오. 계속 기도하게 하십시오.” 목회자가 성령의 능력을 의지하고, 잃어버린 자들을 향해 사랑과 관심을 가지며, 그들을 위해 지속적으로 기도하며, 그들에게 먹일 하나님의 말씀을 구하며, 개인적으로 하나님과 동행하기 위해 기도가 일상생활화 되어야 함은 물론이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성도들로 하여금 기도하게 하는 일이다. 목회자는 자신만이 기도할 뿐 아니라 함께 기도하며, 또 성도들이 계속적으로 기도하게 하는 일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래리 테일러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예수님께서는 항상 기도하여 넘어지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무엘은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지 않고 중지하는 것은 죄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빌립보 사람들을 위해 전심으로 기도했습니다. 기도는 사역에 있어서 생명의 피와 같으므로 교회는 무릎을 꿇고 나가야 합니다. 모든 성공적 사역 뒤에는 헌신된 기도의 용사가 있었습니다. 성도들이 기도하게 하십시오. 기도 편지, 기도실, 장로 모임, 무엇이든지 사용하십시오. 계속 기도하게 하십시오. 기도는 하나님께서 우리가 원하는 것만을 주기 위해 쓰이는 도구가 아닙니다. 기도는 하나님의 의에 동참할 수 있게 하는 수단이며 하나님께서 역사 하시는 통로이며 하나님 마음을 움직이게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사역이 온전히 기도로 묻히게 하십시오. 하나님께서는 기도하라고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아름다운 목양의 샘터, p.118~121)

특히, 목회자는 중보기도의 중요성을 무엇보다 잘 인식해야 한다. 경배와 간구는 그리 어렵지 않지만 중보기도는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목회자 자신이 이 일에 본을 보이지 않으면 누가 기도하려고 하겠는가? 척 스미스 목사는 이 중보기도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기도의 세 번째 형태는 중보기도인데, 이것은 노동에 속하는 기도입니다. 하나님을 경배하는 기도는 노동이 아닙니다. 그것은 영광 돌리는 일입니다. 경배는 자연스러게 맺어지는 하나님과의 아름다운 영적 교제를 말합니다. 간구으 ㅣ기도 역시 그렇게 노동이 아닌 것은 지금 내게 필요한 것에 나의 관심이 전부 집중되어 있으므로 쉽게 구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중보기도를 하려면 내가 애를 써야만 하는 것입니다. 바울도 골로새 교인들에게 편지를 끝내면서 그의 동역자 에바브라에 대해 말하기를, 그리스도 예수의 종인 너희에게서 온 에바브라가 너희에게 문안하니 저가 항상 너희를 위하여 애써 기도하여(골로새서4:12)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기도는 노동으로 기술되어 있습니다. 중보기도를 통하여 나 자신을 초월하는 기도를 하게 되는데, 이 기도는 나의 필요를 구하는 것이 아닌 나 주위에 있는 다른 이들의 피요를 위해 기도하는 것입니다. 저는 저의 가족을 위해, 친구를 위해, 아직도 예수 그리스도를 모르는 이웃을 위해 기도합니다. 저는 또한 그리스도의 몸 안에 있는 분들의 필요를 위해 기도해 줍니다. 어쨌든 제가 관심을 가지고 있는 자들의 여러 가지의 필요를 하나님 앞에 들고 옵니다. 중보기도를 하는 동안 저는 기도가 실제적으로 무엇인가 하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기도는 바로 영적 전쟁입니다.”(하나님이 원하시는 기도, pp.15,16)

목회자들이야말로 정말 기도가 필요한 사람들이다. 왜냐면 그가 서 있는 위치 때문에 사탄의 공격에 더 노출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목회자들은 언제나 설교를 잘 하려고 하기 전에 먼저 영적 전투와 같은 기도생활에서 승리해야만 한다. 또한 이를 위해 목회자들은 설교자를 위해 성도들이 기도할 수 있도록 부탁해야 한다.

(3) 찬양의 능력

갈보리채플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척 스미스 목사의 강해설교 이외에 독특한 찬양사역이다. 앞에서도 언급한 바 있지만 갈보리채플의 찬양사역은 상당히 독창적이면서 다른 많은 찬양 문화에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갈보리채플에서 만들어진 수많은 노래들이 예배 가운데 사용되고 있으며 또 다른 교회로 전파되었다. 독창적이면서 강력하며 또 진실한 찬양의 힘이 척 스미스 목사의 설교에 큰 힘을 실어준다. 래리 테일러는 갈보리채플의 찬양에 대해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갈보리채플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찬양과 예배입니다. 예배는 설교를 위한 것이 아니며, 감사와 찬양을 통해 가장 성스러운 곳을 향해 들어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신령과 진정으로 하나님께 예배하는 자들을 찾고 계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코스타 메사 갈보리채플의 개척 시절에는 문 앞에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시오, 우리와 함께 그를 경배합시다’라는 간판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경배하는 것 이것이 진정한 예배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드려야 하는 예배에서 다른 사람이 드리는 예배를 바라보는 예배 참석자로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을 원하지 않으십니다. 또한 우리는 예수님에 대한 노래보다는 예수님께 드리는 찬양을 강조합니다. 예수님을 찬양하고 사랑하며 그에게 드리는 찬양을 해야 합니다. 단지 늦게 오는 성도들이 자리에 앉을 때까지 시간을 때우는 것이 찬양이 아닙니다.(실제 갈보리채플 예배 시 늦게 들어오면 문을 닫기 때문에 설교를 듣지 못한다) 여러분은 교회가 하나님께로 향하고 있는지 구별할 수 있습니다. 성소는 아침 일찍부터 앞줄에 앉기를 원하는 사람들로 가득 채워져 마음속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찬양을 하는 것입니다. 진실하고 우리의 마음을 움직이며 성령이 함께 하는 예배는 중요하고 기본적인 것입니다.”(아름다운 목양의 샘터, pp.102~107)

척 스미스 목사 자신은 찬양에 열심이라는 사실을 갈보리 교인이라면 누구나 잘 안다. 척 스미스 목사는 찬양에 있어 온 몸으로 모든 회중에 본을 보인다. 그렇다고 척 스미스 목사 자신이 음악적 재능과 감각이남들보다 결코 뛰어나다고 볼 수 없다. 다만 하나님을 찬양하는데 진지하고 열심 일뿐이다. 척 스미스 목사의 영적 파워는 그의 뜨거운 찬양에서 솟아나고 있다. 설교하기 전에 몸과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해서 찬양을 하면서 성령의 임재를 경험하기에 설교에 들어가면서부터 자연스럽게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 영감 있는 메시지를 전할 수 있는 것이다. 그 자신의 찬양뿐만 아니라 갈보리채플의 찬양 역시 검소하면서 단순하지만 오직 하나님께 초점을 맞추는 강점이 있다. 그레이스 커뮤너티 교회의 담임목사인 존 맥아더는 다음과 같이 평하고 있다.

“나는 그들이 흥을 돋우는데 보다는 경배하는데 더 주안점을 두고 있다는 말에 찬성합니다. 직접 내 눈으로 볼 수 있었는데 실제로 예배드릴 때 슬쩍 들어가 뒤에서 봤죠. 성가대도 특송 부르는 솔로도 뭐 특별순서도 없이 그저 소박하고 겸손하다는 인상을 받았어요. 초점이 하나님께 맞추어져 있다는 사실이 확연했습니다.”(믿음의 모험)

갈보리채플의 찬양은 설교를 준비시키는 측면에서 강력한 힘이 있다. 설교를 듣기 전에 찬양을 여러 곡을 부르기 때문에 설교자가 설교하기에 쉽게 만든다. 즉, 찬양을 통해 먼저 청중의 마음을 하나님을 향해 열어 놓도록 한다. 이렇게 찬양이 설교자를 도와주는 중요한 조력자인 것이다. 골든 스프링스의 갈보리채플의 담임목사인 라울 A.리스는 다음과 같이 찬양의 중요성을 말한다.

“찬양을 하면 그 동안 닫힌 마음 문이 열려서 정말 중요한 하나님의 말씀이 잘 들어올 수 있도록 우리의 심령을 준비합니다. 바로 이 점이 찬양 인도자들이 주의할 점입니다. 찬양 인도자들은 자신이 교인들을 즐겁게 해주기 위해서거나 자기를 과시하기 위해서 인도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찬양 인도자들은 오직 사람들을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로 인도하기 위해 찬양을 인도해야 하기 때문에 기도를 통해 목사와 한 마음이 되고 그가 무엇을 가르치게 될지 몰라도 그가 강대상에 서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칠 때 그 말씀을 받는 사람들이 잘 받을 수 잇도록 찬양을 통해 미리 준비시키는 것입니다.”(믿음의 모험)

그러나 갈보리 채플의 찬양은 단지 설교를 돕기 위해 마련된 수단이 아니다. 이것은 예배와 설교를 위해 의도적으로 찬양을 강조하는 식이 결코 아니다. 갈보리 채플의 찬양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진실한 반응이다.

(4) 친근한 분위기 조성

예배에 있어 편안하고 자연스러운 분위기를 만드는 데 척 스미스 목사는 세심한 배려를 한다. 사실 이것이 그의 설교를 돕고 있다. 갈보리채플은 어느 누구에게나 친근하고 편안한 분위기가 되고자 애쓴다. 코스타 메사의 본 예배당 시설도 체육관처럼 웅장한 시설이 아니다. 마치 집에 들어가 있는 것같이 기둥이 군데군데 세워져 있다. 그런 노력의 배후에는 잃어버린 영혼을 향한 애정에서부터 비롯되는 것이다. 그래서 머리를 길게 기르거나 맨발로 예배당으로 걸어 들어오는 히피들에게 언제나 진심으로 당신을 환영한다는 느낌을 주도록 한다. 개방적이고 누구에게나 친절한 집회 분위기는 척 스미스 목사의 설교에 상당히 힘을 실어준다. 왜냐면 가정집과 같이 편안한 분위기에서 자연스럽게 마음을 열게 되고 결국 하나님의 말씀을 자연스럽게 듣게 되기 때문이다. 부담 없는 분위기가 척 스미스 목사의 설교를 돕는 중요한 조력자인 것이다. 척 스미스 목사가 가지고 있는 집회시설의 분위기에 대한 원칙이 어떠한가 들어보자.

“나는 항상 친근한 집회 분위기를 조성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해왔다. 그래서 건축 설계에 있어서도 썰렁하게 크기만 하고 대형 체육관이 아니라, 다정한 모임에 찾아온 느낌을 주기 위해 이 백 석 내지 오 백 석씩 좌석이 나누어지도록 기둥과 대들보를 배열하였다. 바닥에 깐 카펫도 초원에 앉은 기분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따뜻한 친교의 분위기를 제공하는 데 도움이 되어야 한다고 본다. 전면의 강단도 단순하고 꾸밈이 없도록 했다. 전체 좌석은 잘나고 못난 사람 없이, 차별 없는 대화가 이루어지도록 반원형을 이루게 했다. 모든 것이 탁 트여 개방적이고 신선한 분위기를 제시했다. 크지만 꾸밈이 없었다.”(위대한 추수, p. 26)

모든 갈보리채플은 이와 같이 사람들에게 부담 주는 것을 싫어하는 편안한 분위기를 강조하고 있다. 척 스미스 목사는 조명시설이나 카페트나 장식에까지 세심하게 신경 쓴다. 자기만의 취향에 의해서가 아니라 교인들의 입장에서 신중하게 생각한다. 어떤 사람도 있는 그대로, 편안한 모습으로 들어올 수 있는 분위기가 강점이다. 이것은 단지 건물의 분위기만이 아니라 교회의 문화가 주는 분위기를 말한다. 사람들을 있는 모습 그대로 몸의 중요한 지체로 받아들이는 문화는 설교자를 편하게 만들어준다. 척 스미스 목사는 교회가 문화적으로 유연성이 있어야 함을 다음과 같이 강조하고있다.

“우리 갈보리채플 운동이 가졌던 태도 가운데는 ‘구부러질 줄 아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가 부러지지 않을 것이요”라는 것이 있습니다. 교회사를 공부해 보면 하나님은 항상 그 시대 사람들에게 맞는 문화적 도구를 사용하여 사람들에게 역사 하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흔히 저지르기 쉬운 오류 중에 기독교를 한 고정된 형태의 문화로 보거나 선교 등을 통해 교화한 사람들을 소위 기독교 문화라는 서양식 사고의 틀 안으로 두드려 맞춰 넣으려고 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이 잇는 그곳으로 오셔서 있는 그대로의 사람들에게 역사 하시고 그들이 몸담고 있는 문화적 배경 안에서 말씀하신다고 생각합니다.“(믿음의 모험)

담임 목회자로서 자기가 섬기는 교회가 교회를 찾아오는 모든 사람들에게 ‘가장 편하고 부드러운 인상과 분위기’를 제공한다고 자신 있게 이야기한다는 것은 굉장한 도전이다. 척 스미스 목사는 갈보리채플의 분위기를 이렇게 자랑하고 있다.

“누구라도 갈보리채플의 교인을 붙들고 교회 일을 물어 보라. 그 답은 구구하겠지만, 그래도 따뜻하고 사랑이 넘치며 경건한 가운데서도 부담 없고 마음 편한 곳이라는 대답을 얻을 것이다. 또 예배당 안을 찾아 들어올 때의 첫인상은, 모여든 주위의 사람들로부터 풍기는 하나님의 따뜻한 사랑인 것이다. 예전의 서로의 따뜻한 친교 분위기가 전체를 감싸줄 것이다. 모두 행복하고 기쁜 웃음으로 맞이해 줄 것이다. 그리고 또 사람들이 입고 있는 옷차림이 보여주듯이 경건하면서도 꾸밈없는 분위기를 맞이하게 된다. 교회에 간다고 애써서 치장할 필요가 없다는 느낌이다. 그러면서도 또 치장을 해도 마음만은 여전히 불편할 것이 없다는 얘기다. 우리 교회는 사람의 옷차림과는 전혀 상관이 없다.”(위대한 추수, p.252)

요컨데, 척 스미스 목사는 자신의 설교가 더욱 효과적으로 전달되기 위해서 사람들의 입장에서 늘 생각하면서 세심하게 배려하고 있다. 교인들의 필요를 무시하고 전적으로 설교자 자신의 필요에 맞추어서 설교를 준비한다면 아무리 탁월한 내용으로 설교를 준비했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교인들에게 아무런 의미를 주지 못할 것이다. 교인들은 자신들에게 의미 있는 것을 들으려고 한다. 따라서 설교자는 언제나 교인들의 입장에서 본문을 생각하는 습관을 들여야 한다. 척 스미스 목사는 언제나 교인들의 마음과 영적 필요에 늘 민감해 있다는 것이 분명하다. 설교행위만이 전부가 아니라는 점을 그 자신이 분명히 알고 있다. 바로 이점이 척 스미스 목사의 설교를 더욱 영감 넘치는 설교가 되도록 만들어주고 있다.

2. 척 스미스의 설교의 일반적 특징

필자가 그의 설교를 듣고 읽으면서 느낀 점들을 소개하고자 한다. 지극히 주관적인 느낌이지만 그의 설교를 여러번 들어본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주관적인 평가는 나중에 객관적인 평가를 위해 필요하다.

(1) 상당히 편하다는 느낌이다.

필자가 그의 설교를 읽고 또 비디오 및 오디오 테잎을 통해서 경청하면서 느낀 것은 특별하다는 것보다는 그저 평범하고 편하다는 느낌이었다. 그러나 그렇게 느낀 것은 필자가 설교란 성경본문을 가지고서 가용한 모든 수사학 정보를 총 동원해서 청중을 클라이맥스로 끌고 올라가는 것이라는 선입견을 가지고 대했기 때문임을 알게 되었다. 자세히 들어보면 그의 설교는 설교라기보다는 가르침의 전형적인 모델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그의 설교는 평범함과 편안함 속에서 위대한 진리를 우리가 찾도록 도와주는 가르침이라고 볼 수 있다. 그의 설교는 설교라기보다도 한 편의 대화라고 할 수 있다. 그는 대화하듯이 가르친다. 그리고 그 가르침 속에서 그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지혜와 말씀을 향한 깊은 통찰력과 지식을 주려고 애쓰고 있다는 사실을 필자는 느낄 수 있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장 편하게 들려줄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것은 얼마나 귀한 것인가?

(2) 설교보다는 가르침이다.

필자는 여러 유명한 강해자들의 설교를 듣기도 하고 읽기도 했지만 역시 그만이 가지고 있는 독특한 면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무엇보다도 그는 수사학을 구사하면서 웅변적으로 자기 논리를 전개해나가는 여타 다른 강해설교자들과는 달리 편하게 마치 가정집에서 대화하듯이 가르치는 교사라는 느낌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그는 자신이 성경말씀을 설교한다(preaching)고 말하기보다는 가르친다(teaching)고 표현하기를 더 좋아한다. 설교가 내용보다는 전달방법을 강조하면서 긴박감을 조성하는 특징이 있다면, 가르침은 전달방법보다는 내용을 강조하면서 이해시키고 깨닫게 하고 지식을 제공하는 특징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설교는 동기부여에 목표를 둔다면 가르침은 깨달음에 목표를 둔다고 하겠다. 그래서 그는 일방적인 선언이나 화려한 수사학을 동원한 설교적 요소를 잘 사용하지 않는다. 역동적인 몸짓이나 화려한 미사여구, 그리고 극적인 예화들은 도리어 교인들로 하여금 본문의 진리에 집중하는 것을 방해한다. 척 스미스 목사는 방법보다는 메시지 그 자체에 집중하고자 노력한다. 그리고 그는 청중을 설득하려들거나 강요하기보다는 그들의 영적 필요를 이해하면서 진리의 말씀으로 채워주고자 한다. 그래서 그의 설교는 도전보다는 약속이 많고, 동기부여보다는 깨닫게 하는 교육적 요소가 많다. 그것은 성경말씀에 대한 그의 태도를 보여주는데 그것은 교리를 주입하고자 하는 것보다는 듣는 자들로 하여금 본문에서 진리를 발견하도록 돕는 것이 그의 목표임을 보여준다.

참고로 필자는 릭 워렌의 설교와 척 스미스의 설교를 비교해보았다.

①가장 두드러진 차이점은 상황에서 본문으로 접근하는 방식과 본문에서 상황으로 접근하는 방식이라는 방향의 차이점이다. 릭 워렌의 설교는 청중을 분석하고 그들의 문제를 파악하고 성경으로 대안을 제시하여 해결책을 제시하는 식이다. 반면 척 스미스의 설교는 성경을 묵상하고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가르침으로써 삶의 문제를 믿음으로 대처하도록 격려하는 식이다. 청중과 상황과 문제를 분석하는 것이 릭 워렌의 설교의 출발점이라면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고 성경을 깨닫는 것이 척 스미스의 설교의 출발점이라고 할 수 있다. 청중이 관심을 가지는 문제를 예리하게 다루는 것이 릭 워렌의 관심사라면 성경 본문에서 하나님을 깊이 발견하는 것이 척 스미스의 주된 관심이다. 릭 워렌은 청중의 필요를 분석하여 성경으로 해결하려고 하는 반면, 척 스미스는 성경본문과 하나님을 깊이 묵상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게 만들고자 한다. 청중의 필요를 생각하고 그들의 필요를 채우라는 말보다는 성경을 가지고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이야기 해주는 척 스미스 목사의 설교가 필자에게는 더 영감 있게 다가온다. 문제와 필요와 변화의 개념보다는 성경과 깨달음과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와 사랑의 개념이 더 성경적으로 다가온다. 즉, 출발점의 문제가 근본적인 차이점이다. 사람의 필요에서 시작하지 말고, 하나님에게서 시작하라는 것이다. 척 스미스는 청중을 분석하는 것이 인본적이라고 비판한다. 현실을 직시하고 문제와 상황을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지만 하나님에게서 시작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②또 하나의 근본적인 차이점은 릭 워렌은 비교인들의 필요에 초점을 맞추는 설교라면, 척 스미스는 훌륭한 말씀의 제자를 만드는 데 초점을 맞춘다는 점이다. 예수님은 많은 회심자를 만들어 내라고 명령하지 않으셨다. 예수님은 ‘제자’를 만들어 내라고 명령하셨다. 요즘 설교의 문제는 청중에게 지나치게 집중한다는 점이다. 그러나 척 스미스는 본질의 문제를 제기한다. 즉, 설교자는 하나님께 집중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에게서 시작해야 한다는 것이다. 릭 워렌은 상황에서 본문으로, 청중에서 메시지로 향하기 때문에 시리즈 설교가 적합하다. 이것은 윌로우 크릭의 빌 하이벨스 목사의 설교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성경은 목적이 아니라 청중의 필요를 채우는 도구가 된다. 그러나 척 스미스는 본문에서 상황으로, 하나님에서 메시지로 향하기 때문에 강해식 가르침이다. 물론 나름대로 강해설교를 한다고 스스로 생각하는 설교자들이 많지만 실제로는 시리즈 설교인 경우가 많다. 주제에 맞춘 시리즈 설교가 교인들에게 분명 큰 도움을 줄 수 있지만 성경 전반에 대한 균형 잡힌 지식을 제공하는 것은 아니라는 약점이 있다. 반면, 척 스미스 목사는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 쭉 가르치는 것이 특징이다. 교인들은 다음주 설교본문이 어디인지 예상할 수 있으며 미리 예습할 수 있다. 그래서 담임 목사의 설교를 듣고 자신이 묵상하고 연구한 것과 비교해보면서 하나님의 말씀이 과연 그러한가 더욱 확실히 알게 된다. 이처럼 갈보리 채플에서는 설교가 전 교인들에 대한 성경공부에 대한 동기를 부여해주는 것이 된다. 그래서 성경을 아는 지식은 그 자체로 신앙의 목적이 되며 목회의 주된 일이며, 하나님을 아는데 있어 필수적인 수단이 된다. 그리고 삶의 변화를 유도하는 동기부여가 강점이라고 할 수 있는 릭 워렌의 시리즈식 단거리 설교와는 달리 척 스미스 목사의 마라톤식 설교는 성경에 대한 풍부하고 균형 잡힌 지식을 제공하는 장점이 있다.

(3) 요구보다는 주는 것이 많다.

그의 설교, 아니 가르침은 “요구하는 설교가 아니라 주는 가르침”이다. 눅 6장 38절은 이렇게 말한다.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흔히들 설교를 듣고 나면 머리와 가슴속에서 남는 것은 별로 없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척 스미스 목사는 무엇인가 생각할 수 있는 자료들을 많이 주려고 하기 때문에 그의 설교를 들어보면 무엇인가 남는 것, 받은 것이 있다고 여겨진다. 목회자는 복의 근원으로 부름을 받았기 때문에 받는 자보다는 주는 자가 되어야 한다. 척 스미스 목사는 목회자들에게 교인을 진심으로 사랑하면서 자신의 최선을 주라고 가르친다. 그래서, 목회자라면 누구나 다음과 같이 자문해보아야 한다: “나는 강단에서 저 불쌍하고도 사랑스런 영혼들에게 무엇을 줄 수 있단 말인가? 혹시 저들을 괴롭게 하지는 않는가? 자신은 행하지 않는 어떤 것을 요구하지는 않는가? 무엇인가 해야만 축복을 받는다는 식으로 행위의 무거운 짐을 지워주지는 않는가? 자신도 지지 못하는 높은 기준을 부과하지는 않는가?”

교인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어떻게 설교할 것인가 연구하기 이전에 먼저 자신에게 적용해보고 실천한다면 그러한 우를 범하는 일은 훨씬 줄어들 것이다. 실제로 설교자라면 자신이 설교한 대로 실천했는지 그리고 실천하고 있는지 자문해보면 거의 대부분은 입을 다물 것이다. 자신도 지키지 못하는 무거운 짐을 사실 청중에게 떠맡기는 식의 설교가 많은 것이다. 예를 들어, 자신은 전도를 하지 않으면서 교인들을 보고는 전도하라고 하는 식 말이다. 척 스미스 목사는 앞에서 그가 이야기했듯이 목회자는 풍성하게 먹여주는 자여야 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설교자들은 양떼들에게 풍성한 꼴을 먹이지는 않고 그들에게서 젖을 빼내려고 혈안이 되어 있다. 교회는 양떼들을 치유하고 먹이고 성숙하게 하는 목장이지 젖을 짜내는 공장이 아니다.

그러면, 자신이 양떼들을 먹이고 있는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두 가지로 알 수 있다. 청중이 다음 설교를 기대하면서 기다리고 들으려고 사모하면서 준비하는가? 설교자 자신이 자신의 설교에서 감동을 받으며 하나님께 가까이 가며 하나님을 더 깊이 알게 됨으로써 자신이 성숙해짐을 체험했는가? 자신이 감동 받지 못하고 설교하는 경우, 그리고 자신이 본문을 통해서 깨어지지 못하고서 청중을 깨뜨리려고 하는 설교가 얼마나 많은가? 설교의 목적과 목표가 청중에게 동기부여 함으로써 설교자가 원하는 목회 목표를 달성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그들의 관심은 꼴을 먹여 주는 것이 아니라 젖을 얻어내는 것이다.

그러나 척 스미스 목사는 설교가 말씀이 회중을 축복하게 하는 것이라고 믿는다. 얻어내기 위해 설교하지 말고 진심으로 주기 위해 설교해야 한다고 믿는다. 설교는 회중에게 성령의 능력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깨닫게 함으로 주님께 가까이 가며 주님을 섬기기 원하는 그들의 영혼을 격려하고 용기를 북돋아주며 더욱 분발하도록 선한 동기를 유발하는 것이다. 살아 있는 하나님의 말씀의 꼴을 아무런 대가없이 그저 주는 것이 목회다. 그러면 척 스미스 목사는 설교에서 무엇을 주는가? 말씀으로 청중에게 어떤 축복을 주고자 하는가?

1) 그는 청중에게 지식을 준다.

척 스미스 목사에게 강해설교란 지식의 공유이다. 그의 설교는 실제 전도할 때나 삶 속에서 즉시 사용할 수 있는 은혜로운 정보로 가득 차 있다. 척 스미스 목사는 성경에 대한 체계적 지식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즉, 성경을 ‘체계적으로 깊이 아는 것’이야말로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되는 첫 걸음이라고 확신하는 듯하다. 그래서 그는 본문을 가르칠 때 본문의 배경지식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그래서 설교자는 본문에 대한 배경지식을 얻기 위해 주석이나 사전을 충분히 참조해야 한다. 그리고 본문이 교인들의 생활에 실제적으로 도움이 되도록 할 책임이 목회자 자신에게 있다. 우리의 영적 성숙을 위해 도움이 될만한 모든 영적 정보를 본문에서 찾는 것이 중요하다. 척 스미스 목사는 성경에 대한 풍성한 지식은 우리의 영혼이 살지는 데 필수적인 바탕이 된다고 확신한다. 사실 오늘날 신학서적은 많이 읽어도 실제 성경에 대한 지식은 점점 빈약한 수준으로 되어 가고 있다. 그리고 강단의 설교 또한 편의주의와 대중적 지지도에 편승하여 성경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세상 지식과 윤리로 가득 차 있는 것은 실로 안타까운 일이다. 성경을 펼쳤으면 성경에 충실하게 가르쳐야 한다.

2) 그는 지혜를 준다.

그의 설교는 다분히 분별의 지혜를 주는데 탁월하다. 이단을 분별하는 지혜나, 혹은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도록 중용의 지혜를 주고 있다. 이러한 분별의 지혜, 중용의 지혜는 척 스미스 목사 자신이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 순서적으로 강해하는 습관에서 생긴 능력이다. 이렇게 성경을 사랑하고 깊이 본문을 묵상하는 가운데서 척 스미스 목사는 본문을 통해 가장 고귀한 가치가 무엇인가를 밝혀내는데 탁월한 감각을 얻게 된 것으로 보인다. 척 스미스 목사는 본문을 통해서 청중이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데 도움이 될만한 실마리가 있는지 찾아본다. 사실 많은 목회자들이 성경을 체계적으로 강해하는 사역을 하지만 척 스미스 목사의 사역에서 특징적인 것은 ‘성경을 보는 눈’을 갖게 해주는 것이다. 물고기를 잡아서 맛있게 잘 요리하여 회중의 입에 적절하게 넣어주는 탁월한 요리사들은 많다. 하지만 회중으로 하여금 스스로 물고기를 잡아 요리하는 법을 보여주는 요리사들은 드물다. 설교자가 만일 그가 섬기는 교인으로 하여금 성경을 스스로 보고 깨닫도록 성경을 보는 눈으로 준비시켜준다면 설교 자체가 제자훈련이 될 것이다. 그러나 본문을 보는 법을 직접 시범 보이는 것으로서 설교를 이해하는 목회자들은 과연 얼마나 될까? 이런 점에서 척 스미스 목사의 설교는 독특하다고 볼 수 있다. 왜냐면 그는 본문을 보고 적용하는 법을 가르치기 때문이다. 척 스미스 목사는 탁월한 요리사라기 보다는 요리하는 법을 가르쳐주는 강사와 같다.

3) 그의 설교는 은혜가 있다.

은혜를 주는 설교가 무엇인가? 그것은 은혜스러운 설교가 아니라 은혜가 무엇인지 분명히 밝혀주는 설교다. 척 스미스 목사에 의하면 감정에 호소하거나 카타르시스를 억지로 유도하는 설교가 은혜로운 설교가 아니다. 척 스미스 목사는 본문을 해설하면서 무엇보다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에 대해서 말하는 것을 가장 중요하게 여긴다. 그리고 하나님이 역사 가운데 어떤 일을 행하셨고, 또 지금 우리 안에서 어떤 일을 행하시는 지에 대해서 보여준다. 그는 근본적으로 성경본문을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라는 시각에서 보기 때문에 그의 설교는 궁극적으로 하나님을 체험하는 말씀,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시키는 말씀이 된다. 그러므로 그의 설교에서 중요한 한 가지 원리를 깨닫게 된다면 그것은 모든 설교본문 속에서 하나님과 나의 관계에 도움이 되는 중요하고 실제적인 통찰력을 제공하는 단서를 찾으라는 것이다. 사실 모든 성경본문은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 회복을 위해 기록했다. 설교자는 본문을 묵상할 때에 하나님과 나의 관계를 깨닫게 해주고 개선시켜 주는 아이디어를 발견해야 한다. 척 스미스 목사는 이것을 찾는, 즉 본문묵상을 소중히 여기고 있다. 즉, 그는 설교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기 위해서 본문을 묵상하는 것이다. 영감을 얻기 위해 본문과 씨름하는 몸부림이 중요하다. 그리고 자신의 삶 속에서 먼저 진리를 적용하고자 씨름한다. 실제 생활 속에서 말씀대로 살기 위해 하나님의 은혜를 발견하려고 하고 성령의 능력을 의지하려고 기도한다. 그 가운데서 얻어진 영감, 즉, 본문의 중심 아이디어가 발견되어지고 나면 비로소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과 은혜 안으로 초청하기 위해서 어떻게 나열하고 구성할 지 생각하는 것이다. 그의 설교 원고를 보면 그가 작성한 제목이 그가 묵상하면서 발견한 아이디어를 함축하고 있는 것을 금방 알게 된다.

4) 그의 설교에는 소망이 있다.

그의 설교를 들어보면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풍성한 언급이 있다. 그리고 하나님과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신뢰와 소망이 커지는 것을 느끼게 된다.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무엇인지 본문을 통해서 잘 보여주고,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하나님이 순종하는 자들에게 주시고자 하는 축복이 얼마나 풍성한지 잘 묘사하는 은사가 있다. 그래서 그의 설교를 듣다 보면 하나님이 정말 넓으신 분이고 은혜주기를 기뻐하시며 얼마나 풍성한지 깨닫게 된다. 물론 그가 믿음을 심어주는 하나님의 약속은 균형감각을 잃지 않는 장점이 있다.

긍정적 설교와 부정적 설교에 대해서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는 부분이 있다. 성장하는 교회는 대부분 긍정적인 설교를 하고 있기 때문에 설교는 무조건 긍정적이어야 한다는 생각과 또한 이에 대한 반발로서 부정적인 설교를 때론 해야 한다는 논리 때문에 심하게 양떼를 질책하는 설교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그것이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느 한 쪽으로 치우침으로써 균형을 잃어버리고 방황하게 된다. 어떤 사람들은 척 스미스 목사의 설교가 사람들이 듣기 좋은 말만 한다고 비난할 수 있다. 그러나 척 스미스 목사의 의도는 막연한 희망과 용기를 심어주는 긍정적 설교와는 다르다. 그가 진정 의도하는 바는 하나님을 깊이 아는 데서 주어지는 하나님의 약속과 축복이다. 하나님을 제대로 이해하는 것은 그 자체가 희망이요 믿음이요 용기를 얻는 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을 아는 것에 근거하지 않는 막연한 희망과 막연한 약속은 하지 않는다. 하나님과 바른 관계, 하나님과의 깊은 사귐, 하나님을 더 깊이 아는 지식,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에서 오는 약속과 축복을 강조하는 것이다.

그러나 반대로 적극적 사고방식의 설교자들은 성경본문을 택할 때 ‘긍정적 본문’만을 선택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척 스미스 목사로부터 배우는 지혜는 어떻게 균형감각을 갖는가 하는 부분이다. 그의 설교는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 전체적으로 순서적으로 가르치는 형식이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균형을 이룰 수 있는 장점이 있다. 또한 부정적 설교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균형감각이 필요하다. 축복과 약속을 받기 위한 조건으로서 행동을 요구하는 것이야말로 부정적인 설교이다. 그러나 성경을 순서적으로 보면 본문이 스스로 균형을 잡고 있다. 구약 역사서를 보면 패배도 있고 승리도 있다. 선지서를 보면 심판의 선언도 있고 약속의 선언도 있다. 신약을 보면 교리가 있고 또 적용도 있다. 긍정적 설교와 부정적 설교는 이러한 균형감각을 상실하고 어느 한쪽에 치우친 데서 나타나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을 처음부터 끝까지 순서적으로 가르친다면 자연스럽게 균형감각을 갖출 것이다. 균형감각을 갖는 방법에 있어서 릭 워렌 식의 균형감각은 청중의 상황에 따라, 그리고 목적 시트에 따라 설교의 강조점을 바꾸는 방식이지만 척 스미스 식의 균형감각은 전체적으로 순서적으로 일관성 있게 가르치는 방식에서 자연스럽게 균형감각을 갖추는 방식이다.

(4) 그의 설교는 여행 가이드와 같다.

실제로 그의 설교를 들어보면 자신의 강해를 ‘성경에로의 여행’이라고 자주 묘사하는 것을 보게 된다. 예를 들어 구약을 끝내고 신약을 시작할 때는 ‘이제 우리는 신약으로의 여행을 떠나게 됩니다’고 말한다. 이것은 그가 설교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 가를 보여준다. 즉, 설교는 대부분의 설교학 책들이 정의하는 것처럼 청중을 동기부여 하여 설교자가 목적하는 바를 향해 움직이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청중으로 하여금 성경본문에 대한 깊이 있는 앎, 지식, 통찰력을 갖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성경의 원저자요 주인공인 하나님에 대해서 깊은 지식을 제공하는 것이 그가 생각하는 설교의 목적이다. 그가 생각하는 설교자의 역할은 낯선 곳을 여행하는 많은 여행객들에게 그들이 밟는 땅을 소개해주는 가이드와 같은 것이다. 그래서 청중으로 하여금 본문에 대해 깊이 알게 하고 몰랐던 의미를 새로이 발견하게 하고 음미하게 하는 것으로 만족하는 것이다. 설교를 통해 청중을 축복하는 것이 목표이지, 청중을 움직이는 것이 그가 추구하는 목표가 아니다.

대부분 설교자들은 청중에게 축복을 주기 위해서 설교하기보다는 축복을 받으려면 이러이러한 것을 해야 한다고 오히려 요구하고 있다. 본문을 가지고 설교하지만 설교자의 개인적인 유익과 입지를 강화하려는 목회적 야망과 교인들을 움직이고자 하는 정치적 야망이 내포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갈보리채플은 이것을 방지하기 위해 성경으로의 여행을 해야 한다고 가르치는데, 이것을 위해 다음과 같은 원칙을 두고 있다.

1) 성경의 기록대로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순서적으로 연속 강해(exposition)한다.

2) 주중에 5장-10장 정도 성경을 읽도록 전교인 성경 통독 프로그램을 가진다.

3) 교인들이 지난 주 읽은 본문 속에서 설교 본문을 선택한다.

4) 주일 낮에 행한 강해설교를 위해 주일저녁에는 주해설교를 한다.

5) 목요일 저녁에는 심층연구로서 본문과 관련된 교리, 신학, 해석학 등을 깊이 다룬다.

6) 예배시간에 광고는 성경 읽기를 권장하는 것 이외에는 하지 않는다.

7) 성경의 어느 한 절을 강조하지 않고 문맥을 따라 전체적인 핵심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알게 한다.

갈보리 채플의 강해설교의 특징은 설교자가 설교하기 전에 설교할 본문을 교인들이 먼저 읽게 하고 연구하게 격려한다는 것이다. 그런 방식으로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 쭉 진행한다.

