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계시록에 대한 깊은 이해를 원하시는 모든 형제 자매 그리스도인에게 도움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옛날 제 설교원고를 올립니다.
설교원고에 너무 얽매이지 마시기를 바라고, 자기 설교인 양 베끼지도 말기를 부탁드립니다^^
선교지에 있다보니 한국어로 설교할 기회가 없고,
아프리카 등불선교에 관심 가져주시는 분들에 대한 고마움을 이렇게 공유함으로 표현하고 싶은 마음으로 글을 올립니다.
제 글을 읽는 모든 분들을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요한계시록 강해(2)
그리스도의 영광
본문: 계1:9-20
1:9 나 요한은 너희 형제요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라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의 증거를 인하여 밧모라 하는 섬에 있었더니
1:10 주의 날에 내가 성령에 감동하여 내 뒤에서 나는 나팔 소리 같은 큰 음성을 들으니
1:11 가로되 너 보는 것을 책에 써서 에베소, 서머나, 버가모, 두아디라, 사데, 빌라델비아, 라오디게아 일곱 교회에 보내라 하시기로
1:12 몸을 돌이켜 나더러 말한 음성을 알아보려고 하여 돌이킬 때에 일곱 금 촛대를 보았는데
1:13 촛대 사이에 인자 같은 이가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가슴에 금띠를 띠고
1:14 그 머리와 털의 희기가 흰 양털 같고 눈 같으며 그의 눈은 불꽃같고
1:15 그의 발은 풀무에 단련한 빛난 주석 같고 그의 음성은 많은 물소리와 같으며
1:16 그 오른손에 일곱 별이 있고 그 입에서 좌우에 날선 검이 나오고 그 얼굴은 해가 힘 있게 비취는 것 같더라
1:17 내가 볼 때에 그 발 앞에 엎드러져 죽은 자같이 되매 그가 오른손을 내게 얹고 가라사대 두려워 말라 나는 처음이요 나중이니
1:18 곧 산 자라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 볼지어다 이제 세세토록 살아 있어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노니
1:19 그러므로 네 본 것과 이제 있는 일과 장차 될 일을 기록하라
1:20 네 본 것은 내 오른손에 일곱별의 비밀과 일곱 금 촛대라 일곱별은 일곱 교회의 사자요 일곱 촛대는 일곱 교회니라
오늘 우리는 사도 요한이 본 첫 번째 비전에 대해 살펴볼 것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영광에 대한 비전입니다. 이 비전을 품고 살아가기를 바랍니다. 거룩한 환상, 혹은 꿈, 예언, 계시, 혹은 묵시 등 다양하게 번역되어지는 이 단어는 우리가 무엇으로 부르던 간에 하나님이 그려주시는 선명한 그림입니다. 이 그림이 오늘 우리 마음속에도 그려지기를 바랍니다. 지금 우리에게 가장 시급하고 필요한 것이 무엇일까요? 돈? 명예? 결혼? 취직? 야망의 실현? 성공과 출세? 아닙니다. 바로 비전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지식입니다. 하나님의 큰 일에 대한 그림입니다.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그림들을 가슴에 품고 세상을 사는 일입니다. 지금 세상은 극도의 혼돈과 무질서로 불안감에 떨고 있습니다. 교회 역시 마찬가집니다. 하나님이 제공하시는 비전을 상실한 채 방황하는 교회나 개인이 얼마나 많습니까? 비전의 중요성에 대해 성경은 거듭 강조하고 있습니다. “묵시가 없으면 백성이 방자히 행하거니와 율법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느니라.”(잠29:18) “이스라엘 자손들아 들으라.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 여호와께서 이 땅 거민(居民)과 쟁변하시나니 이 땅에는 진실도 없고 인내도 없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도 없고 오직 저주와 사위와 살인과 투절과 간음뿐이요 강포하여 피가 피를 뒤대임이라”(호4:1,2)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호4:6) 비전이란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그림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지식입니다. 여러분 가슴속에 하나님이 그려주신 비전이 있습니까? 사람은 무엇인가 항상 가슴에 그려보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지금 무엇을 그리면서 살고 있습니까? 우리는 이 계시의 말씀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이 말씀으로 우리는 비전을 품고 세상을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끝까지 인내심을 품고 이 계시의 말씀을 따라 나와 함께 여정을 떠나봅시다.
먼저, 사도 요한은 자신의 정체를 분명히 밝힘으로써 시작합니다.
