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계시록 강해(3)
에베소 교회: 처음 사랑을 잃음
본문:계2:1~7
2:1 에베소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오른 손에 일곱 별을 붙잡고 일곱 금 촛대 사이에 다니시는 이가 가라사대
2:2 내가 네 행위와 수고와 네 인내를 알고 또 악한 자들을 용납지 아니한 것과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 거짓된 것을 네가 드러낸 것과
2:3 또 네가 참고 내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 게으르지 아니한 것을 아노라
2:4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2:5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치 아니하면 내가 네게 임하여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2:6 오직 네게 이것이 있으니 네가 니골라 당의 행위를 미워하는도다 나도 이것을 미워하노라
2:7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과실을 주어 먹게 하리라
오늘은 예수님께서 교회를 어떻게 바라보고 계시는 지 살펴보겠습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자기들이 다니는 교회에 대해 나름대로 평가를 내리고 있습니다. 너무 사랑이 없다든지, 혹은 진부하다든지, 혹은 지나치게 자유스럽다든지 혹은 이런 저란 말들을 못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어떤 견해도 주 예수님의 견해보다 더 중요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견해를 들어보아야 합니다.
오늘부터 우리는 일곱 차례에 걸쳐 교회를 바라보시는 주 예수님의 시각을 살펴보면서 예수님이 원하시고 찾으시는 진정하고도 건강한 교회상이 어떤 것인지에 대해서 그려보게 될 것입니다. 이런 작업은 저와 여러분이 이 공동체, 그리고 어디서 어떤 교회를 섬기게 될지 모르겠지만 주님의 관점과 마음으로 교회를 섬기게 하는 일에 매우 중요한 나침반을 제공해줄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왜냐면 앞으로도 살펴보게 될 것이지만 사람들이 교회를 바라보는 관점과 주님께서 바라보시는 관점과는 거의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일단 내가 교회를 바라보고 생각하는 것이 십중팔구 틀린 것이라고 생각하고 교회를 바라보는 데 성급함을 버리고 마음을 가다듬어서 주님의 성령께서 각 교회를 향해 무엇이라고 말씀하시는 지를 진지하게 들어야 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교회를 향한 주님의 음4성은 어떻게 듣게 될까요? 교회를 향해 기도할 때 듣습니다. 교회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중보할 때 그 마음속에 성령이 말씀해주십니다. 여러분은 교회를 사랑하십니까? 여러분은 흠 많고 문제 많은 교회를 끌어안고 계십니까? 교회가 나를 제대로 보살피지 않는다고 언제까지나 투정부리지 마십시오.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발로 차버리지 마십시오. 존 칼빈이 말한 대로 교회는 여러분의 어머니입니다. 어머니가 마음에 안 든다고 어머니를 내쫓으면 망하듯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문제 많은 교회를 위해 기도하십시오. 그러면 성령이 하시는 음성을 듣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계시록은 모든 교회들을 향해 보편적으로 주시는 말씀과 특별하게 주시는 말씀이 있습니다. 지상 교회들은 저마다 특징이 있고 안고 있는 문제들도 각기 다릅니다. 2장, 3장에서는 각기 다른 특성과 문제들을 안고 있는 교회들을 향해 주님이 적절하게 적용하시는 말씀들입니다. 즉, 계시록의 일반적인 메시지를 특별하게 적용하는 원리를 2, 3장이 보여주고 있는 겁니다. 모든 교회들을 향해 일반적으로 주시는 말씀은 1장에서 이미 살펴보았습니다. ‘본 것’과 ‘이제 있는 일’과 ‘장차 있을 일’에 대한 것입니다. 사도 요한이 본 것은 그리스도의 영광과 교회의 영광이었습니다. 모든 교회는 그것을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모든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말미암아 역사 배후에 그리고 역사 가운데 일어나고 있는 진정한 일을 알아야 합니다. 역사의 실체에 대해서 배워야 합니다. 그래서 계시록은 교회로 하여금 복음에 입각한 참된 역사관을 갖도록 도와줍니다. 그리고 모든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하심과 그로 말미암아 대 심판을 통해 세상나라가 망하고 새 하늘과 새 땅이 열리며 새 예루살렘이 온전히 이루어지게 될 미래에 대해 알아야 합니다. 