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부 아프리카를 이해하려면 "아파르트헤이트"에 대해서 반드시 알아야 합니다. 아파르트헤이트apartheid란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소수 백인 정부가 오랫동안 시행했던 인종분리정책을 말합니다. 분리정책은 정치 경제 교육 등 여러 방면에서의 차별을 정당화했습니다. 제가 살고 있는 곳은 옛 트랜스발 공화국의 수도여서 백인(화란계 후손으로 아프리카너afrikaaner라고 부름)의 정서가 매우 강한 곳입니다. 이곳 신학교에서 성경과 신학을 가르치는 백인교수들은 자신들은 분리했을 뿐 차별은 하지 않았다고 말하는데 이것은 학자들의 교묘한 말장난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성경에서 하나님은 그 종류대로 분리하여 창조하셨다고 하면서 백인정부의 아파르트헤이트를 지지했습니다. 지금도 그것을 믿고 주장하고 있는 것을 보면 아파르트헤이트의 망령이 아직도 남부 아프리카에 죽지 않고 활동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1960년대부터 소위 '분리발전정책'이라고 부르게 된 아파르트헤이트apartheid는 주민을 반투(아프리카 흑인), 유색인, 아시아인, 그리고 백인으로 구분하는 1950년도의 주민등록법으로 시행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보다 훨씬 오래전부터 인종분리정책은 널리 시행되었는데 1948년 백인정부인 국민당이 집권하면서 이 정책을 공식화하고 더욱 확대하기위해 아파르트헤이트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1950년에 만들어진 집단지역법에 의하면 도시에 각 인종의 거주 구역과 업무 구역을 따로 정했고, 정부는 신분소지증pass 법을 더욱 강화했습니다. 그리고 모든 인종들 사이의 사회적 접촉을 금지하고 인종에 따른 공공시설의 분리를 정당화했으며, 별도의 교육 기준을 정하고 인종에 따라 특정 직업을 갖는 것을 제한했으며, 유색인종의 노동조합을 축소했고, 유색인종이 정치에 참여하지 못하도록 법적으로 엄격한 제제를 가했습니다.
얼마전 프레토이아 대학을 다니던 어떤 한국 청년이 아프리칸스를 모국어로 사용하는 어떤 백인 여성과 사귀게 되었고 결혼을 결심했는데 백인부모의 극심한 반대로 결국 헤어진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러한 보수적 성향은 그 가정만 유별난 것이 아니라 이 나라에 거주하는 모든 백인 가정에 공통적인 정서인 것입니다. 동양인인 제가 백인을 친구로 사귀는 것은 하늘의 별따기입니다. 그들은 사업을 위해 혹은 자신들의 안전을 위해 친근한friendly 태도를 보이지만 그러나 결코 자신의 마음을 열어보이지 않습니다. 아프리카 백인들은 아메리카 백인들과는 아주 다릅니다. 남부 아프리카 백인들은 보수적인 성향으로 유명합니다. 그들은 자신의 가족, 친척과는 유별난 유대관계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웃에 관해서는 관심이 없습니다. 제가 사는 집 좌우에는 백인이 사는데 한번도 저를 초대한 적이 없습니다. 물론 제가 초대하는 것도 원하지 않고요. 그런데 거리에서 만나면 손을 들어 인사를 먼저 합니다. 여기서 백인의 인사는 "나는 당신의 적이 아니니 안심하라"는 신호입니다. 이토록 극도의 보수성향을 지닌 그래서 지난 세기 동안 분리정책을 지지했었던, 신학자들이나 정치인조차 공개적으로 흑인은 열등하게 창조되었다고 주장하던 아프리카 백인들이 인구 90%에 달하는 흑인들에 대해 제대로 복음을 전했을까요? 그리고 제대로 선교했을까요? 분리를 하고 차별한 그들의 사고방식속에서 성경적인 선교가 과연 가능했을까요?
