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설교

가상칠언 사경회(2)-어머니와 아버지

등불지기 2012. 2. 19. 19:05

(2)둘째날: 요19:25~27, 마27:45~49 [어머니와 아버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예수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자기 몸 버리신 예수 위해 사는 것이라.”

두 번째 집회에 오신 분들을 주님의 이름으로 환영한다. 오늘 십자가로 더 가까이 다가가는 은총이 여러분에게 충만하게 있기를 바란다.

첫 번째와 두 번째로 남기신 말씀은 자신을 못박고 욕하는 자들을 향해 주신 것이라면

오늘 세 번째와 네 번째로 남기신 말씀은 자신을 낳은 부모를 향해 하신 말씀이다.

 

말세는 효행이 사라지는 시대다: “고통하는 때”(딤후3:1,2)

-무엇으로 고통? 자기사랑, 돈사랑, 자긍(pride), 교만, 훼방, 거역

-점점 인간성의 본질은 이기적으로 되어갈 것이다. 점점 자기중심적인 세상이 될 것이고 거역하는 일은 많아져갈 것이다.

ex.집단적 이기주의, 미국의 이기주의, 민족주의의 부흥이 있을 것이다. 자원은 고갈되고 더 많이 차지하기 위해 피나는 싸움을 벌일 것이다. 마지막 때가 될 수록 삶은 더욱 각박해질 것이다.

-가정의 질서는 더욱 무너져갈 것이다. 이것에 대해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해야 한다. 가정의 파괴, 해체는 더욱 가속화될 것이다. 여러분은 말세의 고통에 대해 하나님의 말씀으로 대비를 해야 한다

 

세상에서 가장 가까운 관계: 아내와 남편, 그리고 부모와 자식

-눈에 보이는 부모를 잘 섬기지 못하면서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잘 섬길 수 없다.

ex.십계명의 두 돌판: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

※“부모를 공경하는 것은 약속 있는 첫 계명이다” 땅에서 잘 되고 삶을 오랫동안 누리며 살기 원하는가? 당장 집으로 가서 효도를 실천하라.

-부모와의 관계가 불편하면 하나님과의 관계도 불편하다. 부모님을 잘 공경할 수 있다면 하나님도 잘 공경할 수 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부모님의 마음을 아프게 자주 한다면 그것은 위선이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중요한 본을 보여주신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어머니에 대한 말씀과 아버지에 대한 말씀을 남겼다. 십자가의 삶을 살기 원하는가? 당장 집에 돌아가서 효도를 실천하라!

ex. 바울: 루포의 어머니, 나의 어머니(롬16), 디모데, 디도

 

세 번째 말씀: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보라 네 어머니라”

➀여자여!

계시와 상관이 없음을 강조, 즉, 하나님의 뜻을 강조하기 위함, 존칭어

➁“당신의 아들입니다.”(Here's your son!)

-가나의 혼인잔치 회상하셨을 것

-바울에게 디모데와 디도는 ‘참 아들’이었다.

➂“당신의 어머니라!”(Here's your mother!)

-왜 하필 요한에게 부탁하는가?

-혈통보다 영통이 중요하다.

ex. 엘리야 승천시 엘리야가 “내 아버지여 내 아버지여!”

-내게 영적 부모가 있는가? ex. 바울에게도 있었다.(롬16장)

 

요한이 사랑의 사도라 불리어지는 이유?

(1)주님의 사랑을 체험했기 때문

-요한은 주님이 가장 사랑하셨던 제자였다. “그 사랑하시는 제자” “예수의 가슴에 누워”

※우리가 남을 사랑하려면 먼저 사랑을 듬뿍 받아야 한다. 사랑을 받은 것만큼 남을 사랑하게 되어 있다.

-그런데, 요한의 원래 성품: 사랑하지 못하는 성격(보아너게, 우레의 아들) 그런 그가 어떻게 변했는가?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하지 못한 사람은 남도 제대로 사랑하지 못한다. 그의 사랑을 경험하라. ex. 김성일 [제국과 천국]

-어떻게 체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라!

 

(2)주님을 사랑하려고 노력했던 제자: 십자가에 끝까지 남아있던 제자. 십자가에 달리시는 주님 곁에 끝까지 남아있었던 결과였다. ❊십자가를 바라보는 자는 참 사랑을 알게 된다: 훈련도 아니고 인격도 아니라, 오직 예수의 십자가를 바라봄이다.

