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묵상

유혹에 관하여

등불지기 2012. 7. 23. 00:31

 

 

저는 파송되어 외국에 나온지 4년이 채 안되는 초보 선교사입니다. 그런데 얼마 전에 마음만 먹으면 목회할 수 있는 기회가 찾아온 적이 있었습니다. 선교를 한다는 것과 목회를 하는 것은 다릅니다. 가장 큰 차이는 언어의 문제이지만 다른 차이는 재정의 차이도 있습니다. 선교를 할 때는 전적으로 후원에 의지합니다. 물론 사도바울처럼 스스로 텐트를 만들어 팔면서 재정을 보충하면서 선교하는 자비량 선교사도 있습니다. 저도 솔직히 후원에 의지하지 않고 스스로 재정을 채워가며 사역하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다. 그러나 때로는 후원자들의 후원에 전적으로 의지하는 것도 나쁘지 않습니다. 그러나 목회의 경우 섬기는 교회에서 목회자의 생활비 전부 혹은 상당 부분을 책임져주기 때문에 재정적으로 선교사보다는 안정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 순간 제 마음속에는 "이것은 유혹이다" 싶어서 일언지하에 거절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를 다른 동료 선교사들에게 했더니 "왜 그렇게 좋은 기회를 그냥 날려버렸느냐"는 식으로 말하더군요. 왜 어떤 사람에게는 '기회'가 되고, 어떤 사람에게는 '유혹'이 되는 걸까요? 어떤 사람은 유혹을 유혹으로 보지 않고 '기회'로 여기는 걸까요? 기회인 줄 알았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것이 유혹이었음을 알게 될 때 무슨 일이 일어나는 걸까요? 유혹은 우리 삶에 어떤 변화를 가져다주는 걸까요? 유혹에 넘어가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요? 등등..유혹의 문제에 대해 묵상해보았습니다.

 

제가 아는 어떤 선교사님에게 한국의 어느 중형 교회에서 담임목사로 청빙받을 수 있는 '기회(?)'가 왔습니다. 늘 선교의 사명을 이야기 하고 함께 열심히 사역하자던 분이 어느날 갑자기 한국교회로 돌아가서 목회할 생각으로 청빙서류를 준비하는 모습을 보고 약간 씁쓸한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제가 볼 때에 아직 해야 할 일이 많고, 한국교회 목회현실과는 맞지 않는다고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이 '기회'가 하나님이 주시는 기회인 것처럼 굳게 믿고 큰 확신을 가지고 준비하는 모습을 본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결국은 청빙이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습니다. 그분에게는 한국교회에서 담임목사로 청빙되어서 목회하는 것이 '기회'로 여겨졌지만 제가 볼 때에는 그것은 분명 '유혹'이 틀림없었습니다. 이 일을 계기로 일어난 몇 가지 미세한 변화가 있었는데 그분의 사역을 돕기 위해 후원회가 조직되려는 일이 무산되었습니다. 만약 그것을 유혹으로 여기고 단호히 거절하였더라면 그분을 위한 후원회가 조직되고 앞으로 더 힘있게 선교사역에 달려갈 토대를 마련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재정문제만 아니라 심리적으로도 일단 선교지를 떠나고 한국교회로 돌아갈 마음을 먹었기 때문에 다시 선교지에 마음을 집중하기에 쉽지 않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어든..."(마4:3,6) 유혹의 문제는 사실 정체성(identity)의 문제입니다. 유혹에 쉽게 흔들리는 이유는 정체성이 흔들리기 때문입니다. 정체성identity이란 자신이 누구인가에 대한 이해self-understanding입니다. 정체성이 흔들리면 유혹에 쉽게 흔들리게 되고 유혹에 흔들리게 되면 사역에 열매를 맺지 못하게 됩니다. 마치 바람에 흔들려 땅에 떨어지는 과실은 썩어 문들어지는 것처럼 말입니다. 열매가 열매답기 위해서는 일단 비나 바람에 흔들리지 않아야 하는 것입니다. 흔들리면 떨어지고 떨어지면 썩어져 없어져버리는 것입니다. 유혹이란 자신의 정체성이 확실한지 그렇지 않은지 알기 위해서 다가오는 어떤 '바람'과 같습니다. 자기 정체성이 약하거나 흔들리는 사람에게 '유혹'은 '기회'로 다가옵니다. 아주 달콤한 기회로 다가옵니다. 그러나 그것은 결국 자신을 배반하고 자신을 실망시키는 비참한 결과를 낳게 합니다. 문제는 그것만이 아닙니다. 자신은 조롱거리가 되고, 남들의 비웃음거리가 되고, 더 큰 문제는 열매가 떨어지게 되고 썩어져없어져버리게 되는 결과를 초래하는 것입니다. 일단 열매가 떨어지면 다시 되돌리는 일은 불가능하게 되어버립니다. 그래서 유혹이 무서운 것입니다. 

