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설교

변증설교(4)-왜 선악과를 만드셨는가?

등불지기 2012. 2. 19. 19:52

 

왜 선악과를 만드셨는가?

 

본문: 창2:15-17

 

성경공부를 인도하면서 가장 많이 질문 받은 것 중에 하나가 이것입니다. “하나님은 왜 선악과를 만드셨나요?” “하나님께서 선악과를 만들지 않았다면 인간은 죄를 짓지 않았을텐데...” “하나님은 사람이 죄를 지을 것을 아시면서도 선악과를 만드신 것인가요?” “사랑의 하나님이 어떻게 인간이 죄를 지을 것을 아시면서 선악과를 만드실 수 있나요?” 이런 질문들은 우리가 성경을 읽으면서 한번쯤 품을만한 것들입니다. 그러나 저는 역으로 한번 물어보고 싶습니다. “지혜와 사랑의 하나님께서 굳이 선악과를 만드셨다면 그 의도는 무엇일까?” 오히려 “선악과나무를 만드신 하나님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과 지혜를 알 수는 없을까?” 그런데 이런 식으로 질문을 던지는 사람은 거의 만나보지 못했습니다. 제가 종종 받는 질문은 마치 하나님이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느냐는 식으로 따지는 질문이었습니다. 저는 사람들의 질문을 들으면서 속으로 느끼는 것이 이것입니다. 왜 사람들은 하나님의 선하심을 의심하는 방향으로 생각하는 걸까요? 그렇습니다. 먼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전에 그렇게 질문하는 사람의 마음을 한번 살펴봅시다. 왜 그런 질문을 하는 걸까요? 혹시 인간이 죄인이 된 것에 대해 하나님께 궁극적인 책임이 있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함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선하신 성품에 대해서 의심이 있다는 말인가? 왜냐면 인간이 범죄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드심으로 인간이 죄를 지을 수 있도록 유도하셨기 때문이 아닌가? 저는 질문자의 마음에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해 의심하는 마음이 있다는 것을 지적하고 싶습니다. 자신의 악함과 부패함을 그런 식의 질문을 통해서 변명하고 은폐하는 의도가 다분히 있다는 것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이 문제를 심리학적으로 반격함으로써 풀기보다는 ‘하나님의 의도’란 측면에서 풀고 싶습니다.

자, 이 어려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어디서부터 시작할까요? 모든 문제해결의 실마리는 간단합니다. “문제를 풀기 위해서는 처음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이것은 모든 문제를 푸는 열쇠입니다. 창세기 2장에서 선악과나무를 왜 만드셨는가에 대한 문제는 1장에서 그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고 봅니다. 다시 말해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우리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어떤 모양으로 창조하셨는지부터 살펴보아야 합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사람을 6일째 마지막에 창조하셨다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첫째 날에 창조하지 않으신 까닭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사람을 종으로 부려 먹기 위함이 아니란 것만큼은 분명하게 알 수 있습니다. 창조의 마지막 날에 하나님은 사람을 창조하실 때 의논하셨습니다! 왜, 무엇 때문에, 그리고 무엇을 의논하셨을까요? 어쩌면 이것이 선악과나무를 만드신 것에 어떤 빛을 던져주는 것이 아닐까요? 자, 어쨌든 간에 하나님은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으로 창조하셨습니다. 문자적인 의미로 볼 때 사람은 하나님을 닮을 수 있는 가능성의 존재, 하나님의 신성에 참여할 수 있는 탁월한 존재로 지음 받았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시면서 하신 말씀에 인간창조의 의도가 다분히 드러나고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대신하여 만물을 다스리는 일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의도가 무엇입니까? 무엇이 부족해서가 결코 아닙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품고 하나님을 대신하여 만물을 관리하고 다스리는 청지기로 삼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그것도 오해할 가능성이 다분한 표현입니다. 왜냐면 요즘은 청지기에 대한 개념이 없기 때문입니다. 종과 청지기가 다르다는 사실을 알면 청지기로 삼기 위해 사람을 창조하신 것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것인지 알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더 강조해야 하는 것은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하나님을 닮기 위해서는 하나님과 마음을 나누고 교제해야 합니다. 이것이 인간창조의 진정한 의도였습니다. 요한복음 17장에 예수님의 기도에서 이러한 의도는 극명하게 드러나고 있습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영원 전부터 영광을 나누시면서 완벽한 기쁨을 누리셨습니다. 이제 선하신 의도와 합의에 따라서 그 기쁨과 영광을 창조될 사람에게 나누어주기로 결정하셨습니다. 이것이 삼위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시기 전 의논하신 내용입니다. 물론 그 의논에는 인간의 범죄할 가능성에 대한 논의와 함께, 범죄할 인간의 대속을 위한 논의까지도 포함됩니다.

