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전 저는 달콤새콤한 체리가 먹고 싶어서 화분에 심긴 체리모종을 가꾸기 시작했습니다. 열심히 물을 주고 거름도 주는데 별로 자라는 모습이 눈에 띄지 않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잘 키울 수 있을까 싶어 자료를 찾아보고 공부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체리나무는 그 열매를 맛보기까지 생각보다 세월이 많이 걸린다는 사실을 알고 내심 포기할까 말까 망설이고 있습니다... 어린 체리나무를 보면서 문득 드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체리열매는 하나의 비유로 제게 다가왔습니다. 누구나 풍성한 열매를 거두기를 바라고 맛보기를 열망하고 있지만 그렇지 못한 세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 배고프다고 심을 것을 먹어버리거나, 둘째 먹는 것에 비해 심는 것은 적거나, 셋째, 심긴 하지만 빨리 자라지 않고 생각대로 열매가 보이지 않아 중도에 포기해버리기 때문입니다. 풍성한 삶에 가장 큰 장애물은 오래 참지 못하는 조급함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풍성한 삶을 살기 위해 우선 농부의 마음을 배워야 하는데 농부에게 중요한 것은 세 가지입니다: 씨seed, 밭field, 그리고 때time입니다. 어떤 영역field에든지 가능하면 선한 영역에 선한 뜻seed을 품고 꾸준히, 중간에 변경하거나 혹은 포기하고 싶은 때time가 반드시 올 것인데 그 순간을 잘 참고 넘기면서 지속한다면 반드시 풍성한 결실의 계절season이 찾아옵니다.-시126:6;갈6:9
얼마전 어느 흑인 마을에 들어가서 교회 지도자들을 위한 무료신학훈련학교를 개설하기 위해 논의를 한 적이 있었습니다. 기본적으로 성경을 체계적으로 그리고 더 깊이 배우기를 갈망하는 분들을 만날 수 있어서 수월할 것 같았습니다. 제 자신을 소개하고 제가 가르치는 과목들을 소개하니 높은 관심을 보여주었습니다. 많아야 15명 정도로 시작하려고 했는데 어느새 소문이 났는지 30명이 넘는 지원자가 생겼습니다. 제가 하는 신학훈련 사역의 특징은 건물이 없어서 비용이 적게 들어 갑니다. 그리고 교회 지도자들이 학생인데 그들이 적어도 책값은 내게 합니다. 물론 제가 한 푼이라도 받는 것은 없습니다. 그들이 공부할 교과서는 제가 돈주고 사고 교재를 가지고 그들이 정한 장소에 찾아가기 위해 운전하며 기름값을 지불하는 것도 제몫입니다. 하지만 그들에게 책을 나눠줄 때 그들이 자신들이 공부할 책을 사게 합니다. 그리고 한 사람이 그 책값을 거두어서 관리를 하게 합니다. 자신들이 낸 책값을 자신들이 먹을 음식과 졸업식 경비로 반반 지출하게 합니다. 그런데 이 문제에 관련해서 제가 놀란 것이 하나 있습니다. 30여명이 넘는 지원자들이 다들 교회에서 가르치고 설교한다는 나름 영적 지도자들이고 목회자들인데 지원자들의 책값을 거두어서 관리할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고 물어보니까 자신들은 돈 관리를 잘 못한다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서 재정사고가 날 가능성이 높다는 말입니다. 이 말을 듣고서 저는 아무리 성경과 신학을 잘 가르쳐도 결국 '재정관'을 가르치지 못하면 공든 탑이 한 순간에 무너질 수 있다는 사실을 다시 떠올리게 되었습니다. 오늘날 많은 신학교가 있는데 왜 신학생들에게 재정관을 가르치는 교수들이 하나도 없는 걸까요? 왜 성경에서는 재정에 관해 구원이란 단어보다 더 많이 말씀하고 있는데 왜 목사들은 교인들에게 재정의 문제에 관해 실제적인 가르침을 주지 못하고 맨날 뜬구름 잡는 이야기만 하는 걸까요? 선교사역도 마찬가지라 봅니다. 재정훈련, 그리고 경영과 청지기훈련을 시키지 못하면서 제대로 된 선교사역을 했다고 할 수 있을까요? 제 자신에게 도전해보았습니다.
