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계시록 강해(4)
서머나 교회: 가난하지만 부유한 교회
본문: 계2:8~11
2:8 서머나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처음이요 나중이요 죽었다가 살아나신 이가 가라사대
2:9 내가 네 환난과 궁핍을 아노니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니라 자칭 유대인이라 하는 자들의 훼방도 아노니 실상은 유대인이 아니요 사단의 회라
2:10 네가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 말라 볼지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십 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2:11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자는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아니하리라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만큼 물질적으로 풍요로웠던 때는 아마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돈만 있으면 무엇이든지 얻을 수 있는 자본주의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만큼 영적으로 가난한 시대는 또 없을 것입니다. 돈의 가치 외에 다른 보이지 않는 영적인 것에 대한 가치를 알아보는 눈들은 점점 사라져가고 있습니다. 교회사를 고찰해보면 물질적으로 빈곤했던 시대를 살았던 교회가 영적으로 풍요로웠던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오늘날 사회를 보십시오. 얼마나 많은 교회들이 붉은 네온사인으로 밤거리를 밝히고 있습니까? 그런데 무엇이 빈곤하다는 말입니까? 하늘의 영광을 바라보고 추구해야 할 교회마저도 물질의 가치를 추구하면서 우리 영혼의 허전함은 더 심화되어 가는 것입니다. 이 시대의 영적 빈곤은 어디서부터 발생할까요? 유일하신 참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물질을 섬기는 우상숭배에서 비롯되는 줄로 믿습니다. 이러한 우상숭배를 대항하여 피 흘리기까지 싸우는 순교자들만이 교회의 영성을 다시 회복시킬 것입니다. 오늘 우리 시대의 비극은 위대한 순교자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교회사를 보면 순교자를 소유했던 시대야말로 가장 영적으로 풍요로웠습니다. 우리 교회가 영적으로 풍성해지기 위해서는 순교자를 소유해야 합니다. 순교자의 영성을 가져야 합니다. 유일하신 참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목숨을 거는 사람들이 교회를 세속화와 다원화에서 지킬 하나님의 도구입니다. 우리는 기도해야 합니다. 이 시대의 순교자를 우리에게 주시옵소서! 이 시대의 맘몬과 싸우는 복음의 용사들을 주옵소서! 오늘 본문은 가장 가난했으면서도 가장 부요했던 한 교회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가장 가난하면서도 가장 부요한 삶을 살아가는 성도들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편지로 된 요한계시록이 일곱 교회로 보내졌을 당시에는 이 서머나 교회뿐만 아니라 모든 교회가 너나할 것 없이 로마제국의 황제숭배로 인해 고통당하고 있었습니다. 이 시간 잠시 당시 로마 시대의 황제숭배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당시 황제 숭배는 일 년에 단 한번 거행하는 의식이었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그 의식에 참석해서 “가이사는 주님이십니다”라고 고백하여야 했습니다. 그런데, 일단 이 고백을 하기만 하면 연중 어느 때에도 다른 신을 섬겨도 괜찮았습니다. 그러나 예수쟁이들은 달랐습니다. 예수님 밖에는 아무도 주님으로 고백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반면, 유대교는 이 황제숭배의식에서 제외되는 특권을 가졌다고 합니다. 그래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유대교로 개종하는 일이 많았다고 합니다 (히브리서는 그러한 위기의 교회를 향해 기록되었습니다.) 그리고 유대인들이 교회내로 침투해들어와 할례를 받아야 된다고 가르쳤습니다. 또한, 많은 유대인들은 공공연하게 그리스도인들을 당국에다 고발하기도 하였습니다. 이러한 환난 속에서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주 예수’만 섬기기 위해 땅굴로 된 묘지(카타콤)에 숨어 들어가 예배를 드리거나 가정에서 은밀하게 예배를 드렸습니다.
