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어릴 적 꿈이 많았던 아이였습니다. 몽상에 빠져 있기를 좋아했고 상상의 날개를 펼쳐 비상하기를 즐기는 꿈쟁이였습니다. 어떻게 하면 빛의 힘으로 우주를 자유로이 여행하는 우주선을 만들 수 있을까 혹은 중력을 극복하고 자유자재로 하늘을 나르는 비행체를 만들까 궁리하기도 하고 또 사람처럼 걸어다니는 로봇을 만들 수 있을까 나름 설계도를 그리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나름 천체와 물리에 대해 책을 보기도 했습니다. 그러던 중 14살 때에 예수님을 나의 인격적인 구세주로 영접하게 되었는데 그때도 저는 여전히 꿈을 꾸고 있었습니다. 그때는 우주선이 아니라 성경을 들고 전세계를 다니며 복음을 전하는 그런 모습을 상상하며 어린 시절을 보내었습니다. 그런데 점점 자라면서 꿈은 사라지고 현실에 얽매이기 시작하였습니다. 나이가 들수록 꿈을 꾸는 것이 점점 어려워진다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하였습니다. 젊을 때는 꿈과 비전과 희망을 노래했는데 나이가 들수록 현실에 당면한 여러 문제들과 씨름하느라 분주해지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나 우여곡절 끝에 아프리카에서 사는 지금 저는 다시 꿈을 꾸고 있습니다. 그리고 만나는 사람마다 제 꿈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추억이 아니라 꿈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하루하루가 설레임의 연속입니다.
혈기왕성한 청년들에게 꿈을 꾸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지만 나이가 들수록 꿈을 꾸라고 하는 것이 얼마나 큰 일인지 모릅니다. 나이가 들면 자녀문제, 집문제, 직장문제, 그리고 노후문제 등 현실적인 문제로 고민하기 쉬운데 그런 사람들에게 꿈을 가지라고 하면 반응이 거의 없이 눈만 꿈벅거리기만 합니다. "이제 인생 마감할 때가 멀지 않았는데 웬 비전을..."이라고 말할 것입니다. 나이가 들게 되면 앞을 바라보고 꿈을 노래하기 보다 뒤를 돌아보고 추억을 노래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 하나님은 꿈을 꾸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의 성령께서는 하나님이 행하실 일들에 대해 지식을 갖게 하고 하나님이 하실 일에 대해 자신의 인생을 드려 의미있는 삶을 사는 그런 꿈을 갖게 하십니다. 그래서 꿈이 있다는 것은 내가 하나님 안에 살아있다는 뜻이고 성령과 함께 동행하며 동역하고 있다는 그런 뜻입니다. 그래서 저는 감히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그런 꿈이 있습니까? 성령 안에서 감히 꿈을 꾸어보십시오!