풍성한 삶을 '재정'이란 영역에 국한시켜서 생각해보겠습니다. 우리가 풍성한 삶을 누리며 사는 것을 우리의 하나님 아버지께서도 원하신다고 저는 굳게 믿습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풍성한 삶은 단지 재정만의 문제만이 아니라 영성, 감정, 관계, 사역, 가정, 공동체 등 여러 가지 영역을 포함하는 '전인격적인' 풍성함holistic abundance을 의미합니다. 즉 어느 한 영역만 가지고 '풍성함'을 단정하기 곤란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 가지 영역 중에서 하나의 온도계와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이 있는데 저는 그것이 '재정'에 관한 영역이라고 생각합니다. 재정에 관해 풍성한 삶을 누린다는 말은 많은 돈을 벌고 쓰는 그런 삶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제가 생각하는 '재정적으로 풍성한 삶'의 정의는 재정을 관리하고 다스리는 능력ability to manage the finances입니다. 즉 돈이 많고 적음의 문제가 아니라 돈을 포함한 넓은 의미에서의 재정을 관리하고 다스리고 통제하는 능력이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입니다. 그것은 돈이 한 푼도 없는 광야와 같은 상황 속에서도 낙심하거나 환경에 대해 불평하지 않고 능동적으로 재정을 심고 가꾸며 그래서 결국 열매를 거둘 것에 대한 비전을 가지고 있느냐, 아니면 매마른 광야와 같은 상황에 처할 때 주저앉고 절망하느냐의 문제입니다.
재정적으로 풍성한 삶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일까요? 저는 가장 으뜸되고 가장 중요한 것이 '자유'라는 성품이라고 생각합니다. 재정에 대해 자유로울 수 있다는 것, 돈이 다 떨어졌을 때에도, 추제할 수 없을 정도로 돈이 많아도 내 영혼이 자유로움을 유지할 수 있다면 저는 그러한 삶을 재정적으로 풍성한 삶이라고 믿습니다. 좁은 의미에서 말하자면 '재정적인 자유'입니다. 더 좁은 의미에서 말하면 '채무'debt가 전혀 없는 삶을 의미합니다. 빚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면 우리는 재정적으로 풍성한 삶을 누리고 있다고 일단 말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제가 생각하는 매우 좁은 의미의 풍성한 삶입니다. 그러나 재정적으로 풍성한 삶을 넓은 의미에서 말하자면 '주는 삶'입니다. 단지 주는 행위만을 말하지 않고 어떤 마음으로 주느냐입니다. 주는 것을 통해 즐거움을 느끼는 것, 혹은 가난한 자들을 향해 불쌍히 여기는 마음에서 비롯된 구제행위, 혹은 나그네와 헐벗은 자들을 사랑으로 대접하는 손님대접의 정신hospitality 등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다시 요약하자면 좁은 의미에서 '아무에게도 아무 빚을 지지 않는 얽매인 것이 없는 자유로운 상태'이고, 적극적인 의미에서 '필요한 이들에게 기꺼이 즐거이 대가없이 베풀어 줄 줄 아는 여유로움의 상태'를 의미합니다.