이러한 시대 속에서 서머나 도시는 가장 황제숭배가 왕성했던 소아시아 지방의 도시였습니다. 그 이유는 로마의 갖아 밀접한 동맹관계에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서머나 도시는 에베소에서 북쪽으로 약 56km 떨어진 곳에 위치한 항구도시였습니다. 지금 터키의 이즈메르시가 바로 고대의 서머나 도시로서 지금 인구 35만 이상으로 터키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입니다. 에베소 교회에서 읽혀진 이 계시록의 편지는 두 번째로 서머나 교회에 도착되었을 것입니다. 이 서머나 시는 그리스 제국의 알렉산더 대왕이 직접 설계한 도시라고 합니다. 그래서 고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웠던 도시였다고 합니다. 이 서머나 시는 항구도시로서 대륙 횡단하는 동방의 상인들이 유럽으로 들어가는 첫 관문이었습니다. 그래서 빈부간의 격차가 매우 심한 도시였습니다. 자주 강도떼가 나타나기도 했습니다. 서머나 시에서 가장 유명한 산이 하나 있는데 파고스 산이라고 합니다. 이 산의 중턱에는 유명한 제우스 신전과 키멜라 신전이 있어 멀리서 보면 마치 사람 머리에 왕관을 씌운 것처럼 세워졌었다고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 주님께서 서머나 교회에게 생명의 면류관을 약속하고 계시는 것은 그러한 지형을 생각해보면 참으로 흥미롭습니다.
이 도시에 서머나 교회가 있었습니다. 이 서머나 교회의 담임목사님은 사도 요한의 제자인 폴리갑이었습니다. 폴리갑은 사도 요한 이후 주후 156년까지 그곳에서 순교할 때까지 있었습니다. 이 서머나 교회는 현재에도 존재하고 있다고 합니다. (한번 가서 확인해봐야 하겠습니다.) 그 말이 맞다면, 2,000년 동안 교회의 생명이 지속되었다는 것입니다. 무엇이 서머나 교회로 하여금 그토록 생명력 있는 교회로 만들었을까요? 무엇이 2,000년 역사를 버틸 수 있게 했을까요? 그것은 예수는 주님이시다라는 고백을 위해 피를 흘린 순교자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복음을 위해 목숨을 바찬 순교자들의 피가 있었기에 서머나 교회는 2,000년 역사를 유지해왔습니다. //여기서 저는 여러분에게 폴리갑의 유명한 순교사화를 들려드리기 원합니다. 주후 156년 경 유대인들의 선동에 의하여 교회 지도자들은 로마군에 의해 체포되었습니다. 그중에 폴리갑은 도시 외곽 농장에서 체포되었는데 군중들은 맹수에게 밥으로 던지라고 극성을 부리고 있었습니다. 이에 폴리갑은 저항하지 않았고 맹수가 포효하는 경기장에 가기까지 줄곧 기도했다고 합니다. 총독은 황제에 대한 충성을 서약하면 풀어주겠다고 약속합니다. 그러나 폴리갑은 다음과 같은 유명한 말로 대답합니다. “저는 46년 동안이나 그분을 섬겨왔지만 그분은 제게 한 번도 잘못한 적이 없습니다. 제가 어떻게 감히 나의 왕이시오 나의 구세주 되시는 그분을 욕되게 할 수 있겠습니까?” 화가 머리끝까지 난 총독은 그를 짐승에게 던지지 말고 화형에 처하라고 명령했습니다. 거친 로마 병사들에 의해 폴리갑은 화형대에 매달렸고, 그의 발밑에 불이 붙어졌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돌풍이 불어 불이 꺼지려고 하자 당황한 한 로마군사가 올라와 칼로 목을 베었습니다. 때는 주후 156년 2월 23일이었습니다.