“나 요한은 너희 형제요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라”(9절)고 했습니다. 여기서 “나 요한은...” 요한계시록이 왜 신구약 정경목록에 들어가게 되었는지 충분히 설명하고 있습니다. 구약정경은 오직 선지자들로 부름 받은 자들의 저작만을 포함합니다. 그리고 신약정경은 부활의 증인, 즉 사도로 부름 받거나 사도의 동역자나 그 계열로 인정되는 문헌을 포함합니다. 반면 위경이라는 단어도 있는데 이것은 저작권을 위반한 문헌을 가리킵니다. 예를 들어, 베드로 묵시록이나 바울 묵시록과 같은 책들입니다. 아무튼 우리는 이 요한계시록이 사도 요한의 손을 통해 기록되어진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임을 믿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 삶의 잣대가 되며 규범이자 기준이 됩니다. 사도 요한은 자신을 가리켜서 “너희 형제”라고 소개합니다. 이 계시록이 정경이 되는 것은 초대교회의 많은 교회들이 그렇게 인정했기 때문입니다. 거룩한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를 인정했습니다. 물론 오랜 세월이 지나서 이 서신이 전달되지 못한 지역에서는 이 서신의 권위에 대해 의심을 품긴 했지만 초대교회에서 광범위하게 이 서신이 다른 책들, 예를 들어 클레멘트의 서신과 같은 몇몇 경건서신들과는 전혀 다른 권위로 인정하고 있었던 것은 틀림없습니다. 오늘 우리는 이러한 전통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여타 다른 몇몇 묵시록과 혼동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아무튼 이 오래된 책이 오늘까지 이토록 흠 없이 보존되어 우리 손에 전달되어 왔다는 사실은 하나님의 섭리가 아니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기적 중의 기적입니다. 계속해서 사도 요한은 자신을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라”고 말합니다. 이 말씀만큼 저자의 사도적 권위를 분명하게 드러내주는 구절은 없을 것입니다. 사도로서 요한은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로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산헤드린 공회에서 요한을 비롯한 사도들이 예수님 대문에 채찍을 맞고 협박을 받는 일이 있었습니다. 그때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니라.”(행5:41)고 했습니다. 신약성경을 읽어보면 사도들의 한결같은 고백이 예수 그리스도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예수님이 겪으신 고난을 겪어야만 함을 인정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정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고 했습니다.(행14:22)
오늘날은 어떻습니까? 더럽고, 어렵고, 힘든 일을 기피하는 시대입니다. 편하게 살면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큰 착각입니다. 주님과 함께 고생하는 일이 없이 주님의 나라에 들어가서 영광을 누리는 것은 없습니다. 형제들이여, 사서라도 고생을 하십시오. 더럽고 어렵고 힘든 일을 피하지 말기 바랍니다. 자존심 다 구기더라도 끌어안기를 바랍니다. 그냥 고생하지 말고 가능하면 복음과 함께 고생하십시오. 지금 한국교회가 전 세계에 파송한 선교사들이 세계에서 2위라고 합니다. 미국이 2만 명 가량 되고, 한국은 9천명, 영국이 8천 명 가량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가장 힘들고 어렵고 더러운 땅에서 사역하는 선교사들은 단연 한국교회가 1위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군대생활을 포함하여 더럽고 힘들고 어려운 생활을 해보면서 온갖 자존심을 다 구겨보았기 때문에 산간벽촌 오지에 가서도 잘 적응합니다. 왜죠? 고생해보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물론 도시선교 자체를 부정적으로 보면 안 됩니다. 21세기에 들어와서 도시선교는 전략적으로 중요합니다. 어쩌면 세계복음화는 도시복음화에 달려 있다고 하겠습니다. 제가 말하려는 것은 고난에 대한 태도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고난을 통해 준비됩니다. 그러나 지금 한국은 좋아할 때가 아닙니다. 한국의 선교사 파송률은 90년대 들어서 현저하게 줄어들고 있는 추세입니다. 이 시대의 젊은이들은 고생하는 것을 싫어합니다. 적당하게 누리다가 천국도 누리고 싶어합니다. 나는 여러분에게 묻고 싶습니다. 지금이라도 주님과 함께 고생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그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 기꺼이 주님의 환난에 동참할 각오가 되어 있습니까? 그리고 주님과 함께 견디고 참겠습니까? 