당연히 참 자유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발견할 수 있습니다. 만일 수 백 수 천 억의 자산을 가지고 있고 평생 다 쓸 수 없는 재산을 가지고 있다고 할지라도 내세와 부활에 대한 소망이 없이 오직 이생이 전부인 양 살아간다면, 이 땅에서 자신이 누릴 수 있는 것을 마음껏 누릴 수 있다고 할지라도 그가 진정 '풍성한 삶'을 살고 있다고 할 수 있을까요? 과연 그럴까요? 저는 결코 아니라고 믿습니다. 저는 그런 인생이 있다면 세상에서 가장 불쌍하고 가장 비참한 인생이라고 믿습니다. 왜냐면 이생은 순간이며 꿈과 같은 것이고 우리가 들어갈 저생은 실제이며 영원한 삶인데 이생에서의 삶이 가장 화려할수록 저생에서의 삶은 더욱 더 비참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생에서의 화려한 삶을 기억하면서 저생에서 얼마나 괴로울까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지 못한다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보배로운 은혜, 즉 죄사함의 축복을 발견할 수 없을 것이고 우리는 아무리 천문학적인 재산을 가지고 마음껏 누린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여전히 빚더미에 앉은, 결국 파산한 인생이나 다를 바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생각해보세요. 만일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속redemption 즉 죄사함의 축복을 이미 받은 것이라면 지금 이생에서 우리가 겪는 상황이 어떠하든지 간에 우리는 이미 자유인이고 우리의 자유를 다시 구속할 것은 아무도 아무 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따라서 최고 최대의 자산asset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축복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이 세상에서 가장 풍성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만일 내가 1조원의 채무가 있는데 그것이 은혜로 면제되었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생각만 해도 홀가분할 것이고 마음은 자유로울 것입니다. 지금 내 손에 한 푼도 없을지라도 나의 마음은 이미 부요해졌습니다. 그러나 1조원의 채무가 있는 사람이 오늘 하루 동안 천 만원의 공돈이 생겼다고 생각해보십시오. 그 돈으로 인해 마음이 부요해질 수 있을까요? 일시적으로 그럴 수 있겠지만 그의 마음에 참된 자유는 깃들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속의 은혜를 발견할 사람은 이보다 한 단계 더 나아갔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단지 천문학적인 빚을 면제된 것만이 아니라 영원한 하나님의 왕국kingdom을 상속받기로 작정된 자들입니다. 지금 당장 내 손에 한 푼이 없어도 이미 법적으로 완전하고 또 안전한 상속자가 된 것입니다. 따라서 일시적인 이생에서 아무 것도 누리지 못하고 살지라도 그런 광야같은 삶이라 할지라도 그 속에서 항상 기뻐하며 모든 일에 감사할 수 있습니다. 재정적으로 풍성한 삶을 사는 사람의 특징이 바로 그러한 '희락'과 '감사'의 열매를 맺는다는 사실입니다. 만일 그의 삶에 이러한 기쁨과 감사가 없다면 둘 중에 하나입니다. 그는 아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유를 발견하지 못한 채 여전히 천문학적인 빚을 떠안고 신음하며 살아가는 죄인이거나 아니면 정신이 돌아버려서 자신이 누구인지 어떤 신분인지 완전히 망각하고 살아가는 미치광이이거나일 것입니다. 복음으로 인한 원초적인 기쁨을 잃었다면, 그리고 영원한 하늘나라를 상속받은 자로서 마땅이 가져야 할 그리고 보여주어야 할 여유로운 마음, 이래도 감사 저래도 감사할 줄 아는 그 원초적인 여유로움을 잃었다면 우리는 아무리 많은 돈을 벌고 마음껏 쓰고 있을지라도 혹은 그 반대일지라도 우리는 결코 풍성한 삶을 살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나의 형제 자매 그리스도인들 여러분, 진정 재정적으로 풍성한 삶을 살고 싶습니까? 그렇다면 여기 재정적인 자유를 얻게 하고 누리게 하는 열쇠가 어디에 있는지 알려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것은 내가 누구인가 하는 정체성identity에 관한 지식입니다. 이 지식의 열쇠가 여러분에게 재정적인 풍성함으로 인도해줄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많은 것을 가지고 있음에도 마음은 여전히 부족하다고 느끼고 만족을 알지 못하고 항상 불평하고 원망하고 좀 더 가지자 좀 더 벌어들이자고 하는 까닭은 자신이 누구인지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자신이 하나님 보시기에 진정 어떤 사람인지 알게 된다면 우리는 재정을 관리하고 다스리고 정복할 수 있게 될 것이며, 마치 알라딘의 램프에 나오는 거인 지니처럼 우리가 원하는 대로 마음껏 부릴 수 있는 능력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아주 중요한 진리입니다. 만일 내가 진정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 나라를 상속받을 '상속자'임을 진심으로 믿게 된다면 우리는 매사에 그렇게 생각하며 그렇게 행동하게 될 것이고 우리의 믿음에 따라 돈과 재물은 종노릇을 하며 반응을 보일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돈이 없이 살 수 없는 존재'라고 믿으며, 돈이 없다고 하는데 어떻게 할 수 있지 하며 지갑의 눈치만을 본다면 돈 역시 우리의 믿음에 따라 그렇게 반응을 할 것입니다. 결국 환경이니 돈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가 우리 자신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으며, 우리 자신에 대해 어떻게 믿고 있는지의 문제인 것입니다.