 

만약 그분이 자신의 정체성이 '선교사로서의 정체성'이 확고하게 정립이 되었다면 그런 제안이 절호의 기회가 아닌 무서운 유혹으로 여겨졌을 것입니다. 재정적인 안정감이란 선교사에겐 큰 유혹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자신을 이 땅에 복음을 전하라고 보내신 분이 하나님 아버지이시고 자신은 아버지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자라는 정체성이 확고하다면 아무리 큰 재정적인 안정감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유혹입니다. 저의 경우 그런 기회를 거절했을 때 재정적으로 손해보는 것 같았지만 그러나 하나님은 결코 제가 손해보는 것을 원하지 않으시는 분이심을 그 후에 체험적으로 알게 해주셨습니다. 참 놀라운 축복입니다. 제가 한 것은 큰 일이 아니었습니다. 저의 정체성idendity이 견고한가 아니면 약한가를 알기 위해 다가오는 '바람'에 대해 저는 아무 반응이 없이 꿈적하지 않았을 뿐입니다. 특별한 행동을 한 것이 아니라 '유혹' 앞에 저는 단지 아무 행동도 하지 않았을 뿐입니다. (저의 그러한 결정에 대해서 당시 많은 동료 선교사들은 저를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하나님께서 확실히 후대하여 주셨다는 사실입니다. 유혹에 흔들리지 않았을 뿐인데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은 기대 이상이었습니다.

 

