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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연구

구약의 역사를 보는 관점

by 등불지기 2012. 4. 5.

 

 

구약의 공관서라고 불리우는 사무엘서와 역대기서를 어떤 관점에서 바라보고 해석해야 할 지에 대해서 예전에 제가 쓴 강의안입니다.

성경공부에 도움이 되길 바라며,

김광락 선교사 올림.

 

<성경 역사관 비교 연구>

<사무엘서 열왕기서와 역대기서를 보는 법>

1.오늘날의 해석의 문제점들:

성경에서 가장 우화적(allegorical)며 모범적인(examplary) 해석이 잦은 부분이다.더구나 역대기에 기록된 긴 족보는 복음 선포에 있어서 거의 무시되고 있으며 반복되어져 있는 다윗 또는 열왕들의 행적들 간의 차이에는 관심을 기우리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한 무관심은 거룩한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의 도덕책이나 교훈집으로 평가절하하는 심각한 처지에 이르게 하며 더 나아가서는 하나님 말씀을 감하는 무서운 죄를 저지를 위험성도 내포하는 것이다. 성경 역사서는 독특한 역사 속에서 자신의 다스리심(sovereign rule)과 구원하심을 계시하신 하나님의 메세지이다. 그러한 거룩한 역사관을 가지지 않고 세속적인 인간 역사관을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에 접근하려는 시도는 실패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2.성경 역사관과 세속 역사관의 차이점:

그러면 성경의 거룩한 역사관과 세속 역사관의 차이는 무엇인가? 우선 성경 66권을 관통하는 사상이 무엇인가를 보자. 주의깊게 성경을 계속 읽어온 신자는 한 권 한 권 속에 여러가지 다양한 사건들이 모여 무언가 큰 단일한 하나의 역사(one historical event) 혹은 메세지를 드러내고 있다는 것을 느끼개 된다. 그러한 통일성(integrity) 하에서 모든 작은 사건들과 말씀들이 조화로운 구조를 이루면서 각각의 의미의 빛을 우리에게 비추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그 통일성이란 대체 무엇인가? 한 마디로 하면 인간들을 구원하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구원 계시(devine revelation of the salvation of man)라 할 수 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종말론적 최고 최후 절정(the eschatological acme in Jesus Christ) 을 이룬다.

그런데 구원계시라 할때 그것은 인간만을 구원하는 협의의 의미를 전달해준다. 하나님의 구원은 전우주를 회복하는 포괄적인 역사이다. 그래서 구원계시라기보다는 하나님나라의 계시라고 하는 것이 더 적절한 것 같다. 그 이유는 또 예수님께서 하나님나라를 강조하여 가르치신 것에도 분명하다. 즉, 성경은 하나님나라의 왕이 되신 여호와(언약의 하나님에 대한 거룩한 명칭)께서 인간역사의 주인이 되시며 주관자가 되셔서 인간나라를 왕적인 권위로서 다스리시며 또한 자신의 그 거룩한 나라로 죄인들을 계속적으로 초청하고 계신다는 것을 선언하고 있다. 고로 성경은 하나님나라의 책이며 그 역사서는 하나님나라의 역사를 다루고 있는 것이다.

반면 세속 인간나라의 역사관은 역사의 주인이되시는 또한 하나님나라의 주인이 되시는 하나님을 증거하고 있지 않는다. 오히려 그 거룩한 하나님나라의 역사관을 정면으로 공격하고 있다. 그 이유는 인간을 역사의 주인으로 어떤 인간을 왕으로 높이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왕으로 삼기를 거부하는 이러한 세속 역사관은 적그리스도적인 사상이다. 불행하게도 교회 안에서이러한 사관을 가지고 성경을 보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교회 내에서 거룩한 사관이 회복되어야 한다. 그것이 현 세계의 모든 교회의 당면한 사명인 것을 알아야한다. 교회가 세속사관에 의해 지배될 때 교회는 빛과 소금의 맛을 잃어버리게 되는 것이다.

 

3.하나님나라의 역사관

그러면 구체적으로 하나님나라의 역사관이란 어떠한 것인가? 그것은 하나님이 자신의 나라를 이 땅에 건설하고자 하신다는 것이다. 그것은 다른 말로 하면 사탄의 나라를 파괴한다는 의미이다. 사탄은 최초로 하늘에서 이루어진 하나님나라에서 하나님의 주권에 반기를 든 세력이다. 그는 이 땅에 내려와서 자신의 주권을 인간들에게 주장하여 자신의 나라를 건설했기 때문이다. 인간의 왕정은 바로 그 사탄의 나라를 섬기는 역활을 담당하는 것이다. 이러한 가운데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선택하시고 그로 말미암는 이스라엘공동체로 하여금 자신의 나라가 온전히 이루어진 표본으로 삼고자 하셨다. 그러나 그 공동체는 이방 나라처럼 인간의 나라를 만들기를 원했다. 인간의나라가 하나님의 나라를 대적하는 죄를 범하지 않도록 하나님은 선지자를 보내셔서 끈임없이 하나님나라를 잊지 않도록 견재하게 하신 것이다. 비록 택함받은 이스라엘 공동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나라를 대적하는 인간나라를 형성하고자 할 때는 어김없이 심판을 내리시고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왕이나 백성들에겐 축복을 내리심으로 하나님은 자신이 왕이 되심을 선포하셨던 것이다.

 

4.「삼 / 왕 / 역」 의 역사관 개요

우선 우리는 히브리식 성경분류를 살펴보아야한다. 그것에 의하면 「삼/왕」은 에언서에 속해 있으며 「대」는 성문서(지헤서) 에 속해 있다. 그리고 「삼 / 왕」은 본래 한권으로 간주되었다. 에언서의 의미는 문자 그대로 이스라엘 백성에게 경계 혹은 주의경고하는 것이며(proclaim the Kingdom of God against the Kingdom of man that the Kingdom of man will be judged by the true king of Israel the sovereignty, the mission of which the prophets are undertaken by HIm) 지혜서(성문서)란 이스라엘 백성의 고백, 소망, 찬양, 사랑 등의 내용을 담은 이야기이다. 그러므로 사무엘서와 열왕기서를 읽을 때는 하나님께서 이스라렐 백성들에게 사건 사건을 통해서 무엇을 경고하시며 어떻게 자신의 돵되심을 증거하고 계시는가를 살펴보아야할 것이며 역대기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부엇을 희망하는 가를 살펴보아야 하는 것이다.(What the people do anticipate of the devine KIngdom)

우리는 왕과 선지자와 제사장과의 상호 갈등 관계를 주의 깊게 보아야한다. 그럴때 우리는 예언서에서는 선지자들의 역활이 왕들과 제사장들보다는 훨신 더 강조되어 부각되고 있는 반면, 성문서 특히 역대기서에서는 왕들과 제사장들의 역활이 강조되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은 이렇게 설명될수있을 것이다. 예언서에서는 하나님의 나라에 반기를 드는 인간나라에 대한 심판을 선언함으로 하나님이 왕이 되신다는 것을 증거하는 것이고 역대기는 하나님이 온전히 왕으로서 섬김을 받으시는 하나님이 친히 다스리시는 왕국이 설립되리라는 희망의 메세지를 전하기 위한 것이다. 즉, 전자는 인간왕정에 대한 심판(against monarchy)이라면 후자는 신정(for theocracy)에 대한 기대라 할 수 있다.