아파르트헤이트 역사를 들여다보면 긴 한 숨이 나옵니다. 백인정부는 1959년에 흑인들이 거주하는 구역을 정했고 1970년에는 모든 아프리카 흑인들이 흑인거주구역의 시민이며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시민권에서는 제외시켜버렸습니다. 그럼에도 백인들은 흑인들의 노동력을 이용해서 부를 축적하는 것을 지속했던 것입니다. 백인정부는 결국 모든 흑인들에게 백인들의 언어인 아프리칸스를 의무적으로 배우도록 강요함으로서 결국 1976년 소웨토 폭동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아파르트헤이트는 국제적으로 큰 비난을 받게 되었고 1985년 미국과 영국에 의해 제재 조치를 받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이런 압박에 못이겨 결국 1990년 마지막 백인 대통령인 더 클라크 대통령은 아파르트헤이트의 법률을 대부분 폐지하게 되었고, 1993년 신헌법이 제정됨으로 흑인들에게도 참정권이 주어지게 되었고, 1994년 넬슨 만델라가 최초의 흑인대통령으로 당선됨으로써 법률적으로는 아파르트헤이트는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법은 사라졌지만 그 정신은 아직도 남아서 활개치며 돌아다니고 있습니다. "아파르트헤이트의 망령" 선교사의 관점에서 볼 때 적어도 그렇게 표현하고 싶습니다. 아파르트헤이트 정부 시절 백인들이 세운 신학교와 교회에서는 백인정부의 정책을 지지하였으며 신학교수들은 아파르트헤이트 정책을 위해 신학적 근거들을 만들어 제공했습니다. 나름 세계적으로 유명한 신학자들이 있지만 그들은 백인정부의 강압적이고 폭압적인 차별정책에 눈을 감고 입을 다물었습니다. 오히려 흑백차별을 적극 찬성하며 지지하기도 했습니다. 차별을 지지한 백인교회들이 흑인마을을 대상으로 제대로 된 선교나 교육을 시도했을리가 없습니다. 한국에서는 부흥운동으로 널리 알려진 앤드류 머레이 역시 케이프타운 웰링턴에서 목회할 시절에 흑인에 대한 지독한 편견을 보여준 바 있다는 것은 이미 알려진 사실입니다. 차별정책이 강력하게 시행되던 시절에 백인정부는 법과 무력을 사용하여 흑인들을 강압적으로 눌러버렸는데 당시 해가 졌는데도 흑인이 백인마을에 어슬렁거리다가는 총에 맞아 죽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살인한 백인은 처벌을 받지 않았습니다. 구별과 차별을 강조한 백인들이 선교를 제대로 했을리 만무합니다. 백인들 중에 괜찮은 목사나 신학교 교수가 흑인 마을에 들어가서 복음을 전하는 일이 전혀 없었던 것입니다. 아직도 아파르트헤이트의 망령이 활개치고 다니는데 바로 이것 때문에 남아공 선교의 필요성이 대두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아파르트헤이트 역사를 이해하지 못하면 왜 기독교 국가인 남아공에 가서 선교하느냐고 질문을 던집니다. 인터넷 통계에 의하면 3분의 2가 기독교인이라고 하면서 말이지요. 하지만 실제로 흑인 마을에 들어가서 인구수와 교회수 그리고 출석수를 조사해보면 최대 3%를 넘지 않는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자신은 기독교인이라고 말하지만 교회를 출석하지 않는 경우가 많고 설교하는 흑인목사들 대부분이 정규신학을 하지 않고 소명감 하나만 붙들고 설교하니 제대로 성경을 가지고 설교하는 목사를 만나기 힘든 것입니다. 어떤 이들은 남아공에 신학교도 있고 신학자도 있는데 왜 선교사가 남아공에 가서 선교를 해야 할 필요가 있는가 라고 묻습니다. 100년간 지속된 흑백차별의 역사와 아파르트헤이트 역사를 보면 확실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백인들은 차별논리를 내세워서 자신들만의 왕국을 건설하려고 했고, 흑인들을 이용해서 자신들의 왕국을 발전시키려고 했던 것입니다. 백인들은 흑인들 마을에 들어가서 복음을 전하고 지도자를 키우는 일을 한 적이 없었습니다. 어느 백인목사나 백인교수가 흑인 마을에 들어가서 가르친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이 글을 쓰는 순간에도 없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백인들은 말하기를 자신들이 세운 학교에 들어오라고 말합니다. 아파르트헤이트 시절에는 원천적으로 봉쇄했지만 지금은 들어올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제와서 들어오라고 말한들 아파르트헤이트를 경험한 흑인들은 들어갈 생각조차 하지 않는 것입니다.
