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설교

변증설교(7)-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인가?

등불지기 2012. 2. 19. 20:00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인가?

 

본문: 마태16:13-17

 

리는 무조건 믿으라고 말하기 전에 각자 믿는 바에 대해 시험하고 검사하고 나서 스스로 결정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도 저도 여러분에게 믿음을 강요하지 않습니다. 성경을 기록한 저자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믿음을 강요하거나 윽박지르지 않습니다. 조사해보고 나서 스스로 결정하라는 여유가 넘칩니다. 왜 여유가 있는가?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증거가 충분하기 때문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개념을 믿는 종교가 아니라 역사적 사실을 믿는 종교입니다. 특히 믿는 가정에서 자라난 그리스도인들이 혼동을 겪고 신앙의 갈등을 겪는 부분이 바로 여기 있습니다. 믿지 않는 가정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신앙생활하는 그리스도인들은 자기 자신이 경험한 주관적인 증거가 있기 때문에 흔들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믿는 가정에서 자라난 사람들의 경우는 다릅니다. 어릴 때부터 교회에 다녔고, 교회에서 가르치는 것을 무의식적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에 주관적인 증거를 가지고 있지 않은 상태에서 세상에 나가면 ‘기독교 신앙은 날조다.’라는 말이나 ‘예수는 신화다’라는 지성적인 공격을 받게 되면 순간 당황하게 되는 것입니다. 믿는 가정에서 자라난 그리스도인들에게 정말 필요한 것이 바로 변증설교입니다. 왜냐면 그들은 기독교 신앙을 개념이나 사상 정도로 받아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기독교 신앙을 역사적인 신앙으로 배워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가운데 혹시 아주 어릴 적부터 부모님을 따라 교회에 다녔다면 이제 분명히 알게 되기를 바랍니다. 기독교 신앙과 다른 종교가 무엇이 다른지에 대해서 배우십시오. 그리고 무엇보다 기독교 신앙이 다른 종교와 달리 유일하게 역사성을 매우 강조하는 것임을 아십시오. 왜 믿는 가정에서 자라난 많은 사람들이 커서 방황하거나 교회를 떠나가는지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들은 기독교 신앙이 다른 종교와 무엇이 다른지를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기독교 신앙이 그저 하나의 개념이나 사상을 믿는 것으로 오해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한번이라도 기독교 신앙의 근거가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성에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그들은 자신들의 삶을 진리되신 예수 그리스도께 온전히 헌신하게 될 것이라고 믿습니다. 여러분에게 바로 그런 일이 일어나게 되기를 축복합니다.

지난 시간에는 나사렛 출신의 예수란 인물이 실존 인물이었는가에 대해서 여러 가지 증거들을 찾아보았습니다. 우리가 만일 실제하지 않은 인물을 나의 구세주로 믿고 있다면 이것은 가장 불행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이 신화도 모르면서 예수님을 신화적인 인물이라고 주장하고 있지만 그들은 역사적인 증거들을 애써 외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정말 예수님이 신화적인 존재라는 증거가 있기 때문에 그렇게 말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불신앙을 정당화하기 위해, 자신들이 믿음을 갖는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혹은 믿기 싫어서, 다시 말해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자신들의 적대감정 때문에 단지 그렇게 표현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은 신화라고 말하면서 그 증거를 제시하지 못합니다. 그들은 실제로 그 증거를 찾아볼 생각조차 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얼마나 진리를 싫어하고 있는지를 역으로 보여줄 뿐입니다. 그러나 1세기와 2세기에 기록된 여러 문헌들을 통해서 우리는 예수님이 실제로 존재했던 인물이었음을 명확하게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것이 우리에게 믿음을 가져다주지는 못함을 기억하십시오. 이것은 예수님은 신화적인 인물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의 입을 다물게 할 뿐 그들에게 믿음을 가져다주지는 못합니다.