5.History in the OT (by J.A. Motyer[the expositor's bible commentary, pp309-339]

구약은 내부분 역사로 이루어진 책이다. 심지어 어떤 의미에서는 역사에 몰두해서 이루어진 책이기도 하다.

 

1.역사와 예언: 성경 역사는 단순히 역사적인 것만이 아닌 예언적 영감의 산물이다. 그러므로 여호수아로부터 열왕기에 이르는 문서들을 ‘전기 예언서’라고 칭한 것은 정확하고도 깊은 통찰력에서 나온 것이다. 예언과 마찬가지로 구약의 역사는 하나님으로부터의 하나님에 관한 선언이다. P. Ellis는 말하기를, 여호와를 맏는 사람들의 이야기 속에는 기존의 문학적의미로서의 “영웅”이 없으며, 아브라함, 야굡, 요셉, 심지어 모세까지도 영웅이 아니라고 한다. 왜냐하면 주인공은 언제나 주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라고 하였다.

2.역사와 신학: 그러나 하나님에 관한 진리를 선포하기 위한 매개체로서 역사를 사용하는 핵심적 의미는, 이러한 방식으로 신학이 상대주의로부터 보호된다는 사실이다. 이렇게 함으로 신학은 각색과 이론의 부류에서 해방되어 객관적이고 확증적인 것이 된다. 구약은 신학적이기 때문에 또한 역사적이기도 한 것이다.

3.역사의 선택성: 역사는 메세지를 전하기위해서 자료들을 선택적으로 서술하고 있는 것이 그 특징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극것이 역사의 신빙성을 해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모든 자료들을 총 망라하며 20세기적인 ‘정밀성’으로 기술하려는 것은 오히려 역사가 아니며 역사의 본질도 아닌 것이다.

 

4.역사의 목적성: 구약 역사 속에는 뚜렷한 목적성이 있다. 역사가 자신이 그 사건들 가운데 휩쓸려 있으면서도 이러한 목적을 의식하고 있다는 것은 구약역사만이 지니고 있는 특징이다.그것은 첫째,’여호와의 날‘이다. 그것은 역사는 목표를 향하여 전진한다는 구약 역사가의 신앙이다. 이 신앙으로 말미암아 그들은 절망과 고통 속에서 절대적인 희망을 발견하엿던 것이다. 이 개념은 후에 ‘오는 세상’ 혹은, ‘오는 세대,‘ 그리고 신약의 중요한 ’하나님 나라‘의 구약적 배경이 되었다. 둘째, 신명기적 역사관이다. 구약 역사는 의가 국가를 흥하게 하고 죄는 수치와 파멸을 가져온다는 것을 주장하는 운리적 목적성에 의해 생명력을 갖는다. 바로 이것이 종종 ’힌명기적 역사관‘이라고 일컫어진다. 이러한 역사관은 가나안 정복 후의 역사서에서 완전히 형성되고 선지자들에 의해 격언처럼 받아들여졌다. 이로 말미암아 구약에 잇어서의 역사는 윤리적 결단, 윤리적 갈등, 그리고 윤리적 영향력을 나타내는 무대가 된다. 셋재는, 전인류적이다. 즉, 이스라엘 민족의 혈통적 특수성이 아니라 온 인류를 향한 중심으로 이스라엘이 묘사되어 진다. 넷째는, 창조적 구속이다. 바로 성경 역사는 하나님의 창조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하나님이 만물을 창조하셧으며, 또한 그것을 다스리시고, 예정하신 종말로 인도하신다는 것이다. 이는 역사적 진화론과는 판이한 것이다.

 

1.역사란 무엇인가?

시.공을 통해서 발생ㅅ한 의미적(significative) 사건과 사실에 관해서 역사가의 관점에 따라 기록된 과거의 이야기라고 간단하게 정의할 수 있다.(따라서 미래로서 과거를 해석할 수 없으며 역사가가 처한 시점에서 해석해야 한다.) 과거는 살아있는 과거와 죽은 과거가 있다고 할 수있다 그것은 현재에 의미를 던져주고 있는 지의 여부에 의한 분류이다 시실은 역사가의 기준에 의해 독자에게 어필되어지도록 선택된 무역사적 자료이다. 역사란 역사가의 관점에서 소화된 의미적 사실들이다. 이 과거 의미적 사실들은 우리에게 항상 의미를 주며 미래에 대한 경과와 약속을 제공해준다. C. Becker가 말했듯이 역사사의 사실이란 역사가에 의해 창조되기 까지는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 역사는 ‘현재’ 즉,‘역사가의 싯점’에서 ‘과거’를 묘사한 것이며 평가한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역사는 역사가의 창조적인 산물이다. 또 역사는 역사가의 경험으로서 역사가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것이다. 역사가는 어떤 엯사의식 또는 역사적 주체성을 가지고 객관적인 사실들을 다룬다. 그러므로 객관적 사실들 그 자체로서는 역사상에 존재할 수ㅗ 없으며 또 존재가 불가능하다. 그 사실에세 입혀진 역사가의 사관이 중요하다. 역사서를 대할 때는 사실들 자체보다 그 사관을 밝혀내는 것이 역사서를 바라보는 방법이다. 그러나 사실들과 사관은 서로뗄레야 뗄수 없는 관계이므로 우리는 그것이 어떤 연결 구조에 있는 지 밝혀내야 한다.