여기 십자가를 바라보았기 때문에 사랑의 사람이 된 분을 소개한다!

ex.한국이 세계에 자랑하는 사랑의 사도, 손양원 목사님의 생애를 알고 있는가? 아가페에서 나온 [나의 아버지 손양원 목사]란 책을 읽어보기 바란다. 손양원 목사님은 1939년 나환자들 공동체인 애양원교회 전도사로 부임한 뒤 신사참배거부로 옥고를 치르며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1945년 8월 17일 해방 후 목사안수 받고 애양원을 계속 섬기다가 1948년 10월 21일 여순 반란사건 때 두 아들이 순교하게 되었다. 공산주의 당원들은 살기등등하여 난동을 부리며 무차별로 학살을 일삼고 다니는 중에 손양원 목사님의 두 아들(동인, 동신)을 예수쟁이라고 총으로 쏘아 죽였다. 두 아들을 죽인 청년은 체포되어 즉결 재판에 회부되어 사형에 처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가족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목사님은 자기 두 아들을 죽인 그 청년을 감옥에서 끌어내어 자신의 양아들로 삼았다. 애양원에서 거행된 두 아들의 장례식에 손양원 목사님은 흰 두루마기에 삼베 두건을 쓰고 단상에 올라 다음과 같은 인사말로 답례하였다고 한다.

“여러분 내 어찌 긴 말의 감사를 드리리요, 내 느낀 바 은혜 받은 감사의 조건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첫째, 나 같은 죄인의 혈통에서 순교자가 나게 하셨으니 감사합니다.

둘째 허다한 성도 중에서 이런 보배를 어떻게 나에게 주셨는지 감사할 따름입니다.

셋째, 3남 3녀 중에서 가장 귀한 장/차자를 바치게 된 축복을 감사합니다.

넷째, 한 아들의 순교도 귀하거늘 두 아들을 순교의 제물로 바치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다섯째, 예수 믿다 와석종신해도 복인데 전도하다 순교했으니 어찌 감사치 않으리요.

여섯째, 미국유학 가려던 내 아들, 미국보다 더 좋은 천국으로 갔으니 안심되어 감사합니다.

일곱째, 우리 두 아들 총살한 원수를 회개시켜 내 아들 삼을 마음 주시니 감사합니다.

여덟째, 우리 두 아들 순교 열매로 무수한 천국의 아들들이 생길 것이 믿어지니 감사합니다.

아홉째, 역경 중에서도 여덟 가지 감사 찾게 하시니 감사하옵고,

열째, 이 큰 영광은 먼저 가신 부모님이 이 아들 위해 35년간 기도하고 교우 여러분이 23년간 기도해준 덕분으로 오직 감사할 따름입니다.”

 

(2)이와 같이 십자가를 아는 사람이 참 사랑을 알고 참 사랑을 아는 사람이 참된 것을 맡을 수 있다. “믿음 소망 사랑 중 사랑이 제일이다”

손양원 목사님은 자신의 두 아들을 죽인 학생이 구속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반란군을 진압한 계엄사령관을 방문하여 정중하게 인사를 하고 자신을 소개한 후 다음과 같이 요청을 했다고 한다. “나의 죽은 아들은 결코 자기를 죽인 사람이 죽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만일 이 학생을 사형시킨다면 제 아들인 동인과 동신의 순교를 값없이 만드는 것입니다.” 사령관은 어이없어했다. 손목사님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 아이들은 예수를 믿습니다. 예수는 자기 생명을 이웃을 위하여 초개같이 버렸습니다. 이로 인하여 무죄하신 예수가 죄인을 대신하여 십자가 형틀에서 희생이 되었습니다. 친구를 사랑한다면 죽음까지도 각오하는 것입니다. 이 학생을 죽여서는 아니 됩니다. 저는 내 아이를 죽인 저 학생을 내 자식으로 삼겠습니다.” 결국 사형장에 끌려가기 직전에 풀려났다. 그 청년의 부모는 손목사님을 하나님 대하듯이 했다. 손목사님은 그 청년의 머리를 쓰다듬고서 “안심하라. 예수를 잘 믿고 착한 사람이 되어 주님의 일꾼이 되어라”고 말씀하셨다. 이 사랑의 말에 그 청년은 변화를 받아 나중에 복음을 전하는 자가 되었다.

❊여러분은 자기 아들을 죽인 원수를 자신의 양아들로 삼을 수 있는가? 하나님께서 바로 그 본을 보이셨다. 이것은 자신이 죽는 것보다 더 한 것이다. 그래서 아가서 8:6은 “사랑은 죽음과 같다”고 했다. 내가 죽지 않고 참 사랑을 할 수 없다!

 

(3)주님이 사랑하는 어머니 마리아를 받들어 섬겼다는 것을 옆에서 보았다.