이러한 정체성은 돈이 없어 궁핍한 상황에서도 낙심하지 않게 해주는 힘이 있습니다. 마치 알라딘과 같이 램프만 있으면 아무리 가난한 집에 살지라도 아무리 먹을 것이 없어도 불평하지 않는 것처럼 말입니다. 내가 원하는 것을 언제든지 얻을 수 있다는 믿음이 있기 때문에 많은 것을 가졌거나 혹은 정반대로 아무 것도 가지고 있지 않을 때에도 그 마음은 결코 요동하지 않게 됩니다. 자신이 누구인지 정확히 알게 된다는 것! 이것은 마치 알라딘의 요술램프를 소유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내가 누구인지 정확히 알기 때문에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도 정확히 알게 되고, 더 나아가 내가 원하는 것을 정확히 어떻게 얻게 되는지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해볼까요? 램프를 가진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제발 빌려달라고 사정할까요? 결코 아님니다. 자신이 아무리 궁핍하고 배고파 굶어죽게 될 상황에 처했을지라도 다른 사람에게 구걸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왜냐면 자신이 가진 것을 가지고 어떻게 활용할 것인지 그래서 어떻게 자신의 필요를 채울 것인지 알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그래서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도 아무 빚도 지지 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재정적으로 풍성한 삶을 살려면 무엇보다 빚과 싸워 이겨야 합니다. 빚을 지게 되면 자유를 잃는 것을 의미합니다. 빚을 지게 되면 기도생활도 잘 안되고 묵상도 잘 되지 않고 신앙생활이 침체에 빠지는 이유가 그것 때문입니다. 빚은 자유를 앗아가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자유를 잃지 않기 위해 목숨을 걸고 투쟁해야 합니다. 빚을 내어서 우리의 필요와 소원을 채우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자유를 잃지 않도록 하는 일입니다. 말세의 경향이 그럴 것입니다. 주님이 다시 오실 때가 가까이 다가올수록 이 세상은 빚이 점점 늘어갈 것입니다. 빚은 사람들의 자유를 앗아가고 그래서 진리에 눈을 돌리지 못하게 만드는 힘이 있습니다. 말세의 구조가 점점 사람들에게 빚을 강요하는 시대가 될 것입니다. 이런 시대에 우리의 믿음을 지키고 우리의 영혼을 지킨다는 것은 다름 아니라 빚과 싸운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자유를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 목숨 걸고 싸우는 것을 의미합니다.
위 지도를 잘 보십시오. 이것은 빚을 기준으로 바라본 세계지도입니다. 붉은 색이 부채가 심각한 지역입니다. 붉은 색이 점점 늘어갈 것입니다. 이런 지역에서 살아가는 것은 그만큼 더 치열한 영적전투가 예고되는 것입니다. 또 다른 차트를 보여드리겠습니다.