 

2.성경 역사의 의미

역사성이란 현대 우리에게 의미를 주는 과거 사실을 의미한다. 성경을 대할때, 우리는 먼저 기록된 그 당시 언약백성들에게 의미를 준 과거 사실이 무엇인지 물어보아야 한다. ‘의미적 과거 사건’이 현재에 대한 통찰과 미래에 대한 소망을 제공해준다. 그러면 성경에서 의미적 사건(significative event)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님의 행위이다. 하나님깨서 행하신 모든 행위는 이스라엘 언약 백성들에게 통찰력솨 매래에대한 소망을 준다. 같ㅇ은 원리가 오늘날 성도들에게 적용된다. 오늘날 성도 역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언약을 맺은 동일한 언약백성이기 대문이다. 또한 하나님의 하신일은 여원하신 하나님의 변치 않고 신실하신 성품에 근거하고 있기 때무에 우리의 신앙의 유일한 근거사 된다. 그러므로 성경을 대할때늘 하나님깨서 (주체적으로) 행하신 일들이 무엇이며 그것이 어떤 의미를 주엇는지, 그 의미는 누구를 위한 것인지 세밀히 반ㄱ혀내어야 하는 것이다. 여기서 주의할 중요한 것은 우리는 해석자이며 결코 역사가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 말의 의미는 우리의 임무는 성경 역사를 듣고 보는 것이지 우리자신의 세속 철학에 의해 왜곡된 역사관을 성경에 덧입혀서는 않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실수가 얼마나 저질러지고 있는가?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을 무디게 만드는 범죄다.

 

3.구약 역사서를 보는 법(구약 역사의 성격)

기곧교는 역사의 종교이다. 역사성(historicality)이 없다면 기독교는 믿음도 고백도 모두 허구가 되고 만다. 그러한 의미에서 ,신약 역사서인 공관 복음과 마찬가지로, 구약 역사서는 믿음의 중요한 토대를 형성해 준다. 성경의 역사를 대할 때, 역사관이 완전히 제거된 20세기적 ‘객관성’이나 과학적인 ‘엄밀성’에 부합되는 자료들을 모은다는지 혹은 과학적인 연대기를 얻고자 기대하는 것은 그릇된 접근임을 알아야 한다. 사관이 없는 이것은 살아잇는 과거가 아니라 죽은 과거일 뿐이다. 성경은 그러한 무시간적이고 생명이 없는 20세기의 어떤 과학 서적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다. 그러한 접근은 하나님 말씀인 성경을 하나의 인간 수준에서의 문학 서적이나 과학 교과서로 전락시키는 행위이다. 성경 역사는 역사적 사실과 역사관 사이의 끊임없는 순환 구조 속에서 선포되는 하나님의 행위 선포에 대한 벳세지로서 명백한 역사성을 지니고 있지만 20세기가 요구하는 ‘정밀성’은 제공하고 있지 않는다. 구약 성경 역사는 단순한 혈통적 민족적 역사가 아니라 은헤 게약으로 맺어진 하나님 백성의 역사이다. 성경 저자의 신학과 신앙으로 씌여졌지만 그것은 언약의 역사요 구속의 역사요 메시야 대망적 역사요 하나님 나라의 역사로서 어떠한 사람이 아니라 오로지 언약의 통치자이신 여호와 하나님 과 그의 놀라우신 언약적 통치를 선포하고 있다. 오직 여호와께서만이 역사의 주인공으로 소개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일반 세속 역사서와는 다는 태도로 읽어야 한다는 의미이다. 즉, 성경 역사는 어더한 인간 편의 관점도 거부하며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아야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구약 성경 역사는 어떤 철학적 체계가 아니라 오직 믿음의 세게 내에서만 이해되어지는 것이다. 그것은 인간의 역사나 특수 민족의 역사로 보아서는 안되며 오직 언약의 왕이신 하나님과 그의 언약적 통치가 어떻게 선포되고 있는지 살펴보아야한다. 구약 성경 역사는 하나님 나라의 성취 또는 완전한 사사와 종말논적 왕을 바라보는 독특한 역사로서 크게 두 다지 사건으로 엮어져 잇다. 첫째는 신명기적 선지자적 사관이며ㅡ 둘째는 역대기적 제사장적 사관이다. 선지자적 사관은 심판과 경고로 언약 백성의 윤리적 결단의 촉구가 그 주된 특징이라면, 제사장적 사관은 회복의 소망과 치유가 그 특징이다. 이 두 특징은 역사서 및 에언서에서 양대 산맥을 형성하고 있다.여기서 구약역사를 해석하는데 특별히 주의를 기울여야 할 부분이 있다.

 

첫째, 성경 역사를 서술하는 제자들의 역사 기술 방법에 주의할 필요가 있다. 구약 저자는 자료를 선별하고 (Ex.아합,오므리), 어떤 부분을 특히 강조하고 (Ex.여리고와 아이성은 정복의 모델), 자료들을 대조 시키기도 한다. 둘째, 서로 상충하는 기사는 관점의 기주에 따라 -저자의 의도도 포함-달라 질 수 있음을 생각 해야하며, 그것이 하나님의 언약적 신실성을 해치지 않는한 신학적 정당성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구약 역사의 해석적 요약:

*하나님에 대해서 어떻게 선포하는가 보라.

/하나님의 언약적 통치에 대해서

/하나님의 언약적 신실하심에 대하여

/하나님의 자기증거(self-demonstration)에 대하여

/하나님의 나라와 권세와 영광에 대하여 Etc...

 

4.구약 역사와 예언과의 관계

구약 역사는 본질적으로 구약 예언과 동일하다. 양자간의 차이는 강조점의 차이일 뿐이다. 구약 역사가 “해석된 역사”라고 한다면 구약 예언은 “역사의 해석”이라고 할수있다. 그 역사성에 있어서는 동등한것이다.그러므로 구약 역사의 예언서는 같은 위치에서 같은 시대별로 상호 보완적인 입장에서 보아야 한다. 구약 역사와 구약 예언은 둘다예언의 하나님 여호와를 진정한 왕으로 내세우고 있으며 그 왕의 공의와 긍휼의 언약적 통치를 다루고 있다.

 

a."해석된 역사“

제자들의 선지자적 관점이(신명기적/제사장적) 역사적 사실에 투영됨으로 성경에 기술된 모든 역사적 사실들은 그 선지자적관점과 역사적 사실들간의 순환구조를 밝힘으로서만이 진정한 의미를 지니게된다.그 한 예를 들어 보면 이해가 쉬울 것이다. 오므리나 여로보암2세는 그 개관적인 치적에 비해서 성경에 거의 중요하게 취급되고 있지않다. 오므리 앙은 새 수도를 사마리아에 세우며 이스라일에 잇점을 가져왔다.오므리는 약 50년 간의 정치적 불안을 종식하였고 국제적 국외적 평화와 부를 가져왔고, 모압을 정복하여 종속국으로 삼았다. 그의 지적은 오므리 왕조가 무너진 훨씬이후에도 앗시리아 제국 에 이르기까지 이스라엘이 “오므리의 왕조”로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성경 저자는 그들을 별로 중요하게 평가 하지않는다.

