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설교

요한계시록 강해(1)-거룩한 편지(계1:1-8)

등불지기 2012. 3. 3. 15:44

요한계시록 강해(1)

거룩한 편지

본문: 계1:1~8

 

1:1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 이는 하나님이 그에게 주사 반드시 속히 될 일을 그 종들에게 보이시려고 그 천사를 그 종 요한에게 보내어 지시하신 것이라

1:2 요한은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 곧 자기의 본 것을 다 증거하였느니라

1:3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

1:4 요한은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에 편지하노니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시고 장차 오실 이와 그 보좌 앞에 일곱 영과

1:5 또 충성된 증인으로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시고 땅의 임금들의 머리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기를 원하노라 우리를 사랑하사 그의 피로 우리 죄에서 우리를 해방하시고

1:6 그 아버지 하나님을 위하여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신 그에게 영광과 능력이 세세토록 있기를 원하노라 아멘

1:7 볼지어다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각인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 터이요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를 인하여 애곡하리니 그러하리라 아멘

1:8 주 하나님이 가라사대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라 하시더라.

 

오늘부터 여러분과 함께 요한계시록을 항해하도록 하겠습니다. 이 복된 말씀을 여러분과 함께 나눌 수 있다는 것이 제게는 큰 도전이자 축복입니다. 또한 요한계시록의 말씀을 읽고 듣고 가슴에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을 것입니다. 이 복된 말씀을 통하여 우리가 종말론적인 신앙을 확고히 다지게 되는 계기가 되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여러분들도 인내심을 갖고 저를 따라와 주기 바랍니다. 많은 사람들이 요한계시록에 도전하다가 중도에 포기하거나 혹은 잘못된 길로 빠지고 말았습니다. 이 책은 정말 인내심을 갖고 읽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매우 조심스럽게 읽어야 합니다. “먼저 알 것은 경의 모든 예언은 사사로이 풀 것이 아니니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니라”(벧후1:20,21) “무식한 자들과 굳세지 못한 자들이 다른 성경과 같이 그것도 억지로 풀다가 스스로 멸망에 이르느니라.”(벧후1:16)고 베드로 사도는 경고했습니다. 그러나 해석의 어려움이 있다고 해서 이 책을 해석하기를 포기하는 것은 안 된다고 봅니다. 왜냐면 이 책도 역시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제가 볼 때 교회가 이 책을 해석하는 일을 등한히 하거나 포기해버렸기 때문에 오히려 이단들이 이 책을 마음대로 해석함으로써 교회를 공격할 수 있는 기회를 준 것 같습니다. 교회는 이 책을 되찾아야 합니다. 지금 교회는 이 책을 읽어야 하며 들어야 하며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가슴에 품어야 합니다. 이 책은 바로 교회를 위해 주신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이 책을 통해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영광과 그리스도의 교회의 영광에 대해서 볼 것입니다. 교회가 무엇이며, 교회는 역사를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 지에 대해서 요한계시록은 매우 중요한 시야를 열어주고 있습니다. 저는 요한계시록에 대해서 이렇게 부제를 붙이고 싶습니다. “교회가 지녀야 할 복음적 역사관” 예, 그렇습니다. 교회는 역사 속에서 자신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 배워야 합니다. 그리고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일들이 어떻게 진행되는지 역사를 보는 눈을 가져야 합니다. 요한계시록을 통해서 우리는 바로 그것에 대해 배울 것입니다. 역사와 시대를 바라보는 우리의 관점이 달라질 것입니다. 관점의 변화는 분명 삶의 변화를 가져올 것입니다. 세상에서 승리하는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이 책을 정말 아름다운 책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고등부 여름수련회를 인도할 때 요한계시록을 개관하면서 개인적으로 많은 도전을 받게 되었습니다. 3박 4일 동안 계시록 4장부터 18장까지 6번에 걸쳐서 설교를 하게 되었는데 기회가 되면 좀 더 자세히 연구하고 설교하고 싶은 간절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청년1부와 2부가 연합예배를 드리게 되면서 이 일을 해야 하겠다고 결심하게 되었습니다. 같이 연합하여 예배드리는 것에 대해서 안 좋게 생각하는 분들이 많이 있다는 것을 잘 압니다. 그러나 솔직히 제게는 한없이 감사한 기회입니다. 저는 이 책을 통해서 복음에 대해서, 교회에 대해서, 그리스도에 대해서, 소망에 대해서, 승리하는 삶에 대해서, 세상의 마지막 일들에 대해서 실제적인 지식을 얻을 것이라는 확신이 있습니다. 사실 이 책을 보면서 우리는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 모든 성경 66권을 다 보게 될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은 성경 전체의 요약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특별히 요한계시록은 창세기와 출애굽기에 나오는 이미지들이 많이 나옵니다. 그리고 선지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할 때 사용한 이미지들도 많이 나옵니다.