아무튼 하나님은 사람을 결코 로봇으로 만들지 않으셨다는 사실에 저는 감사드립니다! 저는 이것이 선악과를 만드신 의도에 포함된다고 믿습니다. 다시 말해서, 만일 하나님께서 사람을 하늘의 천사들처럼 단지 명령에 복종하는 존재로 만드셨다면 결코 선악과를 만들지 않으셨을 것이다. 그러나 사람을 하나님을 닮을 수 있고, 하나님을 대신하여 하나님이 지으신 만물을 다스리는 존재로 만드셨다면 하나님처럼 될 수 있는 방법도 인간에게 제시하셔야 합니다. 이것은 청지기와 종의 관계를 통해 충분히 설명할 수 있습니다. 분명 청지기는 종과 다릅니다! 청지는 어떤 사람입니까? 주인의 명령에 순종하되, 주인의 마음을 가진 주인의 벗, 주인의 친구인 자리입니다. 느헤미야는 아닥사스다 왕의 술관원이었습니다! 그가 왕의 술관원이었다는 말은 왕의 신임을 전폭적으로 받는 자리에 있었다는 말이고, 왕과 마음을 나눌 수 있는 벗의 자리에 있었다는 뜻입니다.(느2:1) 왜냐면 느헤미야는 마음만 먹으면 왕을 독살할 수 있는 자리에 있었으니까요. 우리가 잘 아는 요셉의 이야기도 사실은 청지기의 이야기입니다. 요셉은 종으로 팔려갔지만 특유의 성실함과 책임감 때문에 청지기로 발탁되었습니다. 요셉은 보디발의 청지기가 되었고, 나중에 애굽의 청기기가 되었습니다! 청지기는 주인의 창고 열쇠를 맡은 사람입니다. 마음만 먹으면 주인의 모든 것을 다 빼앗을 수 있는 권세를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 권세를 주인이 종에게 허락하지 않으면 결코 청지기일 수 없습니다. 청지기에게 주인은 모든 것을 맡깁니다. 모든 것을 맡기지 아니하면 그는 청지기가 더 이상 아니라 종입니다. 청지기란 주인이 자신이 가지고 있는 모든 보물이 든 창고의 열쇠를 맡긴 사람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 선악과를 만드신 이유는 사람에게 당신이 가지고 있는 보물창고를 맡기기 위해서였습니다. 즉, 선악과는 하나님처럼 되는 열쇠였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역으로 선악과를 만드신 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어떤 신분과 위치로 대우하시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문제를 더 자세히 해결하기 위해 선악과가 정확히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선악과나무를 그저 과일나무 정도로만 생각합니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선악과나무는 하나님의 모든 보물이 담긴 창고열쇠와 같습니다. 선악과에 대해 성경은 어떻게 말하고 있습니까? 17절을 보세요. 성경은 분명히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선악을 알게 한다”는 말의 의미는 “선과 악을 규정짓는 능력을 갖게 한다”는 뜻입니다. 원래 이 능력은 하나님께만 있었습니다. 선과 악을 구분하고 규정짓는 능력은 하나님의 고유한 권한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만의 고유한 권한을 사람이 가질 수 있도록 허락하신 것은 그만큼 사람을 신뢰하고 맡기신 것임을 뜻합니다. 마치 선악과나무 곁에 생명나무를 두신 것도 하나님의 생명에 참여할 수 있는 권한을 사람에게 열어놓으신 것처럼 말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사람은 생명을 선택하지 않았고 대신 지식을 선택했다는 데 있습니다. 아무튼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는 하나님만이 갖고 계시는 고유한 권한에 인간이 접근하고 찬탈할 수 있는 열쇠였습니다. 마치 보디발이 열쇠를 요셉에게 맡기고, 바로가 자신의 인장반지를 요셉의 손가락에 끼워준 것처럼 하나님은 자신의 인장반지를 사람의 손에 넘겨주신 것입니다. 바로가 요셉에게 “이 보좌 외에 다 허락한다.”고 말했듯이 하나님도 “이 선악과나무 외에는 다 허락한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선악을 임의로 규정하는 이 능력을 가지는 것은 사람이 하나님처럼 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하나님을 배반하고 하나님처럼 될 수 있는 열쇠를 맡기신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바로가 자신의 인장반지를 요셉에게 맡긴 것과 같이 하나님으로서는 큰 모험이었습니다. 왜 모험하셨을까요? 왜냐면 하나님은 사람을 청지기로 존중하시기로 작정하셨기 때문입니다. 왜냐면 하나님은 사람과 마음을 나눌 수 있는, 그래서 하나님을 닮을 수 있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만일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지 않았다면 결코 선악과나무를 만들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천사와 같이 사람을 만드셨다면 결코 선악과나무는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바로 그 선한 의도 때문에 선악과나무를 만드신 것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단이 사람을 유혹할 때도 “하나님처럼 될 수 있다”고 유혹했습니다. “하나님처럼 될 것을 하나님이 아신다.”고 한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은 자신이 하나님처럼 되고자 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 반역하는 행위였습니다. 청지기가 열쇠를 가지고서 창고를 자기 것으로 만들어버린 것과 같습니다. 원래 사람은 지음 받을 때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함으로써만 영생할 수 있도록 언약을 체결하였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스스로 하나님과의 언약을 어긴 것이었습니다. 호세아 6장 7절을 보세요. “그들은 아담처럼 언약을 어기고 거기에서 나를 반역하였느니라.” 스스로 하나님처럼 되려고 하는 것이 하나님께 대한 반역(=죄)인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요셉이 바로의 인장반지를 이용해서 스스로 보좌를 찬탈했다는 식의 가상 시나리오와 같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이 주신 기회를 가지고 반역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밀어내고 스스로 보좌에 하나님처럼 앉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왜 선악과를 만드셨는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우리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죄지을 수밖에 없도록 몰아가신 것이 아니라 전적인 선택권을 주셨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합니다.

