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는 실존인물인가?
본문: 벧후1:16-21
변증설교가 조금 어렵고 딱딱하게 여겨질지라도 잘 집중해서 듣게 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의 지성이 강해질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것입니다. 법정에서 판사와 검사와 변호사가 서로 공방을 벌이는 것은 증거에 대한 것입니다. 그냥 믿으면 되지..라고 말하지 마십시오. 맹목적 신앙은 불신앙 못지 않게 위험한 것입니다. 제가 요즘 계속 강조하는 것이 증거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증거를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맹신이 되거나 신비주의 신앙이 됩니다. 증거라고 할 때 우리는 역사적인 증거를 가장 중요한 증거로 여기는 것이 당연합니다. 감정적이고 주관적인 증거는 역사적인 증거 다음으로 필요한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기독교 신앙은 역사적 신앙입니다. 철학적 신앙이 아닙니다. 개념적 신앙이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다니면서도 역사적 신앙을 갖지 못한 채 철학적이고 개념적인 신앙의 수준에 머물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상에서 힘을 쓰지 못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공격 앞에 맥을 못 추는 것입니다. 여러분, 기독교와 불교, 유교, 이슬람교와 다른 점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역사성입니다. 역사성이 가장 중요한 차이입니다. 기독교는 역사적인 증거를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종교입니다. 그러나 불교나 유교나 이슬람교는 역사적인 증거는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가장 큰 차이점입니다. 성경은 역사책입니다. 역사적 사실을 기록한 책입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담대한 제안을 하나 하겠습니다. 만약 성경에 기록된 사건 중에 날조된 것이 하나라도 있다면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이 됩니다. 정말 그렇다면 믿음을 버리십시오. 그러나 진지하게 증거들을 찾아본다면 여러분들을 압도하는 강력한 증거들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오늘날 사람들은 증거를 받고도 믿지 않습니다. 그만큼 마음이 완고하다는 증거입니다. 그만큼 진리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증거입니다. 그만큼 진리에 대해 관심이 없다는 증거입니다. 요즘 현대인들의 관심은 진리가 아니라 필요입니다! 자기와 상관이 없으면 믿지 않습니다. 실용주의가 오늘날을 지배하는 정신입니다. 심지어 교회조차, 목회자들조차 진리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그 증거로 기독교 책들 중에서 진리에 대해 다루고 있는 책들은 인기가 별로 없습니다. 목회자들은 변증서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오직 목회성공에 대한 책들만 찾아다니는 것 같습니다. 교인들은 오직 ‘은혜’가 되는 책들만 찾아다니는 것 같습니다. 진지하게 진리에 대해서 고민하는 모습은 거의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오늘날의 기독교가 화려하지만 알맹이가 없다는 비난을 받을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에게 부탁하고 싶은 것이 이것입니다. 그것이 지금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는가를 묻기 전에 그것이 진리인가 아닌가를 먼저 물으십시오. 그것이 지금 나에게 무슨 유익을 줄 것인지 묻기 전에 그것이 옳은 것인가를 먼저 물으십시오. 이것이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의 정직한 태도입니다. 이러한 정직함이 있다면 여러분의 신앙은 급속도로 성장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을 견고하게 세워주는 일군이 될 것입니다.