특히 창세기와 요한계시록은 매우 밀접한 관계에 있습니다. 아키발드 G. 브라운이란 분이 요한계시록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한 것은 매우 적절한 것입니다. “나는 창세기에서는 지구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를, 계시록에서는 지구가 어떻게 사라지는 지를 보게 되었다. 창세기에스는 달과 태양이 나타나지만 계시록에서는 달과 태양을 볼 수 없다. 창세기에서는 동산이 있지만 계시록에서는 도성 곧 민족들의 고향이 나온다. 창세기에는 첫 아담의 결혼 사건이 나오지만, 계시록에는 둘째아담의 결혼 이야기가 나온다. 창세기에는 저 잔인한 대적 사단이 나온다. 그러나 계시록에는 그의 멸망이 그려지고 있다. 창세기에서는 모든 고난과 고통의 시작, 최초의 눈물을 볼 수 있으나 계시록에는 더 이상 고통이나 비극이 존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모든 눈물이 다 씻기운다. 창세기에는 죄로 인해 인간에게 닥친 저주가 그려져 있고, 계시록에서는 더 이상 저주가 존재하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보게 된다. 창세기에는 사람이 동산과 생명나무에서 쫓겨난 사실을 보게 되며, 계시록에서는 다시 돌아갈 수 있으며 생명나무가 주어질 것이라는 약속을 볼 수 있다.” 그렇습니다. 사실 요한계시록을 알면 성경 전체를 다 아는 것입니다. 그러나 요한계시록을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성경 전체를 먼저 알아야 합니다. 이 복된 말씀을 함께 살펴보는 것은 정말 흥미진진한 도전입니다.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이 책은 예수님의 제자 요한이 밧모섬에 유배되었을 때에 기록되었습니다. 기록 연대는 대략 주후 95년 전후인 것 같습니다. 이 시기는 초대교회가 중대한 전환기를 맞이할 때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 세계로 전파되어서 두 세대가 지났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목격한 증인들은 이제 다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이제 새로운 세대가 복음을 듣고 회심하여 하나님의 교회를 섬기고 있었습니다. 어쩌면 참 증인은 요한 사도 혼자였는지 모릅니다. 엘리야가 자기 혼자만 남았다고 여기면서 로뎀나무 아래 누워있었듯이 사도 요한도 죽을 날만 기다리며 밧모섬에 있었을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엘리야를 다시 호렙산으로 부르셔서 그에게 장차 일어날 일들을 계시하여주셨듯이, 사도 요한을 부르셔서 앞으로 반드시 일어날 일들과 교회의 운명에 대해 계시하고자 하셨습니다. 사도 요한의 입장에서 생각해보십시오. 사도 요한은 개인적으로 교회를 향해 많은 생각에 잠겨 있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마지막으로 교회를 위해 무언가 하고 싶은 일을 찾고 있었는지 모릅니다. 당시 교회 역시 무언가 새로운 메시지가 필요했을 것입니다. 특히 점점 증가하고 있는 핍박과 시련 속에서 교회는 어떻게 시대를 바라보고 인내하며 새로운 시대를 준비해야 하는지 의식 있는 그리스도인들이라면 다들 고민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요한계시록은 여러모로 요한 사도뿐만 아니라 당시 교회들에게 가장 적절한 말씀이었습니다. 특히 고난당하는 교회들에게 요한 계시록은 가장 적절한 계시의 말씀이었습니다. 급변하는 시대 속에서 분명한 정체성을 잃지 말아야 할 교회로서는 요한계시록의 메시지가 절실히 필요했을 것입니다. 저는 바로 이것이 요한계시록을 해석하는 기본적인 자리라고 믿습니다. 요한계시록을 해석하는 여러 가지 관점이 있습니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저는 먼저 역사적인 관점을 지지합니다. 1세기 교회들에게 주신 말씀이기 때문에 그들에게 먼저 의미가 있는 말씀이 되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그런 다음에 오늘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 뜻을 밝혀야 합니다. 예를 들어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666’이란 숫자를 ‘컴퓨터 바코드’라고 해석하는 것이 역사적 해석의 원칙을 어기는 것입니다. 먼저 당시 교회들에게 의미가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오늘 우리에게 의미가 있다고 믿습니다. 저는 이것이 해석이라고 믿습니다. 참 해석은 그때 그곳과 지금 이곳을 서로 연결시키는 작업입니다. 해석은 일명 ‘다리놓기 작업’입니다. 먼저 그때 그곳으로 가야 합니다. 그때 그곳에서 말씀을 들었던 성도들의 입장에 서 보아야 합니다. 저는 여기서 출발하는 것이 가장 안전한 해석이라고 믿습니다.