백인들이 세운 신학교가 몇 있는데 지금 급격히 쇠퇴하여 가는 중이고, 문을 닫기 일보 직전에 와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남아공 백인교회는 나름 분투하고 있지만 선교사인 제 눈에는 촛대가 보이지 않습니다. 다른 나라에 선교사를 보낼지는 몰라도 바로 근처의 흑인 마을에는 들어가지 못하는 것입니다. 자신들이 과거에 아파르트헤이트를 통해 뿌린 씨앗 때문에 그렇게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들끼리의 부흥은 옛날 이야기가 된지 오래입니다. 일단 백인 젊은이들이 헌신하는 일이 줄어들고 있습니다. 프레토리아나 스텔렌보쉬같은 유명 신학교에서는 한국인 유학생이 학교를 먹여살린다고들 합니다. 게다가 흑인들의 정서에는 백인 신학교에서 가르치는 비평학이 맞지 않습니다. 또한 흑인들은 일찍 결혼하는 경향이 있는데 처자식을 놓아두고 신학교에 입학하는 것도 어렵고, 무엇보다 학비가 흑인들에게는 천문학적입니다. 흑인이 받는 월급이 20만원 수준인데 일 년에 1, 2천만원 학비를 내고 공부하라고 말합니다. 현실이 이토록 부조리입니다. 그런데도 흑인들은 기독교를 버리거나 부정하지 않는 것이 신기할 정도입니다. 식민지배를 한 종족의 종교를 식민지배를 받은 종족이 받아들이는 것은 유례가 없는 일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흑인들은 기독교를 부정하지 않고 받아들이는 대신 "독립교단"의 형식으로 받아들인 것입니다. 자신들은 서구의 신학이 아닌 자신들만의 신앙으로 교회를 세워나가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교회를 세워나가면서 신학훈련을 받지 못함으로 발생하는 치명적인 문제들이 나타남에 따라 저와 같이 성경과 신학을 가르쳐주는 선교사들의 필요성을 깨닫게 됩니다. 언젠가 흑인들이 스스로 신학을 가르칠 날이 올 것인데 그때가 선교사들이 철수해야 할 때가 될 것입니다.
아파르트헤이트의 망령이 아직도 설치고 돌아다닌다고 했는데 그것은 법률적으로는 폐지되었지만 실제적으로는 백인과 흑인 사이에 또 다른 차별이 시행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교육과 지식에 있어서 백인들은 중요한 정보를 흑인들과는 공유하지 않고 자신들끼리 나누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제가 부동산 정보를 알기 위해 부동산 에이젼트 사무실에 방문해서 상담을 받아보면 좋은 정보들은 이미 백인들끼리 공유하고 별로 중요하지 않는 B급 혹은 C급 정보들만 공유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집을 사거나 혹은 Rent를 하려고 할 때에도 아시안들과 흑인들은 맨 나중으로 밀려나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이런 실정은 영적인 분야에서는 더욱 두드러지는데 흑인마을에 들어가서 성경과 신학을 강의하는 백인목사나 신학교 교수들을 도무지 듣지도 못했고 찾아볼 수도 없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영적 차별의 심화로 말미암아 흑인마을은 영적으로 더욱 약해지고 그래서 그 빈틈을 쌍고마라고 불리는 무당이나 자이온Zion이라 불리는 이단들이 비집고 들어와서 참 복음을 거짓 복음으로 대체해버리고 있습니다. 아이러니한 것은 백인교회 역시 노인들만 앉아 있고 젊은이들은 잘 보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영적 빈곤을 틈타 무슬림이 점차 세력을 확장해나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아파르트헤이트의 망령을 대적하고 깨부술 말씀의 종들이 이 땅에 절실히 필요합니다.
South Africa,
김광락 선교사 올림..
P.S
백 마디의 말보다 한 장의 사진이 더 잘 말해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아래는 apartheid 시절에 관련된 사진들을 모아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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