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그리스도의 시험(6)
하나님만 섬기라
본문:마태4:10 김 광 락 목사
이에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사단아 물러가라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 |
I. 천사가 왜 타락하게 되었는가를 알면 오늘 본문을 이해하기가 쉬워집니다.
A. 원래 하나님은 자연만물과 우주와 사람을 만드시기 전에 하나님을 섬기는 영들을 먼저 창조하셨습니다. 천사들은 하나님이 만물을 창조하실 때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를 바라보면서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존재로 지음받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가장 가까이 모셔 섬기던 그룹천사 중에서 자기 밑에 속해 있던 부하들을 거느리고 천상을 벗어나는 일이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B. 그들이 그렇게 하나님을 섬기는 일을 하지 않고 자기 지위를 벗어난 이유는 그들 속에 시기와 질투심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형상으로 사람을 지으시는 것을 보고 시기했습니다. 그 사람들에게 그 피조물을 다스리고 정복하고 지배하고 번성하고 생육할 복을 주시는 것을 보고 질투했습니다. 자기들보다 더 하나님과 가까이 교제할 수 있는 사람의 지위를 보고 화가 난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이 가지고 있는 특권과 지위를 빼앗기 위해 원래 지위를 벗어난 것입니다. 군대말로 하면 탈영입니다.
C. 그래서 그들은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하나님과 친밀하게 교제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을 방해하기로 작정했습니다. 사람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못하게 막는 대신 사람으로부터 하나님께 돌려야 할 영광을 빼앗고 자신들이 하나님처럼 군림하려고 시도했습니다. 그들의 계획은 처음에는 성공했습니다. 우리 조상 아담과 하와는 에덴동산에서 추방당하고 노예로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섬기는 특권을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대신 사람들은 사단이 원하는 대로 살아가기 시작했습니다. 사단은 결국 하나님이 받으셔야 하는 영광을 사람들에게서 가로챈 것입니다. 사단이 하늘의 처소를 벗어나 탈영하게 된 이유는 하나님께 특별한 섬김으로 영광을 돌리는 사람의 지위에 대한 시기와 질투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단은 하나님께 돌려야 할 영광을 가로채는 것을 목표로 삼았습니다.
II. 제가 사단이 타락하게 된 경위와 과정을 길게 설명 드리는 이유는 사단이 제일 싫어하는 것이 바로 사람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사단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우리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못하도록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못하도록 방해하려고 한다는 겁니다. 저번에 말씀드렸듯이 지피지기(知彼知己)면 백전백승(百戰百勝)이라 한 속담은 영적 전쟁(spiritual warfare)에서도 통하는 말입니다.
A. 영적 전쟁에서 승리하려면 내가 어떤 사람인지 먼저 알아야 합니다. 내가 얼마나 연약하며 내가 어떤 약점을 가지고 있는지 내 자신을 잘 알아야 합니다. 내 안에 어떤 욕구가 잠재되어 있는지 알아야 합니다. 그 다음 알아야 하는 것은 사단의 속성입니다. 사단이 제일 싫어하는 것이 무엇인가?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경배하지 못하게 하고 하나님을 섬기지 못하게 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못하게 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의 영적 특권을 빼앗고자 하는 것이 사단의 소원입니다.
B. 거꾸로 말해서 우리가 하나님께 예배드리고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것 자체가 이미 승리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이 시간 여러분이 이렇게 나와서 예배드리고 말씀 듣고 기도하고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여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보려고 몸부림치는 것 자체가 이미 승리한 증거입니다.
C. 사단이 우리를 시험하여서 얻고자 하는 최종 목표가 무엇인가?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께 예배드리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섬기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영광 돌리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단이 시험하는 최종 목표입니다.
III. 우리는 예수님이 당하신 세 번째 시험에서 마귀의 노골적인 의도를 보았습니다. 마귀는 정체를 드러내고 이빨을 드러내고 뻔뻔스럽게 하나님의 아들에게 “내게 절하라”고 요구합니다. 하나님께 드려야 할 행동을 가로채는 것이 마귀의 소원 중에 소원이었습니다.