자, 오늘 제가 다루려고 하는 바는 바로 이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성에 있습니다! 예수란 인물이 실존했고,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주장했고, 자신이 말한 대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는 사실, 그리고 승천했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사실이 아니라면, 이것이 단지 지어낸 이야기에 불과하다면 저는 지금 당장 목사직을 그만 둘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진지하게 물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과연 실존 인물인가?” “그 증거는 무엇인가?” 철학자 버트란트 러셀은 자신이 쓴 책 [내가 기독교인이 되지 않은 이유]란 책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고 합니다. “그리스도가 과연 역사상에서 존재했는가 하는 것은 매우 의심스러우며 또한 그가 가령 존재했다 할지라도 우리가 그에 대해서 알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그러나 실제로 러셀과 같이 주장하면서 자신의 불신을 정당화하려고 애쓰고 있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실존 인물이 아니기 때문에 자신은 예수님을 믿지 않겠다고 용감하게 주장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는 것입니다. 혹시 이와 비슷하게 예수님이란 인물은 사람들이 지어낸 신화이기 때문에 자신은 예수님을 믿지 않는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을까요? 그러나 실제로는 많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길거리에 가서 교회에 다니지 않는 사람들에게 물어보십시오. “혹시 당신이 교회에 나오지 않는 이유가 예수님이란 분이 실존인물이 아니기 때문입니까?” 기독교를 비방하고 멸시하는 사람들 중에 상당수가 나사렛 예수의 역사성에 대해서 인정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를 공격하면서도 예수란 인물에 대해서는 공자나 석가모니와 같은 수준에 있는 인물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오토 베츠란 학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지금껏 어떤 진지한 학자도 예수의 역사성을 의심하는 위험천만한 가정을 하지 않았다.” F.F.브루스란 학자는 또 이렇게 말했습니다. “어떤 저자들은 ‘그리스도 이야기는 신화’라는 상상을 하는 것 같다. 하지만 그들도 역사적 증거를 근거로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공정한 역사가에게 그리스도의 역사성은 줄리어스 시저의 역사성만큼이나 자명한 것이다. ‘그리스도 이야기는 신화’라는 이론을 유포시키는 자들은 사실 역사가라고 할 수 없다.” 저는 브루스가 한 이 말에 공감하고 있습니다. 기독교 신앙을 신화로, 성경을 신화책이라고 비판하는 사람들은 도대체 신화를 제대로 알고나 하는지 묻고 싶습니다. 그들은 역사와 신화를 제대로 분간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철저하게 역사에 절대적으로 의존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성경은 철학서나 윤리책이 결코 아닙니다. 성경은 역사서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실존인물이란 증거는 무엇일까요? 1세기와 2세기에 기록된 문헌들을 모두 조사해보면 그 증거들을 충분히 발견할 수 있습니다. 첫째로, 기독교인이 아닌 사람들이 쓴 글에서 예수님이 실존인물이란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만약 예수란 인물이 제자들이나 몇몇 사람들에 의해서 날조된 인물이라면 비기독교인들에 의해서 그렇게 기록될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고대문헌들을 조사해볼 때 우리는 특히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게 되는데 바로 기독교에 대해서 적대적이고, 공격적인 입장에 있던 사람들조차 예수의 역사성에 대해서는 인정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은 AD 55년에서 120년까지 살았던 고넬리우스 타키투스란 사람이 있습니다. 참조로, 연대기를 기록할 때 전세계적으로 AD와 BC를 표기하고 있다는 사실은 예수의 역사성을 전제로 하고 있다는 또 다른 증거입니다. 고대 로마의 탁월한 역사가였던 타키투스의 글 중에서는 이런 표편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으로부터 그 어떤 안심시키는 말도, 왕자가 줄 수 있는 그 어떤 후한 선물도, 또한 신들에게 드려지는 어떤 희생 제물도 네로가 로마 대화재를 명령했다고 믿어지는그 오명에서 네로를 벗어나게 할 수 없었다. 