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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회복학교

현대 영성운동의 현주소와 방향

by 등불지기 2012. 10. 23.

 

 

[현대 영성운동의 현주소와 방향]

 

 

21세기에 들어서면서 본격적으로 "영성회복운동"의 붐이 일어나고 있다.

그러나 영성회복운동에 뛰어들기 전에 위에서 그리고 멀리서 떨어져서 바라볼 필요가 있다.

지금 전세계적으로 일어나는 영성회복의 바람이 어디서부터 왔으며 어디로 불려가고 있는가?

 

 

원인

왜 최근들어 온 세상과 교회들이 영성운동에 열광하고 있는가?

 

첫째, 이것은 말세의 특징으로서 이미 성경에 예언된 바이기도 하다.

마24:11,12-"거짓 선지자가 많이 일어나 많은 사람을 미혹하겠으며 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

마24:24-"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여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리라."

딤전4:1-"그러나 성령이 밝히 말씀하시기를 후일에 어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미혹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따르리라 하셨으니"

 

 

둘째, 점점 세상은 물질주의화되고 자본주의의 팽배로 인해 사람들이 내적으로 공허함을 느끼며 허무감 속에서 고통 당하고 있으며, 그 결과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영적세계를 추구하게 되고 신비주의 세계에 몰두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현주소

그러면 현실은 어떤가? 지금 교회들마다 전개하려는 '영성회복운동'은 어떤 모습으로 진행되고 있는가?

 

 

지성주의적 영성운동

첫째, 지성주의적 영성운동으로서, 사람들은 지적인 모습을 가지고 영성운동을 추구하려고 하는 경향이다. 대표적인 경우가 레노바레를 창시한 리차드 포스터의 경우이다. 그의 사상과 맥을 같이 하는 이들로서는 토마스 머튼을 필두로, 헨리 나우웬, 필립 얀시, 달라스 윌라드, 유진 피터슨, 등이 있다.

 

 

이 운동의 특징은 로마 카톨릭의 신비주의 운동(대표적인 예가 이그나티우스 로욜라의 예수회에서 가르쳤던 영성수련법이다.)과 동방의 명상종교(불교, 힌두교)에서의 세계관(범신론적이고 다원주의적 세계관으로서 모든 만물에 신적인 기운이 깃들여있으며 사람은 내면의 직관과 상상력을 동원하여 그 신의 실체와 임재를 경험할 수 있고 그로 인해 그 신과 같이 변화할 수 있다는 주장)이 혼합된 형태로서, 침묵운동을 그 특징으로 한다. 모든 요란하고 시끄러운 '소리'를 거부하고 내면의 세계에 깊이 잠기는 의식운동을 통해 신적 합일을 추구하는 것으로서 지성주의적 신비주의라고 할 수 있겠다. 지성주의적 영성운동의 뿌리는 2세기의 영지주의까지 거슬러올라갈 수 있다고 하겠다.

 

 

반지성주의적 영성운동

둘째, 반지성주의적 영성운동으로서, 사람들은 감정적인 모습을 가지고 영성운동을 추구하려고 하는 것이다. 신사도운동New Apothles Movement으로서 대표되는 이 영성의 흐름을 주도하는 대표적인 인물로서는 베니 힌, 고든 린세이, 케네스 해긴, 캐더린 쿨만, 라인하르트 본케 등 소위 '부흥사'들로 알려진 이들이다.

 

 

이 운동의 특징으로서는 쓰러뜨림, 입신, 웃음, 치유로 특징지울 수 있다. 지성주의적 영성운동이 침묵운동Silence으로 특징지워진다면 반지성주의적 영성운동은 입신운동Slain in the Spirit 혹은 Sleeping in the Spirit으로 특징지워진다고 할 수 있다. 소위 능력자의 터치로 인해 뒤로 넘어져서 의식을 잃고 깊은 잠에 빠지는 것을 입신이라고 부르는데 이러한 입신(의식을 잃고 깊은 잠에 빠져드는 상태)은 반지성주의적 영성운동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반지성주의적 영성운동의 뿌리 역시 성경시대로까지 거슬러올라가 갈 수 있는데 속사도시대에 몬타누스가 그 대표적인 경우라 하겠다.

 

 

공통분모

이 두 영성운동의 공통점은 모두 '기도운동'의 형태를 띠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신비한 체험'을 목표로 하고 있다는 것이다. 영적 체험을 갈망하는 현대인들의 욕구를 지성주의적인 방법으로 채우든가 아니면 반지성주의적인 방법으로 채우려고 한다는 점에서 모두 인본주의적이라고 할 수 있다. 문제는 이 두 영성운동이 모두 복음을 가장한 반복음주의 운동, 본질에서 벗어난 변질된 영성운동이라는 것이다. 반복음이란 복음과 비슷하나 아닌 사이비적인 요소를 강조함으로써 복음의 본질을 놓치게 만들고 복음의 본질을 가로막는다는 점에서 반복음적이다. 예컨대, 지성주의적 영성운동의 핵심인 침묵기도는 침묵을 강조함으로써 오히려 기도를 가로막는 것이고, 반지성주의적 영성운동의 핵심인 '쓰러뜨림'은 성령의 인격적인 요소를 오히려 저해하는 요소가 되고 있다.

