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속해서 풍성한 삶에 대해 생각해보겠습니다. 특히 재정finances이란 영역을 중심으로 생각해보겠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재정적으로 풍성한 삶이란 단지 돈이 많은 삶을 가리키지 않습니다. 쓰고 싶은 곳에 마음껏 돈을 쓰고 다니는 그런 삶이 반드시 '재정적으로 풍성한 삶'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이 개념을 먼저 정확히 이해하고 있어야 합니다. 왜냐면 겉으로는 돈을 펑펑 쓰고 다니며 사치하며 사는 것 같을지라도 보이지 않는 빚debt이 많을 수 있고, 또 구제하거나 남에게 베풀어주는 부분에서 매우 인색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만일 겉으로 보기에 호화롭게 사는 것 같고 마음껏 돈을 쓰며 사는 것 같을지라도 빚이 있다면 그 심령이 결코 자유를 누리지 못하고 도리어 속박의 상태에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구제와 베푸는 일에 인색하다면 그의 영혼이 가져가는 것이 하나도 없으므로 결국 그의 자산 역시 한낱 한 여름밤의 꿈과 같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재정적으로 풍성한 삶이라고 할 때 겉으로 보이는 것만으로 판단할 수 없음을 강조하는 이유입니다. 따라서 사실 재정적인 풍성함은 지금 그가 얼마를 가졌는가보다는 지금 그의 심령에 '자유'와 '너그러움'이란 성품이 있느냐를 더 중요한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고 거듭 강조하는 것입니다.
"한 부자가 있어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롭게 즐기더라."(눅16:19)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비유에서 보듯이 우리는 부자의 삶을 '재정적으로 풍성한 삶'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그럴 수 없는 이유는 비록 겉으로 보이는 부자의 삶은 풍요로움으로 가득 차 있는 것 같지만 그의 심령에는 자기만을 생각하고 베풀기를 거절하는 인색함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가난한 이웃을 보면서도 그는 애써 외면하고 있는 모습을 보면 그의 내면을 또한 들여다볼 수 있습니다. 그는 좋은 것을 받았을 뿐 좋은 것을 주는 법이 없었습니다. 따라서 그의 생애는 다음 생애를 위해 투자한 것이 하나도 없으므로 단지 이생의 삶뿐만 아니라 전체적으로 그의 생애를 바라보면 그는 참으로 빈곤하게 산 것입니다. 자신의 영혼을 위해 아무 것도 투자한 것이 없으므로 그의 현재 삶은 엄밀히 말해 빈곤한 것입니다.
"...한 부자가 그 밭에 소출이 풍성하매 심중에 생각하여 이르되 내가 곡식 쌓아 둘 곳이 없으니 어찌할까 하고..."(눅12:16)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또 다른 부자의 비유를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이 부자는 자신의 밭에 소출이 풍성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고민을 하기 시작하는 것은 '어떻게 쌓아둘 것인가'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쌓을 곳에 대한 고민을 할 뿐 그러나 어디서 어떻게 쓸 것인가에 대해서는 고민하지 않습니다. 이 부자의 고민과 결심은 오직 '저축'뿐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재산을 안전하게 보관하는 방법에 대해서 고민합니다. "또 이르되 내가 이렇게 하리라 내 곳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 두리라."(눅12:18) 이 부자에게 치명적인 문제는 이것입니다. 비록 많은 것을 가졌을지라도 나누고 베푸는 것에 대해서는 전적으로 무지한 것입니다. 그저 많이 저축하고 많이 소유하는 것만이 풍성한 삶의 조건이 아님을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또한 이 부자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되"(눅12:19) 이 부자의 또 다른 치명적인 문제는 거짓된 평안과 즐거움에 속고 있다는 것입니다. 많은 저축이 자신의 영혼에 평안과 기쁨을 주는 것으로 굳게 믿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야 말로 가장 치명적인 거짓말 중에 하나입니다. 많은 소유와 영혼의 평안은 아무 상관이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 부자는 자신의 영혼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영혼에게 속삭이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부자 역시 영혼의 상태에 대해 최소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영혼의 풍성함을 바라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자신의 영혼에게 하는 말은 거짓말이었습니다. 그는 최소한 자신의 영혼에 관해서는 거짓 선지자 역할을 하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풍요롭고 풍성한 삶이 넉넉한 소유에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큰 착각이요 심각한 거짓말을 믿고 있는 것입니다.