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설교

시편23편 강해(7)-나는 돌아갈 집이 있습니다

등불지기 2012. 2. 19. 06:40

영원한 집을 사모하며 선한 목자되신 주님의 인도를 받으며 순례의 길을 가시는 모든 분들을 예수님의 이름으로 사랑하고 축복합니다!!

시편23편 강해(7)

본문: 시23:6절 김 광 락 목사

“나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

 

■ 이제 이 아름다운 시편의 마지막 결론을 살펴보게 되었습니다. 이 마지막 6절 말씀은 이 시편만큼이나 아름다운 신앙고백으로 결론짓고 있습니다.

▶시편 23편을 다시 한번 정리해봅시다. 이 시편은 목자로서 경험이 풍부한 다윗이 기록한 노래라고 했습니다. 다윗은 양떼들을 돌보면서 그리고 사랑하는 양떼들을 바라보면서 하나님께서 친히 자기 자신을 이렇게 돌보시고 또 바라보시고 계신다는 영감을 얻어서 노래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신이 양떼들을 보살피는 것과 똑 같이 하나님께서 자신을 그렇게 돌보신다는 사실을 체험을 통해서 알게 되었습니다. 자기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전체를 이와 같이 --자신이 양들을 돌보는 것과 똑 같이-- 친히 돌보신다는 사실을 성령으로 깨닫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다윗의 신앙을 통해서 중요한 신앙의 한가지 원리를 보게 됩니다. 생활 가운데서 하나님의 임재를 발견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 생활과 동떨어진 하나님이 아니라 자기 생활과 밀접한 하나님을 고백합니다. ‘무소 부재하신’ 혹은 ‘생사화복을 주장하시는’ 등 이런 거창한 말로 하나님을 높이는 것도 필요하지만 중요한 것은 내 일상생활 속에서 --다윗은 목자로서의 생활 속에서 하나님을 발견했던 것같이-- 가까이 계시는 하나님을 높여드려야 할 것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임재가 얼마나 가까이 있는지 잘 알았습니다. 생활 속에서 보았습니다. 양들을 바라보면서 자기 자신을 바라보았고, 이스라엘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렇기에 다윗은 이스라엘을 조롱하는 골리앗을 향해서 담대하게 나아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양떼들을 공격하는 사자나 곰이나 다른 맹수들을 향해서 분노하는 심정으로 막대기를 던지고 물매돌을 던졌던 다윗은 단지 그것에서 그친 것이 아니라, 그렇게 하는 자신의 행동 속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발견한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이 자신을 위해 싸우신다는 믿음을 다윗은 생활 속에서 체험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맹수들에게 던지던 것과 똑같은 심정으로 골리앗을 향해서 돌을 던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 신앙이 생활과 이원화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 삶 속에 능력이 없는 것이 아닙니까? 만약 우리 역시 다윗처럼 일상생활을 영위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임재를 가까이 느낄 수 있고 그렇게 확신할 수만 있다면 또 다른 ‘골리앗’을 만나더라도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고, 평소와 같이 승리하게 될 것입니다.

▶시편 23편은 목자가 양을 치는 1년 동안의 모든 과정과 주기를 보여준다고 했습니다. 1절은 이 시편의 제목이 됩니다. 2절은 울타리가 쳐져 있는 목장에서 목자가 양들을 인도하고 먹이는 모습입니다. 3절은 이제 목자가 양들을 데리고 먼 길, 고원 위의 초장으로 길을 떠나는 모습을 그려줍니다. 4절은 고원 위의 초장에 다다르기 전에 반드시 지나가야 하는 협곡을 지날 때의 상황입니다. 5절은 험한 골짜기를 고생하면서 지난 후 양들의 목전에 펼쳐지게 되는 대평원의 푸르고 푸른 초장을 보여줍니다. 6절은 이제 목자가 양들을 데리고 다시 고원에서 내려와서 본향, 본집으로 돌아가서 쉬는 장면입니다.

