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설교

예수 그리스도의 시험(2)-돌을 떡으로 만들라

등불지기 2012. 2. 19. 18:44

예수 그리스도의 시험(2)

돌을 떡으로 만들라

본문:마태4:2~4 김 광 락 목사

사십 일을 밤낮으로 금식하신 후에 주리신지라 시험하는 자가 예수께 나아와 가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이 떡덩이가 되게 하라”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I. 사단이 예수님께 와서 가장 먼저 시험한 것은 배고픔을 이용한 것이었습니다. “사십 일을 밤낮으로 금식하신 후에 주리신지라” 이 배고픔의 문제는 사람이 가지고 있는 욕구 중에서 제일 강한 것입니다. 그리고 제일 기본입니다. 사단은 바로 인생이 가지고 있는 가장 기본적인 욕구를 통해서 시험을 주고 있습니다.

A. 예수님도 우리와 똑같은 육신의 욕구를 가지고 계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시지만 사람의 몸을 입으셨기 때문에 사람이 느끼고 욕구하는 바를 똑같이 가지고 계셨습니다. 그런 그분께서 40일을 온전히 금식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40일 동안 금식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성경에서 40일은 하나님의 심판을 나타내는 기간입니다. 최초로 노아홍수가 40일 동안 땅에 있었습니다. 또 모세가 시내산에서 거룩하신 하나님으로부터 율법의 말씀을 받고 새언약을 맺을 때에 40주야를 금식했습니다. 엘리야가 40주야를 걸어서 호렙산에 도착했습니다. 요나가 니느웨 백성들에게 선포한 회개의 기간이 40일이었습니다. 또 에스겔이 범죄한 자기 백성을 위해 회개한 기간도 40일이었습니다. 이렇듯 40일은 하나님의 심판을 의식하고 구원의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기 위해서 겸손히 낮아지는 기간이었습니다. 예수님이 40주야를 금식하신 것은 모세가 새로운 율법을 받아 이스라엘 시대를 열기 위해 40일 금식한 것과 같이 예수님도 새 언약의 시대를 열기 위해 40일을 금식하신 것입니다. 바로 저와 여러분을 하나님의 진노로부터 구원하기 위해서 친히 40주야를 금식하신 것입니다.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친히 굶주림을 경험하셨습니다.

B. 이렇게 40일 금식을 끝난 직후에 마귀가 예수님께 찾아온 것으로 봅니다. 마귀가 예수님께 찾아온 때를 보면서 우리는 두 가지를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첫째, 우리 역시 이렇게 기도를 끝낸 후를 주의해야 합니다. 기도할 때보다 기도를 끝낸 후에 마귀의 공격을 받기 쉽습니다. 훗날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를 끝내시자 마자 가룟유다와 유대군병들이 찾아온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작정하고 기도할 때는 아무런 문제가 생기지 않습니다. 그러나 기도를 다 끝내는 순간 방심하는 그 순간에 마귀가 틈타기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둘째, 사단이 시험하는 방법 중에 가장 기본적인 것이 우리 처지를 가만히 살펴보는 것입니다. 풍족하고 넉넉하면 교만해지도록 시험합니다. 가난하고 어렵고 궁핍할 때에는 하나님을 향해 불평하고 원망하도록 시험합니다. 소유욕이나 탐욕으로 가득 찬 모습을 보면 물질로 시험합니다. 사단은 우리 마음속에 있는 욕구가 어느 쪽으로 쏠려 있는지 먼저 조사한 뒤에 그쪽으로 기울도록 계기와 형편을 마련합니다.