따라서 그러한 소문을 차단하기 위하여 네로는 거짓되게, 그리스도인들이라고 불리며 일반적으로 미움의 대상이 되던 사람들에게 그 죄를 대신 뒤집어씌우고, 또 그들에게 가장 혹독한 고문으로 벌을 주었다. ‘그리스도인들’이란 명칭은 그리스도에게서 유래되었는데 그는 황제 티베리우스 통치 기간에 유대 총독이던 본디오 빌라도에게 죽임을 당하였다. 그러나 한 때 억눌려 있던 그 해로운 종교는 그것이 시작된 유대 지역과 로마 전역에서 다시 일어났다.” 이 글에는 예수의 부활을 간접적으로 암시하는 표현도 있습니다. 이 외에도 예수의 역사성을 인정하고 있는 비기독교인, 혹은 반기독교인들은 여럿 발견할 수 있습니다. 2세기 후반의 사모사타의 루시안, 로마의 역사가인 수에토니우스, 특히 수에토니우스의 경우 비기독교인이면서 나사렛 출신 예수가 30대 초반에십자가 처형을 당했으며 그후 20년이 채 지나지 않아서 로마에 그리스도인들이 등장했으며, 기독교인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정말 존재했고, 죽었고, 그리고 다시 살아났다는 확신 때문에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또 소아시아의 플리니우스, 탈루스, 플레곤 같은 당시 역사가들이 예수의 역사성에 대해서 인정하고 있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탈루스란 역사가가 쓴 글에는 예수가 십자가에서 운명하던 오후 늦은 시간에 어둠이 땅을 뒤덮은 것에 대해서 태양의 일식으로 해석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후 221년에 율리우스 아프리카누스란 역사가는 탈루스의 글에 대해서 이렇게 반박하고 있습니다. “그의 세 번째 역사책에서 탈루스는 이 어두움을 태양의 일식이라고 교모하게 둘러대고 있다. 하지만 그것은 합리적인 생각이지 않다. 왜냐면 태양의 일식은 보름달에는 일어나지 않는데, 그리스도가 돌아가신 때는 바로 유월절 보름 기간이었다.” 플레곤이란 비기독교인 역사가도 이렇게 기록하였습니다. “티베리우스 시저가 왕위에 있을 때, 보름달 기간에 태양의 일식이 일어났다.” 이외에도 주후 70년 경에 스토아 철학자로서 활동한 시리아 사람인 마라바 세라피온이란 사람은 예수를 철학자 소크라테스,, 피타고라스와 비교하고 있습니다. 기독교인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예수의 역사성을 전제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가 쓴 글을 인용해볼까요? “소크라테스를 사형에 처함으로써 아테네인들은 무엇을 얻었는가? 그들의 범죄에 대한 심판으로서 기근과 전염병이 그들에게 임하였다. 피타고라스를 화형에 처함으로써 사모스 섬의 주민들은 무엇을 얻었는가?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의 땅은 모래로 뒤덮히고 말았다. 유대인들은 그들의 지혜로운 왕을 사형에 처함으로써 무엇을 얻었는가? 그들의 나라는 그 사건 직후에 바로 멸망당하고 말았다. 신은 공정하게도 지혜로운 이 세 사람의 원수를 갚으셨다. 아테네인들은 배고픔으로 죽었고, 사모스 섬 주민들은 바다에 압도되었으며 그들의 땅에서 쫓겨난 유대인들은 산산이 흩어져서 살고 있다.”
이외에도 예수의 역사성에 대해서 말하는 문헌은 로마인과 그리스인만이 아니라 유대인의 문헌에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기독교 신앙에 대해서 적대적인 사람들입니다. 바벨론 탈무드란 책에서는 이런 표현이 나옵니다. “유월절 전날 밤에 그들은 예수를 매달았다. 그리고 통보자 한 사람이 나와서 예수 앞에 서서 40일 동안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이 자는 사술을 행하고, 이스라엘을 꾀어서 그릇된 길로 인도하였기에 곧 돌에 맞아 죽게 될 것이다. 이 자에게 유리한 어떤 것이라도 알고 있는 자가 있다면, 앞으로 나와서 이 자를 대신하여 탄원하기를 바란다. 그러나 그를 변호할만한 어떤 것도 발견하지 못한 그들은 유월절 전날 밤에 그를 매달았다.” 후대에 기록된 탈무드에도 “예수”란 명칭이 나옵니다. 또 다른 결정적인 증거는 주후 37년에 태어나 주후 100년 경에 죽은 요세푸스란 유대인 역사가의 글입니다. 유대인 장군이었지만 로마에 투항해서 로마를 위해 일한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글에 이런 표현이 나옵니다. “이때 즈음에 예수가 있었다. 그를 사람이라고 부르기에는 그는 너무나 놀라운 일들을 행하였다. 하지만 그럴 수 있다면 그는 지혜로운 선생이었고, 많은 사람들이 그가 가르친 진리를 기쁨으로 받아들였다. 그는 많은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을 모두 그에게로 이끌었다. 그는 그리스도였고, 우리 가운데 있는 주요한 사람들의 제안을 따라 빌라도가 그에게 사형을 선고했을 때에도 그를 사랑했던 사람들은 그를 버리지 않았다. 왜냐면 제 삼일에 그는, 선지자들이 미리 예고한 대로, 다시 살아서 그들에게 나타났기 때문이다. 선지자들은 또한 그에 관한 일만 개의 다른 놀라운 것들도 예건하였다. 그리고 그에게서 이름을 딴 그리스도인들은 오늘날에도 멸절되지 않고 있다.”