바울이 기도한 것처럼 기쁨으로 견디고 오래 참음에 이르는 자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 다음, 사도 요한은 자신이 계시를 받게 된 배경에 대해 설명합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의 증거를 인하여 밧모라 하는 섬에 있었더니 주의 날에 내가 성령에 감동하여 내 뒤에서 나는 나팔소리 같은 큰 음성을 들으니”(9,10절)라고 했습니다. 요한이 계시를 받은 장소는 밧모섬입니다. 이곳은 그리스 밀레도에서 서쪽으로 약 60km 떨어진 작은 섬으로서 가로 세로 16km, 9km 규모의 불모지입니다. 이 섬은 1세기 당시 주로 정치범들이 유배된 곳으로서 백발이 성성한 사도 요한은 이곳에서 소수의 다른 정치범들과 함께 광산에서 막노동을 하면서 물고기들을 잡아 연명했을 것입니다. 지금은 유명한 관광지가 되어 이곳에는 사도요한 기념교회와 계시록을 기록한 계시교회가 있다고 합니다. 여러분들이 나를 성지순례를 보내주면 갔다와서 멋진 그림 보여주겠습니다. 요한이 이 섬으로 유배를 떠나게 된 때는 도미티안 황제가 죽기 약 2년 전, 주후 약 95년경이었던 것으로 보는 학자들이 많습니다. 도미티안 황제는 아버지 베스파시안 황제와 형 디도 황제에 대해 늘 열등감을 안고 있었는데 황제로 즉위하자 그러한 열등감이 자신을 숭배하라는 강요로 이어졌습니다. 계2장의 버가모 교회의 안디바가 이 황제숭배에 반대해서 이미 순교했고, 사도 요한도 황제숭배를 반대하다가 순교할 뻔 하다가 이 섬으로 유배되었다고 합니다. 전설에 의하면 도미티안 황제가 끓는 기름가마솥에 사도요한을 집어던지도록 했는데 죽지 않으니까 이 섬으로 유배 보내었다고 합니다. 요한이 이 섬에 갇히게 된 것은 “하나님의 말씀, 즉 예수의 증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증거입니다. 예수님이 어떤 분인가에 대한 증언이 곧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 말씀을 가지고 있습니까? 다시 말해서 예수 그리스도가 어떤 분인지 진정 알고 있습니까?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질문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느냐입니다. 여러분은 예수가 구세주요 왕중왕이며 인류를 죄에서 구원하실 그리스도라는 사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합니까? 그것을 믿습니까? 그것을 진정 믿는다면 여러분의 가슴은 흥분으로 가득 찰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에 대한 증언 때문에 기꺼이 고난 받고 고생하는 것을 쌍수 들고 환영하려 들것입니다. 나는 여러분이 예수가 주요 그리스도라는 사실에 대해 새롭게 생각해보기를 권합니다. 이 간단한 선언은 우리 삶을 송두리째 흔들어놓기에 충분한 선언입니다. 이 선언은 우리로 하여금 온갖 고난과 고생 속에서도 기뻐하게 만들어주기에 충분합니다.
그리고 사도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를 새롭게 만나게 되었다고 진술합니다.(12~20절)
우리는 지금 예수 그리스도를 새롭게 경험해야 합니다. 그것이 혼란기를 헤쳐 가는 그리스도인의 살길입니다. 주님이 어떤 분인가 알고 있다고 전제하지 말고, 주님이 어떤 분이신 지 개인적으로 그리고 교회적으로 새롭게 깨달아야 합니다. 보세요. 사도 요한은 3년이나 예수님과 함께 먹고 마셨으며 함께 잠을 자고 공동체 생활을 하면서 누구보다 예수님을 가까이서 모셔본 사도였습니다. 그는 자신을 예수의 가슴에 기대었던 “사랑받는 제자”라고 소개할 정도로 예수님과의 각별한 사랑을 나누었던 사람입니다. 또한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예루살렘에서부터 로마와 에베소에 걸쳐서 사도 중에서 가장 최 장수를 누리면서 열정적으로 복음을 전했던 사도였습니다. 그러한 사도요한이 복음 전파 때문에 정치범들이나 갇히게 되는 외딴 섬에 유배된 것은 그에게는 무엇을 의미했을까요? 자신의 사역이 여기서 끝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가졌을 지도 모릅니다. 또한 노년의 삶을 이제는 주님 나라에 들어갈 준비를 해야겠다고 생각하면서 자신의 영원한 영광을 그려보면서 기도에 열중했을런지도 모릅니다. 실제로 밧모섬에 지금도 있는 어느 동굴 안에는 무릎이 만들어 놓은 흔적이 있다고 할 정도로 사도 요한은 열정적으로 기도에 전념했을 것입니다. 교회를 향한 염려로 기도하고 있었을 것이고, 죽음 이후에 주어질 영광스런 하늘나라를 그려보면서 기도했을 것입니다. 그를 위해 기도하던 교회는 또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이제는 교회도 끝이란 말인가! 마지막 사도가 붙잡혀 갔으니 교회 역시 힘을 잃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때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에게 새롭게 나타나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에게 예수님은 자신에 대해서 새롭게 계시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도 요한에게 자신에 대해 어떻게 계시하여 주셨습니까? 그것을 세 가지로 정리해보도록 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 생각해보도록 합니다.