 

b.”역사의 해석“ 이 역사적 사실들을 선지자적 관점으로 해설하는 것이 예언서이다. 구약예언은 당시 역사적 사실( 역사성)들을 제외한 어떤 공허한 것을 말하지 않는다. 구약 예언 역시 엄밀하게 역사성을 그 근거로 삼고 있다. 그것은 심판과 회복이라는 두 구조, 즉 언약에 기초하는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을 근본으로 하고 있다. 이 구약 예언에서 역사성을 배제한다면 근본 메세지는 왜곡되어지고 만다. 그 역사성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 나차난 하나님의 행위(covenantal act)이다. 그 행위는 본질적으로 심판과 구원을 내포하고 있으며 장래에 경고와 희망을 약속한다. 하나님의 하신 일들이 우리의 신앙의 근본이 된다. 이 진리는 성경 전체를 이해하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해석의 동기이다. 전자의 측면이 성경 역사이며, 후자의 즉면이 성경 예언이다.(The past illuminates the presenmt, which get the root for the future; the former is concerned with Biblical history, the latter withe Biblical prophecy.)

 

5.구약 역사와 땅의 관계

구약 역사에서 ‘땅’ 이 의미하는 바는 자못 크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그 땅’에서 살게 될 것과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은 아브라함의 언약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확신을 주는 중요한 증표이다. 신학적으로 가나안 약속의 땅은 언약 그 자체는 아니지만--참 언약은 하늘에 속해 있었고 가나안은 단지 하늘의 것의 모형으로서 주어진 것일 뿐이었다--언약에 대한 증표 혹은, 보증으로서 주어진 것일 뿐이었다. 그러므로 그 언약백성이 자기들이 분배받은 땅을 소중히 여기는 것은 언약을 사랑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또한 그 ’땅‘은 온세계 내에서 하나님의 성소 혹은 성전의 역활을 하였다. (여기서 성소란 하나님이 친히 임재하시는 거룩한 영역을 말한다.) 그러기에 그 ’땅‘은 거룩하며 그 언약백성은 그 ’땅‘을 거룩히여겨야 하며 죄악으로 더럽히지 않도록 함으로 ’제사장 나라‘의 역활을 계속 수행해야 했다. 죄약으로 더럽혀질 경우엔 반드시 ’징계‘의 형태로 하나님의 간섭하심이 임하였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 땅에 여전히 거하신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 땽에서 왕으로서 언약으로 통치하신다는 의미도 된다. 그러나 BC 586 년 이후부터 시작된 포로기는 이스라엘에 심각한 신학적 위기를 내포하였다. 여호와께서 주신 기업인 땅과 성전이 파괴되며 약탈됨으로 생겨난 것이다. “우리 하나님은 우리를 영영 버리신 것이 아닌가?”“하나님은 여전히 우리에게 관심을 가지시고 계시는가?” 이러한 땅과 성전의 파괴로 심각한 신학적 위기를 맞이한 이스라엘 공동체에 대한 하나님의 답변이 바로 에스겔, 다니엘, 학개, 스가랴, 말라기 등의 예언서와 역대기, 에스라, 느헤미야, 에스더의 역사서인 것이다. 이들의 메세지는 하나님의 회복에 대한 찬양의 메세지이다. 우리는 이들 예언서와 역사서를 분리하여 보아서는 안되는 것이다. 우리는 이들 예언서와 역사서를 대할 때, 다음과 같은 점들을 유의하여야 한다.--첫째, 아브라한의 언약에 대하여 무엇이라 말하는가? 둘째, 잃어버린 땅과 성전에 대하여서 무엇이라 발하며 하나님께서 어떻게 회복시키실 것을 약속하고 있는가? 셋째, 세부 지명들의 신학적(언약적)의미와 당시 지정학적 의미는 어떠하였는가? 예를 들면 세겜과 길갈은 여호수아서, 사사기, 사무엘서 등의 가나안 정복기에서 그 언약적 중요성이 새롭게 강조된다. 또한 예루살렘성(시온성=temple mountain, 다윗성)은 포로기 이후 중요한 언약적 의미를 띄고 있다.

 

6.심.열왕기 사관과 역대기 사관의 비교 (II)

두 사관은 구약 역사에 대한 두 신학적 해석이다. 여기서 삼. 열왕기는 구약역사에 대한 선지자적 해석이라한다면 역대기는 구약역사에 대한 제사장적 해석이라 할 수 있다. 이렇게 사관의 차이가 발생하게 된 원인은 이스라엘 포로 이전과 이후라는 역사적 시점의 차이에 따른 구속사적 반성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한 구속사적 반성이라는 역사신학적 관점은 인간 편의 작용이지만 그것은 동일하게 시대 속에 계속되어 온 하나님의 위대힌 언약적 통치를 선포하고 있는 점에 서 하나님의 뛰어난 계시의 기록서인 것이다.

 

A.선지자적 해석으로서의 삼.열왕기

삼.열왕기의 형식적인 틀은 왕조(monarchy)이지만 내면의 신학적인 관점은 선지자적이다. 그 선지자적 관점을 이해하는 열쇠는 신명기이다. 심명기의 왕조에 대한 조항을 참고해 보라; 1) 왕은 여호와의 택하신 자여야 하며, 2)타국인이어서는 아니되며, 3)말을 많이 두지 말아야 하며, 4)아내를 많이 두지 말아야 하며, 5)율법서를 늘 가까이 할 것. 이 신명기적 사관은 여호수아에서 시작하며 왕조시기의 예언서들에 이르기까지 핵심적인 메세지를 형성한다. 그 메세지는 세속 왕조/인간나라를 경계 또는 경고하고 언약 돵조/하나님 나라를 우선으로 삼을 것을 명령하는 언약적 요구이며 하나님의 언약적 다스리심을 장엄하게 선포하는 것이다. 이 하나님 나라의 선포는 다양한 방식에 의하여 이루어짐을 예의 관찰하여야 한다. 이 사관에 의하면 오직 하나님과 그의 행하심이 강조되며 그를 이스라엘의 참 통치자로 소개한다. 인간 왕은 오직 하나님의 언약적 통치이 대리 역활을 수행할 때만 환호를 받는다. 그러나 그 언약의 영역에서 벗어날 때는 다윗이나 솔로몬 같은 위대한 왕이라 할찌라도 가차엄ㅎ이 비판되어진다. 한가지 주목할 것은 왕조 형서으이 교리적 토대를 형성하는 사무엘은 이 선지자적 해석의 아버지 역활을 하며 그에 따라 사울과 다윗은 그 선지자적 선포에 따는 대조적인 두 패러다임으로서 제시되고 있다는 것이다.