그 다음 제가 생각하는 해석의 원칙은 교리적입니다. 어떤 분들은 요한계시록을 해석하면서 역사가 진행되면서 어떤 일들이 일어날 것인지 연구합니다. 물론 요한계시록은 종말에 있을 일들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요한계시록이 단지 우리의 지적인 호기심을 채우기 위해서 기록된 것은 아니라고 믿습니다. 저는 요한계시록이 우리가 믿고 고백해야 할 부분에 대해 기록했다고 믿습니다. 특별히 저는 그것이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와 깊은 연관이 있다고 믿습니다. 즉, 기독론과 교회론이 요한계시록에 있어서 핵심입니다. 세 번째로 요한계시록을 해석하는 원칙은 교회의 유익을 위한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은 환난과 핍박 속에 있던 교회들에게 유익을 주기 위해서 기록되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결코 교회를 혼동에 빠뜨리거나 공포에 질리게 하기 위해 기록된 책이 아닙니다. 요한계시록은 시련 속에 있던 교회를 위로하고 인내심을 갖게 하며 소망을 붙잡고 담대하게 행동하도록 하기 위해서 기록되었습니다. 저는 요한계시록에 대한 여러 가지 해석을 시도한 책들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참된 교회론에 근거하지 않는 해석을 저는 일단 제쳐놓습니다. 저는 여러 가지 해석들을 보면서 일단 교회에 어떤 유익을 주는가에 대해 질문을 던집니다. 그것이 교회로 하여금 인내하고 소망을 가지는 데 어떤 역할을 하는지 알고 싶습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요한계시록은 이단들에 의해서 교회를 분열시키고 미혹에 빠뜨리는 데 잘못 이용되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이제 우리는 요한계시록을 교회를 위한 책으로 되돌려 놓아야 합니다. 함께 요한계시록을 살펴보면서 기상천외한 해석을 기대한다면 일찌감치 포기하는 것이 좋습니다. 저는 이 책을 통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어떤 일을 행하셨는지, 교회가 어떤 곳인지, 교회는 무엇을 바라보아야 하는지에 대해서만 이야기 할 것입니다. 저는 재미있고 기발한 해석보다는 바른 교리에 입각한 바른 해석을 하려고 노력할 것입니다.

