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묵상

축복에 관하여 IV

등불지기 2013. 8. 13. 23:04

 

 

축복에 관하여 IV

 

높은 자 앞에 설 때 위축당하지 말라

 

“..야곱이 바로에게 축복하매 바로가 야곱에게 묻되 네 나이가 얼마냐”(47:7,8)

이집트왕 바로는 당대 가장 높은 군주였습니다. 높은 보좌에 앉아있는 바로를 처음 만난 야곱은 바로를 축복합니다. 축복은 영적 권위자의 증표와 같습니다. 바로가 더 높은 자리에 앉아 있지만 영적 권위로 말하면 야곱이 바로보다 훨씬 더 높은 자리에 서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축복을 연습해야 합니다. 누가 높고 낮고를 비교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하나님께 받은 복을 흘려보내기 위해서입니다. 흘려보내야 살 수 있습니다. 흘려보내야 새로워질 수 있습니다. 고여있으면 썩기 시작하고 냄새가 진동합니다. 우리는 높은 사람을 만나도 흘려보낼줄 알아야 합니다. 높은 지위의 사람 앞에 섰을 때에도 당당하게 행동해야 합니다. 우리가 가진 것이 적기 때문에 위축당할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 때문에 당당해야 합니다. 누구를 만나든, 바로 앞에 설지라도 축복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를 세상에 보내신 하나님의 의도입니다.

 

외모로 판단하지 말라

 

“...그들을 데리고 내 앞으로 나아오라 내가 그들에게 축복하리라.”(48:9)

야곱은 요셉의 두 아들을 축복하기 원했습니다. 그런데 야곱은 축복할 때 요셉의 장자인 므낫세에게 오른손을 얹지 않았습니다. 야곱은 자신의 오른손을 동생인 에브라임에게 얹었습니다. 요셉은 아버지의 오른손이 므낫세에게 얹혀지기를 바랬습니다. 그러나 야곱은 그렇기 하기를 거절했습니다. 왜냐면 자신이 경험한 하나님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은 혈통이나 외모를 따져서 보을 주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오직 믿음을 보고 복을 주기를 원하십니다. 야곱 자신이 그렇게 복을 받았듯이 하나님의 마음을 따라 오른손을 동생 에브라임에게 엊은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다른 사람을 축복할 때는 믿음으로 해야 합니다. 외모나 조건이나 혈통이나 행위를 따라 축복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믿음으로 복을 받듯이 축복도 믿음으로 하는 것입니다.

 

분량대로 복을 받는다

 

“...곧 그들 각 사람의 분량대로 축복하였더라.”(49:28)

야곱이 죽기 직전 12아들들에게 일일이 축복하였습니다. 그러나 야곱의 축복은 결국 야곱의 마음대로 도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야곱의 축복은 일종의 예언과도 같은 것이었습니다. (사실 축복과 예언은 서로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야곱의 축복은 그 아들들이 갖고 있던 믿음의 분량대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복을 받기 원합니까? 그러면 복을 받기 합당한 그릇이 되어야 합니다. 큰 복을 받기 원합니까? 그러면 큰 그릇이 되어야 합니다. 큰 그릇이 되려면 큰 시련을 통과해야 합니다. 큰 연단을 견디어 내어야 합니다. 그래서 더 정결해져야 합니다. 나의 분량대로 우리는 축복을 받을 수 있습니다.

 

정직한 자의 축복

 

성읍은 정직한 자의 축원을 인하여 진흥하고 악한 자의 입으로 말미암아 무너지느니라.”(11:11)

우리는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할까요? 우리의 축복이 현실이 되기 위해서 무엇보다 우리가 정직한 자가 되어야 합니다. 모든 축복이 다 효과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정직한 자의 혀가 권세가 있고 능력이 있습니다. 우리의 가정이나 사업이나 사역이 진흥하기 위해서 정직한 자들이 우선 많아져야 합니다. 여기서 정직한 자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하나님 보시는 대로 볼 줄 아는 사람, 하나님의 말씀을 가감하지 않고 말할 줄 아는 사람이 곧 정직한 사람입니다. 반면 하나님의 말씀과 다르게 말하는 사람, 자신의 감정을 따라 혹은 사람들의 생각을 따라 말하는 사람은 '거짓말하는 사람'입니다. 가정이나 사업이나 교회나 나라가 잘 되는 길은 정직한 자의 혀에 달려 있습니다. 반대로 가정이나 사업이나 나라가 망하는 것도 사람의 혀에 달려 있습니다. 축복의 말이 아니라 저주의 말 때문에 무너집니다. 격려의 말이 아니라 비난의 말 때문에 무너집니다. 우리가 친구를 사귈 때 주의해야 할 것이 이것입니다. 다른 사람에 대해 쉽게 비난의 말, 험담의 말을 하는 사람을 주의해야 합니다. 그 친구 때문에 내 사업이 내 가정이 내가 소중하게 여기는 공동체가 파괴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저주를 자청하는 삶을 보면 두려워하라