 

B.제사장적 해석으로서의 역대기

역대기는 포로 후기의 기록이며 제사장겸, 율법의 학사인 에스라에 의해 씌여진 것임을 기억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역대기의 삶의 자리는 포로에서 돌아온 이스라엘 공동체가 이미 성전과 모든 베사베도를 잃어버린 가운데에서의 언약백성의 갈등과 혹은 소망에 관한 것이다. 삼.열왕기 사관에 배해서 역대기 사관은 상당히 희망적이다. 여기에서는 성전이 중요시되고 성전을 중심으로 하는 메시야적 왕국을 희망하는 것이다. 삼.열왕기가 선지자를 역사의 무대에서 주인고으로 제시하고 있는 반면, 역대기는 제사장을 주인공으로 제시하고 있다. 제사장적 사역을 강조하고 있는 것은 회복의 메세지로서 하나님께서 여전히 그 백성들에게 관심을 갖고 걔시며 그 결과로 하나님께서는 그 백성을 위해 완전한 제사장적 메시야 왕국을 세우실 것이라는 암시를 던지고 있다. 그러한 관점에서 다윗은 특히 메시야의 대망이 투영된 인물로서 이상화되어 나타나고 있다. 삼.열왕기에서 비판되고 있는 결점들이 거의 감추어지고 언약을 성실히 수행하시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이 강조되고 찬양되어진다. 그래서 역대기는 상당히 대망적이고 고백적이며 찬양적이다. 역대기는 이스라엘 역사를 주관해오시는 언약의 하나님을 찬양하는 역사라는 점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상당히 구속사적으로 인접해 있다. 다윗이 높이 평가되어지는 것은 그가 성전을 준비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삼하 7장에 예언된 나단의 신탁인 다윗의 후손이 ’집‘(’성전‘의미)을 세울 것이라는 하나님의 언약적 약속을 소망하는 믿음이 이미 나타나고 있다. 이 믿음은 예루살렘과 성전 건축을 앞두고 있었던 이스라엘 벡성에게 상당히 의미가 있는 것이었다.

 

7.언약 국가로서의 이스라엘의 역사

언약국가와 세속국가는 잘 구별되어야 한다. 언약국가는 언약의 하나님 여호와를 참되신 왕으로 인정한다는 언약 아래있는 특이한 정부 형태이다.(a special kingdom under the graceful covenat that accept the idea of the true kingship of Jehovah the covenantal King) 거렇기 때문에 언약 국가에서의 열왕들은 오직 여호와만이 진정한 왕이시라는 사실을, 여호와 그가 자기 백성을 언약으로 다스리신다는 사실을 늘 상기할 필요가 있었다. 사단은 늘 만국을 미혹하여 하나님의 왕되심에 도전하도록 자극한다. 이스라엘은 인근의 세속 국가들의 영향에 미혹되어 그 언약을 무시하고 자신을 왕으로 내세움으로서 그 언약적 통치의 영역을 벗어나려고 하였다. 그러나 그럴 때 마다 하나님은 그 왕과 그 백성들을 징계함으로써 자신이 참 언약적 왕임을 증거하여 오셨던 것이다. 언약적 통치를 벗어나려고자 하는 모든 시도들은 스의 심판을 면치 못하였다. 누구나 하나님의 언약적 통치에 대적하는 자는 깨어지게 되었다. 이것이 구약적 복음의 핵심이다. 즉, 하나님은 열왕들의 시대에 자신이 진정한 언약적 왕이시라는 사실을 끔임없이 계시하여 오셨던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 사실을 선포하는 왕이나 선지자가 늘 역사의 무대에서 주인공이 되어왔던 것이다. 이 모든 열왕시대를 거치면서 언약 백성들은 진정한 언약적 통치와 또 그 통치를 완전히 실현할 이상적인 ’언약 왕‘을 소망하게 되었던 것이다. 오늘날의 현대 시대에서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언약적 통치를 받아들이는 성도들은 시민 공동체와 교회 공동체를 혼동해서는 안된다. 구약에서 늘 그랫듯이 교회 공동체가 시민 공동체를 닮아가려는 시도는 늘 실패와 좌절과 징계만 남을 뿐이다. 교회는 국가와의 동일시에서 그 본질을 결코 찾을 수 없다. 오히려 세속 공동체와 본질적으로 다르며 세속 공동체 위에는 늘 하나님의 심판이 머물러 있음을 선포하는 데서 교회의 참 본질을 발견할 수 있다. 교회 공동체는 늘 교회 공동체 다와야 한다. 교회 공동체로서 늘 남아 있는 길은 새 언약에 늘 복종하는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의 언약적 통치를 늘 사모하며 기다리며 의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칼빈이나 루터의 도시 종교개혁은 한계점을 지니고 있다고 비판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교회가 국가에 무관심하라는 이원론이 결코 아니다. 오히려 교회의 국가에 대한 접근방법이 세속 공동체의 방식이 아니라 인간이 결코 왕이 될 수 없고 오직 여호와께서만이 진정한 왕이심을 메세지와 삶으로 선포하며 맞서는 것이다. 그것을 가리켜 교회의 선지자적 사명이라 부르는 것이다.

 

8.구약 역사 해석의 오류(study on allegorization)

구약 약사를 해석할 때 좌로나 우로나 치우쳐서는 안된다. 그것은 거룩한 사관을 배제하는 과학적 사실들을 추구하는 해석과 역사성 내지 역사적 사실들을 배제해버리는 풍유적 해석이다. 보수주의 계열의 교회에서는 역사서에 대한 접근이 거의 풍유화의 오류를 범하는 것이 독점되고 있다. 풍유적 해석은 무역사적 해석으로서 우리의 신앙에 아무런 뿌리도 제공해주지 못한다. 우선 그것이 감동을 끼칠찌라도 결국은 믿음의 근거를 위협하는 해석을 지니고 있다. 이러한 풍유적 해석은 크게 3가지로 구분될 쑤 있다.:문자적 풍유, 예표적 풍유, 실존적 풍유.