네 번째로 요한계시록을 해석하는 원칙은 이 책의 묵시적 특성을 따라서 해석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은 묵시문학적 특성을 따라서 기록되었습니다. 묵시문학이란 구약의 중간기 시대에 시작된 문학적 특성으로서 쉽게 말하면 그림과 환상을 통해서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요한계시록은 문자적으로 해석하면 크게 오해하기 쉽습니다. 예를 들어, 누군가 지난밤에 꿈을 꾸었는데 괴물에게 쫓겨 다니다가 낭떠러지에 떨어졌다고 합시다. 잠에서 깬 후에 이것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은 여러 환상들을 순서대로 모아놓은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는 분들은 이 책의 장르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요한계시록을 기본적으로 상징적으로 해석해야 한다고 봅니다. 마지막으로 저는 요한계시록을 해석할 때 문맥을 봐야 한다고 믿습니다. 요한계시록은 그냥 환상을 나열하고 있지 않습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자세히 읽어보십시오. 요한계시록은 매우 치밀하고 논리적인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일곱 교회, 일곱 인, 일곱 나팔, 일곱 대접, 등 7이란 숫자를 가지고 요한계시록을 볼 수 있습니다. 각 구조는 다음 구조를 향하여 점진적으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저는 이것을 좀 어렵지만 이렇게 표현하고 싶습니다. “안식을 향해 나선형으로 전진하는 구속역사관” 이것은 나중에 살펴보면서 조금씩 보겠습니다. 아무튼 전체 흐름과 구조를 알면 부분을 해석하는데 굉장히 유익합니다. 산악 전문가들에 의하면 산에서 길을 잃으면 산꼭대기로 올라가라고 합니다. 마찬가지로 요한계시록을 이해하려면 늘 구조와 흐름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그러면 이 책이 궁극적으로 말하려고 하는 바는 무엇입니까? 요한계시록의 주제는 ‘교회의 영광과 승리’입니다. 그래서 교회가 이것을 알고 주어진 시련과 역경을 잘 견디고 승리하는 것입니다. 최후 승리를 위해 교회를 격려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올바른 ‘구속사관’을 가지게 됨으로써 자신이 처한 상황과 문제들을 잘 이해하게 되고 잘 대처하게 될 뿐만 아니라 당면한 문제들을 잘 돌파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이 책이 의도하는 바입니다. 이 책이 말하려고 하는 것은 매우 단순하면서도 심오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말미암아 온 우주에 어떤 변화가 발생했으며, 하나님의 구원역사가 어떻게 진행될 지, 그리고 다시 오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구원역사가 어떻게 완성될 지에 대해서 그림을 그려가면서 말하고 있습니다. 즉, 요한계시록은 진리의 명제를 서술하는 방식이 아니라 그림으로 메시지를 전달하는 방식으로 기록되고 있는 것입니다. 자, 너무 서론이 길었습니다. 이제 1장을 살펴보겠습니다. 요한계시록 1장은 이 책의 주인장이자 주인공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교회의 머리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가 이 책을 주신 분이고, 또 이 책의 내용이십니다. 그리고 2장과 3장은 예수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1장은 이렇게 시작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 사실 이것이 요한계시록의 원래 제목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란 말은 이중적인 뜻이 담겨 있습니다. 첫째,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계시를 교회를 위해 교회에 주셨으며, 둘째, 이 계시는 다름 아닌 예수 그리스도를 드러내는 것이 목적이라는 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 책의 주인공이십니다. 또한 이 책을 교회에게 주신 주인장이십니다. 우리가 요한계시록을 읽어나갈 때 이것을 반드시 기억해야 합니다. 즉, 예수님이 중심이 되셔야 한다는 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빠진 해석은 매우 위험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빠진 교회는 더 이상 교회가 아닙니다. 우리는 언제나 중심을 잃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그 중심이란 다름 아니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것입니다. 기독론을 빼면 이 책은 시체와 다를 것이 없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대로 기독론과 교회론이 이 책의 핵심적인 교리입니다. 종말에 되어질 일들을 무슨 암호를 풀듯이 하여 사람들을 미혹하고 교회를 혼란에 빠뜨리는 자들을 조심하십시오. 그들은 결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아무 것도 알지 못하는 자들입니다. 오직 그리스도를 신실하게 믿는 자들, 그리스도를 변함없이 사랑하는 자들에게만 이 책은 의미가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거나 그리스도를 사랑하지 않는 자들에게는 이 책은 의미는커녕 오히려 두려움과 혼란을 가중시킬 것입니다. 이 책을 통해서 다른 것을 보려고 하지 마십시오. 오직 그리스도와 그의 교회를 보려고 하십시오. 기도하는 마음으로 그렇게 해보십시오. 그러면 보이기 시작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 책은 계시입니다. 다시 말해서 인간이 만들어낸 책이 결코 아닙니다. 교회의 머리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해 주신 거룩한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요한계시록을 해석할 때 교회를 향해 말씀하시는 주님의 음성으로 간주하고 읽어야합니다. 이것은 이 책을 매우 경건하게 읽어야 한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어떤 이들은 요한계시록을 해석한다고 하면서 인본적인 잣대로 마구 난도질하는 것을 봅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우리가 이 책을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이 책이 우리를 해석하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요한계시록을 읽는 것이 아니라 요한계시록이 우리에게 말하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주님이 말씀하시는 것을 듣기 위해서 이 책을 읽어야 합니다. 여러분, 얼마 전에 [바이블코드]란 책이 베스트셀러가 된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책은 심각한 문제가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이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는 말은 이 책이 무슨 암호를 해독해야 하는 암호책(code book)이 아니라 하나님의 메시지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결코 모호하게 말씀하는 법이 없습니다. 주님이 당신의 몸된 교회를 위로하고 격려하시기 위해 주신 말씀은 매우 단순하며 분명합니다. 저는 요한계시록을 암호책 정도로 간주하고 해석하는 것을 배격합니다.