C. 예수님이 40일 금식을 마친 후 사단이 시험하려고 다가온 사실은 우리에게 중요한 세 번째 영적 교훈을 줍니다. 사단은 우리 마음 안에 있는 인생의 기본적인 욕구를 이용하는 것입니다. 즉, 사단이 우리를 힘들게 하고 넘어지게 하고 무너뜨리는 근거는 바로 우리 마음 안에 있다는 사실을 잘 알아야 합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주리지 않으셨더라면 사단은 돌을 떡으로 만들라는 시험을 하지 않았을 겁니다. 만약 우리 마음 안에 어떤 욕구가 있는지 알게 된다면 사단이 어떤 시험을 하게 될 것인지 알게 될 것입니다. 만약 우리 마음 안에 있는 욕구를 알아내고 그 욕구를 다스릴 줄 안다면 사단의 시험도 다스릴 줄 알게 될 것입니다. 지피지기(知彼知己)면 백전백승(百戰百勝)이라 한 속담은 영적 전쟁에서도 통하는 원리입니다. 나를 잘 아는 사람은 마귀의 시험에서 승리하기 쉽습니다. 내가 어떤 존재이며 어떤 연약함을 가지고 있는지 잘 알면 마귀의 시험에서도 이길 수 있는 확률이 높아집니다. 그래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만약 우리가 우리 자신의 모든 욕구(desire and need)에 대해서 죽는다면 사단은 전혀 우리를 시험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날마다 십자가에 못 박혀 죽기를” 원했고 또 죽는 연습을 날마다 했던 것입니다. 사단의 무서운 시험이 올 때 우리는 우리 마음을 살피고 우리 안에 어떤 욕심이 있는지 살펴야 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선언해야 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힌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니라” 내가 스스로에 대해서 십자가 죽음의 선언을 하는 순간 모든 사단의 시험을 넉넉하게 이기는 힘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내 안에 있는 온갖 정욕과 욕심과 욕구에 대해서 주님과 함께 죽을 때 사단은 우리에게 어떻게 접근해서 시험할 틈을 찾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십자가만이 우리의 능력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II. 이렇게 예수님이 굶주리셨고 배고프셨을 때 마귀가 다가와서 시험했습니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이 떡덩이가 되게 하라.” 돌을 떡으로 만드는 것이 사단이 생각한 첫번째 시험이었습니다. 그런데, 여기 아주 어려운 문제가 있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은 어떤 분입니까?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실 때 예수님도 함께 하셨습니다. 예수님도 말씀으로 천지를 친히 창조하셨습니다. 그런 예수님께 있어서 돌을 떡으로 만드는 것쯤은 아무런 문제도 아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공생애 초기에 가나 혼인잔치에서 물을 포도주로 만드신 분이십니다. 그리고 물고기 두 마리와 다섯 개의 떡으로 남자 오 천명을 먹이고도 남기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돌을 떡으로 만드는 것이 왜 안 되는 것일까요? 본문이 말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만약 예수님이 이때 돌을 떡으로 만드셨다면 우리는 여전히 구원받지 못하고 죄인으로서 살아가고 있을 겁니다. 문제는 예수님에게 있어 너무나 간단하고 식은 죽 먹기 식의 일이 왜 안 된다는 겁니까?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분이 돌을 떡으로 만드는 것은 왜 안될까요? 오병이어의 역사를 베푸신 분이 왜 돌을 떡으로 만드는 것은 안됩니까? 게다가 돌을 떡으로 만드는 것은 다른 사람에게 해를 입히는 것도 아니고 육신의 정당한 필요를 채우는 일인데 왜 안된다는 겁니까?

A. 우리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언약을 이해해야 합니다. 언약에는 생명의 약속과 규정이 있습니다. 아담은 하나님이 금지한 실과를 먹지 않는 한 영생할 수 있었습니다. 아담이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행위언약이라고 하고, 예수님이 맺으신 언약을 구속언약이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구속주가 되시기 위해서는 한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그것은 흠 없는 어린양이 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온전한 인간이 되셔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성부와 똑같은 신성과 권능을 가지고 계셨지만 온전한 인간이 되시기 위해서 그것을 사용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자신을 비우시기로 하나님과 거룩한 언약을 맺으셨기 때문에 신적인 능력을 사용하는 것은 금지되어 있었습니다. 오직 예수님은 성령의 허락하심과 능력주심의 범위 내에서만 기적을 행하셔야만 했습니다. 사단이 시험하는 것은 육신의 욕구를 채우기 위해서 금지된 신성을 사용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세례요한에게 세례 받으심으로 모든 의를 이루시고자 하신 예수님의 의도가 이루어지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죄인들을 구속하시기 위해 흠 없는 어린양이 되시려는 예수님의 의도가 실패하는 것입니다.

B. 그 다음으로 만일 예수님이 돌을 떡으로 만드셨다면 사단의 지시대로 따른 것이 되기 때문에 금지된 것입니다. 여러분, 아무리 합리적이고 기본 욕구에 근거하는 것이라 할지라도 사단의 지시대로 순종하는 것은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것이 되는 겁니다. 사단에게서 나온 것은 아무리 좋고 합리적이더라도 우리에게 독이 되는 겁니다. 바울 사도가 복음을 전할 때 귀신들린 여자가 따라다니면서 “이 사람은 하나님의 큰 종”이라고 선전할 때에 아무리 맞는 말이지만 바울이 그 말에 “맞아 맞는 말이야”라고 고개를 끄덕거리며 동의했더라면 복음전파에 실패하고 말았을 겁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 귀신을 꾸짖고 내쫓았던 겁니다. 맞는 말이라도 귀신들에게 나온 것은 다 거부해야 합니다. 꼭 필요한 것이라 할지라도 마귀로부터 말미암은 것은 다 거절해야 합니다.