 

 

처방: 신본주의적 영성운동

진단 결과 현대 영성운동은 좌표를 잃고 표류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면 지성주의와 반지성주의 사이에서 어떻게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고 균형을 잡을 수 있는가? 처방은 있다. 인간의 힘과 노력으로는 불가능하지만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도우심으로 가능하다. 인간의 영적 욕구를 만족시키기 위한 시도도 아닌, 그리고 중세수도사의 비밀수련법에서 시작한 것도 아닌,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되, 지성주의와 반지성주의의 한계를 극복하는 신본적 중도주의 영성운동의 방향을 제시하고자 한다.

 

 

첫째, 두 가지 교리를 잘 붙들어야 한다.

하나는 성경의 권위이고 다른 하나는 성령의 인격성이다. 전자는 동방정교나 신비주의 수도회나 명상종교에서 결여된 것이다. 성경의 권위 아래 모든 것을 놓아야 한다. 지성주의적 영성운동을 바로잡는 것은 바로 성경의 권위 아래 복종하는 것이다. 또한 성령의 인격성이란 교리를 잘 붙들어야 한다. 성령의 인격성은 신사도운동에서 결여된 것이다. 사람을 쓰러뜨리는 것, 의식을 잃는 것, 의식을 잃은 채 웃음을 터뜨리는 것은 모두 성령의 인격성을 드러내지 못한다. 성령의 성품과 일치하지 않는 모든 것은 그 모양이라도 버려야 한다.

 

 

둘째, 자기중심적(내면에 집중하는)적 기도에서 이타중심적 기도(중보기도)가 되어야 한다.

침묵기도를 하면서 자기 내면에 욕망에 초점을 맞추고, 자기 욕망을 버리고, 다시 자기 마음이 신적인 기운으로 채우는 것은 다분히 인본주의적이고 자기중심적이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자신을 비우셨지 자신을 위해 비우신 것이 아니었다. 사도 바울은 교회를 위해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자기 몸에 채운다고 했다. 또한 교회의 위로를 위해 환난을 받는다고 했다. 자기만족을 위해 비우고 채우는 것이 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또한 반지성주의적 영성운동에서 추구하는 쓰러짐과 입신체험을 향한 갈망도 자기중심적이다. 자기만족을 위해 넘어지고, 자기만족(치유,성공,축복,충만)을 위해 입신하려고 하는 것이다. 따라서 지성주의 영성운동과 반지성주의적 영성운동의 공통점은 모두 기도운동의 형태를 띠고 있지만 모두 자기중심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앞으로의 영성운동은 이타적인 기도운동, 혹은 세계선교나 이웃을 위한 중보기도운동으로 전개해야 바람직하다고 본다.

 

 

셋째, 사도들이 가르쳤는가? 로 점검해야 한다.

교회사에서 일어났던 어떤 '운동'이든 나름대로는 성경을 인용하여 자기들의 주장을 정당화하고 합리화한다. 그러나 눈여겨보아야 할 것은 자기들이 주장에 성경을 억지로 끼어맞추는지, 아닌지이다. 또한 그들이 강조하는 것이 과연 예수님이 그렇게 가르치신 것인지, 그리고 사도들이 과연 그렇게 가르친 것인지를 끊임없이 물어보아야 한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머릿돌이 되시고 사도들의 놓은 터 위에 세워진 하나님의 집이라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원수의 계락은 교묘하게 우리의 시선을 돌려서 우리가 서 있는 터 위에 서 있지 않게 유혹하고 있다. 만일 우리가 주님과 사도들이 진정 그렇게 가르치셨는가? 진정 그렇게 훈련시키셨는가? 그렇게 기도하라고 하셨는가? 하는 질문을 포기하지 않는다면 반드시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과 자칭 영성운동이라고 하나 아닌 것을 분간해낼 수 있을 것이다.

 

 

넷째, 말씀과 표적의 상관관계를 정립해야 한다.(막16:15-18)

우리는 이 둘 사이의 순서를 잘 기억해야 한다. 어떤 체험도, 어떤 기적도, 어떤 기사도 하나님의 말씀보다 앞설 수 없으며, 앞서도록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표적과 체험의 세계를 무시해도 된다는 말이 결코 아니다. 체험과 표적의 세계에 문을 닫아두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체험과 표적이 앞서가서는 안 된다. 언제나 말씀이 먼저 가고 표적과 체험이 뒤따라야 정상이다. 지성주의 영성운동에서 말하는 것처럼 우리가 내면의 욕망을 버리고 마음을 비우면 비로소 충만케 된다면 그 충만은 더 이상 성령충만이라 할 수 없다. 왜냐면 성령충만은 우리의 비움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행하신 일을 근거로 주어지는 것이다. 즉, 비움이 아니라 믿음과 연합이 충만의 근거인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일에 대한 말씀이 앞서지 않고 우리의 기도가 어떻게 충만을 경험할 수 있는 기도가 되겠는가? 또한 계시로 알게된 하나님의 성품과 원칙, 그리고 하신 일을 알지 못하고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를 수 없고,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지 않고 단지 침묵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 안에서 변화되는 것이 가능한가? 그런 침묵을 통해 경험하는 하나님은 성경의 하나님이라 할 수 없을 것이다. 또한 반지성주의 영성운동에서 말하는 것처럼 우리의 영혼이 거듭나고 정결하게 되는 것이 능력자의 터치 한번으로 되는 것이라면 그것은 더 이상 기독교가 아니다. 우리는 진리의 말씀에 순종함으로써 우리의 영혼이 깨끗해지고 구원을 얻는 것이다.