따라서 계시록이 전하는 일반적인 메시지는 영광의 그리스도, 즉, 기독론, 그리고 교회론, 그리고 역사관과 미래관에 대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교회가 이러한 지식을 가지고 예배드리도록 요청하고 계시며, 승리하는 삶을 살라고 격려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일반적인 메시지를 개인적인 삶과 공동체의 예배에 적용할 때 복이 있다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이 복잡한 시대에 진정한 복을 받기 원한다면 이 계시의 말씀을 잘 읽고, 잘 들으며, 마음에 잘 간직하는 자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오늘은 계시록이 전달된 첫 번째 교회인 에베소 교회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그런데, 왜 하필 일곱 교회뿐인가? 그리고 왜 에베소 교회가 가장 먼저인가? 이에 대해서 간단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계시록에 기록된 일곱 교회는 지금의 터키로 알려진 소아시아에 있습니다. 정치범들이 수용된 밧모섬에서 편지를 보내는 것은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이 계시를 받은 지 2년 후에 도미티안 황제가 죽고 밧모섬에서 풀려나게 되는데 풀려난 직후 요한이 직접 걸어서 편지를 전달했다고 보입니다. 지도상으로 보면 에베소는 로마에서 출발한 사도 요한이 가장 먼저 도착한 항구도시였을 것입니다. 에베소에서 라오디게아까지 이르는 여행길은 서울에서 부산까지 거리를 넘는 먼 여정입니다. 요한계시록의 일곱 교회는 이 여정을 따라 들른 도시에 세워져 있었습니다. 그러면 왜 하필 일곱 교회뿐인가? 물론 빌립보교회나 골로새교회와 같은 다른 교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고고학자들의 연구를 살펴보면 이 일곱 교회는 우편물을 모아져서 지방으로 분배되는 분배소가 있었다고 합니다. 즉, 빌립보 교회나 골로새 교회는 나름대로 큰 교회였지만 우편물 분배소가 없었다는 겁니다. 그러므로 일곱 교회는 사실 전 세계 모든 교회들에게 전달되도록 선택되어진 교회였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일곱 교회는 모든 지상 교회의 대표입니다. 따라서 일곱 교회를 향해 보내어진 편지는 사실 오고 오는 모든 세대의 교회들을 향해 보내어진 주님의 서신입니다.
에베소와 에베소 교회는 어떠했습니까? 에베소 교회가 위치한 에베소란 도시가 발견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습니다. 1869년 터키의 서해안의 어느 늪지대 밑에서 발굴되었습니다. 늪지대 아래 파고 들어가니까 화려했던 다이아나 신전이 있었고 유적들이 많이 발굴되었다고 합니다. 그 도시 위를 늪과 수풀이 천년 넘게 뒤덮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에베소는 고대 세계에서 굉장히 유명한 항구도시였습니다. 계시록에 언급된 일곱 도시 중에 가장 큰 에베소는 동방의 주요 교통로로 연결되고 있었고, 로마가 신뢰하여 자유도시라는 영예를 준 도시로서 로마법을 따라서 자유롭게 재판할 수 있었으며 자치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많은 경제적인 이익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행19장을 보면 이곳에 큰 원형경기장이 있었다는 사실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이 화려한 도시에 세워진 교회는 어떠했습니까? 이 에베소 교회는 행19장에서 사도 바울의 헌신적인 복음사역에 힘입어서 세워졌습니다. 사도 바울이 목회하기 전에 행18장을 보면 알렉산드리아 출신의 아볼로라는 성경학자가 성경말씀으로 토대를 잘 다졌고, 그 위에 사도 바울의 복음사역이 빛을 발했습니다. 사도바울이 에베소에 도착해보니 이미 신자들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이 보기에 그들은 성령세례를 받지 못한 신자들이었습니다. “너희가 믿을 때 성령을 받았느냐?”며 도전하면서 안수함으로 성령세례 받는 일이 생겼습니다. 그리고 회당에서 2년 도안 말씀으로 강론하게 되었고, 그 동안 온갖 치유와 축사의 표적들이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이때 스게와의 일곱 아들이 귀신들린 사람을 고치려다가 크게 망신당하는 일이 있었고, 아데미(다이아나) 여신에 관해서 큰 소동이 있기도 했었습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뜻과 강력한 성령의 역사에 따라 견고하게 세워졌습니다. 그리고 바울이 이 에베소 교회를 떠난 후에 바울의 후계자인 디모데가 남아서 잠시 목회를 했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에베소서는 바울이 에베소 교회를 떠난 후에 에베소 성도들을 위해 기록된 말씀입니다.
