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묵상

눈물에 관하여

등불지기 2013. 12. 23. 08:33

 

 

눈물tears에 관하여 생각나는 대로 글을 올려봅니다.

 

눈물을 보일 줄 아는 리더(1)

 

"따르는 사람들의 어려움에 대해 리더로서 무심하게 느낀다면 공감결핍증후군을 의심해보아야 한다."
제가 아주 어릴적 그러니까 40 수년 전 제가 주일학교 코흘리게였을 때 저의 집에 심방 오신 연로하신 어느 목사님께서 눈물을 흘리신 모습을 지금도 생생히 기억합니다. 나이가 꽤 많으셨는데도 교회에서 가장 가난한 교인의 가정에 오셔서 예배를 인도하시면서 우시며 흘리시던 그 눈물속에서야말로 참 목자의 모습을 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목사로서 교인들이 겪는 고난에 대해 눈물 흘릴 줄 모른다면 더이상 목회를 수행할 수 없는 심각한 지경에 이르렀다는 것을 보여주는 징조가 아닐까요? 리더로서 함께 일하는 사람들의 문제를 공감해주지 못하고 도리어 비난한다면 이미 리더십을 잃어버린 것이 아닐까요? 이것은 모든 리더, 상사, 정치인에게도 해당되는 이야기일 것입니다.-요11:35

 

공감결핍증후군에 관해서 참조하려면

http://m.media.daum.net/m/media/newsview/20131209192007888

 

눈물의 리더십(2)..

예레미야 선지자는 심판의 메시지를 던지기 전에 먼저 눈물을 쏟았고, 예수님도 예루살렘에서 바리새인들을 향해 분노의 저주를 쏟아붓기 전에 먼저 눈물을 쏟으셨습니다. 개인이나 교회나 나라 혹은 정치를 향해 분노와 저주를 쏟아내기 전에 먼저 눈물을 쏟아야 합니다. 먼저 눈물을 쏟아낼 줄 아는 사람만이 살리는 비판을 할 줄 압니다. 눈물을 통과하지 않는 비판은 그것이 아무리 의로운 것 같을지라도 의로운 것처럼 보일 뿐 하나님의 의를 드러내기에 부족하고, 살리는 것이 아니라 죽이며, 세우는 것이 아니라 무너뜨릴 수 있습니다. 날카로운 비판력만 남은 리더는 공동체에 매우 위험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먹일 줄 모르고 때릴 줄만 아는 목사는 교회를 질식키며, 따뜻한 말로 위로할 줄 모르고 비판의 날을 세우기만 하는 리더가 속한 공동체나 모임은 언제 무너질지 모릅니다.-눅19:41

 

눈물의 리더십(3)..

리더로서 그 따르는 사람들 앞에서 눈물을 보인다는 것은 자신의 감정에 솔직하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하지만 눈물이 때로는 정치적으로 이용되기도 합니다. 사울왕은 자신을 죽이지 않고 살려준 다윗 앞에서 눈물을 보였습니다.(삼상24:16) 하지만 그의 눈물은 위선이었습니다. 왜냐면 뉘우치는 듯 하였지만 금새 그는 추격대를 재정비하여 다윗을 뒤쫓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삼상26:20) 이처럼 눈물을 교묘히 이용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눈물로써 사람들의 마음을 조종하려고 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어떤 경우는 눈물을 보아도 속지 말아야 할 때도 있습니다. 눈물은 진심인 것 같지만 진실이 아닐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결국 순종하는 삶이니까요. 눈물을 보이지 않더라고 묵묵히 의의 길을 가는 리더가 눈물을 보이면서도 자신이 가고 싶은 길을 가는 리더보다 훨씬 낫습니다.

