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리카에서 이곳 저곳 다니다보면 흑인들이 종종 '거듭난 그리스도인'born-again Christian이란 표현을 쓰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거듭난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거듭난 그리스도인은 어떤 특징이 있을까요? 거듭난다는 표현이 요한복음 3장에 나오기 때문에 요한복음 3장의 니고데모와 예수님의 대화를 중심으로 거듭남의 의미에 대해 생각해보겠습니다.
밤중에 찾아온 니고데모
니고데모는 바리새인이요, 지도자요, 선생이었습니다. 그는 성경에 정통한 유대인이었을 뿐만 아니라 다른 유대인들에게 성경을 가르치는 선생이었고 존경을 받는 지도자였습니다. 그런 그가 밤중에 예수님을 찾아옵니다. 요한복음에서 '밤'을 비롯한 모든 시간(예를 들어 "사흘후에")표현은 나름대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전체를 이해하고 해석하는데 필요한 도구는 요한복음 1장에 있습니다. 요한복음 1:1-18을 그래서 프롤로그라고 부릅니다. 이 프롤로그에 보면 "빛이 어둠에 비취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요1:5)는 말씀이 있습니다. 빛이 비추이고 있지만 어둠이 빛을 인식하지 못하는 것은 거듭나지 못한 인생들의 상태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알지만 예수님을 바로 알지 못하고, 예수님에 대해 들었지만 아직 예수님과 아무런 관계도 없는 그런 인생입니다. 니고데모는 그런 인생으로 예수님을 찾아온 것입니다. 니고데모가 예수님을 찾아온 것은 나름대로 예수님을 안다고 자부했고 자신의 지식을 예수님께 드러내고 예수님께로부터 인정받기를 기대한 것이지만 사실 그는 빛을 제대로 인식하고 있지 못하고 있는 "밤"에 다니고 있었습니다.
밤에 다니는 신자들
어떤 이들은 교회를 춣석하고 교회에서 노래도 부르며 때로는 대표기도도 하고 직분을 맡아 봉사도 잘 해냅니다. 그러나 니고데모와 같이 밤에 다니는 '명목상 그리스도인' 그러니까 '거듭나지 못한 종교인'일 수 있습니다. 니고데모는 자신이 다른 어느 누구보다 예수님을 잘 안다고 하는 자부심이 있었고 그 자부심을 드러내고 싶었고 인정받고 싶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있는 것과 하나님을 실제로 아는 것은 전혀 별개의 것입니다.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다른 사람들에게 가르치는 것과 실제로 예수님을 아는 것은 전혀 다른 것입니다. 밤에 다니는 신자들의 특징은 첫째 남들보다 나름 지식을 갖고 있다는 자부심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내면의 두려움이 있습니다. 어둠의 특징이 두려움입니다. 사람들의 눈에 띄는 것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거듭나지 못한 명목상 그리스도인의 특징은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의 신앙을 노출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있다는 것입니다. 두려움의 이면에는 수치심이 있습니다. 이 둘은 서로 동전의 양면과 같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지식을 갖고 있으면서도 예수님을 믿는 것에 대한 수치심을 갖고 있는 것입니다.
"나는 당신을 잘 압니다."