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눅12:15)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현재 얼마를 소유하고 있는지와 풍성한 삶은 직접적인 관련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그 부자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눅12:20) 우리는 아무리 많은 것을 가졌다 할지라도 하나님이 오늘 밤 내 영혼을 불러가실 때 그것이 과연 내 것이 될 수 있는지 물어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내 영혼을 부르실 때 내 것이 되는 것만 우리는 내 소유라고 인정해야 합니다. 그때 내 것이 될 수 없다면 우리는 내 소유라고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따라서 소유, 저축은 풍요한 삶의 기준이 될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 앞에 설 때 가져가는 것만이 내 소유가 될 수 있고 참 소유가 많을수록 참 부요한 삶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지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눅12:21)
재정적으로 풍성한 삶이란 많은 재물을 쌓아두고 사는 삶이 아니라 많든 적든 주어진 재물을 하나님을 위하여 자유자재로 사용할 수 있는 삶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비록 많은 것을 가지고 있지 않을지라도 주어진 것에 감사할 줄 알고 자족할 줄 알며 그것을 기꺼이 나눌 수 있고 베풀 수 있고 드릴 수 있는 삶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많은 자산finances을 소유하고 있고 쌓아두고 있는 사람을 '부자'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단지 많이 쌓아두고 있는 사람이 더 이상 '부자'가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진정한 의미의 부자는 많이 쌓아두는 사람이 아니라 많이 하나님 앞에서 의미있게 사용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자신이 부자라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성경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네가 이 세대에서 부한 자들을 명하여 마음을 높이지 말고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두며 선을 행하고 선한 사업을 많이 하고 나누어주기를 좋아하며 너그러운 자가 되게 하라 이것이 장래에 자기를 위하여 좋은 터를 쌓아 참된 생명을 취하는 것이니라."(딤전6:17-19) 자신이 부자라고 생각하게 되면 우선 교만하게 됩니다. 다른 사람들을 내려다보는 경향이 생기게 됩니다. 자신이 쌓아둔 재물을 의지하기 때문에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을 갖기가 어려워집니다. 자신이 부자라고 생각한다면 첫째, 겸손해야 하고, 둘째, 자신의 소망을 전적으로 재물이 아니라 하나님께 두어야 하며, 셋째, 누리는 삶이 재물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 때문임을 기억하며 항상 감사해야 하고, 넷째, 구제하는 일을 특히 힘써야 하고, 다섯째, 선한 사업에 대한 비전을 품어야 하고, 여섯째, 주는 것을 좋아해야 하며, 일곱째, 인색한 마음을 갖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이러한 일곱 자기 원칙을 지속적으로 삶속에 적용해나갈 때만이 재물 때문에 자신의 생명을 잃어버리는 비극이 생기지 않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원칙이 없이 정 반대의 삶을 살아간다면 오히려 자신이 쌓아둔 많은 재물이 자신의 터가 무너지게 만들고 자신의 생명을 앗아가버리게 될 것입니다.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계3:17)
라오디게아 교회는 재정적으로 부족함이 없는 교회였습니다. 그러나 교회의 머리되신 우리 주님의 눈에 비친 라오디게아 교회의 실상은 겉보기와 정반대의 모습이었습니다. 많은 재정을 자랑하고 있었지만 사실은 곤고하고 가련하고 가난하고 벌거벗은 모습이었습니다. 우리가 재정적으로 풍성한 삶이라고 할 때 이런 라오디게아 교회와 같은 모습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풍성한 재정에 안주하면서 하나님을 더 이상 갈망하지 않았고 간절히 찾지도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간절히 찾지 않는 한 아무리 많은 재물을 가지고 있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진정 풍성한 삶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주님이 라오디게아 교회에게 주신 처방전은 이것입니다. 자신이 가진 그 많은 재물을 가지고 자신의 영혼을 위해 사용하라는 것입니다. 기꺼이 고난에 동참하기 위해 대가를 지불하려는 모습을 보여야 영적 수치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재정적으로 풍성하다고 생각하는 (외형적으로) 큰 교회일수록 더욱 구제와 전도와 선교에 힘써야 하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교회는 자신도 모르게 영적 수면에 빠져들게 되고 벌거벗은 채로 다니게 될 것입니다.