전설에 의하면 사도 요한이 말년에 이 에베소 교회에서 목회를 했다고 합니다. 만약 이 전설이 옳다면 사랑의 사도라 불리우는 사도 요한은 사랑에 대해서 많이 가르쳤을 것입니다. 아무튼 에베소 교회는 사랑을 많이 받았고, 또한 사랑에 대해 잘 알고 있었던 교회였습니다. 그러나 사도 요한이 밧모 섬에 유배된 후 이 에베소 교회는 사랑이 식어지게 된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주님은 에베소 교회에 대해 이같이 책망하십니다. “너희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사도 요한은 주님으로부터 이 말씀을 들을 때 어떤 감정이었겠습니까? 하나님의 교회가 그렇게 쉽게 사랑이 식어질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해 저으기 놀랐을 것입니다. 바울이 목회하고, 디모데가 목회하고, 그리고 요한 자신도 목회했던 교회가 주님으로부터 어떤 경고를 받고 있습니까?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치 아니하면 내가 네게 임하여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4,5절) 저는 요한계시록에 기록된 주님의 책망 중에 이보다 더 무섭고 소름끼치는 말씀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너는 지금 나를 사랑하고 있지 않다. 만약 회개하지 않으면 내가 네게 준 촛대를 치워버리겠다” 여러분, 이 얼마나 무서운 말씀입니까? 주님의 말씀은 우리 가슴을 얼어붙게 하기에 충분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예수님은 처음부터 책망의 말씀을 하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이 교회를 다루시는 방법을 보시면 얼마나 부드럽고 신사적인지 모릅니다. 예수님은 먼저 자신이 누구인가 드러내시면서 시작하십니다. 1절, “에베소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오른손에 일곱 별을 붙잡고 일곱 금 촛대 사이에 다니시는 이가 가라사대” 일곱 교회를 향한 주님의 말씀을 보면 알겠지만 예수님은 모든 교회에 동일한 모습으로 나타나시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영광을 각기 다른 각도에서 조명하십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영광을 아는 것이 그토록 광대하고 무궁한 것임을 말해주는 것일 뿐만 아니라, 문제를 안고 있는 지상교회가 문제를 극복하고 승리하는 교회가 되기 위해서 붙들어야 할 그리스도의 영광을 보여주시기 위함입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관점입니다. 각 교회를 향해 자신을 드러내시는 주님의 영광은 각 교회가 붙들어야 하며, 시선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영광입니다. 그러면, 에베소 교회의 문제는 무엇입니까? 사랑을 잃어버린 교회였습니다. 이런 에베소 교회가 다시 회개함으로 승리할 수 있으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에베소 교회에 보여주신 그리스도의 영광을 주목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문제가 무엇이든 간에 그리스도의 영광을 주목할 때 온전히 극복되고 승리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계십니까? 여러분, 늘 무지한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가 씨름하고 싸우는 문제 그 자체에 몰두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것은 죄인의 당연한 본성입니다. 그런 우리에게 지금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무엇입니까? “나를 바라보아라. 그러면 너희들이 싸우는 문제에서 승리할 수 있고, 나의 영광의 나라에 동참하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움을 바라보십시오. 그리스도의 무궁한 영광을 깨닫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여러분을 힘들게 하는 것이 무엇이든 간에 여러분은 승리자가 될 것입니다. 늪에서 버둥거리면 거릴수록 여러분은 더욱 깊이 수렁 속에 빠져 들어갈 것입니다. 그러나 위를 바라보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의 몸은 하늘의 영광에 의해 끌어올려질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무궁한 영광을 바라보는 것, 이것이 우리의 힘이요 승리의 비결입니다. 예수님의 자기계시를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왜냐면 우리는 에베소 교회가 승리하기 위한 열쇠를 1절에서 찾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영광을 드러내신 다음에 예수님은 에베소 교회를 먼저 칭찬하십니다. 2, 3절, “내가 네 행위와 수고와 네 인내를 알고 또 악한 자들을 용납지 아니한 것과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 거짓된 것을 네가 드러낸 것과 또 네가 참고 내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 게으르지 아니한 것을 아노라” 여기서 주님은 “내가 너를 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교회의 구석구석을 다 알고 계십니다. 그리고 우리 또한 그렇게 알고 계십니다. 우리의 슬픔, 고민, 눈물과 회한, 모두 다 알고 계십니다. 정말 지치고 힘들 때 그래서 기도할 힘조차 없을 때 우리는 어떻게 기도할 수 있겠습니까? 그저 “주님, 아시지요?”라고 울부짖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나를 속속들이 다 알고 계시는 그리스도를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에베소 교회의 칭찬할 만한 점들을 먼저 보십시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관점입니다. 하나님의 교회를 바라볼 때 마음에 안 드는 점이 많이 있지만 먼저 칭찬할 점들을 바라보는 것은 우리가 배워야 합니다. 기도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먼저 감사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을 위해 중보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먼저 그 사람을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교회를 향해 쓴 사도 바울의 서신을 읽어보십시오. 먼저 감사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죄인들은 어떻게 합니까? 먼저 단점만 봅니다. 잘못된 점만 부각시킵니다. 우리는 교회를 영적으로 진단 내리는 데 있어서 균형과 순서를 지켜야 합니다. 요즘 제가 자주 질문을 듣는 것이 이것입니다: “청년부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고 계십니까?” “무엇을 느끼고 계십니까?” 저는 주님의 음성을 충분히 듣기 전까지는 개인적인 판단을 보류하기로 결심했습니다. 일단 장점들만을 보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대답합니다. “아, 너무 감사하죠. 이런 점도 좋고 저런 점도 좋습니다.” 주님이 교회를 바라보시는 관점대로 따라가려고 노력하는 중입니다. 일단은 청년부를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에베소 교회의 어떤 면을 칭찬하고 계십니까? 그걸 보면 에베소 교회의 특징을 알 수 있습니다.