 

A.문자적 풍유: 그 문자적 범위 내지 함의를 미래의 사건과 연결시킨다. 즉, ’포도주‘--’포도주는 붉다‘는 특징을 도출해냄--’피‘의 특성과 연결시킴--’예수님의 보혈‘을 상징한다고 해석하는 방식이다. 그러나 구약 역사는 미래에 예어넉 근거를 제공하지만 그 당시의 저자의 관점으로 과거를 해석한 것이기 때문에 해석의 tool은 미래의 어떤 것이 아니라 과거의 어떤 것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B.예표적 풍유: 신약적 관점에서 구약을 해석하는 것은 하나늬 성경 신학적 작업으로서는 가능하지만 역사 신학적 입장에서는 명백히 오류이다. 예표적 해석은 오직 그 예표가 성취된 사건이 빌생한 시점에서 시도되어야 하며 그것이 아직 성취되기 이전에 시도되어서는 아니된다. 그것이 그당시에 어떤 의미를 제공하는가가 중요하다. 예를 들어 모세가 놋뱀을 들었다는 역사적인 사실을 모세오경에서 예수님의 십자가로 해석되는 것은 역사적 오류이다. 그것은 신약에서 그렇게 선포되어야만 한다. 모세시대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빅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명백히 모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그때 그 순간 선포된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가 아니라 하나님의 독특한 언약적 통치의 한 방법이었던 것이다. 고로 예표적 해석은 구약에 있어서 신약으로 해석하는--역사 신학적 오류이다. 여기에서 예표적 또는 모형적 해석을 무조건 반대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이 해석은 그러나 성취의 관점에서 적극적으로 수용되어야만 한다. 고로 구약의 신약적 해석은 바람직하지 않고 신약의 구약적 해석이 용납되어야 올바른 것이다.

 

C.실존적 풍유: 이것은 문자적 풍유와 비슷한 것으로 단디 그 문자 만의 함의를 실존적으로 해석하는 것인데, 예를 들어 신약 사도 행전의 베드로가 본 환상에서 하나님의 음성인 “일어나 잡아먹으라” 라는 말을 바로 오늘날의 성도가 영적으로 재각성해서 선교사업에 박차를 가해야 한다는 식의 해석 같은 것이다. 이 해석 안에는 하나님의 언약적 행위가 전혀 언급되지 않고 있음을 관찰할 수 있다. 성도의 실존은 단지 하나님의 역사적 행위가 명확히 밝혀진 이후에 비로소 가능한 것이다. 하나님의 행위에 근거하지 않는 실존적 결단의 촉구는 아무런 생명이 넚는 비역사성의 해석인 것이다.

 

D.역사서 해석에서 알레고리를 방지하는 해석의 순서:

1.성경이 씌여진 시대와 시점을 밝혀라.(저자의 시점과, 사건의 시점)

2.그 시점에서 발생한 역사적 의미의 사건인 하나님의 행위를 밝혀라.

3.그 시점의 사건을 조명할 대과거의 사건들을 밝혀라.(예를 들어, 여호

수아의 지도하에 요단을 건넌 것은 모세의 출애급과, 아브라함의 언약

이 그 대표적 사건들일 것이다.)

4.미래에 어떤 암시를 줄 것인가를 생각해보라.(예를 들어, 하나님이 아

합의 집을 심판하신 것은 또다시 ’아합의 집’을 심판하실 것을 말한다)

 

E.해석상의 주의:

1.p를 pp로 해석하여야 하며 f로 해석하지 말 것.

2.문자 또는 표현이나 그 뉘앙스에 미혹되지않도록 하며(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영감’이라 착각하고 있다.) 역사적 사건에 관심을 둘 것.

3.사건의 분명한 의미성(역사성)을 밝혀야 하며 이것의 천명이 없다면

아직 해석이 되지 않은 것이다. 그 사건이 그들에게 무슨 의미를 가

져다 두었는가?

 

9.구약 성경 역사의 해석학적 모델

구약 성경의 역사서를 해석하는 데 있어 크게 3 가지의 해석학적 모델이 존재한다.:예표론적 해석, 구속사적 해석, 하나님 나라 해석.

 

A.예표론적 해석: f로 p해석(interpret present by future)

 

B.구속사적 해석: f로 p해석 + pp로 p해석(interpret present by past)

 

C.하나님 나라 해석: pp로 p해석(interpret present by past)

 

(p: 성경 저자의 시점과 기록된 사건의 발생 시점; f:p의 이후에 되어진

일들; pp:p이전에 이미 되어진 일들)

 

나는 역사성을 무시하지 않고 역사 감각에 일치하는 즉, 시대착오를 범하지 않는 해석학적 모델로서 하나님 나라에 입각하여 해석할 것을 주장한다. 그것은 어떤 해석인가? 한 마디로 하나님의 통치가 어떻게 나타났는가에 답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하나님이 과거에 어떻게 준비해오셨는가를 포함한다. 하나님 나라에 입각한 해석학적 질문들을 아래와 같이 제시할 수 있다.

가) 하나님이 자신의 언약적 통치를 어떻게 준비해오셨는가?

나)하나님이 어던 방식으로 자신의 언약적 통치를 나타내보이셨는가?

다)하나님의 그 언약적 통치는 미래에 되어질 일들에 대해 어떤 암시

(해석이 아님)를 던져줄 수 있는가?

라)하나님의 그 언약적 통치는 그 발생 당시와 기록 당시 어떤 의미를

던져 주었는가?

마)당시 언약 백성들이 받아들인 그 역사적 의미를 오늘날 우리에게

어떻게 적용될 수 있겠는가?

이 해석학적 질문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의 하신 일에서 출발한다. 그것이 일단 밝혀지면, 이제 비로서 적요으로 들어가야 한다.( 마)의 작업) 적용은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갈급해하는 모든 영역임을 병심해야 한다. 반드시 우리 영혼의 관심사나 삶의 관심사에만 국한괴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적용되어야 할 부분은 아담의 죄가 오염시킨 모든 영역, 온 우주적인 영역까지 포괄한다. 이 점에서 우리의 해석학적 안목은 넓혀져야 할 필요가 있다. 우리의 관심사에서 출발하는 해석은 오류를 면치 못하게 된다. 우리는 우리의 관심사가 아니라 하나님의 관심사를 물어야 하는 것이다.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먼저 구하는 것은 이처럼 성경 해석 작업에서도 적용되어야 하는 것이다.