▶시편 23편을 시간적으로 보면 이렇게 정리할 수 있습니다. 봄철이 되면 목자는 홀로 고원 위로 올라가서 나중에 양들을 데리고 올 때를 대비해서 모든 작업을 해둡니다. 독초를 뽑는다든지 혹은 거름을 뿌린다든지 혹은 맹수들을 살펴본다든지 하는 것입니다. 무더운 여름철이 오면 선선한 고원위로 양떼들을 인솔해갑니다. 양들은 고원위로 가기 전에 협곡을 지나가면서 최고의 위험을 극복해야 합니다. 목자가 가장 신경 쓰는 때가 바로 이 시기입니다. 드디어 고원 위로 올라가면 목자가 미리 예비해 놓은 양질의 목초지가 양들의 눈앞에 확 펼쳐지게 됩니다. 이 때 양들은 너무 좋아서 펄쩍펄쩍 뛰게 됩니다. 선선한 고원에서 양들과 함께 여름철과 가을철을 보냅니다. 그곳에서 목자는 양들 하나 하나를 어루만지면서 사랑을 베풉니다. 예를 들면, 양들의 머리 위에 기름을 부어 벌레가 달라붙지 못하도록 합니다. 기름을 부어 양들의 병을 치료하기도 합니다. 겨울철이 오기 전에 양들을 데리고 다시 내려가서 본래 왔던 고향인 목장으로 돌아가서 그곳에서 기나긴 겨울을 편히 쉬게 됩니다.

■ 오늘 본문은 그런 의미에서 나온 고향으로 다시 돌아가서 편히 쉬는 양들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이것은 성도가 본향에 돌아가서 주의 품에 안기어 영원히 쉬는 것을 가리킵니다.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돌아갈 고향은 이곳이 아닙니다. 저곳입니다. 이 땅이 아닙니다. 저 하늘나라입니다. 세상에서 성공하고 출세하고 세상에서 편히 여생을 보내는 것이 우리가 살아가는 궁극적인 목적이 아닙니다. 주님 품에 안기는 것이 궁극적인 목적입니다.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이 땅은 언젠가는 없어질 것입니다. 영원한 곳은 저 천국입니다. 많은 분들이 왜 지상의 것을 가지고 연연해하는지 모릅니다. 세상에서 성공하는 것이 그렇게도 중요합니까? 내 집 마련하기 위해 불로소득을 취해야 합니까? 내 삶의 안일함을 위해 다른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사는 지는 무관심해도 좋다는 말입니까? 마치 이 땅에서 영원한 천국을 건설하려고 몸부림치면서도 신앙생활 한다고 할 수 있습니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 땅에 소망이 없다는 사실을 증명해 보이면서 살아야 합니다. 이 땅에 투자하고, 이 땅에 저금하고, 이 땅을 사놓는데 그렇게도 열심을 내고, 이 땅에 사람들의 이목과 주목을 받으려고 하고, 이 땅에서 무언가 탑을 쌓아보려고 하고... 땅의 것을 우리가 끊지 않으면 땅의 것이 도리어 우리를 하늘에서부터 끌어내릴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땅의 지체를 죽이라’고 말했습니다.(골3) 혹시 없어질 땅에 소망을 두지는 않는지요? 영원한 하늘나라에만 소망을 두시기를 바랍니다.

■ 본문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나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아멘. 다윗이 이 시편을 결론지으면서 내리는 위대하면서도 탁월한 신앙고백입니다. 다윗은 탁월한 목자이면서도 이 고백을 하는 순간에는 한 마리의 양으로서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고백하는 셈입니다. 즉, “나의 목자께서 내가 어떠한 경우에 처하든지 정녕 나를 선하고 인자하게 돌보실 것입니다.” 라고 말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어떤 일이 일어나든 어떤 상황이 벌어진다 하더라도 목자되신 주님께서 나를 선하고 인자하게 돌보신다는 말입니다. 어떤 상황이 벌어진다 하더라고 말입니다. 그러니까, 이 말은 선한 목자되신 주님께서 나에게 항상 좋은 상황과 축복스런 상황을 만들어주실 것이라는 말이 아닙니다. 이것은 주님을 내 형편에 맞추는 행위입니다. 그러나 다윗의 이 고백은 나를 주님게 맞추는 신앙고백입니다. 어떤 상황이 벌어진다 한들 나를 향한 주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은 변하지 않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주님을 이렇게 고백할 수 있습니까? 상황이 좋으면 주님께 감사하고 상황이 절망적으로 되어갈수록 “주님, 왜 나를 이런 상황으로 몰아가십니까?”라고 불평 원망하지 않습니까? 절망적으로 되어가는 상황 속에서도 다윗의 이 고백과 같은 고백을 주님께 드릴 수 있습니까? 다윗의 이 신앙고백은 주님을 향한 우리의 신뢰가 얼만큼 절대적인가? 혹은 상황에 따라 바뀌어지는 변덕스러운 고백이 아닌가? 라고 질문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어떻습니까? 건강을 잃어갈 때 이런 고백을 할 수 있습니까? 병원에서 ‘암’이라고 진단받았을 때도 이런 고백을 할 수 있습니까? “정녕 나를 따르리니” 라고 말입니다. 사랑하던 사람이 갑자기 죽었을 때 이런 고백을 할 수 있습니까? 기대했던 것과 전혀 다른 일이 일어나서 실망하게 되었을 때에 이런 고백을 할 수 있는지요? 사업이 안되고 부도맞을 때에 이렇게 고백할 수 있겠습니까? 자녀들이 어긋난 길로 빠져서 나쁜 친구들과 어울려 다닐 때도 이런 고백을 할 수 있을까요? 믿었던 사람이 나를 배신하고 버리고 상처를 주었을 때에도 이런 고백을 할 수 있겠느냐는 말입니다. 다윗은 바로 그런 상황 속에서도 그런 고백을 했던 사람입니다.

