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로몬(슐로모)는 평화의 왕이란 뜻으로 사랑하는 자(lover)입니다. 술람미(슐라마이트)는 평화의 왕후란 뜻으로 '사랑받는 자'(beloved)입니다.
남성과 여성, 남편과 아내, 그리스도와 교회, 어떻게 의미를 부여하든 참 사랑은 서로 같은 본질입니다.
남자로서 '사랑하는 자'일 수 있고, 동시에 '사랑받은 자'일 수 있습니다.
여성으로서 '사랑받은 자'일 수 있고, 동시에 '사랑하는 자'일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자와 사랑받은 자로서 각각 부르는 노래에 따라 부르다보면 저절로 사랑의 능력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참 놀랍지요?
자, 이제 오페라 마지막 무대에 오게 되었습니다. 이제 다같이 사랑의 피날레를 장식할 때입니다.
함께 본문으로 들어가보실까요?
< 제 8 장 >
●v.1-4: 솔로몬의 고백을 듣고 술람미가 솔로몬에게 하는 고백(IV)
계속해서 술람미는 솔로몬에게 사랑의 고백으로 화답하고 있다. 이 사랑의 고백에는 제안과 약속이 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의 결심과 서원을 말한다.) “그대(솔로몬)가 만일 내 어미의 젖을 먹은 오빠들 중에 한 사람이었다면 내가 밖에서 그대를 만날 때 자연스럽게 그대에 입을 맞추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내(술람미)가 그대를 인도하여 내 어미 집에 영접하여 그대에게서 교훈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나는 향기로운 술 곧 석류즙으로 그대에게 마시게 했을 것이고, 그대는 왼손으로 내 머리에 베개하고, 오른손으로 나를 안았을 것입니다.” 술람미의 이 말은 솔로몬과의 자연스러운 관계가 아직도 익숙하지 못하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이 성령충만한 가운데 있다 하더라도 자신은 아직도 그리스도와의 깊은 연합이 자연스럽지 못하고 익숙하지 못함을, 즉, 자신의 미숙함을 겸손히 아는 자들이다. 마지막으로 술람미 여인은 순결을 지킬 것을 간곡하게 부탁하고 있다. “예루살렘 여자들아 내가 너희에게 부탁한다. 나의 사랑하는 자(솔로몬)가 원하기 전에는 (성욕, 정욕, 탐심을 비롯한 욕망 등을) 흔들지 말며 깨우지 말지니라” 이 순결함이 얼마나 소중한지 모른다.
●v.5: 전원으로 휴가를 간 두 부부의 노래/ 솔로몬의 노래 (I)
이제 솔로몬은 술람미의 청원을 듣고 친정인 레바논으로 휴가를 같이 떠나게 된다. 그곳에서 두 연인은 더 깊은 사랑을 나누게 된다. 본문은 제3자의 목소리가 던지는 질문으로 시작한다. “그 사랑하는 자(솔로몬)를 의지하고 거친 들에서 올라오는 여자(술람미)가 누구인가?” 이 말씀은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완벽하게 말해준다. 그리스도인이란 그리스도를 ‘그 사랑하는 자’로 여기는 사람이며, ‘그 사랑하는 자’를 의지하는 사람이며, ‘그 사랑하는 자’를 의지함으로 거친 들을 지나 저 천성으로 향해 가는 사람이다. 이 목소리에 대해서 솔로몬이 먼저 입을 연다. “너(술람미)를 인하여 네 어미가 신고한, 너를 낳은 자가 애쓴 그 곳 사과나무 아래서 내가 너를 깨웠노라” 이 말은 문자적인 의미로는 첫 번째 성적 경험을 말하지만, 그러나 더 본질적인 의미는 거듭남의 사건을 말한다. 거듭남의 사건은 참 사랑이 깨어나는 사건이며, 참 사랑을 발견하는 사건이다. 지금까지 “사랑하는 자가 원하기 전에는 일깨우지 말라”고 세 번 반복되었던 것이 이제서야 비로소 해답을 얻는다. “너를 인하여 네 어미가 신고한, 너를 낳은 자가 애쓴 그 곳”은 어디를 말하는가? 에덴 동산이 아니고 무엇일까? 태초에 사람을 생령으로 만드신 그곳이 아니고 무엇일까? 그곳에 생명나무가 있었다. 아가서에는 그것을 사과나무로 표현하고 있다. 그리고 그것을 훗날 예수님은 포도나무로 표현하셨다. 죄인들은 생명나무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참 사랑을 발견하게 되며, 참 사랑을 발견하는 순간 그 영혼은 새생명으로 창조되는 것이다.