(5) 그의 설교는 귀납적이고 핵심을 쉽게 파악하게 한다.

그의 설교를 들어보면 문맥을 통해 본문의 핵심을 파악하게 도와주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그의 가르침은 귀납적(inductive)이다. 그가 발견한 진리를 일방적으로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청중과 함께 관찰하고, 청중이 스스로 발견할 수 있도록 차근차근히 진행한다. 그는 결코 서두르지 않는다. 또한 그가 관찰을 통해 발견에 이르도록 하는 진리는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면서도 신선한 느낌을 준다. 누구나 다 본문의 핵심에 대해서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을 새로운 각도에서 조명함으로써 그 핵심을 알고 있는 사람으로 하여금 더욱 더 그 진리에 감동하도록 만든다. 그의 설교는 그래서 어떤 면에서는 예측 가능할 정도이다. 그러나 이미 알고 있는 부분은 창조적으로 접근한다. 새로운 방식의 접근방법으로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진리에 도달하게 만든다. 어떻게 그렇게 하는가? 깊은 연구와 묵상에서 비롯된 본문에 대한 통찰력, 그리고 자기 삶에 적용한 것을 성령의 능력을 의지하면서 대화식으로 이야기하기 때문이다. 흔히들, 머리를 쓰는 신참 강해설교자들은 본문에서 기발한 설교주제를 끄집어내어서 자기 머리의 명석함을 자랑한다. 그러나 척 스미스 목사는 전혀 새로운 무엇인가를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알고 있는 것을 다만 ‘새롭게’ 가르친다. 우리가 복잡하게 알고 있는 것은 단순하게,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것은 새롭고 창조적인 방식으로,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것은 더 깊이 생각하도록 가르치는 은사가 있다. 이것은 그가 얼마나 본문을 깊이 그리고 많이 묵상하고 연구하는가를 보여준다. 그는 에스라와 같이 성경을 연구하고, 준행하며 가르치는 일에 본을 보이는 사람이다.(스7:10)

(6) 단순하며 자연스럽다.

그의 설교는 복잡하지 않다. 부모들이 자녀들을 데리고 집회에 많이 참석하는 것을 볼 수 있다고 한다.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는 진리를 결코 복잡하게 가르치지 않는다. 그는 다른 목회자들에게도 쉽게 가능하면 단순하게 가르치라고 말한다. 그의 설교는 본문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복잡하게 가르치지 않는다. 본문을 가지고 설교할 때 가능하면 단순화시켜라. 그런데 이것이 진짜 어렵다. 대부분의 강해설교자들은 본문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잘 주해하지만 대부분은 그것을 어렵게 전한다. 그러나 척 스미스는 본문의 핵심을 쉽게 파악하도록 집중하게 만드는 기술이 있다. 이것은 아마도 그의 오랜 목회경험에서 나오는 것 같다. 하지만 그의 설교를 가만히 살펴보면 중요한 원리 같은 것이 보인다. 그게 무엇인가 하면 그는 본문을 깊이 연구하고 분석하지만 그 연구과정과 묵상과정을 통해서 결국은 여러 가지를 다 붙잡는 것이 아니라, 한 가지를 붙잡는 것이다. 그 한 가지 교훈에 자신을 푹 잠그는 것이다. 그 한 가지 진리가 자신을 사로잡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나머지 교훈들은 그것을 철저히 뒷받침해주는 보조역할을 하도록 구성한다. 깊은 묵상을 통해 한 가지 영감을 얻고 거기에 다른 연구한 자료들을 종속시켜서 특정 모티프 혹은 시퀀스를 가지고 배열하는 것이 그의 설교준비작업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설교를 들으면 오직 한 가지 교훈을 마음속에 깊이 간직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의 설교에는 오직 한 가지 뚜렷한 설교의 목표가 있기 때문이다. 설교에 단순함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잘 보여준다. 준비는 많이 하되 최대한 단순화시키는 것이 그의 강해설교의 특징이다.

이를 다른 설교자들이 배우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1) 본문을 깊이 연구하되 한 가지 진리를 붙잡으라.(Only one truth)

2) 그 한 가지를 한 단어나 구로 나타내 보라.(Keyword)

3) 다른 교훈들은 그것 아래에 종속시켜라.(Subnotes)

4) 설교의 목적과 목표를 분명한 명제로 서술하라.(Goal Statement)

5) 설교의 주제문을 가장 압축된 문장으로 표현해 보라.(Subject Statement)

(7) 진리를 생활에 적용시킨다

그의 설교는 어떤 이들로부터 ‘실용주의적 가르침’이라고 비판될 정도로 실제적이다. 그리고 적용할만한 실제적인 교훈으로 가득 차 있다. 그가 사용하는 예화 역시 실제적이다. 그만큼 그의 설교는 진리를 삶 속에 적용함에 있어서 탁월하다. 사실 부흥하고 성장하는 모든 교회의 설교는 결코 딱딱하지 않다. 지루하지 않다. 그리고 삶 속에 활용할 수 있는 실제적인 진리를 다룬다. 그리고 부정적이거나 파괴적이지 않다. 척 스미스 목사의 설교는 딱딱한 지식을 가르치는 듯하더니 어느새 깊은 적용의 자리로 끌고 가는 매력이 있다. 특히 그는 우리 삶을 향한 하나님의 성품, 계획, 뜻, 목적, 하신 역사, 하시는 일, 하실 일들, 등에 대해서 깊은 통찰력을 제공한다. 그의 적용은 단순히 하라 하지 말라가 아니다. 무엇을 하면 복을 받고 하지 아니하면 저주받는다가 아니다. 그의 적용의 특징은 하나님에 대한 깊은 앎, 경외감, 관계, 사랑을 회복시켜 주는 것이다. 삶 속에서 하나님을 발견하도록 돕는다는 점에서 그의 적용은 세상에서도 배울 수 있는 그런 삶의 통찰력과는 다른 면을 보여준다. 이를 위해 척 스미스 목사는 자신이 전하는 말씀에 자신이 어떻게 순종하는지를 그대로 겸손하게 보여주기를 잘한다. 그는 결코 자기를 자랑하는 예화를 들지 않는다. 그의 겸손한 인격을 그의 적용 속에서 엿볼 수 있다. 그가 본문을 청중의 삶 속에 적용할 때는 결코 강압적이지 않다. 그는 매우 겸손하게 본문을 생활과 연관시키고 있다. 이것은 아마도 척 스미스 목사 자신이 설교하기 위해 성경을 연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한다. 자신이 진리에 목말라 하고 있으며 자신에게 먼저 적용하기 위해 성경을 연구한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그의 설교가 적용하는 데 탁월할 수 있는 것은 아마도 척 스미스 목사 자신이 진리를 먼저 자신에게 적용하는데 탁월하기 때문이라고 본다. 성경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말씀대로 살려고 하는 인격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이런 설교는 도저히 흉내낼 수 없을 것이다.

그의 인격에서 우러나오는 영감을 느낄 수 있는 장면들을 몇 가지 소개하고자 한다.

1) 하나님과 나의 관계에 대한 깊은 이해를 제공함

척 스미스 목사의 설교는 철저하게 하나님에게서 시작하는 것을 중요한 원칙으로 삼고 있다.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바른 깨달음이야말로 우리 영혼을 살지게 하는 중요한 영의 양식임을 확신하기 때문이다. 골로새서 1:6에, “이 복음이 이미 너희에게 이르매 너희가 듣고 참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은 날부터 너희 중에서와 같이 또한 온 천하에서도 열매를 맺어 자라는도다”라고 했다. 복음의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게 되면 저절로 열매를 맺게 될 것이다. 그래서 그는 성경본문을 묵상할 때 본문에 계시된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묵상한다. 아래에 열거한 인용들은 그가 본문을 통해 하나님을 어떻게 묵상했는지 잘 보여주는 예라고 할 수 있다.

<인간본성에 대한 통찰력>

그는 아브라함이 아비멜렉 앞에서 아내 사라를 누이동생이라고 거짓말하는 창세기 20장 본문에서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종종 영적으로 교만한 마음을 품곤 합니다. 그래서 ‘내가 옛사람을 확실히 정복하였고 나의 본성과 육신을 언제든지 다스릴 수 있게 되었으니 이제는 어떤 시험이 닥쳐와도 끄떡없다’라고 자신 있게 말하고 나면 하나님께서는 곧 나의 마음속에 어떤 흉악한 것이 들어 있는가를 보여주시기 위해 더 큰 시험을 주시곤 합니다. 정말로 우리 마음속에 어떤 것이 들어 있는지, 우리의 육신 속에 무엇이 들어있는지를 제대로 알 수는 없는 일입니다. 그래서 때때로 우리들은 큰 신앙적 실패를 경험하고 난 후 죄책감 속에서 절망하면서 ‘하나님, 제가 어찌하여 이런 일을 저지르고 말았습니까? 이것만은 제가 틀림없이 정복한 줄로 알았는데, 하나님과 그토록 오랫동안 동행해온 제가 어찌 이런 일을 저지르고 말았습니까?’라고 부르짖게 됩니다. 참으로 절망적인 순간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기도와 치유, p.14,15)

<문제에 대한 하나님의 시각을 제공함>

“그러므로 나를 종종 실족시키곤 하는 내 속의 저 약하고 부족한 부분은 나를 넘어뜨리기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요, 내가 나를 의지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나의 발길을 보호하사 거침이 없게 하시고 나로 하여금 훗날 그리스도 앞에 흠 없이 서게 하실 하나님만을 믿고 의지하게 만들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입니다. 어쩌면 하나님께서 지난 주 여러분들 속에 있는 저 부족한 부분들을 들춰내 보여 주셨을 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여러분들도 아브라함과 같은 시험을 받아 그 시험을 이겨내지 못하고 아브라함처럼 실수를 되풀이하였을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그것은 여러분들도 실패할 것을 사전에 프로그램 해 집어넣었기 때문이었을지도 모릅니다. 미리 겁을 집어먹고 ‘에니, 나는 도저히 안되지’하며 포기했던 탓일 겁니다. 그러나 절망할 필요는 없습니다. 만을 우리가 우리의 죄를 자백하면 하나님은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우리 입으로 자백해야만 합니다. ‘하나님, 저는 약합니다. 저는 약해서 이 일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제 대신 해주신다면 제가 이 일을 할 수 있는 것을 아오니, 하나님, 저를 도와 주시옵소서’라고 고백해야만 합니다.”(기도와 치유, p.22)

<하나님에 대한 바른 이해를 가르침>

“이 이야기가 전해주는 하나님의 모습은 흔히 사람들이 알고 있는 그것과 얼마나 판이하게 다른 모습입니까? 우리 주변에는 하나님을 알기를 우리들이 죄짓는 순간을 기다리고 계시다가 그 죄에 걸맞는 벌이나 내려주시는 분쯤으로 알고 잇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기도와 치유, p.99)

<하나님에 대한 바른 계시의 중요성을 언급함>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르시기를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로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이유는 하나님의 빛과 하나님에 대한 이해를 사람들에게 전해주기 위해서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에 대해 잘못 알고 있는 사람들, 하나님은 파괴하고자 하시는 분이 아니라 고쳐주고자 하시는 분이며, 무너뜨리고자 하시는 분이 아니라 일으켜주고자 하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에 대한 진리를 알려주시기 위해서 오셨다는 말씀입니다.”(기도와 치유, p.101)

<외모로 보지 않으시고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

“하나님께서는 일찍이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하나님이 사람을 그 외모로 취하사 어떤 이를 다른 이들보다 더 높게 여기시는 분이 아니시며, 하나님 앞에서 우리들은 모두 다 똑같이 받아들여질 뿐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밝혀두셨습니다.”(기도와 치유, p.143)

<하나님에 대한 이해를 삶 속에 적용함>

“그러므로 유대인들의 구약성경도 분명히 하나님은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않는 분이라는 사실을 기록하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유대인들에게는 그런 하나님께서 우리들 또한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않기를 원하고 계신다는 인식이 분명히 있었어야 했습니다. 이것은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에게는 바로 여러분도 빌리 그래함이나 어떤 유명한 인물 못지 않게 중요한 사람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의 기도도 성자 칭호를 받은 그 어느 누구의 기도 못지 않게 빨리 응답해 주실 것임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을 그 누구 못지 않게 사랑하시며, 날 때부터 하나님께 특별히 총애를 받는 사람은 있을 수 없음을 의미합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께 있어서 이 세상에 살았던 어느 누구 못지 않게 중요한 사람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께 얼마나 중요하며 또 하나님은 여러분을 얼마나 사랑하시는가 하면, 만일 여러분이 이 세상에 단 하나뿐인 죄인이었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오직 여러분의 죄를 씻어 주시기 위해서 그 아들을 보내주게 하셨을 정도입니다.”(기도와 치유, p.145)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 속에서 모든 것을 이해함>

“세상은 줄곧 하나님과 전쟁을 벌여 왔습니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도 하나님을 대적하여 반항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나타내시기 위해 오셨던 예수 그리스도를 유대인들이 대적하여 반항했듯이, 오늘날의 이 세상도 반항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이 사람이 우리의 왕이 됨을 원치 아니하노라’ 이제 세상은 같은 말을 하나님께 대하여 해오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를 다스리는 것을 원치 아니하노라.’ 우리는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으며 살기를 거부하고 하나님의 기준에 따라 살기를 거절하며 오직 하나님께 대항하여 공개적으로 반항하고 있는 세상을 살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공개적인 반항의 결과는 현재 진행되어 가고 있는 우리 사회의 현실에도 잘 나타나 있습니다. 비단 우리 사회뿐만 아니라 온 세계 전반에 걸쳐 보이고 있는 사회질서의 붕괴현상이 그것입니다....인간은 하나님께서 채워놓으신 도덕의 굴레를 벗어 내버리고자 애쓰던 와중에 저도 모르게 엄청나게 힘센 육신의 올가미 속으로 빠져들고 말았습니다. 하나님께 반항해 온 결과로 세상은 오늘날 우리들이 보는 이 위기를 맞게 된 것입니다. 그같이 망가져 가고 있던 세상에 하나님께서는 평화의 메시지와 함께 그 아들을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오늘날 여러분들의 인생 또한 망가지기 시작하고 있다면 하나님께서는 그 평화의 메시지와 함께 저를 여러분들에게 보내셨을 것입니다.”(기도와 치유, pp.146,147)

<하나님의 주권과 사람의 순종의 관계에 대한 이해>

“성경에 보면 옛날부터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막아보려 했었음을 알게 됩니다...여기서 바로는 하나님을 막으려 했던 대가로 얼마나 많은 고난과 고통을 겪었습니까? 여러분들 중에도 많은 어려움과 고통을 겪고 있는 사람들이 잇는데, 어쩌면 이것은 그 사람들 역시 하나님을 막으려 하고 있기 때문에 겪는 고통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여러분들도 혹시 하나님께서 하시고자 하시는 일에 방해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한번 스스로 살펴보십시오. 그 결과로 여러분들이 여러 가지 고통과 어려움, 또 고난 등을 겪고 있는 것인지도 모릅니다.”(기도와 치유, p.163)

<우리의 문제상황과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신앙고백>

“저는 왜 하나님께서 우리들의 삶 가운데 고난과 고통과 슬픔이 들어오도록 허락하시는지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제가 아는 것은 하나님은 선하신 분이라는 사실입니다. 저는 또 하나님이 세상을 그토록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므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대단히 사랑하신다는 것도 압니다. 예수님은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사랑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하나님이 선하시다는 것과, 우리를 무엇보다 더 사랑하신다는 것과, 그리고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압니다. 또 하나님께서는 하시고 싶은 일들을 하신다는 것을 압니다. 누구도 하나님의 손을 금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압니다. 하나님께서 제 인생의 모든 상황들과 모든 문제들을 다스리고 계신다는 것을 저는 압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일 외에는 그 어떤 일도 제게 일어날 수 없음을 저는 알고 있습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주관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저는 또 제가 하나님을 사랑하며, 하나님께서 그 뜻대로 저를 부르셨으므로 모든 것들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제가 모르는 것은 왜 하나님께서는 제가 아무리 궁리해보아도 어떻게 그 일이 선한 일이며, 그 일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올 수 있는 것인지 도저히 이해가 안 되는 일들을 제 삶 가운데 허락하시는가 하는 점입니다. 이제 저는 앞을 내다 볼 수 있는 햇수보다 더 많은 햇수를 뒤돌아 볼 수 있는 나이에 도달하였습니다. 그래서 거의 한 바퀴를 다 돈 시점에서 지난 일들을 돌이켜본다는 이점을 가지고 그 동안 제가 살아온 인생 길을 뒤돌아보니, 지난 날 하나님께서 제게 경험하도록 허락하셨던 저 많은 어려웠던 순간들, 고통스러웠던 순간들, 그리고 그 고난과 실망들에 깃들여 있던 하나님의 계획과 목적들이 이제 눈에 들어올 때도 더러 있게 되었습니다. 지금 와서 돌이켜보니 하나님께서 그 때 무얼 하고 계셨는지 어느 만큼은 볼 수가 있더란 말씀입니다. 어떻게 하나님께서 그 일들을 사용하셔서 내 속에 연단 받은 인격을 빚어내셨고, 나라는 미물을 가지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실 도구로 만들어 가셨는가를 볼 수가 있었습니다. 이제야 하나님의 손길을 볼 수가 있었고, 하나님께서 왜 그 일들을 허락하셨는지를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그 때는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그 때는 이것이 끝이요 이것만큼은 절대로 극복해낼 수 없는 듯이 보였지만, 이제 뒤돌아보니 왜 하나님께서 그 당시에는 이해할 수 없었던 저 많은 일들이 일어나도록 허락하셨는지를 이해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모르는 일을 당하게 되면 그곳에 머물지 않고 아는 일들로 되돌아가는 법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은 선하시며, 나를 무엇보다 더 사랑해주시고, 하나님께서 내 인생의 모든 상황과 문제들을 주관하고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이 일들 가운데 또 이 일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선하신 목적을 이루어가고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 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제가 할 일은 하나님을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믿고 의뢰하는 것이요, 내 길을 하나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왜?’에 대한 해답은 알거나 이해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믿고 맡기는 데 있습니다. 솔로몬은 말하기를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의뢰하고 네 이해하는 것을 의지하지 말라.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고 하였습니다. 에녹은 하나님이 저를 옮기시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는데 누구든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말하기를 ‘너희 믿음의 시련은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한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제가 하나님께 모든 것을 의뢰하고 맡겼을 때, 저는 비록 하나님이 무엇을 하고 계시는지 모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그 뜻을 이루어 나가고 계신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며, 하나님을 이해할 수는 없지만 하나님께서 역사하고 계신다는 것만은 알 수 있습니다. 그럴 때 제게는 평안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이해해 보려고 노력하는 한 제 마음은 계속 혼란에 빠지게 됩니다. 한밤중에도 이 일들을 생각하다 보면 잠이 오지를 않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때인가 ‘하나님,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다 주관하시며 모든 것을 다 아시니 제 길을 다 하나님께 맡기겠나이다’ 하고 고백하는 순간 나는 크나큰 평안을 체험하게 됩니다. ‘주께서 마음을 주께로 돌리고 있는 자를 온전한 평강 속에 지키시리니 이는 그가 주를 의뢰함이니이다’라고 선지자 이사야는 말했습니다. 그러니 이제 여러분들, 마음의 눈을 코앞의 문제에다 두지 말고 주님에게로 초점을 맞춘 다음, 모든 것을 주님께 맡기고 ‘주여, 내가 여기 있사오니 주께서 아시기에 가장 좋을 대로 하옵소서!’라고 해보십시오.”(기도와 치유, pp.183-185)

2) 자신의 삶에 적용하는 모범

척 스미스 목사의 설교의 특징은 진리를 먼저 자기 자신에게 적용해야 한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다.

“한번은 누군가가 제 차에 길게 상처를 냈습니다. 저는 그 일을 저지른 자가 누구이든 간에 그를 용서할 마음이 없었습니다. 또 언젠가는 누군가 제 차에서 양복 두 벌을 훔쳐갔습니다. 세탁소에 가져가려던 더러운 옷들이었는데 그걸 훔쳐가서 어떻게 할 것이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저같이 배가 나온 사람이 입는 양복이 몸에 맞을지도 모르겠지만 어쨌든 저는 그 사람에 대해 용서할 마음이 들지 않았습니다. 저의 옛 성품이 그것을 용납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제가 그를 용서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것들은 모두 다 썩어질 것들이라...’ 우리가 사람들과 관계를 많이 가지면 가질수록 미워하는 사람들도 많아집니다. 사회에서 두드러지게 보일수록 대적자는 많아집니다. 우리는 무조건 용서해야 합니다. 사람에 대한 미움으로 자신을 괴롭게 하거나 속에서 울화가 치밀어 오르도록 방치해 두어서는 안 됩니다. 분노와 용서하지 못하는 마음은 우리의 몸 안에서 화학적 물질들을 분비시켜 내부에서부터 육체를 파괴시키기 시작합니다. 예수님은 인간의 생리체계를 잘 아시기 때문에 해로운 물질을 분비시키는 원인이 되는 미움, 복수심, 분노 등을 갖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용서는 바로 우리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도 반드시 필요합니다.”(위대한 추수?)

척 스미스 목사는 자신의 경험을 고백하기도 한다.

“저는 목회 초기에 자주 금식했었는데, 보시다시피 지금은 거의 하지 않습니다. 그 당시 금식하는 동안에 저는 목회자로서 여러 사람들과 가정을 심방하기도 했는데, 마음시가 고운 주부들이 집에서 만든 과자 따위를 대접하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어떻게 하는 것이 최선이겠습니까? ‘참으로 고맙습니다만 저는 금식 중입니다’고 하겠습니까? 저는 그 자리에서 금식을 깨고 그 과자를 먹었습니다. 금식한다는 것을 다른 사람이 알게 되면 사람들의 존경심이 그 금식에 대한 상이 되어 버립니다. 저는 사람에게 보다 하나님께 상을 받고 싶습니다. 하나님께 상을 받기 위해서는 사람들에게 얘기해서는 안되므로 이 고민에서 빠져나갈 길이 없었는데, 특히 갓 구워낸 과자를 앞에 두고 어디 다른 곳으로 빠져나갈 길이 없었는데, 특히 갓 구워낸 과자를 앞에 두고 어디 다른 곳으로 빠져나간다는 것이 쉬운 일입니까? 저는 그 과자를 맛있게 먹었습니다.”

척 스미스 목사는 자신만의 신앙고백을 하기도 한다.

“제가 오늘 아침 여러분들 앞에서 한 가지 간증하고자 하는 것은 저 자신도 부족한 곳들이 많아 그 부분에서 여러 번 같은 실수를 되풀이하였고, 그때마다 앞으로 또다시 실패할 것을 사전에 프로그램 해 넣었었지만, 마침내 하나님께서 그 일들을 맡아주시사 제 자신의 힘으로는 도저히 해낼 수 없었던 그 일들을 제 대신 이루어주셨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 저를 대신해 일해주셨기 때문에 저는 승리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스도의 능력과 그리스도의 승리를 제가 체험할 수 있었던 것은 제가 온전했기 때문이 아니요, 오직 제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갔기 대문입니다. 그러나 저는 아직도 그것을 잡은 줄로 여기지 않습니다. 저는 앞으로도 수없이 더 실족할 수밖에 없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또한 제가 실족할 때마다 하나님께서 저를 넘어지지 않도록 붙들어주시고, 다시 일으켜 주시며, 제게 하나님을 의지하지 아니하고 스스로의 힘을 의지했던 또 한 군데의 부족한 곳이 있었음을 가르쳐주실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나면 저는 다시 한번 자기 자신을 의지해서는 안되며 하나님을 온전히 믿고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하지 않고서는 내가 서있을 수 없음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물론 저도 그와 같은 사실을 좋아하지는 않습니다. 제가 바라는 것은 척 스미스에게도 일부분은 고귀한 면이 있으며, 더러는 뛰어난 부분도 없지 않아 있다는 것일 겁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감사하게도 제가 전혀 그렇지 못하다는 것을 여러 번에 걸쳐서 증명해 주셨습니다. 그때마다 저는 실족하여 넘어질 뻔하였으나 하나님께서는 결코 저를 넘어지도록 내버려두시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제가 실족하였을 때에도 다만 하나님의 크고 영원하신 팔에 안기는 것일 뿐이요, 하나님께서 곧 그 팔로 저를 다시 일으켜 세워 주시고, 지탱해 주시며, 제 실수들을 용서해주시므로 제가 그분의 능력 가운데서 다시 걷기 시작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저는 저를 다시 서있을 수 있게 해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얼마나 감사하고 있는지 모릅니다.”(기도와 치유, p.23)

(8) 계속 탐구하는 자세

그의 설교는 그가 하나님과 하나님의 진리를 찾으려고 부단히 노력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실제로 그는 한 책을 강해설교를 하기 전에 그 책에 대한 주석책을 다 섭렵하면서 나름대로 심층연구를 한다. 그리고 나름대로 설교본문을 정하고 제목도 미리 붙여놓는다. 그리고 자신이 미리 준비한 자료를 가지고 설교하기 전까지 더 깊이 묵상한다. 이렇게 설교의 기본 골격이 미리 준비되어지면 유익한 점이 훨씬 많아진다. 사실 강해설교를 하는 목회자들 대부분이 다음에 설교할 본문을 그때 그때마다 연구한다. 강해설교를 하기 전에 미래 강해할 책에 대해서 연구를 마쳐놓지 않으면 강해설교의 일관성을 잃어버리기 쉽다. 하지만 척 스미스 목사는 미리 본문연구와 본문개요를 한꺼번에 해 둔다. 그래서 본문연구에 시간을 더 많이 들인 나머지 그것을 자신에게 적용하는데는 시간이 부족한 다른 강해설교자들과는 달리 이미 본문개요는 준비되어 있으므로 더욱 본문과 씨름할 수 있게 된다. 본문에 대한 기본적인 연구는 충분히 준비되어 있으므로 이제는 본문이 자신을 사로잡을 때까지 거듭 묵상하고 거듭 자신에게 적용하는 일에 힘쓸 수 있게 된다. 이렇게 함으로써 척 스미스 목사의 설교는 더욱 영감이 충만해지게 된다. 무엇보다 척 스미스 목사는 본문을 연구하면서 진리를 발견하는 기쁨을 얻고자 노력한다. 그리고 그 기쁨을 청중과 함께 나누기를 원한다. 척 스미스는 ‘연구한다’는 말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실제 갈보리채플에서는 매주 목요일 저녁마다 ‘심층연구시간’이 있다. 이 시간에는 척 스미스 목사 자신이 깊이 연구한 주제나 본문을 가지고 집중적으로 말씀을 청중과 함께 연구한다. 매주 목요일에 심층연구시간을 그가 계속 인도하고 있다는 것을 보면 그는 목회자이기 이전에 학자로서 서 있음을 보여준다. 불행하게도 오늘날 큰 교회를 담임하는 대부분의 목회자들은 연구하는데 게으르다. 책을 보는데 시간과 정열을 투자하지 않는다. 한 편의 설교를 위해 과연 얼마나 투자하면서 연구하는가? 목회자가 학자의 모습을 보여주어야 한다. 오히려 본문을 깊이 연구하는 학자의 모습이 신학교에서나 어울리고 교회에서는 어울리지 않다고 여겨지는 풍토는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3. 척 스미스의 설교의 해석학적 원리

지금까지 그의 설교에 대한 필자의 지극히 일반적이고 주관적인 느낌을 중심으로 그의 설교의 특징을 살펴보았다. 그의 설교를 많이 읽고 들어본 다른 분들은 필자와 다르게 생각할 지 모른다. 하지만 필자가 주관적인 느낌은 필자만의 것이 아님을 확신한다. 그리고 그런 주관적인 느낌을 표현함으로써 그의 설교를 처음 접해보는 다른 사람들이 그의 설교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리라는 것을 확신한다. 그러면 이제 그는 설교하기 위해 본문을 어떻게 묵상하고 해석하는지 원리를 찾아보도록 하자.

(1) 역사적 배경에 대한 정확한 지식 추구

그의 설교집을 보면 상당히 높은 지적요소를 추구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성경지식을 풍부하게 제공하고 있다. 갈보리 채플에서 강해설교는 지식을 제공하는 가르침이다. 그리고 그가 제공하는 대부분의 성경지식이 삶 속에서 믿음의 고백을 위해 도움이 되는 실제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 특히 그는 성경 당시 배경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제공함으로써 성경에 대한 보다 깊은 지식을 쌓게 하는데 관심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 자신이 성령의 역동적 능력을 의지하면서도 동시에 이렇게 지식적인 요소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그의 ‘중용의 원리’에 근거한 것으로 분석된다.

“유대인의 생활에서 기도는 매우 중요한 부분이었습니다. 하루에 두 번식 쉐마도 암송해야 했습니다. 쉐마는 구약성경 가운데 세 부분을 포함하고 있는데 그 첫 부분은 신명기 6:4에서 시작됩니다. “너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유대인들은 아침에 일어나서 제일 먼저, 그리고 밤에 잠자리에 들기 직전에 이 쉐마를 암송했습니다. 오전 9시 이전에, 밤 9시 이전에, 하루 두 번씩 의무적으로 그렇게 해야 합니다. 또 ‘쉬메나쓰’라는 기도문도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쉬메나스’란 18개의 독립된 기도문인데, 모든 유대 아이들은 어려서부터 이것을 암송해야 했으며 하루에 세 번씩 외웠습니다. 이들은 이렇게 똑같은 기도를 의무적으로 매일 아침 점심, 저녁에 드려야 했으므로, 이것이 그들의 관습과 의무가 되어 버렸습니다. 이러한 배경에서 어떤 유대인들은 아침 9시가 되면 사람들에게 잘 보이는 장소에서 이 장황한 쉐마와 쉬메나스를 암송했습니다. 그러면 이들을 보는 사람들은 ‘야, 저 사람 대단하구나 믿음이 매우 깊구나’하며 칭찬했습니다. 이 칭찬의 소리를 들으면서 기도하는 사람들은 기도하면서 마음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겠습니까? ‘저 모든 사람들이 나를 매우 훌륭하고 거룩한 사람으로 생각하는구나...오 주여, 감사합니다’하지 않겠습니까?”-마태복음 강해, p.58

갈보리 채플에서는 기본적으로 역사적 해석을 추구한다. 그래서 지나친 영해를 용납하지 않는다. 이러한 역사적 해석은 성경에 대한 객관적 지식을 더욱 풍성하게 해줄 수 있는 장점이 있다.

(2)한 폭의 그림

그는 본문을 설교하기 이전에 본문에 대해 명확한 그림을 그리는 것 같다. 그래서 그는 본문을 설교할 때 청중에게 생생하게 묘사할 수 있다고 본다. 본문의 한자 한자를 깊이 묵상하면서 본문에 대한 전체적인 그림을 그릴 때 본문이 말하고자 하는 진정한 의미에 도달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는 본문을 묵상할 때 본문의 의미를 그림처럼 훤히 파악하기 때문에 나중에 설교할 때에도 실감 있는 표현을 사용하여 본문을 묘사할 수 있다. 청중의 상상력을 자극하면서 본문을 묘사하는 척 스미스 목사의 설교의 한 부분을 소개해보자.

“이 때 네 명의 남자가 사지가 마비된 한 친구를 메고 예수님께로 나아오고 있었습니다. 여기 ‘중풍병자’라고 되어 있는 단어는 원어로 ‘사지가 마비된 사람’이라는 말을 번역한 것인데 그 사람이 왜 사지를 못쓰게 되었는 지에 대해서는 설명이 없습니다. 정말로 중풍 때문에 사지가 마비되었는지도 모르고, 어쩌면 당시에 흔했던 매독으로 인하여 사지를 못쓰게 된 사람이었을지도 모릅니다. 당시에는 매독을 치료할만한 약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매독에 일단 걸리게 되면 그 균이 온 몸으로 퍼져 나가 뇌에까지 번지게 되고, 그렇게 되면 사지가 마비되었던 것입니다. 이 사람이 참으로 왜 사지가 마비되었던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한 가지 우리가 확실히 알 수 있는 것은 그 사람의 네 친구가 예수님께서 그의 병을 치료해주실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어떻게 해서든지 그 친구를 예수님 앞으로 데려오고자 굳게 마음먹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머물고 계시던 집 근처에 도착하자마자 새까맣게 모인 사람들의 무리를 보게 되었고, 자기들의 친구가 누워 있는 침상을 멘 채 그 사람들의 사이를 뚫고 지나가 예수님 앞으로 나아가기란 도저히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사람들은 우리들이 흔히 볼 수 있는 그런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매우 창조적이었으며,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위하여 독창적인 방법을 고안해 낼 수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저에게도 그런 아들이 한 명 있는데 이 세상에서 제 아무리 들어가기 어려운 곳이라 해도 이 녀석에게 부탁만 하면 틀림없이 들어갈 수 있는 방법이 나오곤 합니다. 이 사람들은 아마도 상황을 파악하기 위하여 넷 중 한 사람을 먼저 보내어 무리 속을 뚫고 들어가게 한 뒤, 예수님께서 알아서 사람들에게 말씀하고 계시는 정확한 위치가 어디인지를 탐색하게 하였을 것입니다. 그 위치가 확인되자 그들은 집 위로 올라가 예수님이 앉아 계신 곳 바로 위에 해당하는 지점의 지붕을 뚫고 병든 친구를 그 누워 있는 침상 째 예수님 앞으로 달아 내리기 시작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한참 말씀을 하고 계시는데 갑자가 머리 위가 소란스러워지면서 지붕에서 들것이 하나 매달려 내려오고 있는 모습을 한번 상상해보십시오. 만일 여러분들이 그날 그곳에 계셨다면 ‘저 놈의 지붕 위에서는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길래 저런 소리가 들리나?’ 하고 몹시 궁금해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또 예수님게서는 분명히 지붕 위로부터 줄에 매달려 내려오고 있는 들것과 병자를 보시고 껄껄 웃으시며 즐거워하셨을 것입니다. 큰 소리로 웃고 계시는 예수님의 모습이 눈에 선하지 않습니까? 한편 집주인은 노발대발하면서 ‘내 지붕은 대체 어떤 놈이 고쳐줄꺼여?’라며 소리쳤을 것입니다.”-기도와 치유, pp.60, 61.

이와 같이 풍부한 상상력을 동원한 본문묘사는 더욱더 청중으로 하여금 본문을 잘 이해할 수 있게 해 준다. 이것은 주석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본문을 오랫동안 깊이 묵상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얻어지는 것이다.

(3)구원으로의 초청

그는 청중에게 ‘헌금하라’ ‘가서 전도하라’는 말을 하지 않는다. 그의 주된 관심사는 설교를 통해서 청중으로 하여금 그들이 무엇을 증거 할 것인가를 가르쳐주는 것이다. 즉, 그는 청중을 효과적인 증거자로서 무장시키는 데 관심이 많다. 청중이 세상으로 가서 세상에 대하여 하나님과 그리스도에 대하여 증거 할 ‘말’을 마음에 심어주는 것이 그의 관심사이다. 따라서 그는 설교 시에 복음에 대하여 명확한 요약문을 제시한다. 그가 복음에 영혼들을 초청하는 설교를 들어보자.

“예수님께서는 우리들의 구속을 다 이루어 놓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다시 한 번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의도하셨던 궁극적인 하나님의 의도, 즉 인간이 하나님과 교제를 나누며 하나님의 형상과 하나님의 모양을 가지고 살도록 하신 의도를 실현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한때 우리와 하나님이 하나가 될 수 없도록 우리가 하나님과 교제를 나눌 수 없도록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가로막고 있던 장벽은 이제 모두 제거되었고, 우리 모두가 들어갈 수 있는 문이 활짝 열렸습니다. 계시록 22장 17절, 성경의 끝은 이르기를, ‘성령과 신부가 말씀하시기를 오라 하시는도다. 듣는 자도 올 것이요, 목마른 자도 올 것이요, 또 원하는 자는 값없이 생명수를 받으라 하시더라’라고 하였습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에게 주신 선택권을 행사하여 하나님과의 교제 안으로 들어오는 것은 여러분들에게 달려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리하도록 여러분들을 억지로 강요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인간이 하나님께 반기를 들고자 하였을 때 그것은 인간 스스로 선택해서 한 일이었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그의 삶 속에서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시는 관계로 돌아올 때도 역시 자유로이 선택하여 그리하도록 정해 놓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다 이루어졌습니다. 구속에 있어서 하나님의 일은 다 이루어진 상태입니다. 이제 남은 것은 여러분들이 믿는 일뿐입니다. 하나님께서 다 이루어놓으신 일과 여러분들 사이를 가로막고 잇는 것은 불신, 그리고 그것이 무엇이든 여러분들을 못 가게 막고 있는 것뿐입니다. 여러분들이 고집을 부리며 움켜쥐려고 하는 것, 절대로 놓지 않으려고 하는 그것이 무엇인지는 여러분들 스스로가 마음속으로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오늘도 여러분들을 부르고 계십니다. 어서 와서 죄 사함과 깨끗하게 해주심을 받고, 하나님과의 교제가 무엇인지 알게 되기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것들은 모두 여러분들의 것입니다. 오기만 하면 됩니다.”(기도와 치유, p 117-118)

척 스미스 목사는 전쟁비유로 초청한 적이 있다.