물론 꿈에는 내가 스스로 꾸는 것도 있고 하나님이 주시는 꿈도 있을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나이가 들면서 현실적이 됩니다. 현실적이 된다는 말은 꿈을 꾸어도 그것이 현실화되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는 사실을 알고 적당히 현실과 타협하거나 현실에 안주해버린다는 뜻이고 또 몇 번에 걸친 좌절을 통해 자신의 꿈이 이루어지지 않을 것에 대한 두려움이 강화되었고 그 두려움이 현실 속에서 크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꿈을 꾸는 것을 두려워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꿈을 꾸는 것을 포기해버립니다. 꿈이 없는 인생으로 살아가는게 무슨 큰 문제가 있냐고 할지 모릅니다. 사실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꿈이 없는 그런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들 중에 하나가 되는 것은 큰 문제는 없습니다. 그러나 꿈이 없는 인생이 과연 하나님이 원하는 인생일까요?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시고 충만하고 정복하고 다스리라고 말씀하시며 복을 주실 때는 꿈을 꾸며 사는 삶을 원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26:39)
"사람의 마음에는 많은 계획이 있어도 오직 여호와의 뜻만이 완전히 서리라."(잠19:21)
사람은 많은 꿈, 기대, 희망을 품습니다. 그러나 오직 하나님의 뜻만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꿈에 관하여 우리가 가질 태도가 이것입니다. 꿈을 꾸는 것은 내 자유이지만 그 꿈을 이루는 것은 하나님이십니다. 이 진리를 잘 알면 우리는 훨씬 자유롭게 꿈을 꾸며 살 수 있습니다. 이 진리를 제대로 알지 못하면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해서도 오해하게 됩니다.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꿈이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리고 그 꿈을 이루기 위해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며 매달립니다. 그리고 그 꿈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하나님께 섭섭한 마음을 갖게 됩니다. 몇번 그런 일이 일어나면 하나님 앞에서 꿈을 꾸는 것 자체를 포기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렇게 생각해야 합니다. 오직 하나님의 뜻만이 이루어져야 한다고..하나님의 뜻이 아니면 이루어지지 말게 해달라고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내 안에서 나온 꿈이라면 이루어지지 않아야 하고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 내게 유익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루어지지 않으면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이루어진다면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므로 하나님께 감사드릴 수 있습니다.
"또 여호와를 기뻐하라..."(시37:4)
사람들이 꿈을 꿀 때 그 꿈이 꼭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희망합니다. 그리고 그 꿈을 이루어달라고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기 시작합니다. 문제는 여기 있습니다. 하나님보다 내 꿈이 더 큰 것입니다. 하나님은 단지 내 꿈을 이루는 수단에 불과할 뿐입니다. 그것이 과연 하나님의 뜻인지 아닌지 아는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뜻이 더 중요한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꿈을 꾸기 시작하면 결국 자신을 함정으로 끌고가게 됩니다. 우리가 꿈을 꿀 때 점검하고 확인해야 하는 것은 이것입니다. 내 꿈보다 하나님이 더 커야 합니다. 내 뜻보다 하나님의 뜻이 더 중요해야 합니다. 내 뜻대로 되지 말아야 하고 하나님의 뜻만이 바로 서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내 뜻이 이루어지 않고 내 꿈이 좌절되어도 오히려 우리는 기뻐하며 감사할 수 있습니다. 결국 내 꿈이 좌절될지라도 그것이 더 이상 또 다른 꿈을 꾸는 것을 가로막는 장애물이 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안에서 계속 선한 꿈을 꾸면서 앞으로 전진하며 나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청컨데 나의 꾼 꿈을 들으시오"
