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에 대하여 I
기본 정의 basic definition
가난poverty은 절대적 가난과 상대적 가난이 있습니다. 절대적 가난이란 최저 생계비에도 못미치는 수입으로 인해 생존 자체가 위협받는 상태를 말합니다. 상대적 가난이란 남과의 비교 속에서 자신이 빈곤의 상태에 있다고 여기는 심리적 상태에서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절대적 가난의 원인은 공의가 무너져서 원활하게 재분배가 이루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상대적 가난의 원인은 지나친 경쟁과 강요된 비교의식과 불평등한 경쟁구조에 대한 불평불만입니다. 절대적 가난의 해결은 부의 독점지배구조를 타파하고 사회적 약자를 보호하는 재분배가 이루어지게 만드는 것입니다. 상대적 가난의 해결은 기존의 경쟁구조에서 벗어나 새로운 게임의 룰을 만드는 것입니다.
게임체인저가 되려면 How to become a game-changer
오늘 글을 쓰려고 하는 주제는 후자에 관한 것입니다. 어떻게 게임의 룰을 바꿀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상대적 빈곤의 심리에서 벗어나서 풍요의 심리를 가지고 치열한 경쟁구조의 삶속에서 여유와 풍요를 누리며 살 수 있을까에 대한 것입니다. 저는 그것을 게임체인저game-changer가 되는 삶이라고 정의합니다.
가난의 미덕 knowing the virtue of poverty
가난이 무조건 나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인정할 필요가 있습니다. 일명 [가난의 미덕]입니다. 가난이 우리에게 주는 유익이 있고 우리가 알지 못하는 풍요로움과 보이지 않는 어떤 가치를 제공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가난이 주는 교육적 가치입니다. 이게 무슨 말이냐고요? 자녀교육에 일가견이 있는 사람들은 다들 “자녀를 가난하게 키우라”고 조언합니다. 어릴적부터 부모가 많은 것을 넘치게 공급해주는 것을 경험하면서 자라게 되면 부모의 공급에 고마움을 모르고 당연하게 생각하게 되고, 자립심이 약해지고, 형제들 사이에 누가 많이 받았는지 서로 비교하고 그래서 시기하게 되며 형제가 불화할 수 있으며, 무엇보다 모든 필요를 채우시는 하나님을 의지하고 경험하는 것은 불가능하게 되어버립니다. 요즘 부모는 자식에게 넘치게 공급하여 주는 것을 사랑이라고 여기고 있으나 공급과잉은 자녀가 소중한 가치를 배울 수 있는 기회를 앗아가버릴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겄은 진정한 사랑이 아니라 그릇된 사랑입니다. 공급과잉을 경험한 자녀가 부모를 진정으로 공경했다는 이야기를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통화의 개념을 바꾸라 change the concept of currency
게임체인져가 되려면 먼저 통화의 개념을 바꾸어야 합니다. 성경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흩어 구제하여도 더욱 부하게 되는 일이 있나니 과도히 아껴도 가난하게 될 뿐이니라."-잠11:24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요? 통화currency의 개념을 지폐notes나 동전coins으로 설명하는 일반적인 개념으로는 이해할 수 없습니다. 성경은 씨앗seed혹은 양식food의 개념으로 설명하고 있지요. 하나님은 우리에게 먹을 양식과 심을 양식을 함께 주시는 분이십니다. 심어야 할 양식을 쌓아둔다면 썩어버릴 수도 있고, 또 심을 때를 놓치거나 심을 양식도 먹어버리면 늘 빈핍에 시달리게 됩니다. 이것이 아끼고 모은다고 풍요로워지지 않는 까닭입니다. 쓰면 쓸수록 줄어드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늘어나는 그런 삶이 있습니다.-고후9:10 참조
가치의 개념을 수정하라 Modify the standard of value