그렇다면 오늘 살펴볼 것은 예수란 분이 실제인물이었다면 그분의 정체는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분은 자신에 대해서 어떻게 말했는가 하는 것입니다. 특히 성경에서는 그분이 자신의 신분과 정체에 대해서 자신이 하나님이며,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주장했다는 것입니다. 사실 기독교 신앙은 바로 여기서 출발합니다. 나사렛 예수는 평범한 인물로 태어나 살다가 십자가에 못박혀 죽은 것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셨으며 하나님의 아들로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으며 하나님의 아들로 다시 살아나셨다는 사실입니다. 기독교 신앙의 본질은 바로 그러한 사실을 받아들이는 데서부터 출발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나사렛 예수를 역사상 가장 존경하고 흠모할만한 인물로 인정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기독교에 대해서 적대적인 사람들 중에서도 예수 그리스도의 인물됨에 대해서는 부정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분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란 인물을 존경할만한 성인으로 받아들이지만 하나님의 아들, 즉 신성을 가지신 분으로는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두 부류로 나눌 수 있습니다. 나사렛 예수를 믿되 평범한 사람으로 믿는 사람과, 신성을 가지신 하나님의 아들로 믿는 사람들입니다. 진정한 기독교인은 바로 후자, 즉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믿는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나사렛 예수가 정말 하나님의 아들인가, 아니면 신성이 없는 평범한 목수의 아들인가 하는 것을 결정해야 합니다. 이것은 나사렛 예수가 자신을 정말 하나님의 아들로 주장했는가에 따라 달라집니다. 만약 그분이 자신의 신분에 대해서 그렇게 주장한 적이 결코 없으며, 또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정체성(identity)을 가지고 산 적이 없다면 오늘 기독교인들의 신앙은 다 무너집니다. 그러나 만약 그분이 정말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면 정반대로 문제는 달라집니다. 우리가 신약성경이 가지고 있는 문헌적인 신빙성을 가지고 본다면 예수님은 분명 자신에 대해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주장하셨고, 또 그러한 정체성, 자기 이해를 가지고 사셨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오늘 왜 중요할까요? 이 문제에 관해 토마스 슐츠라는 학자가 다음과 같이 말한 것을 인용해보겠습니다. “예수님을 제외하고는 모세든, 바울이든, 부처든,, 모하메드든, 공자든, 그 어떤 알려진 종교지도자도 자신을 하나님이라고 감히 주장한 적이 없다. 오직 예수님만이 유일하게 자신의 신성을 주장한 유일한 종교지도자이며 동시에 그만이 유일하게 세상의 많은 부분의 사람들에게 자신이 하나님이란 사실을 확증시킨 사람이다.” 예수님은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주장하셨고, 또 그런 정체성을 가지고 사셨습니다. 그런데 인류역사상 위대한 종교지도자들 중에서 아무도 그렇게 주장한 사람도 없었고, 그러한 정체성을 가지고 살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몇몇 사이비 교주들이 자신이 하나님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정신병원에 가도 자신이 하나님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로부터 존경받는 종교지도자들 중에서, 인류 역사에 긍정적이고 선한 영향을 끼친 지도자들 중에서, 고상한 인격을 가진 사상가나 지도자들 중에서는 한 사람도 찾아볼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먼저, 나사렛 예수가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 신성을 가진 하나님으로 주장한 증거를 찾아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다음 그러한 주장을 신빙성이 있는지 여부를 판단해보아야 합니다. 첫째, 나사렛 예수가 사형을 받게 된 죄명이 바로 신성모독이었다는 것입니다. 산헤드린 공회에서 나사렛 예수를 처형하기로 결정한 죄목은 윤리적인 부분이나 기적을 행한 종교적인 부분이 아니라 자신이 신성을 주장했다고 믿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은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주장했기 때문에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것입니다. 둘째, 예수님은 자신을 하나님과 동등하다고 주장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0장 25절부터 읽어보세요.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하신대 유대인들이 다시 돌을 들어 치려하거늘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아버지께로 말미암아 여러 가지 선한 일을 너희에게 보였거늘 그 중에 어떤 일로 나를 돌로 치려 하느냐 유대인들이 대답하되 선한 일을 인하여 우리가 너를 돌로 치려는 것이 아니라 참람함을 인함이니 네가 사람이 되어 자칭 하나님이라 함이로라.” 유대인들은 나사렛 예수가 신성을 가졌다고 주장하는 것에 대해 잘 알고 있었습니다. 요한복음 5장 17, 18절에도 나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니도 일한다 하시매 유대인들이 이를 인하여 더욱 예수를 죽이고자 하니 이는 안식일만 범할 뿐 아니라 하나님을 자기의 친아버지라 하여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으로 삼으심이러라.” 유대인들이 보기에 나사렛 예수란 인물은 일관되게 자신이 하나님과 매우 특별한 관계에 있다고 주장하는 것으로 보고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은 그 어떤 유대인들도 상상할 수 없는 말을 하고 있다는 것에 대해 놀라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나의 아버지’라고 부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이스라엘의 아버지’라고 인식하기는 했지만 ‘나의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에 대해서는 인식해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셋째,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방식으로 말씀하셨습니다. 구약에서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나는 스스로 있는 자”라고 하셨던 바로 그 표현을 예수님께서 하신 것입니다. 요한복음 8장 58절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 하시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진실로 진실로’라는 말의 의미는 자신이 하는 말에 신적인 권위를 부여하는 말입니다. 이것은 자신이 곧 하나님이란 선언이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의 말을 듣고 놀란 것은 예수님이 신성을 주장하시면서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또, “내가 있느니라.”는 이 말씀 역시 “나는 여호와”란 뜻이기 때문에 사람들로 하여금 충격을 준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 돌려야 할 영광과 자신이 받아야 할 영광이 동등하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는 모든 사람으로 아버지를 공경하는 것같이 아들을 공경하게 하려 하심이라. 아들을 공경치 아니하는 자는 그를 보내신 아버지를 공경치 아니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한복음 5:23,24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곧 자신이 하나님 아버지와 동일한 신성과 영광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었습니다. 이 외에도 예수님은 자신을 아는 것이 곧 하나님을 아는 것이라고 말씀하시기도 했습니다.(요8:19) 또 예수님은 자신을 믿으라고 말씀하기도 하셨습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요14:1) 세상의 존경받는 그 어떤 종교지도자나 사상가도 이런 식으로 사람들에게 말한 적이 없습니다. 자신을 믿으라고 누가 말했단 말입니까? “빌립이 가로되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또 예수님은 하나님으로 말씀하셨습니다. 구약의 선지자들은 “주께서 말씀하시되”라는 말을 사용하였지만 예수님은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라는 말을 사용하셨습니다. 역사상 이런 식으로 가르친 지도자는 없었습니다.