첫째, 행위와 수고가 많았습니다. 많은 일을 하며 많은 활동을 하는 교회였습니다. 예수님은 게으르지 아니하고 부지런한 에베소 교회를 칭찬하십니다. 저는 고등부를 섬기고 있었을 때는 교회에 오지 말라고 합니다. 아이들은 틈만 나면 교회에 모여서 활동하기를 좋아합니다. 원래 정신연령이 낮은 사람들이 활동하기를 좋아합니다. 활동하는 가운데 자기 정체성을 확인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무엇인가를 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기 때문에 자신이 살아있다는 즐거움을 갖는 것이죠. 그러나 나중에 자신의 죄성을 발견하고 고민하기 시작하면 걷잡을 수 없이 힘들어집니다. 그래서 교회를 떠나가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활동이나 캠페인이나 이벤트성 행사를 그리 좋아하지 않습니다. 기도회나 성경공부에는 별로 열심히 없다가도 무슨 행사를 할 때는 ‘불같은 열심’을 내는 친구들이 있습니다. 그들을 볼 때마다 내심 불안합니다. 그러한 행사에 열심히 뛰어다닌다고 주님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줄로 착각하는 영혼을 볼 때마다 안타까운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저는 교회가 아무 일도 안하고 모일 때마다 성경공부만 하고 헤어지는 것도 원하지 않습니다. 교회는 선한 일에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꾸어주고 베풀어주며 찾아가서 봉사해야 합니다. 우리 교회는 이런 일을 잘 하는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우리 교회의 여선교회에서는 ‘손길봉사’라는 행사를 정기적으로 하는데 저는 굉장히 찬성합니다. 고아원이나 양로원에 방문해서 씻겨주고 청소도 하는 일 등입니다. 이것은 분명 칭찬 받을 만한 일입니다. 그리고 이런 일들을 많이 해야 합니다.
둘째, 인내하고 참고, 견딜 줄 아는 교회였습니다. 오래 참을 줄 아는 것은 분명 칭찬 받아 마땅합니다. 요즘 젊은이들은 오래 참지 못한다고 합니다. 분명 그것은 자라난 환경과 관련이 있습니다. 편하게 자란 사람이 오래 참는 것을 힘들어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교회가 오래 참는다는 것은 무엇을 말할까요?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신앙고백 때문에 힘들어지고, 고난이 찾아오고, 교회가 하는 많은 선한 일을 하느라 시간이 없고 바쁜 일 가운데서도 참고 견딘다는 것입니다. 작은 어려움에도 쉽게 포기하려는 경향은 이제도 있었고 그때도 있었습니다. 그렇게 본다면 에베소 교회가 고난 속에서도 참고 견디고 주어진 직분과 사명을 잘 감당하고 있었다는 것은 칭찬 받아야 할 일입니다. 여러분, 우리에게 이러한 인내심이 없다면 우리는 주어진 사명을 잘 감당하지 못할 것입니다. 주의 일을 하면서 언제나 좋고 즐거운 일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을 위해 일할 때 고난이 찾아오고 힘들어질 때도 참을 수 있습니까?
셋째, 에베소 교회는 정통성이 있는 교회였습니다. “...또 악한 자들을 용납지 아니한 것과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 거짓된 것을 네가 드러낸 것과”(2절) 6절에도, “오직 네게 이것이 있으니 네가 니골라당을 미워하는 도다 나도 이것을 미워하노라” 에베소 교회는 이단을 물리칠 정도로 정통 교리에 굳게 서 있는 교회였습니다. 에베소 교회를 위협했던 이단들은 크게 세 종류였습니다. 첫째, 악한 자들입니다. 이들은 의도적으로 하나님을 무시하고 도덕성을 무시하고 권위를 대적하는 사람들입니다. 둘째, 자칭 사도입니다. 사도의 권위를 주장하는 자들로서 정경의 권위를 무너뜨리려는 자들입니다. 셋째, 니골라당입니다. 이들은 오늘날의 구원파와 같은 부류로서 무절제하고 방종한 삶을 살면서도 자기들은 구원받는다고 믿었고 가르쳤던 사람들입니다. 에베소 교회는 이러한 이단들을 효과적으로 분별하고 물리칠 정도로 강력한 교리 위에 서 있었습니다. 아볼로가 터를 다졌습니다. 그리고 2년 동안 바울이 말씀 강론으로 터를 다졌습니다. 그리고 디모데와 사도 요한과 같은 탁월한 말씀의 종이 섬겼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정통성을 확립할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 공동체는 어떻습니까? 저는 한국교회의 문제 중에 하나가 교리공부에 게을리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저는 모든 교회가 진지하게 교리공부를 다시 해야 한다고 굳게 믿는 사람입니다. 