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복에 관하여 III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보여주라
“그들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하심을 우리가 분명히 보았으므로...이제 너는 여호와께 복을 받은 자니라.”(창26:28,29) 아브라함이 죽었을 때 아브라함의 사명 즉, 복의 통로가 되어 하나님의 복을 모든 족속에게 전하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일은 이제 그의 아들 이삭에게로 옮겨지게 되었습니다. 이삭의 삶을 지켜보던 가나안 사람들은 마침내 하나님이 이삭과 함께 하심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삭을 계속 공격하면 자신들이 불리해질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에게 “너를 저주하는 자를 내가 저주하리라”고 약속하신 하나님의 말씀 그대로였습니다. 그래서 이삭과 평화협정을 맺자고 먼저 제안했습니다. 이것이 세상을 사는 그리스도인들이 보여주어야 할 모습입니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심을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조차도 인정할 수밖에 없도록 보여주어야 합니다. 우리가 가진 재물이나 소유에 의해서 세상을 놀라게 할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세상은 우리가 아무리 많은 것을 가졌다 할지라도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것을 보게 되면 우리가 아무리 가난하게 살고 아무리 적은 수라 할지라도 두려워하게 될 것입니다.
축복의 기회를 놓치지 말라
“...죽기 전에 여호와 앞에서 네게 축복하게 하라...”(창27:7)
축복은 단지 기도 그 이상입니다. 축복은 사명의 전수를 뜻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가나안 땅에 파송하신 하나님의 의지, 하나님의 소망을 물려받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삭은 나이 많아 죽기 전에 자신이 아버지 아브라함으로부터 물려받은 그 사명을 자신의 아들에게 물려주기를 원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삭의 두 아들 중에서 에서는 이 축복의 기회를 소흘히 여겼습니다. 에서는 이 축복이 담고 있는 어마어마한 영적 의미를 알지 못했습니다. 자신이 가진 장자의 명분을 팥죽 한 그릇에 팔아버리는 모습에서 이미 게임은 결정났습니다. 팥죽 한 그릇을 신나게 먹고 있는 순간 하나님의 촛대는 에서에서 이미 떠나 버렸습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장자의 명분은 나이와 혈통을 뛰어넘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복을 세상에 전달하여야 하는 사명의 지팡이를 물려받는 것이고, 단지 복을 받는 것을 넘어서서 복을 전달하는 통로로서 부름받는 것을 의미합니다. 에서는 이것을 소홀히 여겼습니다. 그리고 팥죽 한 그릇을 그 사명보다 더 사랑했습니다. 성경은 이러한 모습을 ‘망령된 행동’ 즉 정신 나간 것이라고 말합니다. 세상에서 살면서 망령된 삶을 살지 않도록 항상 깨어 있어야 하겠습니다.
축복은 받을 자에게 주어진다
“어머니가 그에게 이르되 내 아들아 너의 저주는 내게로 돌리리니 내 말만 따르고 가서 가져오라.”(창27:13) 이삭은 에서에게 그 사명을 물려주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어머니 리브가는 두 아들을 잉태할 때부터 하나님의 마음이 동생에게로 기울어져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에서의 삶과 야곱의 삶을 지켜보면서 하나님의 계획에 대해 더욱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야곱이 먼저 이삭의 축복을 받을 수 있도록 수를 쓰기로 마음먹은 것입니다. 많은 사람이 축복을 받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축복은 받을 자가 받습니다. 은혜는 모든 사람에게 열려 있지만 은혜는 받을 자가 받습니다. 야곱은 아버지의 저주가 두려워서 감히 아버지께로 나아가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어머니 리브가는 저주를 자청하면서까지 야곱을 축복의 자리로 내몰았습니다. 축복을 받기를 원한다면 축복을 받을만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기회는 한 번뿐이다
“이삭이 심히 크게 떨며 이르되 그러면 사냥한 고기를 내게 가져온 자가 누구냐 네가 오기 전에 내가 다 먹고 그를 위하여 축복하였은즉 그가 반드시 복을 받을 것이니라.”(창27:33)
뒤늦게 도착한 에서는 그제야 상황을 깨닫고 울면서 아버지 이삭에게 매달리며 축복해 달라고 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이삭은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만일 축복이 사람의 의지와 정성과 노력으로 전달되는 것이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하지만 복은 하나님으로부터 흘러나오는 것이기 때문에 사람의 노력과 의지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복을 내리시는 기회는 단 한 번뿐임을 알아야 합니다.