●v.6,7: 전원으로 휴가를 간 두 부부의 노래/ 술람미의 노래 (II)
이 태초의 사랑, 이 영원한 사랑이 깨어난 인생이 노래하는 것이 어떤 것일까? 술람미 여인은 참 사랑을 맛본 모든 거듭난 인생을 대표하여 참 사랑이 어떤 것인가를 노래한다. 참 사랑은 어떤 것인가? 술람미가 말하는 사랑의 성경적 정의를 살펴보자.
(1)참 사랑을 알게 된 술람미는 자신을 소중하게 간직해달라고 부탁한다. “너(솔로몬)는 나(술람미)를 인(도장)같이 마음에 품고, 도장같이 팔에 두라” 솔로몬에게 있어 도장은 자신의 모든 권위와 지위와 위엄을 상징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사랑을 체험한 사람은 그분께 자신의 생명을 그렇게 품어달라고 기도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그리스도는 자신을 믿는 사람에게 자신의 영을 도장과 같이 새기는 의미(인침)로써 부어주신다.
(2)참 사랑을 알게 된 술람미는 사랑이 얼마나 강렬한 지를 말하고 있다. “사랑은 죽음같이 강하고” 사랑은 죽음보다 강하다고 말하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죽음도 이길 수 없는 것이 사랑이다. 사랑 앞에 죽음도 물러갈 수밖에 없다. 이 사랑을 누가 보여주었는가? 태초에 참 사랑으로 기쁨을 나누셨던 하나님 그분이 우리에게 보여주셨다. 성부는 성자를 죽는 자리에까지 내어주심으로 우리를 향한 당신의 사랑을 확증하셨다. 성자는 십자가에 죽기까지 복종하심으로 우리를 향한 당신의 사랑을 증거하셨다. 죽음보다 더 강력한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하신 하나님의 사랑 외에 무엇이 더 강렬한 사랑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그 사랑이 얼마나 강렬한가? 사랑의 이면에 투기가 있다. 사랑과 투기는 함께 간다. 진실로 사랑하는 사람은 진실로 투기한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자신을 계시하실 때 ‘질투하는 하나님’으로 나타내셨다.(출20장) 투기하지 않으면 진실로 사랑한다고 할 수 있겠는가? 사랑은 전인격을 독점하고자 하는 강렬한 의지이기 때문에 사랑하는 자는 또한 투기한다. 그렇다면 사랑이 죽음같이 강하다면, 투기는 어떠한가? 투기는 음부(괴물로 비유되는 지옥)같이 잔혹할 것이다. 지옥의 충천하는 화염을 말하면 많은 사람들이 그것이 어떻게 하나님의 사랑을 말할 수 있느냐고 묻는다. 그러나 지옥의 불은 하나님의 뜨거운 사랑 때문에 더욱 치열하게 타오르고 있는 것이다.
(3)참 사랑을 알게 된 술람미는 그 어떤 것도 사랑의 불을 끌 수 없을 것이라고 말한다. “이 사랑은 많은 물이 꺼치지 못하겠고 홍수라도 엄몰하지 못하나니” 성경에서 ‘많은 물’은 노아 시대의 홍수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그것은 극한 시련, 어려움, 상처, 문제들을 의미한다. 즉, 참 사랑의 불길은 문제가 생기더라도 식지 않게 만든다. 어떤 사랑은 시련이나 어려움이나 작은 문제들을 만나면 금방 식거나 사그라지는 것을 본다. 오늘날 작은 문제 때문에 이혼하는 가정이 얼마나 많이 늘어가고 있는가? 심지어 치약을 자는 습관 때문에 서로 이혼한 부부가 있다고 한다!