-참된 사랑을 목격할 수 있다는 것은 굉장한 축복이다. 사도요한은 예수님의 참 사랑을 눈으로 보았다.

※모델의 중요성: 모델을 보지 못하면 변화될 수 없다.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못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요일4:20)

“누구든지 자기 친족 특별히 자기 가족을 돌아보지 아니하면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보다 더욱 악한 자니라”(딤전5:8)

※우리에게 참 사랑의 모델이 무엇인가? 우리는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있다. 내가 어떻게 그런 사랑을 할 수 있는가라고 말하지 말라. 주님께서 그 길을 보여주셨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볼 때 우리는 사랑의 능력을 받게 된다.

❊모델의 중요성: 모델을 보지 못하면 할려고 노력해도 안된다!

 

어머니를 향한 예수님의 사랑이 왜 특별났는가?

-어릴 때부터 받들어 섬김, 약속 있는 첫 계명을 몸소 행하심

-“여자여” 왕후나 여왕에게 쓰여진 최상급 호칭. cf. 마리아 숭배의 근거? ❋로마카톨릭의 심각한 오류? 마리아숭배!

-어머니의 필요에 대해 관심을 가지셨다.

❊눅2:45-“칼이 네 마음을 찌르듯 하리라.”(시므온) 왜? 사랑하는 아들이 남의 죄 때문에 억울하게 죽어간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얼마나 가슴 아팠을까!

-사도 요한이 죽을 수 없는 이유?(그 형제 야고보는 가장 일찍 순교한 제자)

-부모님을 공경하지 못하면서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참될 수 있는가?

※부모님과의 관계에서 힘들어하는 지체? 십자가로 오라.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못 박히면 된다.

※마땅히 섬겨야 할 책임을 다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깊이 생각해 보라.

❊찬송304장 [어머니의 넓은 사랑]

“사랑을 아는 것 만큼 사랑을 행하게 될 것이다”

 

네 번째 말씀: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이제 예수님은 자신의 아버지를 향해 입을 여신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그런데 이 말씀은 오랜 침묵 끝에 하신 말씀이다.

-십자가위의 6시간을 다시 한번 생각해보자.

오전 9시부터 오후 3시까지, 정오 12시부터 해가 빛을 잃고 캄캄함이 온 땅에 임했다. 오전 9시부터 첫째~셋째 말씀을 하셨고, 마지막 운명 직전에 네 가지 말씀을 한꺼번에 다 쏟아내셨다. 침묵을 깨고 혼신의 힘을 다해 하신 첫 마디가 이 말씀이다. 3시간이 넘는 이 침묵의 시간은 굉장히 길게 느끼셨을 것이다. 이 침묵을 사이로 어머니에게 하신 말씀과 자신의 아버지에게 하신 말씀이 있다. 어머니에게 말씀하신 뒤 곧 예수님은 하늘의 아버지를 생각하셨을 것이다. 그런데 하늘이 빛을 잃었다. 하늘의 아버지께서 그 얼굴을 가리우신 것이다. 예수님은 그 어둑캄캄함을 3시간이나 견디셨다. 이 시간은 예수님에게 얼마나 길게 느껴졌을까? 예수님은 이제 아버지와의 관계에 대해 깊이 생각하고 계셨다. 그리고 입을 열어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라고 신음하듯 절망을 토해내셨다.

 

-네 번째 말씀을 하실 때 예수님의 심정이 어땠을까?

최소한 3시간 이상의 침묵하심을 통해 깊은 고독, 고통을 느끼심

※세상에서 가장 큰 고통은 사랑하는 사람에게 버림받는 고통이다. 영원 전부터 영화를 나누었던 아버지로부터 버림받은 고통을 누가 이해할 수 있단 말인가? 이것은 모든 인간이 가지고 있는 원초적인 고통이다.

※고독한 사람을 위한 치유의 말씀

※어린아이들의 두려움: 부모로부터 버림받는 고통(원초적 고독), 가장 큰 저주는 ‘널 버리겠다’는 말이다.

 

-성부 하나님께 버림받은 것에 대해 이해할 수 있는가?

이것은 사람의 생각으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 이것은 구속의 신비이다. 그토록 사랑하는 아들을 내어버리셔야 하는 아버지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는가? 이것은 구속언약의 신비를 보여준다.

※구속언약이란?