또 예수님은 죄를 사하심으로써 자신이 하나님이심을 간접적으로 나타내셨습니다. “예수께서 저희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소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 어떤 서기관들이 거기 앉아서 마음에 의논하기를 이 사람이 어찌 이렇게 말하는가 참람하도다. 오직 하나님 한 분 외에는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막2:5-7)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이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다고 말씀하심으로써 자신이 곧 하나님이심을 증거하셨습니다.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예수님 이전과 이후 그 어떤 존경받는 지도자나 사상가도 자신이 죄를 사한다고 선언한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또 예수님은 자신이 곧 생명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자신이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요14:6절)이라고 주장하셨습니다. 많은 종교지도자들은 자신이 길과 진리와 생명에 대해 알고 있다고 주장했지만 결코 자신이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주장하지는 않았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이 차이는 매우 중요한 차이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심판하는 권세를 가지고 있다고 말씀하심으로 자신이 곧 하나님이심을 간접적으로 드러내셨습니다.(요5:27)

무엇보다 1세기 살았던 그리스도인들이 나사렛 예수를 주와 하나님으로 고백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조상들도 저희 것이요 육신으로 하면 그리스도가 저희에게서 나셨으니 저는 만물 위에 계셔 세세에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이시니라. 아멘.”(롬9:5)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빌2:6-11절)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니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골1:15-17절) “그 안에는 신성이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고.”(골2:9절) “복스러운 소망과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심을 기다리게 하셨으니.”(딛2:13절)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서 베드로 역시 예수님을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하고 있지 않습니까? 도마 역시 부활하신 예수님 앞에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하고 있지 않습니까? 히브리서를 보면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오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히1:3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도 요한 역시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요1:1절)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1:14절) “또 아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이르러 우리에게 지각을 주사 우리로 참된 자를 알게 하신 것과 또한 우리가 참된 자 곧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니 그는 참 하나님이시오 영생이시라.”(요일5:20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저는 “나사렛 예수가 누구인가?”에 대해서 이야기했습니다. 지금까지 길게 논증한 결과 밝혀진 사실은 이것입니다. 나사렛 출신의 예수란 인물이 스스로 신성이 있다고 생각했고, 또 그렇게 주장했고, 바로 그것 때문에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 한 분 때문에 인류 역사에 가장 크나큰 변화가 있었다는 사실을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바로 그러한 나사렛 예수 한 분 때문에 인생이 바뀌고, 나라와 민족의 운명이 바뀌고, 역사가 바뀌게 된 증거들은 무수히 많습니다! 19세기에 살았던 유명한 무신론자인 찰스 브래드라우란 사람이 어떤 그리스도인에게 기독교의 주장들의 진위에 대해 서로 토론하자고 도전했습니다. 그 사람은 휴 파라이스 휴즈란 사람이었는데 런던의 슬럼가에 빈민들 사이에서 일하면서 영혼 구원 사역에 집중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브래드라우에게 한 가지 조건만 만족한다면 토론에 응하겠다고 했습니다. 휴즈는 이렇게 조건을 제시했습니다. “우리가 각각 우리의 가르침을 통해 영향을 받아서 죄와 부끄러움이 가득한 삶으로부터 구속을 받은 남녀의 예를 가지고 우리의 신앙의 진위성에 대한 구체적인 증거를 제출하도록 합시다. 