무엇보다 1세기와 2세기에 살았던 기독교인들이 남긴 문헌에 보면 그들은 모두가 예수가 존재했었고,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으며,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서 많은 사람들에게 나타났다는 소식을 전하다가 끔찍한 박해를 당하거나 그들의 목숨을 지불한 사람들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 일들이 실제로 일어났다는 그들의 증언 때문에 초기 기독교인들은 모든 것을 잃고 말았습니다. 바로 이것 때문에 그들이 남긴 문헌은 매우 중요한 증거가 됩니다. 왜냐면 자신들이 죽어가면서도 놓지 않으려고 했던, 자신들이 죽어가면서도 자신의 생명과 바꾸지 않으려고 했던 것이기 때문에 더욱더 신빙성이 있는 증거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문헌은 주후 30년부터 발견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성경이 바로 그 책입니다. 누가복음 24장 34절, 로마서 1장 3절 4절, 로마서 4장 24,,25절, 로마서 10장 9,10절, 고린도전서 11장 23절에서 26절, 고린도전서 15장 3절에서 5절, 빌립보서 2장 6절에서 11절, 디모데전서 3장 16절, 디모데전서 6장 13절, 디모데후서 2장 8절, 베드로전서 3장 18절, 요한일서 4장 2절, 등에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에 대해 명백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현존하는 세상의 그 어느 책보다 더 오래된 문헌이고, 역사적으로, 고고학적으로 입증된 책입니다. 뿐만 아니라 사도 시대 이후의 역사가들이 쓴 문헌에도 예수의 역사성에 대한 증거들은 수도 없이 발견할 수 있습니다. 1세기 말엽에 로마교회의 감독이었던 클레멘트가 쓴 글, 안디옥의 감독이었던 이그나티우스는 사형집행을 받으러 로마로 압송되어가는 과정에 남긴 편지들, 사도들의 제자였고 아테네 교회의 감독이었던 쿠라두라투스가 쓴 글, 주후 130년경에 기록된 바나바의 편지, 2세기 아테네에서 살았던 라리스티데스, 주후 100년경에 태어나서 기독교 신앙 때문에 167년에 참수를 당한 저스틴 마터의 글, 사도들과 비슷한 시기에 살았던 헤게시푸스가 기록한 다섯 권의 회고록, 등이 있습니다. 이외에도 로마 황제들이 쓴 편지들에 보면 예수의 역사성에 대해 충분한 증거들을 또한 발견할 수 있습니다. 트라얀, 마르코비우스, 하드리안, 안토니우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유베날리스, 세네카, 히에로클레스 등 수많은 황제들이 남긴 글에도 예수의 역사성에 대해 분명한 증거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성경이 가장 믿을만한 책이라고 믿지만 성경 이외에도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증거들을 수없이 발견할 수 있습니다. 신약성경 외에 수많은 문헌들 속에서 예수님이 실제인물이며, 특별한 능력을 가졌으며, 그를 따랐던 사람들의 헌신과 순교, 예루살렘에서 로마 총독에 의해 죽임을 당한 일, 그 후에도 기독교는 계속 확장했다는 것,, 로마의 상류층까지 기독교 신앙은 파급되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심지어 최근 브리테니카 대백과 사전에도 예수 그리스도를 실존인물이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 모든 자료를 종합해볼 때 우리가 한 가지 알 수 있는 사실이 있습니다. 고대에 기독교에 대해서 적대적인 사람들조차도 예수의 역사성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예수의 역사성에 대해서 의심하기 시작한 것은 18세기 말에 처음으로 몇몇 학자들에 의해서 제기되었을 뿐이란 사실입니다. 영국의 유명한 신학자인 하워드 마샬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기독교의 창시자가 실제로 존재했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고서 기독교 교회의 발생, 복음서의 진술, 그리고 그것들을 배후에서 게쏙 이어져온 전통을 설명하기란 불가능하다.” 오늘날 예수의 역사성을 부인하거나 의심하는 사람은 학계로부터 거의 왕따를 당하는 수준이란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왜냐면, 증거는 결정적이기 때문입니다. 증거는 가히 압도적이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기독교 신앙에 대해서 공격적인 사람들조차 부인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가 고민해야 할 차례입니다. 