니고데모는 예수님께 찾아온 이유를 이렇게 드러냅니다. "나는 압니다. 나는 당신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선생인 줄을 압니다. 당신이 행하는 표적은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증거임을 나는 압니다."(2절) 요한복음 전체에서 다루고 있는 주제는 '믿음'에 관한 것입니다. 요한복음이 말하는 믿음이라는 '안다' 혹은 '본다'는 동사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지금 니고데모는 예수님을 알고 있다고, 예수님을 믿고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아는 것은 믿는 것이고, 믿는 것은 보는 것입니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지식을 예수님께 드러내고 예수님께로부터 인정받고 싶은 마음이 있지만 그러나 니고데모는 밤에 속한 인생입니다. 거듭난 그리스도인이란 말은 그리스도에 관한 이런 저런 지식을 갖고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거듭난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를 바로 알고 있고 바로 보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에 관한 참된 지식을 소유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 그리고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아는 지식입니다.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
예수님의 대답은 이것입니다. "너는 나를 보고 있다고 하지만 너는 거듭나지 않았기 때문에 아직 나를 보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께서 사용하신 '하나님 나라'는 곧 예수님 자신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를 본다는 말은 곧 예수님 자신을 바로 알고 바로 믿고 예수님의 정체를 하나님이 보시는 것과 같이 바로 이해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처음 '거듭난다'는 표현을 사용하셨습니다. 거듭남의 의미를 살펴보기 전에 예수님은 거듭남과 예수님 자신에 대한 참되고 바른 이해를 갖는 것을 연결하여 설명하셨습니다. 거듭난 사람만이 예수님에 대한 바른 지식을 갖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거듭남에 대한 놀라운 말씀입니다. 남들에게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가르칠 수 있다고 해서 예수님에 대한 바른 지식을 갖고 있지 않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사람이 어떻게 거듭날 수 있습니까?
여기서 우리는 거듭남의 의미를 살펴보아야 하겠습니다. 니고데모가 이해한 '거듭남'은 '다시 태어남'의 의미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말씀하신 '거듭남'의 의미는 '다시 태어남'born again이 아니라 '위로부터 옴'born above였습니다. 성경원문에서 '거듭남'은 다시again의 의미도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 위로부터above란 의미도 있습니다. 그러나 니고데모는 다시again란 의미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여기서 거듭나지 못한 '명목상 그리스도인'의 특징을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이해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을 때나 들을 때에 하나님의 의도를 붙잡지 못하는 것입니다. 성경을 읽어도 하나님의 의도를 계속 놓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의도로 이 말씀을 하셨는지 놓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말씀을 잘 오해하고, 하나님을 잘 오해하는 것입니다.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예수님은 비로소 '거듭남'의 의미를 설명해주십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거듭난다'는 말은 '다시 태어난다'는 의미가 아니라 '물과 성령으로 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위로부터 나는 것born above이란 다름 아니라 '물과 성령으로 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기서 물과 성령은 서로 다른 것이 아닙니다. 히브리 사고방식은 한 가지를 '이미지와 실체'라는 두 가지 방식으로 설명하는 습관이 있습니다. 구약의 시가서를 읽어보면 히브리인들의 독특한 사고방식인 평행법이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물과 성령은 서로 다른 것이 아닙니다. 물은 성령의 사역에 대한 이미지이고, 성령은 그 실체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성령은 우리를 거듭나게 하시는 분으로서 성령의 거듭나게 하시는 사역을 '물'이라는 이미지로 표현하신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이것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가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따라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딛3:5)