요셉이 그 형들에게 한 말입니다. 요셉이 꾼 꿈은 분명 하나님이 주신 꿈입니다. 그 형들에게 자랑한 그 꿈이 요셉 스스로 만든 꿈이 아니란 사실을 누구나 알 수 있습니다. 첫째, 요셉이 꾼 꿈은 선명하였습니다. 요셉이 구체적으로 묘사하는 것을 보면 그가 꾼 꿈이 얼마나 선명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런 선명한 꿈을 연속적으로 꾸었습니다. 반면 사람이 자기 욕심을 따라 꾸는 꿈은 그렇게 선명하지 못합니다. 마치 비유하자면 하나님이 주시는 꿈은 칼라 영상에, 인간이 꾸는 꿈은 흑백 영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인간이 자기 욕심으로 만들어내는 꿈은 추상적이고 모호하며 흐릿합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고난과 시련이 찾아오면 금방 잊어버리고 만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주신 꿈은 혹독한 시련이 찾아올수록 더욱 더 또렷해지고 선명해진다는 것입니다. 요셉은 하나님이 주신 꿈을 그의 평생에 그가 아무리 힘든 시련을 겪는 순간에도 결코 잊지 않았습니다. 둘째, 요셉이 꾼 꿈은 요셉으로 하여금 큰 고난으로 이끌었습니다. 당장 그 형들에게 미움을 받고 죽임을 당할뻔 했고 버림을 받고 노예로 팔려갔습니다. 인간의 꿈과 달리 하나님이 주시는 꿈은 그 꿈을 이루기까지 많은 시련을 통과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불을 통과할 때 사라지는 것은 금이 아닙니다. 그러나 참된 꿈은 정금과 같이 시련을 통과할수록 더욱 선명해집니다.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요엘2:28)
나이 들어갈수록 꿈을 꾸는 것은 점점 어려워집니다. 왜냐면 나이 들어갈수록 점점 현실적이 되고 미래보다는 과거지향적이 될 것이고 비전보다는 추억을 노래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만일 내일 임종을 맞이할 것을 아는 사람이 오늘 어떤 꿈을 갖게 된다면 그것은 인간이 자기 욕심을 따라 자기 안에서 만들어내는 그런 꿈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꿈일 가능성이 매우 높을 것입니다. 왜냐면 사람이 자기 힘과 의지로 꿈을 만들어낼 수 있는 그런 상황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만약 우리가 불가능한 상황 가운데서도 가능한 꿈을 꾼다면 그 꿈은 하나님이 주신 꿈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성령이 꿈을 주시는 분이라고 말씀합니다. 나이가 들면 자신의 경험을 의지하게 되고 자신의 추억을 되새김질 하게 됩니다. 그러나 나이가 들어도 성령을 모시고 살아가면 하나님이 행하실 일들을 바라보게 되고 그 일에 자신을 드리는 것을 꿈꾸게 됩니다. 왜냐면 성령은 하나님이 행하실 일들에 대해 보여주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그의 거룩한 영을 통해 당신이 행할 크고 놀라운 일에 대해 미리 보여주시고 행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성령 안에서 우리는 참된 꿈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들은 꿈에 헤롯에게로 돌아가지 말라 지시하심을 받아 다른 길로 고국에 돌아가니라."(마2:12)
하나님은 여러 가지로 말씀하시는 분이십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꿈을 통해서도 말씀하시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럴 때에도 기록된 말씀을 스스로 위반하면서까지 말씀하시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특별한 메시지를 담아 꿈으로 말씀하실 때에는 매우 일시적이고 제한적으로 그렇게 하신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꿈에 의존하거나 혹은 늘 꿈을 통해 말씀해달라고 기도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꿈을 통해 내게 말씀하신다고 생각할 경우에는 이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인지 아닌지 분별해야 하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기록된 말씀으로 확증해달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깨닫는 영을 보내주시도록 간구해야 합니다.
사람마다 성향이 다릅니다. 저의 경우는 꿈이야기를 별로 좋아하지도 신뢰하지도 않는 편입니다. 자면서 꿈을 꿀 수 있는 것은 나의 뇌가 정상적이라는 신호 정도로만 생각할 뿐입니다. 하루 종일 스트레스를 받고 지냈다면 꿈에서 쫓기는 꿈을 꾸기도 합니다. 저의 경우 스트레스를 받게 되면 종종 군대생활하던 장면도 나타나고 때로는 아주 엄한 담임목사님 밑에서 부목사로 긴장하며 사역했던 시절도 보이곤 합니다.(ㅎㅎ) 그러나 저는 여기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지 않습니다. 잊어버리고 또 주어진 하루에 충실할 뿐입니다. 이것이 매우 정상적인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간밤에 꾼 꿈에 특별한 영적 의미를 부여하여 다른 사람들에게 자랑하고 다니는 것을 가끔 보는데 저는 별로 좋아하지도 않고 관심도 없습니다. 그러나 자면서 꾸는 꿈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 꾸는 꿈은 다릅니다. 특히 고난 중에 꾸는 꿈은 다릅니다. 잘 나갈 때 꾸는 꿈보다 힘들고 어려울 때 꿈 이야기를 하면 저는 귀 담아 들으려고 합니다. 왜냐면 힘들고 어려운데도 꿈 이야기를 한다면 그 꿈은 보통 꿈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꿈이 그렇습니다. 성령께서 내 마음을 사로잡게 되면 나는 하나님이 행하실 일들에 대히 믿음의 눈으로 보게 됩니다. 하나님이 앞으로 하실 일들에 대해 알게 되면 나는 그 일에 나도 참여하고 싶은 열망이 속에서 생겨나게 됩니다. 그런 꿈은 자랑하고 다녀도 괜찮습니다. 그것이 성령이 아닌 나의 욕심으로 생긴 꿈인지 어떻게 알 수 있냐고요? 아주 간단합니다. 불을 만나면 태워 없어져버리고, 물을 만나면 꺼져 없어질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꿈은 불과 물을 통과하면서 더욱 또렷해지고 더욱 선명해지고 더욱 간절해집니다. 그리고 오직 하나님의 뜻만을 기뻐하고 하나님이 그 어떤 꿈보다 더 크게 볼 줄 아는 사람은 이것이 자신에게서 온 것인지 아니면 하나님에게서 온 것인지 정도는 분별할 수 있습니다.