A. 마귀가 자기의 목표(=사람들이 하나님께 영광 돌리지 못하게 하는 것)를 달성하기 위해 한 조치가 무엇이었습니까? 지금까지 우리가 살펴본 시험을 다시 요약해봅시다. 첫째로, 마귀가 사용한 방법은 인생이 가지고 있는 육신적인 기본욕구를 역으로 사용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경우 배고픔과 굶주림을 이용한 것입니다. 둘째로, 마귀가 사용한 방법은 많은 사람들이 예배드리기 위해 엎드려 기도하는 처소에서 세우는 것입니다. 사람들로 하여금 엎드리게 하고 경배하게 하고 존경하게 만듭니다. 숭배하는 자들을 보여줌으로써 자신을 증명하고 싶은 충동을 가직 하는 방법입니다. 자기를 존경하는 자들에게 자신을 과시하고 싶은 충동을 갖게 한 것이 마귀의 두 번째 방법이었습니다. 세 번째 마귀가 사용한 방법은 세상 나라의 부귀영화와 권세에 대한 환상을 보여주는 방법입니다. 이 방법은 목적에만 집중하게 하는 방법입니다. 성공에 대한 환상에만 사로잡히게 하는 방법입니다. 결과만 생각하고 과정에 대해서 생각하지 못하게 합니다. 눈이 멀게 하여 과정에 대한 판단력을 흐리게 하는 방법입니다. 지름길로 정상의 자리에 오를 수 있다는 환상을 품게 합니다. 불로소득의 환상을 품게 합니다. 이렇게 처음에는 작은 것, 사소한 것에서 시작해서 나중에는 보다 대담한 방법으로 접근합니다.
B. 마귀가 세 번째 시험에서 한 일은 환상을 보여주고 환상에 도취되게 한 다음 자기 정체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무엇이라 말했습니까?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수많은 사람들이 결과에 대한 환상, 성공에 대한 환상, 목표에 대한 환상에 사로잡힌 나머지 그만 마귀에게 절해버립니다. 그 환상이 너무나 실제적이고 손에 잡힐 듯이 구체적이기 때문에 이제 금방 성취할 수 있다는 강한 확신을 가지고 즐거운 마음으로 마귀에게 엎드립니다. 여러분, 예수님을 시험한 똑 같은 방법으로 마귀는 우리 조상을 넘어뜨렸습니다. 사단은 하나님이 금지한 나무실과를 보고서 환상을 품게 만들었습니다.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명백한 거짓말로 환상을 품게 합니다. 그래서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창3:6) 마귀가 우리 조상을 넘어뜨린 방법은 이렇게 환상을 품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처럼 우리도 살아가면서 성공에 대한 환상, 축복에 대한 환상, 정상의 자리에 대한 환상, 부귀영화에 대한 환상, 등을 품을 때 마귀의 시험에 넘어지기 쉽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C. 그러나 우리 예수님은 이러한 마귀가 주는 환상에 현혹되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마귀가 노골적으로 정체를 드러내는 것을 보셨습니다. 하나님께 돌려야 할 영광을 가로채려고 하는 마귀의 본성을 간파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러한 사단에게 분노심을 터뜨리십니다. 사단을 꾸짖고 책망하십니다. “사단아 물러가라.” 신약성경에서 “사단아 물러가라”고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은 두번 나옵니다. 여기 한번 나오고, 그 다음으로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베드로에게 또 한번 하십니다. 베드로가 멋있는 신앙고백을 한 후 예수님으로부터 칭찬을 받았습니다.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그러나 베드로는 우쭐한 나머지 예수님이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지 못하시도록 막겠다고 자신있게 말했습니다. 아마도 베드로는 자신이 수제자이고 이렇게까지 칭찬을 받았으니 자신이 뭔가 대단한 사람이 된 듯한 영웅심에 잠깐 빠졌던 것 같습니다. 그 순간은 분명 예수님께 이러한 환상을 보여주었듯이 베드로에게도 이런 환상을 순간적으로 보여주었을 것입니다. 자신이 나서서 예수님을 보호하는 주동자가 된 듯한 착각 속에 빠지게 했을 겁니다. 그러나 그런 베드로에게 예수님은 이 세 번째 시험에서 마귀에게 한 말과 똑 같은 말을 하십니다.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예수님은 베드로 뒤에 강력하게 역사하고 있던 사단의 실체를 보셨습니다. 그래서 베드로의 생각을 사로잡고 있던 사단을 꾸짖으셨습니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마16:23b) 이처럼 우리도 주님을 위해 하나님 나라를 위해 내가 무엇인가 된 듯한 착각 속에서 영웅심리에 도취해서 내가 무엇인가 해 보겠다고 호언하는 경우가 있을 수 있는데 그 배후에 사단이 역사하고 있음을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에 골몰하게 생각이 복잡하고 사람의 일에 생각이 사로잡힌 것은 명백하게 사단이 나를 주장하고 있는 증거라고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일이 무엇입니까? 십자가의 일입니다. 섬김의 일입니다. 