그러면, 계시의 내용은 무엇입니까? “이는 하나님이 그에게 주사 반드시 속히 될 일을 그 종들에게 보이시려고”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반드시 속히 될 일’이란 말은 하나님의 작정과 계획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작정하신 일들, 즉, 하나님이 행하실 일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과 재림과 관련하여, 그리고 그 이후에 있을 하나님의 계획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즉, 이 일은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입니다. 그러니까 사람의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큰 일’(마그넬리아 데이)에 대해서 교회가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고난 속에 있는 교회가 위로받는 길입니다. 하나님이 반드시 행하실 일들을 교회가 알 때 교회는 핍박 속에서도 두렴이 전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요한계시록을 해석할 때 하나님의 큰일과는 아무런 상관없이 멋대로 해석하는 것을 봅니다. 에를 들어, 몇 년 며칠에 어느 나라 임금이 군대를 거느리고 어느 나라를 침공해 들어갈 것이며, 그 임금이 얼마동안 이러 저러한 일들을 자행할 것이라는 식의 해석 말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러한 것은 우리의 시야를 흐리게 만드는 교설에 불과합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하나님의 큰일에 대한 지식만이 우리 삶에 참된 의미를 준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계시는 어떻게 전달되었습니까? “그 천사를 그 종 요한에게 보내어 지시하신 것이라” 계시의 사건에 천사가 등장합니다. 여기서 천사는 계시의 전달자에 불과합니다. 요한계시록에서 천사의 역할은 자세히 알 수 있는데 그것은 중재의 역할입니다. 성도들의 기도를 받아서 하나님께 가져갑니다. 하나님의 응답을 성도들에게 가져옵니다. 또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계시의 도구로 일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심판을 대행하기도 합니다. 계시의 사건에 천사가 등장하는 것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줄까요? 그것은 우리가 받은 이 계시가 참으로 중하며 위엄이 있으며 엄숙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계시의 말씀을 함부로 취급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천사들도 살펴보기를 원하는 말씀을 우리가 받았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천사들이 직접 이 계시를 모든 교회들에게 전달하도록 하실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거룩하고 영광스러운 천사가 아닌 부족하고 허물 많은 우리에게 이 계시를 부탁하셨습니다. 이 얼마나 황송한 일입니까? 우리는 이 말씀을 이처럼 황송하고도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받아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이 계시의 완전함에 대해서 믿어야 합니다. “요한은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 곧 자기의 본 것을 다 증거하였느니라”(2절)고 했습니다. 겉으로 보면 요한계시록이 환상을 기록한 책이지만 그러나 환상을 통해서 하나님이 말씀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환상을 통해서 우리는 메시지를 받아야 합니다. 단지 환상을 보는 것은 충분치 않습니다. 그림을 보고서 진리를 들을 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은 곧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메시지라는 것입니다. 요한 사도는 이 계시를 충실히 기록했습니다. 개인적으로 더하거나 덜한 것이 없다고 분명히 선언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책에 대해서 어떤 인본적인 기준으로 가감을 시도하는 자유주의적 해석을 배격합니다. 이 책은 완전한 계시이며, 오류가 없는 순결한 계시입니다. 우리는 이 계시를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일들에 대해 증거하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들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 계시를 우리에게 주신 의도는 무엇입니까?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3절)고 했습니다. 기록된 계시의 말씀은 궁극적으로 교회에 유익을 주기 위해서였습니다. 특히 고난 속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가 유익을 얻기 위함이었습니다. 어떤 유익입니까? 종말에 합당한 삶을 살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교회가 교회다워지기 위해서입니다. 교회가 아무리 힘들고 어렵더라도 그 정체성을 잃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환난 속에서 인내하며 참 소망을 견고하게 붙잡도록 도와주기 위해서입니다. 세상에 동화되지 않고 주님의 재림을 준비하는 교회가 되기 위해서입니다. 종말론적인 삶을 사는 것입니다. 교회는 어떻게 이 유익을 얻을까요? 먼저, 이 책을 읽어야 합니다. 그리고 설교를 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 책이 주는 하나님의 메시지를 마음속에 간직해야 합니다. 먼저 읽으십시오. 경건한 마음으로 읽어 내려가십시오. 내게 주시는 계시의 말씀으로 간주하고 읽으십시오. 그런 다음에 설교를 들으십시오. 그런 다음에 하나님이 말씀하시고자 하는 바를 가슴에 품으십시오. 그러면 그 말씀이 일을 하기 시작할 것입니다. 그 말씀이 하나님께 더 가까이 다가가도록 여러분의 심령을 이끌 것입니다. 모든 상황 속에서 방향을 잃지 않도록 길을 지켜줄 것입니다. 이 책을 보배롭게 여기십시오. 이 책을 사랑하십시오. 말씀을 품는 자들이 되십시오. 여러분이 말씀을 품으면 말씀이 여러분을 영화롭게 할 것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 안에, 하나님의 말씀이 여러분 안에 거하도록 하면 일은 내 안에 계시는 그분의 말씀이 모든 것을 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요한은 자신이 받은 계시를 편지의 형식으로 각 교회들에게 전하고 있습니다. 교회를 위해 무언가를 주고 싶었던 요한은 자신이 받은 말씀으로 그들에게 유익을 주고 있습니다. 교회는 교회를 위해 주어진 마지막 계시의 책을 통해서 분명히 유익을 얻을 것입니다. “요한은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에 편지하노니 이제도 계시도 전에도 계시고 장차 오실 이와 그 보좌 앞에 일곱 영과 또 충성된 증인으로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시고 땅의 임금들의 머리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기를 원하노라” 이 계시록은 편지의 형태로 소아시아 교회들에게 전달되었습니다. 역사적으로도 소아시아에서는 이 계시록이 하나님의 말씀임을 의심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요한계시록에 기록된 일곱 교회는 우편물을 분배하는 분배소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사실은 일곱 교회만이 아니라 모든 교회에 전달된 것이라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교회들이 이 책을 읽어야 합니다. 오늘날 교회는 이 책을 설교하는 것을 포기한 것 같이 보입니다. 이것은 참으로 슬픈 일입니다. 이 보배를 창고에 깊숙이 넣어두고 있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습니다. 교회가 이 보배를 끄집어내지 않으면 원수들이 훔쳐갈 것입니다. 칼은 빼어서 사용하라고 있는 것이지 그냥 벽에다가 고이 모셔두라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요한계시록은 다른 성경과 마찬가지로 세상 속에서 전투하는 교회를 위해 주님이 제공해주신 무기입니다. 교회는 이 무기를 휘두르면서 영적 전쟁을 강력하게 치러야합니다.

