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설교

변증설교(10)-예수는 부활하였는가? III

등불지기 2012. 2. 19. 20:08

 

예수는 부활하였는가(3)

 

본문: 고전15:1-11

 

수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심!! 이것이 단순히 꾸며낸 이야기가 아니라 실제로 일어난 사건이며 역사적 사건임을 알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저는 여러분이 이 사건이 인류 역사에 있어서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알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사실이 아니라면 기독교 전체는 날조와 허구로 가득 차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사실이라면 인류 역사에 실로 엄청난 일이 발생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사실이라면 내 삶 전체를 뒤바꾸어 놓을 수 있는 강력한 힘이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은 기독교 전체의 뿌리요 근간이며 토대가 되는 것입니다. 만약 여러분 중에 개인적으로나 인격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는 분이 있다면 이 사실이 역사적 사실인지 한번 조사해보기를 바랍니다. 직접 조사해보고 스스로 결론을 내리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사실인지 아닌지 조사해 보고나서 여러분이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영접할 것인지 결정해도 늦지 않습니다. 기독교가 진리의 종교라고 하는 것은 바로 이것 때문입니다. 조사해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증거 여부를 신중히 검토해보라고 도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계속해서 이 사건에 대해서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특히 오늘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해 4복음서에 기록된 내용이 조금씩 차이가 있는 것에 대해서 살펴보려고 합니다.

왜냐면 많은 사람들이 본문을 연구하다가 이 부분 때문에 부활의 역사성에 대해 의문을 던지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실제로 부활이 일어나지 않았지만 후대의 사람들이 지어낸 이야기, 신화라는 것입니다. 그 증거로 각각의 본문에서 나타난 부활에 대한 기사가 서로 다르게 기록되어 있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오히려 그 반대일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역사적 사실에 대해서 너무나도 중요하고 장엄하기 때문에 기록자가 자신들이 최선을 다하여 역사적으로 보고하는 과정에서 생긴 차이일 뿐입니다. 오히려 사복음서에 나타난 기록의 차이 때문에 오히려 역사적 부활에 대해 신뢰할 수 있게 됩니다. 나 같으면 부활의 사건에 대한 표현이 일방적인 것보다 다양한 것이 더욱더 역사성을 신뢰하는데 도움이 된다고 봅니다. 만약 부활의 사건이 날조된 이야기라면 사복음서에 부활에 대한 묘사가 서로 약간 차이가 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부활에 대한 기록들을 서로 비교할 때 약간씩 차이가 난다는 것이 역으로 이 사건이 역사적 사건임을 증명하는 강력한 증거라는 것입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4복음서를 종합해서 전후문맥을 살펴보는 것입니다. 부활 사건의 역사적 시나리오를 재구성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제일 먼저, 예수님은 자신이 신성을 주장한 혐의로 유대지도자들로부터 고소되었습니다. 그리고 역사상 가장 끔찍한 형벌인 로마의 십자가형을 받아 죽게 됩니다. 예수님의 처형은 모든 예루살렘 주민들에게 큰 뉴스였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이 죽으시는 장면을 목격했는데 성경을 보면 최소한 예수님의 죽으심을 목격한 여자는 3명이고 매장을 목격한 여자는 2명이라는 것을 마가복음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안식일이 지난 다음 날 동이 터오기 직전에 세여인 혹은 다섯 여인이 무덤을 향해 떠납니다. 때는 이른 아침이지만 주위는 어두웠습니다. 그 여인들이 떠난 이유는 예수님의 시신에 향유를 바르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들은 미리 안식일 전 금요일에 사서 준비를 해두었었습니다. 그들은 아리마대 요셉이 사용한 향유 외에 다른 향유를 사용하여 예수의 시신을 다시 싸기로 했습니다. 적어도 세 사람은 확실합니다. 막달라 마리아,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 세베대의 아내 살로메였습니다. 그들의 집은 예루살렘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마가복음 16장 1절을 보면 그들이 무덤에 도착할 즈음에는 이미 해가 동터오고 있었을 때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무덤에 도착하기 전에 부활사건은 이미 일어났었습니다. 부활은 해뜨기 전 새벽에 일어났습니다. 아마도 그들이 가고 있는 중에 천사들이 무덤을 막은 큰 돌을 굴렸을 것입니다. 그 순간 지키는 성전파수병들이 그 엄청난 광경에 그만 의식을 잃고 말았을 것입니다.(마28:2-4) 그러나 여자들은 성전파수병들이 지키고 있었는지도 몰랐고 지진이 일어났는지도 몰랐습니다. 여인들은 영문도 모르고 무덤으로 향하고 있었습니다. 여인들은 무덤을 막은 돌을 누가 옮겨줄 것인가 염려하면서 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도착해보니 군인들이 의식을 잃고 쓰러져 있었고 무덤을 막은 큰 바위는 옆으로 치워져 있었습니다. 그 광경에 여인들은 매우 놀랐습니다. 그러나 정신을 가다듬고 의식을 잃고 누워있는 군병들을 비켜서 무덤 안으로 들어가 보았습니다. 제일 먼저 본 것은 예수님의 시신이 없다는 사실이고 그 다음으로 연이어서 본 것은 남자의 모습을 한 천사의 모습이었습니다. 그 무덤 안에는 천사가 둘이 있었습니다. 그 중 여자들과 가장 가까이 있던 천사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무서워 말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를 찾는구나. 그러나 어찌하여 산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으려고 하느냐. 그는 여기 계시지 않고 그가 말씀하신 대로 살아나셨다. 여기 그를 두었던 곳이다. 와서 그의 누우셨던 자리를 한번 보라. 그리고 갈릴리에 계실 때에 너희에게 어떻게 말씀하셨는가 기억해보라. 말씀하시기를 인자가 죄인의 손에 넘기워 십자가에 못 박히고 제 삼일에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셨다. 그러므로 빨리 가서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다고 고하라. 그는 먼저 갈릴리로 가실 것이다. 그곳에서 그분을 만날 것이다. 보라. 내가 분명하게 너희에게 말했다.” 이 말을 들을 때 세 여자는 무서움과 동시에 깊은 경외감에 사로잡혀서 말문을 열지 못했습니다. 여자들은 공포에 사로잡히게 되었습니다. 겁에 질려서 천사들이 하는 말이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제자들에게 가는 동안 몇몇 사람을 만났을 터이지만 침묵할 수밖에 없었습니다.(막16:8) 그러나 그들이 돌아가는 길에서 점차 사건의 심각함에 대해서 인식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사건의 심각성을 점점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베드로와 요한에게 가서 사실을 말하게 됩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여인들과 함께 있었고 다른 9명의 제자들은 베다니나 혹은 베다니에 가까운 곳에 은신해 있었을 것입니다.