교회가 교리공부를 하는 것은 겨우 세례 받기 전에 한 시간 정도뿐입니다. 그리고는 교리공부를 도무지 하지 않습니다. 교리적인 지식이 없이 집사나 장로를 시킵니다. 이것이 문젭니다. 교리적인 장로교가 교리공부를 거의 시키지 않는다는 것은 정말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습니다. 장로님들도 교리공부를 해야 합니다. 리더들도 제대로 교리공부를 해야 합니다. 교리에 대한 중요성은 요즘 너무 간과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열심을 내다가 어느 날 갑자기 교회 안에서 자취를 감춰버리는 사람이 왜 생깁니까? 그의 삶을 지탱해주는 교리적 지식이 없기 때문입니다. 뼈 없는 문어처럼 교리 없는 신앙생활은 흐물흐물 거리는 것입니다. 뼈대가 강한 건물이 지진이나 테러에도 강한 것처럼 교리가 강한 신자가 위기의 때에도 흔들리지 않는 법입니다. 교리에 대해 공부하십시오. 칼빈의 기독교강요가 좋습니다. 간단명료하고 논리적으로 배우기 원한다면 루이스 뻘코프의 조직신학도 좋습니다. 교리적인 지식을 가지는 것에 대해 편견을 버리십시오. 교리공부는 세례 받을 때나 하고 초신자들이나 하는 것이며 그것은 차갑고 딱딱한 것이라는 편견을 버리십시오. 그러한 편견은 사단이 현대자유주의 이름 아래 교회 안에 심어놓은 함정입니다.
이제 이렇게 책망하신 다음에 비로소 예수님은 에베소 교회를 책망하십니다. 이러한 순서가 교회를 정죄하는 사단의 활동과 다른 점입니다. 예수님은 교회를 책망하시기 전에 칭찬하심으로써 교회를 사랑하고 계시는 분임을 분명히 그리고 충분히 입증하십니다. 그런데 이어지는 책망이 굉장히 가슴 아픕니다.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여기서 “너”는 누구를 가리킵니까? 본문은 ‘에베소 교회의 사자’라고 되어 있지만 에베소 교회의 성도들 전체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구약에서 이스라엘 백성 전체를 향해 말씀하실 때 하나님은 ‘너희’가 아니라 ‘너’라는 단수를 사용하신 적이 많습니다. 그러면 여기서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다”는 말씀은 무슨 뜻일까요? 이 말씀은 문자적으로 이런 뜻입니다. “너는 나를 사랑하고 있지 않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처음 사랑’이라는 말로 표현하신 의도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2절과 3절을 참고할 때 분명히 교회의 습관적인 사랑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사랑이 아닌 습관적이고 형식화된 사랑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은 ‘수고와 인내’로서 묘사되는 ‘선한 행위’를 칭찬하십니다. 그러나 에베소 교회는 활동은 많이 하고 있었지만 진정한 마음은 없었던 것입니다. 오직 의무감이 그들의 살을 가득 채웠던 것입니다. 의무는 충실히 이행했지만 그러나 그들의 행함 속에서 그들은 아무런 기쁨도 맛보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에베소 교회는 하나님의 일을 하되 마지못해서 한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교회와 우리에 대한 중요한 통찰력을 얻게 됩니다. 즉, 기독교가 그리스도를 위한 행위들로 전락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행위들이 분명 선하고 아름다운 것이지만 그 속에 그리스도가 빠질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다시 말해서 본문이 우리에게 하고자 하는 말씀은 이것입니다: “기독교가 무엇인가? 기독교는 곧 그리스도 자신이다.” 자, 여러분, 여기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여러분의 삶 속에 그리스도가 계십니까? 우리 공동체 안에는 그리스도가 진정 존중이 여김 받고 계십니까? 처음 주님을 믿을 때는 주님을 더 깊이 알고자 하는 열망으로 시작하다가는 그러나 세월이 지나서 주님을 위한 여러 가지 나의 일들에 바쁜 자신을 발견함으로써 우리는 마음에 무엇인가 공허함을 느끼면서도 주님을 위한 자신의 일을 보면서, 그 일에 투자하는 자신의 열성과 땀을 기억하면서 내가 주님을 사랑하고 있다고 그렇게 고백하고 있지 않습니까? 주님을 위한 나의 일에 매진하는 것이 곧 주님을 사랑하는 것과 동일하지 않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계십니까?