 

 

 

예수님의 눈물

 

복음서에서 예수님께서 눈물을 흘리신 기록을 몇 군데 찾아볼 수 있는데요.. 우선 죽은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은 또한 완전한 인간이셨습니다. 사랑하는 친구 나사로의 죽음 앞에 예수님이 눈물을 흘리셨습니다(눅11:35). 장례식을 집례하면서 유족들이 눈물을 흘릴 때 함께 눈물을 흘리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것이고 인간적인 것입니다. 만일 우는 것은 믿음이 없는 행동이라고 비난한다면 그는 아직 인간이 덜 된 것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예수님은 또한 예루살렘에 입성하기 전에 눈물을 흘리셨습니다(눅19:41). 그때 흘리신 눈물은 예루살렘을 얼마나 사랑하셨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그러나 정작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후에는 예루살렘에서 전문적으로 가르치는 지도자들을 향해 무서운 진노의 저주를 쏟아내셨습니다. 우리는 누구나 교회를 사랑하고 조국을 사랑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쓰디쓴 비판의 말을 쏟아내기도 합니다. 그러나 먼저 눈물을 쏟아내기 전에는 비판의 말들을 쏟아내지 않도록 절제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예수님은 형제의 눈속에 있는 티를 빼기 전에 먼저 자신의 눈속에 있는 들보를 빼내어라고 하셨습니다. 자신의 눈속에 깊숙히 박혀 있는 들보를 빼낼 때 얼마나 아프겠습니까? 자신의 눈속에 있는 들보를 빼내며 흘리는 눈물을 경험해보지 않고 형제의 눈속에 있는 티를 빼려고 덤벼들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다윗의 눈물

 

"내가 탄식함으로 피곤하여 밤마다 눈물로 내 침상을 띄우며 내 요를 적시나이다."(시6:6)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다윗처럼 눈물이 많은 사람이 또 있었을까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그는 큰 권력을 가진 왕이었고 백성들의 신임과 존경을 한 몸에 받는 영웅이었지만 그에게는 항상 하나님의 진노 아래 눈물로 긍휼을 구하지 않으면 안 되는 죄인임을 항상 의식하며 살았습니다. 하나님의 거룩을 이처럼 의식하며 살았던 왕은 여지껏 없었습니다. 다윗이 흘린 눈물은 단지 그가 감수성이 풍부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죄인임을 잘 알기 때문이었습니다. 다윗은 또한 하나님의 응답을 경험하기 위해 눈물의 기도 외에는 없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이렇게 고백하였던 것입니다. "악을 행하는 너희는 다 나를 떠나라 여호와께서 내 울음소리를 들으셨도다. 여호와께서 내 간구를 들으셨음이여 여호와께서 내 기도를 받으시리로다."(시6:8,9) 자녀를 키우다보면 알게 됩니다. 어느날 매를 들고 무섭게 혼내는데 닭똥같은 눈물을 뚝뚝 흘리면 매를 높이 든 손에 힘이 빠져서 내려올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두 눈을 부라리고 매섭게 바라보던 제 눈에도 눈물이 그렁그렁 맺힙니다. 어려운 일로 힘듭니까? 시련과 고난으로 어렵습니까? 무조건 하나님 아버지 앞에 엎드려 눈물을 쏟아내십시오. 자녀가 흘리는 눈물은 아버지의 마음만 아니라 아버지의 손도 움직이는 힘이 있습니다.

 

눈물의 병을 채우라

 

"...나의 눈물을 주의 병에 담으소서..."(시56:8)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날 때 내가 채워야 할 눈물의 병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눈물의 병에 선을 그어두셨습니다. 우리는 그 분량을 채우기전까지는 결코 나를 위해 예비하신 밥상을 맛볼 수 없을 것입니다. 내가 고통을 당할 때 하나님께서는 어디에 계시는지 물음을 던집니다. 하나님! 도대체 어디에 계십니까? 우리는 눈물의 골짜기를 지날 때 아무리 살펴보아도 우리 곁에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것처럼 느껴질 것입니다. 그러나 놀라운 사실은 그러한 우리를 지켜보시면서 하나님께서는 하나 둘 셋.. 숫자를 세고 계십니다. 눈물의 병을 바라보시면서 한 칸 두 칸 세 칸...그래 조금만 더..라고 말씀하십니다. 제가 선교지로 파송받아 나오기 전에 3-4년 정도 눈물의 병을 채우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때는 아무리 부르짖어도 금식하여도 응답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 것처럼 보였고 아주 멀리 계신 것 같았고 마치 내 신음소리에 귀를 막고 계시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그러나 나중에 알게 된 것은 하나님께서는 보고 계셨고 듣고 계셨으며 숫자를 세고 계셨습니다. 제가 경험한 하나님은 가난한 자의 눈물을 결코 외면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이셨습니다.