그렇다면 나는 어떻게 반응해야 할까요? 둘 중에 하나일 것입니다. 그 예수를 사랑하든가 아니면 사랑하지 않던가 입니다. 그분의 말씀을 마음에 새기며 지키며 살아가든가, 아니면 방관하면서 내 생각과 내 마음대로 살아가던가 입니다. 이것은 오늘 우리가 결정해야 할 과제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베드로는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를 목격한 증인이라고 자신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자신의 이야기가 결코 날조된 이야기가 아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 주 에수 그리스도의 능력과 강림하심을 너희에게 알게 한 것이 교묘히 만든 이야기를 따른 것이 아니요 우리는 그의 크신 위엄을 친히 본 자라.”(16절) 베드로는 계속해서 자신이 목격한 예수님의 영광에 대해서 증언하고 있습니다. “지극히 큰 영광중에서 이러한 소리가 그에게 나기를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실 때에 그가 하나님 아버지께 존귀와 영광을 받으셨느니라. 이 소리는 우리가 그와 함께 거룩한 산에 있을 때에 하늘로부터 난 것을 들은 것이라.”(17,18절) 여러분, 정직하게 그리고 진지하게 이 말씀들을 보십시오. 여러분은 이 말씀이 지어낸 이야기로 들립니까? 여러분은 이 말씀이 베드로 자신이 꾸며낸 말씀으로 보입니까? 여러분 중에 혹시 이 본문을 보고서도 예수란 인물은 날조된 이야기에 불과하며, 신화적인 인물이라고 생각하실 수 있겠습니까? 실제로 존재하지 않았는데 존재한 것처럼 베드로가 지어내고 있다고 생각하실 수 있습니까? 여러분이 정직하게 들여다본다면 여러분 스스로가 알게 될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저는 이 본문을 보면서 베드로가 이 본문은 고의로 지어낸다고 도저히 상상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지어낸 이 이야기 때문에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못박혀 순교했다는 것은 더더욱 믿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베드로 자신이 증언하는 이야기가 사실이라면 베드로 자신이 자신의 증언 때문에 십자가에 거꾸로 못박히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을 수 있었다는 것이 믿어집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그러나 더욱 더 저를 놀라게 하는 것은 바로 그 다음 본문입니다. 베드로는 자신이 직접 목격한 그러한 경험보다 더 확실한 증거가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대단한 체험을 해야 믿음이 견고해진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것이 아닙니다. 베드로가 말하고자 하는 핵심은 무엇입니까? 이토록 대단한 체험을 했다고 할지라도 기록된 말씀을 묵상하면서 믿음이 생기는 것보다 더 강력하지는 못하다는 것입니다. 성경을 읽고 연구하고 묵상하다가 믿음이 생긴 사람은 신비한 체험과 환상과 기적을 경험한 사람보다 더욱 확실한 신앙인이 될 수 있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오늘 우리에게 가장 강력한 증거는 우리가 체험하는 주관적인 증거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우리에게 가장 강력한 증거가 바로 기록된 성경말씀이라는 것입니다. 이 성경책을 통해 우리는 역사에 실재하셨던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가장 압도적인 증거를 얻게 될 것이란 말씀입니다. 그 증거는 베드로 자신이 변화산에서 변화되신 그리스도를 친히 목격하는 것보다 더 강력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이 책을 읽고 묵상하면서 내 안에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증거가 새벽밤하늘에 빛나는 샛별처럼 떠오르기까지 기다려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이 성경책에 대해서 사사로이 접근하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겸손하고 진지하게 접근해야 합니다. 무엇보다 성령의 도우심을 겸손히 구하면서 이 책을 읽고 묵상해야 합니다. 