복종의 일입니다. 사람의 일이 무엇입니까? 넓은 길입니다. 지름길입니다. 권위주의의 길입니다. 업적주의 길입니다. 영웅심리에 도취해서 뭔가 해낼 수 있다는 자만심의 길입니다. 고난 없이 영광을 누리는 길입니다. 십자가 없이 왕국을 세우려는 길입니다. 바로 이런 ‘사람의 일’에 골몰해 있는 것이 바로 사단이 우리를 사로잡고 시험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하나님의 방식이 아니라 사람의 방식에 골몰해 있는 것이 바로 사단이 우리를 사로잡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D. 이렇게 거짓말로 환상을 보여주면서 마귀가 자기 정체를 드러내면서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다 주겠다고 유혹합니다. 결과에 집중하게 하면서 그 결과에 매혹하게 하면서 방법은 아무 문제도 아니라는 듯이 유혹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돌아가야 할 경배와 영광을 가로채는 것입니다. 이렇게 마귀의 뻔뻔스러운 의도가 명백하게 드러났을 때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사단아 물러가라” 이렇게 꾸짖어야 합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안방에 도둑고양이가 기어 들어왔다고 가정해보십시오. 여러분은 어떻게 하겠습니까? 여러분의 안방에 도둑고양이가 들어왔을 때 어떻게 하겠는가 생각해보십시오. 그렇게 하듯이 마귀를 꾸짖으십시오. 우리가 기도할 때나 살아갈 때 마귀는 처음부터 노골적으로 정체를 드러내지 않는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처음에는 작은 것, 기본적인 것을 가지고 시험합니다. 자기 정체를 숨기고 접근합니다. 그럴 때에도 ‘사단아 물러가라’는 식으로 과민반응을 보일 필요는 없습니다. 다만 말씀을 인용하기만 하면 떠나갑니다. 그러나 자기 정체를 드러내고 노골적으로 우리를 공격하고 시험할 때 우리는 “사단아 물러가라”고 꾸짖어야 합니다. 영적인 어린아이는 개들이 짖으면 무서워서 엄마 아빠에게 매달리면서 도와달라고 호소하지만 영적인 어른이 되면 직접 꾸짖습니다. 때로는 우리가 우리 문제를 가지고 하나님께 긍휼과 도움을 간청할 때가 있지만 때로운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권세를 사용해서 우리 스스로 문제를 해결해야만 합니다. 믿는 자는 누구든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필요할 때, 사단이 자기 정체를 드러내고 공격할 때는 과감하게 신자의 권세를 사용해야 합니다. 신자의 권세를 활용해서 스스로 문제를 해결해야 합니다. 문제가 생길 때마다 기도 받으러 다닌다면 언제 영적으로 장성해지겠습니까? 신자의 권세를 사용하시기 바랍니다. 평소에는 말씀에 순종하고 말씀을 인용하고 살아가면 됩니다. 그러나 적이 이빨을 드러낼 때는 급합니다. 이렇게 다급할 때, 위급할 때, 긴박한 상황이 발생할 때는 신자의 권세를 주저 없이 사용하십시오. “사단아 물러가라” 주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신 방법입니다. 노골적으로 정체를 드러내는 원수들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왜냐면 예수 믿는 여러분은 하나님의 자녀 된 권세를 이미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IV. 그러나 신자의 권세를 가지고 사단의 세력을 물리칠 수 있지만 모든 문제를 “사단을 꾸짖는 방법으로만” 일관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지혜로운 방법이 아닙니다. 꾸짖는 방식은 주로 노골적인 공격이 있을 때 사용하십시오. 우리의 주된 방식은 “사단아 물러가라”가 아니라 “기록되었으되”인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A. 여러분, 예수님이 하신 방법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사단을 꾸짖으심으로 승리하신 것이 아니라 말씀의 권세로 승리하셨습니다. 성경을 그 상황에 맞게 인용함으로써 승리하셨습니다. 귀신들린 자를 예수 이름으로 쫓아내 버렸다고 내가 승리했다고 방심하면 큰 착각입니다. 왜냐면 나간 귀신들은 더 악한 동료 귀신들을 데리고 다시 한번 찾아오기 때문입니다. 찾아와서 다시 들어갈 수 있는지 여부를 살펴봅니다. “더러운 귀신이 사람에게서 나갔을 때에 물 없는 곳으로 다니며 쉬기를 구하되 얻지 못하고 이에 가로되 내가 나온 내 집으로 돌아가리라 하고 와 보니 그 집이 비고 소제되고 수리되었거늘 이에 가서 저보다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가서 거하니 그 사람의 나중 형편이 전보다 더욱 심하게 되느니라 이 악한 세대가 또한 이렇게 되리라.”(마12:43-45) 그래서 귀신을 꾸짖는 것만으로는 불충분합니다. 귀신들이 다시 들어가지 못하도록 그 심령에 말씀으로 가득 채워야 합니다. 가득 차 있는 것을 보고서는 못 들어오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먼저 꾸짖으시고 그 다음에는 말씀의 권세로 충만하게 자신을 채우신 것입니다.