영원 전, 세상을 창조하시기 훨씬 이전부터 성부와 성자께서 성령의 보증으로 맺으신 언약이 있었다. 세상과 사람을 창조하시기 이전에 맺었다. 하나님과 사람과의 언약이 아니었다.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하시고 탁월한 위치를 부여하시려고 작정하시기 이전에 세우신 언약이었다. 하나님은 사람을 당신의 최고의 작품으로 창조하시기로 작정하시기 이전부터 사람이 타락하여 범죄 할 것을 미리 아셨다. 그리고 그 대책을 논의하셨다. 그 논의가 바로 구속언약인 것이다. 성부의 제안에 성자는 순종으로 답했다. 그리고 때가 되어 여자의 몸에서 나셨다. 그리고 때가 되어 십자가에 달리셨다. 그런데 십자가에 막상 달리실 때 그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래서 이렇게 절규하셨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예수님은 실제로 버림을 받으셨다.예수님은 하나님의 진노 아래 신음하는 모든 죙니들을 대신하여 절규하셨다! (정확하게 말해서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예정하신 자들을 대표하여 절규하셨다! 그러므로 이 절규를 이해하지 못하면 그리스도인이 아니다.) 붙붙는 하나님의 진노로 고민하시면서 토해내시는 예수님의 이 절규는 모든 버림받은, 하나님의 진노 아래 신음하는 죄인들에게 희망으로 다가온다!!

 

-예수님의 이 고백을 보면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우리 인생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 아버지와의 관계인 것이다. 그리고 가장 불행한 것은 그분으로부터 버림받는 일이다.

ex.다윗의 가장 큰 두려움: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신을 내게서 거두지 마옵소서”(시편51:11)

※예수님은 실제로 버림받고, 아버지와의 관계가 단절되는 상황 속에서도 아버지를 ‘나의 하나님’이라고 거듭 불렀다.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에게서 버림받았던 적이 있는가?

※자살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이해해본 적이 있는가? 세상으로부터 버림받았을 때 더 이상 세상에 살고 싶은 마음이 없어서이다.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버림받은 것 때문에 이렇게 절규해본 적이 있는가?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여기서 예수님은 감히 자신의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고 있다. 그저 “나의 하나님”이라고 부를 뿐이다. 처음에 “아버지여”라고 기도하시던 예수님은 “다 이루었다”고 고백하신 이후에야 비로소 “아버지여”라고 기도하실 수 있었다. 그 전에는 그저 “나의 하나님”이라고 부를 뿐이었다.

※하나님께 버림받은 죄인이 할 수 있는 말이 무엇인가? “나의 아버지여”라고 부를 수 있는가? 없다! 그저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이여” 라고 부르짖을 뿐이다.

 

-버림받으신 성자 하나님을 바라보라. 우리는 우리의 죄 때문에, 타의에 의해 아버지로부터 버림받은 것이지만 예수님은 스스로 버림받는 길을 선택하신 것이다. 스스로 고독을 선택하신 이유? 무엇 때문에 고독을 느끼셔야 했는가?

※우리의 죄 때문에

❊내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는가? 내가 무슨 잘못을 했느냐를 생각하지 말라! 내가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어떻게 설 수 있는가를 생각해보라! 내가 하나님의 영광에 도달했는가를 생각해보라! 기준은 내 생각이나 다른 사람의 생각이 아니라 하나님의 거룩과 영광이다! 스캔들이 되어야만 죄를 인정하려고 하지 말라. 어떤 사람은 스캔들이 되어도 인정하지 않으려는 사람들이 많다. 오직 하나님의 거룩과 영광이 기준이다.

※그분의 절규를 들을 때마다 내가 절규해야 할 말을 주님이 대신 하셨다는 느낌이 강하게 든다. 사실 내가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라고 절규해야 할 사람이 아니었는가? 그러한 우리가 어떻게 해서 그 하나님을 “나의 아버지여”라고 부를 수 있단 말인가? 예수님이 날 대신 버림받으셨기 때문이 아닌가? 예수님이 대신 부르짖어주셨기 때문이 아닌가? 날 대신해서 버림받으신 예수님을 믿는가? 진정으로?

 

-예수님이 겪으신 지옥의 고통: 영원히 버림받음을 느끼는 곳, 영원히 고독을 느끼는 곳

※지옥을 믿는가? 현대인들은 지옥을 이야기하면 불쾌하게 생각한다.

※지옥은 어떤 곳인가? 하나님의 진노의 불길이 충천하는 곳

※지옥의 고통을 아는가?