본문 9절을 읽어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선악과나무만 있게 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사람이 보기에도 좋고 먹기에도 좋은 과실나무들을 많이 나게 하셨고, 심지어 생명나무도 나게 하셨다. 생명나무의 과실을 따먹음으로써 하나님의 생명에 참여하고 하나님을 닮아가는 무한한 축복을 선택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은 수많은 유실수도 아니고 더구나 생명나무도 아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선택한 것입니다. 만약에 선택의 여지가 선악과나무 외에 없었다면 문제는 달라집니다. 그러나 사람은 생명나무를 포기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금하신 것을 의도적으로 선택했습니다. 이것에 대한 책임을 하나님 때문이라고 하는 것은 적반하장입니다.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는 것입니다. 한강에서 뺨을 맞고 와서 어디서 행패를 부린다는 식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선택한 행위에 대해 하나님께 결코 그 책임을 전가할 수 없습니다. 사람은 영생할 수 있는 기회를 스스로 포기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생명나무를 포기하고 스스로 보좌에 앉고자 한 것입니다. 이것은 압살롬이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그 아버지를 보좌에서 쫓아내고 스스로 왕이 되고자 한 것처럼 명백한 반역이고 쿠테타입니다. 사람은 영생의 길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길을 선택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영생의 방법은 아주 단순했습니다. “선악과를 먹지 않는 것으로 영생할 수 있다.” 이 얼마나 간단한 순종입니까? 하나님은 영생하기 위해 어려운 명령을 주지 않으셨습니다.