대부분의 꿈은 자기 욕망의 거울에 비친 자기 모습입니다. 나르시즘 즉 자기애가 강한 사람에게 이런 꿈은 자주 나타납니다. 이런 꿈들은 간 밤에 분명히 꿈을 꾸었는데 일어나면 생각이 나지 않고 하루 종일 바쁜 일에 정신없이 살다보면 잊혀지는 것들입니다. 나이가 들다보면 삶의 여러 가지 바쁜 현장 속에서 잊어버리고 마는 것들입니다. 그러나 어떤 꿈은 아주 특이하게도 잊혀진 것 같은데 다시 살아납니다. 하나님이 주신 꿈은 죽은 것 같아도 다시 살아납니다. 하나님은 죽은 자도 살리시는 분으로 죽은 꿈도 다시 살리십니다. 저는 어릴 적 예수님을 영접하고 전 세계를 다니며 복음 전하는 꿈을 가지고 자랐습니다. 그러나 신대원을 들어가고 20여년간 다양한 모양의 교역자로 교회를 섬기면서 그 꿈을 잊어버리고 살게 되었습니다. 교회를 섬기면서 어떻게 하면 개척하여 큰 교회를 이루어볼 것인가를 꿈꾸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후자의 꿈은 사라지고 처음 가졌던 그 꿈이 살아나기 시작했습니다. 영어로 복음을 전하고 영어로 설교하는 것을 꿈꾸던 어린 시절의 꿈이 다시 되살아나기 시작했습니다. 지금은 그 꿈을 이루며 살고 있습니다. 죽은 줄로만 알았던 꿈이 하나님의 은혜로 다시 살아난 것입니다. 저는 그 자체만으로 큰 행복이라 생각합니다. 삶이 꿈 속에서 사는 것 같이 여겨집니다.