 

기적을 부르는 눈물(1)

 

"이르되 아이가 죽는 것을 차마 보지 못하겠다 하고 화살 한 바탕 거리 떨어져 마주 앉아 바라보며 소리 내어 우니"(창21:16)

쫓겨난 하갈과 이스마엘은 브엘세바 광야에서 방황하다가 죽기 직전까지 이르렀습니다. 그때 온갖 서러움이 밀려오기 시작했습니다. 쫓겨난 것도 억울한데 광야에서 방황하다가 아들과 함께 죽을 지경이니 얼마나 억울하고 속상하며 서러웠겠습니까? 그 순간 어미는 목놓아 엉엉 울기 시작했습니다. 어미의 통곡소리를 듣고 어미의 눈물을 바라보던 어린 이스마엘도 영문도 모른 채 따라서 울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하갈의 소리가 아니라 어린 이스마엘의 우는 소리를 들으시고 반응하셨습니다. 그리고 하갈에게 말씀을 들려주셨습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하갈이 우는 것을 보시고 반응하신 것이 아니라 어린 이스마엘의 우는 소리에 반응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스마엘이 아닌 하갈에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갈의 기도에 응답하시기 전에 마치 이스마엘이 우는 소리를 기다리고 계신 것처럼 보입니다. 종종 하나님께서는 내 눈물에 반응하지 않는 것처럼 보일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보고 계십니다. 알고 계십니다. 그러나 중요한 무엇인가 기다리고 계십니다.

 

기적을 부르는 눈물(2)

 

제가 어렸을 때 아주 어려웠습니다. 군생활을 정말 어렵게 한 남자는 군대 이야기를 꺼내지도 않습니다. 정말 어려운 삶은 자세히 설명하기조차 싫어집니다. 대충 말하면 보통 사람 같으면 실성하여 정신 나간 사람이 될만한 그런 고난이었습니다. 저의 고난이 아니라 저의 어머니가 겪으신 고난입니다. 그때 저의 어머니는 힘들 때마다 교회 예배당으로 달려가서 엎드려서 우셨습니다. 예배당 바닥에 눈물을 흥건히 쏟아내지 않고서는 하루 하루를 견디기 힘든 세월의 연속이었습니다. 제가 14살 때였는데 하루는 교회에서 열리는 부흥회에 참석했습니다. 그때 저는 큰 소리로 예수님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하나님께서 저를 만져주시고 만나주셨습니다. 고난 중에 눈물을 쏟아내는 어머니를 만나주신 것이 아니라 철이 들지 않은 제 소리에 하나님께서 응답해시고 만나주셨습니다. 저는 제 삶을 복음을 위해 헌신하기로 서원했고 그렇게 살겠노라고 어머니께 말씀드렸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극심한 고통과 고난 중에 흘리신 눈물의 기도에 응답해주시는 방법이었습니다. 상황은 변하지 않았지만 눈물의 기도는 상황을 견디는 능력을 가지고 오며 상황을 함께 견딜 수 있는 동역자를 가지고 옵니다. 그래서 그토록 심했던 고난이 사실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느끼며 고난 중에서도 즐거워하며 감사할 수 있게 합니다. 이것이 진짜 기적중에 기적입니다.