■ 그러면, 무엇이 다윗으로 하여금 그런 고백을 할 수 있게 만들었을까요? 무엇보다 다윗은 자기 생활 속에 가까이 임재하시는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그리고 다윗은 목자로서 생활하면서 목자되신 하나님을 알았고, 만났으며, 경외하는 가운데 믿음이 견고해졌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배신당하고, 버림받고, 죽음의 위협을 받으며, 억울한 누명을 쓰며, 인생의 비참하고 쓰라린 고난의 잔을 마실 때에 절망하기보다 자기가 과거에 돌보았던 양들을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어떤 상황에든지 선하고 인자하고 신실하게 돌보는 목자가 함께 있음을 생각했던 것입니다. 따라서 다윗은 어떤 상황에서든지 그리스도를 신뢰하는 법을 배운 사람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목동으로 충실하게 양떼를 치던 다윗을 부르셔서 이스라엘의 주권자로 삼으신 것은 평소 양떼를 치면서 목자되신 하나님을 섬겼던 그 믿음을 보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눈에 띄였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를 부르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합당한 사람을 찾으시는데 다윗과 같이 생활 속에서 하나님을 섬기고 경외하는 자를 찾고 계시는 것입니다.

▶구약에 다윗이 있었다면 신약에는 바울이 있습니다. 바울은 무엇이라고 고백합니까? “...내가 어떠한 형편에 처하든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4:11~13) “그러나 지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이 큰 이익이 되느니라. 우리가 세상에 아무 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 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 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딤전6:6~8) 바울은 어떤 형편에든지 그리스도만으로 만족했던 사람입니다. 빌립보서를 보십시오. 감옥에 갇힌 바울이지만 기쁨의 서신을 빌립보 교회에 보낸 편지가 아닙니까? 주를 위해 열심히 전도하다가 감옥에 갇혔으니 인간적으로는 분통이 터지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사도 바울은 감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있습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나름대로 열심히 주를 섬기다가 도리어 생활고가 찾아온다든지 주님을 위해 교회를 위해 열심을 내면 낼수록 오히려 고난과 시련이 더 가중될 때에 이렇게 기뻐하고 이렇게 만족하고 이렇게 감사할 수 있겠습니까? 왜 이런 상황과 이런 시련이 우리에게 주어질까요? 선한 목자 되신 주님이 우리를 돌보시고 인도하신다고 하는 확신이 있는지 시험받기 위함입니다. 선한 목자 되신 주님을 얼마나 신뢰하는지 측정하기 위함입니다. 주님이 일부러 이런 극한 상황으로 나를 몰아가시는 것처럼 보이는데도 다윗처럼, 바울처럼 감사할 수 있습니까? 목자가 맹수들이 우굴거리고 죽음의 위험이 도처에 깔린 좁고 좁은 협곡으로 양들을 몰아갈 때도 감사할 수 있을까요? 노련한 양이라면 그럴 수 있을 겁니다. ‘아, 지난번에 내가 이 길을 처음 갈 때는 목자를 원망하고 목자를 이해하지 못하고 목자를 따라가지 않으려고 하고 곁길로 가려고 했었지. 그러나 지나고 보니까 목자가 준비해둔 상을 베푸시려고 그랬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지. 그래서 이번에는 목자를 신뢰할 수 있어’ 그러나 처음 길을 떠나는 1년 생 양들은 마구 불평하고 원망하고 할 것입니다. ‘저 목자가 우리를 죽이려고 하는 게 아닐까?’ ‘저 목자를 따라 갔다간 우리가 몰살당하는게 아닐까?’ ‘우리가 저 목자를 정말 신뢰해도 될까?’ ‘내 생각에는 이 길로 가는 것이 결코 현명한 것 같지 않은데 말야’ 이렇게 생각할겁니다. 그러나 몇년 목자를 따라가 본 경험이 있는 양이라면 이번에도 우리를 돌보아 주실 것이라고 생각할 겁니다. 그렇습니다. 선한 목자되신 주님은 ‘합력해서 선을 이루시는 분’이십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최선의 것으로 예비하시는 주님, 어떤 형편에서도 최선의 방법으로 인도하시는 주님을 믿을 때 참 평안이 내게 오는 것입니다. 선한 목자되신 주님은 우리를 위하여 목숨까지 버리신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경우에서든지 선하고 인자하게 우리를 돌보아주실 것을 확실히 믿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상황, 어떤 경우, 어떤 시련, 어떤 절망을 만나든지 간에 우리 주님을 이렇게 고백할 수 있으려면 주님이 어떻게 나를 인도하셨는지 생각하고 깊이 마음에 새겨두어야 합니다. 지금 절망가운데 있습니까? 점점 절망의 늪 속으로 빠져 들어가십니까? 과거에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 나를 어떻게 인도하셨는지 주님의 그 손길을 기억해보시기 바랍니다. 과거에 받은 은혜와 축복을 새어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지금 당하는 고난과 시련 속에서도 “나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라고 고백할 수 있을 겁니다. 그리고 성경을 보십시오. 성경을 묵상하시면서 하나님이 얼마나 신실하신 분이신 지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깨닫고 아는 것만큼 우리는 시련을 이길 수 있습니다. 선한 목자 되신 주님을 아십시오. 그분을 배우십시오. 그분을 열심히 알도록 하십시오. 하나님을 아는 지식만이 우리를 우리의 상황 가운데 구출해줄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이 나라 이 민족이 사는 유일한 길입니다. 하나님을 힘써 알도록 합시다. 그것이 우리의 유일한 희망입니.