제가 그런 남녀 100명을 모아올테니 당신도 그렇게 해보십시오.” 그리고 나서 휴즈는 브래드라우가 100명을 모아올 수 없으면 50명만 모아와도 되고, 50명도 모아올 수 없으면 20명만 와도 된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최종적으로 그는 숫자를 1명으로 줄였습니다. 브래드라우가 해야 할 일의 전부는 무신론으로 삶이 변화된 한 사람을 찾아내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면 그리스도로 삶이 변화된 100명의 사람을 모아와야 하는 휴즈는 그와 토론할 것을 수락할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브래드라우는 두 손 들고 항복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오늘 읽은 본문에서 우리는 굉장히 중요한 한 가지 사실을 보게 됩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누군가에 대해서, 사람들이 자신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를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 어떤 종교지도자들에게서도 찾아 볼 수 없는 매우 독특한 점입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이 자신들에게 대해서 무엇을 믿는가 하는 것이 근본적으로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하고 계셨습니다. 이에 대해서 우리는 어떤 결론을 내려야 할 단계에 왔습니다. 예수란 분이 자신에 대해서 하나님이라고 주장하셨다는 사실에 대해 우리는 다음과 같이 추론해볼 수 있습니다. 첫째로, 그의 주장은 거짓이었다는 것입니다. 둘째로, 그의 주장은 사실이었다는 것입니다. 결코 중간 지대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좀 더 쉽게 말해서, 예수님의 자기주장에 대해서 우리는 세 가지 대안 중에 하나를 선택할 수밖에 없습니다. 첫째, 예수님은 거짓말쟁이었습니다. 자신이 주장하는 것 거짓이란 것을 알고 있었고, 고의적으로 거짓 주장을 했다는 것이지요. 그는 철저히 다른 사람을 속이기 위해 처음부터 끝까지 거짓말만 한 사람이었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그는 위선자였다는 것이지요. 이 결론을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그가 바보란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왜냐면 자신이 주장한 거짓말 때문에 죽었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예수님이 거짓말쟁이고, 사기꾼이고, 바보였다면 우리는 그가 다른 사람이 남겼던 도덕적 가르침, 도덕적 삶, 도덕적 영향력에 대해서 과연 설득력 있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역사를 통해 볼 때 예수 그리스도만큼 많은 사람들의 마음과 정신에 선한 영향을 끼친 인물을 찾아볼 수 없는 것입니다. 사기꾼이 이것을 만들 수 있을까요? 둘째로, 예수님은 미치광이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주장이 거짓인지도 알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이지요. 다시 말해서 자신은 망상에 사로잡혀 있었다는 것입니다. 아마도 이것역시 설득력이 없습니다. 왜냐면 미친 사람에게 찾아볼 수 없는 놀라운 성품과 능력이 예수 그리스도의 삶에 찾아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미친 사람에게서 우리는 지혜와 삶의 통찰력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또한 미친 사람으로부터 우리는 사랑과 긍휼과 용서와 같은 성품을 발견할 수 없습니다. 미친 사람의 특성에 대해 알면 알수록 예수 그리스도를 미친 사람이라고 말하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시도인지 알게 될 것입니다. 역사가인 필립 샤프란 학자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처럼 하늘처럼 맑고 산 공기처럼 상쾌하고, 칼처럼 날카롭게 관통하며, 전적으로 건강하고 활력이 넘치며, 항상 준비되어 있고, 항상 침착한 한 지성인이 그 자신의 인격과 사명에 대해 그렇게 급진적이고 심각한 속임수에 빠져 있을 수 있었을까? 이것이야말로 터무니없는 공상이다.” 미친 사람의 말이 우리에게 평안을 주고 기쁨을 주는 경우를 저는 한 번도 듣지도 보지도 못했습니다. 셋째, 저와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받아들이는 제안은 이것입니다. 나사렛 예수의 주장은 사실이었다는 것이지요. 그는 주님이십니다. 그는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이 사실에 대해서 사람들은 두 가지 반응을 보일 것입니다. 첫째, 받아들일 수 있거나, 혹은 받아들이지 않고 거절하거나입니다. 만약 거절한다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신 하나님을 거절하는 것이 틀림없습니다. 만약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그분을 세상에 보내신 하나님을 아버지로 받아들이는 것이 될 것입니다.