이 폴리갑의 순교를 시발점으로 서머나 교회는 큰 핍박과 환난을 겪게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에 기록된 대로 예수님의 예언이 그대로 적중되었던 것입니다. 10절 말씀을 보십시오. “네가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 말라. 볼지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시리니 너희가 십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서머나 교회는 이 말씀에 ‘아멘’으로 화답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계21:11에 기록된 대로 “죽기까지 자기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였습니다.” 이러한 충성이 있었기에 서머나 교회는 2,000년이란 긴 세월 동안 변질되지 않고 복음의 질긴 생명력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 교회는 2,000년 후까지도 과연 살아있는 복음의 생명력을 간직할 수 있을까요? 어떻게 그것이 가능할까요? 그 비결은 한 가지입니다. 복음을 위해 자기 생명을 아끼지 아니한 충성된 종들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한국교회에 2,000년 후까지도 과연 살아 있는 말씀이 선포되는 생명력 있는 교회가 몇이나 존재하게 될까요? 그 비결도 한 가지입니다. 복음을 위해 자기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는 순교자들의 피가 필요한 것입니다. 복음에 충성하는 자들 말입니다. 지난 시간 살펴 본 에베소 교회는 열심히 일도 했고 많은 봉사도 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어떻습니까? 세상을 환하게 밝힐 촛대는 옮겨지고 말았습니다. 교회의 터는 늪지대가 덮고 말았습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처음 사랑을 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서머나 교회는 예수는 주님이시다 라는 한 가지 고백을 위해 생명을 바쳐가며 충성했습니다. 생명을 바친 사랑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그 촛대는 지금까지도 건재한 것입니다. 아무리 많은 봉사와 선교와 일을 하여도 이 생명을 바친 사랑, 즉, 순교자적인 헌신이 없으면 우리의 촛대는 언제 어디로 옮겨질지 모릅니다. 오늘 우리는 다시금 주님과 주님의 복음에 대한 충성을 다짐해야 할 것입니다. 죽도록 충성하겠노라고 말입니다.
이러한 서머나 교회에 주님은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셨습니까? 두 가지 모습으로 자신을 계시하십니다.
첫째, 처음이요 나중이신 모습으로 자신의 영광을 드러내십니다. 알파와 오메가, 처음과 나중이라는 말씀은 창조주와 심판주로 자신을 소개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당시 고난당하고 있었던 서머나 교회에 무슨 의미가 있었겠습니까? 처음과 나중이라는 말은 시간과 공간과 환경을 초월하신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서머나 교회가 당하고 있는 그러한 고난의 환경은 창조와 최후 심판이라는 하나님의 계획 속에서 이해되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의 복음은 서머나 교회의 그러한 환난에 제약받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주님을 따르는 우리의 삶 속에 많은 고난이 찾아옵니다. 그러나 그 고난이 주님을 결코 제한하지는 못합니다. 우리가 당하는 고통이 창조주요 심판주이신 주님을 제한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획은 나의 고통에도 불구하고 이루어질 것입니다. 여러분이 당하는 고통이 어떤 것이든지 간에 창조와 심판의 시간 속에 있음을 기억하십시오. 창조주와 심판주가 되시는 하나님 앞에서 다 기억되고 있음을 기억하십시오. 등산하여 산 정상에서 시내를 내려다보면 아파트와 집들이 작은 성냥갑처럼 보이는 것처럼 보다 높은 곳에서 우리의 낮은 삶을 내려다보십시오. 그러면 우리가 겪고 있는 고통이란 실체가 어떤 것인지 제대로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둘째로, 우리 주님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분으로 나타나셨습니다.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가 가라사대” 당시 서머나 교회에는 항상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습니다. 죽음의 공포는 모든 성도들로 하여금 정신 바짝 차리게 만들었습니다. 