“전쟁을 벌이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평화를 얻을 수 있는 길이 두 가지 있습니다. 그 하나는 항복함으로써요, 다른 하나는 정복함으로써 입니다. 전쟁 중에는 이처럼 항복이냐, 정복이냐 외에는 평화에 이르는 다른 방법이 있을 수 없습니다. 여러분들이 마음속으로 하나님과 전쟁을 벌이고 있다면 여러분들은 무조건적으로 하나님께 항복했을 때에만 평화를 체험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마침내 정신을 차리고 나서 속으로 깨닫기를 ‘내가 하나님과 싸우고 있다니 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이건 참 말도 안 된다. 오 주님, 저는 이제 항복할 랍니다.’라고 했을 때에만 평화가 가능한 것입니다. 저는 미국이 일본을 상대로 전쟁을 시작할 것임을 국민들에게 알렸던 프랭클린 델라노어 루즈벨트 대통령의 연설을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제가 아주 어린 나이였지만 지금도 또렷이 기억나는 것은 그분이 뛰어난 말솜씨로 ‘우리는 무조건적인 항복을 받아낼 때까지 멈추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던 부분입니다. 그 어떤 타협이나 조약도 용납되지 않을 것이며 오직 무조건적인 항복만을 요구하겠다고 한 것입니다.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결코 죄와의 타협이나 조약을 받아들이지 않으실 것이며, 오직 무조건적인 항복만을 요구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들이 하나님께 무조건적으로 항복할 때 체험하게 될 평화는 정말 너무도 희한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이제 여러분들이 예수님께 나아가 그분을 여러분들의 주님으로 영접하고 여러분들 자신을 그분께 항복해 바칠 때, 여러분들은 저 희한한 평화를 체험하기 시작할 것입니다. 밤에 잠자리에 들어 베개 위에 머리를 두고서도 오랜 전쟁이 끝났다는 사실, 이제는 항복했으므로 더 이상 하나님과 싸울 필요가 없다는 사실이 너무나 기뻐서 잠드는 것조차 아깝게 느껴질 것입니다.”(기도와 치유, p.150)

(4) 문맥을 따른 귀납적 해석

척 스미스 목사는 성경을 해석할 때 기발한 방법을 사용하지 않는다. 가장 좋은 해석은 가장 자연스러운 것이다. 가장 자연스러운 해석이 되려면 첫째로 성경을 역사적으로 해석해야 하며, 둘째로, 성경은 성경으로 해석해야 하며 셋째로, 본문을 자연스러운 문맥을 통하여 본문을 해석하는 것이다. 해석은 문맥을 해쳐서는 안 된다. 문맥의 인도를 받아야 한다. 이를 위해 척 스미스 목사는 여러 권의 주석과 연구서들을 읽을 것은 권하고 있다. 아무 참고서 없이 혼자만으로 본문을 묵상하면서 의미를 해석할 수도 있겠지만 본문의 의미를 파악하기 위해 다른 학자들의 저서들을 이용하는 것을 부끄러워 말아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그의 설교는 건전하며 또한 안전하다. 물론 성령의 능력을 의지하지 않고 성령이 깨닫게 하시는 것을 위해 마음을 열지 않고 무조건 다른 주석서들만 참조해서는 안 되지만 말이다. 문맥을 무시한 채 본문의 진정한 의도를 깨뜨리고 기발한 착상으로 기발하게 해석하는 것보다는 다른 주석서들을 두루 섭렵하여 연구하여 본문의 자연스러운 의미를 파악하는 해석이 훨씬 더 낫다. 묵상만 하여 기발하게 해석하는 오류와 주석서만 참조하여 성령의 자유로운 영감을 해치는 양극단의 오류에 빠지지 않도록 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자연스러운 해석에 대해 척 스미스 목사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저는 성경말씀에 대한 최선의 조명과 해석방법은 본문의 평범하고 분명한 의미를 그대로 해석하는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시고 싶으신 바를 그대로 정확하게 말씀하실 수 있는 분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공상적인 영적 해석을 시도함으로 성경의 정확한 가르침으로부터 벗어나곤 합니다. 너무 영적인 해석을 시도하다 보면, 천진난만한 유아들의 동요를 가지고도 굉장한 설교를 만들어낼 수 있을 것입니다. 단순한 가사에서 영적으로 심오한 의미를 찾아내려 시도하는 것이지요. 약간의 상상만 동원하면 조그마한 흙덩이로부터 태산과 같은 교리를 만들어낼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성경 자체가 비유의 근거를 제시하지 않으면 비유적인 해석은 피하는 것이 좋습니다.”-[은혜의 비밀]pp.70,71.

(5) 신본주의에 입각한 해석

척 스미스는 자신이 경험했던 ‘영적 사막의 기간’의 말기에 깨달은 진리가 자신은 양떼를 먹이기보다 때린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즉, 사람이 어떻게 하면 하나님이 어떻게 반응하시므로 어떻게 하라는 식으로 설교했다는 것이다. 은혜의 본질은 충분히 가르치지 않은 채 단지 무엇을 마땅히 해야 하거나 하지 말아야 한다는 식으로 강요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이 어떻게 하셨으므로 우리는 어떻게 반응해야 한다는 식으로 설교해야 함을 깨달았다. 즉, 인간의 행위를 조건으로 하나님의 축복과 약속을 설교해서는 안되며, 오직 그 행위가 자연스러운 열매로서 맺어지도록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서 설교해야 한다고 깨닫게 되었다. 성도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게 되면 저절로 반응하게 될 것이다. 그래서 그는 본문을 설교하기 전에 묵상할 때에 항상 하나님으로부터 시작하려고 한다. 하나님 중심으로 본문을 보려고 노력한다. 본문에서 하나님의 은혜의 본질을 가르채고자 하는 것이다. 모든 본문에서 ‘하나님은 어떤 분이며, 어떤 일을 하셨는가?’라는 질문을 수없이 던지고 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오늘날 많은 설교자들은 본문을 신본주의로 보지 않는다. 스스로 자신의 신학의 노선이 칼빈주의라고 자처하는 사람이 실제 설교할 때는 알미니안주의로 설교한다. 우리가 구원이나 축복을 받기 위해 어떻게 행동해야 한다는 식으로 가르친다. 이런 식의 가르침은 성도들은 더욱 비참하게 할 것이다.

사람의 어떤 행동에 하나님이 어떻게 반응하시는지를 보려는 가르침은 경건을 이익의 지료로 생각하게 하는 가르침이다. 이러한 인본주의적인 설교에 하나님은 사람의 행동에 다만 기계적으로 반응만 하시는 분으로만 서 계실 뿐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어떤 분이시며, 우리를 위해 어떤 일을 행하셨는 가는 본문에서 분명하게 그려주지 않더라도 본문에서 그것을 발견하도록 해야 한다. 그것이 설교자의 의무다. 본문은 사람의 행동이 크게 부각되어 있지만 사실 설교자가 되려면 본문에서 사람을 영웅시하는 오류에서 벗어나서 역사의 주인공이요 영웅이신 하나님을 발견하도록 해야 한다. 척 스미스 목사는 이 일을 성공적으로 잘 해내고 있다. 인본주의를 배격하는 그의 열심을 아브라함의 예를 통해 다음과 같이 설교한 적이 있다

“사람들은 누군가를 마음속에서 영웅으로 만들고, 그 만들어진 영웅을 숭배하고자 하는 본능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렇게 사람들이 영웅의 모습을 만들어 나갈 때에는 항상 그 영웅이 승리했거나 무용을 떨쳤던 일들만 크게 부각시키려 하고 그 영웅의 약한 면이나 실패했던 순간들은 굳이 이야기하려 하지 않는 것이 보통입니다. 그렇게 할 경우, 애써 만들어 냈던 영웅의 이미지가 손상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승리했을 때뿐만 아니라 실패했을 때의 일도 다 들춰내 보여주고자 하십니다. 그래서 여기 믿음의 조상이요, 하나님께서 크게 들어 쓰셨던 이 아브라함이 이번에는 철저하게 실패하는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서슴없이 아브라함의 실패를 기록하게 하셨습니다. 여기 기록된 이 비극적인 실패의 장면들을 한 번 보십시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고작 블레셋 사람들의 땅으로 이사한 후, 아내 사라에 대해 이야기하기를 자기 누이라고 거짓말을 합니다. 가장 위대했던 성도도 이토록 비참하게 실패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오직 한 분의 영웅만 존재합니다. 그 한 분의 영웅은 이 이야기의 주인공이시기도 합니다. 아브라함이 믿음을 잃고 실족해야만 했던 이 이야기 속에도 여전히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그분의 은혜가 계시되어 있지 않습니까? 여기서 우리는 사람이 영웅시되고 우리가 그 영웅을 숭배하는 것을 성경이 허락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모세, 여호수아, 요셉, 다니엘, 바울 등, 성경 속에는 많은 훌륭한 인물들이 등장하지만 이들은 모두 자칫하면 실족하여 넘어질 수밖에 없었던, 불완전한 피조물들이었을 뿐입니다. 성경은 이 점을 분명히 하기 위하여 그들의 실패담을 우리에게 전해줍니다. 그리 함으로써, 우리가 피조물인 그들을 표본으로 삼거나 그들을 바라보는 것을 허락하지 아니하고 오직 한 분 예수 그리스도만을 바라보게 한 것입니다. 오직 예수님 한 분만이 모든 시험 가운데 변함이 없으셨고, 그 어떠한 상황에서도 승리할 수 있었습니다. 인간이었으면서도 완전한 분이었다고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는 사람은 오직 예수님 한 분뿐이십니다.”(기도와 치유, p.11,.12)

그래서 그는 성경에서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에 대해서 가르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확신한다. 성경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하신 일들이 계시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모든 성경본문에서 계시된 하나님의 성품과 하신 일들에 대해서 ‘발견’해내는 것이 설교자로서 매우 중요한 과제이다. 척 스미스 목사는 출33장 모세의 기도 장면을 설교하면서 다음과 같이 자연스럽게 하나님에 대해서 소개하고 있다.

“...모세는 하나님께서 친히 함께 가주실 것을 끈질기게 매달려 구했던 것입니다. ‘다른 대용품으로는 안됩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친히 함께 해주실 것만을 원합니다.’ 모세가 하나님께서 친히 함께 해주실 것을 고집했던 이유는 그가 그 동안 하나님과 동행해 오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 가를 잘 알게 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몸소 체험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모세는 애굽사람들이 숭배하였던 여러 신들을 하나님께서 저 열 가지 재앙으로 쳐서 파하시는 모습을 두 눈으로 직접 목격하였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마른땅을 딛고 바다를 건널 수 있도록 홍해바다를 갈라놓으시고 그 안에 온 애굽의 군대를 수장시키셨던 하나님의 능력을 직접 지켜보았던 사람이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능력을 눈으로 확인하였던 모세였으므로 그 하나님의 능력 없이는 절대로 성공할 수 없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하나님께서 주께서 친히 가지 아니하시려거든 우리를 이곳으로 올려 보내지 마옵소서’라고 말했던 것입니다....또한 그것은 모세가 하나님이 모든 것을 공급해주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잘 알게 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또한 모세는 하나님이 율법의 하나님이심을 깨닫고 있었습니다....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질서의 하나님이셨습니다....모세는 또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사를 주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모세는 하나님이 사랑의 하나님이심을 깨닫게 되었습니다....그러므로 모세는 하나님께서 함께 해주시지 않는 한, 그곳에서 앞으로 나아가는 일이 불가능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그뿐 아니라 이제는 뒤로 돌아갈 수도 없다는 사실 또한 모세는 잘 알고 있었습니다....그리고 그는 하나님께서 친히 함께 가주시지 않을 경우 앞으로 나아가는 것도 원치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능력으로 함께 해주시지 않을 때, 혼자 힘만으로 앞으로 나아간다는 것은 실제로 불가능한 일이라는 것을 깨달아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 없이 앞으로 나아가 보려 하느니 차라리 그곳에서 머무르다가 죽어버리는 편이 훨씬 더 나은 일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기도와 치유, pp.30-34)

요컨데, 척 스미스 목사의 설교의 특징은 언제나 본문에서 하나님의 은혜의 본질을 드러내고 깨닫게 하는 것으로서, 본문중심, 그리고 하나님 중심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6) 영분별의 원리를 제공

그는 설교 시에 잘못된 교리흐름에 대해서 분별할 수 있는 기준을 제시한다. 그는 청중으로 하여금 잘못된 은사운동이나 경직된 말씀운동에 현혹되지 않도록 분별의 지혜를 제공하는데 관심이 있다. 이것은 다분히 그가 “중용의 도”를 중요시하기 때문에 비롯된 것이다. 나중에 살펴보겠지만 척 스미스 목사는 균형을 추구하는 신학자이다. 그는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도록 하는 것을 상당히 중요하게 생각한다. 따라서 본문해석 역시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 매우 중요한 원리가 된다. 척 스미스 목사는 특히 성경의 영감과 권위에 대한 자유주의적 견해를 배격하는데 관심이 있다.

“아브라함에 관련된 여러 가지 이야기 중 특히 이 부분은 성경이 하나님의 영감으로 지어졌다는 사실을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을 줍니다. 만약 성경 속의 이야기들이 그저 전설에 불과한 것이며 아브라함은 우리가 보다 쉽게 그를 숭배할 수 있도록 영웅으로 미화된 것이 지나지 않는다면, 이같이 수치스런 일들이 성경 속에 포함되었을 리가 없기 때문입니다.”(기도와 치유, p.10)

또한 척 스미스 목사는 잘못된 성령운동에 대해 경고하고 있다. (목회철학의 성령론을 참조하기 바란다.)

“여기서 여러분들에게 한 가지 심각한 문제점에 대해 경고 드리고 싶은 것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오늘날 이 성경구절을 대단히 잘못 적용하고 있는 교회들, 혹은 교계의 한 구석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 때문에 위험천만한 여러 가지 기이한 현상들이 이러한 교회들, 혹은 교계일각에서 나타나고 있는 것을 봅니다. 그들은 짐승 울음소리를 내며, 개처럼 짖어 댄다든가, 수탉처럼 ‘꼬끼요-’하는 소리를 낸다든가, 사자처럼 으르렁댄다든가, 아니면 발작성 웃음을 터뜨리며 뒹굴고, 때로는 술 취한 사람처럼 비틀거리면서 이러한 현상들이 모두 진짜 성령의 은사들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면서 그 주장을 뒷받침하면서 ‘어찌 하나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고 말합니다. ‘떡을 달라 하는 아들에게 돌을 주시지 않는 천부께서 성령을 구하는 ;저들에게 얼마나 더 잘 성령을 공급해 주시겠느냐?’는 논리인데 문제는 바로 이것입니다. 저들은 성령을 구하는 것이 아니었다는 점이 문제입니다. 저들이 구했던 것은 어떤 외적 현상으로서 눈에 보이는 그 무엇이었지, 하나님의 영, 즉 성령을 구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성령의 이름 아래 오만가지 해괴한 작태를 부리게 되면서 모두 다 자기들이 구한 결과로 하나님께서 주신 성령의 은사들이라고 하는데 사실 성령하고는 아무 상관도 없는 짓들일 뿐입니다. 바울은 우리가 하나님과의 교제에 있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 한 데까지 이를 정도로 성숙해지고 나면 그때부터는 어린아이와 같지 아니하여서, 사람의 궤술과 간사한 유혹에 빠져 그 때 그 때 새롭게 불어대는 여러 가지 교훈들의 유행바람에 밀려 이리 왔다 저리 갔다 하는 일이 없게 되리라고 이야기해 주고 있습니다. 이제 여러분들이 그 동안 성경을 열심히 공부하여 영적으로 충분히 성숙해진 결과, 온 나라안을 휩쓸고 지나가는 이러한 유행교훈들의 풍조에 밀려 오동하지 않고, 그 궤술과 유혹에 빠지지도 않는 모습을 보는 이 사람은 하나님께서 크게 복 주심을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탐심으로 인하여 지은 말을 가지고 여러분들로 이(利)를 삼아 자기 주머니들을 채우려 하는 저 거짓 선지자들에게 속지 마십시오. 우리에게 성령을 주시는 목적은 개처럼 짖거나, 고양이처럼 울거나, 닭처럼 꼬꼬댁거리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요, 나를 예수님의 형상과 닮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나의 목숨을 가져간다 해도, 나는 예수님께서 억제하실 수 없는 폭소를 터뜨리며 돌아 다니셨다든지, 술 취한 사람 마냥 비틀거리며 혀 꼬부라진 말들을 중얼거리고 계셨다든지 혹은 개처럼 짖고 다니시는 모습을 상상할 수가 없습니다. 다시 말하거니와 성령은 나로 하여금 예수님의 형상을 본받아 그분의 모습을 닮아가게 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내게 주시는 것이므로, 그 성령을 받은 내게서 나타날 현상이란 저와 같이 해괴한 모습들이 아니고 다름 아닌 나의 삶을 통해서 세상으로 넘쳐흐르는 그리스도의 사랑, 그리스도의 선하심, 세상을 향해 그리스도께서 가지셨던 걱정과 염려의 모습, 그 은은한 향기일 것입니다.”(기도와 치유, pp. 85,86)

척 스미스 목사는 성령운동이 가지고 있는 위험성을 본문을 통해 지적하기를 잘 한다.

“누가복음에서는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흥미로운 사실은 하나님의 성령에 대해 잘못된 개념을 퍼뜨리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은 성령의 역사를 우리의 삶에 연결시키려는 시도에 관해서 ‘성령세례를 받으려다가 귀신 들리는 수가 있으므로 매우 조심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이 주장은 제가 이제까지 들어본 말 가운데 가장 불경스러운 말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과 전혀 상관이 없는 말입니다. 이 말로 인해 상당수의 사람들이 성령세례 받기를 두려워합니다. 하나님께 마음을 열었다가 대신 귀신이 들어오면 어떻게 하나 하고 걱정하게 됩니다. 우리들은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께 나아갈 때는 온전한 확신을 갖고 나아가야 합니다. 제가 걱정하는 것은 하나님께 마음을 온전히 열 때 하나님께서 어떤 일을 행하실 것인가 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께 마음을 온전히 열지 못함으로써 내가 받지 못하게 되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점입니다. (마태복음 강해, p.80)

또한 거짓 선지자들을 경고하기도 한다.

“거짓 선지자들도 사람들을 모을 때는 진리를 말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거짓 선지자들을 즉시 알아보기가 어렵습니다. 때문에 근본적이며 기본적인 진리에 접하여 영생의 문제를 달게 될 때에 우리는 물어보아야 합니다. 그가 당신을 좁은 문과 좁은 길로 인도하여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 의지하도록 이끄는가 아니면 종교적 제도나 종교적 의식이나 어떤 교회를 믿도록 이끄는가? 어떤 사람이 당신으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 외에 또 다른 어떤 것을 믿도록 한다거나, 영생의 문제에 관하여 예수님만 완전히 신뢰하면 충분하다는 사실에 의심을 갖게 한다면 그는 거짓 선지자입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거짓 선지자들은 많은 시간을 투자하여 그들이 말하는 것들을 들어보기 전에는 식별해내기 어렵습니다. 저들이 많은 진리를 그 교리에 섞어 전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 두 가지를 매우 교묘하게 섞는 재주를 가지고 있으므로 듣고 있다 보면 미로에 빠지듯 미혹되기 쉽습니다. 가장 중요한 핵심은 영생으로 인도하는 길에 관한 문제입니다. 그리고 거짓 선지자는 양을 먹이기보다는 궁극적으로 속여 빼앗습니다. 사람들이 그들의 모임에 빠지게 되면 거짓 선지자들은 그들의 조직 유지를 위한 기부를 더욱 강조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사람들을 그의 단체에 재정적으로 속박 당하도록 만듭니다......거짓 선지자들은 양들에게서 이익을 취합니다. 탐욕이 그들의 근본이며 각종 속임수로 자신들의 탐욕을 채우려고 합니다. 그들은 추종자들이 모든 것을 바치지 않으면 죄책감을 느끼도록 몰아갑니다. 이것은 거짓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빈털털이가 아닌데 왜 자꾸 돈을 강조합니까?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계획을 이루어 나가시는데 사람들의 후원에 의존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억지로 내는 것을 싫어하시기 때문에 헌금하도록 강요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릇된 동기로 헌금하는 것을 미워하십니다. 그러므로 돈을 강조하며 영리 목적의 사업에 끌어들이는 자들을 주의해야 합니다.”(마태복음 강해, pp.85-86)

또한 행위와 믿음 중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음을 강조한다.

“사도 요한은 우리가 말로는 하나님과 교제를 갖고 있다고 하면서도 실제로는 어두운 가운데 행하고 있다면 이것은 거짓말을 하고 진리를 행치 않는 것이라고 지적했습니다. 저는 ‘오, 하나님, 사랑합니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요한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가 없느니라’고 하면서 결론적으로 ‘저 안에 거한다 하는 자는 그의 행하시는 대로 자기도 행할지니라’고 말했습니다.”(마태복음 강해, p.87)

그러나 척 스미스의 설교는 어느 한쪽 교리에 치우치지 않도록 노력하는 면이 있다. 이것은 그가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 한 절 한 절 가르치면서 터득한 것이다. 그래서 척 스미스 목사는 교인들이 한 쪽 교리에 너무 지나치게 집중하여 미혹 당하지 않도록 권면 하고 있다. 균형성을 상실한 교리는 위험하다는 것이다.

(7) 성령의 조명(영감)을 의지함

척 스미스 목사는 성령의 조명을 대단히 중요하게 여긴다. 오직 성령의 조명하심으로 본문을 깨달을 때 그 말씀이 나와 그리고 청중에게 영감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전달될 수 있다.

“영적인 것들을 이해하고 깨닫기 위해서는 심령 속에 하나님에 관한 일들을 밝히 보여 주시는 성령의 능력이 역사 해야 한다. 바울은 에베소서 1:17에 에베소 성도들을 위하여 기도했는데, 그 내용은 하나님께서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그들에게 주셔서 하나님을 알게 해 달라는 것이었다. 우리에게 부어 주신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은혜와,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사역과, 그분께서 우리 삶 속에서 하고자 하는 일이 무엇인지 알려 주시는 것이 성령의 사역이다. 성령의 도우심 없이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려고 하고 그리스도인의 행위를 이해하려고 하는 것은 얼마나 비극적인가! 한 마디로 그런 일은 불가능하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삶과 거룩함을 위해 필요한 모든 것을 허락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어느 한 가지도 부족한 것이 없도록 해 주셨다.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상황이 아무리 어렵다 해도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비상구를 다 강구해놓으셨다. 성령께서는 하나님이 이미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신다. 그래서 우리는 특별한 필요와 상황에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깨달을 수 있다.” [진짜 성령의 은사, 가짜 성령의 은사], pp.134,135.

계속해서 척 스미스는 별 다른 해석의 방법을 강조하지 않는 것이 그의 해석의 특징이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구하면서 본문을 읽되 가능하면 본문의 흐름에 단순하고 자연스럽게 해석하라는 것이다.

“나는 항상 사람들에게 이렇게 가르친다. 말씀을 읽기 전에 먼저 기도하십시오. ‘주여, 내 눈을 열어 나로 보게 하시고 내 귀를 열어서 성령께서 말씀을 통해 하실 말씀을 듣게 하옵소서’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어떤 이들은 ‘성경 해석 방법이 너무 많아 혼란에 빠진다’고 말한다. 나는 성경에 관해 어떤 사람이 쓴 해석을 읽으라고 하지 않는다. 오직 성경 자체만을 믿으라. 어떤 이들은 ‘당신의 방법이 옳은지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라고 묻는다.....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바로 이것이다. 나는 당신이 단지 성경을 읽음으로써 믿게 되는 사실이 무엇이든지 전혀 걱정하지 않는다. 나는 성령께서 바로 당신이 읽고 있는 성경 말씀을 통해 당신을 가르치실 수 있다고 믿는다. 성령께서 가르쳐 주시는 것은 당신이 알 필요가 있는 모든 것이다. 나는 당신에게 어떤 사람의 성경해석을 읽으라고 권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단지 성경을 읽으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면 성령께서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을 가르쳐 주실 것이다. 나는 당신이 혼자서 성경을 읽을 때 성경을 어떻게 해석할지 걱정하지 않는다. 당신이 어떤 잘못된 교리로 빠지지나 않는지, 혹은 이상한 쪽으로 생각을 잘못 이끌어 가지 않을지 걱정하지 않는다. 내가 걱정하는 것은 당신이 그럴 듯하게 성경을 해석한 생명력 없는 쓰레기 같은 어떤 글을 읽을 때 혹시라도 이상한 쪽으로 생각을 몰고 가지나 않을까 하는 것이다.” -[진짜 성령의 은사, 가짜 성령의 은사], pp.137,138

척 스미스 목사의 설교는 여러 권의 연구서들을 통합하여 나름대로의 기준을 가지고 정리하는 지적인 활동과 동시에 본문만을 붙들고 씨름하여 성령이 주시는 깊은 영감의 샘물을 길어 올리는 영적인 활동이 조화를 이루는 장점을 보여주고 있다고 하겠다.

4. 척 스미스의 설교 준비 방법

척 스미스 목사의 강해설교 준비원리에 대해서는 미국 코스타 메사 갈보리 채플의 성경 학장인 데이빗 학킹(David Hocking)목사가 내한하여 서울 갈보리 채플에서 강의했을 때 강의자료를 참고하여 정리하고자 한다.

(1)경건훈련

설교를 준비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평소 경건 훈련에 힘쓰는 것이다. 갈보리채플에서는 설교를 위해서가 아니라 성경연구를 위해서 다섯 가지를 요구한다.

첫째, 미리 준비하라는 것이다. 미리 설교계획을 짜서 달력에 표시해두라는 것이다.

둘째, 조직하라는 것이다. 한 주에 연관성 없는 여러 설교를 하지 말라는 것이다.

셋째, 극기하라는 것이다. 매일 시간을 정해서 성경연구를 위해 투자하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 연구시간은 철저히 지키라는 것이다.

넷째, 성실하라는 것이다. 성경연구 시간을 미루지 않도록 하고 개인기도생활을 열심히 하고, 말씀 자체에서 오는 능력보다 자신의 설교솜씨를 뽐내려고 하는 교만을 주의해야 하며, 남의 설교를 베끼지 않도록 하며, 자신이 준비하지 못한 것을 하나님이 채워주시리라는 안일한 생각을 하지 말며, 특별히 설교를 잘 하려고 노력하지 말고 말씀 속에 깊이 잠기도록 하라는 것이다.

다섯째, 성도들의 영적 필요에 민감해지라는 것이다. 본문을 연구하고 묵상하고 설교원고로 만들 때, 자신이 발견한 진리가 정말 성도들에게 도움이 될 만한 것인지 늘 자문해 보아야 하며, 또한 설교자가 청중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는지, 그들을 위해 진정 기도했는지, 그들의 필요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는지 자문해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목사는 설교하기 위해 성도들과 늘 대화하고 친밀하게 교제하는 소그룹의 장이 있는 얼마나 중요한지 모른다. 교회가 대형화되어갈수록 목회자는 대중과 상대하기 위해 소그룹에서 탈피하려는 경향이 있다. 이것은 점점 성도들의 영적 필요를 인식하는 데서 멀어지는 결과를 초래한다. 따라서 대형교회의 목회자일수록 소그룹을 잘 섬겨야 하는 것이다.

척 스미스 목사는 개인적으로 성경을 연구하는 일에 있어서 성실한 사람이다. 척 스미스 목사는 개인성경연구가 경건생활에 매우 중요한 일임을 다음과 같이 강조한다.

“우리는 종종 꾸준한 성경공부를 해나가는 습관을 들이지 않기 때문에 자라지 않습니다. 우리는 육체의 부분은 충실하게 먹이고 영적인 필요를 채워주는 일은 소홀히 합니다. 그 결과로 영적인 사람은 쇠약해지고 육체의 사람은 막강해집니다. 영적인 사람이 강건해지기를 원한다면 영으로 심는 길밖에는 도리가 없습니다. 육으로 심고도 어떻게든 영적 수확을 거두기를 기대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성령을 좇아 행하기 위해서는 영을 먹이기 시작해야 합니다. 그 말은 하나님의 말씀에 중점을 두고 더욱 더 많은 시간을 말씀에 써야 한다는 뜻입니다.”-[은혜의 비밀], p.90.

(2)성령의 조명하심을 간구하라.

척 스미스는 다음과 같이 자신의 방법을 소개한다.

“나는 ‘오 성령님, 내 마음과 심령을 열어 주사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게 하옵소서’라고 꼭 기도한 후에 하나님의 말씀을 읽는다. 나는 감히 내 자신의 육에 속한 지식만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다가가지 않는다. 그러면 실패할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쳐 달라고 성령의 도우심을 구한다. 요한일서 2:27에서는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라고 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할 때 가르침과 인도를 성령께 의지할 수 있다.” ([은혜의 비밀], p.135)

(3)본문의 뜻을 바로 이해하도록 노력하라.(본문연구)

본문을 연구하기 위해서는 우선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기 위해 기도로 준비해야 한다. 성령의 도우심이 아니고선 결코 성경말씀을 제대로 깨달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 다음에 겸손한 마음으로 본문을 여러 번 깊이 정독하는 것이 중요하다. 본문의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서 문맥을 여러 측면에서 살펴보고 본문의 전후 관계를 철저하게 이해해야 하며, 본문에 대한 원어적 지식도 나름대로 충분히 소화해두어야 한다. 본문을 읽으면서 나름대로 본문구조를 분석하고 컨코던스(concordance)를 활용하여 다른 성경구절과 비교하면서 읽어야 한다.

이렇게 본문의 뜻을 바로 이해하는 것은 설교를 위한 묵상이 아니라 바로 설교자 자신을 위한 묵상이 되어야 함을 의미한다. 자신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해야 한다. 설교자가 설교의 의도를 가지고 본문을 보아서는 안 된다. 본문이 원래 말하는 바에 집중해야 한다. 먼저 자신이 본문에서 깨닫는 것이 중요하고, 그 다음에 청중이 본문의 의미를 깨닫도록 하는 일이다. 청중이 본문의 뜻을 깨닫도록 돕는 일이야말로 목사가 할 수 있는 최상의 섬김이다.

그런데 청중으로 하여금 본문의 뜻을 깨닫게 하고, 용기를 북돋아 주며, 열심을 내게 하며, 덕을 세워주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목사 자신이 스스로에게 본문의 뜻을 적용시키는 일이다. 목사 자신이 깨닫는 것 이상으로 교인들을 깨닫게 할 수 없고, 목사 자신이 본문을 통해 덕을 세우는 것 이상으로 교인들로 하여금 덕을 세우게 할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인식해야 한다. 자신에게 잘 설교할 줄 아는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도 잘 설교할 수 있는 것이다.

(4)주제를 결정하라.

본문의 전체 문맥을 확실히 이해하고 각 문단 별로 중심사상이 무엇인지 있는 대로 다 찾아서 열거하도록 하라. 그리고 각각의 중심사상들 중에서 어느 것이 본문의 전체적인 흐름에 중심을 차지하고 있는지 결정해야 한다. 각각의 중심사상을 전체적인 주장에 비추어서 하나씩 살펴보는 것이 중요하다. 그 다음 메시지의 주제를 간단하게 한 문장으로 표현한 다음 본문 속에서 그 주제문장을 발전시키고 확장시켜 나가는 것이 중요하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본문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정확하고 분명하게 진술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5)시퀀스를 개발하라.

척 스미스 목사의 설교와 모든 갈보리채플 목회자의 설교에 있어서 특징적인 것이 시퀀스를 개발하는 것이다. 시퀀스(sequance)란 설교자와 청중이 각각의 중심사상을 함께 발전시켜 나가는 능력을 가리킨다고 한다. 이것은 다른 말로 ‘핵심단어’(keyword)라고 부를 수 있겠다. 즉, 시퀀스가 하는 역할은 설교가 본문에 대해 연구한 여러 가지 교훈을 단순 나열식으로 늘어놓는 무책임한 설교를 방지하는 것으로서, 본문을 연구하면서 발견한 것들을 한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묶어주는 일정한 흐름을 말한다. 시퀀스가 없을 때 설교는 중구난방식 설교가 되기 쉽다. 이것은 흔히 강해설교를 처음 시도하려는 목회자들이 자주 범하는 실수이다. 대게 이런 경우는 본문을 충분히 연구하지 못하거나 혹은 설교 준비하는 일에 게을리 했기 때문이다.

흐름이 좋은 설교가 좋은 설교가 된다. 아무리 좋은 본문을 가지고 깊이 연구했다 할지라도 설교자가 분명한 목적의식과 방향의식을 가지고 발견한 것들이 한쪽으로 자연스럽게 흘러가도록 만들지 않으면 좋은 설교가 될 수 없다. 따라서 설교자는 좋은 주해자가 되어야 할뿐 아니라 좋은 설교감각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이러한 설교감각은 바로 어떻게 하면 효과적인 흐름을 유도할 것인가 하는 점이다. 좋은 시퀀스를 개발하기 위해 가장 간단한 방법은 핵심단어(keyword)를 사용하는 것이다. 핵심단어는 본문 안에 나오는 어느 단어이거나 아니면 본문을 설명하기 위한 핵심 단어이어야 한다. 이러한 핵심단어를 중심으로 일관성 있는 흐름을 만들어야 설교가 곁길로 빠지지 않고 한 방향으로 집중되면서 흘러갈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핵심단어가 지나치게 청중의 흥미를 끌기 위해 고안된 것이라면 오히려 설교에 역효과를 낳을 수 있다. 핵심단어는 본문의 핵심에 맞게 자연스러워야 한다.

(6)설교구조를 개발하라.

먼저 몇 가지 요점들을 설정함으로 전체적인 설교구조를 만든다. 각 대지는 전체 설교 주제를 발전시켜 나가도록 해야 한다. 각 대지는 연결되어 있으면서도 서로 구별되어야 한다. 각 대지는 형태가 비슷해야 좋다. 즉, 각 대지는 모두 질문하는 형태이거나, 아니면 증명하는 형태이든지, 아니면 동사형 혹은 명사형 등등, 일관성이 있으려면 형태가 비슷해야 한다. 각 대지는 서로 무게 중심이 비슷해야 한다. 어느 한 대지가 다른 대지보다 지나치게 길거나 많은 강조점을 가지지 않도록 배려하는 것이 좋다. 이렇게 대지를 구분할 때 앞서 설정한 핵심단어(keyword)를 사용하여 핵심단어가 돋보이도록 하는 것이 좋다. 그러나 지나치게 청중의 흥미를 자극하여 본문에 집중하지 못하게 해서도 안 좋다.

설교준비에 있어 해결해야 할 3대 과제가 있다면 ①본문연구, 묵상, 주해를 통해 본문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정확하게 밝혀내는 것, ②밝혀낸 진리를 효과적으로 구성하는 것, ③밝혀낸 진리가 사람을 변화시키고 영혼의 갈급함을 채울 수 있도록 성령의 기름부음을 받는 것이다. 그 중에서 대다수 설교자들이 가장 힘들어하는 부분 중에 하나가 어떻게 본문의 진리를 효과적으로 구성하는가 하는 점이다. 이 문제에 대해 척 스미스 목사는 자세한 방법론을 가르치지 않는 것 같다. 그의 가르침은 본문에 대해 설교자가 “감동 받으면” 설교구성은 절로 되어진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자는 설교구성에 있어서 적절한 커뮤니케이션 훈련을 받을 필요가 있다고 본다. 강력한 설교구성이 강력한 설교를 만든다고 확신한다. 설교 구성 원리들은 여러 가지가 있다. 이에 필자가 제시하는 몇 가지 설교구성원리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귀납법적 모델(Inductive Model): 갈보리채플의 강해설교에서 사용하는 방법

①서론: 유용한 정보를 제공하여 참여를 자극한다.(문맥,배경,필요)

②관찰: 본문에서 중요하고 특별하고 도움이 될만한 것을 보게 한다.

#가장 중요한 단계; 전체 그림, 숨은 그림, 생활에 도움이 되는 아이디어

③해석: 다른 본문과 연결하여 주어진 본문을 바로 이해하게 한다.

④영감: 삶의 비유를 제시하여 본문에 대해 감동 받게 하다.

⑤적용: 원칙과 원리를 제시하여 행동하는 것을 돕는다.