세 여자 중에 제일 젊은 여자가 막달라 마리아였습니다. 그는 여자들을 대표하여 베드로와 요한에게 말했습니다. “사람이 주를 무덤에서 가져다가 어디 두었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겠습니다.”(요20:2) 다른 여자들은 자기들 나름대로 이런 저런 말을 덧붙였을 것입니다. 이때만 해도 여자들은 천사의 부활선언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분명한 것은 그들이 천사를 보았다는 것과 시체가 거기 없었다는 것입니다. 여자들은 부활의 의미와 갈릴리로 가라는 말의 의미를 깨닫지 못했습니다. 이 말을 들은 베드로와 요한은 즉시 일어나 무덤으로 뛰기 시작했습니다. 여자들의 말에 놀라 진상을 확인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정말 예수님의 시신이 없어졌을까? 누가 시신을 가져갔단 말인가? 가서 확인해보자!’ 그들은 이렇게 결심했습니다. 그래서 두 제자는 있는 힘을 다해서 무덤으로 뛰었습니다. 요한이 제일 젊었기 때문에 가장 빨리 뛰었습니다. 그러나 먼저 도착한 요한은 무덤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안을 들여다보았습니다. 그러나 곧 이어 도착한 베드로는 그의 기질대로 용감하게 무덤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들이 본 것은 너무나도 신기한 광경이었습니다. 무덤에 굴이 굴려져 있었고 시신이 그 안에 없었다는 것과 시신을 감쌌던 수의가 그대로 남아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은 누가 시체를 훔쳐가지 않았다는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또 한 가지는 수의가 ‘감겨있는 채로’ 남아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수의를 누가 풀지 않았다는 증거이었습니다. 베드로가 요한을 불러 이것을 지적했을 때 요한은 바로 그것을 깨닫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의 부활하심에 대해 아직도 정확하게 제대로 깨닫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왜냐면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되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의아하게 생각하면서 베드로와 요한이 무덤을 나가서 길을 가는 동안 다른 길을 통해 막달라 마리아가 무덤으로 향해 오고 있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떠난 직후 그녀는 무덤에 도착했습니다. 그녀는 이제는 들어가지 않고 무덤 밖에서 흐느끼고 있었습니다. 무덤 밖에서 안을 들여다 볼 때 시신이 뉘였던 자리의 양쪽에 흰 옷을 입은 두 천사가 각각 앉아 있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때 마리아는 처음에 만났던 그 천사들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마리아는 처음에 천사가 전해준 말의 의미를 생각할 겨를이 없었을 것입니다. 부활의 약속을 묵상하기 보다는 예수님의 시신이 사라진 것에 대해서 걱정하는 것이 더 컸기 때문이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에 대한 걱정과 사랑 때문에 천사들 앞에서도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습니다. 천사들이 그녀에게 물었습니다. “여자여 어찌하여 우느냐?”그녀가 대답했습니다. “사람이 내 주를 가져다가 어디 두었는지 내가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 말을 하고 (아마도 집으로 향하기 위해) 뒤로 돌이키는 순간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았으나 그녀는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의 형상은 평소에 마리아가 본 그런 형상이 분명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전혀 새로운 형상의 예수님이었음이 분명합니다.(요20:14) 예수님이 그녀에게 물으십니다. “여자여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 이 말에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이 동산지기인 줄 알았다. 그리고 대답합니다. “주여 당신이 옮겨 갔거든 어디 두었는지 내게 이르소서 그리하면 개가 가져 가리이다.” 막달라 마리아는 아직도 예수님인줄 몰라보고 있습니다. 이때 예수님이 그녀를 평소에 부르시는 호칭으로 부르셨습니다. “마리아야!” 이 말에 마리아는 깜짝 놀라면서 “선생님!!”이라고 대답했습니다. 마리아의 대답은 거의 무의식적으로 튀어나온 말이었습니다. 그것은 평소에 부르던 말이었습니다. 몸에 배인 말이었던 것입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의 음성을 듣기 전까지는 그분이 예수님인 줄 알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의 용모는 확실히 변화되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을 듣자마자 마리아는 예수님의 발을 붙잡고 경배하려고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물러서시면서 부드럽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만지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못하였노라.