■ 다윗은 주님을 가장 자랑스러운 듯이 고백합니다.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 이것은 목자를 따라 여행을 다녀온 양이 다른 양들에게 자랑하는 것입니다. 이 고백은 내세를 향한 믿음을 담고 있습니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집은 좁은 의미에서 보면 하나님의 성전을 가리킵니다. 그러나 다윗이 여기서 고백하는 말은 다윗 당시에 성전이 없었기 때문에 성전을 말한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대신 다윗은 하나님의 면전, 혹은 하나님의 완전한 보호하심 가운데서 영원한 안식을 누린다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우리 일생을 마감하고 주님 앞에 섰을 때 이렇게 고백하게 될 것입니다. “내가 주님의 집에 영원히 거하게 됨을 인하여 감사합니다.” 아니, 좁은 의미로서, 우리가 고난의 시련을 헤치고 나서 주님이 주시는 참 안식을 누리게 될 것을 말하고 있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보시는 가운데서 절대적인 평화를 누리게 되는 날이 온다는 말입니다. 절대적인 안식을 누리게 된다는 말입니다.

▶ 지금 힘드십니까? 불안하십니까? 미래에 대해 걱정되십니까? 주님이 과연 나와 함께 하실지 염려되십니까? 점점 절망 가운데 빠져 들어가십니까? 헤어 나오려고 몸부림치면 칠수록 더 악화 되어갑니까? 고독합니까? 아무도 나를 돕는 이가 없으십니까? 그럼 잘 됐습니다. 선한 목자 되신 주님을 바라보십시오. 주님만이 우리를 참으로 돌보시는 분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님 외에 참으로 우리를 알고 우리를 돌볼 줄 아는 사람이 그 어디 있을까요? 우리가 그분께 속했다는 사실이 확실합니까? 그렇다면 그분은 언제나 한결같은 사랑과 선함과 자비로 우리를 돌보실 것입니다. 나중에 주님 앞에 서게 될 때 비로소 우리는 확실하게 알게 될 것입니다. 주님 앞에서 영원히 안식하고 쉬게 될 것을 말입니다. 그때는 우리가 지금 당하는 모든 고난과 시련이 즐거운 추억이 될 것입니다. 고난과 역경에 대한 우리의 기억이 주님을 더욱 더 경외하게 만들어 줄 것입니다. 선한 목자되신 주님을 찬양합니다. 지금까지 시편 23편을 묵상하게 인도하신 우리 주님을 찬송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