편지를 열면서 요한은 삼위 일체 하나님에 대해 가장 명확하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그의 서신이 거룩하다는 것을 분명히 말해주는 것입니다. 먼저, 성부 하나님에 대해서 어떻게 소개하고 있습니까?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시고 장차 오실 분”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영원 전부터 계시는 분입니다. 지금도 살아계십니다. 그리고 세상을 새롭게 하시기 위해 오실 것입니다. 성부 하나님은 그 사랑하는 아들을 육신을 입고 우리 곁으로 보내심으로써 가장 실제적으로 우리 곁에 오셨습니다. 그리스도는 죽임을 당하셨지만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그 주님은 지금도 살아계십니다. 더 중요한 것은 장차 오실 분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오실 그리스도와 달리 성부 하나님의 오심은 만물을 새롭게 하기 위해 오시는 것입니다. 교회의 소망이 바로 그것입니다. 즉,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만물을 새롭게 하기 위해서 다시 오신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하나님의 보좌 앞에 있는 일곱 영”입니다. 성령에 대해서 이렇게 표현하는 것은 성령의 신성과 완전성을 강조하기 위해서입니다. 성령은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의 성품과 행하신 일들에 대해서 깨닫게 하십니다. 성령이 아니고서 교회는 결코 신령한 일을 알 수 없습니다. 성령이 돕지 않으시면 교회는 캄캄한 영적 무지에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은 성령을 ‘일곱 등불’이라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령을 의지함으로써 우리는 하나님에 대해서, 하나님이 행하신 일들, 그리고 장차 행하실 일들에 대해서 알게 됩니다.