●등산모델(Climbing Model)

①오픈: “흠” “호오” 감정이 긴장되고 들을 준비를 갖추는 단계

②타락상황: “그래, 맞아 내 문제야” 삶의 모순에 쓰라린 직면을 하는 단계

③필요절감: “그럼 어쩌지?” 인간의 행동에 대해 깊이 좌절하고 은혜를 사모하는 단계

④하나님의 은혜(해결): “그래?” “야호” 하나님의 행동(성품)을 깨닫고 환호하는 단계

⑤우리의 응답: “암, 그렇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인간의 책임이 자연스럽게 깨닫게 됨

⑥영광의 찬송: “아멘” “할렐루야” 하나님이 하신 일에 대한 감사, 감격, 찬송

⑦기대: “믿습니다” 현실과 미래의 불확실성에 대한 하나님의 역사를 믿고 기대하는 단계

●역설모델(Paradox Model, 유진 로우리 박사의 이야기식 설교구성모델)

①평형을 뒤집어라

②모순을 분석하라

③해결의 실마리를 드러내라

④복음을 경험하라

⑤결과를 예견하라

●시나리오 모델(Drama-manuscript Model)

이것은 마치 설교원고를 드라마 대본 쓰듯이 작성하는 구성법으로서, 무대, 주인공, 소품, 때, 목적, 장소, 장르 등을 연출자와 연기자를 위해서 알기 쉽도록 쓰는 작가와 같이 설교원고를 작성하는 방법이다. 실제 설교원고는 드라마나 연극 대본과 매우 유사하다. 이 방법은 멀티미디어 시대에 적합한 설교모델이라 할 수 있다.

●의사소통모델(Communicative Model)

이것은 현실과 본문 사이에 끊임없이 대화의 가교를 잇는 작업으로서 ①현실에서 본문으로, 다시 ②본문에서 현실로 다가가는 식으로 구성하는 설교구성법을 의미한다. 이것은 상담 혹은 상황설교에 적합하다.

●예화모델(Illustrational Model)

이것은 생활 속에서 찾아보기 쉬운 비유나 은유를 찾아낸 뒤 그것을 본문과 연결시키는 작업으로서 ①비유에서 본문으로, 다시 ②본문에서 비유로 다가가는 식으로 구성하는 방식이다.

요컨데, 등산모델은 우리의 타락상황, 우리의 문제에서 시작해서 복음(하나님의 은혜로운 성품과 행하심)으로 다가가는 방식이며, 역설모델은 본문에 숨겨진 역설을 찾아서 그 역설에서 시작하는 것이며, 귀납법적 모델은 관찰을 통해 중요한 것을 발견하는데서 시작하는 방식이며, 의사소통모델은 현실의 세계관에서, 예화모델은 생활비유에서 시작하는 방식이다. 갈보리 채플의 설교 구성 원리는 철저히 귀납법적이라고 할 수 있겠다. 갈보리 채플은 심리학이나 기타 학문의 방법이 강단에 적용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오직 본문에 집중하는 것이다.

(7)설교원고를 작성하라.

그의 설교원고는 출판을 위해 조사까지 작성하는 그런 설교원고가 아니다. 그의 설교원고는 오로지 그 자신만을 위해 준비된 것이다. 그래서 그의 설교원고는 요점을 중심으로 간단하게 되어 있다. 그는 우선 본문을 크게 몇 가지 대지로 구분하여 I, II, III 세 단락 정도로 구분한 뒤 각각의 대지에 대지를 설명하는 중간대지를 A, B, C, 혹은 D. E. 등으로 두어 큰 대지를 설명하는 역할을 하게 한다. 그런 다음에 자신이 선포하고자 하는 교리적 진리를 1, 2, 3 형태로 문장화한 다음에 a, b, c 형태로 청중과 대화하는 형식으로 적용한다. 그의 설교원고의 특징은 다분히 첫째, 둘째, 셋째, 라는 식으로 블록화 내지는 정형화하지 않고 본문의 자연스런 흐름에 맡기도록 노력한다는 점이다. 그래서 그의 설교는 처음부터 끝까지 자연스러운 흐름을 유지하고 있다. 만약 자신이 주장하고자 하는 바를 첫째, 둘째, 셋째, 라는 식으로 여러 개를 나열하는 식으로 청중에게 말한다면 청중은 기억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자연스런 본문의 흐름을 따라서 설교자가 의도하는 방향과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구조라면 청중이 설교를 들으면서 설교자가 말하는 바를 기억하기가 쉬울 것이다. 오늘날 대부분 제목설교자들과 초보 강해설교자들이 설교 전체의 일관된 흐름을 보여주기보다는 벽돌을 쌓는 식으로 되어 있다. 설교가 유기적으로 구성되지 못하고 기계적으로 구성될 경우 여러 가지 요점을 말하지만 전체적인 흐름에 대한 방향성이 없기 때문에 청중이 설교를 듣고 나서 기억하기에는 어려움을 겪는다. 설교는 산탄총이 아니라 대포가 되어야 한다. 척 스미스 목사의 설교원고를 통해서 배울 수 있는 점은 단순히 본문을 가지고 대지를 세 가지 정도로 구분하는 나열식으로 구성하지 말고, 대신에 본문의 흐름을 잘 파악하여 어떤 일정한 방향을 향해 물 흐르듯이 흘러가는 점진적 방식으로 설교원고를 구성하라는 것이다. 당신이 만약 설교자라면 지난주에 했던 자신의 설교 원고를 한번 꺼내 보라. 그리고 자신의 설교원고에 어떤 방향성이나 점진성이 있는지 자문해 보라. 어떤 목표를 향해 물 흐르듯이 흘러가는가 물어 보라.

참고로 척 스미스 목사의 설교원고는 다음과 같은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설교일시와 장소를 메모함)

●제목: 본문의 핵심을 가장 잘 나타내주는 구(phrase)로써 표현함

●본문: 성경본문의 핵심을 가장 잘 나타내는 본문 중 한 두 구절로 설정.

●서론: 간략한 설명, 어떤 경우는 서론 없이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기도 한다.

I. 대지문장: 본문 핵심에 대한 귀납적인 해석

(보통 본문을 3~4 개의 대지로 나눈 뒤 대지별 구성에 따른 해석, 증명, 적용을 한다)

A. 대지 설명 문장: 위의 큰 대지에 대한 기본 설명(원어해설 및, 해석적 시도)

1. 귀납적 해석 및 예증 1 (본문에서 발견되는 진리를 문장형태로 명제화)

a. 1에대한 해석, 예증, 적용 1. (예화, 혹은 질문형태로 청중과 대화를 시도함)

b. 해석, 예증, 적용 2.

c. 해석, 예증, 적용 3.

2. 귀납적 증명

a.

b.

3. 귀납적 적용

a.

b.

c.

B.

1.

2.

3.

C.

1.

2.

3.

II. 본문 핵심에 대한 신구약 성경적인 증명 및 예화

A. 대지 설명 문장: II 대지에 대한 기본 설명(원어 해설 및, 해석적 시도)

1. 귀납적 해석 및 예증 1 (본문에서 발견되는 진리를 문장형태로 명제화)

a. 1에대한 해석, 예증, 적용 1. (진리를 깨닫기 위한 방대한 성경적 지식을 제공)

b. 해석, 예증, 적용 2.

c. 해석, 예증, 적용 3.

2. 귀납적 증명 2

a.

b.

c.

B.

1.

2.

3.

III. 본문 핵심에 따른 생활속의 적용 및 실예(결론 부분)

A. 대지 설명 문장: 위의 큰 대지에 대한 기본 설명(원어해설 및, 해석적 시도)

1. 귀납적 해석1 (본문에서 발견되는 진리를 문장형태로 명제화)

a. 1에 대한 적용문장 설명1 (실생활의 적용을 위한 청중의 이해를 도모)

b. 적용문장 설명 2

c. 적용문장 설명 3

2. 귀납적 증명 2

a.

b.

c.

3. 귀납적 적용 3

a.

b.

B

1.

2.

3.

c.

5. 척 스미스의 설교의 방법

그러면 실제로 그는 강단에서 설교할 때 어떤 음성과 자세로써 메시지를 전달하는가?

(1)청중에게 부담을 주지 않음

그의 설교방법은 크게 두 가지이다. 첫째, 대화방식을 취해야 한다. 둘째, 성령의 능력을 의지해야 한다. 그는 일반적인 설교자들이나 다른 갈보리채플 사역자들과 달리 강단에서 설교자의 제스처를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 오랜 세월 경건주의 생활에 익숙하였기 때문이며, 그의 교회 성도들 역시 그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젊은이들이 많이 모이는 다른 갈보리채플의 사역자들은 젊은 회중들과 같은 가벼운 복장에 자유로운 제스츄어를 사용한다. 그러나 척 스미스 목사는 양복을 단정하게 입고 거대한 군중이 아니라 마치 한 사람과 대화하듯이 말한다. 그는 과장된 제스처가 설교내용의 진실성을 떨어뜨린다고 생각하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과장된 몸짓이나 우스꽝스러운 표정을 짓는 일은 거의 없다. 그것은 그가 본문을 얼마나 진실하고 진지하게 다루는 지를 보여준다. 그리고 때로는 부드럽게 너털웃음을 보여주기도 하다. 그러나 그의 설교에서 우스운 몸짓이나 과장된 제스처를 거의 발견하지 못한다. 그의 설교에서 청중을 웃기는 유머는 가끔 있으나 결코 웃도록 강요되거나 저속하지는 않다. 그의 모습에서 볼 수 있는 것은 본문의 진리에 대해 경외감을 가지고 대하는 진지함과, 그 감격스런 진리를 청중과 자연스럽게 대화하면서 가르치려고 하는 성실성이다. 이는 오늘날 많은 강단에서 청중과 자연스럽게 대화한다는 명목 하에 저속한 말을 사용하거나, 유머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거나, 유머집을 뒤적거리거나, 혹은 청중을 웃기기 위한 과장된 몸짓과 제스처를 사용하는 설교자들과는 분명히 차별되고 있다.

(2)천천히 또박또박 발음

그의 설교를 들어보면, 대체로 느린 편이다. 그러나 발음이 분명하며 어린아이도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쉽게 말한다. 그는 어렵게 설교하지 말라고 가르친다. 어린아이도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쉽게 가르치라고 한다. 그리고 설교조로 말하지 말라고 한다. 그는 대화하듯이 편안하게 말하라고 한다. 그래서 그는 분명한 발음을 강조한다. 그는 어떤 설교자들처럼 속사포를 쏘듯이 쏘아대지 않는다. 어떤 설교자들은 스스로 흥분해서 기관총과 같이 막 이야기하는 중에 불분명한 발음이나 대충 문장을 발음하는 경우가 자주 있다. 그러나 척 스미스 목사의 설교를 들어보면 좀처럼 흥분하는 기색을 찾아보기 어렵다. 대신 그는 본문의 진리에 대한 분명한 확신을 보여준다. 그리고 자신이 발견한 진리를 청중이 함께 발견하고 감동 받도록 하기 위해서 천천히 그리고 분명한 발음으로 명확하게 이야기한다. 그래서 그의 설교를 들어보면 설교한다는 느낌보다는 내게 이야기해주고 있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3)서로 주고받는 참여적 설교

그는 소그룹에서 성경공부를 인도할 때 원으로 둘러앉게 한 다음 자신도 그 가운데 끼어 앉아서 자연스럽고 편안하게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말한다고 한다. 그는 교회건물도 웅장한 체육관식 건물이 아니라 서로 대화할 수 있는 가정집분위기를 연출해야 한다고 믿는다. 그래서 예배당도 반원형태로, 그리고 오 십 명씩 혹은 백 명씩 앉을 수 있도록 기둥으로 구분하여 소속감을 주는 공간개념을 강조한다. 그래서 코스타 메사의 갈보리채플 모교회의 예배당에 들어갈 때 청중은 조명등을 볼 수 없다고 한다. 오직 설교자만이 조명등을 볼 수 있도록 되어 있다. 청중이 화려하고 눈부신 조명등과 어마어마한 예배당의 규모를 보고서 부담을 가진다면 설교자와 효과적으로 교감을 하는 데 방해가 된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래서 설교자에 집중하도록 강단에 초점을 맞추고 다른 조명과 장식을 최대한 감추도록 한다. 오늘날 예배당의 규모를 강조하고 설교자가 가운을 입고 설교자로서 위압감을 주는 분위기와는 분명히 다른 차별성을 보여 준다. 이것은 척 스미스 목사가 설교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에 대해서 보여 주는 것이다. 설교는 청중이 안방에 들어와 있는 듯이 편하게 느껴야 마음을 열고 말씀을 잘 받아들일 수 있다는 생각이다. 그래서 설교는 언어, 제스처, 표정, 의복, 문장구사, 등 모든 면에서 청중에게 부담을 주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4)공동체를 대표자로서 신앙고백 하는 자세

척 스미스 목사는 종종 “여러분”이라는 말보다는 “우리”라는 말을 가지고 적용하기를 좋아한다. 그럼으로써 그는 회중에게 강요하는 인상을 피하고 공동체의 고백으로서 적용을 효과적으로 하고 있다. 이 ‘우리’라는 개념의 적용은 우리는 특별한 비전을 소유한 공동체라는 의식을 심어준다는 점에서 또한 효과적이다. 이것은 오늘날 대부분의 설교학 저서에서 정의하는 이른바 설교는 청중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을 설교자가 대언한다는 생각과 다른 면을 보여준다. 즉, 일반적인 의미에서 ‘설교’는 위에서 아래로 주어지는 이른바 하나님의 대언(代言)이라는 의식인데 반해서, ‘가르침’은 아래서 위로 올라가는 방식, 즉, 공동체의 신앙고백이라는 측면이 강한 측면을 강조하는 것이다. 그래서 척 스미스 목사는 “하나님이 지금 여러분에게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라는 말을 잘 사용하지 않는다. 대신에 그는 “우리”라는 말을 사용하기를 즐겨한다. 그는 ‘우리“라는 말로써 하나님의 말씀을 위에서 아래로의 주입이 아닌 공동체의 신앙고백을 설교자가 하나님께 올려드린다는 개념을 가지고 있다.

“헌금할 때에 ‘우리’는 순수한 마음으로 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 9:7에서 헌금을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이 억지로 서약했기 때문에 아까워하면서도 내는 헌금을 기쁘게 받으시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헌금을 기쁘게 여기시지 않습니다. 사람들로 하여금 자선을 많이 베푼다는 사실을 모르게 해야 합니다. 사람들이 무슨 말을 하더라도 마음에서 우러나오지 않는 헌금은 하지 말아야 합니다. 더 나아가 하나님께서는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각각 그 마음에 정한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하였는데 여기서 ‘즐겨 내는’이라는 말은 ‘깔깔 웃으며 낸다’라는 말입니다. 헌금할 때 마음에 기쁨이 없으면 그 헌금은 드리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헌금을 원하시지도 않고 필요로 하시지도 않습니다. 헌금 드리는 문제는 하나님과 자신만이 아는 극히 개인적인 일로 만드는 것이 좋습니다.”-마태복음 강해, pp. 57, 58.

(5)문맥을 따라 핵심을 파악하게 한다

척 스미스 목사의 강해설교는 결코 남이 예상하지 못할 정도로 기발하지 않다. 성경이 말하는 대로 말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교인들은 다음주 척 스미스 목사가 어떤 내용으로 설교할 것인지 충분히 예측할 수 있다. 그러나 척 스미스 목사는 언제나 문맥 속에서 핵심을 파악하는 데 탁월하다. 그래서 언제나 교인들은 본문을 항상 새롭게 보곤 하는 일이 가능한 것이다. 본문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글의 흐름에 따라 짚어가기 때문에 언제나 그의 설교는 신선한 영감을 유지한다. 많은 사람들이 강해설교를 한다고 하지만 사실 문맥을 벗어나서 본문의 핵심을 자기중심적으로 파악하는 경우가 많다. 척 스미스 목사는 문맥 속에서 핵심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언제나 하나님 중심으로 보아야 한다고 가르친다.

베드로 전서는 “찬송하리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 그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기업을 잇게 하시는” 하나님께 감사함으로써 시작하고 있다. 이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몫이다. 우리는 이것에 대해 아무런 관계도 없다. 베드로는 하나님이 행하신, 그리고 행하시는 일들에 대해 말하고 있다. 우리를 거듭나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드리자! 우리는 어디에 있는가? “우리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입었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모든 것을 행하신 것임을 단지 믿음으로써 우리가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요한복음 6:29에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하나님이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그렇다. 사람의 반응이 중요하지만 그러나 나는 누구에게 반응하는지를 알아야만 한다. 나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며, 하나님이 어떤 일을 행하셨는지를 알아야 한다. 이것은 단지 당신이 성경을 전체적으로 가르칠 때 자연스럽게 얻을 수 있을 것이다.-The Philosophy

(6)말씀의 적용점을 예화로써 보여 준다.

척 스미스 목사의 설교는 독창적인 예화와 실제적인 이야기로 가득 차있다. 그는 좀처럼 예화집에서 유명한 예화를 인용하거나 위인들의 어록에서 “누가 어떻게 말하기를...”이라는 식으로 말하지 않는다. 그는 자신만의 예화를 만들어낸다. 그리고 자신만의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그러기에 그의 예화는 ‘예화’라기보다는 자신의 삶이 녹아든 진솔한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예화’의 느낌이 없다. 예화를 찾기 위해 예화사전을 따로 찾아볼 필요가 없다. 왜냐면 척 스미스 목사 자신에게 말씀을 적용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교인들의 흥미를 끌만한 극적인 예화나 자신을 우러러보게 만들어주는 과장된 예화도 없다. 오히려 예화로써 척 목사 자신에 대해 이야기할 경우에는 성공보다는 실패에 관한 예화가 많다. 이러한 면이 그의 설교를 생동감 있게 만드는 중요한 요소가 되고 있다. 이것은 말씀을 일방적으로 적용시키는 일반적인 설교와 달리 청중에게 진리를 삶 속에 적용하는 방법을 가르친다는 점에서 매우 특이할 만하다고 하겠다. 설교자 자신이 먼저 진리를 자신에게 적용한 후 적용하는 과정에서 겪은 시행착오를 교인들과 나누는 것이다. 자신의 삶 속에 진리를 적용하는 과정에서 얻은 예화야 말로, 교인들에게 진리를 삶에 적용하는 법을 가르치기 위해서 가장 좋은 방법이다. 척 스미스 목사는 다양한 방식으로 예화를 만들어 사용하고 있는데 마태복음 6장 강해설교에서 자신이 만든 예화를 다음과 같이 찾아 볼 수 있다.

1)가정적 예화

“...가령 제가 전 재산을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주었다고 합시다. 그리고 난 후 기자회견을 요청하고 TV의 토크 소에 나가서 점잖은 미소를 띄우며 스스로 이러한 엄청난 구제 사업을 벌였다고 사람들에게 알리게 되면 사람들이 감탄하고 놀라서 ‘척 스미스, 그 사람이 저렇게 훌륭한 일을 하는구나, 대단하군!’하며 칭찬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제가 받을 상은 이미 다 받은 것입니다. 그렇게 스스로를 높이는 저의 모습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생각하시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상급대장을 살펴보시며 ‘어디 볼까? 척 스미스의 상급란에는 아무 것도 기록되어 있지 않구나’하시지 않겠습니까? 저는 ‘아니, 하나님, 아무 기록이 없다니요. TV 토크쇼도 안 보셨나요?’하며 확인해별고 해도 ‘척, 너는 그 때 사람들로부터 상을 다 받지 않았느냐’ 하실 것입니다. 바로 이 점이 예수께서 강조하신 부분입니다. 즉 동기가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자신에게로 모든 사람의 시선이 집중되는 그런 방식으로 선행을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마태복음 강해, p.54

2)삶의 예화

“이 세상을 보면 사람들의 칭찬, 즉 사람들이 주는 상에 만족하는 사람들이 매우 많습니다. 미국에서는 매년 7월 4일, 독립기념일에 불꽃놀이가 벌어집니다. 해마다 갈수록 신기한 묘기들이 백출합니다. 로켓으로 쏘아 올린 폭죽들이 오색의 광채를 발하며 순식간에 ‘펑’하고 머리 위에 터진다거나 공중에서 회전을 반복하면서 다른 불꽃들과 함께 아름다운 무늬를 창공에 그리는 것을 보고 관중들은 매료되어 ‘잘 한다’는 감탄사를 외치며 박수를 보냅니다. 무수한 섬광을 발하며 순식간에 왔다가 사라지는 불꽃들을 관중들은 한순간도 놓치지 않으려는 듯이 지켜봅니다. 세상의 영광은 폭죽놀이의 폭죽들이 ‘펑’하고 터졌다가 잠시 여운을 남기며 사라지는 현상과 흡사합니다. 세상의 영광은 너무도 빠르게 사라져버리지 않습니까? 자고 깨어나면 새로운 인기 스타가 등장하여 어제의 스타가 누렸던 영광을 빼앗아 갑니다. 사람들은 날마다 새로운 스타를 기다립니다. 다니엘서 12:3에서 ‘지혜 있는 자는 하늘의 별과 같이 영원히 빛나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선행을 하기 원하는 분은 순식간에 사라지는 인간의 영광보다는 하나님의 영광과 광채 속에서 영원히 빛나는 상급을 받도록 해야 합니다.”-마태복음 강해, p.56

3)목회 생활속의 예화

“저는 어느 부흥사가 설교 중에 ‘하나님께서 저에게 여러분 가운데 15명이 제 사역을 위해서 1천 달러씩 헌금할 것이라고 계시해 주셨습니다. 할렐루야!’라고 하는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는 계속해서 ‘하나님이 여러분 가운데 15명의 마음에 말씀하십니다. 1천 달러를 헌금하기를 원하는 마음이 있는 분은 그 자리에서 일어서 주시겠습니까?’라고 말했습니다. 한 사람이 일어서자, 그는 ‘할렐루야 축복 받은 성도여,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라고 외치며 그에게로 다가갔습니다. 일어선 성도는 손에 수표를 들고 있었으며 그 부흥사는 그 수표를 재빨리 받아 넣고는 ‘이 헌금은 제가 하나님 대신에 받은 것입니다. 그리고 또 다른 분이 없습니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얼마나 한심한 노릇입니까? 그 부흥사는 물론 그 헌금을 바친 사람도 그의 1천 달러에 대한 하나님의 상을 받지 못할 것입니다. 그는 이미 1천 달러의 헌금에 대해서 사람들에게 공포했기 때문에 자신의 상을 사람들로부터 받은 것입니다. 사람들은 그를 훌륭한 자선가로 생각할 지 모릅니다. 저는 아직도 많은 설교자들이 이러한 방법으로 성도들에게 올바르지 못한 동기를 유발시켜 헌금하도록 만드는 사실을 매우 슬프게 여깁니다. 이것은 비극입니다. 왜냐하면 헌금하는 성도들이 하나님께 받을 상을 그들이 강탈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일들은 모두 죄입니다.”-마태복음 강해, pp.56,57.

4)경험 속의 예화

“그러므로 우리는 사람들이 우리를 기도의 사람이라고 알아볼 수 없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로부터 ‘훌륭한 기도의 사람’이라는 칭송을 듣는 한 목회자를 실제로 만나본 적이 있었습니다. 우연하게 그분과 제가 같은 여름 수련회의 강사로 초빙되어 설교하게 되었습니다. 거기에서 저는 그가 어떻게 그러한 기도의 사람이라는 칭송을 듣게 되었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그 분은 매일 아침 6시부터 7시까지 예배당에서 전 캠프에 들리도록 기도했습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과연 우리가 기도의 사람이라는 명성을 갖기를 참으로 원하실까? 하고 의문을 가져 봅니다. 골방에 들어가서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보시는 아버지께 기도하는 것이 주님의 뜻에 더 맞지 않겠습니까? 그 목사님은 기도의 사람이라는 명성을 좋아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는 그 명성을 유지하기 위해서 모든 사람들이 들을 수 있는 방법으로 계속 기도하였습니다.”-마태복음 강해, p.59.

5)성경 속의 예화

설교자가 자칫 기발한 예화, 감동적인 예화를 만들어낼 수는 있으나 그것의 위험성은 예화가 본문의 빛을 가리는 데 있다. 본문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잊어버리고 예화만 기억하게 된다면 설교를 잘 못한 것이다. 예화는 철저하게 본문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뒷받침하는 보조기구에 지나지 않아야 한다. 척 스미스 스미스 목사의 설교에는 무엇보다 성경 안에서 찾아낸 예화로 가득하다. 가장 좋은 예화는 성경이 가지고 있다. 성경에는 진솔한 삶의 이야기로 충만해 있으며 그 모든 이야기들은 하나님에 대해서 매우 중요한 교훈을 던져 주고 있다.

6. 척 스미스의 신학

설교와 신학은 서로 분리될 수 없다. 왜냐면 그가 어떤 신학노선을 가고 있느냐에 따라서 그의 성경해석과 적용과 설교방법이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효과적으로 말씀사역을 하고 있는 모든 설교자는 나름대로 신학을 정립한 사람이다. 딤후2:15에, “네가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변하여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군으로 인정된 자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쓰라”고 했듯이 교리가 약하면 설교도 약해질 수밖에 없다. 그러면 설교자로서 척 스미스 목사는 어떤 신학노선을 걷고 있는가? 설교자로서 척 스미스 목사의 신학의 특징은 한 마디로 균형성이라고 할 수 있다. 미국 그레이스 커뮤너티 침례교회의 담임목사인 존 맥아더 목사는 갈보리채플의 신학노선을 다음과 같이 평가하고 있다.

“신학적 관점에서 보면 갈보리채플은 독자적 노선을 가고 있습니다. 일종의 혼합 형태라고 봅니다. 제가 듣기에 침례신학자는 척 스미스 목사를 오순절파라고 부르고, 오순절파는 척 스미스 목사를 침례신학이라고 말한다고 하는데 분명한 것은 척 스미스 신학을 꼬집어 뭐라 할 수 없다는 점입니다. 그러니까 독자적 노선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믿음의 모험)

척 스미스 목사의 신학이 어떤 특징이 있는지 세 가지 범주로 나누어 살펴보도록 하자. 첫째, 성경의 권위에 대한 확신, 둘째, 갈보리 채플의 신학적 균형. 셋째, 갈보리 채플이 교리적으로 배격하는 것.

(1) 성경의 무오와 권위에 대한 실제적 확신

척 스미스 목사의 신학이 독자적 노선이라고 할 때, 이러한 평가는 척 스미스 목사의 신학이 자기만의 색깔이 없다거나 신학적 기반이 약하다는 것이 결코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로 척 스미스 목사의 신학이 견고하게 균형 잡혀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신학적 균형을 잡을 수 있다는 것은 신학적 깊이가 없이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척 스미스 목사의 설교는 분명한 신학적 사고 위에 서 있는 것이 분명하다. 그리고 그것은 오랜 세월 동안 오로지 성경만을 깊이 파고들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40년이 넘도록 성경을 처음부터 끝까지 연구하고 준행하며 가르치는 일에 전념함으로써 신학은 이제 척 스미스 목사의 몸에 자연스럽게 배일 수밖에 없었다. 신학 전문서적을 많이 읽는다고 유능한 신학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 신학서적은 읽으면서도 성경은 연구하지 않는 신학자들이 얼마나 많은가? 신학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이해를 추구하는 신앙이다. 늘 진리에 대해 목말라 하며 경건한 질문을 던지는 것이 곧 신학 하는 것이다. 심지어 신학교에서 신학을 가르치는 신학자라고 해서 다들 성경을 연구하는 것이 아니다. 나름대로 정통교리를 가르친다고 하면서 전문신학서적을 연구하면서도 성경은 보지 않는다.

그러나 척 스미스 목사는 성경을 처음부터 끝까지 여러 번 깊이 반복하면서 연구한 결과 그 나름대로의 신학적 토대를 구축할 수 있었다. 그것은 신실한 성경연구의 결과이다. 목회자는 성경을 사랑하고 성경을 깊이 연구하며 묵상하는 것이 삶의 전부가 되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척 스미스 목사는 자신과 갈보리채플만의 독특한 신학적 입장을 고수하기를 꺼려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무엇이 갈보리채플을 다른 신자들의 모임과 구별시키는가 하는 질문에 대해서, 갈보리채플이 고수하는 신학적 입장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분명하게 대답할 수 있으나 대답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갈보리채플 성경대학 학장인 래리 테일러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갈보리채플의 신조, 갈보리채플의 다른 점, 특징에 대해서 질문을 많이 하는데 이에 대해서 대답하기를 꺼려하고 있다. 그 이유는 신앙에 대한 확신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이 분열되는 것을 피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하나님 말씀인 성경의 절대무오성에 대한 교리, 예수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 등 사도신경의 기본 교리를 믿고 있다. 그러나 세부적으로 들어가면 분명히 다른 교회들과 구별되는 교리적 특성이 있기는 하지만 교회의 분열이나 불화를 초래하는 것을 피하는 것이 우선적인 가치이기 때문에 그런 것을 두드러지게 자랑하지 않는다. 그래서 갈보리채플 안에서도 큰 폭의 유연성을 허락하고 있다. 갈보리채플의 목사들은 똑같은 믿음을 가진 복제판들이 아니다. 바로 이 유연성이야말로 갈보리채플을 독특하게 만드는 점이다.”(아름다운 목양의 샘터, pp.152,153)

성경의 무오성과 권위에 대한 변함없는 확신은 갈보리 채플의 중요한 특징이다. 그러나 갈보리 채플에서 더욱 중요한 것은 성경의 권위와 영감에 대한 교리를 보호하기 위해 논쟁을 벌이는데 힘과 시간을 낭비하려고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갈보리 채플에서 중요한 것은 성경의 권위를 실제로 삶 속에 적용하려고 애쓰는 것이다. 척 스미스 목사는 다음과 같이 그르친 적이 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종종 우리의 무기를 보호하려고 애쓰는 때가 많습니다. 예를 들면, 사람들이 성경을 가지고 논쟁할 때에 우리는 성경을 보호하려 듭니다. 그러나 성경은 아주 큰 무기로서 양쪽에 날이 선 칼인 것입니다. 그런고로 성경을 보호하려 하지 마시고 사용하십시오. 당신이 만약 싸움중이라면 다음과 같은 말을 하지 마십시오. “당신은 이 칼을 주의 깊게 보시는 것이 더 좋을 것입니다. 보세요. 이 칼은 우리 도시에서 칼날이 제일 날카롭습니다. 숫돌에 갈려서 너무나 날카롭지요.” 당신은 이 칼을 보호하지 마십시오. 당신의 무기로 사용하십시오!”-[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기도], p.34.

갈보리 채플은 성경의 권위와 무오성에 입각한 견고한 교리들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러한 교리를 지키기 위해 논쟁하는 일보다는 실제로 그러한 교리를 삶 속에 적용하는 일에 더 힘써야 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것은 실제 삶의 현장 속에서 성경연구를 게을리 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이 갈보리 채플에서 성경의 권위를 믿는 가장 중요한 목적이다.

(2) 균형을 추구하는 신학

척 스미스 목사의 신학은 철저하게 성경의 영감과 권위를 확신하는 믿음 위에 서 있다. 동시에 그의 신학은 상당히 균형감각을 강조하려고 애쓰는 것을 볼 수 있는데, 필자는 그의 신학을 ‘균형을 추구하는 신학’이라고 부르고 싶다. 복음주의 진영 안에서 양극단의 견해를 극복하고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가 분열되지 않고 서로 조화를 도모하려고 하는 부분이 갈보리 채플이 성장한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척 스미스 목사는 세 가지 영역에서 균형을 추구하고 있다. 첫째, 성경의 권위와 성령의 역사에 대한 균형. 둘째로, 은혜와 믿음에 대한 균형. 셋째로, 현실과 종말의 균형, 넷째, 복음과 문화에 대한 균형이 그것이다.

1)성경의 권위와 성령의 역사의 균형

척 스미스 목사는 무엇보다 성경의 권위와 성령의 자유로운 역사를 균형 있게 강조하고자 애쓴다.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도록 세심하게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다. 갈보리채플은 성령의 은사에 대해서 상당히 개방적인 태도를 취한다. 척 스미스 목사 자신도 혼자 있을 때에는 방언을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공적 예배 때에는 누가 방언을 하거나 오순절 혹은 은사주의 집회에서 볼 수 있는 카리스마적 신비체험을 하는 것은 극히 나타나지 않는다. 공적 예배 동안에는 지극히 평범하고 말씀 강해와 찬양이 중심이다. 특별히 광적인 움직임이나 행동이 보이지 않는다. 물론 말씀집회가 끝나고 따로 남아서 기도하는 기도모임이 있다고 한다. 그러나 공적집회에서 방언이나 기타 은사체험은 대체로 금지되어 있다. 이렇게 볼 때 갈보리채플의 노선은 중간 오순절 계통 (semi-pentacostal, or soft-pentacostal)이라고 부를 수 있다. 대부분의 오순절 계통의 교회는 삼위일체 중에 성령의 역사에 치우치는 경향이 있는데 반해 갈보리채플에서는 특정 교리를 지나치게 강조하는 부분이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 척 스미스 목사는 성령론을 중요시하지만 성령론만 강조하는 것이 아니다. 그는 성경을 전체적으로 가르치는 것을 더 강조하고 있다. 성령의 은사를 체험하기 위해서는 성경에 나와 있는 대로 배워야 한다고 말한다. 성령의 은사를 체험하는 것이 목적이지만 그러나 대부분 은사집회에서 하듯이 극단적이거나 열광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을 가르치는 가운데 조용히 이루어지도록 하고 있다. 이에 대해 척 스미스 목사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갈보리채플은 전통적으로 말씀을 가르치는 일에 중점을 두어 왔습니다. 마가복음은 제자들이 여기저기 나가서 말씀을 두루 전파했을 때 성령께서 함께 역사하사 표적들이 따랐다고 하면서 끝을 맺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표적들은 믿는 자들을 따라가는 겁니다. 우리도 하나님께서 기적적인 역사를 행하실 수 잇고 지금도 행하고 계신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표적들은 우리보고 그것을 보고 믿으라고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일종의 이차적인 현상으로써 따르는 겁니다. 말씀을 가르칠 때 말씀을 전파했을 때 저절로 따라오는 것입니다.”(믿음의 모험)

사실 많은 사람들이 빈야드 운동이 갈보리채플에서 갈라져 나온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절대로 그렇지 않다. 빈야드 교회는 존 윔버라는 사역자에 의하여 시작된 교회로써 다른 교파에서 갈라져 나와 척 스미스 목사의 허락을 받아 코스타메사 갈보리채플에서 예배를 보아 왔었다. 그들은 척 스미스 목사의 권면에도 은사중심의 성령운동을 지향하여 부흥을 하였지만 결국 갈보리채플의 성도들에게 영향을 주게 되어 척 스미스 목사는 그들의 가르침을 따르는 성도들을 데리고 다른 곳으로 나가도록 하였다고 한다. 처음 그들은 50여 명이 갈보리채플에 들어왔으나 500여 명의 추종자들을 데리고 나가 빈야드 교회를 세웠다고 한다. 이들의 가르침은 교세가 커질수록 점점 더 잘못되어졌는데, 토론토 빈야드채플이 일으킨 성령운동은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 지역에 지대한 나쁜 영향을 끼치고 말았다. 따라서 갈보리채플과 빈야드 운동은 목적하는 바가 다르다. 목회의 강조점이 한쪽은 말씀이고, 한쪽은 체험이다. 빈야드 운동에 대해 척 스미스 목사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그 목사님들은 좀 더 체험 쪽으로 목회의 방향을 바꾸어가려고 했습니다. 말씀을 가르치는 것보다는 이 표적과 기사를 체험하는 데에 목회의 강조점을 두는 겁니다. 다시 말하면 표적과 기사들이 목회에서 첫째로 강조하는 바가 되고 말씀은 그 체험한 것들을 확인해주는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말씀에서 자라서 체험을 하게 되는 것과는 다른 얘기입니다. 그래서 그 목사님들 그룹이 자신들이 강조하고 싶은 점들을 강조하는 목회를 하기로 결정하고는 우리들이 축복을 비는 가운데 떠나갔습니다. 우리는 사실 이름도 빈야드로 바꾸도록 격려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만약 그 쪽 방향으로 목회를 발전시켜 가고자 한다면 그렇게 해도 좋으니 서로 교제는 끊지 말자고 했습니다. 나중에 그분들이 교제를 끊고 말았지만 우리는 서로 교제를 계속 해 나갈 것을 권했습니다. 분명한 점은 그리스도와 말씀을 향한 사랑이 우리가 서로 다르게 강조하려 했던 목회의 주안점보다 커야 한다는 사실입니다.”(믿음의 모험)

척 스미스 목사는 어느 목회자 수련회 기간 동안 빈야드 운동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자, 저기 다른 그룹이 형성되었으니 목회의 강조점을 거기 맞추고 싶은 분들은 우리를 떠나 저 그룹에 들어가 주십시오. 우리는 계속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일에만 힘쓰고 표적은 말씀을 뒤따르는 것으로 하여, 표적에 강조점을 두지 않겠습니다. 우리의 강조점은 말씀을 가르치는 것과 말씀 안에 성도들을 온전히 세우는 일에 두겠습니다.”(믿음의 모험)

그는 마태복음 4장을 가지고 강해설교 하는 중에서 성령론에 있어서 균형 잡힌 관점을 다음과 같이 강조하였다.