통화의 개념을 수정할 뿐만 아니라 가치의 개념 또한 수정해야 합니다. 모든 것에는 가치를 매길 수 있습니다. 가장 쉬운 가치가 금액으로 매겨진 가치 price입니다. 그러나 의외로 많은 영역에서 금액으로 매겨지지 않은, 눈에 보이지 않는 가치가 있습니다. 이를테면, 자유, 자연, 여유, 깨끗한 공기와 물과 같은 것입니다. 특별히 ‘건강’이라는 가치는 엄청난 것입니다. 천문학적인 자산을 가졌지만 불치병을 앓는 사람보다는 특별한 자산assets이 없을지라도 건강한 사람이 더욱 잘 사는 것입니다. 당연히 일시적인 것보다 영구적인 것이 더욱 가치가 있겠지요. 사람들이 금이나 다이아몬드를 귀하게 여기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입니다. 만약 죽어서라도 가져갈 수 있다면 가져갈 수 없는 것보다 훨씬 더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믿음 소망 사랑 혹은 구원salvation과 같은 가치는 그 어떤 금액으로도 매길 수 없는priceless 가치가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사람의 부유함을 그가 가지고 있는 돈이나 부동산 등으로 따진다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일까요? 저는 아프리카 선교사로서 흑인 목회자들을 키워내고 그들에게 올바른 복음을 전하는 것을 저의 사명으로 여기고 살아갑니다. 저는 제 사역에 나름대로 무한한 가치를 매기고 있습니다. 만약 제가 복음을 전하면서 강사료를 요구한다면 저는 제 스스로 제 가치를 제가 요구하는 수준으로 떨어뜨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제가 매긴 가치는 너무나 귀한 것이기 때문에 저는 현지인들에게 돈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복음의 가치를 어찌 돈 몇 푼에다 비할 수 있겠습니까? 이처럼 가치기준이 달라지면 비록 은행 잔고balance가 없을지라도 우리는 부요한 마음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심리적 부요함은 선행되어야 한다 recovery of abundant mind is to proceed
삶의 필요needs와 소원wants에 대해 대응respond할 수 있다고 여기는 마음을 ‘심리적 부요’ 혹은 ‘마음의 풍요’라고 정의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나의 필요needs와 소원wants에 대해 무기력함과 무능력함을 느끼는 상태를 ‘심리적 빈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심리적 부요함을 확보하지 못한 상태에서는 아무리 애쓰고 노력하고 수고하여도 생활 속의 부요함을 회복할 수도 경험할 수도 없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연봉이 3천만원인 사람은 연봉이 1억을 받는 사람을 보면서 항상 빈곤을 느낄 것이고, 연봉이 1억인 사람은 연봉이 10억인 사람을 바라보면서 자신이 항상 빈곤하다고 느낄 것입니다. 왜냐면 자신이 비교하는 사람의 필요needs와 소원wants를 자신의 것으로 삼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자신은 많은 것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항상 자신의 필요와 소원에 반응하며 사는 것이 힘들다고 느끼게 됩니다. 그러나 그가 깨닫지 못하는 것은 자신의 필요와 소원이 아닌 다른 사람의 필요와 소원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심리적 부요함을 회복하고 확보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필요와 소원을 되찾아야 합니다. 이와 같이 심리적 부요함을 되찾게 되면 능동적이고 주도적인proactive 삶을 살기 시작합니다. ‘풍요로운 삶’abundant life, 다시 말해서 재정적인 면에서 자기주도적인 삶을 사는 것이 가능하게 됩니다.