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 이 말씀에 막달라 마리아는 기쁨에 겨워 흩어진 모든 제자들을 찾아다니면서 예수님이 살아나셨고 자신이 예수님을 직접 보았다고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마리아에게 주신 사명은 흩어진 제자들을 한 자리에 모으도록 하신 것이었습니다. 이 말을 들은 제자들은 저녁에 함께 모이자고 의견일치를 보았습니다. 그래서 십자가 사건 이후 3일 만에 흩어졌던 제자들, 숨어 은신하여 있던 제자들이 하나둘씩 예루살렘에 모여들기 시작했습니다. 불과 3일 만에 말입니다. 이후 예수님은 지상에서의 40일 사역을 시작하기 전에 천상에 잠간 올라가셨다가 다시 오셔서 천사를 만나 경외감과 두려움에 싸여 제자들에게 고하려고 가고 있던 다른 두 여인(알패오의 아내 마리아와 세베대의 아내 살로매)에게 나타나셔서 평강을 전하셨습니다. “평안하뇨?” 두 여자가 나아가서 예수님의 발을 붙잡고 경배했습니다. 이에 예수님이 그 여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무서워 말라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리로 가라 하라 거기서 나를 보리라.” 예수님은 그 제자들을 한 곳으로 모으기 위해 세 여자들에게 나타나셔서 갈릴리에서 모이도록 지시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 다음 베드로에게 먼저 나타나시고 그 다음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깊은 슬픔과 좌절에 빠져 있던 베드로는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고 흩어진 제자들을 다시 불러 모으는 일을 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를 만나십니다.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 중 한 사람은 글로바(즉, 알패오)였습니다.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는 처음에는 여인들처럼 주님을 알아보지 못했지만 말씀을 듣는 가운데 예수님이신 줄 알아보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길을 돌이켜 즉시로 예루살렘에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도착한 곳은 예루살렘의 마가 다락방이었는데 10사도와 다른 사람들이 있었는데 웅성거리면서 하는 말이 주님이 정말 살아나셨고 베드로에게 나타나셨다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그 두 사람도 가세하여 예수님을 길에서 만난 일을 이야기했습니다. 그러나 모인 제자들의 분위기는 들뜬 분위기라기보다는 회의하고 의심하는 분위기가 역력했습니다. 이 말을 할 때 예수님이 신비한 방법으로 나타나셔서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라고 하셨습니다. 문이 안에서 잠겨있는 방에 예수님은 갑자기 나타나신 것입니다. 제자들이 놀라고 무서워하면서 혹시 영을 보는 것처럼 생각했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어찌하여 두려워하며 어찌하여 마음에 의심이 일어나느냐 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 줄 알라 또 나를 만져 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아는 있느니라.” 그곳에서 주님은 자신을 만질 수 있도록 허락하셨습니다. 그리고 “여기 무슨 먹을 것이 있느냐?”하시자 제자들이 생선을 드리자 그것을 드셨다. 누가복음에서는 11명의 제자들이 모였다고 했는데 요한복음에 의하면 이 첫 번째 모임에는 도마가 빠졌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문제의 해결은 요한복음 본문이 열쇠를 쥐고 있습니다. “이 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에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 예수께서 또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이 말씀을 하시고 저희를 향하사 숨을 내쉬며 가라사대 성령을 받으라 너희가 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하시니라 열 두 제자 중에 하나인 디두모라 하는 도마는 예수 오셨을 때에 함께 있지 아니한지라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주를 보았노라 하니 도마가 가로되 내가 그 손의 못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하니라. 여드레를 지나서 제자들이 다시 집안에 있을 때에 도마도 함께 있고 문들이 닫혔는데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시고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도마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요20:19-28) 도마의 이 고백이 저와 여러분의 것이 되기를 바랍니다.