 

기적을 부르는 눈물(3)

 

감정이 풍부하지 못한 저와 달리 저의 어머니는 유난히 눈물이 많은 분이십니다. 아들인 제가 바라보는 저의 어머니는 영락없이 감수성이 풍부한 사춘기의 여린 소녀와 같습니다. 그래서 기도하실 때 종종 눈물로 기도하는 모습을 자주 보면서 자랐습니다. 사람 앞에서는 잘 우시는 것을 볼 수 없는데 기도할 때는 그렇게 눈물이 많은 분입니다. 제가 고등학생이었을 때가 생각납니다. 제가 고3이었는데 저의 남동생은 중3이었습니다. 그때 제 남동생은 어머니의 성격을 닮아 감수성이 저보다 훨씬 풍부했는데 한 가지 아주 심각한 축농증을 앓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더욱 예민하고 신경질적이었습니다. 온갖 용하다는 의원을 만나도 소용이 없고 신통하다는 신유의 은사를 가진 분들에게 찾아가서 기도를 받아도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아무리 애써도 되지 않자 어머니는 마지막 방법을 사용하기로 작정을 하셨습니다. 남동생을 위해 40일 새벽기도를 작정하셨는데 새벽기도를 다녀오시면 잠든 제 동생의 코를 붙잡고 그렇게 눈물을 쏟아내시면서 기도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잠든 제 동생이 깨지 않도록 마치 한나의 기도와 같이 조용히 기도하셨지만 그 심령에서 터져나오는 눈물을 저는 40일 동안 지켜보았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40일이 지나자 숨어있던 그 엄청난 고름이 깨끗이 사라지고 만 것입니다! 집중하지 못해서 그렇게 공부를 못하던 제 동생이 그 이후론 저보다 훨씬 더 똑똑하고 학교에서 저보다 훨씬 더 성적을 잘 내게 되었지요. 눈물의 기도가 기적을 부른다는 사실을 그때 저는 보고 알았습니다. 눈물은 죄악의 불꽃도 시련의 불꽃도 심지어 지옥의 불꽃조차도 단숨에 꺼버리는 힘이 있습니다.

 

눈물이 매마른 세대

 

"...마음을 성결하게 하라. 슬퍼하며 애통하며 울지어다..."(약4:8,9)

우리는 눈물이 매마른 세대 가운데 살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울기보다는 싸우기를 더 잘 합니다. 슬퍼하며 애통하기보다는 날카롭게 비판하며 정죄하기를 잘 합니다. 슬픔보다는 분노를 터뜨리기를 잘 합니다. 저는 어릴 적 신앙생활할 때 복음에 대해 설교하면서 나 같은 죄인을 위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사랑에 북받쳐 눈물을 쏟아내시던 목사님들을 보면서 자랐습니다. 그러나 제 자신을 포함하여 점점 강단에서 사나워지고 건조해지며 매말라가는 것을 보고 있습니다. SNS를 보면 정의를 짓밟고 약속을 저버리는 정치에 대해 그리고 세상과 타협하고 힘을 잃어가는 교회를 향해 쓴소리를 쏟아내는 소리로 가득한 것을 쉽게 볼 수 있지만 깊은 슬픔과 눈물을 찾아보기는 힘듧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마지막 때는 점점 사랑이 식어진다고 하셨는데 눈물이 매말라간다고 해도 같은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시대를 살아가면서 눈물이 없이 우리 마음을 깨끗하게 할 수 없습니다. 눈물이 없이 성결한 삶을 살 수 없습니다. 눈물이 없이 우리 마음을 죄로부터 깨끗하게 할 수 없습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애통하는 마음 즉 눈물입니다. 눈물이 나의 영혼을 성결하게 할 것이고, 눈물이 교회를 정화시켜줄 것이고, 눈물이 우리 조국과 민족을 구원할 것입니다.

 

농부의 눈물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시126:5)