마태복음 20장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포도원 품군의 비유를 주십니다. 이 비유를 주신 경위는 이렇습니다. 한 부자 청년이 예수님께 와서 “선생님,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해야 영생을 얻겠습니까?”(마19:16)라고 질문했을 때 예수님은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고 나서 나를 좋으라”고 하심으로써 그 청년은 근심하면서 예수님을 떠나갔습니다. 떠나가는 청년들을 바라보면서 의기양양하던 제자들을 대표하여 베드로가 예수님께 이렇게 질문합니다.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좋았사오니 그런즉 우리가 무엇을 얻으리이까?”(19:27) 이때 예수님은 영생과 모든 상급을 약속하시면서 이런 말씀을 주십니다. “그러나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된 자가 많으니라”(마19:30) 그런 다음에 포도원 품꾼의 비유를 주신 다음에 한 번 더 말씀하십니다. “이와 같이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마20:16) 이것은 분명 제자들에게 주신 경고의 말씀입니다.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된 자가 될 것이라는 경고가 무슨 뜻입니까? 사도들은 먼저 부름 받았습니다. 베드로는 가장 먼저 된 자였습니다. 그러나 그에게 주님이 경고하시는 것은 무엇입니까? 처음에 부름 받고 가장 먼저 주님을 따르는 자가 되었을 때 그의 심령은 오직 그리스도를 따라가는 기쁨으로 가득 찼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겨우 3년 남짓 주님을 따라다니면서 베드로의 심령은 어떻게 바뀌었습니까? 그 동안 자신을 따라다니던 자신의 행위에 공로를 부여하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따라가는 것만으로 만족하고 감지덕지하던 베드로가 이제는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좇았으니 이제는 무엇을 얻겠습니까?”라고 질문함으로서 자신의 행위에 공로를 부여하며 주님과 흥정하는 것입니다. 처음 회심할 때는 어떻습니까? 주님을 알고 믿는 것만으로 행복해하겠다고 다짐하던 그 마음이 여러 가지 교회 일과 주님을 위한 행사에 몰두하다가 그만 주님께로부터 떨어지고 만 것입니다. 오늘도 이렇게 해서 많은 사람들이 주님으로부터 떨어져 나갑니다. 베드로나 다른 사도들도 이런 위기에 처했으니 우리야 오죽하겠습니까? 그리스도를 위한 일들이 많아지고 분주해질 때 우리 안에 진정한 위기가 찾아옵니다. 이때야말로 기독교가 그리스도가 빠진 행사로 전락하는 순간입니다. 그리스도를 향한 마음은 전혀 없으면서 그리스도를 위한 일에는 불같은 열심을 내는 어린 친구들을 떠올려보십시오. 주님을 사랑하지 않으면서도 주님을 위한 일, 직분이나 여러 행사들은 탁월하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기독교는 그리스도 자신입니다.
오늘날 우리를 포함한 많은 교회들이 안고 있는 진정한 문제가 무엇입니까? 정말 우리가 힘을 합하여 싸워나가야 할 문제가 무엇입니까? 조직도 행정도 예산도 개혁 대상이지만 정말 우리가 싸워 이겨야 할 적은 타성에 젖은 믿음입니다. 습관에 젖은 믿음입니다. 기쁨이 없는 헌신, 즐거움이 없이 단지 의무감만 남은 활동들입니다. 그러나 처음부터 습관적인 믿음으로 출발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처음에는 한결같이 감격과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신앙의 길에 발을 들여다 놓습니다. 처음엔 나같은 죄인 불러주신 은혜 감사하면서 나를 주님의 도구로 써달라고 기도하면서 언제까지나 주님과 동행하겠다고 다짐합니다. 그런데 점차로 주님을 위해 마련된 여러 활동에 직/간접적으로 뛰어들면서 그만 그리스도에게서 떨어지고 맙니다.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움은 시야에서 사라져버리고 단지 감당해야 하고 이루어야 할 일들, 업적, 성취, 의무감, 무미건조한 책임감만 남는 것입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본문이 우리에게 질문하는 동일한 질문 앞에 우리는 진지하게 고민해보아야 합니다. “나는 정말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있는가?” “아니면 그리스도를 위한 일들에 분주함으로써 그리스도를 사랑한다고 착각하지는 않는가?” 물론 저는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것과 그리스도를 위해 부지런히 일하는 것을 이원론식으로 구분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러나 본문은 그것을 첫째 사랑과 나중 사랑으로 구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처음 사랑을 잃어버린 경우 주님께서 회개할 기회를 주시는데도 회개하지 않고 그대로 살아간다면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촛대를 옮겨버리시겠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교회의 머리되신 주님은 각 교회를 향해 당신의 영광을 세상에 드러낼 능력을 주셨습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영광을 세상에 드러낼 촛대를 가지고 있는 겁니다. 이 촛대는 교회가 감당해야 할 사명의 본질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향해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고 규정하심으로서 이 촛대를 설명하셨습니다. 이 촛대는 어떻게 밝혀지게 됩니까? 그리스도를 사랑함으로써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리스도의 영광에 주목하는 데서 한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과 능력을 맛보는 것입니다. 이것을 예배의 기쁨이라고 혹은 기도의 즐거움이라고 불러도 좋을 것입니다. 어쨌든 웨스터민스터 요리문답의 첫 번째 질문처럼 “사람의 제일된 목적은 그를 영화롭게 하는 것과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영광을 교회가 즐거워할 때 비로소 교회는 세상에 빛을 발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가 그리스도의 영광을 바라보고 즐거워하지 못하고 여러 가지 의무감과 행사에서 만족감을 얻는데서 달라지지 않고 계속 간다면 교회는 세상에 존재해야 하는 이유를 상실하게 되는 것입니다. 에베소와 에베소 교회가 늪지대 아래 파묻혔던 것처럼 우리 교회가 그렇게 되지 않으리라는 법이 있습니까?