첫째, 승리자이신 그리스도입니다(11절)
자, 당시 교회가 처한 상황은 어떤 것이었습니까? 앞서 언급했듯이, 교회는 위기에 처하고 있었습니다. 마지막 사도가 붙잡혔습니다. 교회는 여전히 극심한 핍박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여전히 시체들의 썩는 냄새가 코를 진동하는 캄캄한 지하 동굴을 이곳저곳 헤매면서 예배처소를 옮겨다녀야 했습니다. 상황은 전혀 나아지지 않고 오히려 원형경기장에 끌려가서 맹수의 밥이 되는 신자들이 하나 둘씩 늘어가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교회의 미래를 생각할 때 실로 걱정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교회는 한결같이 위기감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이제 그리스도의 교회는 끝인가? 그리고 교회를 핍박하고 짓밟는 저 복음의 원수들은 무엇을 말해주고 있는가? 교회는 교회가 처한 상황에 대해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가? 이러한 질문들이 교회를 고민하게 만들었을 것입니다. 1세기 교회의 입장에서 보십시오. 분명히 절망적인 상황입니다. 원수 마귀는 교회를 마구 유린하는 것 같고 교회를 향하여 조소와 경멸과 야유를 계속 던지는 것 같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요한에게 나타나셔서 자신을 ‘승리자’로 계시하여 주십니다. 11절을 보세요. “너 보는 것을 책에 써서 에베소, 서머나, 버가모, 두아디라, 사데, 빌라델비아, 라오디게아 일곱 교회에 보내라” 이 말투는 전투중의 지휘관이 부하들에게 내리는 명령과도 같습니다. 요즘 TV광고에 전황이 불리하다고 쩔쩔매는 부하들을 향해 메가페스 장군이 나타나서 “다 받아 주거라”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습니까? 자, 이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무엇을 말하고 있습니까?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는 아직도 살아 계시며, 지금도 역사 속에서 통치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교회는 실패와 절망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미 영광스러운 승리의 반열에 올라와 있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역사의 배후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교회가 느끼고 생각하는 것과는 전혀 다르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교회는 지금 그것을 보아야 합니다!! 아니, 삶에 지쳐 힘들어하는 여러분들이 ‘어쩌면 좋을까’ 당황하는 중에 ‘다 받아주거라’는 식으로 명령하는 주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낙심하지 말고 계속 인내해야 합니다!! 이것이 주님의 메시지입니다. 지상교회는 영광스러운 주님의 승리자되심을 알아야 하고 또 똑똑히 보아야 합니다!!
본문에 언급된 일곱 교회는 실제로 역사 속에서 존재했던 교회들입니다. 본문에 언급된 일곱 교회는 우편배달부가 편지를 전달하기 위해 가는 길을 따라서 위치한 교회였습니다. 즉, 이 계시의 말씀은 회람용으로 기록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에 대한 계시의 말씀이 모든 교회에 회람되어지기를 원하셨습니다. 이 계시의 말씀은 그 일곱 교회에 보내어진 말씀이면서 동시에 오고 오는 모든 세대의 교회들에게도 주어진 말씀입니다. 일곱은 완전수입니다. 본문에 언급된 일곱 교회는 오고 오는 모든 세대의 지상교회의 표본입니다.
자, 승리의 비결은 무엇입니까? 여전히 마귀의 비웃음과 야유 속에서 살고 있는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이신 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스도는 승리자이십니다. 지상교회는 여전히 실패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역사의 배후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고난 받는 교회에 보여주시는 그리스도를 바라보십시오. 교회는 실패하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그리스도는 여전히 승리자로 역사 속에서, 역사 배후에서 통치하고 계십니다. 지상교회가 그리스도를 바로 이해할 때에 비로소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승리에 동참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기는 자로서 세상에서 왕노릇하며 살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삶은 여전히 실패하는 것처럼 보이고 느껴지든지 간에 우리의 구주이신 그리스도는 승리자이십니다. “내가 세상을 이겼다”고 선언하신 주님께서 하늘에 오르셔서 우리를 격려하고 계십니다. “너희가 세상에서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16:33) 승리하신 그리스도를 바라보십시오. 그리스도를 믿으십시오! 그러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나도 승리자의 반열에 들어갈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이 얼마나 단순하면서도 강력한 진리입니까? 나는 실패한 삶을 살지라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승리할 수 있다니! 이것이 복음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둘째, 영광스런 그리스도입니다(12~16절)
그리스도는 자신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요한에게 계시하고 계십니다. 12절에서 16절까지 묘사된 내용은 그리스도의 무한한 영광을 신비스럽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사도 요한이 본 것이 요한 자신에게 가히 충격적이란 사실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즉, 주님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고 자부하던 그에게 그리스도의 영광은 충격적으로 다가왔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영광을 육안으로 볼 수 없지만 그러나 본문에 비추어서 그 영광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알 수 있습니다. 그것만으로도 우리는 흥분하지 않을 수 없다. 왜냐면 그리스도를 친히 만나볼 날이 점점 가까워 오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 요한은 이렇게 설교한 적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 것은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내심이 되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은 아는 것은 그의 계신 그대로 볼 것을 인함이니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요일3:2,3) 사도 바울 역시 이러한 동일한 소망을 피력했습니다. “우리가 이제는 거울로 보는 것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이제는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고전13:12)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의 구세주를 영광 가운데서, 그 영광스러운 모습을 친히 뵐 날이 점점 가까이 다가오고 있다는 사실을 믿습니까? 이 소망이 있습니까? 이 소망이 없이 참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여러분이 거듭난 참 그리스도인이라면 다시 이 소망을 굳게 붙잡기를 바랍니다.