그럴 때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부인할 수 없는 증거들이 샛별과 같이 떠올라 우리의 마음을 밝혀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믿음을 위해서 예수님을 우리 두 눈으로 보아야 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의 믿음을 위해서 오직 기록된 말씀으로 충분합니다. 우리의 육안으로 예수님을 보는 것보다 더 확실하게 우리의 믿음을 보장하는 것이 그의 말씀을 묵상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기독교 신앙은 철저히 역사적인 신앙입니다. 역사적 사실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만일 성경에 기록한 것 중에 어느 하나라도 날조된 것이 있거나, 역사적 사실에 근거하지 않거나, 역사성을 결여하고 있다는 증거가 있다면 저에게 말해주십시오. 저는 그렇다면 기독교 신앙 자체를 포기할 것입니다. 저의 확신은 성경이 역사성으로 충만한 책이며, 내가 믿고 신뢰하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로서 이 땅에 오셔서 나의 죄를 위해 실제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고, 나를 위해 실제로 부활하셨고 승천하셨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여러분에게, 그리고 이 세상에 묻고 싶은 것이 하나 있습니다. 우리는 이토록 강력한 증거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왜 믿고, 왜 안 믿으려고 할까요? 기독교의 증거들을 주의 깊게 살펴보게 된다면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믿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압도적인 증거를 알고도 믿지 않는 이유는 오직 이것밖에 없습니다. 증거를 알고도 믿지 않는다면 철저히 양심이 무너진 경우거나 진리를 부인하며 살기로 결정한 사람일 것입니다. 앞에서 말한 대로 사람들은 합리적이고 강력한 증거를 알고도 자신들의 필요에 맞지 않기 때문에, 자신들에게 당장 유익을 주지 않기 때문에, 자신들이 손해를 보는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다시 말해서 믿을 수 없어서가 아니라 믿으려고 하지 않기 때문에 믿지 않는 것입니다. 자신이 예수를 믿게 된다면 자신이 지금까지 살아오던 인생을 살 수 없을 것에 대해 두려워하기 때문에 믿지 않으려는 것입니다. 그러한 두려움을 감추기 위해 하는 말이 “믿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사실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믿고 싶지 않다.” 그러나 정직하게 객관적으로 진리를 찾는다면, 그리고 진지하게 증거를 탐구한다면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하는 증거는 가히 압도적이라는 사실을 알게 될 것입니다.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그 증거를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진리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은 강력한 증거를 보고도 자신의 완악함과 두려움을 감추기 위해 ‘믿을 수 없다’라고 변명할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믿고 싶지 않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독교의 증거는 어쩌면 믿지 않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이미 믿고 있는 우리들을 위한 것입니다. 변증은 세상을 위한 것이 아니라 교회를 위한 것입니다. 역사적 증거들은 오늘 세상에서 공격을 받는 우리들의 믿음을 견고하게 해주는 것입니다. 압도적인 증거들을 가지고 세상에서 사십시오. 그리고 압도적인 증거들을 가지고서 세상에 말하십시오. 그리고 세상으로 하여금 얼마나 자기들이 이기적이며, 진리를 사랑하지 않는지, 얼마나 진리를 싫어하는지 보여주십시오.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자신들의 적나라한 모습을 보여주십시오. 그렇게 살아가는 이들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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