그러면 그리스도인들에게 찾아오는 '유혹'이란 어떤 것일까요? 저는 첫번째 아담이 받았던 유혹이나 마지막 아담이 받았던 유혹이나 지금 우리가 살아가면서 받고 있는 유혹이나 사실 같은 것이라고 믿습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 사역을 시작하시기 전에 성령에게 이끌려 광야로 가셔서 사단에게 시험temptation을 받으신 것은 오늘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받는 유혹에 대해 매우 중요한 진리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받으신 첫번째 유혹은 돌을 떡으로 만들라는 유혹이었습니다. 이것은 배고픔의 상황에서 주어진 것입니다. 둘째는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리라는 것으로 자신을 많은 사람들에게 입증하려는 유혹입니다. 셋째는 엎드려 절하라는 것으로서 세상 부귀 영화에 대한 지름길에 대한 유혹입니다. 각각의 시험(유혹)은 오늘 우리가 당하는 모든 유혹을 대변하고 있는 것입니다. 첫째는 생활고의 문제로서, 육신의 문제와 영혼의 문제 중에서 어느 것이 우선인가에 대한 유혹입니다. 둘째는 종교적인 문제로서 자신을 입증하기 위해 하나님을 이용할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때를 기다릴 것인가에 대한 유혹입니다. 셋째는 소유와 영광의 문제로서 넓은 길로 갈 것인가 좁은 길로 갈 것인가의 문제입니다. 이 세 가지 유혹은 우리가 늘 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유혹은 언제나 우리의 정체성을 건드리면서 다가옵니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자신의 정체성이 흔들리지 않으면 유혹은 절대로 성공할 수 없습니다. 유혹에 넘어가는 이유는 정체성이 흔들리기 때문입니다. 첫번째 사람을 유혹할 때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뱀이 최초의 사람에게 물은 것은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해 너희는 정말 믿고 있는가?'에 대한 질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정체성에 대한 확실한 지식은 곧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지식과도 같은 것입니다. 뱀이 이렇게 물었습니다. "하나님이 정말 너희에게 선하신 분이라면 왜 동산 중앙에 있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고 하셨는가?"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한 너희의 확신은 어느 정도인가?" 만약 최초의 사람들이 "우리들은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해 추호도 의심도 없는 사람들"이라는 확신이 있었다면 뱀의 간교한 유혹은 결코 성공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뱀의 유혹이 성공할 수 있었던 까닭은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해 흔들리는 연약한 자기 정체성 때문이었습니다. 이것을 기억하여야 하겠습니다. 모든 종류의 유혹은 나의 정체성이 흔들리기 때문에 찾아오는 것입니다. 그것이 유혹인 것은 나의 정체성이 흔들리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달콤한 기회라는 확신과 함께 다가오는 것은 나의 정체성이 흔들리기 때문입니다. 내 정체성이 견고하면 그것은 '달콤한 기회'가 아닌 '무서운 계략'이자 '음모'요 '유혹'이라는 것을 저절로 알게 될 것입니다. 뱀의 유혹에 아담과 하와가 넘어간 것은 그것이 '유혹'이라고 생각되지 않았고 '달콤한 기회'라고 확신되어지고 느껴졌기 때문이었습니다. 그것이 유혹이라고 생각되는 한 우리는 결코 유혹에 넘어가지 않습니다. 그러나 유혹에 넘어간 사람들의 특징은 그것이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되어졌다는 것입니다.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창3:6)" 유혹에 넘어가는 사람들의 반응을 보십시오. 예수님에게 불어닥친 세 가지 유혹도 같은 유형이었습니다. 최초의 뱀과 같이 사단은 예수님의 배고픔을 이용했습니다. 예수님의 자기 자신을 사람들에게 입증하려는 욕구를 자극했습니다. 그리고 영광에 대한 욕구를 자극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육체적 욕망, 종교적 욕망, 세상적 욕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모든 유혹은 사람이 가지고 있는 본질적인 욕구와 욕망을 틈타서 다가옵니다. 문제는 이것입니다. 우리가 가진 이러한 근본적인 욕구 자체가 악한 것은 아닙니다. 배고플 때 밥을 찾아 먹는 것은 결코 죄가 아닙니다. 사람들에게 자신을 드러내고 싶은 욕구 그 자체는 죄가 아닙니다. 무엇을 소유하고 싶은 것도 죄가 아닙니다. 문제는 하나님의 말씀보다 떡을 선택하는 것이고, 사람들에게 자신을 과시하기 위해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이고, 부귀영화를 얻기 위해 사단에게 엎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방법으로 자신의 배고픔을 해결하고, 하나님의 방법으로 사람들에게 자신을 높여주시는 것을 기다리고, 하나님의 방법으로 소유와 영광을 얻는 길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떡이냐 말씀이냐? 그리스도인에게 가장 일반적인 유혹입니다. 살아가면서 생활고에 시달릴 때가 있습니다. 특별히 잘못한 것도 없는데 재정적인 궁핍으로 힘들어할 시기가 찾아올 수 있습니다. 이런 시기를 지날 때 "하나님이 과연 나를 사랑하시는걸까?'라고 하나님의 선하심을 의심하게 됩니다. 그리고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심각한 의문이 들기 시작합니다. "나는 하나님의 자녀가 맞는가? 하나님 아버지께서 돌보시는 하나님의 자녀가 과연 맞는지 모르겠다." 이럴 때 찾아오는 유혹은 손 쉬운 방법으로 생활고를 해결하는 어떤 "기회"가 제시됩니다. 손만 뻗으면 붙잡을 것 같고, 내 것으로 삼을 것만 같아 보이는 순간이 찾아옵니다. 이럴 순간에 만일 자신의 정체성이 확고하다면, 다시 말해서 아무리 생활고에 시달린다 할지라도 "나는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자녀야"라는 정체성이 확실하다면 그러한 기회는 기회가 아니라 '유혹'으로 보일 것입니다. 유혹에 넘어가지 않는 방법은 간단하게도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입니다. 유혹에 아무 반응을 보이지 않는 것으로 유혹을 이기게 됩니다. 그러나 자신의 정체성이 흔들리게 되면 그러한 방법이 '절호의 기회'로 보이게 됩니다. "보암직하게" 보이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기회를 획득하기 위해 자신이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다 동원하여 실행에 옮기게 됩니다. 그러나 이내 그것은 실망과 분노로 끝나버리게 됩니다. 쉽게 떡을 만들 능력이 내게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확인하고 점검해야 할 질문이 있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녀가 맞는가?" "내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지금 이 일을 하는 것이 적당하고 또 합당한 것인가?" "지금 이 방법이 하나님의 방법인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인가?" 