당시 살기 어린 강도떼들이 있었고, 잡아 죽이려고 공모하는 유대인들의 모임들이 있었고, 경기장에서는 그리스도인들을 물어뜯으려는 맹수들의 울부짖음이 있었습니다. 항상 죽음이 서머나 교회를 위협하고 있었습니다. 다윗이 고백했듯이, 서머나 교회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서머나 교회에 우리 주님이 나타나셔서 “보라, 나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라고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너희들보다 먼저 내가 죽음의 공포를 체험했다. 그리고 나는 실제로 죽었었다. 그러나 나는 사망의 권세를 이기고 다시 살아났다. 너희들도 나를 따라올 것이다. 내가 이긴 것처럼 너희들도 충분히 이기게 될 것이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서머나 교회에 우리 주님은 나타나셔서 부활의 생명을 약속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우리 중에는 드물지만 아직도 우리 가운데 복음 때문에 ‘예수는 주님이시다’라는 이 한 가지 고백 때문에 죽음의 그림자가 따라 다니는 사람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제가 어릴 적 신앙생활 할 때 예수 믿는다고 하면 집에서 쫓겨나야 했던 친구들을 보았습니다. 오늘날 그런 사람이 우리 주위에 있습니까? 저는 그 사람이야말로 가장 부요한 사람인 줄 믿습니다. 복음 위해 핍박받는 사람이야말로 가장 영적으로 부자인 줄 믿습니다. 그런 사람에게 우리 주님은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십니까?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자로서” 나타나십니다. 우리가 주님 때문에 죽음과 같은 환난을 겪고 있습니까? 그렇지 않다면 신앙생활 하다가 여러 가지로 시험에 들 때 힘들다고 하지 마십시오. 잽이 되지 않는 것을 가지고 정말 죽겠다고 하지 마십시오. 여러분, 주님이 여러분을 위해 먼저 죽으셨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들이 그 뒤를 따라오게 하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그리고 주님이 여러분을 위해 다시 살아나셨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들도 그분처럼 살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주님을 믿는 자는 지금도 이미 부활의 권능을 체험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고통스럽고 힘들 때 주님을 생각하십시오. 주님의 십자가를 생각하십시오. 주님의 삶은 늘 죽음의 그림자가 뒤따라 다녔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그것을 이기시고 하나님 아버지께 죽기까지 충성하셨습니다. 그리고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바로 이것이 환난 당하던 서머나 교회에게 주시는 두 번째 위로였습니다.
셋째, 주님은 교회의 모든 형편을 다 알고 계시는 분으로 나타나고 계십니다. 본문에서. 우리 주님은 “너희 형편을 다 알고 있다”라고 위로하고 계십니다. 9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내가 네 환난과 궁핍을 아노니,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니라!” 주님은 서머나 교회가 당하던 고통을 알고 계셨습니다. 여기서 ‘안다’라는 말은 그냥 개념적으로 상상하거나 이해하는 정도의 동사가 아니라 ‘공감한다’ 혹은 ‘같이 체험한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 주님도 심정적으로 같이 느끼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울이 교회를 핍박할 때 다메섹 도상에서 주님은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주님의 교회가 핍박을 당하는 것은 곧 주님 자신이 핍박을 당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당하는 현실을 주님이 자신의 몸이 당하는 현실로 여기고 계신다는 사실이 놀랍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의 사랑입니다. 주님은 그 사랑하시는 백성이 당하는 고통을 지켜보실 뿐만 아니라 직접 마음으로 느끼고 계십니다. 주님은 교회의 고통에 친히 참여하고 계십니다. 주님은 여러분의 고통을 느끼고 계십니다. 공감하고 계시며, 마음으로 이해하고 계십니다. 주님은 여러분의 환난을 체험하고 계십니다. 주님은 여러분의 궁핍을 느끼고 계십니다. 교회가 당하는 고통은 곧 주님이 당하는 고통입니다.
그러면 주님은 서머나 교회에 대해서 무엇을 알고 계십니까? 주님은 서머나 교회의 모든 형편을 알고 계셨습니다.