모든 선한 일, 의미 있는 일, 보람된 일, 가치 있는 일이 결실을 맺기까지는 반드시 고비crisis가 있습니다. 그 고비를 넘기지 못하면 씨를 뿌렸을지라도 결실을 맺지 못하고 열매는 익지 않은 채 땅에 떨어지고 맙니다. 그러나 참 열매는 반드시 그 고비를 통과할 때 찾아오는 것입니다. 목회도 결실을 맺기까지 고비가 있습니다. 사업도 마찬가지입니다. 포기하고 싶고 다 때려 치우고 싶고 혹은 변경하고 싶은 때가 있습니다. 선교도 마찬가지입니다. 회의를 느끼고 포기하고 싶은 때가 있습니다. 그런 고비를 맞을 때 우리는 눈물을 흘리게 됩니다. 그러나 참 농부의 마음을 가진 사람은 직관적으로 알아차립니다. 눈물을 흘리는 이 순간에도 포기하지 않고 참아야만 열매를 맺을 수 있다는 사실을...어떤 사람은 그 눈물을 일찍 흘리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늦게 흘리기도 합니다. 시기의 차이가 있을 뿐 눈물 없이 참 열매가 없다는 사실은 변함 없습니다. 눈물을 흘리면서 포기하는 사람이 되느냐, 아니면 눈물을 흘리면서도 포기하지 말고 참고 이 선한 일을 계속 하느냐는 나의 선택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고향으로 돌아가라는 나오미의 말에 룻과 오르바는 함께 눈물을 흘렸지만 하나는 세상으로 돌아갔고, 하나는 하나님 나라로 들어간 것처럼 말입니다.(룻1:9,14)

 

눈물을 닦아주시는 하나님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계21:4)

하나님은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모든 눈물을 닦아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 말은 우리가 눈물을 흘려보지 않고는 결코 하나님의 위로를 경험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애통하는 자만이 하나님께서 위로해주시는 복을 받을 수 있습니다. 천국에 들어갈 자와 지옥에 들어갈 자는 여기서 명확히 구분이 됩니다. 눈물을 아는 자와 눈물을 모르는 자입니다. 눈물을 흘릴 줄 아는 자와 눈물을 흘릴 줄 모르는 자입니다. 우리 삶에 눈물이 없다는 것은 큰 위기입니다. 눈물이 없다는 것은 하나님의 위로에서 멀어져 있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위로에서 멀어져 있으면 우리 심령은 광야와 같이 건조해지고 고슴도치와 같이 사나워져 갈 것입니다. 눈물을 흘려보지 않는 사람은 위로를 겪어보지 않는 사람이며, 위로를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남을 위로할 줄 모르는 사람입니다. 리더로서 눈물의 가치를 알지 못하는 사람은 항상 그 따르는 사람들을 정죄하고 비판하고 비난함으로써 스스로 사람을 잃어버릴 것입니다. 자신은 항상 옳은 말만 하는데 왜 자신에게 적이 생기는지 본인은 이해하지 못할 것입니다. 울어보지 않은 사람은 우는 사람을 웃게 만들 수 없습니다.

 

주님, 눈물을 주십시오!

 

저의 어머니 이야기를 또 하겠습니다. 제가 어릴 적 어머니로부터 들은 이야기입니다. 하루는 눈물이 매마른 것 같고 심령이 건조하게 느껴져서 "하나님! 제게 눈물을 회복시켜 주십시오."라고 기도하셨다고 합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몇 년 동안 눈물이 마를 날이 없었다고 합니다.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저는 '아, 눈물을 달라고 기도할 수도 있구나'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배우자를 달라, 좋은 직장을 달라, 집을 달라, 좋은 학교에 진학하게 해 달라, 돈을 달라, 등 여러 가지를 달라고 기도하지만 '주님, 제게 눈물을 주십시오.'라고 기도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계십니까? 남의 허물은 잘 보이고, 동역자의 허물과 문제는 잘 보이고, 배우자의 약점을 누구보다 잘 보며, 교회 목회자의 문제는 잘 보이고, 정치의 부정부패와 불의는 잘보이고, 교회의 타락은 잘 보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럴수록 우리는 하나님께 눈물을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눈물이 없이 우리 마음을 성결하게 하는 길은 없습니다. 눈물만큼 우리를 정결하게 하고 거룩하게 하는 것은 없습니다. 하나님의 긍휼이 아니면 도무지 대안이 없는 인생인 줄 아는 사람이 흘리는 눈물은 세상의 그 어떤 보석보다 아름다운 것입니다.

 

예수님의 눈물을 내 눈에 담기 원하는

 

김광락 선교사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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