 

기적이냐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인가? 이것은 종교성이 많은 그리스도인에게 흔한 유혹입니다. 나름대로 기도를 많이 한다고 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이런 유혹이 다가오기 쉽습니다. 제가 아는 어느 선교사님은 불치의 병을 앓고 있는 아들이 있었습니다. 그 선교사님은 그 아들을 치유하여 온 세계를 돌아다니면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간증을 하려는 꿈이 있었습니다. 아들을 위해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께서 치유해주신다는 '음성'도 들렸습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하나님께서 이 아들을 치유해주실 것이라고 선포하고 다녔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데려가셨습니다. 그 아들을 위한 기도가 헛되었다고 보지 않습니다만 그 일로 인해 그분은 많은 이들에게 비판을 받는 아픔을 겪게 되었습니다. 성전 꼭대기에 예수님을 세우고 뛰어내리라고 사단은 유혹했습니다. 사람들에게 자신을 확실히 알릴 수 있는 좋은 '기회'였지만 예수님에게는 그것이 '기회'가 아닌 '유혹'이었습니다. 일단 그것이 '유혹'이란 인식이 되면 유혹은 힘을 잃습니다. 그러나 유혹이 성공하려면 그것이 '기회'로 믿어져야 합니다. 종교성이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기도를 많이 하는 것으로 주변에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종교적인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을 시험하는 죄에 빠지기 쉽습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이런 말씀을 주셨다, 자신은 이러 저러한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는 식으로 사람들에게 말을 하고 다니는 것입니다. 영적이라고 생각할 수록, 기도를 많이 한다고 할수록 자신을 더 숨겨야 합니다. 사람들에게 자신을 더 감추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무엇인가 과시하려는 시도를 그만두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운운하는 것을 절제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을 시험하는 무서운 함정에 빠지게 됩니다.

 

"엎드려 절하기만 하면 다 주리라." 지름길로 가려는 유혹은 그리스도인에게 찾아오는 세 번째 유형의 유혹입니다. 목적과 목표만 달성하면 된다는 생각은 이 유혹에 넘어갈 때 드는 생각입니다. 원하는 것만 얻기만 하면 된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의 방법이냐, 아니면 인간적인 방법인가 우리는 날카롭게 질문할 필요가 있습니다. 비록 그것이 내가 궁극적으로 원하는 것이었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방법이 아니라면 기꺼이 '기회'를 날려버릴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만 엎드려 절하겠다는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의 결심은 이 세번째 유혹에서 흔들리지 않게 해줍니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유혹이란 바람wind과 같습니다. 흔들리면 익어가는 과실이 떨어져버립니다. 그러나 흔들리지 않으면 과실이 탐스러운 열매로 익어갑니다. 관건은 좋은 조건의 제안이 찾아왔을 때 흔들리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흔들리지 않는다는 것은 특별히 요구하는 행위action을 취하지 않고 말 그대로 가만히 있는 것입니다. 가만히 있으면 바람은 지나갑니다. 돌을 떡으로 만드는 행위, 성전 꼭대기에서 사람들 보는 가운데 뛰어내리는 행위, 아무도 보지 않는 가운데 가만히 사단에게 엎드려 절하는 행위..이런 행위를 하지 않는 것입니다. 유혹을 이긴다는 것은 특별한 행위를 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유혹을 이기는 것은 요구되는 특별한 행위를 하지 않는 것입니다.

 

"기록되었으되..."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모범은 매우 중요합니다. 예수님은 모든 시험과 유혹에 대해 "기록되었으되"라는 말씀으로 반응하셨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마음에 새겨야 할 반응입니다. 예수님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자신을 성경의 권위 아래 두셨습니다. He put Himself under the authority of the Bible. 이것은 아주 중요하고 의미심장한 메시지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오늘 우리가 유혹에 대처하는 아주 강력한 무기를 제공해주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유혹에 넘어갈 때 그것을 유혹으로 인식하지 못하고 '좋은 기회'라고 철썩같이 믿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유혹에 넘어간다는 말은 특정한 상황에서 요구되는 특정한 행위action을 하는 것인데, 그러한 행위에 대한 근거가 감정적이거나 추상적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삶속에서 어떤 결정을 내리거나 어떤 결정적인 행위를 취할 때 그 모든 행위에 대해 '근거구절'(reference verse)을 제시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예를 들어, 어떤 그리스도인이 새로운 사업을 구상하거나 시작할 때 사업명name of business을 정하는데 고심하지만 자신이 하려는 사업을 위해 '약속의 말씀'을 응답받기 위해서 기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쉽게 말해서, 자신이 행동하려는 것에 대해 성경에서 어떤 '근거구절' 혹은 '약속의 말씀' 혹은 '참고구절'을 제시할 수 없다면 보류하는 것이 좋습니다. 