 

10.성경 역사와 하나님 말씀

고대 사회적 상황 속에서 발생한 구약의 역사적 사건이 어떻게 오늘날 우리에게 들려지며 앞으로도 영원히 들려질 하나님의 말씀이 될 수 있는가? 즉, 시간 속에 이루어진 사건이 어떻게 무시간적 메세지로 변화될 수 있느가이다.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무엇인가? 그것은 영원하신 하나님이 인간 역사 속에 개힙하셨다는 사실 위에 설명될 수 있다. 그것을 어떻게 찾을 수 있는가? 우선 무시간적인 영원한 메세지가 죄기 위해서 역사 속에서 비영원적인 모든 요소들을 제거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그리고 영원하시고 변함이 없으신 하나님의 모든 것을 찾아야 한다.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 역사를 인간적인 조건 하에서 보아서는 안되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인간적인’ 역사 속에서 나오기 때문에 역사적 사실 즉, 분명한 역사성에서 출발해야 한다. 쉽게 말해서 하나님이 인간 역사 속에 친히 개입하신 활동이 성경이므로 인간 삶 속에 개입하신 하나님의 해위가 중요한 것이지 개입하지 않은 것은 우리에게 아무런 의미를 전달해주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구약 역사 연구에 있어 배경 및 고고학 연구를 소흘히해서는 안된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해석의 도구일 뿐 해석 그 자체가 아님을 명심해야 한다. 여기서 우리가 성경 역사를 대할 때, 성경 어느 부분만을 역사적으로 취급하지 않도록 주의하는 것이다. 우리는 성경 전체가 역사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분명히 인식해야 한다. 역사성이 없다고 전제하고 성경을 대하는 것은 성경에서 하나님 말ㅆ믐을 듣는 것을 스스로 포기하는 것이다. 단지 약사성이 우리 시야에서 확연하게 드러나고 그렇지 않고의 차이일 뿐이다. 시간적인 역사적 사실과 무시간적인 하나님의 말씀은 한상 연결되어야 하며 어느 하나를 강조한다면 그 진정한 근거를 상실하게 되어버리고 만다. 또한 여기서 주의해야 할 점은 하나님 말씀을 단순한 도덕적.모범적 교훈과 동일시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왜냐면, 도덕적.모범적 교훈들은 시.공과 문화의 제약을 받는 것으로서 결코 영원하신 하나니므이 말씀이 될 수가 없는 것이다. 모든 문화 시대를 초월한 하나님의 행위여야 한다. 그러나 그것반으로는 불충분하다. 왜냐면 그것을 듣는 우리는 우리 시대의 상황과 문화의 삶의 제문제들이라는 울타리 속에 갇혀 있기에 듣기는 들어도 깨다도 이해하지는 못하기 때문이다. 이제 중요한 것은 듣는 자듥로 하여금 깨닫는 것을 돕는 것이다. 그것이 이른바 적용의 해석이다. 이단계에서는 우리 시대의 삶 속에 그 부시간적인 여우언의 메세지가 어떤 의미를 주고 있는가하는 역사의 역사성을 현실화하는 작업이다. 과거 역사가 오는 여기에 의미기 있게 하기 위해서 과거 사건이 그 당시 어떤 부류의 사람들에게 어떤 의미를 주었는지 밝혀야 하며 그것이 오늘과 미래에 어떤 의미를 줄 것인가를 ‘예측’하여야 한다. 그러한 의미에서 성경 역사의 올바른 해석자는 예언자적 역활을 감당해내는 것이다.

 

11.성경 역사 이해를 위한 해석학적 질문

 

I.역사적 사실들에서 출발할 것

(역사적 질문)

1)무슨 사건이 발생했는가? 그 사건은 누구에게 어떤 의미를 주는가?

2)그 당시 고고학적 자료 및 사회/문화적 배경은 어떠한가?

(문맥적 질문)

3)저자가 어떤 파라다임을 사용하여 교훈하고자 하는 바는 없는가?

4)대조시키는 인물이나 사건은 없는가?

5)저자가 사용하는 독특한 문체나 글의 분위기는 어떠한가?

6)이 사건을 이해하는데 빛을 던져주는 이전의 사건은 무엇인가?

(성경적 질문)

7)이 사건은 하나님 또는 선지자의 어떤 메세지를 확증시켜주는가?

또, 이 사건과 짝을 이루는 말씀이나 사건은 무엇인가?

 

II.하나님의 행위를 설명하고 선포하라.

1)하나님이 하신 일들은 어떠한가? 그는 무엇을 준비, 말씀, 심판,

구원, 확증, 또는 약속하셨는가?

2)하나님이 왜 그 일을 행하셨는가? 그 해답은 자신의 신실하신 언약

적 수행을 보이시기 위함이시다. 그 언약적 다스리심이 어떤 방식으

로 나타났는가? 그 언약 이행의 과정을 상세히 열거해보라.

3)하나님의 하신 그 일은 사단에게, 언약의 공동체에게, 비언약 공동

체에게 어떤 선언적인 의미를 가지는가?

 

III.그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져야 할 구체적인 영역들

1)그것은 나와 우리의 삶의 깊은 필요성과 관심사를 어떻게 채우는가?

2)그것은 우리 이웃에게 무엇이라 말해주고 있는가?

3)그것은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애 무엇을 말해주고 있는가?

4)그것이 지금 당장 실천을 요구하고 있는 바는 무엇인가?

 

IV.확인/검토 작업

1)나(해석자)는 성경의 것 이외의 세계관과 세속 역사관을 성경에 집

넣지는 않았는가?

2)나(해석자)는 성경의 이 해석된 메세지에 자신의 생명을 걸 자신이

있는가? 자신의 해석에 이같은 각오와 고백이 없다면 아직도 올바른

해석이 이루어지지 않은 것임을 알아야한다. 왜냐면 그것은 아직 나

를 변화시키지 못하였기 때문이며 다른 사람을 변화시키지 못할 것

이기 때문인 것이다. 해석자는 자신의 해석에 자신의 생명을 걸어

야 한다.

3)나(해석자)의 해석이 다른 건전한 주석가들의 해석과 비교되었는가?

 

V.종합/정리 작업

1)나의 해석이 전체 성경의 흐름과 맥을 같이하는가? 전체 성경의 메

세지에 어떻게 조화될 지 설명할 수 있는가?

2)나의 해석이 체계적으로 기록되도록 하라.

3)나의 해석을 어떤 모양으로든지 다른 사람에게 전달하도록 하라.

 

12.성경 역사에 대한 문자적 해석의 의미

(Vorn S. Poythress, UNDERSTANDING DISPENSATIONALISM, 권 성수 역, 「세대주의 이해」, 서울: 총신대 출판부, 1990. pp.105--132 참조.)

구약 역사는 원칙적으로 문자적으로 해석되어야 한다. 그러나 통상 ‘문자적’ 해석이 오해되어져 있다는 사실을 해석자는 이해하여야 한다. 그것이 어떻게 오해되고 있는가? 세대주의자들의 경우, 그들은 ‘문자적 해석’이 ‘얼른 생각나는 평범한 해석’ 으로 취급해버림으로 은연중에 자신들 나름대로의 신학 체계와 방법을 도입하는 위험을 안고 잇다. (그 예들은 위의 책을 참조하라.) 우리는 한 단어에서 신학을 연역하는 오류를 범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염두에 두면서 문자적 의미를 세 가지로 살펴보고자 한다.