B. 그래서 여러분, 교회는 무엇보다 이 두 가지가 조화를 이루어야 합니다. 무엇입니까? 사단의 유혹을 분별하고 꾸짖고 대적하는 축사사역과 동시에 다시는 들어가지 못하도록 말씀으로 가득 채우는 이 두 사역이 서로 함께 가야 합니다. 교회는 말씀을 가르치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 지 모릅니다. 여러분, 여러분을 말씀으로 먼저 채우십시오. 우리 안에 사단이 비집고 들어올 틈이 없도록 온통 말씀으로 가득 채워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축사사역자는 말씀사역자과 함께 일해야 합니다. 치유사역자는 부드러운 상담사역자와 함께 일해야 합니다. 꾸짖는 사역이 있으면 채우는 사역이 뒤따라야 온전한 주의 사역이 되는 것입니다. 말씀으로 채우는 일이 없이 꾸짖고 쫓아내는 것은 더 상황이 악해질 수 있습니다. 교회 안에 ‘사단아 물러가라’고 외치는 사람만 있으면 삭막하게 됩니다. 교회사역 중에 가장 중요한 사역은 말씀사역입니다. 예수님은 꾸짖으신 것은 한번이지만 말씀을 인용하신 것은 세번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사역을 보아도 예수님은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나 병자를 치유하는 것이나 이적을 행하는 것보다 말씀을 가르치는 것이 더 중요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사역을 시작하면서 회개의 말씀을 제일 먼저 전파했고 천국에 대해서 제일 먼저 선포하고 가르치셨습니다.
C. 따라서 여러분, 말씀을 사랑하고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고 말씀을 배우고 말씀대로 살아가려고 하는 사람은 귀신들에게 틈을 주지 않는 사람이 되는 것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는 ‘사단아 물러가라’는 말보다 ‘기록되었으되’라는 말을 더 많이 해야 합니다. “기록되었으되”라는 말은 성령의 검을 칼집에서 빼어내는 동작입니다. 그리고 기록된 말씀을 정확히 인용하는 것은 성령의 검을 대적에게 휘두르는 행동입니다. 왜 성경이 성령의 검입니까?(엡6:17) 성령께서 성경말씀을 기록하게 감동하셨기 때문입니다. “오직 성령의 감동ㅎ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이기 때문입니다.(벧후1:21) 성령께서 우리에게 주시기 위해 이 검을 만드셨습니다. 우리가 실제 영적 전쟁터에서 이 검을 사용하라고 이 검을 만들어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검을 장식품 정도로 보관만 할 것이 아니라 실제적으로 빼어 휘둘러야 하는 것입니다. 실제 전투에서 이 검을 빼어 휘두르는 사람이 진짜 성령의 사람이요 말씀의 사람인 줄 믿습니다.
V. 예수님이 빼어드신 칼은 신명기 6:13절입니다. (신10:20에도 나옵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며 섬기며 그 이름으로 맹세할 것이니라” 이 말씀을 예수님은 이렇게 번역합니다.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오로지, only) 그를 섬기라” // 여기서 하나님을 향한 두 가지 태도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첫째, “우리 하나님을 경배하라”, 즉 마음의 상태, 내적 자세를 의미합니다. 둘째, “우리 하나님만을 섬기라”, 즉 행동의 상태, 외적 자세를 가리킵니다. 하나님을 믿는 자는 첫째 내적 자세로서 하나님을 경외(=경배)해야 하며 둘째 외적 자세로서 하나님만을 섬기는 행동이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A. 하나님을 향한 내적 자세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경외하라는 겁니다. 문자적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라는 말은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무서워하라는 말입니다. 어떤 분들은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은 하는데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무서워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감정이 없는 신앙은 잘못된 것입니다. 하나님을 무서워하지 않고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참 사랑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말을 잘못 이해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말은 내가 하나님을 함부로 대하거나 하나님 앞에 함부로 말을 하거나 친구처럼 막 대한다는 그런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말은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하나님을 가장 무서워한다는 말입니다.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마10:28) 그 다음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라는 말은 정성을 다한다는 말입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마음과 뜻과 정성과 힘과 목숨을 다하여 하나님께 마음을 바쳐드리는 것이 바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입니다. 내 마음은 혹시 둘로 나뉘어지고 있지는 않습니까? 내 마음은 전적으로 하나님께 기울어지고 있습니까? 전심으로 하나님을 찾고 있습니까? 연애할 때 온통 생각이 연인에게 가는 것처럼 온 마음이 하나님께로 향하고 있습니까?