"내가 네 환난과 궁핍을 알거니와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니라..."(계2:9)
라오디게아 교회와 반대로 서머나 교회는 외적으로 보기엔 매우 가난한 교회였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눈에 비친 서머나 교회는 정반대로 매우 부요한 교회였습니다. 이처럼 사람이 보는 것과 주님이 보시는 것과는 전혀 다르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사람이 보기에 재물을 많이 쌓아두고 자산이 많은 사람이 잘 사는 것 같지만 사실 우리 주님의 눈을 가지고 그 내면을 깊이 들여다보면, 공허하고 비참하고 빈곤에 시달리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입니다. 겉으로 보기에 아무 것도 없는 것 같지만 실상 모든 것을 가지고 사는 사람이 많습니다. 중요한 것은 사람이 보는 대로가 아니라 주님이 보시는 것이 진리요 참이란 사실입니다. 그러면 서머나 교회의 역설을 어떻게 경제적으로 이해할 수 있을까요? 앞에서 언급하였듯이 우리가 가치를 매길 때는 단지 눈에 보이는 현금만이 전부가 아니란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예를 들어 내 은행계좌에 수 백 억의 현금을 가지고 있다고 할 때 그것도 분명 어떤 가치가 있습니다. 그러나 영원한 시간의 흐름 속에 그것은 별로 가치가 있다고 할 수 없습니다. 왜냐면 매우 짧은 이 생에서만 그 가치가 유효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가난한 사람일수록 자신의 안정감을 재물이 아니라 하나님께 두는 것이 쉽습니다. 아무 것도 없는 사람이 가난한 사람의 마음을 이해하고 적은 것을 가졌을지라도 베풀어주고 도와줄 수 있습니다. 그리고 물질적으로 넉넉하지 못한 사람이 오히려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는 것이 쉬워질 수 있습니다. 재물에 소망을 두지 않고 하나님께 소망을 두기 때문입니다. 라오디게아 교회가 물질적인 풍요로움 속에 영적인 빈곤을 겪은 것과 달리 서머나 교회는 물질적인 빈곤 속에 오히려 영적인 풍요로움을 누리고 있었습니다. 가나안 땅에 정착한 이스라엘보다 광야에서 방황할 때의 이스라엘이 사실 하나님의 구름기둥과 불기둥을 항상 바라보며 살았고 하나님이 날마다 내려주시는 만나의 기적을 맛보며 살았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임재를 더욱 가까이 느끼며 하나님을 갈망하며 살 수 있다는 것은 수 조 달러의 현금과도 바꿀 수 없는 엄청난 값어치를 지니고 있는 것입니다. 이와같이 우리는 어떤 것에 대한 가치를 매길 때 단순히 현금cash만으로 환산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우리는 영원이란 시간의 흐름 속에서 하나님의 눈으로 가치를 매기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저는 재정적으로 풍성한 삶이란 소극적으로 빚을 지지 않는 능력이고 적극적으로 너그러이 베풀어줄 수 있는 능력이라고 정의했습니다. 라오디게아 교회처럼 많은 자산을 가진 사람이 너그러이 잘 줄 것 같습니까? 아니면 서머나 교회처럼 가지지 못한 사람이 더 너그러이 줄 수 있을까요? 물론 사람마다, 교회마다 상대적인 차이가 있겠지만 일반적으로 말하면 없는 사람이 없는 사람의 상황을 더 잘 이해하기 때문에 가진 사람보다 없는 사람이 더 너그러운 마음으로 베풀어 줄 수 있습니다. 물론 없기 때문에 인색한 마음을 가지고 주는 것도 인색할 수 있겠지만 대체로 보면 가진 사람보다 없는 사람이 더욱 잘 주는 것이 맞습니다. 많은 것을 가진 사람은 가지지 못한 사람을 이해하지 못하고 또 가지지 못한 사람을 비판적으로 바라볼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제가 어릴적 자란 20세기가 비록 가진 것이 없었어도 손님을 대접하는 것이나 교회에 헌금하는 것이나 어려운 사람을 돕는 일에도 지금 21세기보다 더 풍성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제가 내린 결론은 이것입니다. 많이 가졌다고 너그러운 성품이 개발되는 것도 아니며, 많이 소유하고 있다고 반드시 잘 주는 것은 아니란 것입니다. 오히려 그 반대일 가능성이 아주 높은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매지 말라"(갈5:1)
저는 잘 주는 사람이란 말을 듣고 싶습니다. 제가 섬기는 교회 역시 주는 교회란 말을 듣고 싶습니다. 우리는 줌으로써 하나님의 마음에 더 가까이 나아갈 수 있고, 줌으로써 우리에게 은혜로 주어진 자유를 누릴 수 있고, 또한 줌으로써 우리를 속박하려는 모든 맘몬의 세력으로부터 우리 자신을 해방시킬 수 있습니다. 주는 행위는 가장 적극적인 자유와 해방의 실천입니다. 저는 주중에는 가난하여 학비를 감당하지 못하여 신학교 근처로 못 가본 흑인목회자들에게 무료로 신학과 성경을 가르치며, 주일에는 목회자의 생활비조차 책임져주지 못하는 작은 한인교회를 섬기고 있습니다. 흑인들은 워낙 받는 것을 좋아하고 제게 물 한 잔이라도 제대로 섬기는 것을 잘 보지 못했습니다. 그래도 불평하지 않고 주님의 상주심을 바라보고 사역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제가 섬기는 교회는 그러나 작지만 주는 교회가 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최근 2주 연속으로 추수감사주일을 지켰습니다. 그리고 모든 헌금은 전액 필리핀 타클로반 이재민들에게 전달하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현지인들에게 음식을 대접하기로 했습니다. 어느 교회가 추수감사주일을 두 번 연속으로 지키며, 또한 지구 반대편에 자신들과 아무 상관이 없는 이웃을 위해 힘을 다하여 모든 주일 헌금을 보낼 수 있겠습니까? 액수를 떠나 생각하면 작고 가난한 교회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우리는 가난한 자들을 기억하고 그들에게 줌으로써 우리가 스스로 풍성한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을 증명합니다. 우리가 가난한 자들에게 너그러이 주는 것은 받는 자의 행복을 위해서가 아니라 주는 자의 자유를 위해서 주는 것입니다. 풍성한 삶의 비결은 바로 이것입니다. "자유를 얻기 위하여 믿음으로 싸우는 것"입니다.
풍성한 삶을 갈망하는 모든 형제 자매 그리스도인들을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김광락 형제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