성령의 역사가 아니면 거듭날 수 없다
성령이 역사하지 아니하시면 예수님에 대한, 기독교 교리에 관한 아무리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고, 심지어 남을 가르칠 수 있을지라도, 거듭날 수 없습니다. 거듭남의 역사는 전적으로 성령의 역사로 가능한 것입니다. 성령의 역사 중에 가장 중요한 사역이 인생을 정결케 하시고 눈에 덮은 비늘을 벗겨내시는 사역입니다. 거듭남이란 육신의 무제가 아니라 영의 문제입니다. 얼마나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느냐가 아닙니다. 기독교 교리에 관한 많은 지식을 가진 것이 거듭남의 증거가 아닙니다. 성령의 역사를 통과한 사람입니다. 거듭난 사람이란 위로부터 난 사람을 의미하고, 위로부터 난 사람이란 성령으로 난 사람이며, 성령의 역사를 통과한 사람을 의미합니다. 성령이 역사하지 않으시면 결코 거듭날 수 없습니다. 성령의 역사가 아니면 결코 예수님에 대한 바른 이해를 가질 수 없습니다. 단지 바른 이해를 갖는 것만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부연하셨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과의 바른 관계에 들어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오직 거듭난 사람만이 예수 그리스도와의 인격적인 관계에 들어가게 됩니다. 그것이 곧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니고데모는 여전히 무지함 속에 갇혀 있습니다. 비록 예수님이라 할지라도 거듭나지 못한 사람에게는 진리를 깨닫게 할 수 없습니다. 아무리 잘 설명해도 참된 진리에 대한 이해에 도달할 수 없습니다. 거듭나지 못한 '명목상 그리스도인'들은 아무리 노력해도 참된 진리에 도달하지 못합니다. 그들은 계속해서 '어떨게 이런 일이?'라고 계속 의문을 던질 뿐입니다. 의문속에 항상 갇혀 있는 것이 거듭나지 못한 인생의 특징입니다. 밤에 속한 인생은 곧 의문 투성이에 갇혀 있는 것을 의미합니다. 바울이 그러했습니다. 그는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서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는 비록 눈은 떴지만 앞을 볼 수 없었습니다. 그에겐 온통 의문 투성이였습니다. 성령께서 그의 눈을 만지시기 전까지 그의 마음에 온통 의문 투성이로 가득했습니다. 이처럼 거듭나지 못한 인생에는 수많은 설명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수많은 의문속에 갇혀 있습니다. 거듭난다는 것은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눈에 비늘 같은 것이 떨어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보아야 할 것을 바로 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보시는 대로 볼 줄 아는 눈이 열려지게 된 것을 의미합니다.
이스라엘의 선생으로서 어떻게?
예수님은 오히려 니고데모에게 반문하시기를 "네가 이스라엘의 선생으로서 성경을 연구하고 가르친다고 하면서 어떻게 이런 일을 이해하지 못할 수 있느냐?"라고 하셨습니다. 성경을 가르치는 사람으로서 자신도 제대로 알지 못하면서 남을 가르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구원에 대해 가르치면서 구원을 경험해보지 못한 선생이 많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 말씀을 가르치고 설교하면서 하나님 말씀의 백미를 경험하지 못하는 목사들이 많습니다. 내가 가르치는 것을 내가 경험하고 있는지 자문해보아야 합니다. 니고데모는 바리새인으로서 성경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고 자부하는 사람이었지만 정작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것에 대해서는 알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거듭남에 대해 처음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이미 오래 전에 구약에서 선지자들이 성령의 역사로 우리의 영이 새로워지고 우리의 영이 살아나는 중생의 역사에 대해 예고하여 왔었습니다. 예수님은 거듭남에 대한 이야기가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라 이미 오래전에 선지자들이 예고했던 것이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어떻게 거듭나는가?