B. 그 다음 하나님을 향한 외적 자세가 무엇입니까? 오직 하나님만 섬긴다는 말은 행동에서 어떻게 나타나야 합니까? 이 하나님을 섬긴다는 말은 여러가지 외적 행동을 포함합니다. 이것은 하나님께만 엎드려 절한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만 도움을 구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만 지혜를 구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 모든 감사를 올려 드린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만 제사를 지낸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일을 행한다는 뜻입니다. 때로는 금식을 가리켜서 하나님을 섬긴다고 말합니다. 하나님께만 눈을 고정시켜 두는 행위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C. 예수께서 이 말씀을 인용하신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비록 마귀가 그 놀라운 성공과 축복의 환상을 보여주어도 예수님 자신은 그것보다 하나님을 경배하고 하나님만 섬기는 것을 최고의 목적이자 목표로 삼는다는 말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중요합니다. 마귀는 예수님께 환상을 보여주면서 제안했던 것이 “당신이 원하는 것이 결국 이것이 아니냐? 내가 고난 없이 손쉽게 이것을 얻을 수 있도록 해주겠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말씀으로 답변하신 것이 무엇입니까? “물론 그것을 얻는 것이 내 목표 중에 하나이지만 그러나 나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만을 섬기는 것이 가장 큰 목표다”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얻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 경배드리고 하나님만을 섬기는 행동이다”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는 과연 이런 주님의 가치관을 가지고 있습니까? 나는 원하는 그것을 얻기 위해 하나님을 섬기고 있지는 않습니까? 원하는 그것을 얻고 나면 하나님을 경배하고 하나님만을 섬기는 일을 중단해버리는 사람이 아닙니까?
VI. 마귀가 노린 것은 하나님보다 이루고자 하는 목적 그 자체를 숭배하도록 유혹한 것입니다. 마귀는 똑 같은 방식으로 그렇게 우리를 유혹합니다. 우리가 바라는 그것을 하나님보다 더 좋아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저 그것을 얻기 위한 하나의 방편 정도로만 여기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마귀의 시험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을 섬기십니까? 아니면 하나님께로부터 얻기 원하는 그것을 섬기십니까?
A. 자, 여기 우리가 정말 얻고자 하는 것, 이루기를 원하는 것이 있다고 합시다. 우리가 이것을 얻기를 간절히 사모한다고 합시다. 이것을 얻기 위해서 목숨 걸고 있다고 가정합시다. 그런데 본문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질문은 이것입니다.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예배라는 사실을 믿느냐?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경배하는 마음이라는 사실을 믿느냐? 그것을 얻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네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라는 사실을 믿느냐?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네가 오직 하나님만 섬기는 행동 그 자체라는 사실을 믿느냐? 그것을 얻기 위해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이루기 위해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네가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경배하고 높이고 엎드려 경배하는 예배 그 자체가 최고의 목적이요 최고의 목표라는 사실을 진정 믿느냐?
B. 우리가 진정 얻기를 바라는 그것보다--비록 그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는 은사나 능력이나 상급이나 신령한 축복이나 권세나 은혜나 다른 좋은 영적 물질적 은총이라 할지라도--그것을 주실 수 있고 안 주실 수 있는 우리 주 하나님께 최고의 존경과 가치와 경배와 마음과 정성을 드리는 것, 즉, 예배행위 그 자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그래서 봉사자보다 능력자보다 은사자보다 중보자보다 충성자보다 더 아름다운 하나님의 사람은 바로 예배자인 것입니다. 여러분, 참 예배자는 누구입니까?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 때문에 예배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그분 때문에 예배하는 사람입니다. 그는 진정 모든 가치와 감사와 기쁨과 경배와 예배는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그분 자신에게 있음을 믿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것 때문에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인격과 신성과 신실하신 성품과 주권과 능력 그분 자신으로 인하여 기뻐하는 것입니다.
C. 이와 같이,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보다 하나님 자신에 더 큰 가치를 두는 법을 배울 때, 우리가 참 예배자가 될 때, 비로소 우리는 사단의 이 세 번째 간교한 시험을 넉넉히 이기게 될 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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