①영원한 어둠의 장소

②영원히 채워지지 않는 욕망의 장소

③영원히 수치를 느껴야 하는 장소

④영원히 목마름을 느껴야 하는 장소

⑤영원히 열등감과 비교의식 속에 좌절해야 하는 장소

⑥영원한 죄책감 속에서 후회하는 장소

⑦영원히 불타오르는 진노의 장소

⑧영원히 기회가 돌아오지 않는 절망의 장소

 

-예수님은 하나님의 침묵과 외면을 통해 지옥의 심연을 느끼고 계셨다. 하늘이 하나님의 침묵을 드러내었다.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깨닫게 하시기 위해 때로는 사람이나 환경을 사용하기도 하신다. 처음에는 말씀으로 경고하신다. 말씀으로 경고해도 듣지 않을 경우에는 부득불 사람이나 환경을 통해 말씀하신다.

ex.요엘서를 보았는가? 메뚜기 떼의 재앙이 연속적으로 찾아올 때 이스라엘은 각성해야만 했었다. 내 삶 속에서 어떤 문제가 연속적으로 발생할 때는 하나님께서 내게 뭔가 하시고자 하는 말씀이 있다는 뜻이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재빨리 점검해야 하며 회개함으로 각성해야 하며 주님의 뜻을 구하는 기도로 하나님을 찾아야 한다.

※우리가 사는 이 시디에 거듭되는 전쟁과 기근, 구제역과 에이즈의 공포는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주고 있다고 생각하는가?

-캄캄한 어둠이 임했다는 것의 의미: 하나님이 얼굴을 가리우셧다는 뜻, 하나님의 진노를 의미함

 

-무엇 때문에 절규하시는가? 절규하셔야 했는가?

(1)말씀을 이루기 위해(시편22:1에서 다윗이 절규했다)

(2)우리의 구원을 이루기 위해(죄값을 지불하기 위해)

※예수님의 버림받으심으로 우리가 양자될 수 있음

※예수님의 버림받으심으로 우리에게 하늘문이 열림: 휘장이 위에서 아래로 찢어짐(휘장의 두께? 45cm!)

ex.“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히10:;19,20)

ex.“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요14:6)

예수님은 이것을 위해 고독을 참으셨다.

※고독을 느끼는 지체가 있는가? 고독에 바르게 대처하는 법? 쾌락과 소유? 아니다. 또 다른 고독이 덮칠 것. 예수님의 십자가로 가야 한다. 인간이 겪고 있는 원초적인 고독은 오직 십자가의 주님만이 치유한다.

※고독의 원인은 죄 때문이다. 죄 때문에 고독의 길을 걸어가셨음. 원초적인 고독병이 치유되려면 오직 십자가뿐이다. 고독한가? 외로운가? 사마리아 우물가의 여인처럼 엉뚱한 곳에서 위로를 찾으려고 하지 마라. 어거스틴이 말한 대로 인간의 마음속에는 오직 하나님만이 채우시는 공간이 있다.

 

결론

ex. 2차 세계대전 때 독일 나치의 죽음의 수용소 아우슈비츠에 가스실로 수많은 사람들이 끌려갔다. 어느 날 아침 이름이 불린 가요니체크란 사람이 독일군의 발에 매달리면서 울면서 울부짖었다. 자기에게 젊은 아내와 갓난아기가 있으니 죽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이때 한 신부가 나서서 군인에게 말했다. 자신이 언제 죽을지 모르지만 이 청년과 순서를 바꿔달라고 말했다. 그날 그 신부는 가스실로 끌려가 시체가 되어 나왔고, 가요니체크란 사람은 나주에 연합군에 의해 해방될 때까지 살아남았다고 한다. 훗날 72년 10월 로마교황청이 그 신부에게 성자의 성품을 인정하기 위해 행사를 가졌는데 그 행사에 가요니체크가 참석했고 이렇게 간증했다. “그 잊을 수 없는 아침, 신부님이 나에게 미소를 보내며 끌려가실 때 나는 그토록 많은 사람이 왜 예수를 믿는지 알았습니다. 그때 나는 골고다 언덕 십자가 곁에 서 있는 것 같았습니다.

여러분은 남을 대신하여 죽어줄 수 있는가? 내가 그를 사랑한다면 혹시 그럴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나와 아무런 상관이 없고, 게다가 무가치하며, 긍휼을 베풀 일말의 가치도 없는 사람을 위해 그렇게 할 수 있겠는가? 아무도 그렇게 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바로 우리를 위해 그렇게 버림을 받으셨다. 우리에게 참 자유를 주시려고 말이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날 대신 버림받으신 예수님을 마음으로 믿어라. 마음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시라. 그러면 그분이 여러분에게 참 자유를 주실 것이다.

함께 찬송

①주 달려 죽은 십자가 우리가 생각할 때에 / 147장

➁갈보리 산 위에 / 135장

함께 기도

①부모님을 사랑하고 섬기고 효도할 수 있는 힘을 간구하기

②하나님의 성신을 내게서 거두지 마시도록 긍휼을 간구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