(4)참 사랑을 알게 된 술람미는 이 사랑의 가치가 너무나 값비싼 것이어서 그 어떤 돈을 지불해도 살 수 없을 것이라고 말한다. 즉, 사랑의 무한한 가치를 말하고 있다. “사람이 그 온 가산을 다 주고 사랑과 바꾸려 할지라도 오히려 멸시를 받으리라” 자신의 전 재산과 세상의 모든 재물을 다 끌어 모아 가져다준다 한들 이 참 사랑을 얻을 수 없을 것이고, 오히려 멸시와 천대를 받을 것이다. 오히려 멸시를 받을 정도로 그 사랑의 가치가 크다는 말이다. 사도행전에 나오는 마술사 시몬의 경우를 보라. 그는 돈을 드려 그 사랑을 사고자 했던 사람이다. 그러나 그는 도리어 저주를 받고 말았다. “하나님의 은혜를 돈주고 살려고 생각했다니, 네 은과 함께 망할지어다” 우리는 이 사랑의 가치를 얼마나 알고 있는가? 우리는 이 사랑의 크기를 얼마나 짐작하고 있는가? 하늘을 두루마기 삼고 바다를 먹물 삼아도 그 크신 사랑을 다 기록할 수 없을 것이다.
●v.8-10: 전원으로 휴가를 간 부부의 노래/ 술람미가 솔로몬의 사랑을 얻게 된 배경 (III)
그러면 술람미 여인은 어떻게 해서 솔로몬의 사랑을 받을 수 있었단 말인가? 술람미는 평범한 시골처녀에 불과했다. 그리고 솔로몬은 위대한 평화의 왕이 아닌가? 술람미 여인이 솔로몬의 사랑(은혜)을 받을 수 있었던 배경에 대해 우리는 궁금해하지 않을 수 없다. 이에 대해 본문은 우리에게 유익한 통찰력을 제공해주고 있다. 본문은 갑자기 술람미가 처녀이었을 때에 그녀의 오빠들이 서로 주고받는 대화를 소개하고 있다. “우리에게 있는 작은누이는 아직도 유방이 없구나(술람미가 아직 어렸을 때, 즉 처녀의 때를 말한다.) 그가 청혼함을 받는다면 우리가 누이 동생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하지?” 술람미의 오빠들은 자기의 하나밖에 없는 누이동생이 성적 경험이 없을 때, 누이동생이 다른 남자들에게서 성적 유혹을 받을 경우를 대비하여 서로 의논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술람미가 어렸을 때 매우 엄격한 가정에서 자랐음을 말해준다. 술람미의 오빠들은 누이동생이 성적 순결을 지키기 위해 자기들이 무엇을 해줄 것인가, 누이동생이 행복한 결혼생활을 하기 위해 무엇을 해줄 것인가를 생각하고 있다. 이런 가정에서 자라나는 것은 오늘날 우리에게 얼마나 큰 축복인가? 오빠들이 하는 말을 들어보자. “그가 성벽일진대 우리는 은망대를 그 위에 세울 것이요 그가 문일진대 우리는 백향목 판자로 두르리라” 이것을 이렇게 번역해보자. “만약 우리 누이동새이 아무 남자의 유혹에도 끄떡하지 않는 성격의 소유자라면 우리들은 누이동생을 칭찬하며 누이동생이 더욱 그 일을 잘 하도록 격려하자. 그러나 만일 우리 누이동생이 아무 남자의 유혹을 마구 받아들이는 성격이라면 우리는 우리 동생을 지켜주는 방패가 되도록 하자” 이처럼 술람미의 오빠들은 술람미의 성적 순결과 행복한 결혼생활을 위해 지대한 관심을 보였다. 이러한 배경 속에 술람미가 자랐다는 사실은 술람미로 하여금 꿈을 꿀 정도로 자신의 결혼생활에 진지하게 고민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비록 솔로몬이라 할지라도 술람미는 진지하게 솔로몬의 청혼을 생각하고 또 생각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10절에서 술람미는 자신의 어릴 때 성격을 이렇게 소개하면서 바로 그것이 솔로몬으로부터 사랑을 받게 된 계기가 아니었는가 회상하고 있다. “나(술람미)는 성벽이요 나의 유방은 망대 같으니 그러므로 나는 그의 보기에 화평을 얻은 자 같구나” 이 문장을 히브리어로 읽으면 훨씬 재미있다. “슐라미 슐로모 샬롬” 솔로몬의 은총을 샬롬이란 단어로 말하고 있는 것은 아가서가 단지 두 부부의 인간적인 순수하고 순결한 사랑만을 언급하고 있는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 아가서가 의도하는 것은 하나님과 인간의 진정한 평화, 화목, 화해인 것이다. 