“많은 사람들이 성령의 세례에 대해서만 강조하는 경향이 있는데 사실 성령의 인도하시는 역사 또한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지속적으로 강조되어야 할 부분은 은사의 체험이나 특별한 계시보다 성령 안에서의 생활, 성령의 인도를 받는 생활입니다. 사도 바울도 로마서 8:14에서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은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씀하지 안았습니까? 성령의 이름으로 요란하게 떠들어대면서도 바른길을 가지 않는 사람들이 참으로 많습니다. 지나치게 흥분하고 자기 나름의 특이한 계시를 주장하면서 삶에서는 아무런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것은 성령의 인도와는 거리가 먼 것입니다. 가장 중요하고 강조되어야 할 것은 일상의 삶에서 성령을 따라 행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삶입니다. 물론 영적 감동으로 인한 현상을 반대하는 것은 아닙니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감동하고 영적인 현상을 경험한다고 하면서 성령의 이끌림을 받으며 살지 않는다는 것은 모순됩니다. 본문에 보면 예수님께서도 성령에 이끌리셨습니다. 무엇 때문에 이끌려 가셨다고 되어 있습니까? 바로 시험을 받기 위해서였습니다.”(마태복음강해, p.26,27)

래리 테일러는 다음과 같이 “균형 잡힌 성령론”을 자세히 설명한다.

“그러나 갈보리채플은 교리나 다른 측면에 있어서 ‘균형의 도’를 매우 소중히 여긴다. 갈보리채플은 근본주의(Fundamentalism)와 오순절주의(Pentecostalism)의 중간적 위치를 차지한다. 갈보리채플의 목회자들은 이러한 균형성이 갈보리채플의 부흥에 있어 중요한 원인이 된다고 믿는다. 근본주의는 성경의 문자적 해석을 고수하며 성경이 영감된 무오한 책이라고 믿는 개신교의 한 분야이다. 그러기에 믿음의 ‘원리들’이 강조되고 있다. 현대 언론이나 자유주의 교회들이 근본주의자들을 비진보적이며 어리석은 자들이라고 비난할지라도 근본주의자들이야말로 하나님의 말씀의 완전성을 지키고 있으며, 보수적인 믿음의 기본적인 교리들을 굳게 잡고 있는 사람들이다. (반면) 현대 교회 운동으로서의 오순절 주의는 20세기 전환기에 L.A.의 아주사 거리에서 발전하기 시작하여 성령의 충만과 일반적인 교회들 속에서 잠자고 있던 영적이며 성경적인 성령의 은사들의 행사를 강조하는 교파를 형성하게 되었다. 또한 자유주의 교회와 언론 매체로부터 지나치게 감정적으로 이끌어 간다는 비평을 받기도 했지만, 오순절주의는 교회 안에 성령의 은사의 중요성과 현대 신자들에게 나타나는 하나님의 권능의 중요성을 회복시켜 주었다. 그렇지만 해를 거듭하면서 근본주의는 하나님의 말씀의 완전성에 집착하면서 경직되고 형식주의적이 되어 갔으며, 성령의 은사들을 수용하지 않는 경향을 띠게 되었다. 마찬가지로 오순절주의도 하나님의 말씀의 가르침에 소홀히 하면서 광적이며 감정적인 경향을 띠게 되었던 것이다. 갈보리채플은 이 둘 사이에서 균형을 이루고 있다. 갈보리채플에서 우리는 성경에 언급된 성령의 은사들을 믿으며, 또한 그 은사들의 활용을 격려하기도 하지만 우리들이 믿음의 근본적인 법칙으로 보고 있는 ‘하나님의 말씀’에 최고의 역점을 두고 항상 단정하고 질서 있게 행하는 것이다. 척 스미스 목사님의 말씀을 인용한다면 ‘우리는 성경이 언급하고 있는 성령의 은사들을 믿으며, 성경의 가르침에 따른 것이라면 그 은사들이 오늘날에도 역사 한다는 사실을 믿는다. 신자로서 우리들은 최고의 은사들을 갈망해야 하며, 그 은사들을 그리스도의 온 몸에 덕을 이루는 사랑 안에서 행하기를 구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가장 극적인 은사들보다도 사랑이 더욱 중요하다는 것과 이 사랑이 없이 행하는 모든 영적인 은사들은 가치 없는 일이라고 믿는다. 이와 같은 균형으로 인하여 갈보리채플의 예배는 하나님의 말씀을 한 절 한 절 가르치는 일을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특별히 후광예배(After Glow Service)는 성숙한 그리스도인 지도자의 인도 아래에서 성령의 은사들이 자유롭게 역사 할 수 있는 장소를 제공하고 있다. 많은 오순절주의자들은 갈보리채플이 충분히 감동적이지 못하다고 할 것이며, 많은 근본주의자들은 갈보리채플은 너무나 감정적이라고 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바로 그 균형이 우리들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자리에 있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아름다운 목양의 샘터, pp.156~162)

2)은혜와 믿음의 균형

척 스미스 목사는 또한 칼빈주의자와 알미니안주의자 사이에 중용을 취하고자 노력한다. 전자는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하며, 후자는 인간의 자유의지를 주장한다. 서로의 주장은 만나지 못할 평행선을 그리는 것처럼 보인다. 척 스미스 목사는 하나님의 은혜와 인간의 믿음이 서로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고 말한다. 하나님의 은혜로우신 주권이 먼저이나 또한 동시에 그것에 대한 인간의 자발적 반응과 합당한 책임 역시 똑같이 강조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가 이 두 교리 사이에 균형을 강조하는 이유는 어느 한쪽에 치우침으로써 교회의 쓰라린 분열의 아픔이 있었다는 것을 교회사를 통해서 보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경을 진리로 믿고 고백하며 그렇게 가르치는 사람들 사이에 서로 견해가 다른 부분에 있어서 갈보리 채플만의 견해를 고집하는 것을 피하고자 노력한다. 척 스미스 목사는 요한계시록의 에베소 교회가 진리를 수호하기 위해 옳은 일들을 열심히 했음에도 불구하고 처음 사랑을 저버렸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이것은 진리를 파수하는 일에 힘쓴 나머지 진리를 사랑하는 일에 실패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말이다. 목숨을 걸고 진리를 파수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목숨을 걸고 진리를 사랑하는 것이다. 척 스미스 목사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는 성경에 명확히 제시되어 있지 않은 모든 결론들과 용어 및 논조 등을 피하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자세는 신학적인 토론의 대상이 되어 왔던 다른 어느 분야에서보다도, 참으로 오랫동안 열띤 논쟁을 불러왔던 칼빈주의자들과 알미니안주의자들 간의 다툼에서 가장 필요한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이 논쟁의 열기 속에 휘말려 있다 보면 성경에서 확실하게 말해주고 있는 점들조차 무시하거나 소홀히 하기가 쉽게 되든지, 아니면 우리 인간들이 하나님의 길을 완전히 측량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다고 믿게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옳은 일’에만 몰두한 나머지 사랑하는 마음을 갖지 못하게 된다는 것은 얼마나 큰 비극입니까? 예를 들어, 성령님의 사역에 대해 얘기를 할 때에 ‘성령세례’다, 혹은 ‘성령충만’이다 하는 용어상의 견해 차이에 사로잡혀 하나님의 영이 우리 삶 속에서 역사 할 때에 나타나는 능력과 그 복 주심에는 전혀 눈을 돌리지 못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우리가 스스로 논쟁에 임하는 모습을 보거나 의견을 발표하는 우리 자신의 태도를 살펴볼 때에 믿는 자 안에 내주하고 계시는 복되신 성령을 ‘소멸’하거나 ‘근심’시켜 드린 적은 혹시 없었는가 하는 반성의 여지가 종종 나타날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성령의 은사에 대해 논하다 보면 제일 큰 은사인 사랑을 베풀라고 가르치는 성경의 제일 좋은 길에 대해서는 간과하기가 쉽습니다. 우리의 바람은 성령의 사랑과 하나됨 안에서 믿는 자들을 한 데 모으는 것이요, 우리의 초점은 우리 자신들의 모습이 아니라 왕이신 하나님께 맞추어져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ㅁ라하고 행하는 모든 일에서 우리 주님께 영광이 돌아갈 수 있도록 하는 데 온 마음과 뜻을 다하고자 합니다.”-칼빈주의와 알미니안주의,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 pp.15,16.

그러면 갈보리 채플은 구원론에 있어서 칼빈주의와 알미니안주의의 균형을 어떻게 모색하고 있는가? 사실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책임은 성경에서 서로 조화될 수 없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어느 한편이 무시된다면 전체적으로 잘못될 가능성이 크다. 감리교 및 다수의 오순절 교단에게 영향을 준 알미니안주의의 강조점은 다음과 같이 다섯 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

①자유의지- 인간의 타락이 전적인 타락이 아니며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에 이를 만한 자유으지가 타락한 인간 속에 선한 부분으로 남아 있다는 내용

②조건 선택- 믿게 된 자가 예수 그리스도의 초청을 받았을 때 ‘자유의지’를 행사하여 이를 수락할 것을 하나님이 미리 아셨기 때문에 인간의 ‘믿는 행위’가 영생에 이르는 하나님의 선택을 받기 위한 ‘조건’이라는 내용

③보편 구속- 하나님이 모든 인간들을 사랑하시며 그리스도께서 모든 인간들을 위해 돌아가셨고, 아버지 하나님은 아무도 멸망에 이르는 것을 원하지 않고 계시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죽음은 하나님으로 하여금 모든 인류를 구원하실 만한 근거가 되는데 단지 개개의 인간이 구원받기 위해서는 자유의지를 행사해야 한다는 내용

④저항할 수 있는 은혜- 인간에게는 완전한 자유의지가 있기 때문에 생명을 구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뜻에 저항할 수 있다는 내용. 즉, 인간의 의지가 거듭남에 앞선다는 뜻

⑤은혜로부터 떨어질 가능성- 인간 자신의 의지를 지속적으로 가지고 있지 않을 대 구원을 잃어버릴 수도 있다는 내용.

이에 대해 칼빈주의의 교리 역시 다섯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①전적 타락- 인간은 전적으로 타락하였기 때문에 하나님의 도움이 없이는 스스로의 의지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할 만한 능력이 없다.

②무조건 선택- 하나님의 선택은 인간의 결정에 의한 것이 아니라 창조주 하나님의 자유의지에 의한 것이라는 내용.

③제한 구속-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이 영원 전부터 아버지께서 예수 그리스도에게 주신 자들을 구원하기 위한 것이었다는 내용.

④불가항력적 은혜- 하나님의 은혜는 인간이 결코 저항할 수 없다는 내용

⑤성도의 견인- 구원은 온전히 주님의 사역이며, 하나님이 시작하신 일을 하나님께서 마치실 것이라는 내용.

그러면, 이에 대해 갈보리 채플은 무엇을 믿고 있는가? 은혜와 믿음과 구원에 대해 갈보리 채플이 가르치는 교리 역시 5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①타락- 모든 인간이 다 죄인이며(롬3;23), 사람의 행위로는 우리의 구원을 얻지도 못하며 얻을 자격도 능력도 없다(딛3:5) 죄의 삯은 사망이며(롬6:23) 하나님의 은혜가 없이는 아무라도 구원받을 수 없다.(엡2:8,9) 의인은 하나도 없으며 그 누구도 선을 행할만한 능력을 가지지 있지 못하며(롬3:10-12), 성령의 역사로 죄인 됨을 깨닫고 거듭남이 없다면 아무도 구원받을 수 없다.(요1:12,12; 16:8-11; 벧전1:23-25) 인간은 분명히 타락했으며 죄악 가운데 길을 잃고 방황하고 있다.

②선택- 하나님은 창세 전에 믿는 자들을 택하셨으며(엡1:4-6), 당신의 미리 아심을 따라 믿는 자들로 하여금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해 놓으셨다.(롬8:29,30) 또한 하나님은 그 이름을 부르는 자마다 구원하실 것이다.(롬10:13) 또한 하나님께서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자들을 당신께로 불러주실 것이다.(고전1:9) 성경은 부르심은 모든 사람에게 주어졌지만 이에 응할 사람은 아주 적다고 성경은 가르친다. 하나님은 분명 택하시는 분이시지만 사람 역시 하나님께서 구원으로 초대하시는 그 부르심에 응해야 한다.

③구속-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화목제로서 죄에 대한 하나님의 의로우신 진노를 만족시켜 줄 제물로 돌아가실 때 온 세상의 죄를 위하여 화목제물이 되셨으며(요일2:2; 4:9,10) 죄와 사망 그리고 지옥에서 구원해주실 유일한 소망으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믿는 모든 자들을 구원해주시고 용서해주실 것이다.(엡1:7; 벧전1:118,19)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될 것이며(요3:16)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 희생은 분명 전 인류를 구속하기에 충분한 것이다.

④은혜- 하나님의 은혜가 인간의 노력이나 은혜를 받을 만한 덕목에 의한 것이 아니라(롬3:24-28; 11:6) 그 아들을 믿게 될 사람들에 대한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의 결과이다.(엡2:4-10) 은혜는 우리에게 우리의 행위로는 도저히 받을 수가 없는 것을 분네 넘치도록 준다.(롬11:6)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를 우리 자신의 의지로 거절할 수도 있다. 마태복음 23:37에, “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병아리들을 날개 아래 모음 같이 내가 네 자녀들을 함께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더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하였도다”고 했다. 정죄는 구원받을 기회를 얻지 못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믿지 않기로 스스로 선택하였기 때문이다.(요3:18) 요5:40에, “그러나 너희는 생명을 얻기 위하여 내게 오기를 원치 아니하는도다.”라고 했다. 요6:37에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절대로 내어쫓지 아니하리라”고 하였다. 예수님은 인간이 주님을 거절할 수도 혹은 영접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을 분명히 말씀하셨다. 요12:46-48에서 예수님은 “나는 빛으로 세상에 왔나니 이는 누구든지 나를 믿는 자마다 어두움 가운데 거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나를 거절하고 내 말을 받아들이지 않는 자를 심판하는 이가 있으니 곧 내가 한 그 말이 마지막 날에 그를 심판하리라”고 하셨다. 분명히 하나님의 은혜는 인간의 자유의지에 따라 받아들일 수도 있고 받지 않고 거절할 수도 있는 것이다.

⑤견인- 그 어떤 것도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며(롬8:38,39)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롬8:1) 요10:27-28에서 예수님은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그들을 알며 그들은 나를 따르느니라. 내가 그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노니 결코 멸망치 아니할 것이요, 또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아갈 자가 업으리라”고 하셨다. 요6:37에 예수님은 “내게 오는 자는 내가 절대로 내어쫓지 아니하리라”고 하셨고, 빌1:6에는 “너희 안에서 선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확신하노라”고 했다. 성령은 우리를 구속의 날까지 인치셨다.(엡1:13,14; 4:30) 그러나 예수님은 마7:21-23에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고 하셨다. 즉,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 중에 많은 사람이 실제로는 믿는 자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신실하게 믿는 자들도 하나님에게서 떨어질 수 잇는가? 딤전4:1에 “후일에 어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미혹케 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좇으리라” 하였다. 벧후2:20,21은 “만일 저희가 우리 주되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앎으로 세상의 더러움을 피한 후에 다시 그 중에 얽매이고 지면 그 나중 형편이 처음보다 더 심하리니 의의 도를 안 후에 받은 거룩한 명령을 저버리는 것보다 알지 못하는 것이 도리어 저희에게 나으리라”고 했다. 그래서 베드로후서1:10에서는 “그러므로 형제들아 더욱 힘써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 너희가 이것을 행한즉 언제든지 실족치 아니하리라”고 했던 것이다.

척 스미스 목사는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책임이라는 개념이 서로 만나지 못할 평행선을 그리고 있는 것처럼 보일 때 그리스도의 몸을 생각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성경을 읽으면서 참으로 서로 이해하기 어려운 문제들을 만날 때 우리가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가를 보여주고 있다.

“비옵나니 하나님이 우리 모두를 도우사 서로 사랑하고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할 수 있게 되게 하소서! 그 무엇보다도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그분을 섬기라고 우리를 불러주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일에 열심일 수 있도록 되기를 바랍니다. 토론은 좋습니다. 의견 차이도 좋습니다. 그러나 분열은 곤란합니다. 예수께서는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고 하셨습니다. 성경에 나온다는 한 특정 주장 때문에 사람이 논쟁을 일삼게 되고 율법주의적이 되며 그 결과 분열이 뒤따르는 것이라면 그같은 주장의 정당성에 의심이 가는 것은 당연한 이치입니다. 나는 차라리 좀더 사랑과 친절을 내게 더해주고 용서하는 마음과 긍휼히 여김을 키워 주는 것들을 찾아 그들을 수용하려 하겠습니다. 그럼으로써 우리 주님과 닮아 가는 것일 테니까요. 만일 상반되는 두 교리 중 한쪽만이 확실한 진리라는 뚜렷한 신념을 당신이 갖게 되었다면 먼저 그 신념과 그 교리로 인해 당신의 성품이 얼마나 더 그리스도를 닮게 되었는가를 우리로 하여금 관찰할 수 있게 해 주십시오. 그리고 나서 우리는 우리 스스로가 당신의 신념을 받아들이는 것이 우리에게 유익할 것인가를 결정하겠습니다. 언제든 그 열매를 보고 당신이 주장하는 진리의 여부를 가리도록 하겠습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 예수님의 사랑의 열매를 맺게 하는 것들을 추구하시기 바랍니다.”(칼빈주의와 알미니안주의,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 p.46)

갈보리 채플의 신학이 균형을 잡는 방법은 오로지 성경이 말하는 대로 믿는 것이다. 종종 교리적인 문제로 서로 의견차이를 보이는 이유는 본문이 말하는 대로 귀를 기울이려는 귀납법적인 방법보다는 특정 주제와 개념 아래 본문을 억지로 집어넣으려는 연역적인 방법을 고수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문맥을 벗어나서 가르치는 주제설교가 균형을 상실하기 쉬운 것이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갈보리 채플의 신학은 성경 본문에 귀납법적으로 의존하기 때문에 양극단의 주장을 피할 수 있게 된 것이라고 여겨진다. 사실 이렇게 교리적 차이에 대해 연역적으로 접근하여 해결하려는 시도보다는 귀납법적으로 접근하려는 것은 최근 신학계에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동향이다. 교리적 신학이 교회의 마찰을 불러일으킨 것에 대해 반발하여 성경신학이 강세를 보이는 것이 그것이다. 이것은 갈보리 채플이 교리적 신학을 부정하고 오직 성경만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교리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귀납법적으로 접근하려고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3)현실과 종말의 균형

갈보리 채플의 신학적 특징은 종말론에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소망을 강하게 붙잡으려고 한다. 척 스미스 목사는 갈보리 채플이 다른 교회와 다른 특징으로서 주저 없이 종말론을 들고 있다.

“우리는 예수 그치스도의 재림과 관련하여 환난 전 휴거와 전천년왕국을 강하게 주장하고 있습니다. 또한 이스라엘 민족을 사랑하고 지원해오고 있으며 이스라엘 백성이 주장하는 땅에 대한 역사적 권리와 메시아의 필요성을 지지하고 있습니다.”-칼빈주의와 알미니안주의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 p.12)

흔히 종말을 강조하게 되면 현실에 대한 책임이 약해지는 경향이 있는데 갈보리 채플은 현실과 종말에 대한 균형을 잘 잡고 있다. 지금은 진정한 종말론적인 신앙이 필요한 때다. 그것은 종말의 때를 사는 성도들은 성경의 가르침에 따라 현실과 종말의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주님이 오늘이라도 오신다면 나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던 준비를 하고 있어야 할까요? 첫째로, 나는 우리가 해서는 안될 일들을 먼저 열거 하고 싶습니다. 직장을 그만둔다든지, 집을 판다든지, 아니면 갚을 필요가 없으리라는 계산하에 될 수 있는 대로 많은 돈을 빌려다 써버리려 한다든지 해서는 안됩니다. 예수님께서도 “내가 돌아오기까지 장사하라”(눅19:13) 하셨듯이, 우리는 우리가 하던 일손을 멈추지 말고 계속 일하고 있어야 합니다. 노아나 롯의 경우에도 하나님이 그들을 구해주셨던 그날까지 그들이 해오던 일들을 계속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깨어 있으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깨어서 예수님의 오심을 기다리고 있어야 합니다. 성경은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 번째 나타나시리라(히9:28)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또한 예비하고 있어야 합니다. 예비는 다름 아니라 우리의 마음과 삶을 예수 그리스도께 바치고 그분께서 우리의 죄를 사해 주시고 허물을 가리워 주심을 받아들이는 일입니다. 그리고 나서는 기다리는 것입니다.”-대환난과 교회, pp.70,71.

그러면 갈보리 채플에서는 종말론은 어떻게 가르치는가? 갈보리 채플에 의하면 환난은 두 가지, 즉, 예수님과 다니엘과 요한 사도가 언급한 대환난과 교회가 반드시 겪어야 할 일반적 환난이 있는데, 대환난이란 죄인을 심판하기 위해서 온 지구상에 임하는 하나님의 진노로서 사단이 지배하는 세상을 살면서 하나님의 자녀들이 겪는 고통과는 다르다는 것이다. 갈보리 채플은 교회가 온 땅에 임할 하나님의 진노를 경험하지 않을 것이라고 가르친다. 왜냐면 하나님은 의인과 악인을 함께 심판하지 않으시기 때문이다.

또한 교회의 휴거란 고린도전서 15:51절에 근거해서 성도들의 육신이 홀연히 영화롭게 되어 주님 앞으로 올려지는 사건을 의미하는데, 여기서 특이한 것은 갈보리 채플이 교회의 휴거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은 전혀 다른 사건이라고 가르친다는 점이다.(대환난과 교회, p.26) 또한 휴거의 날과 시에 대해서 알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전혀 비성경적인 것임을 분명히 한다. 교회의 휴거 이후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문제를 다루실 것이라고 가르친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 대한 약속들과 예언들을 실현하실 것이고,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7년간의 대환난 기간 동안에 지켜주셔서 십 사만 사천 명의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인 치심을 받게 될 것이라고 가르친다.(대환난과 교회, p.30, 72) 이것은 로마서 11장에 나오는 유대인의 구원에 관한 말씀에 근거하고 있다. 이것을 다음과 같이 요식화 해볼 수 있겠다: 교회의 휴거→7년 대환난(유대인의 보호와 구원)→그리스도의 재림→천년왕국→백보좌 심판.

이러한 종말론의 가르침은 미국 선교사들에 의해 신학을 배운 한국교회가 전통적으로 견지해온 입장과 맥을 같이 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물론 최근에는 무천년설에 대해 긍정적으로 보는 시각이 두드러지는 것이 사실이나 어느 것이 비성경적이라고 한 마디로 단정하기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여기서 필자는 이 종말론에 대한 갈보리 채플의 논증에 대해 어떤 신학적 평가를 내리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갈보리 채플은 종말론적인 신앙을 견지하는 삶이 있다는 것이다. 종말론은 신학교에서나 가르치는 것이나 토론의 장에서만 나타나는 주제가 아니라 실제 설교와 삶에서 중요한 근거가 된다는 것이 중요하다. 성경이 말하는 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믿고 소망하고 있으며 깨어 있어서 재림의 주님을 맞이할 준비를 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려고 애쓰는 것이다. 오늘날 설교자들은 삶의 근거로서 종말론을 가르쳐야 한다.

이러한 종말론적 신앙은 극단적인 세대주의자들과는 분명 다른 것이다. 물론, 종말론에 대한 이해에 있어서 세부적으로 이견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분명 성경에 계시된 것을 신실하게 믿으며 깨어 재림을 준비하는 삶은 오늘날 물질만능주의와 현세지향적인 기복주의, 그리고 극단적인 종말론자들에 대한 혐오감 등으로 점차 성경이 말하는 참된 종말론적인 신앙을 부끄러워하고 있는 한국교회 안에 긴급히 회복되어야 할 주제인 것만은 분명하다. 척 스미스 목사는 다음과 같이 종말론적인 신앙으로 도전하고 있다.

“이 시점에서 다시 한번 물어야 할 질문은 이것입니다. “당신은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오늘 이 시간 주님께서 “이것으로 교회는 그 임무를 마쳤다 너희들은 이제 나의 증인으로서의 임무를 다했으니 어서 집으로 올라오너라”고 하신다면 당신은 교회와 함께 들림 받아 공중에서 주님을 영접하기 위하여 세상으로부터 옮겨질 것입니까, 아니면 지상에 남아 뒤통수를 긁적이며 무슨 일이 벌어졌는가를 궁금해하고 있을 것입니까? 지상에 남아 대환난 기간 중 벌어질 저 가공할 재난들에 휘말려 고통받는 것보다 교회와 함께 하늘나라로 올라가는 것이 얼마나 좋은 일인가요? 주님은 당신을 편히 쉬게 해 주시고자 하는데 왜 당신은 굳이 험한 길을 택하려 합니까? 지금 이 순간 마음 문을 열고 예수 그리스도께 당신의 운명을 맡기십시오. 지금 이 순간 예수 그리스도를 당신의 주님이자 구주로 영접하고, 그분께서 말씀하셨듯이 예비하고 있으십시오. 예비하고 있기 위해서 당신이 해야 할 일은 무엇입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마음속과 삶 가운데 거하시게 하는 일입니다. 그것은 당신이 만일 당신의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당신의 마음에 믿으면 당신은 구원을 얻을 것이기 때문입니다.”-[대환난과 교회], pp.73,74

4)복음과 문화의 균형

복음의 상황화(contextualization)라는 주제는 오늘날 참으로 뜨거운 감자가 아닐 수 없다. 복음을 강조하다보면 문화에 적응하지 못하고 세상과 높은 담을 쌓아버림으로써 결과적으로 복음을 전하는데 어려움을 낳기도 한다. 반대로 상황을 강조하다보면 복음의 진정한 본질이 왜곡될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갈보리 채플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과 세상문화라는 것을 서로 배타적인 것으로 두지 않고 서로 조화되어야 할 것으로 보고 있다. 바로 이점이 갈보리 채플이 많은 젊은이들을 교회 안으로 끌어들인 매력일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조화와 균형은 철저히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사랑’을 강조함으로서 가능해왔다. 갈보리 채플의 가장 큰 장점 중에 하나가 바로 모든 문화적 차이와 인종적 차이를 뛰어넘는 ‘사랑’을 강조한다는 것은 앞서 여러 번 강조한 바이다. 복음만을 강조했다면 록 음악과 히피문화에 익숙해있었던 젊은이들을 끌어들일 수 없었을 것이다.

앞서 말한 대로 척 스미스 목사는 복음을 전하되 청중의 문화적 스타일을 옷 입고서 청중에게 자연스럽게 다가가야 할 것을 강조한다. 따라서 사역에 있어 어느 특정 문화적 형태를 고집하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본질을 추구하는 것과 본질을 구현하는 데 있어서 어떤 문화형태를 선택하느냐 하는 점에서 척 스미스 목사는 한 쪽으로 치우치지 않아야 한다고 말한다.(목회철학 참조) 특히 젊은이들의 문화에 갈보리 채플은 민감하게 반응하며 긍정적으로 수용한다. 그 대표적인 경우가 찬양에 중점을 두는 것이다. 하나님의 변함없는 말씀을 가르치면서도 현대적인 감각을 살린 음악을 배제하기는커녕 오히려 복음의 도구로 사용하여 주님을 경배하고 영광 돌리도록 한 것은 어쩌면 20세기 현대 교회사에 매우 중요한 발자취를 남긴 시도였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복음을 전할 때 이 균형을 잡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한 적이 있다. “내가 모든 사람에게 자유하였으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 유대인들에게는 내가 유대인과 같이 된 것은 유대인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는 내가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나 율법 아래 있는 자같이 된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없는 자에게는 내가 하나님께는 율법 없는 자가 아니요 도리어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 있는 자나 율법 없는 자와 같이 된 것은 율법 없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라. 약한 자들에게는 내가 약한 자와 같이 된 것은 약한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여러 사람에게 내가 여러 모양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몇 사람들을 구원코자 함이니 내가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함은 복음에 참예하고자 함이라”(고전9:19-23)

이렇게 척 스미스 목사가 신학적 균형을 강조하게 된 이유는 그가 포 스퀘어라는 오순절 교단에서 자라면서 오순절에 적응하지 못하고 자신만이 가졌던 성경관을 스스로 발전시켜 온 때문이다. 오순절 교단에서 가르치는 신학을 그대로 답습하기보다는 그가 스스로 성경을 읽으면서 터득한 신학관점을 유지하였다. 이렇게 어느 한 쪽으로 치우치지 않으려고 하는 신학적 균형감각을 유지할 수 있었던 힘은 그가 성경을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 빠짐없이 균형 있게 가르쳐 왔던 그의 신실한 말씀사역에서 기인한다고 볼 수 있다. 많은 강해설교자들이 성경을 연속적으로 강해하지만 사실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 순서적으로 가르치는 사역을 그것도 40년 이상이나 계속 하는 그런 강해설교자들은 많지 않다. 자신의 인격과 은사에 매료되는 교인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통달한 교인들을 만들어내려는 것이 척 스미스 목사의 목표이다. 이를 위해서 척 스미스 목사는 몇 년간의 주기로 계속 성경을 강단에서 완독 하려고 하는데 (최근 그의 강해설교는 7번째 시리즈를 마쳤다고 한다.) 이러한 습관이 그로 하여금 신학적 균형감각을 가지게 한 중요한 배경이 된다. 그러한 강단의 습관은 상당히 유익한 점이 많다. 우선 특정 교리에 치우치는 면이 사라지게 된다. 또 유행하는 사상이나 프로그램에 편승하지 않고서 지속적으로 자신의 독창적인 사역을 고수할 수 있게 해준다.

(3) 척 스미스의 교리적 신학이 배격하는 것들

척 스미스와 갈보리채플의 신학적 특징을 굳이 한 마디로 표현한다면 “균형성을 추구함”이다. 그리고 갈보리 채플 밖에서는 성경을 믿고 가르치는 자들과 교제하는 일에 있어서 갈보리 채플만의 견해를 고집하려고 하지 않는다. 하지만 갈보리 채플은 세부적으로 들어가서 배격하는 교리들을 분명히 가지고 있다. 갈보리 채플 가족 안에 있는 목회자들은 서로 교제하며 가르치는 일에 하나를 이루기 위해서 근본 교리들을 분명히 하고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갈보리 채플은 말씀을 가르치는 자들 사이에 매우 강력한 교리적 공동체를 이루고 있다. 갈보리채플 성경대학 학장인 래리 테일러가 소개하는 척 스미스와 갈보리채플이 거부하는 교리들은 다음과 같다:

1) 무천년설, 후천년설을 배격한다.

종말론에 있어서 갈보리채플은 철저히 전천년설주의자이다. 갈보리채플에서 우리는 교회의 환란 전 휴거를 기다린다.(전천년설) 갈보리채플은 요한계시록 6장에서 18장까지에 언급된 7년 대환난이 있기 전에 교회가 들림을 받을 것에 대한 믿음을 강력히 지지한다. 우리는 다른 신자들이 다른 관점을 가지고 있음을 알고 있지만, 이것이 우리가 이 주제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을 보는 관점이다. 우리는 땅을 다스리기 위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성도들의 재림이 개인적이라는 것과 천년왕국 이전에 있을 것과 모든 사람이 볼 수 있게 임할 것을 믿는다. 이 믿음이 우리로 하여금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경배와 섬김에의 참여와 하나님의 말씀을 열심히 공부하는 것과 다른 신자들과 규칙적인 교제를 하게 하며, 침수(侵水)에 의한 성인들의 세례와 성찬에 참여하도록 이끄는 것이다. 갈보리채플은 성경을 문자적으로 해석하지 않고 영해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무천년설’ 곧 요한계시록 20장이 묘사하고 있는 그리스도의 천 년간 지상통치를 부정하는 가르침을 배격한다.

2) 그리스도인들의 귀신들림을 배격한다.

그리스도인들이 귀신들릴 수 있다고 주장하는 일부 오순절주의자들과 카리스마주의자들을 배격한다. 귀신의 공격을 받을 수는 있으나 귀신들리거나 귀신의 지배를 받을 수는 없다.

3) 칼빈주의의 5개요 중에서 두 가지 교리를 배격한다.

하나는 예수님이 오직 선택된 부류를 위해서만 죽으셨다는 제한속죄교리이다. 온 인류의 죄를 위해 죽으심을 부인하는 말이기 때문이다. 선택받은 자만이 구원을 받을 수 있으며, 다른 사람들은 지옥에 보내도록 선택하셨다고 가르치기 때문이다. 또 다른 교리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거부하기를 원할지라도 거부할 수 없다는 ‘불가항력적 은혜’의 교리이다. 그러나 갈보리채플에서는 거부하고자 한다면 그렇게 할 수 있는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음을 가르친다. 물론 이것은 칼빈주의에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극단적 칼빈주의자들의 가르침을 의미한다고 본다. 필자 역시 칼빈주의적 전통에 서 있는 장로교회의 목사로서 칼빈주의 계열 안에서도 다양한 주장들이 있다는 것을 배웠다. 칼빈의 가르침을 그 자제들이 ‘주의’(doctrine)으로 만들 때 오해할 여지가 있는 방식으로 표현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칼빈이 말한 불가항력적 은혜는 오직 ‘유효한 부르심’에 적용되는 것이다. 하나님이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하신 영혼이 그리스도의 복음이라는 부르심의 은혜를 거부할 수 있을까? 예수님은 ‘내 양은 내 음성을 듣는다’ ‘내 양이 아닌 고로 듣지 않는다’고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유효한 부르심과 일반적 부르심으로 구별할 때 우리는 불가항력적 은혜라는 말의 원래 의도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성경에 근거한 특정 교리를 일반적으로 적용하려고 할 때 문제가 생기게 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갈보리 채플이 공식적으로 ‘불가항력적 은혜’를 배격하는 것은 특정 교리가 일반적으로 적용되는 것을 경계하는 데 좋은 각성제가 되는 것이 사실이다.

4) 긍정적 고백(Positive Confession)의 성취라는 가르침을 거부한다.

우리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졌으므로 우리 입술의 고백으로써 우리 자신의 존재를 창조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무한정의 건강과 부를 소유할 수 있다는 교리이다. 그러나 갈보리채플에서는 우리가 본향이 아닌 이방에 살고 있는 것이라고 믿는다. 또한 그런 교리는 하나님의 양들을 교묘히 속여 강탈하는데 쓰일 수 있기 때문에 배격한다. 우리의 입술의 고백과 명령에 하나님이 무조건 따르시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갈보리 채플의 이러한 가르침은 모든 긍정적 사고방식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다. 긍정적 사고방식을 부를 창출하려는 도구로 가르치는 것을 거부하는 것이라고 본다. 성경은 말의 중요성을 대단히 강조하고 있다.(잠언, 야고보서) 예수님도 말의 중요성을 여러 번 가르치셨다. 문제는 건강과 재물을 위해서 긍정적 고백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그 은혜에 합당하게 고백하는 언어생활은 얼마나 중요한지 모른다.

5) 하나님의 말씀보다도 예언에 더욱 우선권을 두는 가르침을 배격한다.

예언적인 말들이 하나님의 말씀과 동등, 혹은 더 우선한다고 주장하는 자들의 교리를 배격한다. 갈보리채플에서는 성경이 최종적인 권위라는 사실을 믿는다.

6) 철학과 심리학에 바탕을 둔 가르침을 배격한다.

일부 교회들은 하나님의 말씀보다도 세속적인 인간의 교리들에 더욱 기초하고 있는 그들의 교육 프로그램과 설교 작성에 세속적인 철학과 심리학을 병합시키고 잇다. 우리는 정신건강에 관련된 분야에서 일하는 우리의 동료 신자들을 존경하는 반면, 갈보리채플에서 우리는 잃어버린 바 되고 상처받은 세상에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것이 교회의 중심적인 사명임을 믿는다. 더욱이 우리의 경험에 의하면 세속적인 인간의 철학과 심리학이 도움을 주기보다는 오히려 해를 끼치는 경우가 종종 있었으며 사람들은 성령의 권능과 사랑으로서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될 때에 최고의 반응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삶을 더욱 좋게 변화시키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다. 갈보리채플에서 우리의 예배는 성경을 가르치는 데에 중점을 두고 있다.

7) 지나친 영적 은사들의 강조와 경험적 표적과 성경적인 가르침을 배제한 신비들을 배격한다.

우리는 프로그램이나 장치를 배제한 하나님의 백성들에 대한 사랑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의 단순한 가르침의 은혜 안에 있는 성경에 기초한 목회이다. 우리의 예배들에서 우리는 경배와 기도와 하나님의 말씀의 가르침을 통한 하나님과의 개인적인 관계에 초점을 맞춘다. 우리는 강해와 제목 성경 공부를 제공한다. 우리는 예배 도중에 큰 소리로 방언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데 이는 우리가 성령이 스스로를 방해하지 않는다고 믿기 때문이다.(아름다운 목양의 샘터, pp.180~191)

그러나 척 스미스가 강조하는 것은 교리가 다르다고 교제하지 않는다는 말이 아니라, 척 스미스는 교리는 다르지만 기본적으로 성경의 권위를 믿고 성경을 신실하게 가르친다면 우리는 모두 한 몸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지체라는 점을 강조한다. 즉, 성경관이 실제적으로 중요한 관건인 셈이다. 위에서 설명한 것은 다만 다른 교파들이 주장하는 신학적 교리들이 갈보리채플의 취지의 범위밖에 있음을 간주하는 것이다. 이러한 신앙고백에 있어 명백히 갈보리채플의 교리를 밝히는 데 있어서 목적은 다른 교파들과 차별성을 획득하기 위해서나 논쟁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라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들과 사랑의 사귐을 가지기를 원한다는 점이다. 척 스미스와 갈보리채플의 신학은 분열을 조장하는 것을 결코 원치 않지만 자기만의 분명한 노선을 가지고 있다.