사도 요한은 자신에게 들린 큰 나팔 소리 같은 음성의 주인공을 알아보려고 돌이켰습니다. 뒤를 돌아보는 순간 그는 두 가지를 보았습니다. 그는 일곱 촛대를 보았고, 일곱 촛대 사이에 거닐고 계시는 그리스도를 보았습니다. 아마도 이 순간 요한은 무릎 꿇어 핍박 속에 힘들어하고 있는 교회들을 향해 기도하고 있었을 겁니다. 그런데 나팔소리같은 큰 음성이 들린 겁니다. 놀라 뒤를 돌아본 요한이 본 것은 무엇입니까? 찬란한 일곱 촛대와 빛나는 옷을 입은 인자 같은 이를 보았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일곱 촛대는 일곱 교회를, 인자 같은 이는 다니엘서에서 예언한 메시야를 가리킵니다. 사도 요한은 이 환상 속에서 새롭게 깨달은 것이 있을 겁니다. 무엇보다 자신이 사랑하고 섬겨왔던 그리스도가 이토록 영광스러운 분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 깨달음은 지금도 성령의 조명하심을 받는 모든 영혼 안에 일어나고 있는 가장 위대한 사건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영광을 깨닫는 그 영혼은 승리하게 됩니다.
자, 그러면 사도 요한이 본 그리스도의 영광을 자세히 들여다봅시다.
첫째, 촛대 사이에 계신다는 것은 교회 가운데 함께 계신다는 뜻입니다. 여전히 문제 많고, 연약한 지상교회라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섬기는 한 그 안에 주님이 영광스럽게 임재하여 계십니다. 여러분, 이것을 믿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그 교회는 수많은 약점을 지녔음에도 불구하고 영광스러운 교회일 수밖에 없습니다. 영광의 주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마18:20; 28:20)
둘째, 인자 같은 이는 다니엘서에 나오는 그 인자로서, 하늘나라를 상속할 메시아를 뜻합니다.(단7장)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예수님은 구약의 선지자들이 예고해왔고, 또 수많은 백성들이 고대해왔던 그 메시아이십니다.
셋째, 발에 끌리는 옷을 입었고 가슴에 금띠를 띠었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신분이 왕같은 제사장과 같으며, 매우 존귀한 신분을 가지고 있음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매우 위엄 있으시며 존귀하신 우리의 대제사장으로서 우리의 죄와 허물과 연약함을 이해하고 계시며 우리를 위해 끊임없이 중보하시는 분이십니다. 당신의 피로 우리를 사서 하나님 아버지를 위하여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신 분입니다.
넷째, 그 머리와 털의 희기가 흰 양털 같고 눈 같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순결과 거룩을 말합니다. 그분에게는 죄가 결코 없으시며 더러움이 조금도 가까이 하지 못하는 분이시며 위엄과 지혜가 한이 없으신 분이십니다.
다섯째, 그의 눈이 불꽃같다는 것은 그리스도는 심판하시기 위해 모든 심령과 영적 세계를 꿰뚫어보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모르시는 것이 없으시며 모든 의와 악을 구별하시는 심판주가 되십니다. 그리스도는 모든 것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여섯째, 그의 발은 풀무에 단련한 빛난 주석 같다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그의 모든 원수들을 짓밟으실 권능을 가졌음을 말합니다. 시편기자는 능력의 주님에 대해 이렇게 극적으로 묘사했습니다. “어찌하여 열방이 분노하며 민족들이 허사를 경영하는고.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원들이 서로 꾀하여 여호와와 그 기름 받은 자를 대적하며 우리가 그 맨 것을 끊고 그 결박을 벗어버리자 하도다. 하늘에 계신 자가 웃으심이여 주께서 저희를 비웃으시리로다.”(시2:1-4) 그 권능의 발로 모든 대적들을 짓밟으실 그 큰 날에 누가 피할 수 있습니까? 그의 심판을 피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일곱째, 그의 음성은 많은 물소리와 같다는 것은 그의 말씀이 매우 위엄 있다는 뜻입니다. 혼돈과 무질서로 가득 찬 공허가 그의 잔잔한 음성에 질서와 조화로 가득 찬 세상으로 바뀌었고, 사납게 뛰놀던 풍랑이 그 음성 앞에 잔잔해졌습니다. 옛날 노아의 홍수때와 같이 그의 음성은 권능이 있습니다.