 

첫째, 단어의 문자적 의미는--그것이 문맥과 상관없을 경우--모국어로 사용하는 자들이 흔히 생각할 수 있는 의미라고 할 수 있다.

 

둘째, 유기적인 전체로 읽되, 가급적이면 가장 평범한 방식으로 읽는다는 의미이다.

 

셋째, 유기적인 전체에 비추어 읽고, 각 구절을 본래의 인간 저자와 본래의 상황에 비추어--즉, 문맥적으로--이해하려고 하는 해석이다. 그 구절이 기록될 당시에 비추어 어떤 이해와 추리가 정당한가를 묻는 것이다.

 

문자적 해석은 아무 근거 없이 되어지는 일방적인 어떤 것이 아니다. 그것은 분명한 근거와 원리에 의해서 해석되는 것이어야 한다. 문명한 근거가 없는 일방적인 해석을 자연스러운 해석이라고 할 수는 없는 것이다. 문법적역사적 해석이란 인간 저자들이 그들 자신의 글을 통해서 무슨 의미를 전달하였는 지를 묻는 해석이다. 그것은 추측이라는 심리학적 사변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즉, 저자의 의중에 있는 독자들이 그 본문과 귀절을 어떻게 이해했으리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며 정당한가에 대한 문제이다. 그러나 이해한 것만이 아니라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암시적인 어떤 내용이 있다고 본 그것도 포함된다. 이것은 예언서에 특히 그러하다. 우리는 예언서에 있어서 문자적 해석을 함부로 적요해서는 아니된다. 역사서와는 달리 그것은 오히려 본문의 참된 의도를 왜곡시킬 위험을 안고 있다.

 

13.역사와 모범적 해석

해석자가 역사적 해석을 추구한다고 하는 것이 모범적 해석을 배제한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역사적 해석은 그 자체가 모범적 해석을 내포하고 있음을 생각할 필요가 있다. 역사가가 역사를 기술하는 것은 독자가 과거를 통해 무엇인가 교훈을 깨닫게 하려는 것이 그 중심된 저술의 목적이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고 단순히 과거의 사건을 나열한다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성경 역사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인 것은 분명하다. 우리가 하나님의 행위를 추구할 때 자칫 잘못하여 이러한 역사가의 교훈적 의도를 무시할 경향이 매우 짙다. 이러한 경향은 최근 구속사적 해석학파에서 두드러진다. 하나님 나라의 성경해석은 인간적인 행위를 제외시키지 않는다. 왜냐면 하나님의 나라가 바로 다름아닌 인간 행위에 의해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행위가 무시된 세속적인 도덕적 교훈을 도출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우리는 그러한 차이를 성경 사무엘상 20 장의 내용을 살펴봄으로 더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삼상 20 장은 다윗과 요나단의 우정을 매우 감동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여기서 단순히 우정의 세계에서 본문을 바라본다면 그것은 참 하나님의 말씀의 의미를 간파하지 못한 것임을 알아야 한다. 왜냐면 ‘우정’은 인간적인 것이며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왕되심을 전혀 말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면 어떻게 여기서 세속적인 단순한 모범적 교훈을 지양하고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모범을 이끌어 낼 수 있을까? 우선 본문의 영적 분위기를 잘 음미해보라. 여기서 강조되는 것은 단순한 인간의 우정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사울을 폐위시키시고 다윗을 세우실 것을 작정하셨는데 이러한 하나님의 주권적 다스리심에 사람은 각기 어떠한 반응을 보이는가를 주목하여야 한다. 즉, 요나단은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고 있지만 사울은 그렇지 못하고 자신의 나라를 구축하려고 한다는 사실이다. 바로 이러한 하나님 나라를 향한 믿음 위에서 다윗과 요나단은 서로 아름다운 우정을 소유하고 있는것이다. 이 점에서 그들의 우정은 인간 사회에서 이해되는 그러한 우정과는 전혀 그 차원이 다른 것이다. 그것은 신앙의 세계이다. 한편, 다윗의 입장에서 볼 때, 요나단의 도움은 하나님의 약속과 선책--자신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삼겠다는--의 신실함과 확실함을 깨달을 수 있게 한다. 분명히 승리는 내게로 돌아온다는 확신을 요나단의 믿음을 통해 얻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 점에서 ‘우정’이라기 보다 ‘성도의 거룩한 교제’라고 불러야 할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가 본받아야 할 것은 무엇인가? 다윗의 믿음과 요나단의 믿음이며 그 믿음위에서 이루어지는 아름다운 교제가 아닐까? 또한 우리는 사울이 그러했던 것처럼 하나님의 나라가 아니라 자신만의 나라를 세우려는, 하나님이 친히 진정한 왕으로서 다스리시는 언약 공동체를 자신이 다스리는 왕국으로 전락시켜버리려하는 시도들을 본받지 않도록 경계해야 될 것이다. 우리는 어떠한 환경이 와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 약속을 신뢰하지 못하게 하더라고 ‘요나단 처럼’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자세를 배워야 할 것이다. 우리 교회 내에서의 성도의 교제가 바로 이러한 믿음 위에서 이루어 지고 있는가? 나는 과연 그러한 교제를 누리고 있는가? 그들처럼 그 속에서 하나님의 약속의 신실함을 증거하고 잇는가?

 

해석자는 이처럼 인간의 행위를 전혀 무시해서는 않된다. 하나님의 행위가 잘 관찰되지 않는 본문들이 너무나도 많다. 그럴 경우 우리는 당황하게 된다. 우리 해석자는 그 속에서 하나님 나라에 입각한 진정한 교훈을 이끌어 내야 한다. 하나님의 약속과 그 신실하심에 대한 경외심과 찬양에 입각한 세밀한 관찰이 없이 단순한 인간 도덕적 교훈을 이끌어 내지 않도록 주의해야만 한다. 성경에 나오는 인간행위들은 모두 하나님 나라의 반영임을 생각하고 그들의 행위가 하나님의 나라와 어떤 관계가 있는지 관칠해보아야한다.그들의 행위가 그 나라에 대하여 무엇을 말해주고 있는가? 어떤 믿음이 그 행위를 하게 하였는가? 그 행위들은 하나님의 언약적 통치와 그분의 약속과 그분의 신실하심을 어떻게 증거하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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