첫째, 가난입니다. 당시 서머나 시는 동방의 상품을 유럽으로 보내는 항구도시였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래서 부자는 엄청나게 부했고, 가난한 자는 엄청나게 가난했습니다. 우리 서울도 마찬가지입니다. 잘 사는 사람은 엄청나게 잘 삽니다. 하지만 등잔불 밑이 어둡다고, 아직도 달동네가 있습니다. 아직도 지하철역에서는 한 푼 달라고 구걸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역에서 신문지를 깔고 노숙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도시가 발달되어 갈수록 왜 빈민은 늘어갑니까? 헨리 죠지의 [진보와 빈곤]은 이러한 사회현상을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사회에 관심을 가진다면 반드시 읽어보아야 할 책입니다. 사람들의 마음이 탐욕으로 물들어갈수록 빈자들은 더 많이 생겨나게 되는 법입니다. 당시 서머나 시에는 이렇게 상대적 빈곤을 겪는 많은 가난한 사람들이 많았고, 서머나 교회의 구성원들은 대부분 극빈자들이었습니다. 주님은 그 형편을 다 보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마음으로 공감하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없는 가운데서도 목숨으로 충성하는 서머나 교회를 그 어떤 교회보다 사랑하고 계셨습니다. 요즘 보릿고개라는 말을 제대로 이해하시는 분이 얼마나 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말 그대로 “찌들게 가난한 삶”이 무엇인지 잘 모르겠지만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60만원 사글세방에 한 푼 수입이 없는 가정에서 대학생 두 명, 중학생 한 명이 다녔습니다. 그러나 지금 돌이켜 보면 그때 주님께서는 참으로 많은 은혜를 부어 주셨던 것 같습니다. 다시 돌아보기도 싫은 생활이지만 하나님의 은혜가 저를 배부르게 만들었습니다. 그 은혜가 있었기에 저는 가난하다고 생각하면서 자란 적은 별로 없었던 것 같습니다. “네가 실상은 부요한 자니라!” 여러분, 그러나 반대로 라오디게아 교회를 보십시오. 얼마나 부자교회인지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그 교회를 향하여 “가난하여 벌거벗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중에 혹시 물질적인 가난으로 고통당하시는 분이 있습니까? 먼저 주님이 그 모든 형편을 다 알고 계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여러분의 마음속에 은혜를 주기 원하시는 주님을 믿고 신뢰하시기 바랍니다. 그 은혜가 있기에 실상은 부요한 자로서 살아갈 수 있습니다. 가난은 분명 저주이지만 그러나 가난 때문에 오히려 하늘나라의 영광이 얼마나 풍성한 지를 깨닫는 사람도 있습니다. 가난 속에서 하나님을 원망하며 사는 것이 분명 저주입니다만 부유함 속에서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사는 것도 동일한 저주입니다. 물질의 풍요 때문에 하늘나라의 풍성함을 기대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물질의 풍요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능력으로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르는 자들도 있습니다. 그들이 진정 복된 인생입니다. 가난에서 벗어나는 것도 축복이지만 그러나 가난 속에서도 하늘의 기업을 얻을 소망 가운데 만족하는 것은 더 큰 축복입니다. 그런 인생이 진정 왕노릇하는 것입니다. 가난 그 자체를 부끄러워하지 마십시오. 어쩌면 가난 그 자체는 하늘나라의 부요함을 소망하도록 우리를 가르치기 위해 잠시 허락된 하나님의 도구인지 모릅니다. 가난 속에서도, 부유함 속에서도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지 못하는 것을 부끄러워해야 합니다.
둘째로, 우리 주님은 서머나 교회가 당하는 훼방을 알고 계셨습니다. 유대인 중에 예수님께로 돌아가는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에 유대인들의 시기와 훼방은 참으로 컸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을 향한 유대인들의 시기와 적개심은 당시 대단했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회당에서의 자기들의 모임을 민16:3에 근거하여 “여호와의 총회”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나 오늘 주님은 본문에서 그들의 모임을 “마귀의 총회”라고 규정하고 계십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겉으로는 사람들의 모임이지만 마귀들이 모이는 장소가 있습니다. 영적 분별력을 가진 사람은 그곳이 어디인지 알 수 있습니다. 어느 도시에 가도 이러한 마귀의 총회가 열립니다. 특히 복음사역이 훼방 받는 도시를 잘 살펴보십시오. 그리고 마귀의 총회가 어디인지 살펴보십시오. 한 도시가 복음화 되느냐 안 되느냐는 그 도시에 자리잡고 있는 마귀의 총회가 얼마만큼 예수님의 이름으로 결박되느냐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영적 전쟁‘입니다.