 

 

다섯째, 예수의 영, 증거의 영, 진리의 영이신 성령을 알아야 한다.

지성주의적 영성운동이나 반지성주의적 영성운동에서 간과하는 것이 바로 성령론의 결핍이다. 특히 예수의 영, 증거의 영, 진리의 영이신 성령에 대한 지식이다. 지성주의적 영성운동에서는 성령충만을 위해 '비움'을 실천하고 연습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우리 내면의 욕망을 버림으로써 성령이 충만해진다면 그 성령은 더 이상 진리의 영이 아니다. 성령은 진리의 영이시며 증거의 영이시며 예수의 영이시므로 우리의 비움에 따라 반응하시는 분이 아니라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반응하시는 분이시다. 성경은 어디에도 성령충만을 위해 우리가 '비움'을 실천하고 연습해야 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충만은 그리스도와의 연합과 믿음에 따르는 것이지 우리의 의식 내에서의 비움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다. 또한 반지성주의적 영성운동에서 간과하는 것 역시 진리의 영이신 성령을 오해하거나 알지 못하는 것이다. 성령은 진리가 역사하는 곳에 역사하신다. 성령은 복음이 복음이 될 때 역사하신다.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가 증거될 때 역사하시는 영이시다. 만약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과 상관없이 임하는 영이라면 과연 진리의 영인지 의심해야 한다. 만일 쓰러지고 의식을 잃고 깊은 잠에 빠져들고 온갖 환상을 체험하고 신기한 음성을 들었고 무의식 상태에서 깔깔대며 웃음을 터뜨렸다고 할지라도 진리를 아는데 진보를 보이지 않는다면, 진리를 증거하는데 관심이 없다면, 진리를 즐거이 순종하는 삶의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면 과연 그 '입신'의 경험이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과연 넘어져서 경험한 그 충만한 상태란 도대체 무엇의 충만이란 말인가? 신기한 것을 경험했다는 흥분으로만 남고 진리에 순종하거나 진리를 담대히 증거하는 것이 아니라면 도대체 어떤 충만이었단 말인가?

 

 

모델

마지막으로, 그러면 모델이 있는가? 거듭 말하지만 우리의 모델은 성경이며, 예수님과 사도들의 가르침이다. 그것으로 우리는 모든 '운동'을 평가해야 하고 점검해야 하고 개혁해야 한다. 하지만 완벽하지는 않지만 좌(지성주의적 영성운동)로나, 우(반지성주의적 영성운동)로나 치우치지 않는 경건운동의 모델로서 갈보리 채플을 추천하고 싶다. 갈보리 채플은 성령의 은사와 능력과 치유에 관해 열려 있고 사모하고 간구하고 있지만 그 어떤 공예배 시에도 쓰러뜨리는 모습을 볼 수 없다. 그리고 모든 공예배는 지루하게 보일 정도로 오직 성경강해에만 집중한다.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 순서대로 강의하는 것이 갈보리 채플의 특징이다. 그러나 성경강해만이 전부가 아니다. 성령의 은사와 능력에 대해 사모하며 기도하고 있다. 체험과 표적을 무시하지 않으나 결코 성경을 앞서지 않으며, 성경을 가르치는 일을 최우선으로 삼으나 성령의 역사를 위해 기도하는 것을 쉬지 않는다.

 

 

시대의 표적을 분별할 줄 알아야 하겠다.

 

2012년 10월 23일

South Africa에서,

김광락 선교사 올림.

 

 

p.s.

늘 그렇듯이 생각이 떠오른 대로 급하게 쓴 글이라 확인하고 수정하고 보완해야 할 점이 많습니다.

저는 생각이 떠오르면 즉시로 글을 써내려갑니다. 아이디어가 떠오르지 않으면 며칠이고 속앓이하기도 합니다.

제게 떠오른 생각은 '지성주의 vs. 반지성주의' 그리고 '신본주의적 중도주의적 영성'라는 변증법적 구도로

현 시대의 영성운동의 흐름을 설명하고 앞으로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려고 한 것입니다.

제 글의 아이디어는 어떤 사람의 글이나 책에서 나오지 않은 것입니다.

혹시 제 아이디어를 가지고 책이나 논문을 쓰려고 하는 분이 계시면 제게 permission을 받으세요..ㅎㅎㅎ

나중에 보완하는 대로 다시 수정본revised version을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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