그러면 에베소 교회가 따라야 할 처방전이 무엇입니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교회가 극복해야 할 모든 문제에 대한 유일하고도 포괄적인 해결책은 그리스도의 영광을 주목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랑을 잃어가고 있는 에베소 교회가 다시 바라보아야 할 그리스도의 영광은 어떤 것입니까? 1절을 다시 보십시오. “오른 손에 일곱 별을 붙잡고 일곱 금 촛대 사이에 다니시는 이”입니다. 이 짧은 구절은 많은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첫째, 그리스도의 권능입니다. 오른 손이 그리스도의 권능을 말해줍니다. 둘째, 그리스도의 주권입니다. 일곱 별을 붙잡는다는 말이 그것입니다. 셋째, 교회의 영광스러움입니다. 일곱 금 촛대가 그것입니다. 넷째, 교회 안에 내주하시는 그리스도입니다. ‘일곱 금 촛대 사이에 다니시는 분’이란 말은 교회 안에 임재하시며, 함께 계시는 그리스도를 말합니다. 그리스도의 영광에 대해서 하나하나 뜯어가며 묵상하는 것은 진정 우리 영혼에 힘이 됩니다. 그리고 우리가 치르고 있는 영적 전투에서 승리할 수 있는 최고의 능력을 제공합니다. 5절에 보시면 예수님께서 에베소 교회가 회개할 수 있도록 격려하시는 말씀을 보여줍니다.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회개하고 처음 행위를 가지라” 여기서 회개의 단계는 세 단계로 이루어집니다. 첫째, 생각하는 것입니다. 둘째, 회개하는 것입니다. 회개란 여러분이 잘 아시는 대로 방향을 180도 바꾸는 것입니다. 셋째, 처음 행위를 갖는 것입니다. 저는 본문을 묵상하면서 둘째, 셋째는 이해가 갑니다만 첫째에 대해서 도무지 이해를 못했습니다.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라”는 말이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도대체 무엇을 생각하라는 말인가? 분명 과거를 회상하라는 말입니다. 분명, 큰 죄악에서 나를 건지신 그때를 생각하라는 말입니다. 주님을 처음 만나서 신앙생활 하던 때를 생각하라는 것인데,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라고 할 때 참으로 난감했습니다. ‘내가 주님으로부터 떨어진 곳이 어디인가?’ 그곳을 찾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묵상하다가 내가 주님으로부터 떨어진 곳을 1절에서 찾을 수 있었습니다. 1절 말씀은 저를 “주님으로부터 떨어진 곳”으로 인도해주었습니다. 그리고 주님을 향한 사랑을 잃어버린 모든 교회로 하여금 “주님으로부터 떨어진 곳”으로 인도하여줍니다. 그곳에서 주님의 영광을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져야만 합니다. 주님의 권능과, 주권과, 임재하심과 주님의 교회의 영광스러움과 교회가 안고 있는 영광스러운 특권들에 대해 깊이 묵상해보십시오. 그러면 내가 언제, 어디서 그리스도에게서 이탈하게 되었는지를 알게 될 것이며, 또 회개할 수 있는 힘을 얻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승리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누구입니까? 귀신을 쫓아내는 자들입니까? 아닙니다. 주님의 권고를 깊이 듣고 주님이 내려주신 처방전대로 회개하는 자들입니다. 우리가 싸워야 할 진정한 적은 귀신들도, 환경도, 재물도, 사람도, 조직도, 부족한 예산, 그 어떤 것도 아닙니다. 우리가 싸워야 할 적은 우리 안에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영광을 바라보면서 즐거워하기보다는 그리스도를 위한 여러 분주한 일에서 만족감을 찾으려는 태도, 습관적인 믿음, 주님과 만났던 때의 로맨스를 그리워하지도 않는 매너리즘, 주님을 위한 여러 가지 일들에 가치와 공로를 부여하는 죄성, 진실한 예배의 감격이나 구원의 감격도 없이 행사와 활동만 무성한 데 대한 아무런 가책도 느끼지 못하는 마음, 바로 그것이 우리가 싸우어 햘 진정한 적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싸울 가장 강력한 무기도 우리 안에 이미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무궁한 영광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에 관한 진리가 우리의 가장 강력한 무기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승리하게 됩니까? 주님의 음성을 듣는 것입니다.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지금 여러분 각자를 향해 성령이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 음성을 들으십시오. 그 음성을 가슴에 새겨두십시오. 성령이 여러분들에게 가르쳐주시는 그리스도에 관한 진리들을 포착하십시오. 그리고 그 진리를 붙드십시오. 그것보다 더 강력한 영적 무기는 없습니다.