참조로 고전15:5을 보면 예수님이 사도들 중에 베드로에게 가장 먼저 나타나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 외 다른 두 여자는 이곳에서 갈릴리에서 만날 것이라고 하셨다고 말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정확하게 일주일 후 부활절 다음 일요일에 두 번째로 제자들의 무리에 나타나셨습니다.(요21:14) 이때는 도마가 함께 있었습니다. 어쩌면 의심하는 도마를 위해서 예수님께서 일부러 나타나신 것 같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그에게 자신을 만져보라고 하셨습니다. 도마는 결국 “나의 주 나의 하나님”으로 고백하게 됩니다. 그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나의 랍비여”라거나 “나의 스승이여”라고 고백하지 않은 것에 주목해야 합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하나님으로 고백하고 있습니다. 제자들은 이제 예수님이 말씀하신 대로 갈릴리로 여행을 합니다. 갈릴리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처음 만나주신 곳이고 제자로 부르신 곳입니다. 그곳에서 예수님은 세 번째로 그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갈릴리 바닷가에는 베드로, 도마, 나다나엘, 야고보, 그리고 요한 다섯 사람만 있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기다리는 동안 옛날의 실력을 발휘하여 고기를 잡아보겠다고 말했습니다. 자신이 옛날의 직업으로 다시 돌아가겠다는 뜻은 아니었습니다. 많은 목사님들이 이 부분을 해석할 때 베드로가 다시 세상으로 돌아가는 것으로 해석하는데 그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베드로는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면서 고기를 잡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베드로가 3년 전에 경험한 것과 똑 같은 일을 경험하게 됩니다. 3년 전에도 그러했듯이 이번에도 그들은 밤새도록 노력했지만 아무 고기도 잡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새벽이 되었을 때 예수님이 그들에게 나타나셔서 “얘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인줄 알아보지 못하고 “없나이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얻으리라”고 하셨습니다. 3년 전에 제자들은 깊은 데로 가라는 명령을 받았지만 이번에는 오른 편에 그물을 던지라는 명령을 듣게 됩니다. 무의식적으로 제자들은 그 말을 따르게 됩니다. 이때까지만 해도 제자들은 아직도 이렇게 말씀하시는 분이 예수님인 줄 모르고 있었습니다. 이윽고 그들은 엄청난 고기떼를 잡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때 요한이 예수님이신 줄 알아보고 “주님이시다!!”라고 외쳤습니다. 3년 전에 그들이 경험한 예수님을 다시 한 번 더 경험하게 된 것입니다. 요한의 이 말에 배드로는 바다로 뛰어내립니다. 그는 바다를 헤엄쳐서 예수님께로 갔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모인 가운데 베드로에게 사랑과 사명을 재확인하셨습니다. 그곳에서 예수님은 베드로의 최후 운명을 예고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시기 까지 40여 일 동안 제자들에게 여러 번 보이셨으며 하나님 나라의 일을 가르치셨습니다(행1:3) 갈릴리의 어느 산에서 (다볼산일 가능성이 크다고 봅니다) 500여 형제에게 동시에 보이셨습니다.(고전15:5절 참조) 거기서 예수님은 복음전파에 헌신할 것을 명령하셨습니다. 마태복음 28:20절의 말씀을 하신 것으로 보입니다. 마지막으로 예수님은 베다니에서 가까운(약 30분 거리소요) 감람산 꼭대기에서 승천하셨습니다. (슥14:4의 예언을 이루시기 위함일 것입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감람산에 모였는지는 정확히 알수 없으나 120여명이 아니었는가 추측해봅니다. 갈릴리 다볼산에서 예수님은 500여 형제들에게 일시에 보이셨고, 예루살렘 근처 감란산에서 120여명이 지켜보는 가운데서 승천하신 것으로 보입니다. 