 

유혹에 대처하기 위해 우리는 성경을 바로 읽고 해석하는 능력을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유혹과 성경해석은 별개인 것 같지만 사실은 아주 중요한 연관성이 있습니다. 왜냐면 때로는 우리가 유혹에 넘어가는 우리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하기 위해 성경을 끌어다가 인용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유혹할 때 사단역시 시편의 말씀을 가지고 유혹하였습니다. 예수님을 성전 꼭대기에 세운 뒤 사단은 예수님께 다음과 같은 근거구절을 제시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언제나 성경에 근거하여 행동에 옮기시는 줄을 사단이 간파하였기 때문입니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뚜어내리라 기록되었으되 그가 너를 위하여 그의 사자들을 명하시리니 그들이 손으로 너를 받들어 발이 돌에 부딪치지 않게 하리로다 하였느니라." 이 말씀은 시편 91편 11, 12절을 사단이 인용한 것입니다. 말씀을 사랑하는 그리스도인을 유혹할 때는 사단이 말씀을 가지고 유혹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말씀을 잘 해석하는 훈련을 받을 필요가 있습니다. 시편 본문은 다음과 같습니다. "그가 너를 위하여 그의 천사들을 명령하사 네 모든 길에서 너를 지키게 하심이라. 그들이 그들의 손으로 너를 붙들어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아니하게 하리로다." 성경을 잘 해석한다는 것은 다름 아니라 성경의 문맥을 잘 이해하는 것이고, 자신의 목적을 위해 성경을 이용하지 않으려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단은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본문에서 "네 모든 길에서"라는 문구를 일부러 빼버렸습니다. 왜냐면 예수님은 성전 꼭대기에 세웠기 때문에 "네 모든 길에서"라는 문구를 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이 가셔야 할 길을 잘 아셨습니다. 성전 꼭대기는 자신이 갈 길이 아님을 잘 아셨습니다. 즉, 사단이 성경을 인용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성경을 잘 해석하셨기 때문에 유혹에 넘어가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사단은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라면 성경을 끌어다가 인용하고 근거구절로 제시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종교적인 유혹에 넘어거지 않기 위해서는 성경을 바로 해석할 줄 알아야 합니다. 자신의 목적을 위해 성경을 인용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지 볼 줄 알아야 합니다. 자신의 목적을 위해 성경을 인용하지만 그러나 하나님을 시험하는 죄에 빠질 수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출애굽한 광야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물이 없어 목마른 상황에서 하나님이 과연 우리 중에 계시는지 의심을 품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모세를 향해 원망하기를 하나님이 우리 중에 살아계시다면 왜 우리에게 이런 문제가 생겼는지 따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증거로 물을 요구하기 시작했습니다. 물을 주시면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지 알 것이라고 했습니다. 물론 하나님은 그들에게 물을 주셨지만 그들은 하나님을 믿지 못하고 하나님을 원망하고 모세를 원망하였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시험한다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일종의 불신이고 원망인 것입니다. 이것은 사사기에 나오는 기드온이 양털을 가지고 하나님께 요구했던 것과 다른 것입니다. 기드온은 하나님을 믿었고 신뢰했고 전쟁터로 나가기로 이미 결심을 굳힌 다음에 자신에게 더 큰 확신과 믿음을 더하시기를 간구하였던 것입니다. 반면 물이 없어 불평하고 원망하는 이스라엘은 지도자인 모세를 향해 불평하며, 하나님께 불평하고 원망하는 것이었습니다. 광야에서 물이 없어 목말라 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처럼 우리 역시 살아가면서 굶주림의 때가 있고, 목마름의 때가 찾아올 수 있습니다. 이럴 때 우리는 "하나님, 저에게 물을 주십시오."라고 간구해야 합니다. 그러나 "물을 주시면 믿고, 물을 주시지 않으면 믿지 않겠습니다."라고 기도하는 것은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방법으로 비를 주실 것을 믿어야 합니다. 비를 달라고, 물을 달라고, 재정을 달라고, 치유를 달라고 기도할 수 있어야 하지만 그것을 가지고 하나님과 흥정하려고 하여서는 안 될 것입니다.