셋째로, 우리 주님은 그들이 투옥 당할 것을 미리 알고 계셨습니다. 10절 말씀을 읽어보겠습니다. “네가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 말라. 볼지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십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여기서 그리스도인들을 옥에 던지는 존재는 마귀라고 말씀하십니다. 물론 권력자가 감옥에 가두는 것이지만 그 배후에 마귀가 역사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슬람 국가들을 보면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시인하는 신자들을 옥에 가두는데 그러한 정권의 배후에 마귀의 견고한 진이 놓여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러한 진이 강력한 성령의 역사로 파괴되어지도록 합심하여 기도하여야 합니다. 주님은 서머나 교회에 그러한 마귀의 공격이 있을 것을 미리 내다보셨습니다. 그리고 주후 156년 2월에 드디어 그것이 이루어졌습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께서는 그것을 왜 말씀해 주시는 걸까요? 그것은 서머나 교회로 하여금 그날에 있을 영적 전쟁을 대비시키기 위함입니다. 어떤 시험이 오는지를 알고 당하면 능히 이길 수 있습니다. 주님은 당신이 사랑하는 교회가 시험에서 능히 승리할 수 있기를 바라셨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환난을 면하게 해주겠다고 하신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교회가 환난을 당당히 통과하게 되기를 바라셨습니다. 그렇게 통과함으로써 교회가 세상과 마귀와 사망을 향하여 비웃게 되기를 바라셨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이길 수 있을까요? 본문은 죽음으로써 이길 수 있다고 말합니다.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죽음으로 그 공격을 이길 수 있다는 것입니다. 죽을 각오를 하면 굉장히 편해집니다. 여러분 이것이 그리스도인들이 가져야 할 십자가의 능력입니다. 주님과 함께 죽을 각오를 하고 살아가면 그 어떤 것도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아니 주님과 함께 죽었다고 간주하고 살아가면 주님과 앞서간 많은 순교자들의 신앙을 본받아 우리도 사망을 향해서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라고 비웃으며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그 어떤 시험도, 유혹도, 권력도, 핍박도 우리를 두렵게 할 것이 없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이 십자가의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까? 이 능력을 진정으로 의지하고 있습니까? 죽음으로 주님과 주님의 복음에 충성하십니까? 모슬렘들이 목숨을 던져 테러를 가하는 것을 보면서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진정한 충성이 무엇인지 배워야 하고 도전 받아야 합니다. 오늘날 우리들은 우리 안에 충성심을 확인해야 합니다. 오늘 우리에게 순교자의 정신이 분명해지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 교회는 세상과 마귀와 육신의 공격 앞에 맥을 추지 못할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그 마귀의 공격은 반드시 때가 있다는 것을 말씀합니다. 본문에서는 10일이라고 되어 있는데, 이것은 문자적으로 10일이라기 보다는 정해진 기간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적어도 우리 주님은 그 기간이 언제인지 정확하게 알고 계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서머나 교회에게 그 기간은 반드시 정한 때가 있으며, 그 기간은 매우 짧은 기간이라는 겁니다. 환난은 영원토록 계속 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정하신 때가 있다는 사실은 환난 속에 있는 성도들에게 얼마나 큰 위로가 되는지요! 우리가 당하는 고통이 반드시 끝이 있다는 사실을 알면 우리는 참을 수 있습니다. 군대에서 생활할 때 입영 첫 날부터 제대할 날을 계산하지 않습니까? 이등병에게 물어보면 금방 몇 일 남았다고 정확하게 대답할 것입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도 그렇게 우리의 남은 때를 계산 할 수 있는 지혜를 가져야 합니다.