7. 갈보리채플의 주일설교의 방식

그러면 갈보리채플에서는 주일날 어떤 순서로 설교를 하고 있는가? 주일 오전 3부 예배 시에는 본문 핵심 중심의 강해식으로 설교하고, 저녁에는 그 구절을 포함한 장 전체를 주해하면서 공부하는 식이다. 예배는 매우 단순하게 진행된다. 먼저 찬양이 있은 후에, 척 스미스 목사가 나서서 봉독할 말씀을 소개한다. 신약을 강해할 때는 구약에서 봉독할 본문을 선택하고 구약을 강해할 때는 신약에서 봉독할 본문을 선택한다. 본문을 봉독할 때는 모든 교인들이 다 일어서는데 주로 교독하는 형식으로 읽는다. 다같이 일어서서 성경을 봉독한 후에 척 스미스 목사가 짧게 일반적인 감사를 올려 드리고, 또 설교를 위해 성령의 도움을 간구 하면서 준비 기도한다.

“아버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볼 때 그분 안에서 자비와 진리가 서로 만나고, 의와 평화가 서로 입맞춤을 보나이다. 주여, 이제 다시 한 번 예수 그리스도를 앎으로써 우리가 받게 된 저 평강, 사람의 지각을 초월하는 저 하나님의 평강 주심을 감사하나이다. 주여, 기도하옵나니 오늘 우리가 주님의 말씀을 볼 때에 우리의 마음 문이 활짝 열려 주님께서 우리들을 위해 예비하신 것들을 모두 다 받고, 주님께서 우리들에게 들려주시고자 하시는 주님의 진리를 온전히 깨달을 수 있도록 해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기도와 치유, p.139)

이렇게 기도한 후 “않으셔도 좋습니다”라고 말한다. 그런 다음에 척 스미스 목사는 저녁에 공부할 장(chapter)을 소개하면서 몇 장을 공부할 테니 미리 읽어오라고 권유한다. 주로 다음과 같은 형태이다.

“마태복음 13장을 펼쳐 주시기 바랍니다. 오늘밤 우리들은 성경 속으로의 여행을 계속하면서 마태복음 13장에 나오는 여러 가지 천국비유들에 대해 공부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 시간에는 이 일곱 가지 천국 비유 중 하나인 13장 44절의 비유에 대해 살펴보고자 합니다.”(기도와 치유, p.45)

“오늘저녁에는 누가복음 11장을 공부합니다. 미리 읽어오실 것을 바라고 모두 모여 저녁 7시에 지난주에 이어서 성경전체를 여행해 보는 우리들의 여정을 계속하겠습니다. 오늘 아침의 말씀은 누가복음 11장의 1절로 시작합니다. 말씀의 내용은 기도입니다.”(기도와 치유, p.76)

“우리가 그 동안 해 오던 성경 속으로의 여행이 이제는 요한복음의 거의 끝 부분인 19장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오늘 저녁에는 역시 요한복음 19장 전체를 공부하겠으나 이제 이 아침에는 요한복음 19장 중 28절로부터 30절까지를 보기로 하겠습니다.”(기도와 치유, pp.107,108)

“그 동안 해왔던 성경 안으로의 여행을 계속하여 우리는 이제 사도행전 10장에 이르게 되었는데 여러분들 모두가 집에서 한 번씩 읽어보시기를 권해드립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안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입니까? 성경을 순서대로 쭉 공부해 나가고 있으므로 여러분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알 수 있는 더없이 좋은 기회를 맞이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진도에 맞추어 집에서 성경을 미리 읽어오시기 바랍니다. 달팽이 걸음으로 가고 있으므로 누구든지 심지어는 초등학교 1학년 학생일지라도 이 진도를 따라올 수 있을 것입니다. 시간이 없다고는 말하지 마십시오. 저는 믿지 않을 것입니다. 어쨌든 이번 주는 사도행전 10장으로 말씀 속으로의 여행이 계속됩니다.”(기도와 치유, p.140)

이렇게 소개한 후 읽은 본문에 대해 강해한다. 강해설교를 마친 다음, “기도하실까요?” 혹은 “기도합시다”라고 한 다음 기도한다. 그런 다음, 청중을 향해 일어서 주기를 요청한 다음 그들과 함께 즉흥찬양을 드린다. 그런 다음 다시 말씀으로 권면, 또는 축복선언을 함으로 예배를 마친다.

II.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척 스미스

우리는 종종 어떤 사역자를 조명할 때 어느 한 쪽에 치우치는 경향이 있다. 우리는 목회자적 측면, 설교자로서의 재능, 그리고 평범한 인격으로서의 면모를 동시에 보아야 한다. 훌륭한 목회철학을 가지고 있고, 탁월한 의사소통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할지라도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영성과 인격이 뒷받침되지 않는다면 아무런 소용이 없다. 많은 목회자들이 두 가지에서 성공적이지만 세 번째에서 실패하는 경우가 많다. 목회자와 설교자로서는 탁월한데 그리스도인으로서는 그렇지 못한 경우가 많다. 목회철학과 설교의 은사는 흠모할만하고 본받고 싶은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영성과 인격으로 이어져야 한다. 목회자와 설교자로 성공했지만 가까이 하기에는 너무나 멀게 느껴지는 사역자들이 많다. 그러나 척 스미스 목사는 그렇지 않다. 그래서 지금까지는 설교자로서의 척 스미스를 살펴보았지만 이제부터는 목회자와 설교자 이전에 한 그리스도인의 모습으로서 척 스미스를 살펴보고자 한다. 그럴 때 우리는 그가 탁월한 목회자와 설교자이기 이전에 그리스도를 닮아 가는 인격, 누구나 흠모할만한 인격, 누구나 쉽게 사귀고 싶은 마음이 들만한 인격의 소유자임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1) 그의 영성은 어떠했으며, (2) 그의 인격은 어떠하며, (3) 그의 비전과 기타 가치관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한다.

1. 척 스미스의 영성

기독교에서 영성에 대한 단어는 기본적으로 하나님 안에서 즐거워하고 하나님과 교제하고 연합하는 것을 추구하는 경향성이라고 정의할 수 있겠다. 인생의 제일된 목적은 하나님을 영원히 즐거워하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즐거워함이 영성이요 경건의 핵심이다. 잠언 10:23은 “미련한 자는 행악으로 낙을 삼는 것같이 명철한 자는 지혜로 낙을 삼느니라”고 했다. 그리고 시편 1편은 복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즐거워하는 사람이라고 했다. 그러나 사실 하나님을 즐거워하지 않고, 하나님과 교제하며 연합을 누리는 것을 추구하지 않으면서도 하나님을 위해 이런 저런 일을 잘 해낼 수 있다. 영성이 없이도 진리를 위해 피흘리며 싸울 수 있다. 영성이 없이도 교회를 위해 자기 몸을 불사르게로 드릴 수 있다. 영성이 없이도 교회일을 효율적으로 해낼 수 있다. 영성이 없이도 성공할 수 있는 것이다. 심지어 영성이 없어도 방언하며 산을 옮기는 믿음을 행할 수 있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들과 교제하지 말라고 분명히 경고하고 있다.(딤후3:5) 목회자라면 참된 경건, 혹은 영성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리고 섬기는 교인들에게 참 경건의 능력을 보여주어야 한다. 그러면 참된 경건은 어디서 나오는 것인가?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신실하게 연구하고 묵상하는데서 나오는 것이다. 디모데전서 6:3-6에, “누구든지 다른 교훈을 하며 바른 말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경건에 관한 교훈에 착념치 아니하면 저는 교만하여 아무 것도 알지 못하고 변론과 언쟁을 좋아하는 자니 이로써 투기와 분쟁과 훼방과 악한 생각이 나며 마음이 부패하여지고 진리를 잃어버려 경건을 이익의 재료로 생각하는 자들의 다툼이 일어나느니라. 그러나 지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이 큰 이익이 되느니라”고 했다. 경건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지족하는 마음이다. 그러나 목회자가 자신의 기업과도 같은 하나님의 말씀에 착념치 않을 때 경건을 이익의 수단으로 생각하게 되고, 그렇게 가르치며 교회 안에서는 사람의 냄새와 함께 온갖 부조리가 발생하게 되는 것이다.

척 스미스 목사는 신실한 말씀묵상과 연구에서 비롯된 것으로 하나님과 교제하며 동행하며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경건을 소유하고 있다. 어떤 과정을 통해 그러한 영성을 가지게 되었는가? 이 모든 것은 척 스미스 목사의 개인적인 노력과 수련의 결과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면서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는 법을 배웠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목회성공을 위해 여러 가지로 노력해보았지만 실패뿐이었고 목회에 지치고 탈진하고 있었을 때 성경은 그를 진정한 영성으로 안내하게 되었다. 그가 성경을 연구하면서 참 경건의 능력을 발견하고 소유하게 되자 그의 목회도 달라지게 되었다. 비로소 목회의 열매가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어느 날 제가 이 로마서를 공부하고 있을 때 하나님은 다름 아닌 하나님과 저와의 관계에 일대 혁명을 일으키셨습니다. 간단하고도 우리가 자주 사용하는 말이면서도 그 뜻을 분명하게 알지 못하고 있는 말의 의미를 분명하게 깨닫게 해주셨는데 그 말이 바로 ‘은혜’라는 단어였습니다. 저는 그때 이후 지금까지 자유롭고 사랑으로 가득한 하나님과의 관계를 누리게 되었으며, 목회에 있어서도 과거에 보지 못했던 어마어마한 하나님의 기적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은혜의 비밀], p.12.

그래서, 우리가 척 스미스의 영성을 이해하려면 그의 성장배경과 그가 본래 17년간 소속되었던 교단의 분위기를 이해해야 한다. 그는 갈보리채플에서 목회를 시작하기 이전에 17년간 자신이 소개한 ‘영적 사막의 기간’에 자신이 연단 받은 것을 그가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가를 이해해야 한다. 그 기간 동안 그는 겸손해야 하며, 하나님만 의지해야 하며, 철저히 성경말씀에만 의지해야 함을 배웠다. 그는 이 기간에 철저히 하나님만 의지해야 하고 하나님의 지시 없이 아무 일도 못하며 하나님의 지시 없이 한 일은 위험하며 또 어떤 원칙을 가지고 목회 해야 하는지 배웠다. 척 스미스는 상당히 겸손한 사람이다. 그리고 균형감각을 갖춘 사람이다. 그러나 그가 이렇게 겸손한 인격으로, 오직 믿음으로, 하나님만 의지하는 신앙으로 흔들리지 않게 우뚝 설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이 그를 연단 하시고 훈련시켰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연단이 있었기 때문에 척 스미스 목사는 자신이 교회를 소유한 듯이 교회 안에서 당당하게 걸어가지 않을 수 있게 되었다.

“나에게는 바다에 뜬 항공모함 같은 갈보리채플로, 나는 마치 함장인 양 걸어가지 않았다. 어떤 큰 기업체의 재별 사장은 그 대형 기업체를 무능한 자식에게도 물려준다고 하지만, 이 교회는 내가 물려받은 것이 아니다. 그 대신 나는 무에서 시작하여 그때그때 하나님의 새로운 부르심에 순응했을 따름이다. 그 부름이 때로는 불합리하게 느껴지기도 했었지만, 그 뒤에는 여러 가지 은밀한 교훈과 피와 땀과 눈물로 어우러진 노력들이 숨어 있는 것이다. 물론 이 일의 성사를 위해서 준비 작업기간이 필요했었다. 그 기간이 나름대로는 광야 생활이었다고 악전 고투하던 긴 세월이었다고 확신한다. 이렇게 가혹하리 만큼 극심한 시련을 통하여 하나님은 앞으로 다가올 작업을 위해 나를 연단 시키시고 단련시키신 것임을 믿는다. 하나님은 이따금 외견상의 처지를 무시하신다. 그러나 우리가 믿기만 한다면 하나님은 불가능을 부인하신다. 그런데도 사실 내게 있어서 상황은 가끔 전혀 불가능하게 보였다.”(위대한 추수, p.30)

사사기에 나오는 기드온의 삶이 주는 영적 교훈은 하나님으로부터 부름 받은 사사라 할지라도 그가 순종하는 법,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법, 그리고 믿음으로 사역하는 법을 배우는 이른바 ‘믿음의 준비기간’이 없이 하나님은 그를 사용하지 않으셨다. 이것은 모세나 여호수아나 다윗에게도 마찬가지이다. 기드온은 믿음으로 하나님의 전쟁을 하는 법을 배워야 했다. 그는 목숨을 걸고 바알의 단을 훼파하고 아세라 상을 찍어버리는 모험을 감행해야 했다. 그리고 여호와를 향한 제단을 다시 쌓아야 했다. 그리고 불평과 비난을 감수하면서 32,000명에서 300명으로 감축하는 믿음의 모험(venture in the faith)을 감행해야 했다. 그 후에야 하나님은 “이제 그들을 네 손에 붙였다”고 선언하셨고 기드온은 나가서 이삭 줍듯이 미디안과의 전투에서 승리한 것이다. 척 스미스 역시 오로지 믿음으로 하나님을 순전하게 의지하는 법을 배운 이후에야 비로소 하나님에 의해 쓰임 받을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17년간의 재정적 영적 공허함은 “위대한 추수를 앞둔 가뭄”이었던 것이다.

척 스미스 목사의 영성을 굳이 범주화한다면 “하나님을 경외하는 지혜와 영혼을 사랑하는 애정과 오랜 연단에서 빚어진 겸손의 목양자”라고 할 수 있겠다. 그래서 본문을 실용적으로 해석해서 교인들의 삶 속에 탁월하게 적용하는데는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을 즐거워하는 참된 경건이 근간을 이루고 있다고 할 수 있겠다. 척 스미스 목사 자신이 갈보리채플 운동의 영성에 대해 어떤 역사적 평가를 내리고 있는지 들어보자.

“분명 갈보리채플 운동은 교회 안에서 성령이 역사하신 한 운동으로 역사에 남게 될 것입니다. 특히 새로운 점으로서 온전한 말씀에 대한 사랑, 말씀공부에 대한 사랑, 교제 곧 교회 안에서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에 대한 사랑, 기도에 대한 사랑, 그리고 주님에 관한 것들에 대한 사랑을 들 수 있고, 또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음악에 대한 사랑인데 온 세상 교회들에 영향을 주었습니다. 새로운 찬양스타일은 전세계 교회음악에 혁명을 가져왔습니다”-믿음의 모험

척 스미스 목사의 영성은 매우 겸손하여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서 자신이 행한 일이 아니라 자신을 통해 하나님이 하신 일임을 잊지 않고 있으며 자신은 그저 구경꾼에 불과하다고 거듭 강조하고 있다. 그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지혜가 있으며, 말씀에 근거하여 치우치지 않으며, 균형 잡힌 인격의 소유자이며, 문화의 장벽을 뛰어넘는 영혼을 향한 깊은 애정이 있으며, 성도가 서로 교제하는 것에 대한 사도적 교회의 감각이 있으며, 특히 그가 말한 바 열심히 찬양하는 데 모범을 보여주는, 그러면서도 다른 그리스도인들과 다른 카리스마적 권위를 보여주지 않는 평범함과 편안함을 보여주는 하나님의 사람이다. 그는 실제로 현대 미국교회사 뿐만 아니라 전세계 복음주의에 지울 수 없는 큰 획을 그렸음에도 불구하고 공정하게 평가받지 못했다. 어쩌면 그것은 그의 겸손한 성품에서 비롯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갈보리 채플에서 척 스미스 목사는 교회성장 세미나를 열고 사람들에게 대대적으로 홍보하며 선전하는 법이 없다. 오늘날 자신의 목회 열매와 영향력을 선전하는 일에 열심 내는 모습과는 얼마나 다른가?

뿐만 아니라 척 스미스 목사의 영성은 ‘지고한 사랑’으로 요약할 수 있다. 그는 성령의 열매 중 사랑을 가장 강조하고 있으며 교인들에게도 하나님을 지극히 사랑하도록 가르치고 있다. 이것은 하나님과의 교제와 연합과 동행에서 충만한 기쁨과 만족을 얻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것이다. 그의 이러한 영성의 단면을 보여주는 그의 설교를 들어보자.

“우리가 하나님을 향해 가지는 사랑은 다른 모든 사랑을 능가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큰 계명이요, 이것을 행하고 나면 모든 것을 행한 것이라고 하신 바로 그 계명입니다. 문제는 여러분들이 이것을 행했느냐는 것입니다. 1에서 10까지 눈금을 매겨서 10을 최고의 사랑이라고 한다면 여러분이 오늘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랑은 그 눈금 위에서 어디쯤 와 있겠습니까? 우선 순위를 따라 목록을 만들어 본다면 하나님은 그 목록 위에서 어디쯤 들어가 있겠습니까? 말만 번지르르하게 ‘오, 나는 이 세상 그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더 사랑합니다’라고 하는 것은 매우 쉬운 일입니다. 그러나 그 말이 사실입니까? 실제로 보여지고 있는 현실입니까? 이것이야말로 우리들 각자가 성령의 도움을 받아 자기 혼자만이 대답할 수 있는 문제일 것입니다. 다윗이 ‘하나님이여, 나를 살피사 내 마음을 아시며 나를 시험하사 내 뜻을 아옵소서’라고 했듯이 말입니다. ‘주여, 나에게 무엇인가가 있어 나로 하여금 하나님을 온전히 사랑하지 못하게 하고 있지는 않은가, 나를 방해하고 있지는 않은가, 장애물이 되고 있지는 않은가, 어쩌면 내 마음속에서 첫째가는 자리를 차지하기 위하여 경쟁을 벌이고 잇지는 않은가, 오 하나님, 나를 살펴주소서! 정직한 내 마음을 알게 하여주소서!’ 만일 그것이 첫째 계명이요, 가장 큰 계명이라면 확실히 그 첫째 계명이요, 가장 큰 계명에 순종하고자 하는 마음이 우리 모두의 가슴속에서 최고의 욕망으로 자리잡고 있어야하지 않겠습니까? 저는 여러분들에게 오늘 어딘 가에서 따로 예수님과 단 둘이서만 만나보실 것을 권해 드립니다. 예수님께서는 갈릴리 호숫가에서 제자들과 만나 주셨던 것처럼 여러분들과도 꼭 만나주실 것입니다. 만나서 여러분들에게 몇 가지 물어보실 말이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들에게 몇 가지 질문을 던지실 것입니다. 그러면서 여러분들의 삶 속에서 ‘이들’이 무엇인지를 보여주실 것입니다. 그리고는 여러분들이 예수님과 가졌던 관계에서 가장 높은 수준으로 여러분들을 끌어올려 주시고자 하실 것입니다. 저 아가페의 사랑, 순수한 주님의 사랑으로 말입니다. 그럴 때, 여러분들의 수준으로 예수님을 끌어내리려 하지 말고 그분이 계시는 높은 곳으로 올라가십시오.”(기도와 치유, pp.134,135)

척 스미스 목사는 오랜 세월 동안 실패와 좌절을 통해 오로지 하나님 한 분만을 신뢰하는 법을 배웠다. 그래서 척 스미스 목사 자신은 갈보리채플을 의지하지도 않고 교인들에게 의탁하지도 않는다. 이렇게 주안에서 홀로서기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온전하게 사랑할 수 있다. 척 스미스 목사는 하나님을 즐거워하며 하나님의 말씀만으로 만족하는 참된 경건을 소유하고 있다. 그래서 남을 지배하려고 들지 않으며 도리어 충만한 사랑으로 남을 섬길 수 있게 된 것이다. 사역자가 참된 경건을 소유하지 못한다면 그 공허한 마음을 채우기 위해 교인들을 좌지우지하거나 혹은 교인들로부터 젖을 요구하거나 혹은 교인들을 의존하게 됨으로써 결국 교회가 상처받게 될 것이다. 참된 목사는 참된 경건을 소유한 사람이어야 한다. 척 스미스 목사는 참된 경건을 소유한 사람이다.

2.척 스미스의 인격

척 스미스 목사의 인품은 그가 오랫동안 연단을 통해, 믿음의 모험과 고민을 통해, 영혼들을 향한 연민을 통해,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말씀을 통해 하나님과 깊이 교제함으로써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간 흔적이다. 그가 보여주는 인격적 특성은 참된 목회자상의 모델이라 할만 하기에 충분하다.

반면, 거짓 선지자, 사이비 목회자의 인격적 특성은 어떠한가?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없는 사람이다. 경건을 강조하되 경건을 이익의 수단으로 가르치는 사람이다. 자신이 경건을 이익의 수단으로 생각하는 한 결코 참된 경건의 열매를 맺을 수는 없을 것이다. 교회 안에도 사이비 목회자는 많다. 예수님은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분별하라고 가르치셨다.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져 보라. 하나님보다 자신을 더 돋보이게 하거나 드러내는 언행을 하지 않는가? 자기 자신에게로 집중시키는 것인가 아니면 주 예수 그리스도께 집중시키는가? 진정 자아를 죽인 흔적이 보이는가? 자신의 모든 욕망에 대해 십자가에 그리스도와 함께 못 박혔는가? 목회자 자신이 신과 같은 완벽하고 권위 있는 존재로 인식되기를 좋아하는가? 일반 교인들의 눈 높이로 낮아질 줄 아는가? 아니면 그들과 거리를 두고서 권위의 장벽을 스스로 높이 쌓고 있는가? 목사는 대단한 인물인양 자신의 영향력을 과장하는가? 그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가능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명석함과 예리함을 자랑하지 않는가? 자신의 업적이 남들에게 공정하게 평가되지 못하면 분노하지 않는가? 남들에게 칭찬 받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가? 그와 함께 하는 가족들이나 직원들이 그를 진심으로 존경하고 좋아하는가? 혹시, 직원들에게 ‘왜 자기를 제대로 섬기지 않는가’ 라고 심하게 꾸짖는가? 이것저것 지시 내리는 것을 목회 지도력인 양 생각하지 않는가? 예수님을 사랑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사랑하게 만드는가?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가장 소중한 것을 바치라”고 하면서 자신의 탐욕은 정당화하지 않는가? 순종하지 않으면 천벌 받는다고 협박하지 않는가? 언행이 불손하고 저속하거나 경박한 말을 사용하는가? 인격이 정말 존경하고싶게 만드는 특성이 있는가? 그리스도를 닮은 증거들이 나타나는가?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랑과 인내의 열매가 있는가? 잘 참지 못하고 혈기를 부리는가? 열등감을 다스리지 못하고 비난이나 무시당하는 것을 참지 못하는가? 이러한 질문을 가지고 거짓선지자인지 검증해 볼 수 있다.

자기 주장의 근거가 아무리 성경적이라 할지라도 그 궁극적인 적용이 돈을 요구하는 것이거나 어떤 유익을 얻는 것, 예를 들어, 개인의 위엄을 차리고 개인의 야망을 드러내거나 성취하기 위함이라면 그는 거짓 선지자라 할 수 있다. 왜냐면 그는 교인들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개인의 야망이나 성취의 도구로 교인들과 진리를 마구 휘두르기 때문이다. 권위주의적이거나 카리스마적이고 자기 체험이나 간증을 하기 좋아하는 것은 거짓선지자들의 보편적인 행태이다. 그들은 자기 중심적이고 자기 도취에 빠져 있다. 이렇게 섬길 줄 모르고 섬김 받기를 좋아하는 것, 자신이 직접 나서서 일하기보다는 남에게 명령하고 지시하기를 좋아하는 것도 역시 거짓 선지자의 습관이다. 거짓선지자는 자기자랑으로 많은 청중을 끌어 모으는데 성공하지만 결코 훌륭한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제자 삼지는 못한다. 그래서 그들은 사람들이 자기 자신을 깊이 알게 되는 것을 두려워한다. 그래서 거리를 두고 권위를 지키고자 한다. 그들은 사람들에게 무시당하고 비난받는 것을 참지 못한다. 그러면서 교인들에게는 용서하고 참으라고 설교한다. 무지한 다수의 청중을 권위를 가지고 장악한다고 속아서는 안 된다. 소수의 교인을 이끌더라도 진실하고 훌륭한 말씀의 사람을 만들어내는 목회자가 참으로 진실한 하나님의 종이다. 참 목자는 결코 자신의 유익을 구하지 않는다. 돈이나 기타 봉사를 요구하지 않는다. 자아를 죽이고 그리스도의 몸을 섬긴다. 돈을 사랑하지 않고 탐심을 미워하는 흔적이 보인다. 목회 현장에서는 경건의 능력을 입증할 “열매”가 중요한 것이다. 그러한 ‘열매’를 보고 교인들은 더욱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게 될 것이고 진리 안에서 분발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척 스미스 목사의 인격에서 우리는 참된 종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그의 인격적 특성은 첫째, 섬기는 지도자상이고 둘째, 균형감각과 포용력이고, 셋째, 겸손과 온유이다. 서울 갈보리채플의 이요나 목사는 척 스미스 목사와의 인격적 만남을 다음과 같이 회상하였다.

제가 척 스미스 목사를 처음 만난 것은 1993년 동경 신유리가오카에서 있었던 초청 세미나였습니다. 그때 나는 오순절 계통 신학원 재학중이었고 믿음생활 속에서 교리적 문제로 가장 번민을 하던 때였습니다. 나는 순복음에서 신앙생활을 해왔고 신학원에서 만난 히라노 코오이찌 목사(동경 호라이즌 채플 담임)를 통하여 갈보리채플 이야기를 들은 후 새로운 믿음의 모험에 발을 딛게 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집회장 객석에서 처음 만난 척 스미스의 모습은 제게 커다란 충격을 주었습니다. 그동안 내가 보아온 수많은 세계적인 목회자들의 모습과는 전혀 다른 모습과 전혀 다른 메시지를 전달하였기 때문입니다. 척 스미스 목사의 집회에 참가한 나의 첫 소감은 어떤 충동적인 감격보다는 생전 만나보지 못한 사람이었지만 나와 아주 절친한 아버지의 친구를 만나는 것같은 느낌이었습니다. 그의 시선은 회중들을 향하고 있었지만 무엇을 요구하지 않았고 그의 영은 오직 성령의 인도하심 속에서 감사와 찬양을 드리고 있음이 역력히 보였습니다. 그는 자신이 배우고 터득한 성경적인 진리를 통하여 발견된 믿음의 모험을 우리에게 전달하면서 우리를 그가 체험한 그리스도의 은혜와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고 있었습니다.

온유하고 평화로움 속에서의 만남은 저의 평생 잊혀지지 않는 기억이기도 합니다. 척 스미스 목사와 두 번째 만남은 제가 목사가 된 후 서울 갈보리채플을 개척한 지 6개월이 되던 1995년 6월이었습니다. 나는 그때 히라노 코오이찌 목사를 모시고 성경적인 부부생활이라는 작은 세미나를 계획하고 있었는데, 척 스미스 목사님은 한국 교회의 초청으로 서울에서 목회자 세미나를 인도하고 있었습니다. 나는 귀중한 시간을 그냥 지나칠 수 없어서 척 스미스 목사님이 묵고 계신 힐튼 호텔에서 우리 성도들과 조찬 기도회를 가졌습니다. 처음 보는 나의 초청에 기꺼이 응한 척 스미스 목사는 이른 아침 웃음꽃이 활짝 핀 얼굴로 스카이 라운지로 올라왔습니다. 30여 명의 작은 무리들 속에 아침 식사를 나눈 후 척 스미스 목사는 간단한 메시지를 통하여 서울 갈보리채플의 개척을 다음과 같이 축복해 주었습니다. “나와 우리 교회는 한국에서의 갈보리채플 사역을 위해 오랜 시간 기도해 왔습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의 기도는 중국을 향하고 있습니다. 이미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역자들이 교회를 개척 후 조바심을 갖고 교회 성장에 급급하여 자신의 힘과 프로그램을 통하여 전전긍긍하다가 실패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말씀을 전해줍니다. “금년에는 스스로 난 것을 먹을 것이요 제 이년에는 또 거기서 난 것을 먹을 것이요 제 삼 년에는 심고 거두며 포도나무를 심고 그 열매를 먹을 것이라” 이 말씀과 같이 하나님의 뜻을 깨달아 주의 은혜의 부르심에 참여하면 삼사천 명의 교회의 토대를 이루게 될 것입니다.” 이 얼마나 감격할 만한 격려의 메시지입니까? 그는 작은 자의 초청에 기쁨으로 임하여 소망과 비전을 주는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또 1998년 10월 저는 샌디에고의 마이크 매킨토시 목사가 이끄는 호라이즌채플 리더 세미나에 참가했습니다. 그곳에는 척 스미스 목사가 주강사로 봉사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3년 전에 만난 나를 알아보고 기쁜 얼굴로 나를 포옹하여 주며 나의 목회에 관심을 갖고 물어왔습니다. 나는 그때 서울 힐튼호텔에서 나에게 준 메시지가 성취되지 않았다고 투덜대며 나에게 당신의 신령한 은사를 나누어주지 않겠느냐고 응석을 부렸습니다. 척 스미스는 그때 일을 기억하면서 “네가 하나님의 뜻을 깨달은 날부터 하나님의 열매가 열릴 것이라” 말씀하시며 내게 성령이 충만하게 해 달라고 손을 얹어 기도해 주었습니다. 그로부터 지금 삼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나는 지금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의 기도와 함께 한국에서도 갈보리채플의 신선한 말씀 운동이 일어날 것을 믿고 있습니다. 그는 성령의 열매를 바라보며 기도하는 진실하고 성실한 주의 종입니다.

(1)섬기는 지도자의 모습

척 스미스 목사의 리더십은 한 마디로 섬기는 리더십(servent leadership)으로 요약할 수 있다. 이러한 리더십은 제자들을 섬기신 예수님을 본받고자 하는 데서 비롯된다. 또한 목회자로 부름 받은 것은 양떼들 위에 군림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섬기기 위한 것이라는 확고부동한 소명관에서 시작한다.

“부르심에 대한 확신과 함께 따라오는 것이 ‘헌신’(commitment)입니다. 목사가 예수 그리스도의 주되심에 전적으로 헌신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나의 나됨은 나의 야망이나 나의 원함이나 나의 의지로 된 것이 아닙니다. 나의 나된 것은 그분의 의지로 된 것입니다. 나는 내 삶을 그분께 맡겨드렸습니다. 만일 내가 주님께 헌신했다면 다른 이들을 섬기기 위해 그분의 말씀과 그분의 사역에 또한 헌신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섬김에 대해 올바른 태도를 가지기 위해서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분은 “이방인의 소위 집권자들이 저희를 임의로 주관하고 그 대인들이 저희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막10:42-44)고 말씀하셨습니다. 목회는 사람들이 당신을 기다리고, 당신을 존경하고, 당신이 목회자이기 때문에 우러러보는 그런 섬김을 받는 자리가 아닙니다. 그것은 실제적으로 사람들을 섬기는 자리입니다. 최근에 나는 어느 목사들의 회의에 참석했다가 목사들의 추한 행동을 보고 감짝 놀란 적이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커피잔을 들고 모임이 있는 방으로 가지고 들어오곤 했습니다. 지금 그것에 대해서는 아무런 문제를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헤어질 때 그들은 캔과 커피잔을 바닥에 내버려두고서 떠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돌아다니면서 커피잔과 음료수 캔을 집어들기 시작했고 그 회의실을 깨끗하게 치웠습니다. 나는 누군가가 와서 커피잔을 차서 카페트 위에 엎질렀을 때 일어난 일을 알고 있습니다. 나는 우리 갈보리 채플의 목사들이 그런 시설에 그런 모습을 남기는 것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목회를 다른 사람을 섬기는 것보다 섬김을 받을 수 있는 기회로 여기고 있습니다. “글쎄요, 누군가가 뒤에 쓰레기를 치우겠지요, 왜냐면 나는 목사이니깐”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목회자라는 뜻과 거리가 멀 뿐만 아니라 비성경적인 태도입니다.”-Distictives

4만에 육박하는 성도들, 그리고 수천의 목회자들을 길러낸 대형교회의 목사로서 교회가 성장하면서 ‘이것을 치우라’ 혹은 ‘저것을 하라’는 식으로 지시하는 습관이 몸에 베지 않았다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것이다. 대형교회는커녕 심지어 작은 교회에서조차 목회자들은 지시하고 명령하고 섬김을 받는 것을 더 좋아하는 경향이 몸에 베여 있는 것이 사실인데도 말이다. 그러나 심지어 목회 현장에서뿐만 아니라 일상생활 속에서도 척 스미스 목사는 섬김이 무엇인지 온 몸으로 실천하는 것을 쉽게 볼 수 있다.

“나는 집에 옷을 집안 이곳 저곳에 놓아두던 때가 있었습니다. 마침내 아내가 말했습니다. “보세요. 나는 당신의 노예가 되는 것에 동의할 수 없어요! 그 옷들은 당신이 직접 걸어놓으세요! 왜 내가 당신의 옷을 걸어놓아야 합니까?” 글쎄요, 저는 그것에 대해 생각해보았는데 그녀가 옳았습니다. 나는 그녀가 내 옷을 걸어놓을 것을 기대하지 말아야 했습니다. 그것은 제게 매우 중요한 교훈이었습니다. 나는 다스리기 위해 부름 받은 것이 아닙니다. 나는 섬기기 위해 부름 받은 것입니다.”-Distictives

척 스미스 목사의 몸에 배여 있는 겸손과 섬김은 철저하게 하나님의 부르심에 의한 것이다. 그래서 척 스미스 목사는 언제나 주님을 섬긴다는 기쁨으로 모든 일을 행할 수 있다.

“예수님께서 배반당하고 잡히시고 십자가에 못 박하시기 전 제자들과 함께 마지막 만찬을 드시던 밤에 그분은 수건을 허리에 두르셨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돌아다니시면서 제자들의 발을 일일이 씻겨주셨습니다. 그분은 그들에게 물었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을 너희가 아느냐 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요13:12-15) 베드로는 훗날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 오게 하려 하셨느니라”(벧전2:21) “목회”라는 단어는 사실 섬김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종으로 부름 받았습니다. 우리는 먼저 주님을 섬겨야 하고 또한 그분의 자녀들을 섬겨야 합니다. 개인적으로 나는 담배를 피는 사람들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더러운 습관을 가졌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그들은 언제나 냄새가 나며 가는 곳마다 냄새를 풍깁니다. 누가 담배를 피는지 알아보는 것은 매우 쉽습니다. 당신이 해야 할 일은 걸어다녀 보면 그들의 옷에 냄새를 맡을 수 있을 겁니다. 담배를 피는 집으로 들어가면 옷이나 커텐 같은 곳에 냄새가 배여 있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정말 더러운 습관입니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나쁜 것은 아무데나 담배재를 떨어뜨리는 것입니다. 그들은 보통 담배를 끄기 위해 발을 가지고 문질러버림으로써 길가에 쓰레기를 남깁니다. 사람들이 교회에 올 때 많은 경우 그들은 담배를 피는 채로 나타납니다. 그리고 교회에 들어설 때 그들은 담배를 던져서 발로 그것을 끕니다. 누가 담배꽁초를 주어야 합니까? 내가 자랄 때는 어머니로부터 담배든 담배꽁초든 만지지도 말라고 배웠습니다. 나는 담배를 너무 싫어하기 때문에 지금까지도 담배를 만질 때면 더러워진다는 느낌을 피할 수 없습니다. 담배꽁초를 주울 때마다 나는 어릴 적 담배를 혐오했던 어릴 적 생각이 나곤 합니다. 나는 정말 담배를 혐오합니다. 교회 마당을 거닐면서 담배꽁초를 볼 때마다 나는 그것이 마당에 보이는 것이 싫어서 그것을 줍곤 합니다. 그러나 그것들을 주울 때마다 나는 누가 그런 것을 그곳에다 버렸는지 투덜거리곤 합니다. 나는 생각합니다. “더럽고, 냄새나고, 사려깊지 못하고 양식도 없는 사람들일거야!” 그때 주님께서 내 마음에 말씀하셨습니다. 그분은 단순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누구를 섬기고 있느냐?” 나는 대답했습니다. “나는 주님을 섬기고 있지요.” 그런데 그분이 대답하셨습니다. “그러면 더 이상 불평하지 말라.” 쓰라린 마음으로 섬기지 말라는 것입니다. 분노심으로 섬기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만일 내가 담배꽁초를 주우면서 더러운 사람들에 대해 생각하면서 그것을 행하는 것에 대해 화를 내고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좋아요, 주님, 저는 주님의 마당을 깨끗하게 치울 것입니다.” 그럴 때 나는 그것들을 주워서 치우면서 내 안에서 불평하는 마음을 가지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왜냐면 나는 주 예수님을 위해서 그것을 하고 있기 때문이거든요. 나는 다른 어떤 사람들이 인정해주기를 바라서가 아니라 단지 주님을 위해 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골3:17) 목회하는 데 있어서 가져야 할 태도 중에서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우리는 사람들이 불쾌게 여기기 때문에 더욱 주께 하듯이 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그들이 감사하지 않는다는 것을 발견할 것입니다. 우리는 그들은 요구하기만 하고 많은 경우에 있어서 돌아보기에 너무 비참하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만일 “내가 그들을 섬겨야 해”라고 생각한다면 그러한 생각은 항상 당신에게 일어날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당신이 “나는 지금 주님을 섬기고 있어”라고 생각한다면 당신은 그러한 불평하는 마음을 다스릴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의 섬김이 무엇이든 간에 우리는 주님게 하듯이 해야 합니다. 그러면 주님께로부터 당신은 당신의 상급을 얻게 될 것입니다. 사람들의 칭찬을 바라지 마십시오. 사람들이 “오, 감사합니다. 당신은 내게 너무나 소중합니다.”라고 맗는 것을 기대하지 마십시오. 너무나 종종 그러한 것은 발생하지 않습니다. 나는 사람들을 위해서 행하고 행하고 행하지만 더 많이 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들로 하여금 당신을 면박 주고 야단치게 만듭니다. 당신은 주님으로부터 당신의 상급을 받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서 모든 것을 주께 하듯 하는 정신적 태도를 유지할 필요가 있습니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종입니다. 그분은 나의 주인이십니다. 그분은 나의 섬김에 대해 내게 상을 주실 유일하신 분이십니다. 나는 사람들을 섬길 때 그러한 관점을 유지하고 올바른 태도를 마음에 지닐 필요가 있습니다. 나는 주님을 위해 그것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Distictives

이것은 그의 영향력과 그가 목회하는 교회의 규모가 얼마나 엄청난지를 생각하면 참으로 이상할 정도이다. 그가 섬기는 코스타 메사 갈보리 채플은 4만 여명에 육박하는 성도들이 모이고 있다. 이처럼 교회가 커질수록 사무실을 넓히고 사람들에게 지시를 내리고 큰 차를 타고 다니며 목에 힘을 주는 모습은 쉽게 볼 수 있지만 교세가 커지고 영향력이 확대될수록 더욱 낮아지는 목회자는 정말 찾아보기 힘들다. 그러나 척 스미스 목사는 “천국에서 가장 큰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마 18:1~4; 23:1; 막9; 눅9:22) 대형교회의 담임목사로서 이런 말을 한다는 것 자체가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모른다. 또한 가르치는 대로 모범을 보이는 것은 더욱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척 스미스 목사는 그 큰 규모의 교회에서 담대하게 주님처럼 섬기라는 말씀을 선포하고 있으며 또한 그렇게 살고 있다. 그러한 모습을 보면서 갈보리 채플의 교인들은 더욱 교회에 대한 소속감과 자부심을 갖게 된다. 목회자는 섬기는 교회가 대형화되어갈수록 더욱 더 섬기는 모습을 보여주어야 한다. 이에 대해서 래리 테일러는 다음과 같이 목회자들에게 권면하고 있다.