이것은 세계 경제가 점점 빚을 강요하는 시대가 될 것이란 제 주장을 뒷받침해주고 있습니다. 정부마다 빚을 내어서 경기를 부양하고 있으며, 가계마다 부채는 점점 증가하는데 그 속도가 매우 가파릅니다. 이것은 그 만큼 내면의 자유를 잃어버리는 것을 의미하고 돈의 노예로 전락하는 것을 뜻합니다. 빚을 떠 안고 사는 사람들의 특징이 항상 내면에 평강이나 여유로움이 없고 입술에는 기쁨의 찬양이나 감사의 고백이 사라지고 있으며 대인관계에서는 항상 인색하고 옹졸하며 상처를 잘 주거나 상처를 받지 않기 위해 스스로를 고립시키는 모습이 두드러지는 것을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재정finances은 실제적인 영적전투가 발생하는 영역입니다. 이 영역에서 승리하면 재정을 종으로 부릴 수 있게 되지만, 만일 패배하면 재정의 노예가 되어버립니다. 재정의 노예가 되어버린 사람의 특징은 항상 마음의 자유나 평강이 없고 어떤 일을 결정할 때 항상 재정의 눈치를 보는 것입니다. 어떤 일을 하려고 할 때 "아! 돈이 없어 안 되겠어!" 라고 쉽게 말합니다. 이 말을 바꿔서 말하면 이런 뜻입니다. "아! 돈이 안 된다고 명령하네요. 그래서 저도 어쩔 수 없네요." 제가 어떤 일을 하려고 할 때, 혹은 어떤 것을 구입하려고 할 때 은행계좌를 살펴보거나 저의 재무상황을 살펴보면서 결정하는지, 아니면 그것이 과연 주님의 뜻인지, 혹은 그것이 과연 내 정체성과 일치하는지의 여부를 따라 결정하는지는 내가 재정의 노예나 아니면 내가 재정의 주인이냐를 보여주는 바로메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래 전에 예수전도단에서 전임간사로 봉사할 때 한 푼의 사례도 없이 한 달에 30여만원의 후원금으로 다섯 식구가 살아야 했던 시절이 있었는데 그 때 이것에 관해 훈련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그 시절에 제 마음 속에 저의 큰 딸을 해외단기선교에 보내어 훈련시키고 싶은 마음이 들었는데 매달 겨우 버티며 살아가는 저의 가계통장은 그런 마음을 품은 제게 "NO! You can't"라고 말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돈이 내게 말을 한다고 느낀 것입니다. 그러니까 제 속에 또 다른 오기가 발동하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하나님을 섬기는 하나님의 종인데 돈 네가 감히 내게 명령을 해? 나는 너의 명령을 받을 이유가 하나도 없어! 나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하나님의 종이란 말야!" 그래서 제가 하나님의 뜻대로 결정하기로 하고 재무상황에 따라 결정하지 않기로 결단을 내렸습니다. 그리고 먼저 하나님의 뜻인지 먼저 하나님의 마음을 살피는 일부터 하기로 했습니다. 마침내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이란 확신을 얻게 되자 신기하게도 하나님께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그 일에 하나님께서 친히 채워주실 것이란 확신도 뒤따라 생기게 되는 것을 경험하였습니다. 그리고 계속 해서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며 한 발자욱씩 하나님의 성령께서 믿음의 감동을 주시는 범위 안에서 순종하여 나가는 연습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예를 들어 어느날 단기선교프로그램에 딸아이를 등록해야 하는데 누가 대신 등록비를 플로잉해주었을 때 속으로 너무 기뻤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제 마음속에 그것을 다시 다른 사람에게 다시 심을 것에 대해 부담을 주셨을 때 기꺼이 순종했습니다. 저는 재정상황에 초점을 맞추지 않기로 결심하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며 기쁨으로 순종하는 일에 초점을 맞추기로 결심했는데 어떻게 해서 기적이 일어났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왜냐면 기적을 기대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는 것에만 초점을 맞추면서 그저 눈 앞에 있는 안개속으로 믿음의 발걸음을 하나씩 내딛는 일에만 집중했을 뿐입니다. 그때 제가 배운 것은 재정의 영역속에서는 치열한 주권다툼이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하나님이 내 삶의 실제적인 주인이냐, 아니면 돈이 내 삶의 실제적인 주인이냐를 내가 선택하는 문제였습니다. 그 선택은 결코 간단하지 않았습니다. 그 선택은 치열한 전투와도 같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을 선택하면 반드시 하나님이 승리하게 해주십니다.