 

유혹(temptation)이란 바른 길, 의로운 길에서 벗어나게 하는 바람wind이라고 정의하고 싶습니다. 그러니까 자신이 바른 길을 가고 있는 사람에게만 적용되는 것입니다. 만일 자신이 어떤 길을 가고 있는지 몰라 방황하거나 혹은 의롭지 못한 길을 가고 있는 사람에게는 결코 불어오지 않는 바람입니다. 있어야 할 곳에 있는 사람에게만 불어오는 바람, 가고 있는 길을 잘 가고 있는 사람에게만 불어오는 바람, 그래서 있어야 할 곳을 벗어나게 하고, 잘 가고 있는 의로운 길에서 이탈하게 만드는 바람입니다. 대부분 이 바람은 매섭고 추운 바람이 아니라 매우 따뜻하고 기분 좋은 바람입니다. 유혹을 당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이 유혹은 달콤합니다. 이 유혹은 '좋은 기회good oppotunity, 혹은 지름길short-cut, 혹은 일확천금, 혹은 행운good luck으로 다가옵니다. 저는 '아주 좋은 기회'라는 표현이 적절하다고 생각합니다. 유혹을 받는 사람의 관점에서는 그것은 아주 좋은 기회입니다. 그리고 유혹이 주어지는 순간 때로는 하나님의 응답, 혹은 하나님의 은혜로 여겨지기도 합니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음성'의 형태로 다가오기도 합니다. 그러나 유혹의 특징은 일단 그것을 받아들여서 요구되는 특정한 행위를 하게 되는 순간 마음의 평안을 잃게 됩니다. 거짓된 확신과 신념은 커져가는데 이상하게 마음에 평안이 없습니다. 또 한 가지 특징은 자신있게 공개하기 어려운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한 편으로는 하나님의 뜻, 인도하심, 혹은 축복이란 표현으로 정당화하려고 애쓰지만 다른 한 편으로는 왠지 떳떳하지 못한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빛 가운데 담대히 드러내지 못하는 것이 유혹에 넘어가는 행위의 특징입니다. 세번째 유혹의 특징으로는 유혹이 요구하는 행위를 하는 순간 즉시 죄책감이 밀려옵니다. 원수는 달콤한 말로 유혹을 하고, 그 유혹을 받아들이고 넘어가는 즉시 비난과 조롱으로 얼굴을 바꾸어버립니다. 유혹에 넘어가지 않는 비결은 단 하나뿐입니다. 자신이 누구이며, 자신이 가는 길이 어떤 길인지 명확하게 아는 지식입니다. 반복되는 말이지만 분명한 정체성입니다. 자신이 누구인지에 대해서, 자신이 부름받아 가고 있는 이 길이 어떤 길인지 잘 알지 못하면 매우 작은 유혹의 바람에도 쉽게 나가 떨어지고 말 것입니다.

 