미움의 대상이 되다
“그의 아버지가 야곱에게 축복한 그 축복으로 말미암아 에서가 야곱을 미워하여...”(창27:41)
그리스도인이 미움과 오해와 핍박을 받는 것은 하나님을 전혀 모르는 사람에게서가 아니라 하나님을 잘 안다고 하는 사람에게서 받는 것입니다. 우리를 비난하고 오해하고 공격하는 사람은 교회 밖에 있지 않고 교회 안에 있습니다. 한 때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하고 섬긴다고 했던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형제를 미워하고 핍박합니다. 축복의 통로로 부름받은 사람은 이와같은 핍박과 오해를 감수해야 합니다. 그런 일을 당할 때 이상하게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오히려 긍휼히 여기고 축복해야 합니다.
받은 복이 크면 받을 시련도 크다
“내가 이와 같이 낮ㅇ는 더위와 밤에는 추위를 무릅쓰고 눈 붙일 겨를도 없이 지냈나이다.”(창31:40)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복을 달라고 기도합니다. 그러나 복을 받은 이후에 어떻게 될지는 생각하지 못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나님께 복을 달라고 해서 복을 받으면 그 복을 흘려보내기 위해 적합한 그릇으로 되기 위하여 불같은 시련을 통과해야 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야곱은 아버지 이삭에게 축복을 받았지만 형을 피하여 20년동안 외삼촌의 집에서 살면서 온갖 고생을 다 하고 온갖 사기와 시험을 다 겪으면서 견뎌야 했습니다. 집안에서 곱게 자랐던 야곱에게 그러한 시련을 통과하면서 그의 마음 그릇이 변화되기 시작했습니다. 큰 은혜를 구합니까? 그렇다면 큰 시련을 각오해야 합니다. 그러나 너무 두려워할 필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인생에게 복과 은혜를 주시고자 하실 때 비록 그의 삶에 고난과 시련이 넘칠지라도 그의 마음에는 염려와 번민이 찾아오지 않도록 지켜주실 것입니다. 삶은 고난으로 넘실거리겠지만 그런 가운데서도 마음은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으로 가득찰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복은 임마누엘의 복이기 때문입니다. 복을 구하는 사람들이 오해하는 것은 복을 받으면 삶에 문제가 사라지고 고난도 찾아오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삶은 내 생각과 기대와 정반대로 흘러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가운데서도 내 마음은 이상하게도 평안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함께 하심은 내 마음의 자리에 머무는 것입니다.
벧엘로 올라가라
“...네 형 에서의 낯을 피하여 도망하던 때에 네게 나타났던 하나님께 거기서 제단을 쌓으라...”(창35:1)
하나님의 은혜로 다시 가나안 땅으로 돌아온 야곱은 그러나 아브라함이 살았던 땅으로 가지 아니하고 숙곳이란 평지에 정착하고 살았습니다. 왜냐면 숙곳이란 땅은 가나안 사람들과 장사하기 좋은 평지였고,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살았던 땅은 장사하기에 적합하지 않은 산지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십여 년 숙곳에서 살면서 야곱의 삶은 점점 물질적으로 풍요로워지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야곱의 딸이 가나안 추장의 아들에게 성적인 능욕을 당하는 일도 생기고, 야곱의 아들들이 하나님을 가까이 하기보다는 우상을 섬기고, 세겜 사람들을 칼로 학살하는 등 많은 문제점들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의 복을 세상에 전달하기 위해서는 하나님께 가까이 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데 야곱은 장사하기 쉬운 지역을 선택함으로써 야곱의 가정에는 크고 작은 문제들이 생긴 것입니다. 비록 축복의 통로로 부름받아 세상을 살아가고 있지만 하나님의 부르심의 목적보다는 세상에서 돈을 버는 것을 더 가까이 하게 된 야곱이 겪는 또 다른 고통을 보면서 우리는 생각해야 합니다. 비록 몸은 세상에 있을지라도 우리 마음은 우리를 은혜로 부르신 하나님을 가까이 해야 합니다. 우리 중심을 잃지 않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할까요?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하신 말씀처럼 우리가 가장 힘들고 어려울 때를 항상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인생을 살면서 가장 힘들 때 하나님의 은혜가 어떠했는지 잊지 않는 것입니다. 가장 어려울 때 경험한 하나님을 기억하는 것, 그것이 오늘 우리가 벧엘로 올라가는 첫 걸음입니다.