빚의 파괴력을 알아야 knowing the power of debt
빚을 진다는 것은 채권자에게 속박을 당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서 빚을 지게 되면 결코 심리적 풍요로움을 가질 수 없게 됩니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자산 가치가 100억이 된다고 할지라도 은행이나 사채업자에게 빚을 지고 있다면 심리적 빈곤에 시달리게 됩니다. 심리적 풍요로움을 확보하고 재정에 관해 주도적인 삶을 살려면 무엇보다 빚이 없어야 합니다. 일단 빚을 졌다면 최우선적으로 빚을 청산하는 것을 목표로 해야 합니다.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어도 빚이 없는 사람이 100억의 자산을 가졌지만 빚을 진 사람보다는 더욱 풍요로운 삶을 살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저는 결혼할 때 양가 부모님이 전셋집을 마련해주셨습니다. 결혼하고 열심히 적금을 들어서 몇 년이 안 되어서 다 갚아드렸습니다. 일단 결혼하게 되면 부모를 떠나 정서적으로 재정적으로 독립하는 것을 의미하므로 결혼할 때 부모님이 도와주신 것도 갚아야 할 빚으로 여긴 것입니다. 빚이 없으면 훨씬 홀가분(?)한 마음으로 부모님을 대할 수 있는 것입니다. 지금껏 살면서 어느 누구에게도 빚지고 살지 않았고,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빚지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심리적 풍요로움을 위해서 그리해야 합니다. 빚지면 자유를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풍요로운 삶abundant life을 위해서 싸워야 할 것들이 있는데 그 중에 하나가 빚debt입니다
광야생활의 유익 benefit of financial wild life
오래 전에 YWAM의 전임간사로 위탁하고 살았을 때는 재정적으로 무척이나 힘들었습니다. 서울의 큰 교회에서 부목사로 섬길 기회도 있었지만 제 스스로 그렇게 선택한 것입니다. 하지만 YWAM 전임간사는 한 푼의 생활비도 받지 않는 생활이었습니다. 그간 사역했던 서울을 떠나 별로 아는 사람이 없었던 지방에서 주야간 전임간사로 사역할 때 얼마나 쪼들렸는지 모릅니다. 처음에 간사로 위탁하겠다고 했을 때 지부장은 하다가 중간에 포기하겠지 하는 눈치였습니다. 그때 고등학교 동창 하나가 저의 어려운 사정을 알고 다른 한 사람과 함께 도와주기 시작하였습니다. 한 달에 30여만원 정도의 후원금을 가지고 2천만원 전셋집에서 5 식구가 살아야 했습니다. 담임목회를 내려놓고 그런 삶을 살아야 했을 때 정체성도 나의 소명도 여지없이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3년 정도 그런 재정적인 광야생활을 하였는데 그때 제가 경험하면서 배운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의 공급자provider이심을 확실히 알게 되었고, 광야생활에서도 나의 필요와 소원에 영광 가운데 넘치게 공급해주시는 은혜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무엇보다 내가 받기 위해 먼저 주어야 한다는 사실을 경험으로 배우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돈을 주고 배울 수 없는 값진 교훈이었습니다. 나중에 선교지에 나와서야 비로서 하나님께서 왜 그런 재정적인 광야생활을 겪게 하셨는지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궁핍한 가운데서도 자족할 수 있다고 고백했던 사도 바울의 고백을 저도 따라할 수 있었습니다. 3년 간의 재정적인 광야생활은 지금 선교지에서 ‘풍요로운 삶’을 살게 하는 큰 밑거름이 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나의 부요함의 근원으로 여기는 삶 Taking the eternal resources of God
나의 모든 필요와 소원에 주도적으로 반응할 수 있다는 자신감은 내 삶의 근원이 무한한 자원이신 하나님께 연결되어 있다는 확신에서부터 나오는 것입니다. 아무리 천문학적인 자산을 소유했다고 할지라도 물질에서 근원을 찾는 것은 한계가 있기 마련입니다. 물질은 언제든지 사라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가진 사람이 없는 사람보다 더 불안해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자신의 무한한 자원의 근원으로 여기는 사람은 어떤 상황 속에서도 자족할 수 있습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4:13)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이러한 믿음의 고백은 내가 재정적으로 물질적으로 풍요로울 때는 결코 배울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신기하게도 아무 것도 없을 때, 정말 광야와 같은 삶 속에서만이 이 진리를 깨닫게 되고 고백하게 됩니다. 앞서 말한 광야생활이야말로 하나님이 나의 참된 근원이시며 공급자이심을 경험하여 알게 순간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광야생활이 하나님을 만나는 ‘성소’sactuary라고 노래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여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간절히 주를 찾되 물이 없어 마르고 황폐한 땅에서 내 영혼이 주를 갈망하며 내 육체가 주를 앙모하나이다. 내가 주의 권능과 영광을 보기 위하여 이와 같이 성소에서 주를 바라보았나이다.”(시63:1,2) 심리적은 부요함은 이곳에서 배우게 됩니다. 이것은 책을 통해서나 혹은 자기명상을 통해서 얻는 것이 아닙니다. 실제적으로 궁핍하고 빈곤할 때 배우게 되는 살아있는 지식입니다. 책을 통해, 혹은 강연을 통해 얻은 지식은 잊어버리기도 하지만 광야학교에서 배운 지식은 결코 나를 떠나가지 않습니다. 이것은 학교나 책이나 사람에게서 얻는 지식이 아닙니다. 광야학교에서 하나님께로부터 배우는 것입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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