세 번째는 충성된 증인으로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시고 땅의 임금들의 머리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리스도는 충성된 증인으로 이 땅에 오신 분입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뜻을 전하고 또 이루기 위해 오셨습니다. 그분은 증인이십니다. 증인이란 말은 “자신의 메시지로 인하여 죽임을 당한 자”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시다가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그분은 모든 순교자들의 머리가 되십니다. 그분은 충성된 증인이십니다. 또한 죽은 자들 가운데 먼저 나신 분이라는 말은 사망의 권세를 가장 먼저 정복하신 분이란 뜻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생명이 되십니다. 그리고 우리의 부활이 되십니다. 또, 땅의 임금들의 머리가 되셨다는 것은 그분이 모든 왕들 중에 가장 뛰어난 왕들이라는 뜻입니다. 그분은 교회 안에서 만물을 통치하고 계십니다. 이 짧은 본문 속에 그리스도를 선지자요, 제사장이요, 왕으로 소개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우리곁에 오셔서 하늘 뜻을 전하셨습니다. 그리스도는 우리를 살리기 위해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그리스도는 우리 안에서 살아계시며 다스리고 계십니다. 우리가 이렇게 삼위일체 하나님을 알게 될 때 비로소 은혜와 평강이 우리에게 임하는 것입니다. 성부, 성자, 성령을 아는 것이 은혜와 평강을 누리는 비결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더욱 알려고 하십시오. 성령의 도우심을 의지하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끊임없이 배워가도록 하십시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야말로 요한계시록의 참된 핵심입니다.

특별히 사도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주목하고 있습니다.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의 탁월함을 드러내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왜냐면 예수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사랑하사 그의 피로 우리 죄에서 우리를 해방하시고 그 아버지 하나님을 위하여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신 그에게 영광과 능력이 세세토록 있기를 원하노라. 아멘” 그리스도가 어떤 분입니까? 우리를 사랑하신 분입니다. 자신의 피로 우리 죄값을 지불하시고 죄에서부터 해방하신 분입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를 하나님의 나라로 삼으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를 다스리는 분이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를 하나님의 제사장으로 삼으셨습니다. 제사장이 무엇을 하는 사람입니까? 제사장은 하나님을 섬기는 자입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는 자유롭게 하나님을 섬길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이렇게 섬길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특권인지 모릅니다. 이점에서 로마 카톨릭은 분명 틀렸습니다. 진리를 범하고 있습니다. 왜냐면 하나님께 직접 기도할 수 있는 특권을 빼앗아서 소위 성인들이나 사제들이 강탈하고 말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오직 그리스도의 피를 힘입어 하나님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 외에 다른 이의 도움을 받을 필요도 없고, 받아서도 안 되는 것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을 자유롭게 섬기는 제사장입니다. 오늘날 교회 안에 특정한 사람이 중보의 특권이나 축복기도권을 쥐고 있는 것을 볼 때 참으로 가슴 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또 어떤 분들은 그런 모습을 오히려 원하기도 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아니라 사람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결코 그러지 마십시오. 자유롭게 하나님을 섬기십시오.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담대히 지성소로 나아가십시오. 예배가 위축되거나 답답해지는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다름 아니라 그리스도에 대한 무지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더욱 알면 알수록 참된 예배를 드릴 수가 있습니다.