여덟째, 그 오른손에 일곱별이 있다는 것은 교회의 사자들을 주장하고 계시는 당신의 주권을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교회의 사자들은 누군가요? 목회자들인가요? 아닙니다. 교회를 섬기는 충성된 모든 성도들을 가리킵니다. 그들은 주님이 붙들고 계십니다. 주님의 권능의 주권에 속해 있는 자들입니다. 누가 주님의 오른손에서 그들을 빼앗아갈까요? 예수님은 공생애 때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저희를 알며 저희는 나를 따르느니라.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저희를 주신 내 아버지는 만유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요10:27-29) 이보다 더 우리를 안전하게 하시는 말씀이 어디 있단 말입니까!
아홉째, 그 입에서 좌우에 날선 검이 나온다는 것은 그 말씀이 권세가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마지막 열째, 그 얼굴은 해가 힘 있게 비취는 것 같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신성과 생명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 빛나는 영광은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구름과 손수건으로 가리어졌지만 베드로, 야고보, 요한과 같은 신약의 사도들에게는 열려졌습니다. 오늘도 믿음으로 그 찬란한 영광을 바라보는 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돌에 맞아 죽어가던 스데반에게 영광의 주님은 얼굴을 숨기지 않으시고 보좌에서 일어 나셔셔 보여주신 것처럼 오늘도 환난과 핍박 속에서 그리스도의 영광은 더욱 찬란하게 빛날 것입니다.
본문은 두 가지 큰 영광에 대해 말해주고 있습니다. 이것은 요한계시록 전체가 말하고 있는 메시지입니다. 첫째는 교회의 영광입니다. 교회가 여전히 실패하고 넘어지고 배교자들이 나오지만 그래도 주님 앞에서 일곱 금촛대와 같이 영광스러운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여러 가지 사상 속에서 힘들어하고 방황하는 골로새 교인들을 향하여 ‘신실한 성도’들이라고 불렀고, 늘 싸우고 분쟁하던 고린도 교회를 향하여서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거룩하여 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입은 자들’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교회의 영광스러움을 알고 있습니까? 이 교회가 여전히 허물 많고 인간적인 냄새가 많이 나지만 그래도 주님이 함께 하시며, 주님이 사랑하시며, 주님이 자신의 피 값으로 사실 정도로 애정이 묻어나는 영광스러운 교회임을 알기 바랍니다. 이것은 교회가 잘못해도 무조건 수용하고 넘어가자는 말이 결코 아닙니다. 적어도 우리는 가장 신실하지 못한 교회를 보면서도 여전히 그리스도 예수의 유일성을 믿고 신앙고백하고 섬기는 한 교회의 영광스러움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으로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의 영광을 인식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움에 대해 배워야 하고, 또 계속 알아가야만 합니다. 그리스도의 영광을 아는 지식이 우리를 얼마나 자유롭게 하며, 얼마나 행복하게 하는지 이 지식이 없는 사람은 이해하지 못합니다. 여러분은 구세주 예수님을 알고 계십니까? 그분을 믿습니까? 그분이 여러분을 위해 하늘 영광을 버리고 이 땅에 오셔서 온갖 고초와 고통을 다 당하셨음을 아십니까? 좋습니다. 그러면 그분이 얼마나 영광스러운지를 알고 있습니까? 그분의 영광에 대해 아는 것이 무엇입니까? 얼마나 알고 있습니까? 그리스도의 영광을 아는 지식이 여러분 마음속에 얼마나 있습니까? 오늘 본문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 드려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영광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합니다. 그리스도의 영광은 너무나 충격적이고 놀라운 것이어서 그 영광을 일단 만 분의 일이라도 아는 사람은 사도 바울과 같이 이렇게 고백하지 않을 수 없을 겁니다.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럽지 아니하고 오직 전과 같이 이제도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나니 그런즉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빌1:20,21)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빌3:7,8)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움을 묵상하는 것만큼 우리 영혼에 즐거움을 주는 다른 일은 없습니다. 혼돈과 불안감, 두려움과 외로움, 소외감으로 가득 찬 세상 속에서 우리 영혼의 즐거움이 그리스도의 영광을 아는 지식에 있지 않다면 우리는 어쩌면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아닌지도 모릅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그리스도의 무궁한 영광을 바라봅시다. 