"꿈에 본즉 사닥다리가 땅 위에 서 있는데..."(창28:12)
하나님이 주시는 꿈의 특징은 반드시 시련을 통과한다는 사실입니다. 야곱은 형 에서를 피해 도망다닐 때 광야에서 꿈을 꾸었습니다. 꿈에서 하나님을 만난 것입니다. 그리고 외삼촌의 집에서 20여년 간 온갖 고생을 다 하고 나서야 자기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한참을 둘러서 온 것 같지만 그러나 그 고난의 시절에 야곱은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더욱 자라고 강해질 수 있었습니다. 요셉도 꿈을 꾸고 나서 상당한 세월 동안 고생을 하였지만 결국 그의 믿음은 더욱 강해질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꿈을 꾼 사람들 중에 오랜 세월 동안 고난을 겪지 않고 그 고난을 통해 속사람이 강해지지 않고 꿈의 성취를 경험한 사람이 한 명이라도 있습니까? 한 명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안에서 꿈을 꾼다는 것은 한 편으로 복되고 즐거운 일이지만 또 다른 한 편으로 큰 고난과 시련을 통과해야만 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자신의 욕망이 만들어낸 착각이든 아니면 하나님이 성령으로 주신 비전이든 간데 우리가 꿈을 가지고 살아간다는 것은 중요한 일입니다. 일단 꿈은 그 꿈을 가진 사람들에게 삶의 의미와 보람을 줍니다. 꿈은 지금 내가 하는 모든 일에 의미를 부여합니다. 물론 그 의미를 다 이해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다 이해하지는 못하지만 분명 특별한 의미가 있다는 사실을 믿을 수 있습니다. 그것이 지금 고난과 시련을 당하는 가운데서도 즐거워할 수 있는 비결입니다. 그래서 꿈이 있는 사람은 지금의 현실과 상황만을 바라보지 않습니다. 그리고 모든 상황 가운데 긍정적인 마음을 유지할 수 있게 됩니다. 내가 하는 모든 일이 사소한 듯 하여도 의미가 있다는 믿음이 생기면 그렇지 않은 다른 사람들과 다르게 일을 할 수 있게 됩니다. 이것이 요셉이 보여준 삶의 모습이었습니다. 비록 지금의 삶이 내가 원하는 모습이 아닐지라도 꿈이 있는 사람은 꿈이 없는 다른 보통의 사람들과는 다른 방식으로 일을 할 수가 있게 됩니다. 꿈이 있다는 것은 이처럼 내 모든 삶에 큰 활력소를 불어넣어 줍니다.
꿈이 있다는 것은 그 삶이 활기가 있다는 뜻입니다. 꿈이 없는 삶은 마치 건전지가 다 된 손전등과 같습니다. 그러나 무작정 꿈을 꾸기 전에 우리는 꿈꾸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그냥 꿈을 꾸라고 하면 다들 자기 욕망이 이끄는 대로 꾸기 시작할 것이고 결국 꿈이 좌절되기 시작하면 꿈 자체를 혐오하면서 살거나 혹은 꿈을 가진 모든 이들을 미워하고 조롱하면서 살게 될 것입니다. 꿈을 꾸는 법을 배우라고요? 예! 그렇습니다. 꿈을 꾸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먼저 하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내가 만든 꿈을 가지고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만난 그 자리에서 하나님이 꿈을 허락하시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으로는 자신의 생각, 자신의 계획, 자신의 뜻보다 하나님을 더 크게 보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을 배워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진정으로 기뻐하고 진정으로 순종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자신의 꿈이 좌절되고 자신의 기대가 무너질 때에도 결코 힘들어하거나 방황하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성령에 대해 마음을 열어놓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이 자신의 사역에도 불구하고 성령께서 가로막으시는 것을 느끼고 있었고 또 자신의 꿈을 통해 하나님께서 새로운 땅으로 가라는 말씀을 받을 수 있도록 늘 성령께 열린 마음을 유지했습니다. 그리고 성령께서 꿈을 통해 말씀하실 때 사도 바울은 자신의 생각을 기꺼이 내려놓고 하나님의 뜻에 즉각 순종하기로 결정했습니다.(행16:7-10) 이처럼 하나님께서 행하실 일들을 온전히 알게 되면 하나님의 그 일에 자신의 삶을 온전히 드리고자 하는 거룩한 소원이 생기게 되는데 이것이 하나님이 주시는 꿈인 것입니다.