복이 되기 위해 버려야 할 것
“...야곱이 그것들을 세겜 근처 상수리나무 아래에 묻고..”(창35:4)
삶에 큰 고통을 겪고 나서야 비로소 야곱은 정신을 차리고 숙곳을 떠나 벧엘로 올라갈 것을 결심하게 됩니다. 숙곳을 떠나 벧엘로 올라가는 것은 돈을 버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삶의 목적이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편안한 삶보다는 사명을 감당하는 삶을 살기로 결심한 것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결심을 실천에 옮기기 위해 야곱은 한 가지 일을 해야만 했습니다. 자신의 아들들과 종들이 섬기며 지니고 있던 온갖 우상들을 다 거두어서 땅에 묻어야 했습니다. 무거운 짐을 지고서 벧엘로 올라갈 수 없었습니다. 회개란 단지 고백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회개란 그 동안 추구해왔던 재물을 포기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 그 동안 쌓아두었던 어떤 가치를 땅에 묻는 것일 수 있습니다. 복이 되기 위해서 우리는 버려야 하고 땅에 묻어야 할 것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한 것들을 땅에 묻기 전에는 벧엘, 즉 하나님의 집으로 올라갈 수 없습니다. 그 모든 우상들이 우리의 발걸음을 무겁게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복이 되기 위해서 우리는 먼저 버려야 합니다. 그리고 위로 올라가야 합니다.
다른 누군가에게 복이 되는 삶
“그의 주인이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심을 보며 또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하게 하심을 보았더라.”(창29:3) 야곱으로 인해 외삼촌 라반이 복을 받았고, 노예로 팔려온 요셉 때문에 그를 노예상인에게서 산 보디발은 복을 받았습니다. 요셉은 형들에게 버림받은 상처를 안고 살아가고 있었고, 돈으로 팔려간 노예신분이었지만 요셉은 축복의 통로였습니다. 우리가 축복의 통로가 된다는 것은 우리의 신분이 달라지고 우리의 삶의 질이 변화되고 고난이 끝나고 편안한 삶을 보장받는 것이 아닙니다. 축복의 통로가 된다는 것은 버림받고, 상처받고, 원치 않는 고난의 나락에 떨어지는 것을 의미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런 가운데서도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것을 체험하는 것입니다. 그런 삶속에서도 하나님의 사랑과 임재를 느끼고 하나님의 손길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놀라운 일입니다. 축복의 통로가 된 사람의 삶은 신기한 것입니다. 세상이 우습게 여기고 비웃고 손가락질을 할만 한데 그 삶을 들여다보면 하나님의 영광으로 가득 차 있고 하나님의 빛으로 빛나고 있습니다. 더 신기한 것은 그의 삶은 비참한데 그를 통해 주변의 사람들이 잘 된다는 것입니다. 나 때문에 다른 누군가가 잘 됩니까? 하나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복을 주시되 다른 사람에게 복을 흘려보내는 복의 통로가 되게 하기를 원하십니다.
내 생각대로 잘 되는 것과 혼동하지 말라
“...이는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심이라. 여호와께서 그를 범사에 형통하게 하셨더라.”(창29:23) 복된 삶이란 내 생각대로 잘 풀려나가는 삶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내 계획대로 잘 되기를 위하여 우리는 기도합니다. 그러나 내 계획이 실패하는 것이 하나님의 응답일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내 계획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이고, 내 생각이 아니라 하나님의 생각입니다. 복을 받는 삶, 그리고 복을 흘려보내는 삶, 다른 누군가에게 복이 되는 삶이란 내 생각대로 술술 잘 진행되는 것이 아닙니다. 나를 복의 통로로 부르신 하나님의 생각대로 술술 잘 풀려나가는 삶입니다. 만일 내 생각대로 잘 풀려나간다면 그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생각과 일치하기 때문이고, 내 생각대로 잘 풀려나가지 않는다면 그것 역시 하나님의 생각대로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알면 모든 상황 가운데서 항상 감사할 수 있습니다. 심지어 내 생각대로 잘 되지 않더라도 하나님께 영광과 감사를 돌려드릴 수 있습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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