우리는 이 모든 것을 종합해볼 때 분명한 결론에 도달합니다.

첫째, 하나님이 사람을 지으신 바로 그 의도(목적) 때문에 선악과를 만드셔야 했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청지기로 삼고자 하셨습니다. 무한히 신뢰하며 마음을 나누는 벗으로 삼고자 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에게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능력을 얻을 수 있는 열쇠를 맡겨주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선과 악을 임의로 구분하고 규정짓는 하나님만의 능력, 지식의 능력이었던 것입니다.

둘째, 사람이 죄인이란 이유는 하나님이 보시는 대로 선악을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선악을 규정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반역의 결과입니다! 사람이 타락한 아담의 원죄를 가지고 있다는 이 고리타분한 명제를 이렇게 증명할 수 있다고 봅니다. 하나님 보시는 대로는 전혀 중요하지 않은 인생이 되었다는 것, 오로지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판단하는 것이야말로 인생이 아담의 원죄의 영향력 아래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가 오셔서 우리 죄를 위해 죽으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첫째, 엄청난 반역죄를 탕감해주시려고

둘째, 하나님의 시각으로 선악을 규정하는 ‘구원의 삶’을 살게 하시려고

셋째, 하나님이 원래 의도하신 대로 하나님의 친구이자 청지기로 회복시키려고 오셨습니다. 나 자신을 한번 돌아봅시다. 나는 소견에 옳은 대로 판단하고, 행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고 있습니까?

말씀을 맺습니다.

저는 처음 중학교에서 예수님을 만나게 되고 성경을 읽기 시작할 때 가장 고민스러운 질문이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왜 선악과나무를 만드셨을까? 선악과나무만 없었더라면 인류는 이런 고통과 참상을 겪지도 않았을텐데! 그러나 하나님은 마흔이 넘어서 비로소 그 참 뜻을 깨닫게 해주셨습니다. 오히려 선악과나무를 만드신 것을 통해 하나님의 마음을 보여주셨습니다. 선악과나무는 오히려 저에게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저는 선악과나무를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묵상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에덴동산에 생명나무 곁에 서있던 선악과나무는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크신 믿음과 소망과 사랑을 드러내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 내가 얼마나 은혜가 필요한 죄인인지 새삼 깨닫게 해주고 있습니다. 주님의 은혜가 아니면 나는 언제나 내 소견에 옳은 대로, 내 마음대로 판단하며 살아가게 되는 죄인입니다. 그러나 또 한편 선악과나무는 하나님의 보좌를 찬탈한 배은망덕한 반역자인 우리 인생들에게 사랑하는 독생자를 보내주신 하나님 아버지의 크신 사랑을 또한 웅변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아들을 반역의 대가로 희생을 치를 것을 태초에 인간을 만들기 전에 합의하지 않으셨다면 하나님은 결코 사람을 만들지도 않으셨을 터이고, 또한 선악과나무도 만들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선악과나무를 만들기 전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먼저 예비하셨습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에덴동산에 서 있는 선악과나무를 통해 갈보리 언덕에 서 있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십시오. 그리고 왜 선악과를 만드셨는가? 라고 묻기보다 이제는 왜 십자가를 세우셨는가? 라고 물으십시오. 왜 범죄하도록 내버려두셨는가? 라고 묻기보다 이제는 왜 범죄한 인생을 그냥 멸망하도록 내버려두지 않으셨는가? 라고 물으십시오. 십자가에 밝히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을 믿음으로 받아들이십시오. 그럴 때 에덴동산의 신비 중에 하나인 선악과나무에 얽힌 하나님의 비밀을 온전히 깨닫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