이 감람산에서 승천하시기 직전에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가 언제 이 땅에 임하는 지에 대해서 묻는 제자들에게 오직 성령이 임하면 권능을 받고 땅끝까지 나아가서 증인이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 다음 손을 들어 제자들을 축복하시면서 승천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승천하실 때 아마도 예수님이 부활하실 때 그 곁에 있었던 두 천사가 함께 하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예수님은 이 모습 이대로 다시 올 것이라고 분명히 약속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이 약속에 힘을 얻어 제자들은 기쁨으로 10일간 기도에 집중하기 위해 예루살렘 마가 다락방으로 다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말씀을 붙잡고 간절히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지 정확히 10일 후 오순절 때에 하늘로부터 예수님이 보내신 성령이 120명 위에 충만히 임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에 의해서 부활의 소식은 예루살렘에서부터 사마리아를 넘어 온 세상을 향하여 지금도 전파되고 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나타나신 사건을 요약하면 아래와 같습니다: 1.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여자들에게 나타나심(마28:8-10,요20:11-18,막16:9,10) 2.오후쯤 베드로에게(눅24:34,고전15:5) 3.저녁때쯤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들에게(눅24:13-32,막16:12) 4.저녁때쯤 예루살렘 마가 다락방에 도마를 제외한 제자들에게(눅24:36-43) (1에서 4까지는 예수님이 부활하신 그 날에 다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승천하신 때는 1과 2 사이였을 것입니다.) 5.다음 주 일요일 밤 도마들 포함한 제자들에게(막16:14,요20:26-29) 6.갈릴리 해변가에서 일곱 제자들에게(요21:1-24) 7.사도들과 500여 형제들과 주의 형제 야고보에게(고전15:6,7) 8.예루살렘 근처 감람산에서 승천을 지켜보았던 사람들에게, 이와 같이 예수님의 부활/승천에 대한 일대기를 종합하면서 재구성해보았습니다. 이것이 전체적인 사건의 흐름입니다. 만약 이것이 사건이 아니라 지어낸 이야기라면 사복음서에서 기록의 차이가 존재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예수님의 모든 행적을 분초별로 재구성할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이 행하신 행적을 연대기적으로 완전하게 복구할 수 없는 이유는 이것입니다. “예수의 행하신 일이 이 외에도 많으니 만일 낱낱이 기록된다면 이 세상이라도 이 기록된 책을 두기에 부족할 줄 아노라”(요21:25절) 그러나 연대기적으로 완전하지 못하다고 역사성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연대기는 각 복음서 저자의 독특한 증거의 기준과 관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4명의 복음서 저자들은 완벽한 연대기를 제시하는 것이 증거의 목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를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도록 자신의 증거기준에 의해서 역사적 사실들을 재구성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부활의 사건을 읽고 들을 때 헷갈리는 이유는 단 한 가지 때문입니다. 그들은 이 사건을 역사적으로 이해하려고 하지 않고 철학적으로 개념적으로 이해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사건은 증거를 토대로 사실 여부을 가리고 사건의 진위성을 가려야 합니다. 그럼에도 어떤 사람들은 이 사건을 역사적으로 보려는 마음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들은 오직 이 사건을 철학적으로 개념적으로 이해하려고 접근합니다. 바로 그것이 이 사건이 역사적 사실이며 역사적 사실로서 충분하고 강력하도 압도적인 증거들이 제시되고 드러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가지고 있는 철학적인 틀, 개념의 안경 때문에 이 사건을 사건으로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결국 역사상 가장 중요한 사건이었던 이 부활의 사건을 통해 살아계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2,000년 전에 실제로 일어났던 이 사건에 대해서 역사적으로 생각하기보다는 자꾸만 철학적으로 개념적인 틀에다가 집어넣으려고 하려고 하지 않습니까? 그것은 사실을 피해 도망가는 또 하나의 모습인 것입니다. 사실을 직면하기 두려워하는 또 하나의 모습입니다.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 그분은 지금도 살아계십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로 나아오는 모든 자들에게 당신의 영원한 생명을 값없이 나눠주시는 분이십니다. 오늘 이 시간 도마의 눈이 열려서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했던 것과 같은 고백이 여러분에게도 있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