돈이라고 하지 않고 재정이라고 하는 것은 보다 넓은 의미의 가치체계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를테면 왕따당하는 친구에게 다가가서 격려해주는 일이라든지 고독한 이웃에게 다가가서 따스하고 친절한 말을 건넨다는 것은 모두 돈과 같이 어떤 가치를 매길 수 있는 것입니다. 돈은 사회적인 합의에 의해 매겨진 가치라면 친절, 사랑, 손님대접, 등과 같은 것은 어떤 사회적인 평가기준이 없지만 분명히 돈money 못지 않는 가치를 매길 수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저는 5년 전에 밤 세 칸짜리 집을 월세로 살았는데 다른 선교사님 집에서 신세를 몇 번 지면서 다음에 이사갈 때는 방 네 칸 짜리 집을 렌트하여 방 한 칸을 꼭 손님대접을 위해 따로 떼어놓아야겠다고 결심하고 그런 소원을 가지고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제 나름대로 손님을 대접할 때마다 가치를 매겼습니다. 그리고 손님이 머물다 떠날 때 요구하지 않기로 결심했습니다. 제가 매긴 것은 제가 임의대로 만든 제 마음속에 있는 청구서의 형태로 주님께 제출되어졌습니다. 처음에는 주님께서 상주시는 것을 기대하는 마음으로 시작했는데 계속 하다보니 주님이 상주시는 것이 너무 확실해지니까 손님을 대접하는 것 자체가 이미 즐거움이 되어버렸습니다. 손님이 자주 찾아오지 않더라도 방 한 칸을 따로 떼어놓는 것 자체에 저는 가치와 의미를 제 나름대로 부여했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그것을 알아주시고 상주실 것을 기대하기 시작했습니다. 중간에 포기하고 싶은 유혹도 찾아왔지만 5년 이상 꾸준히 손님대접을 잘 하려고 애썼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정말 하나님께서 30, 60, 100배의 결실로 갚아주셨습니다. 재정적으로 말입니다.
요즘 제가 느끼고 깨닫는 것이 있습니다. 무엇이든지 선한 뜻을 가지고 선한 일을 중도에 포기하고 싶은 유혹을 극복하고 꾸준히 해나갈 수만 있다면, 적어도 3년에서 5년 이상 다른 사람이 뭐라고 하든 세상의 평가에 귀기울이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상주심을 온전히 바라보며 믿음으로 해내갈 수만 있다면 그것이 재정의 영역일지라도 주님은 풍성한 결실을 맺도록 역사해주시는 분이란 사실입니다. 내가 하는 모든 선한 일에 가치를 매겨보십시오. 그리고 주님께 청구하십시오. 저는 시골지역마다 다니며 신학교를 다니지 못한 가난한 목회자들에게 성경과 신학을 가르치며 훈련하는 선교사입니다. 한번 강의할 때마다 3-4시간 강의하지만 강의하는 제게 물 한 잔도 건네지 않는 현지인들을 볼 때마다 때로는 서운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때마다 저는 제 사역의 가치를 새로이 매깁니다. 내가 하는 사역이 고작 물 한 잔의 가치뿐이냐? 아니! 한 시간 강의는 백만불 이상 강의인데 왜 겨우 물 한 잔 때문에 속상해하니? 주님이 알아주시고 주님이 상주시면 그것으로 행복하지 않니? 이렇게 제 자신에게 설교합니다. 그래서 강사료도 없고 대접도 못받아도 저는 다시 기쁨과 감사로 사역지로 다시 들어갈 수 있도록 합니다. 믿음은 하나님이 계신 것과 당신을 찾는 이들에게 상주시는 분이심을 믿는 것입니다. 풍성한 삶의 비결은 바로 하나님의 상주심을 온전히 바라보는 믿음입니다.
풍성한 삶을 살려면 자유를 위해 기꺼이 싸우려는 의지가 있어야 합니다. 자유를 위해 싸우십시오. 자유를 잃지 않기 위해 투쟁하십시오. 자유를 엿보고 다가오는 흑암의 세력과 타협하지 마십시오.
그리스도 안에서,
김광락 형제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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