오늘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헤롯이 로마 황제인 시저를 기념하기 위해 만든 도시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묻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오늘 저와 여러분에게도 묻고 계십니다. “너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세상의 그 어떤 종교지도자도, 사상가도, 철학가도 이런 식으로 묻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다고 자신 있게 말씀드립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가를 결정하는 일에 게을러서는 안 될 것입니다. 왜냐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에 대해서 가르치시고 선포하신 것이 너무나 엄청난 것이기 때문입니다. 단지 훌륭한 도덕가나 사상가 정도로 치부하기에는 그분의 정체성에 대한 그분의 메시지는 너무나 강력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분의 이름으로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묻고 싶습니다. 여러분에게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는 어떤 분입니까? 여러분은 그분을 어떤 분으로 알고 계십니까? 이것이 왜 중요할까요? 예, 이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어느 정도로 중요할까요? 그것은 곧 내가 생명을 얻느냐의 문제이기 때문에 중요합니다.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요20:31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 그분은 과연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신가? 그분에 대한 이해는 여러분의 생명과 구원과 직결된 문제입니다. 그리고 그분에 대한 이해는 하늘로부터 오는 지식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시 묻겠습니다. “여러분은 나사렛 예수를 어떤 분으로 알고 있습니까?” “여러분에게 예수 그리스도는 어떤 분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