그러면 어떻게 거듭날 수 있습니까?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그러하니라"(3:8) 성령이 바람같이 불어주어야 우리의 죽은 영이 살아나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영이 살아나야 하나님을 바로 보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미 오래 전부터 이 일을 계획하고 또 선지자들을 통해 알려주고 계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일을 행하실 때는 언제나 하늘의 어전회의를 열어서 계획하시고, 계획하신 일을 그 종 선지자들에게 보여주시고, 선지자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하실 일을 사람들에게 선포하게 하십니다. 거듭남 역시 하나님께서 오래 전부터 계획하신 일이고 선지자들에게 보여주시고 알려오신 일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소개하시기를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고 말씀하십니다. 그것은 수많은 선지자들이 하나님께서 어전회의에서 하실 일(구속역사)을 결정하시고 선지자들에게 보여주셨는데, 어느 누구도 하나님의 그 어전회의에 참여한 사람이 없었지만 오직 예수님은 그 어전회의에 참여해보았다고 선언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구약의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어전회의를 계시의 영을 통해 볼 수는 있었지만 직접 그 회의에 참여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거듭나게 하시는 성령의 역사를 결정하시는 하나님의 회의에 직접 참여하신 분이셨습니다. 하늘회의에 직접 참여하신 분으로서 자신이 하늘높이 들려야 하나님의 거듭나게 하시는 성령의 역사가 성취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높이 들린 인자를 바라보아야
죽은 영을 살리는 일, 눈에 덮였던 비늘을 씻어내는 일은 오직 성령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그 일을 하시기 위해 꼭 일워져야 할 일이 두 가지 있습니다. 첫째는 그 일을 친히 계획하고 그 종 선지자들에게 보여주신 분께서 하늘 높이 들려야 합니다. 둘째는 높이 들린 인자를 우리가 바라보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모세가 광야에서 놋뱀을 든 것을 예로 들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불평하고 원망하는 죄를 범함으로 이스라엘 백성은 불뱀에 물려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모세의 간절한 기도에 하나님은 놋으로 뱀을 만들어 장대에 매달아 누구든지 볼 수 있도록 높이 들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누구든지 높이 쳐든 놋뱀을 쳐다보는 자마다 살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모두가 죽어가고 있었는데 높이 들린 놋뱀을 쳐다보는 자마다 구원을 받고 다시 살아나게 되었습니다. 그 놋뱀은 오실 그리스도의 그림자였습니다. 이제 실체로 오신 그리스도께서, 하늘회의에서 죽어가는 인생을 위한 구원계획을 친히 세우신 분께서 친히 오셔서 누구든지 바라볼 수 있게 높이 들리셨습니다. 십자가에 높이 들린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자마다 죽음의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죽어가는데서 다시 살아날 수 있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바라볼 때 성령이 바람같이 역사하셔서 우리의 영이 구약의 선지자들이 예고한 대로 살아나게 되고 눈에 비늘이 씻겨지게 되고 하나님의 영광을 똑바로 바라보며 즐거워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거듭남의 역사입니다.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거듭남의 조건은 아주 간단합니다. 십자가에 높이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단지 바라보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를 바라보지 않으면 자신은 이미 심판을 받은 자임을 자각해야 합니다. 자신은 이미 죄와 죽음의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죽어가고 있고, 아니 이미 죽은 인생이요,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 아래 놓인 가련한 인생임을 먼저 자각해야 합니다. 그런 다음에 십자가에 높이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십자가의 그리스도를 주목해야 합니다. 잠잠히 높이 달리신 그리스도를 주목하는 어느 순간에 홀연히 성령께서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언제 어떻게 성령께서 역사하셔서 내 눈에 덮인 비늘을 씻겨주실지 아무도 예측할 수 없습니다. 어떤 이들은 이렇게 오해합니다. 하나님께서 불신자들을 심판하시는 이유는 그리스도를 믿지 않기 때문이라고..하나님이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하기 때문에 괘심해서 진노하시는 것이라고..결코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이 진노하시고 심판하시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높이 들리시기 전에 이미 모든 인류는 죽음의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죽어가고 있었고, 이미 심판을 받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것은 그리스도를 바라보지 않는 것이고, 그리스도를 바라보지 않음으로 스스로 죄와 죽음의 바이러스에 감염된 상태로 남아 있겠다고 선언하는 것입니다. 원래 죽어가고 있었는데 생명을 거부함으로써 죽음 가운데 머물러 있겠다고 선택한 것입니다.(요3:19)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거듭남의 비결이라고 큰 집회를 열고 사람들을 미혹하는 이단이 있습니다. 