“높이 올라간다는 것은 내려온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교회에서 높은 지위에 올랐다면 하나님 앞에 엎드리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주님의 방법은 세상 것과는 정확히 반대입니다. 교회 안에서 플로 차트(flow-chart)를 본다는 것은 슬픈 일입니다. 플로차트가 꼭 있어야 한다면 거꾸로 올라간다는 것은 봉사해야 할 기회, 즉 봉사해야 할 사람이 더 많아진다는 것입니다. 인간으로 오신 하나님, 창조자이시며 전능하신 주께서는 자신의 수건을 허리에 두르시고 무릎 꿇고 사도들의 발을 씻김으로 종노릇을 하셨습니다. 우리의 주인이신 주님보다 우리가 더 위대합니까? 사역은 봉사를 말하며, 눈을 크게 뜨고 해야 할 일들을 찾아 행하는 일이며, 어떤 일이라도 내가 하기에 하잘 것 없는 일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없다는 뜻입니다. 어떤 일을 해야 한다면 하십시오. 다른 사람에게 시키지 마십시오. 사람을 고용하지 마시고 여러분 자신이 하십시오. 쓰레기가 있다면 집으시고, 전기가 나갔다면 형광등을 바꾸시고, 보모들의 손이 부족하다면 아이들을 돌보십시오. 갈보리채플의 모든 사역자들의 생활은 매우 검소합니다. 일단 사역자들의 생활이 수준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자기가 맡은 성도들의 생활 위에 있다는 것을 의미하게 되므로 그런 사람들은 섬기는 종이 될 수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목사가 되기를 갈망하지만, 정작 자신을 필요로 할 때에는 손을 하나 움직이지 않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또 어떤 이들은 뭔가를 도와 달라고 구체적으로 말할 때에 한하여 기꺼이 응합니다. 이 두 가지 형태의 사람들은 나를 괴롭히는 스타일입니다. 진실한 목사는 (실제적으로) 종이며 매일 자발적으로 사람들을 도와주며 할 일이 없는가 살피며 찾아서 해야 합니다. 들판에 추수할 것은 많은데 일할 자가 없는 것입니다. 위신만을 내세우는 이기적인 목회자는 많으나 일할 일군들, 즉 진실한 종은 거의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더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나의 전 생애를 통해서 볼 때 척 스미스 목사님보다 더 진실한 종을 만난 적이 없었습니다. 한밤중에 새로 지은 빌딩에서 변기를 설치하고, 회의실의 종이를 줍고, 좁은 다락에 올라가 물새는 파이프를 고치며, 주차장에서 사람들의 차에 시동을 걸어주고, 아이들을 돌보며, 항상 다른 사람들을 돕고 또한 그들에게 축복하고 계신 그분을 여러분은 볼 수 있을 겁니다. 왜 척 스미스 목사님은 이러한 일을 하고 있을까요? 그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자녀들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봉사하지 않아도 될 만큼 위대한 사람으로 성장할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교회가 사람들에게 이일 저일, 즉 언제 어느 때라도 아무리 하찮은 일이라도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늘 나라의 가장 큰 자는 모든 사람의 종입니다. 그의 헌신적 사역은 이러한 원리의 중요한 모범이 됩니다. 그는 이에 따른 삶을 살고 있지만, 그것을 남에게 강요하거나 가르치지는 않았습니다.”(아름다운 목양의 샘터, pp.48~54)

척 스미스 목사는 교회의 수 십억 예산을 혼자서 집행하는 권한이 있지만 실제 생활 속에서 섬기는 지도자의 모습을 몸소 실천함으로써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다른 지도자들과 다른 면을 보이고 있다. 모든 직원들과 교인들과 장로들은 하나님이 그를 보내주시고 세우셨다는 것을 의심 없이 받아들인다. 척 스미스 목사의 권위는 성경에 대한 신실함과 섬기는 삶에서 나오는 것이다. 섬김에서 비롯된 영적 권위는 실로 대단하다. 이렇게 섬김을 보여주면서 다른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치는 것은 척 스미스 목사의 장기이다. 그에게서 영향을 받아 또 다른 갈보리채플을 개척하는 많은 목회자들에게서도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그리고 그들은 한결같이 척 스미스 목사의 섬기는 리더십을 강조하고 있다. 섬기는 리더십은 갈보리채플의 중요한 영적 특징이다. 리버사이드 하비스트 크리스챤 펠로우쉽 교회의 담임목사인 그렉 로우리는 척 스미스 목사의 그런 모습을 다음과 같이 진술한다.

“척과 함께 갈보리채플 마당을 지나다 보면 걸음을 멈추고 껌 껍데기를 주어 쓰레기통에 버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또 가다가 여기 저기를 지적하면서 ‘저기 좀 봐 좀 닦아야겠군’ 한다든지 혹은 일하고 있는 사람에게 다가가서 ‘이거 어떻게 하는 거예요?’라고 물어보면서 손수 고치는 모습을 자주 봅니다. 그는 아주 작은 데에도 신경을 씁니다. 구름 속을 헤매면서 고상하고 영적인 것만 생각하는 사람이 아니고 실용적인 것을 생각하는 사람입니다.”(믿음의 모험)

골든 스프링스의 라울 A.리스 목사는 이렇게 척 스미스 목사의 인격을 묘사한다.

“한번은 척 스미스가 결혼식을 주례하려고 가고 있다가 하수도가 막혀 물이 고여 있는 곳 주위에 목사들이 서너 명 둘러 서 있는 것을 보고 발을 멈췄습니다. 그 자리에서 척은 저고리를 벗고 소매를 걷어올린 후 무릎을 꿇고 손을 집어넣어 하수구 속에 막힌 쓰레기들을 모두 꺼냈지요. 그리고는 일어서서 화장실에 가 손을 씻고 나와 소매를 내린 후 저고리를 입고 결혼식장으로 들어갔습니다. 척 스미스는 그런 사람입니다. 종입니다. 몸으로 본보기를 보여주면서 가르칩니다.”(믿음의 모험)

샌디애고의 호라이즌 크리스챤 펠로우쉽의 담임목사인 마이크 매킨토쉬는 이렇게 말한다.

“한번은 제가 보니까 교회 문 앞에 서 있는데 3부, 4부 예배하는 동안 설교하느라 지치고 고단한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도 교회 주차장에 차가 한 대도 없어질 때까지 누군지 큰 문제를 안고 있는 사람 앞에 서서 그 사람 얘기를 참을성 있게 듣고 있는 겁니다. 교회의 스탭으로 그 밑에 5년 동안 있으면서 제가 그를 보고 배운 것은 사람을 보되 중심을 보아야지 옷차림이 어떻다든지, 머리가 길다거나 짧다든지, 몸이 뚱뚱하다거나 그렇지 않다든지, 뭐 얼굴이 잘 생겼다든지 혹은 못 생겼다든지 하는 것을 보면 안되고 또한 내 앞으로 지나치며 만나는 모든 사람을 다 사랑해야 한다는 점입니다.”(믿음의 모험)

코스타 메사의 본 교회 부목사인 오덴 퐁은 이렇게 말한다.

“척은 절대로 자기를 따르는 것을 허용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또한 우리가 어떤 식으로 일을 하는지 엿볼 수 있는 한 단면입니다. 절대로 자기를 따르지 못하게 하는 것이 무언가 척의 대답을 듣고 싶은 질문이 생겨 사무실로 찾아가면 대답 대신 항상 주님을 찾아가라고 합니다.”(믿음의 모험)

마이크 매킨토쉬는 이렇게 말한다.

“척은 언제나 사람이 자랄 수 있는 기회를 주며 실수를 통해 사람이 자라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해 줍니다. 제가 척이 목회하는 것을 보며 배운 또 한 가지는 사람들의 약한 것들을 찾아낼 수 있는 수용능력입니다. 약한 부분을 갖고 있는 사람들에게 기회를 주면서 성령님이 그들의 삶을 바꾸어 놓는 것을 지켜봅니다.”(믿음의 모험)

코스타 메사 본 교회의 부목사인 L.E.로메인 목사는 그의 신앙인격을 이렇게 묘사한다.

“그는 하나님이 일하시는 곳에서 하나님께 방해가 되지 않으려고 애를 씁니다 앞으로 나갔다가 무언가 잘못된 것을 발견하면 마다하지 않고 뒤로 돌아갑니다. 하나님이 그 안에 안 계신다는 것을 알게 되고 일이 잘 안 풀릴 때는 기꺼이 그 일이 실패하도록 내버려둡니다. 라디오가 그랬고, TV 프로그램이 그랬습니다. 그 안에 무언가 안 좋은 게 있었는데 우리는 그대로 인정합니다. 척은 담임목사로서 가능한 한 하나님께 가까이 서서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원하려고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융통성 있고, 개방적이고, 유연하려고 노력합니다.”(믿음의 모험)

성경교사인 척 미슬러는 이렇게 척의 신앙인격을 표현한다.

“척이 가장 크게 기여한 부분은 그 자신도 말했듯이 우리의 방해 없이 하나님께서 하시고자 하는 일을 다 하실 수 있도록 길을 비켜 드리는 일이었습니다. 60년대 말의 저 히피운동인가 무언가만 봐도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움직이시고자 하시는 대로 하나님 방식대로 움직일 수 있도록 공간을 비워드리고, 뭐 하나님은 이런 분이다 혹은 저런 분이다 따위의 인간적인 계획이나 추측 이론들을 주장하려고 하지 않은 결과입니다.”(믿음의 모험)

실제로 이러한 신앙인격이 참 제자훈련을 가능하게 한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실 때 “와 보라”고 하신 것은 공동생활로의 초청이다. 이 부름에 응한 제자들은 예수님이 계신 데로 가서 예수님이 사시는 모습을 보면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확신했다. 그런데 “와 보라”는 요청이 전도집회에 사람들을 데리고 오라는 식으로 사용되는 모습을 보면 참으로 안타깝기만 하다. 사실 제자훈련을 지향하는 목회자는 많지만 주로 교실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대부분이다. 참 제자훈련은 삶의 자리 한 가운데를 활짝 열어놓고 초대할 용기가 없으면 제자훈련을 하지 말아야 한다. 자신의 삶을 개방할 줄 아는 용기가 있는 사람만이 제자훈련에 열매를 맺을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척 스미스 목사는 제자훈련의 모델이라고 할 수 있다. 아주사 퍼시픽 대학의 얼 그랜트 박사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제가 보기에 척은 특별한 제자훈련 교사입니다. 우리들이 흔히 가르치는 그런 유형에 맞지 않고, 그가 이 하비스트 전도집회를 주관하는 사람과 관계하는 모습을 보면 일대일로 개인적 관계를 맺는다기 보다는 좀 멀찍이 떨어져 서 있는 모습인 것 같습니다. 제가 그 사람들과 대화해 보니 제자훈련이란게 바로 척을 관찰하면서 그가 사생활을 어떻게 하고 있는가, 목회는 어떻게 하고, 사람들과는 어떻게 하는가 등을 배워 그대로 따라하는 겁니다.”(믿음의 모험)

이처럼 척 스미스 목사는 가장 가까운 데 있는 사람들에게 큰 영적 영향력을 준다는 점에서 요즘 사람들과 거리를 두고자 하는 권위주의적인 지도자들과는 차별성을 보여준다. 또한 척 스미스 목사는 다른 교회의 목회자들을 초청해서 세미나를 열고서 자신의 목회비결을 전수하지 않는다. 곁에서 직접 보고 배울 수 있도록 기회를 제공할 뿐이다. 듣고 배우는 것보다 보고 배우는 것이 더욱 강력한 것이다. 자신의 삶이 곧 메시지라고 주장할 수 있는 목회자가 과연 몇이나 될까? 척 스미스 목사는 오직 자신의 삶으로 이야기를 하며, 자신이 목양한 교인들이 나가서 열매맺고 개척한 교회를 통해서 말하고 있다. 척 스미스 목사는 ‘담임목사가 이런 일을 해야 하다니’라고 한탄하지도 않는다. 척 스미스 목사는 그와 함께 일하는 직원과 교역자들에게도 권위적으로 대하지 않는다. 그는 같이 일하는 부목사나 스탭진들에게 상당히 많은 자유와 재량권을 주고 있다. 가까운 사람들에게 일방적으로 일을 지시하고 보고 받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의견을 존중해서 무슨 말이든 자유롭게 하도록 해 준다. 그러나 그의 스탭진들은 그에게 좀처럼 따지는 법이 없다. 그들은 척 스미스 목사의 영적 권위를 인정하며 진심으로 존경한다. 그들은 척 스미스 목사가 확신하고 원하는 일들을 찾아서 하려고 한다. 스탭진들은 척 스미스 목사에게 이것저것을 해달라고 요구하기보다는 여호수아가 모세를 보필했듯이 아론과 훌이 모세의 두 팔을 들어 올렸듯이 척 스미스 목사의 심중을 헤아리고 최선을 다해 협력하는 조력자가 되려고 한다. 부목사들이 해야 할 은 척 스미스의 팔이 피곤하여 내려오지 않도록 붙들어주는 일임을 잘 인식하고 있다.

요즘 리더십에 있어서 재정에 관한 투명함을 유지하는 것만큼 절실히 요청되는 것은 아마 없을 것이다. 척 스미스 목사는 돈 관리에 있어서 만큼은 철저하다. 교회의 엄청난 액수에서부터 가정집의 작은 액수에 이르기까지 혼자서 다 관리한다. 이것은 다른 교회에 추천할 만한 것은 아니지만 그가 그렇게 할 수 있었던 배경은 오랫동안 재정문제로 연단 받은 그의 진실성과 철저성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그러면서도 재정에 얽매이지 않고 거대한 비전을 제시하는 데 탁월한 균형감각을 보여준다. 밀러는 척 스미스 목사의 이러한 균형감각(재정과 비전의 관계)을 이렇게 평가하고 있다.

“제가 보기에 척 스미스는 아주 흥미로운 복합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어떤 부분에서는 특히 돈 관리 문제에서는 상당히 보수적이면서도 다른 분야에서는 시야가 넓은 선각자로서 큰 비전들을 제시합니다. 그러면서 동역자들에게 많은 자유를 주어 각자 맡은 바 영역에서 참신한 개혁이 가능하도록 합니다.”(믿음의 모험)

이렇듯 척 스미스 목사는 한 개인 개인이 가지고 있는 고유한 특성을 인정한다. 차이점을 인정하는데 넓은 마음을 보여준다. 척 스미스 목사는 항상 개인이 개인 자신이 되도록 내버려둔다. 획일성을 가지도록 강요하지 않는다. 라울 A. 리스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는 복사판을 싫어합니다. 오리지널한 개성을 믿는데 이게 아주 좋습니다. 누구나 개성을 지켜야 합니다. 어느 사역자이건 간에 누구나 하나님이 따로 따로 기름을 부어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적절한 때에 적절한 장소에 적절한 도시에 적절한 목회에 맞는 한 개인 개인을 골라 기름 부어 주신다고 척이 말한 적이 있는데 그 곳에서 하나님을 필요로 하고 있는 하나님의 백성을 위해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통해 친히 목회를 하는 겁니다.”(믿음의 모험)

마이크 매킨토쉬는 척 스미스에게 들은 말을 이렇게 소개한다.

“목회자들은 종종 자신들의 일을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척은 나에게 나하는 일을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말 것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일은 하나님이 하시는 것이니까 그저 하나님께 마음을 열고만 있으면 하나님이 위대한 역사를 이루어주실 것이라고 말이죠.”(믿음의 모험)

척 스미스의 인격은 다른 갈보리 채플 사역자들에게도 큰 영향을 끼치고 있다. 그의 인격을 흠모하고 그의 사역을 본받고자 하는 사람들이 늘어가고 있다. 아주사 퍼시픽 대학의 브루스 베일로이언 박사는 갈보리채플의 지도자들의 인격을 다음과 같이 평가하고 있다.

“이 사람들은 성실합니다. 자기들에게 해당 안 되는 그 무엇처럼 보이려고 애쓰지도 않고, 솔직하고 정직하며, 잘못을 했을 때 지적 받기를 꺼리지 않는데 한 마디로 성직자들이 가지는 외식이 없습니다. 기독교 대학에서 교편을 잡고 있는 저로서는 이런 외식을 너무 많이 보아와서 솔직히 속이 메스꺼울 정도인데 여기 와서 이 사람들하고 같이 있으면서 격식 없이 웃고 장난치다 보면 아주 신선해집니다. 그러면서 그들 안에서 다른 영혼들을 돕고자 하는 깊은 열정과 그 일을 위해 희생할 준비가 되어 있는 마음 자세들을 보는 것은 매우 고무적인 일이죠.”(믿음의 모험)

척 스미스 목사는 성실성과 겸손을 친히 보여주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그는 목회초기부터 어떻게 목회 했는지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다.

“나는 교회의 일과를 일일이 살펴보면서 누구라도 나를 만나고 싶어하면 꼭 통지해 주도록 교회 간부들에게 지시했으며 비서를 통하여 빠짐없이 각자의 요처에 응하도록 하고 있었다. 주일 예배 후에도 시간이 허락하는 한 누구라도 나를 만나 형식적인 악수만의 인사가 아닌, 개인이나 가정의 무슨 사정이라도 털어놓고 의논하며 같이 기도하는 친교를 유지하도록 했다.”(위대한 추수, p, 27)

척 스미스 목사는 성실하고 근면하다. 그는 한 주간을 매우 바쁘게 움직인다. 척 스미스 목사는 주일날 오전 3부 예배와 저녁예배 이외에 자신의 주간 사역을 이렇게 소개하고 있다.

“갈보리채플은 주마다 평균 이 백 명의 신입 교인을 맞고 있다. 그리고 이 신입 교인들은 네비케이토 교제를 가지고 14주간의 성경공부반을 거치게 된다. 이들은 동시에 주간에 여러 가지 연구반이나 성경 공부반에 참석하여 성경 지식을 쌓는다. 나는 월요일 밤엔 청년들을 지도하고 주중 목요일 밤에는 심층 연구를 한다. 이밖에도 저녁마다 단체별로 성경 공부반, 기도회, 친교를 위한 특수 모임 등에 참가하여 수많은 교인들과 함께 바쁜 나날을 보낸다.”(위대한 추수, p. 28)

(2)균형감각과 포용력

갈보리채플에서 이야기하는 성숙한 인격의 표지는 균형감각과 포용력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성숙함이란 자기만의 색깔을 유지하면서 다른 것을 용납할 줄 아는 넓은 마음이다. 갈보리 채플은 성숙함을 유난히 강조한다. 그것은 서로 차이점이 다르더라도 그리스도의 몸이 분열되어서는 안 된다는 이유이다. 데이빗 학킹 박사는 크리스챤의 성숙도를 이렇게 말한다.

“저에게 있어 크리스챤의 성숙도를 측정할 수 있는 가장 큰 증거는 서로 의견이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사랑할 수 있는 능력입니다. 오늘날 너무 많은 크리스챤들이 천국과 지옥과는 아무 상관도 없는 수많은 문제들을 놓고 서로 싸우고 있습니다. 솔직히 말하면 개인적 선호도와 교리적 특성 때문에 그렇게 싸우는 것인데 척 스미스는 논란의 대상이나 이견이 분분한 관점들을 지혜롭고도 선하게 처리할 수 잇는 능력을 우리 주님의 은혜로 완성할 수 있게 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척은 그런 능력을 갖춘 좋은 모델입니다.”(믿음의 모험)

척 스미스 목사는 다양성을 포용하는 인격이다. 그래서 그의 갈보리채플 역시 다양한 개성의 사람들을 포용할 수 있는 다양성이 큰 매력으로 작용한다. 성장하는 교회의 특성 중에 하나는 이러한 다양성과 개방성이 있다는 점인데 갈보리채플의 다양성은 척 스미스 목사 자신의 인격에서 시작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성장을 원하는 어떤 교회는 일부러 다양한 구성원을 스탭으로 선발하기도 한다. 사도행전의 안디옥 교회가 바로 그런 경우였다. 안디옥 교회는 실로 다양한 구성원들이 지도자로 분포되어 서로 하나됨의 신비를 보여주면서 복음을 전했다. 문화적으로나 사역자들의 개성이 일방적일수록 교회의 사역은 폭이 좁아지게 된다. 다양성은 복음의 능력을 입증해 보여주는 중요한 특성이기 때문에 교회성장을 사모하는 모든 목회자들은 무엇보다 복음의 본질을 추구하되 이러한 다양성과 포용성에 대해 그릇을 넓혀가야 할 필요가 있다. 성숙한 목회자, 성숙한 교회의 특징은 획일성이 아니라 다양성에 있다.

(3)온유와 겸손의 사람

척 스미스 목사를 아는 사람은 한결같이 그의 성품을 온유와 겸손으로 특징 지운다. 그리고 그를 깊은 연민의 사람으로 소개한다. 여기 그를 가장 잘 아는 사람들이 그에 대해서 뭐라고 말하고 있는지 들어보자. 이렇게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는 인격이야말로 정말 참 예수 인격일 것이다.

“척 스미스는 내 친구로서 하나님의 사랑의 산 증인으로 소개할 수 있다. 갈보리 스타일은 한 마디로 표현하려면 우리가 보여주는 사랑으로 우리가 크리스챤임을 아는 말씀이다.”-미슬러(믿음의 모험)

“그는 연민의 마음, 사랑의 마음, 말씀의 마음을 가진 사람인데, 그의 목회의 가장 큰 증거는 그가 말씀을 끝까지 고수하고 말씀에 의존하는 점입니다.”-얼(믿음의 모험)

“목사가 받을 수 있는 최고의 칭찬은 당신은 어쩌면 우리와 꼭 같군요 하는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척 스미스가 바로 그렇습니다.”-데이빗(믿음의 모험)

“그는 온화하고 겸손한데가 있으며 가식이 없다는 것이 눈에 확실히 보입니다. 실질적이고, 사람들에게 부담을 안 주고, 느긋하면서, 사귀기 편하고 얘기하기 쉬우며 전혀 험악하지 않습니다.”-존 맥아더(믿음의 모험)

“그는 기본적으로 조용한 성격이어서 불필요한 말은 안 하고 그 입에서 나오는 말들은 대부분 입을 떠나기 전에 벌써 많은 생각을 거치면서 저울 위에 올라갔던 말들입니다.”-오덴(믿음의 모험)

“제 눈에 그는 섬기는 지도자이고 겸손한 종이며 자기가 누구인지 아직도 알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는 또 자기가 한 일들이 힘으로나 능으로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신으로 된 일들이라는 것을 압니다.”-행크(믿음의 모험)

“그는 참 근사한 사람인데 끝까지 변함이 없고 꾸준한 점을 저는 좋아합니다. 저라면 금방 성질을 내고 말았을 상황에서 참을성 있게 견디어 내는 모습을 본 적이 있는데 옛사람이 다시 살아나기 쉬운 곳에서 참으로 자기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알아 지혜롭게 대처하는 모습이었습니다.”- 댄 스튜어트(믿음의 모험)

“저는 그를 20세기를 살았던 영적 거장 중 한 사람으로 보겠습니다.” - 얼(믿음의 모험)

“척은 이 마지막 때에 하나님께서 부르셔서 그리스도가 20세기판 사도행전의 재현을 위해 예비하셨던 일에 영향을 미치고 그 모델이 되도록 쓰셨던 사람입니다.”-라울(믿음의 모험)

“그는 오늘날까지도 모든 일에서 믿음의 모험을 감행하며, 어떤 일이 모습을 갖추기 전부터라도 모든 것을 볼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는 듯한 사람입니다.”- 오덴(믿음의 모험)

“바울이 에베소서 6자에서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고 했는데 여러 가지 일들을 행한 사람들이 많아도 전쟁터의 포연이 걷히고 났을 때 그들은 서있지 못했습니다. 크게 흉한 일들을 당하거나 해서 쓰러지고 마는데 그런 사람들을 볼 때마다 수 십 년 동안 한번도 흐트러진 적이 없는 척의 신실함과 성실성에 대해서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지금도 내가 갈보리채플에서 만나는 친구들은 그를 초인간으로 보지 않고 그저 하나님의 사람으로 볼뿐이지만 그 기대를 한번도 잃거나 잃을만한 일을 한 적이 없습니다. 그것이 바로 성실성입니다.” - 존 맥아더(믿음의 모험)

“지도자가 갖추어야 할 소양 중 그 분야에 있어서는 척 스미스 목사보다 더 성실한 사람을 본 일이 없습니다.”- 밴 클리브(믿음의 모험)

척 스미스 목사 자신은 갈보리채플의 성공적인 사역에 대해 들려오는 주위의 칭찬에 대해서 어떻게 대답하고 있는가 한번 들어보자.

“저는 다만 구경꾼이 된 기분입니다. 강단 위에 앉아 주일날 예배당이 채워지고 비워지고 채워지고 비워지고 다시 채워지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유리창 밖으로 마당에도 사람들이 꽉 차게 앉는 모습을 보고, 이제 TV가 설치된 체육관에도 사람이 가득 차 있겠지 생각하면, 제가 이 교회 목사라는 생각이 믿어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꼬집어보기도 하고 스스로 자문도 해 보지만 도저히 믿어지지가 않습니다. 그저 구경꾼이 되어서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구경하고 있는 기분입니다.”(믿음의 모험)

3.척 스미스의 교회비전

척 스미스 목사의 교회관은 세상 풍조에도 밀리지 않고 요동하지 않는 든든한 교회를 세우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잘 먹이는 것이다. 사람에게 의존하지 않고 계속 성경의 권위와 성령의 능력을 의존하면서 영혼에 대한 사랑을 계속해 나간다면 아마 변화의 물결 속에서도 계속 서 있을 수 있을 것이다. 척 스미스 목사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모든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치 않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나는 바로 이런 배경에서 출발했습니다. 저는 다시 과거로 되돌아가고 싶지 않습니다. 주님이 나를 데리고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곳, 말씀을 가르쳐서 몸을 튼튼하게 하고 그래서 새로운 교훈의 풍조가 일어난다고 해도 요동할 필요가 없는 그런 교회를 세우는 곳으로 나오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지금 많은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 어떻게 그들이 한 교훈의 풍조를 따르다 다른 것으로 바꾸곤 하는지 한 체험을 추구하다 또 다른 체험을 추구하면서 안정된 지속성이 부족했는지 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언제나 새로운 체험, 설명할 수 없는 새로운 현상, 새로운 성령의 역사를 찾고 있는데 그러다 보니까 항상 성령의 새로운 역사나 새로운 물결을 부르짖으며 추구하며 요동하고 있으면서도 튼튼한 말씀의 배경이 없기 때문에 그것이 성경적인지 아닌지 분별하는 능력이 부족합니다.”(믿음의 모험)

한편 척 스미스 목사는 늘 자기 교회가 아니고 주님의 교회임을 자신에게 주입시키고 있다. 교회를 바라보는 척 스미스 목사의 관점이 바뀌게 된 예화가 있다.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어 예배당을 짓기 위해 큰 공터를 구입했다. 그 공터를 바라볼 때마다 걱정이 태산같이 커져갔다. 걱정이 공포심이 될 지경이었다. 그는 염려하기를 ‘이토록 넓은 땅을 개발하려면 엄청난 돈이 있어야 하는데, 어쩌다가 어리석게 끌려들어 이런 터무니없는 공사를 시작했단 말인가. 좁으면 좁은 대로 참고 견딜 것이지 빚도 다 갚았겠다, 은행에 돈도 다소 여유 있게 있었겠다...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겠는가?’ 이렇게 답답한 심정에서 한숨을 쉬며 자책하고 있을 때 주님의 음성이 그에게 들려왔다. “누구의 교회냐?” 그 말씀에 척 스미스는 큰 소리로 “물론, 주님의 교회지요” “그럼, 무엇 때문에 파산할까 걱정하느냐?” 이 순간 척 스미스의 마음의 짐은 벗겨졌다. 홀가분해졌다. 금방이라도 미칠 것만 같았던 걱정거리가 일시에 말끔히 걷히게 되었다. 재정 문제는 그의 책임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 책임은 하나님의 것이었다. 이 순간 척 스미스 목사는 그의 생애에서 배워야 할 가장 중요한 교훈을 한 가지 배우게 되었다.

“그래, 교회도 내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교회다. 애초부터 일도 하나님이 시작하셨다. 우리가 수용할 수도 없는 그 많은 사람들을 교회로 끌어온 것도 하나님이셨지 않는가?”(위대한 추수, p. 26)

4.척 스미스의 사역자관

갈보리채플에서 사역자는 누구인가? 어떻게 갈보리채플의 사역자가 될 수 있는가? 그리고 사역자의 대우는 어떠한가? 이것은 모든 교회마다 약간씩 다른데 행크는 갈보리채플 운동이 본질적으로 믿는 모든 자가 사역자라는 관점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갈보리채플 운동에 대해서 제가 특히 좋아하는 점들 중 하나는 모든 믿는 자들 개개인이 제사장, 곧 성직자라는 개념에 참된 의미를 부여해주는 운동이라는 겁니다. 갈보리채플 목회자들 중에는 학교에서 학위를 딴 사람들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구체적으로 목회에 부르신 종들이 아주 많습니다. 하나님께서 부르셨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하면 하나님께서 정식 목회자로 세우시려고 부르셨을 때는 이미 목회를 하고 있는 중이었다는 사실을 확인하면 됩니다. 반대로 다른 교회들은 여러 사람들을 망치고 있다고 봅니다. 대게는 어떤 사람을 보고 이 사람이 부름을 받았다는 생각이 들면 이제 그 사람이 목사가 될 수 있도록 신학교로 보냅니다. 신학교에 갔다 오면 그 사람의 사명감은 꽁꽁 얼어붙어 버리기 일쑤입니다. 그 사람이 일찍이 보여준 그 뜨거움은 사라져버린 이후입니다. 즉, 믿는 자들은 모두 제사장 직분을 가졌다는 사실입니다. 갈보리채플 목사들은 대부분 일선에서 야전 막사 생활을 하던 보병 출신으로서 전도의 실제 사역을 하던 사람들이었던 고로 목회실전에 강하다는 겁니다.”(믿음의 모험)

갈보리 채플은 성경대학을 운영하고 있지만 신학교가 아니라 목회현장에서 가장 중요한 것을 배운다고 가르친다. 라울 A. 리스는 갈보리채플의 사역자가 되기 위해서 교육보다는 사역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저는 목사가 되기 위해 따로 교육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사역 자체가 교육이므로 사역을 통해 살아있는 목회교육을 받을 수 있다고 봅니다. 신학교의 문제는 무엇인고 하니 지식만 배우고 경험을 쌓을 수 없다는 점입니다. 그건 참 큰 문제입니다. 자, 여기 졸업을 앞둔 신학생이 있는데 나가서 교회를 개척해야 합니다. 그런데 교회개척에 대해서도 어떻게 해야 목회자가 되어야 하는 지에 대해서도 아는 것이 전혀 없습니다.”(믿음의 모험)

갈보리채플 운동이 300여 이상의 큰 교회를 개척할 수 있게 된 데는 사역자에 대한 이러한 유연한 개념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수천 명 혹은 만 명 이상 되는 큰 교회를 이끄는 갈보리채플의 목사들은 특별한 학위나 목회교육을 받은 적이 없다. 그들은 현장 속에서 훈련을 받았다. 실제 생활 속에서 목회훈련 받았기 때문에 메시지가 실제적이고 성경적이고 적절할 수 있었던 것이다.

갈보리채플의 목회자들의 대우의 수준은 척 스미스 목사 자신을 포함하여 상당히 청민하며 또한 검소한 편이다. 담임목사를 비롯된 모든 교역자들은 청빈을 몸소 실천해야 한다는 것이다. 척 스미스 목사는 이렇게 말한다.

“교직원의 봉급은 일반 기준을 하회한다. 나에게 지워진 우리 교단의 수천만 불 거액을 감사하는 동안, 우리 가정 생활비가 검소의 한계선을 넘지 않도록 절제하고 있다. 나는 하나님 앞에서 이 돈에 대한 책임이 있는데, 이는 내 돈 혹은 우리 돈이 아니고 하나님의 돈이기 때문이다. 나는 단지 관리인에 불과하다. 그래서 이 일을 결코 소홀히 해서는 안 되는 중대한 일이라고 믿는다. 왜냐하면 외부 인사들은 항상 우리를 주시하고 있으며 우리는 우리의 결백성을 증거 할 책임이 있기 때문이다. 나는 언제나 크리스챤의 간판을 내걸고 궁궐 같은 저택에 살며 하나님의 돈을 가지고 동에서 서로 이리저리 누비고 다니는, 그렇게 호탕을 일삼는 소위 미디어 저명 인사들을 볼 때마다 마음이 편하지가 않다. 강압적인 모금 공세에 호응하여 바쳐진 돈, 그러나 이 돈은 대체로 순전하여 남을 의심치 않고 성심 어린 손길로 하나님 앞에 바쳐진 돈이 아닌가? 개인숭배도 위험하지만, 재정의 낭비와 부정직은 더욱 위험한 일이다. 이런 일로 인하여 대중 앞에 안 좋게 비쳐지고 급기야는 크리스챤도 별로 다를 게 없구나 하고 믿는 데로부터 그릇되게 부각된 크리스챤의 이미지, 이것은 비극이다.”(위대한 추수, p.29,30)

갈보리채플은 세상보다 더 나은 도덕적 기준을 제시할 수 있음을 확신한다. 이러한 교회의 도덕적 자신감은 목회자로 부름 받은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정확히 아는 것에서 나오는 것임이 분명하다. 또한 척 스미스 목사는 특히 사역자들에 대해 매우 강한 목회윤리를 강조하고 있다. 래리 테일러 목사는 갈보리채플의 목회자관을 이렇게 소개하면서 다른 목회자들을 권면 하고 있다.