성경을 보면 유혹은 오직 하나님의 길을 알고 있고, 하나님의 길을 가고 있는 사람에게만 찾아왔다는 사실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갈대아 우르를 떠나 가나안 땅으로 왔던 아브라함에게도 유혹의 바람은 불었습니다.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오는 아브라함에게 소돔왕은 거액의 상금을 제시합니다(창14장). 그러나 아브라함은 자신이 가는 길에 대해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단호히 거절합니다. 그런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은 하나님 자신을 상급으로 주겠다고 약속하십니다(창15:1). 유혹에서 이기는 것은 굉장하거 거창한 행위를 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아무 행동도 하지 않는 데 있습니다. 그러나 유혹을 참고 견디면 반드시 상급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경우를 보십시오. 광야에서 사단의 유혹을 참고 견디신 예수님은 이후 가는 곳마다 사역에서 놀라운 성령의 열매들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다시 창세기로 돌아가서 의인들에게 불어닥친 유혹의 바람을 생각해봅시다. 대표적인 인물로 요셉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젊은 혈기의 청년이었던 그에게 보디발의 아내가 유혹의 손길을 뻗쳤을 때 요셉은 옷을 벗고 도망갔습니다. 유혹에 대해 가만히 있는 것이 때로는 최선이 아닐 수 있습니다. 유혹의 바람이 불어올 때 때로는 도망갈 필요도 있습니다. 그렇게 도망가는 것이 처음에는 오해를 사고 누명을 뒤집어 쓰게 되는 일이 생길 수도 있겠지만 중요한 것은 반드시 하나님께서 크게 보상해주신다는 것입니다. 반면, 아브라함의 조카 롯을 생각해봅시다. 자신이 가야할 길, 있어야 할 땅을 잘 알았던 아브라함과 달리 그의 조차 롯은 하나님을 경외하던 의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가야하는 길에 대해서는 분명한 정체성을 갖고 있지 않았습니다. 그는 너무나 쉽게 비옥한 소돔과 고모라 땅을 선택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최후는 좋지 못했습니다. 야곱과 에서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팥죽 한 그릇에 장자의 명분을 쉽게 팔아버린 에서의 모습은 유혹에 너무나 쉽게 넘어가는, 정체성이 명확하지 못한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상징적으로 잘 보여주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비록 에서는 야곱보다 훨씬 먼저 강력한 에돔왕국을 건설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나라는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팥죽 한 그릇이라는 유혹의 바람에 쉽게 넘어간 그는 표면적으로는 성공한 것 같았지만 그러나 그의 성공은 결코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이 외에도 사사기를 보면 유혹에 넘어가서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한 사사들을 볼 수 있습니다. 민수기에 보면 하나님을 알면서도 많은 뇌물에 눈이 어두워 가지 말아야 할 길을 갔던 발람 선지자의 비극적인 최후를 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 사무엘하에 다윗의 경우는 어떻습니까? 왕국통일을 거의 목전에 두고 있었을 때 그에게 강력한 유혹의 바람이 불어닥쳤습니다. 겉으로 굉장한 성공을 거두고 있다고 뭇 사람들로부터 칭송을 받을 즈음 그래서 그의 마음이 이 정도면 나는 거의 성공했다고 자부심을 가질 즈음에 그를 넘어뜨린 유혹의 바람이 불어왔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성경을 보면서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이 가라고 하시는 길을 알고 또 그 길을 가고 있는 사람들에게 찾아온 유혹의 바람들을 찾아보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언제 어떻게 찾아왔고 그 유혹의 바람에 어떻게 반응하느냐에 따라서 어떤 결과가 주어졌는지 공부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에게 찾아오는 유혹의 바람을 쉽게 분간하고 그 바람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도록 나의 중심을 지키는 일은 정말 쉽지 않은 일입니다.

 

"다만 너희에게 있는 것을 내가 올 때까지 굳게 잡으라.(계2:25)" 예수님은 유혹의 실체에 대해서 자세히 알려주시지 않으십니다. 다만 우리에게 있는 것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고 주님이 오실 때까지 그것을 굳게 붙잡고 있으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우리를 유혹하는 세력에 대해서 연구할 수는 있으나 그것이 최선의 방법은 아닙니다. 예를 들어 이단에 대해서 연구하는 일은 필요하겠으나 이단에 대한 많은 공부가 최선은 아닙니다. 이단에 대한 최선의 방어는 우리가 받은 복음에 대해 제대로 알고 확실하게 복음을 붙잡는 일입니다. 유혹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종류의 유혹이 있으며, 언제, 어떻게 우리에게 다가오는지 연구하는 것보다 더 최선의 길은 우리에게 무엇이 있는지 정확히 알고 제대로 붙드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있는 것이 무엇일까요? 이것은 정체성에 관한 지식입니다. 첫째, 하나님께서 나를 어떤 모양의 사람으로 부르셨는지 알아야 합니다. 자신의 부르심을 바로 아는 것입니다. 둘째, 하나님께서 나를 어디로 보내셨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자신의 사명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셋째, 그 사명을 이루기 위해 하나님께서 내게 어떤 은혜와 은사를 주셨는지 알아야 합니다. 자신의 능력과 동시에 자신의 한계를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이 세 가지 지식이 정체성에 관한 지식입니다. 그리고 자신에게 있는 것을 알고 붙잡는 길입니다. 이것이 모든 종류의 유혹에 대처하는 성경적 방법입니다.

 

2012년 7월 22일 주일

South Africa,

김광락 선교사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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