이제 요한 사도는 요한계시록의 가장 중요한 주제를 선포합니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영광스럽게 오신다는 것입니다. “볼지어다.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각인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터이요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를 인하여 애곡하리니 그러하리라 아멘.”(7절) 사도 요한은 ‘보라’고 외치고 있습니다. 이것은 오늘날 교회가 바라보아야 할 것이 무엇인지 말해주는 것입니다. 교회는 궁극적으로 재림의 소망이 있어야 합니다. 교회는 언제나 다시 오실 그리스도를 대망하는 공동체여야 합니다. 교회는 보아야 합니다. 구름을 타고 오시는 그리스도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다시 오시는 그리스도의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럴 때 세상이 애곡하고 있는 것이 보일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그를 볼 것입니다. 그를 찌른 로마군인도 볼 것입니다. 모든 족속 모든 인생이 한분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애곡하는 날이 올 것입니다. 이것이 교회가 붙잡는 재림의 신앙입니다. 우리는 요한계시록을 통해서 다시 오실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눈이 열려지기를 간절히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에 대해 보증하십니다. “주 하나님이 가라사대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라 하시더라.”(8절) 우리가 보통 책을 보면 역자의 머리말을 읽고나면 잠간 저자의 친필 싸인(signature)을 볼 수 있는 것처럼 이 말씀은 마치 하나님께서 이 책에 머리말에 그렇게 자신의 권위로 이 책이 진실하며 이 책에 기록된 대로 반드시 될 것을 친히 보증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요한계시록에서 ‘알파와 오메가’ ‘이제도 있고 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라는 말이 자주 등장하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창세기를 항상 염두에 두고 요한계시록을 읽어야 하는 이유입니다. 하나님은 태초에 천지를 말씀으로 창조하셨습니다. 이제 하나님은 세말에 천지를 말씀으로 새롭게 하실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창조는 창세기에서 시작되어서 요한계시록에 이르러서 비로소 완성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시작하신 일을 요한계시록에 이르러서 어떻게 완벽하게 마무리 지으시는 지 볼 것입니다. 하나님이 시작하신 일을 마침내 완성하시고 매듭지으시는 장면을 볼 때 우리는 참으로 감탄을 금치 못할 것입니다. 창세기에 천지를 창조하시고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고 하신 분께서 이제 마지막 요한계시록에 이르러서 “다 이루었다”고 선언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창조가 완성될 때의 그 감격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것은 보시기에 심히 좋았던 수준을 훨씬 뛰어넘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영광스럽고도 심히 복된 책을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께 찬송과 영광을 돌립시다. 이 책을 통해서 하나님은 우리의 교회를 새롭게 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이 시대를 바라보는 눈을 열어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이 시대를 분별하는 통찰력과 함께 이 시대 속에서 어떻게 우리의 좌표와 방향과 정체를 분명히 하게 될지에 대해 분명히 알려 주실 것입니다. 이 책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을 더욱 잘 알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더욱 더 사랑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더욱 잘 이해하게 되고 또한 사랑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낙심하지 않고 오히려 기뻐하는 법을 배울 것입니다. 그리고 아무리 절망적인 상황이 우리를 가로막는다 할지라도 반드시 승리하는 삶을 살게 할 것입니다. 이 거룩한 책을 읽는 자와 듣는 자와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가슴에 간직하는 자는 복이 있습니다. 이 축복의 세계에 여러분을 초청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