"밤에 환상이 바울에게 보이니 마게도냐 사람 하나가 서서 그에게 청하여 이르되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 하거늘"(행16:9)
꿈이나 환상이나 형태만 다를 뿐 다 같은 말입니다. 자면서 꾸는 꿈이 있고 눈을 떴는데도 선명한 그림이 그려지는 그런 꿈이 있고 기도하면서 어떤 그림이 그려지기도 합니다. 환상이란 마치 어떤 영화를 보는 것이 아니라 마치 영화 속에 직접 들어가 있는 듯한 경험을 말합니다. 모든 꿈과 환상이 다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은 아니므로 우리는 반드시 그런 경험들을 맹목적으로 신뢰하여서는 안 됩니다. 하지만 평소 성령 안에서 늘 깨어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직관적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인지 아닌지 그 자리에서 알 수 있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여기서 제가 말하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성품에 관한 것입니다. 분별력은 하나님의 성품을 아는 지식에서 나옵니다. 하나님은 사도 바울이 소아시아에서 계속 복음을 전할 때 한 번도 이래라 저래라 강압적으로 명령하지 않으셨습니다. 대신 하나님의 임재에 민감해 있던 사도 바울이 하나님의 뜻을 스스로 깨달을 수 있도록 부드럽게 인도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바울에게 보여주신 환상에 등장한 마게도냐인은 고작 한 명이었습니다. 보십시오. 수 천 수 만명이 그 환상중에 등장하지 않은 까닭이 무엇일까요? 바로 하나님의 성품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바울에게 부담을 주기를 싫어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바울이 스스로 하나님의 기쁘신 뜻을 깨닫고 자원하는 마음을 갖게 하기 위해 일부러 환상 중에 단 한 명만 보게 하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들 모두에게 이와같이 신사적이시고 인격적이십니다. 저의 하나님도 제게 그러하셨습니다. 동일하신 하나님은 한번도 제게 아프리카로 나가라고 부담을 주신 적이 없으셨습니다. 제가 스스로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아프리카로 떠나기까지 무려 30여년을 기다려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분을 향해 자원하는 마음으로 순종할 때까지 끝까지 참고 기다려주시는 분이십니다.
"너희 안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빌1:6)
꿈과 현실 사이에 괴리가 당연히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주신 꿈이라면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방법으로 이루실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꿈은 단지 꿈이 아니라 그 자체가 현실입니다. 하나님이 그리는 꿈은 언제나 현실이지 상상에 그친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꿈을 꾸는 사람은 진짜 제대로 된 현실 속에서 사는 것입니다. 비록 지금 보이는 현실이 그 꿈을 부정하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하나님의 꿈은 오히려 그 현실을 부정할 수 있는 힘을 제공합니다. 그러나 사람이 만든 꿈, 자신의 욕망, 자신의 기대, 자신의 생각에서 만들어진 꿈은 그러한 상황과 현실을 부정할 수 있는 힘이 없기 때문에 스스로 무너지는 것입니다.
I have a DREAM!!
"나에겐 꿈이 있습니다"라고 설교했던 킹 목사님의 외침은 특별한 사람들만의 몫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자신을 드리며 살아가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자랑입니다. 상황이, 환경이, 조건들이 나를 부정한다고 느낄 때 나는 내 안에 하나님이 그의 성령으로 부어주신 꿈을 가지고 도리어 그 모든 환경과 상황을 부정해야 합니다. 살아있는 그리스도인은 꿈을 가진 그리스도인입니다. 성령 안에서 꿈을 꾸지 않는 참 그리스도인은 있을 수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너무 많이 꿈의 좌절을 경험해서 꿈 자체를 혐오하기도 합니다. 저도 한 때 그랬습니다. 하지만 좌절을 통해 진짜를 얻을 수 있다면 좌절도 해볼만 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 안에서 꿈을 꾸게 해달라고 기도하십시오. 결코 꿈꾸기를 포기하지 마십시오. 꿈을 자랑하십시오. 꿈을 노래하십시오. 꿈을 따라 사십시오. 내 힘과 노력이 아닌 성령의 능력으로...
참된 꿈은 하나님께서 행하실 일들에 대한 참된 지식입니다.
이 지식이 이 글을 읽는 모든 형제 자매들에게 충만히 임하기를 축복합니다.
꿈을 잃고 살아가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You can reach your dream...
South Africa,
김광락 선교사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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