C. 만일 예수님께서 사단의 제안대로 돌을 떡으로 만들었다면 예수님은 하나님을 의심하고 불신한 것이 되고 맙니다. 3장에 예수님이 세례받으실 때 하늘로부터 들린 음성이 무엇입니까?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그래서 사단이 예수님에게 물은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네가 정말 하나님의 아들인가? 그렇다면 그 증거를 보여달라” “네가 정말 하나님의 아들이 맞는가? 그렇다면 네 배고픔을 해결하기 위해서 능력을 행해보아라” 예수님이 돌을 떡으로 만드셨다면 하나님의 사랑과 인정하심을 의심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 것입니다.

D. 만일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돌을 떡으로 만드셨다면 광야에서 만나를 내려 굶주린 출애굽 백성을 먹이신하나님의 사랑과 공급하심을 불신하는 것이 됩니다. 하나님은 공중의 새도 친히 먹여주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이 돌을 떡으로 만드실 수 있는 능력이 충분히 있으셨음에도 그렇게 하지 않으신 것은 하나님의 공급하심을 믿으셨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일이나 오병이어의 이적은 예수님 스스로의 필요를 채우기 위해 행하신 기적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행하신 모든 이적의 역사들은 예수님 자신을 위한 것이 결코 아니었습니다. 여기서 아주 중요한 원리가 나옵니다. 우리가 만일 우리 자신의 필요와 욕구를 채우기 위해서 어떤 기적이나 능력을 요구한다면 사단의 시험에 넘어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은사나 능력은 나 자신을 위해 주신 것이 아닙니다. 섬기라고 주신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나의 욕구를 채우기 위해서 주님이 주신 능력을 행하하려고 시도하는 것은 사단의 계략에 말려드는 것임을 잘 알아야 합니다.

E. 또, 예수님이 돌을 떡으로 만드는 능력을 시범적으로 보이는 것과 같이 우리도 우리에게 주어진 능력을 가지고 자신을 과시하기 위해서 사용하는 것은 사단의 시험에 넘어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람들이 내가 가진 능력을 알아주지 않고 인정하지 않을 때 우리는 나서서 내가 가진 능력을 과시하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힐 때가 있는 데 그 때가 바로 시험에 넘어지기 쉬운 때인 것입니다. 사단은 이렇게 굶주리신 예수님을 조롱한 것입니다. “네가 정말 하나님의 아들인가? 그렇다면 돌을 떡으로 만들어보아라” 이렇게 시험한 사단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에도 같은 말로 조롱했습니다. “네가 정말 하나님의 아들인가? 그렇다면 작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라”(마27:40) 우리는 사람들이나 사단이 우리를 놀리고 조롱하고 약올릴 때 조심해야 합니다. 원수들이 조롱하고 비웃을 때 우리는 함부로 우리 자신의 능력을 과시해서도 안될 것이고 자랑해서도 안될 것입니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해야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인정하지 않는다고 속상해하는 것은 이미 사단의 시험에 넘어간 증거입니다. 충분히 능력과 자격이 있는데도 남이 알아주지 않을 때 얼마나 속상한 지 모릅니다. 그러나 바로 그 순간이야말로 넘어지기 쉬운 때입니다. 마귀가 우리를 시험하는 방법이 바로 그것입니다. “네가 정말 은사자가 아니냐?” “네가 정말 능력자가 아니냐?” “네가 정말 충분히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졌지 않느냐?” “너는 정말 대단하지 않느냐?” 마귀는 우리 자신을 인정하고 높이는 척 말하지만 사실은 비웃는 것이고 조롱하는 것이고 하나님을 의심하게 만드는 것이고 비교의식에 빠지게 하는 것이고 열등감에 빠지게 하는 것입니다.

III. 이런 교묘한 시험에 예수님은 어떻게 승리하셨습니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마4:4) 예수님께서 이 시험에서 승리하신 비결은 신명기 8:3절 말씀을 그대로 인용하신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시험 당할 때 기록된 성경말씀을 입으로 시인하는 순간 무서운 시험을 이기는 줄 믿습니다.