술람미가 자신이 솔로몬의 은총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이 다른 모든 남자들의 유혹을 쉽게 받아들이지 않는 성벽과 같은 사람이며, 자신의 욕망을 함부로 분출하는 법이 없는(“유방은 망대 같으니”) 사람임을 말하고 있다. 자신의 외모가 아니라 이러한 고지식함과 자신에 대한 엄격함과 진지함과 순결에 대한 책임감이 솔로몬에게 더 큰 호감을 주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주는가? (1)은혜의 본질: 하나님은 외모를 따라 판단하지 않으시고 중심을 보시는 분이시다. (2)은혜의 근거: 충성된 믿음, 자신의 욕망을 자제하고(망대와 같이 지키고 파수하며) 유혹을 거부하며(성벽과 같이) 자신의 영혼을 아무데나 맡기려 하지 않는 책임성이 얼마나 중요한가? (3)은혜의 수여: 내가 자랑할 것이 있어서 나를 사랑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가 나를 보시고 호감을 가지고 생각하셔서 내가 사랑 받게 된 것이라는 사실이다. 자, 성경에서 하나님께 사랑과 은총을 받은 수많은 종들을 생각해보자. 예수님이 선택하신 제자들을 보자. 예를 들어 베드로란 인물을 생각해보자. 베드로가 예수님께 특별히 호감을 드린 것은 그의 단순성과 우직한 충성심이다. 그가 바닷가에서 그물을 씻고 있을 때 예수님은 다시 한 가운데로 가서 그물을 내리라고 명령하심으로써 그의 단순성과 충성심을 시험하셨던 것이다. 그가 얼마나 단순하며 책임감과 열정적인가를 복음서를 통해 잘 알 수 있지 않는가? 예수님이 사랑하시고 선택하셔서 부르셔서 사용하신 도구들은 하나같이 단순한 자들이었다. 그리고 단순한 열정으로 가지고 우직한 충성심을 발휘할 수 있는 자들이었다. 하나님은 그들을 외모나 학벌이나 재능을 따라 판단하지 않으셨다. 그들의 마음의 성벽과 망대가 얼마나 견고하며 높은가를 보셨다.
●v.11,12: 전원으로 휴가를 간 부부의 노래 / 술람미의 고백 (IV)
“솔로몬, 그대는 일천을 얻겠고, 실과 지키는 자도 이백을 얻겠지만, 내게 속한 내 포도원은 내 앞에 있구나”
솔로몬의 포도원이 바알하몬에 있는데 자신의 오빠들이 솔로몬의 포도원을 지키도록 했다고 말한다. 솔로몬은 일천을 얻고, 오빠들은 20%를 수고의 대가로 받겠지만 그러나 자신은 자신의 기업을 가졌다고 말한다. 이것은 자신을 잘 보호해준 오빠들에 대한 감사와 보상을 말해줄뿐더러, 술람미가 무엇을 얻었는지 말해준다. 술람미는 돈을 얻은 것이 아니라 생명을 얻었고, 재물의 복을 받은 것이 아니라 솔로몬과 함께 사랑을 나누는 관계(포도원으로 상징됨)를 얻게 되었다는 것이 무엇보다 큰 축복이란 것이다. 이것은 하박국 선지자가 고백한 내용과 동일한 것이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합3:17,18) 자기를 지켜준 오빠들이 보상을 받겠지만 자신은 더 큰 상급을 받았다는 것이다. 참 사랑을 알게 된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런 고백을 하게 될 것이다. “내게 속한 내 포도동산(생명의 기업을 의미함)은 내 앞에 있구나” 이것이 내 것이라는 사실에 우리는 기뻐 춤출 수밖에 없다. 그리스도와의 사귐이 현실적으로 내 것이라는 사실에 그리스도인들은 춤추며 기뻐할 수밖에 없다. 당신은 이러한 최고의 만족감이 있는가?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 이러한 만족감과 행복감을 발견하였는가? 전도서에서 제기된 질문, “해 아래 사람이 가질 수 있고 행할 수 있는 최고의 선이 무엇인가?” 이 질문은 아가서에서 보다 극명하게 대답된다. “그리스도의 연합 속에서 참된 소유, 참된 행복, 참된 기쁨, 참된 만족이 있습니다!”