그 영광은 실로 엄청나며 충격적입니다. 그 영광을 바라보는 것이 황홀함을 넘어서 육신의 모든 힘을 빼앗아 갈 만큼 충격적입니다. 자, 오늘 본문을 봅시다. 그리스도의 영광을 본 사도 요한이 어떤 반응을 보였습니까? 17절에, “내가 볼 때에 그 발 앞에 엎드러져 죽은 자 같이 되매...” 그렇습니다. “엎드러져 죽은 자 같이 되매...” 이것이 그리스도의 영광을 진정으로 이해하는 자가 나타낼 반응입니다. 그리스도의 영광을 조금이라도 이해하는 자는 자신의 초라함과 더러움에 견디지 못하여 죽음을 경험합니다. 자신의 죽은 것 같음을 느낍니다. 동일한 경험을 이사야 선지자가 했습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영광을 본 선지자 이사야는 이렇게 절규했습니다.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사6:5) 사도 요한이 본 것과 동일한 그리스도의 영광을 구약의 다니엘 선지자도 보았습니다. 다니엘 선지자 역시 힛데겔 강가에서 그리스도의 영광을 보고 나서 어떻게 되었는지를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이 큰 이상을 볼 떄에 내 몸에 힘이 빠졌고 나의 아름다운 빛이 변하여 썩은 듯 하였고 나의 힘이 다 없어졌으나 내가 그 말소리를 들었는데 그 말소리를 들을 때에 내가 얼굴을 땅에 대고 깊이 잠들었었느니라.”(단10:8,9) 신약의 베드로, 요한, 야고보 사도 역시 변화산에서 예수님의 변화되신 용모를 보고 “심히 두려워” 떨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움에 대해서 우리가 교리적으로 이러쿵저러쿵 말할 수 있을는지 모르지만 참으로 그리스도의 영광을 아는 지식을 가진 사람은 자신이 마치 ‘죽은 자와 같은 존재’임을 알 것입니다. 참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인생은 세상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무한한 행복감을 느낄 것입니다. 이렇게 그리스도의 영광을 아는 것이 우리의 힘입니다. 그래서 골로새 교회를 위해 사도 바울은 “그 영광의 힘을 좇아 모든 능력으로 능하게 하시며”라고 기도했던 것입니다.(골1:11) 우리도 그렇게 고백하며 또 그렇게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움을 아는 지식이 나의 모든 능력이 되게 하소서!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영광을 아는 것이 교회의 힘입니다. 어째서 그렇습니까? 우리가 세상을 살면서 ‘아이고, 죽겠다, 죽겠다’고 엄살을 피웁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영광을 바라보는 순간 우리는 이미 세상에 대해 죽은 자가 됩니다. 그런 다음 우리는 세상에서 세상이 감당치 못할 믿음의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승리하는 삶의 진정한 비결이자 원동력입니다. 그리스도의 영광을 바라보고서 요한이 엎드러져 죽은 자 같이 되었습니다. 요한이 경험한 것은 여전히 실패하고 죽는다고 엄살 피우는 연약한 지상교회가 경험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영광을 바라보고 죽는 자는 그리스도의 능력과 함께 다시 살게 됩니다. 그래서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는 생명력으로 죽음과 죄의 바이러스로 가득 찬 세상을 통치하며 한껏 비웃으며 살게 됩니다. 사도 바울이 죽음을 향하여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고 죽음을 향해 야유를 퍼부은 것처럼 그렇게 권세 있는 삶을 살게 됩니다. 이것이 요한계시록이 전하는 승리하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묘사입니다.
세 번째로, 교회의 머리되신 그리스도입니다.(17~20절)
이제 주님은 교회의 머리로 등장하십니다. 그리스도의 영광을 바라보고 두려워 떠는 진정한 영혼을 만져주시는 분이십니다. “그가 오른손을 내게 얹고” 주님의 권능의 손으로 교회를 일으키십니다. 그리고 두려워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동일하신 주님께서 지금도 오늘날의 교회를 향하여 말씀하십니다. “두려워 말라 나는 처음이요 나중이니 곧 산 자라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 예수님도 예전에 죽었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이 고난에 두려워 떨고 있는 교회를 향하여 하시는 말씀이 무엇입니까? “그러므로 죽음 앞에 두려워 떠는 자들이여, 두려워하지 말라. 나 예수도 예전에 죽음을 경험하였다.” 우리 주님이 먼저 죽임을 당하셨다는 사실이 고난 받는 모든 교회에 주시는 위로의 근본입니다. 가장 먼저 죽음과 고난을 다 겪으신 주님께서 ‘죽겠다’고 엄살을 피고, ‘죽음’ 앞에 겁을 내는 모든 교회의 성도들을 향하여 격려하십니다. “나도 예전에 죽었었다. 그러나 보라. 지금 나는 살아있다. 세세토록 살아 있다. 영원토록 살아서 사망과 음부를 심판하는 권세를 가지고 있다”고 선언하십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선언인가요?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인류 역사상 이렇게 위대한 선언을 한 위인이나 사상가나 종교지도자들이 있었습니까?