이렇게 주님의 권고를 따라 회개하게 되면 어떤 약속이 주어지는 줄 아십니까?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과실을 주어 먹게 하리라” 요10:10에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주님이 주시는 생명을 더 풍성하게 누리는 것이 주님의 뜻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이러한 뜻은 자동적으로 우리에게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주님의 뜻을 따를 때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어떻게요? 주님이 가르쳐주시는 세 가지 회복의 단계를 따라 믿음으로 순종하면서 나아갈 때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과실을 주어 먹게 하리라” 그렇습니다. 주님이 약속하시는 것은 생명나무의 과실입니다. 여러분 놀랍지 않습니까? 이 생명나무는 에덴동산에 있었습니다. 에덴동산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교제를 위해 창조된 지성소입니다. 주님과의 만남에는 기쁨이 넘칩니다. 그렇기 때문에 에덴동산은 ‘기쁨의 동산’이란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목적도 바로 그것입니다. 사람과 교제하는 기쁨을 나누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불순종함으로써 하나님과의 관계는 단절되고 말았습니다. 사람은 에덴동산에서 추방되고 말았습니다. 생명나무로 접근하는 길은 그룹천사들과 그들의 손에 들린 불 칼로 막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역사를 거쳐 제한적으로 하나님과 만날 수 있는 길이 제시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다윗과 같은 몇 명의 사람들만이 그 기쁨을 맛보고 사모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말미암아 생명나무로 접근할 수 있는 영광스러운 길이 활짝 열려지게 되었습니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통하여 누구나 지성소로 나아가서 생명나무이신 그리스도를 만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제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의 공로를 힘입어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며 그리스도와 사귀는 기쁨을 얻게 되었습니다. 누구나 기쁨으로 하나님과 교제하며 하나님을 섬길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하나님과 하나님의 아들과 사귀는 기쁨을 확보하기 위해 최선을 싸움을 싸우십시오. 그리스도의 영광을 주목하십시오. 그러면 그리스도의 영이 여러분들의 싸움을 도울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수 천 년의 교회사를 볼 때 수많은 교회들이 지상에 나타났다가 사라져 갔습니다. 처음 사랑을 그대로 지속한 교회는 아직도 살아 있습니다. 아직도 세상에 빛을 발하고 있으며 복음으로 사회에 영향력을 끼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구라파의 교회들을 보십시오. 화려한 건물만 남아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거룩한 임재는 사라지고 건물은 모스크로 변하든지 아니면 음악연주회로 대여되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 교회가 100년후 그렇게 되지 않으리라는 법이 있습니까? 우리의 신앙이 형식만 남게 되지 않으리라고 누가 장담하겠습니까? 나도 한 때는 주님을 사랑했다고 하면서 자위하는 모습으로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된 자를 바라보고서 질시하게 될 날이 머지 않았는지 모릅니다. 문제는 하나님과의 교제입니다. 예배의 회복입니다. 하나님의 임재입니다. 그리스도의 영광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위한 일보다는 하나님의 인격을 믿는 일입니다. 그리스도를 위해 일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영광을 바라보며 한없이 즐거워하는 일입니다. 우리는 이 일을 해야 합니다. 남녀간에 처음 만날 때 서로 간에 더 깊이 알고자 하는 로맨스가 있듯이, 하나님과의 관계도 그래야 합니다. 이 거룩한 로맨스를 확보하기 위해 우리는 몸부림쳐야 하고 싸워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이 주신 거룩한 촛대에 빛이 발하여 어둠을 밝힐 것입니다. 세상은 그 빛을 바라보고 하나님께로 나아오게 될 것입니다. 생키비치가 쓴 [쿼바디스]를 보면 로마의 장군 비니키우스와 리지아의 감동적인 사랑이 나옵니다. 다음은 리지아를 뜨겁게 사랑하는 비니키우스의 편지의 일부분입니다. “내일 만날 수 있지만 오늘 이렇게 그대에게 편지를 씁니다. 몇번이라도 돌아올 수 있는 기회가 있다면 말을 타고 달려 오겠습니다. 더 이상 당신과 떨어져 있다면 견디지 못할 것 같소. 그리워서 못 견디겠소. 사랑하는 리지아.” 여러분, 오늘 우리는 주님께 이런 고백을 드릴 수 있습니까? 우리는 주님께 다음과 같은 사랑의 편지를 쓸 수는 없을까요? “사랑하는 주님, 저는 지금 주님이 그리워서 못 견디겠습니다. 보고 싶습니다. 어서 속히 오십시오.”라고 말입니다. 주여, 우리에게 주님의 영광을 보여주심으로 한없이 즐거워 춤추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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