●v.13,14: 전원으로 휴가를 간 부부의 노래 / 솔로몬과 술람미 (V)
이제 두 부부(하나님과 이스라엘, 그리스도와 교회,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인)가 서로 즐거운 노래로 주고받으면서 아가서가 마무리되고 있다. 이 두 절은 마치 사랑하는 두 부부가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노래로 화답하는 오페라의 인상적인 결말과도 같다. 먼저 솔로몬이 노래를 부른다. “너 동산에 거한 자야 동무들이 네 소리에 귀를 기울이니 나로 듣게 하려무나” 이것을 이렇게 번역해보자: “오, 그대여, 생명의 동산에 사는 당신이여, 당신의 친구들이 당신의 소리를 들으려고 귀를 기울이고 있소. 나에게 당신이 그들에게 하는 말을 듣게 해 주시오” 솔로몬과 함께 친정으로 휴가를 왔으니 함께 자란 동네친구들이 술람미를 한번 보려고 모여들었을 것이 분명하다. 술람미의 동네친구들은 솔로몬과 함께 있는 술람미의 목소리를 듣고 싶어했을 것이다. 그때 솔로몬은 술람미가 그들에게 해주는 말을 듣고 싶어했을 것이다. 어떤 말을 술람미가 했을 것인가? 솔로몬과 함께 살면서 느꼈던 행복함에 대해 자랑하는 말을 아마 했을 것이다. 솔로몬은 술람미가 자신의 행복에 대해 그들에게 말하는 것을 들으면서 자신도 행복해 했을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자신이 그리스도인이 된 것에 대해 행복해하며 행복하다는 사실을 세상 사람들에게 알리는 사람이다. 그리스도는 그것을 원하신다. 이 신랑의 노래에 대해 신부는 이렇게 응수한다. “나의 사랑하는 자야 너는 빨리 달리라 향기로운 산들에서 노루와도 같고 어린 사슴과도 같아여라” 이것을 이렇게 번역해보면 어떨까? “나의 사랑하는 그대여, 당신은 빨리 달려오세요. 향기로운 산들에서 노루와도 같이 젊은 사슴과도 같이 빨리 달려오세요” 술람미는 자신을 향한 솔로몬의 사랑을 이렇게 “빨리 달려 오라”는 식으로 재촉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오늘날 교회가 사랑하는 주님께 드리는 최후의 기도이며, 최후의 고백이다. “아멘.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 (마라나타!) 이처럼 사랑하느 사람들의 마음은 서로 빨리 듣고 싶어하고 보고 싶어한다. 그들은 서로의 인격에 초점을 맞추지 서로가 가진 재물이나 소유에 관심이 없다. 이것이 참 사랑이다. 서로 신뢰하며 서로 사랑하는 참된 사랑은 인격에 초점을 둔다. 신랑은 신부의 말을 어서 듣고 싶어한다. 자신이 얼마나 행복하며 즐거운가를 자신 있게 친구들에게 말하는 목소리를 듣고 싶어한다. 반대로 신부는 신랑의 사랑을 빨리 받고 싶어한다. 이러한 사랑으로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며, 이러한 사랑으로 우리가 서로 사랑하고 있는가? 이 한 가지만 기억해두자. 하나님의 사랑을 알지 못하면 형제도 온전히 사랑하지 못한다. 반대로 말해도 진리가 된다. 형제를 온전히 사랑하지 못하는 자는 여전히 어둠에 있고, 하나님의 사랑을 알지 못한다.(요2:11;3:15,17참조)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였음이라.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가 없느니라. 우리가 이 계명을 주께 받았으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할지니라”(요일4:1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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