부활의 주님, 지금도 살아 계셔서 통치하시는 주님은 요한에게 기록하라고 명령하십니다. “네 본 것과 이제 있는 일과 장차 될 일을 기록하라” 요한계시록은 세 가지 본 것을 증거합니다. 사도 요한이 본 것과, 있는 일과, 장차 될 일입니다. 이것은 각기 무엇을 의미합니까? 사도 요한이 본 것은 무엇입니까? 20절에 주님은 설명하십니다. “네 본 것은 내 오른손에 일곱 별의 비밀과 일곱 금 촛대라 일곱 별은 일곱 교회의 사자요 일곱 촛대는 일곱 교회니라” 사도 요한이 본 것이 무엇입니까? 주님의 오른손에 쥐어져 있는 일곱별과 일곱 금 촛대입니다. 사도 요한이 가장 먼저 기록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종들과 교회가 그리스도의 주권 안에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의 중심교리는 교회론(敎會論)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계시록의 말씀은 가장 먼저 교회에 대해 바르게 이해하게 도와줍니다. 주님은 교회의 머리가 되시며, 교회와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주권 안에 놓여있다는 사실입니다. 일견 넘어지고 실패하는 것처럼 보이는 교회라 할지라도 사실상 살아 계시는 주님의 주권 안에 있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발견해보십시오.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법을 배워보십시오. 교회를 향한 인본적이고 인간적인 시각을 던져 버리고 교회를 통치하고 계시고 교회의 운명이 주님의 권능의 손안에 있음을 믿으십시오. 이것은 교회 안에 있는 우리가 생각해야 할 부분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손안에 있습니다. 주님의 주권을 적극 인정하고 나아갑시다. 이것이 세상을 이기는 믿음의 비밀입니다.
그러면 이제 있는 일과 장차 될 일은 어떤 것입니까? 그것은 우리가 앞으로 계시록을 계속 살펴보면서 배우게 될 것입니다. 간단하게 말하면, 이제 있는 일과 장차 될 일이란, 교회가 당하는 핍박과 같은 그러한 상황들의 진정한 실체, 영적 세력들의 움직임에 대한 생생한 청사진, 즉, 역사 배후에 일어나고 있는 악한 영들의 정체와 그들의 운명에 대한 메시지로서 요한계시록의 중요한 부분입니다. 지금의 교회를 핍박하는 진정한 악의 세력과 그들의 운명, 그리고 핍박 속에 있는 교회의 영광스러운 정체와 교회가 맞이할 운명에 대한 소식입니다. 요한계시록은 이와 같이 우리에게 교회의 보이지 않는 영광과 현재 되어지는 영적 전투의 실체, 그리고 교회가 얻게 될 영광스러운 미래에 대해 말해주고 있습니다. 이 얼마나 신나는 모험입니까? 자, 한번 잘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이미 승리가 예정된 대로 싸움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안다면 얼마나 싱겁겠습니까? 그렇게 계시록의 말씀은 우리를 복잡하게 하고 힘들게 하는 많은 대적들을 싱겁게 보도록 만들어 줄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지금 우리는 극도의 혼돈과 두려움 속에서 세상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럴 때 우리가 알아야 할 기본적인 복음이 있습니다. 첫째, 우리의 머리되시는 그리스도의 영광과 둘째,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영광입니다. 그리고 셋째, 우리의 정체성을 다시 확인해야 합니다. 넷째, 우리가 반드시 거쳐야 할 운명이 어떤 것인지 알아야 합니다. 반드시 승리하지 않으면 안 될, 승리하도록 작정되어진 싸움, 그러나 피 튀기게 싸워야 하고, 그러한 혹독한 싸움터 속에서 견디도록 작정된 우리의 삶의 청사진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우리의 힘은 그분의 영광을 아는데서 나오는 줄 알아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그분을 참으로 아는 지식이 우리의 참 능력의 원천입니다. 그분을 아는 것만큼 우리는 강력해질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은 그분의 영광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부디 주님의 영광을 더욱 알아가기 바랍니다. 그 영광을 아는 것이 그리스도인들의 영적 힘입니다. 그 영광의 힘을 좇아 모든 능력으로 능하게 하여 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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