A. 신명기 8:3은 이렇게 말합니다: “너를 낮추시며 너로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이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슴으로 사는 줄을 너로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 말씀은 광야 40년의 삶을 마무리하고 가나안 땅으로 곧 들어가게 될 광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한 모세의 설교입니다. 40년간의 광야생활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나님께서 광야 이스라엘 백성을 낮추시는 기간이고, 일부러 주리게 하신 기간이고, 신기한 방법으로 먹고 사는 기간입니다. 왜 그렇게 이스라엘을 연단하셨는가? 광야 40년간을 인도하시고 연단하신 하나님의 깊은 뜻이 무엇인가? 그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알게 하려 함”입니다.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함에 달려 있지 않음”을 보여주시기 위함입니다. 사람이 정말 살아가는 것은 의식주문제가 해결될 때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갈 때임을 깨닫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이와 같이 광야 이스라엘 백성을 연단하신 하나님은 오늘 우리 인생들도 그렇게 연단하고 계십니다.

B. 그래서 구원받고 소명을 받은 하나님의 종들과 하나님의 백성들이 구원받은 후 가장 먼저 연단받는 부분이 바로 이 의식주 문제입니다. 물질 문제입니다. 먹는 문제입니다. 돈 문제입니다. 우리가 예수 믿기 전에는 돈이 살아가는데 꼭 필요한 줄로 알았는데 하나님은 그 생각을 깨뜨리십니다. 우리는 먹고 마시는 이 의식주 문제가 해결되어야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다고 믿었는데 그것으로 행복할 수 없다는 사실을 보여주시기 위해서 일부러 의식주 문제나 물질 문제에 대해 고달프게 만드십니다. 빈궁하게 만드십니다. 하나님이 부르시는 모든 종들이 가장 먼저 연단받는 부분이 이 의식주 문제 물질 문제를 완전히 하나님께 맡길 수 있도록 연단하십니다. 하나님보다 돈이나 물질이나 의식주 문제에 연연하는 한 절대로 하나님은 약속하신 가나안에 들여보내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 사랑하는 자녀를 반드시 이 의식주 문제로 먼저 연단하십니다. 그래서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인생으로 만들어 가십니다.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할 때” 모든 의식주와 물질문제도 주님이 친히 해결하시고 인도하시는 줄을 체험하게 하십니다. 그래서 계속해서 하나님이 주신 사명에 집중하게 만드십니다. 우리 삶을 참으로 행복하게 만드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그것은 떡문제가 아닙니다. 그것은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만이 우리를 참으로 행복하게 만듭니다.

C. 많은 사람들이 이 의식주 시험에서 더 나아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 시험에 통과하기 위해서 어떤 사람은 일년이 걸리기도 하는데 어떤 사람은 10년 20년씩이나 걸려서 겨우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고 말씀에 순종하는 인생이 되기도 합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지금 여러분은 어떤 연단의 단계에 와 있습니까? 이 연단의 단계에서 승리하려면 어떤 말씀이 도움이 되는지 성경을 보십시오. 말씀을 달라고 기도하십시오. 그리고 주님이 주시는 그 말씀을 붙잡고 나가십시오. 그러면 속히 그 시험을 이기고 벗어나게 될 것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이 의식주 문제, 인간의 가장 근본적인 욕구인 이 굶주림의 문제, 생활고의 문제로 곤경에 처해 있다면 주님이 사단에게 던진 성령의 검을 내 것으로 만드시는 것이 도움이 될 것입니다.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IV. 우리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순종하는 인생, 물질이나 의식주나 생활고로 얽매이고 연연해하는 그런 인생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하나님이 주신 비전과 목적에 순종하는 그런 인생으로 만들어가기 위해서, 사람의 생명이 소유의 넉넉함에 있지 않음을 보여주시기 위해서, 참으로 행복한 삶이 물질이나 먹는 것에 달려 있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 우리를 일부러 굶주리게 하십니다. 일부러 우리를 빈궁하게 하십니다. 일부러 서럽게 하십니다. “네가 정말 이만한 사람인데 왜 고작 그렇게 밖에 못사느냐?”는 사단의 조롱을 받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일부러 우리가 가진 것을 빼앗아 가시기도 합니다. 우리가 가진 힘을 약하게 하시기도 합니다. 일부러 장사가 안되게 하시기도 합니다. 일부러 배고프게 하십니다. 만일 여러분의 하는 일이 갑자기 안되고 안풀리고 자꾸 꼬이고 막히면 기억하십시오. ‘아, 내가 지금 사단의 시험을 받고 있구나’ 그러나 또 기억하십시오. 우리는 예수님보다 더 배고플 수 없고, 예수님보다 더 낮아질 수는 없고, 예수님보다 더 빈궁할 수는 없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러나 그 가운데서도 말씀으로 능히 승리하신 그리스도를 우리도 본받을 때 우리는 삶 속에서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인생으로 쓰임 받게 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