그들이 말하는 거듭남의 비결이란 거짓말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거듭남의 비결이란 이것입니다. 자신이 이미 심판을 받았고 자신이 이미 멸망했음을 깨닫고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바람과 같이 역사하실 때까지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를 주목하는 것입니다. 이것 외에 다른 특별한 방법으로 거듭날 수 있다고 하는 모든 말은 다 우리를 그리스도에게서 시선을 돌리게 만드는 거짓말입니다. "그를 믿는 자마다" 아주 간단하지만 사람들은 이 말의 참 의미를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독에 의해 죽어가는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 놋뱀을 장대에 매달아 높이 든 것을 생각해보십시오. 누구든지 그것을 쳐다보는 자마다 살았습니다. 독은 사라졌습니다. 새생명이 주어졌습니다.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마다"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높이 달리시기 이전에 우리 인생은 이미 죄와 죽음의 독에 감염되어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이미 진노 아래 있었고 심판을 받은 것입니다. 그것을 자각하고서 그런 인생을 대신하여 친히 '죄'가 되시어서 십자가에 높이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것' 그것이 거듭남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믿음입니다. 거듭나기 위해 무슨 성령집회에 참석해야 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십자가의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성령께서 바람과 같이 역사하실 때까지 십자가의 그리스도를 응시하는 것입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멸망치 않고...멸망하지 않게 해주겠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십자가에 높이 달리시기 전에 이미 멸망하게 된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믿지(바라보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이 화가 나서 멸망시키는 것이 결코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은혜와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께서 그 아들이 십자가에 높이 달리신 것을 바라보는 자마다 아무 조건없이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려는 영생이란 곧 하나님 자신의 생명입니다. 단지 영원히 사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생명을 나누어주시는 것을 말합니다. 사람의 영혼은 불사입니다. 문제는 어디서 어떻게 누구와 함께 사느냐입니다. 우리의 생명이신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서 영원히 사는 것--이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려는 영생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려는 구원이란 다름 아니라 하나님 자신을 우리에게 주시는 것이고, 하나님 안에서 영원히 기뻐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원한 즐거움에 참여하는 삶
십자가의 주님을 바라볼 때 어느 순간 갑자기 성령께서 임하시게 되고,
성령이 역사하실 때 우리 눈을 덮은 비늘이 씻겨내려가게 되고,
우리는 밝은 눈으로 그리스도의 영광을 바라보게 되고,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며 즐거워할 수 있게 됩니다.
그 즐거움은 일시적인 즐거움이 아니라 영원한 즐거움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려는 영생의 참 본질입니다.
오직 물과 성령으로 난 자만이 하나님의 즐거움에 영원히 참여할 수 있습니다.
남아프리카에서,
김광락 선교사 올림..
p.s.
니고데모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니고데모는 과연 거듭난 그리스도인이 되었을까요?
이에 대해 성경은 우리에게 한 가지 힌트를 주고 있습니다.
"일찍이 예수께 밤에 찾아왔던 니고데모도 몰약과 침향 섞은 거을 백 리트라쯤 가지고 온 지라. 이이 예수의 시체를 가져다가 유대인의 장례법대로 그 향품과 함께 세마포로 쌌더라."(요19:39,40)
예수님의 시신을 수습하여 세마포로 감싼 뒤에 무덤에 안장한 이는 두 사람이었습니다. 아리마대 사람 요셉과 밤중에 예수님을 찾아온 니고데모였습니다. 사람들의 시선을 피하여 밤중에 예수님을 찾아온 니고데모가 모든 사람의 이목이 집중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예수님의 시신을 무덤에 안장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특히 예수님께서 쿠테타의 명분으로 십자가에 처형당하신 직후이므로 니고데모가 보여준 행동은 그의 심경에 매우 중요한 변화를 일으켰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어쩌면 니고데모는 예수님이 말씀하신 대로 "인자는 높이 들려야 하리라"고 하셨는데 그 말씀대로 높이 들리신 인자를 믿음의 눈으로 가장 먼저 바라본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어쩌면 니고데모는 하나님 나라를 가장 먼저 바라보고, 하나님 나라에 가장 먼저 들어간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나를 대신하여 스스로 죄가 되신 분 예수 그리스도
그의 십자가를 부끄러워하지 않는 삶..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며,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며 살기를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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