“하나님은 목회보다는 목회자에 더 관심을 갖고 계십니다. 사역에 있어서 하나님이 당신을 택하신 것은 당신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전문성이나 기술이 필요해서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원하신다면 하나님의 사역을 위해 돌멩이도 쓸 수 있으니까요. 하나님은 우리를 필요로 하지 않으나 우리를 원하고 계십니다. 우리와 깊고 인간적이며 친밀하고 계속적인 교제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의 마음을 원하지 봉사를 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의 예수님과의 개인적인 관계는 매우 중요합니다. 기도와 말씀으로 시간을 보내십시오. 설교를 위해 공부하는 것이 아닌 하나님을 알기 위해 연구하십시오.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그에게 헌신하는 것보다 더 중요합니다.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여러분이 존재하는 이유이며 십자가에서 귀하신 피를 흘려 예수님께서 여러분을 구원하신 것입니다. 척 스미스 목사님은 ‘기독교는 홍역과 같이 스스로 퍼져나가게 해야 한다’고 말하곤 했습니다. 여러분은 자신보다 성도들을 예수님께 더 가까이 데려 갈 수는 없습니다. 또한 당신이 소유하지 못한 것을 그들에게 나눠 줄 수도 없습니다. 기도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말씀의 사람이 되십시오. 에녹과 같이 예수님과 함께 걷는 사람이 되십시오. 다윗과 같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가 되십시오. 예수님은 우리를 좀더 가까이 이끄시며 사람의 마음 속 깊숙한 곳으로 인도하십니다. 예수님은 여러분 마음속에 임재하고 계십니다.”(아름다운 목양의 샘터, pp.137~143)

이 청빈의 도를 세상에 보여주는 목회자들은 과연 몇이나 될까? 이 청빈의 도를 담대하게 선포하고 가르치는 대형교회의 목회자들은 몇이나 있을까?

5. 척 스미스의 미래관

그러면 이제 척 스미스 목사는 다가올 미래를 어떻게 예견하고 있으며 어떻게 대처해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는가? 척 스미스는 현재에 안주하려는 위험을 경고하면서 미래를 대처해야 함을 역설한다.

“모든 유행과 풍조가 그렇듯이 히피문화도 지나가 버렸습니다. 그런데도 계속해서 그 히피운동을 유지하려고 했다면 여기에 초막 셋을 지어 이 일을 기념하고 여기 살면서 더 이상 아무 데도 가지 말자고 하는 생각 속에 갇히어 영원히 길을 잃어버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히피들은 변해서 여피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이제 그들의 자녀를 돌보아야 합니다. 오늘날 이 아이들은 어떤 고민을 하고 있습니까? 요즈음은 어떤 것들이 문제가 되고 있습니까? 우리들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와 우리가 돌보아야 하는 저 사람들에게 맞추어 실생활과 관련지을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그 옛날 한 때 사람들에게 공감을 주었던 스타일을 어떤 예배형식이나 의식의 틀에 집어넣어 보존하려고 해서는 안됩니다.”(믿음의 모험)

아주사 퍼시픽 대학의 얼 그랜트 박사는 이렇게 갈보리채플의 미래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갈보리채플이 직면하고 있는 위기 중 하나는 이제 이 운동이 제도화하여 한 교단으로 정착할 위험성이 많다는 것입니다. 제가 가르치면서 연구해 보니 보통 제 3 세대에 가면 어떤 새롭게 시작한 운동이든 제도화되는 경향이 있는데 벌써 갈보리채플은 제 2 세대를 맞았고 곧 제 3 세대가 나올 겁니다. 이 시점에서 갈보리채플이 해야 할 일은 다시 새롭게 하여 다시 새로워지는 형태를 갖추어서, 제도화로 빠져드는 것을 막아야 합니다.”(믿음의 모험)

척 스미스 목사 역시 옛날에 아주 효과가 있었던 방식이 미래에도 계속 효과를 본다고 믿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지금 우리는 이만큼 이루어놓았지 않는가 하면서 업적을 논하고 자화자찬하면 미래는 끝이라는 것이다. 그러면 더 이상 하나님이 새롭게 인도하시지 않는다는 것이다. 항상 겸손한 마음으로 미래에 더 크게 쓰임 받기 위해 준비해야 한다는 것이다. 산 호세의 갈보리채플 커뮤너티의 담임목사인 단 맥클루어는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 우리는 아직도 시작도 못한 셈입니다. 끝 날려면 아직 멀었어요 라는 마음을 가질 수만 있으면 계속 앞으로 나갈 수 있지만 그렇지 않으면 한 때 왔다가 사라져버린 교회사의 한 점으로 남을 뿐입니다.”(믿음의 모험)

척 스미스 목사는 목회성공의 척도를 외적인 기준에 의해 평가하기 시작하거나 그런 기준에 의해 추구하기 시작하면 목회는 더 이상 발전이 없고 끝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척 스미스 목사 자신은 차, 옷, 건물, 교인 수 등 세상적인 척도로 하나님의 성공을 평가하지 않을까 조심하고 있다. 그리고 갈보리채플은 계속해서 기도생활과 말씀공부라는 준비과정을 통해서 미래에도 계속 쓰임 받을 수 있는 대가를 지불할 각오를 하고 있다. 목회경륜이 짧은 사람들일수록 쉽게 교만해지기 쉬운데 즉,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사용하시는 것을 보고 자기들이 잘나서, 자기들에게 공로를 돌리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기 때문에 목회수명이 단명 한다고 보고 있다. 이에 대해 척 스미스 목사 자신은 이렇게 위험성을 경고하고 있다.

“사단이 공격하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우선 매력적인 여자를 동원해서 사단은 많은 목사들을 파괴했습니다. 돈과 돈 문제에 얽혀드는 것도 사단이 많은 목회자들과 목회를 망쳐놓은 큰 무기 중 하나입니다. 그 다음에는 영광이 있습니다. 목회가 올라가니까 목회회자도 덩달아 따라 올라가서 자기가 뭐라도 된 것처럼 생각하고 사람들이 ‘야, 정말 목사님 굉장하군요. 교회도 엄청나군요.’라고 추켜 올리면 그 소리에 빠져서 ‘내가 정말 성공했구나. 이젠 해 냈어’ 하면서 모두 주님이 해 놓으신 것이라는 사실을 잊어버리게 됩니다. 내게서 나오는 것 중 조금이라도 가치가 있는 것은 다 주께 받은 것인데도 말입니다.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뇨 네가 받았은즉 어찌하여 받지 아니한 것 같이 자랑하느뇨’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항상 내가 방금 한 설교도 다 성령께서 주신 영감으로 해서 가능했던 것인데 그 설교가 만약 누구에겐가 감동을 주었다면 당연히 영광 받으실 분은 하나님이시고 나는 그저 그릇으로 쓰임 받았던 것뿐입니다. 하나님이 내 마음에 심어주시고 하나님이 영감 주셔서 쓰게 된 설교니 영광은 물론 하나님이 홀로 받으셔야지 제가 무슨 찬사나 영광을 받을 수 있습니까? 사람들이 내게 칭찬을 하는 것도 그냥 내버려 둘 수가 없고 그저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르치고 있어야 하겠지요”(믿음의 모험)

라울 A. 리스 목사는 척 스미스 목사의 목회철학은 계속적으로 공유해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다.

“오늘 이날까지도 저는 제 자신은 물론이고 전 스탭진들에게 척 스미스의 테잎을 듣게 하여 한 마음, 한 목회철학을 가지도록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를 통하여 우리 목회에 축복을 주셨습니다.”(믿음의 모험)

그리고 계속해서 기도의 중요성을 언급한다.

“무슨 프로그램 따위나 신학대학원 교육보다 무릎을 꿇고 정말로 하나님께서 당신의 삶 속에 원하고 계신 것이 무엇인지를 물어본 다음 모든 일에 있어서 하나님을 의지해보십시오.”(믿음의 모험)

더 필드는 갈보리채플 운동이 계속적으로 성공하기 위해서는 더 많은 기도를 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저는 젊은 목회자 모두에게 기도에 더 많은 바칠 것을 권하겠습니다. 이제 주의 종으로 보낸 지난 63년여를 돌아다보니 한 가지 바꾸고 싶은 것이 있다면 기도에 더 많은 시간을 보냈더라면 하는 생각입니다. 우선 내 자신의 영혼 위에 하나님의 축복과 기름부음을 받고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은 다음 성령의 권능 속에서 말씀을 전하는 일에 있어서 주님과 직접 주고 받는 이 기도라고 하는 영적 교류를 대신할 만한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믿음의 모험)

척 스미스 목사는 갈보리채플의 미래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설교한 적이 있다.

“하나님께서는 저에게 하나님이 함께 해주시는 것이야말로 그 무엇보다 소중한 것임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래서 저도 모세가 그랬던 것처럼 하나님께서 함께 가주시지 않는 곳에 가려고 하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지를 잘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 없이 앞으로 나아가기란 있을 수 없는 일이지요. 그러나 저는 제가 죽고 난 후를 염려하고 잇습니다. 제가 죽고 난 후 어리석은 사람들이 나타나 저의 기념물을 세울지도 모릅니다. 그리고는 ‘척 스미스 목사는 이리 했다. 척 스미스 목사는 저리 말했다. 척 스미스 목사 살아있을 때는 이렇게 했었다.’ 등등의 말을 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변화무쌍한 분입니다. 하나님은 한 가지 방법만 따르시지 않습니다. 때로는 반석으로 인도하신 후 그 반석을 ‘치라’고 하시는가 하면, 다음 번에는 그 반석에게 ‘말로 명하라’고 하시는 분입니다. ‘아니, 아니야! 반석은 꼭 치는 것이 우리 식이야! 척 스미스 목사는 늘 반석을 쳤거든! 그러니 우리도 반석을 쳐야지!’ 절대로 그래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은 결코 한 가지 방법에만 자신을 국한시키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러니 우리도 한 가지 방식에만 묶여서는 안됩니다. ‘옛날 히피들이 우글대던 70년대에는 이 방법이 꽤나 효력이 있었지. 그러니 이제 또 다시 그 방법으로 해야 돼!’라고 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과거의 한 시점이나 그 시점의 방법에 얽매이지 말고 성령의 인도에 따를 수 있도록 모든 가능성에 대해 마음 문을 열어 놓읍시다. 여기까지 온 것도 모두가 하나님께서 함께 해주셨기 때문이었음을 인정하고, 앞으로 더 발전할 수 있는 것도 오로지 하나님께서 함께 해주시는 이유 한 가지 뿐이라는 것을 잊지 맙시다. ‘주께서 친히 가지 아니하시려거든 우리를 이곳에서 올려 보내지 마옵소서.’ 하나님께서 친히 함께 해주셔야만 교회가 살아서 숨쉬며 그 능력을 발휘할 수 있고, 하나님께서 함께 해주셔야만 교회가 이 사회 속에서 주님의 증인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이시여, 하나님 없이 그 일을 하고자 하는 죄를 짓지 않도록 우리를 지켜 주시옵소서. 하나님께서 함께 해주시는 은혜가 우리에게는 늘 필요합니다. 그것이 지금 우리에게 필수적인 것처럼, 앞으로도 영원히 필요 불가결한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동행해 주심을 언제나 느낄 수 있게 해주시며, 하나님이 주신 저 땅을 하나님과 함께 하나씩 정복해 나갈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친히 우리와 함께 그곳으로 올라가 주시옵소서.”(기도와 치유, pp.40,41)

지금까지 우리는 (1) 목회자로서의 척 스미스 (2) 설교자로서의 척 스미스 (3)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척 스미스를 조명해보았다. 이 순서는 하나님의 사역자로서 반드시 훈련받아야 하고 정립해야 하는 중대한 주제들이다. 목회자로서 하나님의 부르심의 소망 위에 든든히 서서 성경적인 목회철학을 견실히 소유해야 하며, 성령과 동행하면서 그것을 의사소통할 수 있는 능력을 배양해야 하며, 섬김을 받으려 오신 것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오신 그리스도를 닮아 가는 인격으로 나아가야 한다. 척 스미스 목사는 그 모든 과정을 삶과 사역과 섬기는 교회를 통해 훌륭하게 보여주고 있다. 세미나를 통해 거창하게 떠들지 않는대신 “너희가 나의 추천서”라고 말했던 바울처럼 말이 아니라 열매로 자신의 목회비결을 말하고 있다. 본인은 비록 충분한 자료를 확보하지 못했지만 그의 목회와 교회에 대해 연구하면서 그가 현대교회사에 끼친 영향력은 정말 과소평가 되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제 우리는 한 개인을 깊이 탐구하면서 조심스럽게 결론을 내려야 할 시점에 도달했다. 우리는 개인을 영웅시하는 오류에 빠지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한 개인을 이토록 준비시키시고 영광스럽게 들어 사용하신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찬양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그를 통해 이루신 일들에 대한 공로를 철저히 하나님께만 돌려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를 통해 중요한 교훈으로 우리를 깨우쳐 주심으로 방황하지 않고 믿음의 경주를 경주할 수 있도록 우리에게 복 주신 하나님께 경배해야 할 것이다. 왜냐면 하나님은 또 다른 한 사람을 찾고 계시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관점에서 다시 그와 갈보리채플의 과거와 미래를 생각해보면서 다시 한번 지혜를 얻고자 한다.

III. 척 스미스 설교와 갈보리채플운동에 대한 평가

1.긍정적 평가

현대 미국 교회사뿐만 아니라 전세계 교회에 있어서 중요한 발자취를 남겼다고 볼 수 있다. 척 스미스의 갈보리채플이 남긴 중요한 영향력을 다음과 같이 요약해볼 수 있다.

첫째, 성경전체를 강해하는 것을 통해서 말씀회복을 통한 하나님과의 관계회복을 추구한 점에서 많은 교회들에게 중요한 영향을 주었다.

둘째, 특별히 음악에 대한 애정이야말로 갈보리채플이 전세계교회들에 끼친 큰 영향이라고 할 수 있다. 은혜 받은 청년들이 스스로 작사 작곡한 노래를 교회에서 부르기 시작함으로써 새로운 형태의 음악문화가 확산되기 시작하였다.

셋째, 척 스미스 목사는 비전의 중요성을 일깨워주었다. 당시 방황하던 히피 청년들에게 꿈을 심어주고자 했으며 그들에게 어떻게 복음을 심어주어야 할지 많은 교회들이 난감해 하던 차에 척 스미스 목사의 갈보리채플은 비전목회의 모델을 보여주었다. 즉, 히피문화를 복음으로 극복한 사례를 보여줌으로써 교회가 어떻게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는 지에 대한 가능성을 제시하였다. 갈보리 채플이 회심한 히피들을 위한 피난처로 마련한 ‘메시아의 집’은 그들을 그리스도의 제자로 훈련하여 사역자로 배출하는 온실이 되었다는 사실은 오늘날 교회가 어떻게 다원화된 사회문화를 극복하고 복음의 능력을 잃어버린 영혼들에게 제시해야 할 지 좋은 지침을 제공해준다고 보겠다. 즉, 사랑과 공동체 훈련만이 이 시대의 젊은이들을 수용할 수 있는 유일한 그릇이다.

넷째, 갈보리채플이 얼마든지 정치적이고도 교단적인 체계를 갖출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정치적 틀을 잡는데는 별로 신경을 안 쓰고 계속 본질만 추구했다는 점에서 여타 성장하는 교회들에게 모범이 된다.

다섯째, 갈보리채플은 목회자 개인이 독자적으로 목회하기보다는 분명한 원칙, 목회철학, 방향, 비전을 공유함으로써 다른 수많은 갈보리채플을 성공시킴으로써 제자 삼는 목회의 참 표본을 제공해준다.

여섯째, 척 스미스 목사를 비롯한 모든 갈보리채플은 오직 믿음으로 목회 하는 모범을 보여주었다.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이 공급하신다는 신념 속에서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만을 신뢰했다는 점은 믿음선교의 허드슨 테일러, 믿음구제의 죠지 뮬러와 같은 반열로서 믿음목회의 길을 제시했다.

일곱째, 갈보리채플은 성경을 전체적으로 가르치면서 자연스럽게 균형 있는 신학, 균형 잡힌 영성, 균형 잡힌 교리를 가르치게 되었다. 목회와 설교와 인격이 균형 잡힌 목회자를 찾는 것은 매우 힘들다. 그러나 척 스미스 목사는 그것을 보여주고 있다. 그의 목회는 건강함과 성숙함의 의미를 잘 가르쳐주고 있다. 건강한 교회가 성숙하지 못할 수 있고, 성숙한 교회가 건강하지 못할 수 있다. 건강함은 철저히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에 의존함을, 성숙함이란 사랑과 포용력을 의미한다. 특히 척 스미스 목사는 그리스도의 몸을 사랑하는 것이 강조된다. 그래서 어느 한쪽으로 치우쳐서 분열을 조장하는 위험을 잘 극복하는 길을 제시해주었다. 그리고 자신이 교회를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 안에 소속되어 있는 것에 대해 감사하고 있다. 이와 같이 균형감각과 중용이 영적인 삶과 사역에 있어서 얼마나 중요하며 어떻게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을 수 있는가를 보여주었다.

여덟째, 갈보리채플은 목회자의 사명이 정확히 무엇인가를 보여주었다. 목회자의 사명은 전도하라고 가르치는 것이 아니다. 헌금하라고 가르치는 것이 아니다. 오직 풍성하게 하나님 말씀으로 먹이는 것이다. 은혜의 본질을 가르치는 것이다. 그들을 전도하라고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전도하게끔 세워주고 말씀으로 준비시켜 주는 일이다. 그의 목회철학은 다분히 목양이 중심이다. 말씀으로 교인들을 먹여 그들을 온전하게 하며 성숙하게 하여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이르도록 돕는 것이다.

아홉째, 갈보리채플은 단순히 교회성장의 대표적인 사례의 차원을 넘어서서 사회정신구조를 갱신했다는 점에서 진정한 의미의 “운동”이라고 평가될 만 하다. 오늘날 많은 교회들이 개 교회 성장에만 치우치고 만족하는 것을 볼 때에 갈보리채플 운동(Calvary Chapel Movement)은 중요한 도전을 준다.

열 번째, 갈보리채플은 목회철학과 가치관과 목회방식이 다른 사역자들에게 전수할 수 있다는 점에서 새로운 차원에서 평가될 만 하다. 척 스미스 목사는 개인의 영향으로 300여 갈보리채플을 개척시키고 성공시킨 것이 아니다. 분명한 목회철학과 방향 그리고 사역방법들을 공유하는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척 스미스의 비전과 가치관을 이해하고 그것을 열심히 모방하고자 함으로써 그를 능가하는 목회사역을 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즉, 참된 스승은 자신을 능가하는 제자들을 얼마나 많이 배출 했느냐로 알 수 있는데 갈보리채플은 목회비전을 전수할 수 있다는 점이 가장 큰 장점으로 꼽힌다. 자신을 닮은 목회자를 이렇게 많이 양성할 수 있다는 점에서 척 스미스의 위치와 영향을 웨슬레에 비교하면 너무 지나친 칭찬인가? 그러나 척 스미스는 당장 교단을 형성할 수 있지만 그것 역시 그리스도의 몸을 분열시키지 않는 가 매우 조심스럽게 여기며 교단화하는 것을 꺼리고 있다. 분명, 웨슬레 이후 척 스미스만큼 제자목회에 성공한 목회자를 찾아 볼 수 있을까 싶다. 진실로 척 스미스를 닮고 싶어하는 목회자와 교회가 많다. 실제로 척 스미스는 다른 사람이 자기보다 더 크게 성공하기를 진심으로 바라고 있다. 척 스미스 목사 자신은 갈보리채플에서의 40여년 간 목회를 다음과 같이 요약하고 있다.

“지난 사십 년간 목회생활을 통해 주님이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교훈은 목회 철학과 그 방향, 효과적이고 능력 있는 목회방법을 제 삼자에게 전수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우리는 이것의 가치와 중요성을 확신한다. 오직 주님께 순종할 때, 그들도 이 땅위에 능력 있는 강한 교회를 세울 수 있다는 것이다.”(위대한 추수,p.9)

2.발전적 제언

갈보리채플 운동을 통해 도전 받고 척 스미스 목사의 목회원리를 목회에 적용하려면 다음과 같은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첫째, 갈보리채플 운동을 이해하는데 있어 사람이 무엇을 했기 때문에 이만큼 성공했다는 식으로 보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의 주권과 은혜를 인정하는 데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하나님 나라의 역사를 묵상하는 데 있어 사람을 그럴 듯하게 포장하는 우를 범해서는 안될 것이다. 이것은 갈보리채플에서도 조심하고 있는 바이다. 갈보리채플운동을 연구하여 자신의 목회에 적용하고자 하는 모든 사역자들은 참 주인공 되신 하나님의 역사를 과소평가하고 사람의 행위의 틀에 하나님의 역사를 가두어두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각각의 개인과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부르심의 소망을 발견하고 거기서 출발해야 한다. 단지 모방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둘째, 갈보리채플 운동이 잘못 전수될 때 한쪽으로 치우치는 이른바 균형감각의 상실로 이어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차가운 지식전달의 강단으로 치우칠 위험도 있고, 또 동시에 빈야드 운동과 같이 말씀보다 표적과 체험에 목회 강조점을 두는 은사주의식으로 치우칠 수 있다.

셋째, 갈보리채플 운동이 말씀운동이 중심이지만 동시에 기도에 대한 강조점이 약하지 않다 보여진다. 한국의 명성교회와 같이 보다 집중적이고 강력한 기도운동과 갈보리채플 운동이 가지고 있는 말씀을 통한 성령운동이 어떻게 서로 조화될 수 있는가를 연구해보는 것이 앞으로 사역을 앞둔 모든 목회자들이 연구해야 할 과제일 것이다.

넷째, 갈보리채플 운동을 교묘하게 준비된 프로그램을 통해서 모방하려면 큰 오산이다. 하나님은 항상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으신다. 아무리 좋은 프로그램을 계획하고 준비했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이 함께 하지 않으시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모든 운동은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으로부터 시작하지 않는 모든 인본주의적인 프로그램은 반드시 실패하고 만다.

다섯째, 갈보리채플 운동의 영적 구심점은 척 스미스 목사 자신이다. 그는 다른 모든 갈보리채플 사역자들에게 정신적 지주가 된다. 한 사람의 개인적 영감과 영향력에 모든 것이 달려 있지 않도록 하는 제도적 배려가 매우 중요하다. 갈보리채플은 목사의 영적 건강에 모든 것이 달려 있다. 따라서 목사가 부패할 경우 즉각적으로 정리할 수 있는 자기정화시스템이 필요하다. 아무리 좋은 성령사역 말씀사역을 하더라도 개인의 자질에 너무 많이 의존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 필요하다. 못이 삭으면 그 못에 걸린 모든 것이 떨어지기 마련이다. 척 스미스 목사 자신도 각각의 갈보리채플이 교단으로 형성되지 않고 계속적으로 각자 성령의 인도하심에만 전적으로 의존하도록 노력하고 있다. 각 교회는 서로 독립적이고 서로 아무 관련이 없도록 무척 애를 쓰고 있다고 한다. 정치적인 교단구조로 각 교회를 유지하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각자 성령의 인도에 의존하도록 내어 맡기는 것--이것은 아직도 갈보리채플이 영적 건강을 유지하는 중요한 원동력이 되고 있다. 앞으로 하나님의 큰 사역을 감당할 모든 목회자들은 이 점을 유의해야 한다. 개인의 영향력에 조직의 생명력이 달려 있지 않도록 계속적으로 유연하고 생명력 있고 자생력 있는 조직으로 만들어 가는 노력이 필요하다.

여섯째, 갈보리채플 운동이 하나의 분파운동이 되어서는 안 된다. 즉, 갈보리채플의 목회철학만을 절대시하고 다른 교회를 평가절하 하는 우를 범해서는 안 된다. 오덴 목사는 다음과 같이 이 점을 강조하고 있다.

“우리가 추구하는 것은 어떤 모임을 갈보리채플 코스타 메사의 복사판이 되도록 만들어 나가는 것이라기보다는 이미 성령의 감동과 인도로 인해 같은 형태의 모임으로 다듬어지고 같은 비전을 가진 사람들이 모이는 교회가 이미 된 형제교회들과 계속 교제를 나누려고 하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실제로 우리 마음과 우리 삶 속에 역사 하시는데 특히 하나님께서 함께 모이게 해 주실 때 마음과 뜻이 같은 사람들은 어떻게 해서든지 서로를 찾을 수 있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절대로 어떤 방법이나 형태로든 우리 목회 스타일이나 교회 유형을 회원가입제로 확산해 나가고 있는 것이 아니라, 갈보리채플 자체가 유기체이므로 항상 마음과 뜻을 같이 하고 있는 다른 그리스도의 몸 또는 지체들이나 사람들을 받아들이고 있는 겁니다.”(믿음의 모험)

IV. 한국교회의 영적 갱신을 위해 목회자들에게 드리는 10가지 제언

1. 각종 행사위주의 교회운영에서 탈피, 성경으로 돌아가는 말씀운동을 일으키자. 목회자들은 개인성경연구에 있어 교인들에게 모범을 보여야 하며, 이를 위해 자신이 어떻게 매일 규칙적으로 성경을 연구하고 있는지 교인들에게 공개할 필요가 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목회자는 교인들이 매일 규칙적으로 성경을 읽을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온 교회가 성경 전체를 통독하도록 돕는 프로그램을 개발해야 한다.

2. 성경에서 교회의 정체성을 회복하자. 이를 위해 목회자는 교회의 교회됨과 볼질에 대해 분명히 교인들에게 가르칠 수 있어야 하며, 건전하고 성숙한 교회관을 교인들에게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매년 정기적으로(연초가 좋을 것이라 생각된다) 교회론, 교회의 사명과 비전 등에 대해 사경회를 가질 필요가 있고, 담임목사가 직접 교인들에게 가르쳐야 한다.

3. 건전한 성령운동의 방향을 모색하자. 목회자는 교회가 ‘기도하는 집’이 되도록 힘써야 하며, 목회자 자신이 중직자들과 함께 기도회를 직접 인도해야 하며, 기도회에서 일꾼을 찾아야 한다. 목회자가 기도하는 그룹을 인도할 때 온 교회가 기도하는 일에 동참하게 될 것이다.

4. 권위주의적 리더십의 모델이 아닌 청빈과 섬김의 리더십 모델을 제시하자. 교인들이 보다 친근하게 느끼고 편하게 다가올 수 있도록 담장을 낮추어야 한다. 사역으로 부름 받았다는 것은 곧 섬김으로 부름 받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것처럼 목회자는 교인들을 섬기고 있다는 ‘상징적인 행동’을 할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목회자가 직접 교회 대청소를 하면서 쓰레기를 줍는 것은 어떨까?

5. 모든 비본질적인 거품을 제거하는 고통을 감수하는 대수술을 하자. 교회 내에 모든 조직을 점검하고 그러한 조직이 성경적인 원칙에 따라 움직이고 있는지 도와주어야 한다. 예를 들어, 당회는 교인들에게 신앙의 모범을 보이면서 온 교회의 연합과 사업을 위해 일하는 것이지, 교인들을 간섭하거나 목회자를 고용 또는 해고하는 모임이 아니다.

6. 개척목회와 제자목회의 참된 방향을 제시하자. 교회는 계속 닮은꼴을 생산할 수 있도록 제2, 제3의 교회개척을 꿈꾸며 일꾼을 키워야 한다. 교회 안에서 담임목회자가 능력있는 목회자 양성이라는 제자훈련에 본을 보여야 한다. 여기서 말하는 제자훈련이란 교실에서 가르치는 제자훈련이 아닌 삶 속에서 본을 보임으로써 제자들이 자신을 닮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7. 개인의 카리스마가 아닌 목회원칙을 세우고 그것을 공유하자. 교회의 주인은 자신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모든 사람들이 이해하도록 해야 할 의무가 있다. 특히, 목회의 권위를 직분이나 조직이 아닌 말씀과 성령의 권위에 두도록 하자. 목회자는 말씀에 최우선 순위를 두어야 하며, 또한 동시에 성령의 능력을 항상 의지하는 모습을 보여주어야 한다. 성숙한 목회자와 성숙한 교회라면 자신들이 교인들의 헌신과 충성에 의존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강조해야만 한다.

8. 성도들에게 돈을 강요하지 말자. 돈에 있어서 투명하다는 것을 증명하자. 교인들에게 헌신을 요구하기보다는 즐거이 헌신할 수 있도록 풍성한 꼴로 먹이는데 최선을 다해야 한다. 스트레스를 받는 양은 양질의 젖을 낼 수 없다. 우선 교인들로 하여금 편안하고 행복하게 느끼도록 말씀과 성령의 능력으로 섬겨야 한다.

9. 과다한 경쟁을 통한 물량적 성장보다는 영적 성숙을 꾀하자. 목회의 목표는 교인들로 하여금 어린아이가 되지 않고 말씀에 굳게 서서 흔들리지 않으며,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를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기까지 성장하도록 돕는 것이다. 내적 성장은 양적 성장을 필연적으로 가져올 수밖에 없다.

10. 집단이기주의에서 벗어나서 한 신앙고백으로 하나되어 갱신언약운동을 펼치자. 목회자는 무엇보다 사랑으로 충만한 목자가 되어야 한다. 그리고 충만한 사랑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는 다른 그룹을 포용할 줄 알아야 한다.

V. bibliography

Chuck Smith, The Philosophy of Calvary Chapel, The Word for Today

Chuck Smith, Calvary Chapel Distinctives, The Word for Today

Chuck Smith, Calvary Chapel Distinctives, The Word for Today

척 스미스, 기도와 치유(건생 1997)

척 스미스, 진짜 성령의 은사 가짜 성령의 은사(나침반)

척 스미스, 칼빈주의와 알미니안주의 그리고하나님의 말씀, 건생

척 스미스, 대환난과 교회, 건생

척 스미스, 하나님이 원하시는 기도, 선한 목자 세계 선교회

척 스미스, 슬펴하는 자에게 주는 위로, 선한 목자 세계 선교회

척 스미스, 위대한 추수(나눔터)

척 스미스 목사와 갈보리채플 소개 비디오, A Venture in Faith

척 스미스, 은혜의 비밀(나침반 2001)

척 스미스, 마태복음 강해(포도원)

래리 테일러, 아름다운 목양의 샘터(이레서원 1997)

밥 휙스트라, 신앙의 심리학화(건생)

데이빗 학킹, 강해설교 어떻게 할 것인가?(서울 갈보리채플)

척 스미스 목사 설교 요약, 서울 갈보리채플

제랄드 R.맥더못, 주만 바라볼찌라: 참 영성의 12가지 믿을 만한 표지들(CLC)

VI. 부록: 갈보리채플의 믿음의 신조(아름다운 목양)

1. 갈보리채플은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믿는 신자들의 모임으로서 형성되었다. 우리의 최상의 모임으로서 형성되었다. 우리의 최상의 목적은 그리스도를 알고 성령님의 능력으로 그의 형상을 닮아 가는 것이다. 우리는 교파 교회가 아니며, 교파 운동을 반대하지도 않는다. 다만 한 몸 된 그리스도의 몸의 분열을 초래하는 교리 차이의 지나친 강조는 반대한다.

2. 우리는 기독교 모임의 유일하고도 진실된 기초는 그리스도의 아가페 사랑이며, 이 사랑은 우리의 그 무엇보다도 가장 위대하며, 이 사랑 없이는 우리를 그리스도인이라고 자처할 수 없음을 믿는다.

3. 우리는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는 영적이어야 함을 믿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겸손한 마음으로 성령님께 우리의 예배를 인도하시도록 전적으로 맡긴다.

4. 우리는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는 감동적이어야 함을 믿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예배에 찬양을 중요시하며 찬양에 상당한 비중을 둔다.

5. 우리는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는 지적이어야 함을 믿는다. 그러므로 우리의 예배는 하나님께서 어떠한 예배를 원하시는지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도록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하는 순서에 최대의 역점을 둔다.

6. 우리는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는 결실이 있어야 함을 믿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가 하나님을 진정으로 예배하고 있다는 것을 명백히 나타내기 위해 우리의 삶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여 드러낼 수 있도록 생활한다.

7. 우리는 모두 정통 기독교 복음주의의 근본적인 교리들을 믿는다.

8. 우리는 성경의 무오성과 신.구약 성경이 영감되어진 전혀 오류가 없는 하나님의 말씀임을 믿는다.

9. 우리는 하나님께서 성부, 성자, 성령의 구분된 삼위로서 영원히 존재하심을 믿는다.

10. 우리는 성부 하나님께서 인격적이시며, 초월해 계시며, 모든 피조물들의 주권적 창조주이심을 믿는다.

11.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완전한 하나님이시며, 완전한 인간이심과 동정녀에게서 태어나셨으며, 무죄한 삶을 사셨고, 십자가 위에서의 대리적인 죽음으로써 우리의 대속을 제공하셨으며, 성령의 권능으로 말미암아 육체로 부활하셨고,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승천하셨으며, 우리의 중보를 위하여 영원히 사시는 것을 믿는다.

12. 승천하신 후에, 예수님은 예루살렘의 신자들에게 성령을 부어 주셔서, 그들로 하여금 온 땅에 복음을 전파하라는 예수님의 명령을 성취시킬 수 있게 하셨으며, 오늘날의 모든 신자들에 의하여서도 이 사명이 나누어지게 하셨다.

13. 우리는 모든 사람이 본성적으로 하나님과 나뉘어져 있으며, 그들 자신의 죄에 대한 책임이 있지만 구원과 구속과 용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값없이 모든 사람들에게 제공되었음을 믿는다. 한 사람이 죄를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구원해 주심을 믿으면 그는 즉시로 거듭나서 성령으로 인침을 받고 그의 죄들은 용서받았으며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주님과 함께 영원히 지내도록 예정된 것임을 믿는다.

14. 우리는 성경에 언급된 성령의 은사들을 믿으며, 만일 그 은사들이 성경적인 지침 안에서 실행되어질 때에는 그 은사들이 오늘날에도 유효함을 믿는다. 신자로서 우리는 최고의 은사들을 갈망하며 전체 그리스도의 몸이 덕을 세우도록 사랑 안에서 그 은사들을 활용하여야 한다. 우리는 어떤 최고의 대단한 은사들보다도 사랑이 더욱 중요하며 이 사랑이 없이는 모든 영적인 은사들의 활용이 무가치함을 믿는다.

15. 우리는 교회의 정치는 복잡한 관료주의보다는 단순한 것이어야 함을 믿으며 우리는 육적인 조장보다는 성령의 인도를 더욱 의지한다.

16. 우리는 환란 전 교회의 휴거를 기다리며, 우리는 땅을 다스리기 위해서 그의 성도들과 함께 오실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이 개인적이며, 전천년에 가시적으로 임할 것을 믿는다. 이 믿음이 우리에게 거룩한 삶과 헌신적인 봉사, 하나님의 말씀의 부지런한 공부, 규칙적인 교제, 침례에 의한 성년의 세례와 성찬에 참여하도록 동기를 부여한다.

17. 우리는 개개인의 삶의 성경의 가르침이 적용되어 개인을 그리스도 안에서의 더욱 큰 성숙으로 이끌 수 있도록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기를 원한다.

18. 우리는 다음 사항들을 배격한다.

① 진실한 그리스도인이 귀신에 들릴 수 있다는 것.

② ‘칼빈주의의 5요점’ 예컨대 자유 의지의 옂를 두지 않는 숙명적인 칼빈주의의 관점, 특히 우리는 예수님의 속죄가 한정적이라는 신조를 배격하며, 그 대신 우리는 예수께서 모든 사람을 위해서 죽으셨음을 믿으며, 하나님의 사랑을 구하시는 은혜가 거부될 수 없다거나--불가항력적인 은혜--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은 지옥에 가도록 선택하셨다는 것은 배격하고, 그 대신 우리는 누구든지 그리스도께로 오고자 하면 그럴 수 있음을 믿는다.

③ 긍정적인 고백 (하나님께서 인간의 의지에 따라 병을 고치시거나 기적을 행하시도록 명령받을 수 있다는 신앙)

④ 성경에 위배되는 인간의 예언

⑤ 성경의 가르침에 인본주의와 세속적인 심리학이나 철학을 결합시키는 것

⑥ 성경의 가르침에 배타적인 영적 은사들, 경험적 표적들, 신비들의 지나친 강조.

19. 우리의 예배에서 우리는 경배와 기도와 말씀의 가르침을 통하여 하나님께 대한 개인적인 사귐에 초점을 맞춘다. 우리는 강해와 제목 설교의 가르침을 동시에 수용한다. 우리는 예배 도중에 큰 소리로 방언을 하거나 성경 공부가 진행되는 도중에 예언을 하는 행위는 허용치 않는데, 이는 우리가 성령께서 자신을 저지하지 않으실 것을 믿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러한 특별한 은사들이 행해지리 수 있는 은사집회(After-Glow Services)들과 믿는 자의 모임(Believer's Meetings)을 가지고 있다.

VII. 갈보리 채플의 비전선언문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은 온 인류를 위한 것이며, 그의 사랑으로 인하여 예수님을 보내시어 인류의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게 하시고 사흘만에 부활하신 것을 믿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죄 사함과 부활하신 주님을 전파한다.

우리는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는 것을 믿는다.(디모데후서3:16,17절)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일을 강조한다.

우리는 교회가 그리스도 안에서 성숙하고 성장하여 그리스도의 몸을 온전케 하기 위해 “은사받은”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세우시는 것을 믿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은사 받은 사람들을 발견하여 복음을 전파하도록 성경의 말씀으로 그들을 무장시킨다.

우리는 우리의 주와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곧 재림하실 것을 믿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 삼는다.(마태복음28:19)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오직 한 몸이며, 비록 그의 교회에 여러 가지 다른 점이 있을지라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성령안에서 우리 모두가 하나임을 믿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 안에서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켜야 한다. (에베소서4: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