 

가난한 자를 조롱하는 자는 그를 지으신 주를 멸시하는 자요 사람의 재앙을 기뻐하는 자는 형벌을 면하지 못할 자니라.”(17:5)

네 원수가 넘어질 때에 즐거워하지 말며 그가 엎드러질 때에 마음에 기뻐하지 말라.”(24:17)

얼마전 한국의 모 교단에서 십일조를 내지 않는 교인은 교인의 자격을 박탈하기로 결의했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참으로 속상하고 안타깝기 그지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로 구원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복된 진리를 스스로 부인하는 것입니다. 교회가 다른 복음을 받아들이면 스스로 저주를 초청하는 것입니다(갈1:8,9참조). 교회는 가난한 자들이 환영받아야 하고 가난한 자들이 편한 마음으로 와야 정상입니다. 만약 가난한 자를 부끄럽게 하거나 가난한 자를 무시한다면 교회는 스스로 교회됨을 포기한 것입니다. 가난한 자들이 예배드리러 교회에 들어올 때 불편함과 부끄러움을 느낀다면 그런 교회는 아무리 크고 화려한 예배당을 가지고 있다 할지라도 지구상에서 하루빨리 사라져야 합니다. 가난한 자들이 없는 교회가 있습니까? 우리 교회에는 가난한 교인이 없다고 한다면 그것은 자랑이 아니라 자멸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저주를 자청하는 교회의 모습을 보면 예루살렘을 바라보시며 눈물을 흘리시던 주님이 생각합니다. 저주를 자청하는 또 다른 모습은 다른 사람, 이웃 나라의 재앙을 기뻐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일본을 싫어하고 미워도 쓰나미와 방사능 문제로 고통을 당하는 모습을 볼 때 기뻐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이웃이 고통을 당할 때는 입을 다물어야 할 때입니다. 우리는 복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은 저주를 자청하는 삶을 보면서 두려워하는 모습을 포함하는 것입니다.

 

복을 끌어당기는 삶

 

선한 눈을 가진 자는 복을 받으리니 이는 양식을 가난한 자에게 줌이니라.”(22:9)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여호와께 꾸어 드리는 것이니 그의 선행을 갚아주시리라.”(19:17)

복은 우리가 추구할 대상이 아닙니다. 우리가 추구해야 할 대상은 오직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뿐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하나님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복을 추구하는 것을 우리는 기복주의라고 부릅니다. 기복주의로 가장한 기독교는 참 기독교가 아닙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이용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복을 달라고 기도해서는 안 된다는 그런 말이 아닙니다. 우리는 얼마든지 하나님께 복을 달라고 기도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복을 구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구할 때는 그 의미가 무엇인지 정확히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 복을 구하는 기도는 자신의 변화를 구하는 기도입니다. 하나님께서 복을 내려주시는 분이지만 우리는 복을 받기 합당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철이 자성을 띄기 시작하면 다른 철을 끌어당기듯 우리가 복을 받기 합당한 사람이 되면 복은 저절로 따라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달라고 기도하는 것은 복을 받기 합당한 사람이 되도록 은혜를 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사람이 되기 위해 합당하게 연단하고 빚어주실 것을 구하는 기도입니다. 그러면 복을 받기 합당한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요? 은혜를 아는 사람, 은혜를 베풀 줄 아는 사람입니다.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길 줄 아는 사람, 가난한 자에게 실제적인 도움을 줄 줄 아는 사람입니다. 선한 눈, 긍휼의 눈을 가진 사람에게는 복이 따라다닐 것입니다. 우리의 눈이 미움, 경쟁, 시기, 질투, 인색함으로 가득 차 있으면 복이 우리를 알아보고 멀리 도망갈 것입니다. 복을 받고 안 받고는 말씀의 거울에 비치는 우리의 눈에 달려 있습니다.

 

모든 것이 적당해야 한다

 

이른 아침에 큰 소리로 자기 이웃을 축복하면 도리어 저주 같이 여기게 되리라.”(27:14)

우리가 축복할 때에는 때와 시기가 맞아야 함을 기억해야 합니다. 복은 우리가 생각하고 계획하고 원하는 시점에 다가오지 않습니다. 이른 비와 늦은 비가 있듯이 하나님의 복은 언제나 하나님의 때에 우리에게 임합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때에 복을 받을 수 없습니다. 왜냐면 복은 하나님이 내리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축복할 때에는 항상 이 를 살펴야 합니다. 이 때가 적절하지 못하면 아무리 좋은 의도로 축복했다 할지라도 그것은 축복이 되기는커녕 오히려 그 반대 효과가 날 수도 있습니다.

 

(계속)

 

 

 

 

P.S. 그리스도를 아는 빛이 어둔 바닷길에 등대처럼 여러분 모두를 안내하는 은혜가 있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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