그러면 왜, 이러한 환난이 교회에 임하도록 우리 주님은 허용하실까요? 하나님께서 교회로 하여금 이 환난을 겪는 것을 원하시는 이유가 도대체 무엇일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공의요 동시에 사랑입니다. 큰 영광을 얻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하는 것은 하나님의 공의입니다. 이 고난을 통해 큰 영광으로 나아가는 것은 하나님의 큰사랑의 증거입니다. 또한 그것은 하나님의 크신 지혜입니다. 그것은 큰 시련을 준비시키기 위해 작은 시련을 적극 활용하시는 원리와 같습니다. 다시 말해서, 서머나 교회로 하여금 더 큰 시련을 이겨내도록 하기 위해서 단기간의 시험을 허용하시는 것입니다. 마치 독감 예방 주사를 맞는 것처럼 말입니다. 즉, 둘째 사망의 저주를 면하게 하시기 위해서 하나님은 사망을 경험하게 하십니다. 죄 때문에 영원히 멸망하지 않도록 죄 때문에 번민하고 회개하고 징계 받게 하십니다. 이 고난의 신비는 하나님의 오묘한 지혜의 영역에 속합니다. 오늘 우리는 어떻습니까? 이 고난의 신비를 진정으로 알고 있습니까? 우리는 작은 시련에는 힘들어하고 불평합니다. 그러나 그 시련을 통해 정금같이 우리를 연단하시어 더 큰 사역을 맡기시려는 주님의 계획은 이해하지 못합니다. 만약 하나님의 더 큰 계획을 알기만 한다면 우리에게 다가오는 작은 시련들을 얼마든지 감사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식이 없는 백성이 망한다고 했습니다. 자기들을 향한 하나님의 원대한 비전에 대해서 무식하기 때문에 자기들에게 오는 작은 고통과 시련을 견뎌내지 못하고 스스로 무너지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서머나 교회로 하여금 바로 그것을 알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들이 당하는 고통과 환난은 하나님의 정하신 뜻에 의해서 당하는 것임을 진정으로 알게 될 때에 그들은 시련과 고통 속에서도 충분히 기뻐할 수 있습니다. 시험 속에서 온전히 기뻐하는 것이 그들을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서머나 교회 성도들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분명한 계획을 가지고 계시며, 그 계획을 이루는 기간이 주권적으로 정해져 있음을 깨닫고 온전히 하나님의 뜻을 신뢰하고 기뻐하는 법을 배우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들에게 드리워진 고통의 그림자는 결코 오래가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기 원하셨습니다. 우리에게 오는 불같은 시험은 일시적이며, 하나님의 선한 뜻과 목적에 따라 잠시 오는 것임을 알기만 한다면 우리는 능히 모든 시험을 이기고 승리하게 될 것입니다. 모든 시험 속에서도 온전히 기뻐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날 때 온전히 기뻐하십니까? 기뻐할 수 없다구요? 하나님의 선한 뜻을 이해할 수 없으시다구요? 지혜가 없다면 모든 것을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않으시는 하나님께 구하십시오. 하나님은 지혜를 주시는 분입니다.
그러면 주님은 서머나 교회에게 무엇을 약속하십니까? 이 약속은 누구에게 주어집니까? 이러한 서머나 교회에 대해 주님이 요구하시는 것은 그러한 시험을 이겨내라고 하는 것입니다. 무엇으로 이겨낼 수 있습니까?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죽도록 충성하라! 다시 말하면, 죽음으로 충성함으로써 그러한 시험을 이겨낼 수 있습니다. 순교자적인 신앙을 묵상해보아야 합니다. 내게 순교자의 피가 흐르고 있는지 점검해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유일하심과 예수 그리스도의 주되심 때문에 자기 목숨까지 내어놓을 수 있는 각오가 있습니까? 이것은 결코 무리한 요구가 아닙니다. 주님을 경험하지 못하고 중생하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이 요구는 기독교의 독선으로 느껴질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의 죄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인생이라면 이 요구는 지극히 당연한 것이며, 쉬운 것입니다. 어차피 한번 죽은 인생 두 번 죽는 것은 두렵지 않는 법입니다.
바로 이러한 성도들에게 주님은 생명의 면류관을 약속하십니다. 생명의 면류관이라고 할 때 서머나 교회의 성도들은 그 의미를 쉽게 마음에 그려볼 수 있었을 것입니다. 왜냐면 당시 파고스 산에는 아름답고 웅장한 건물들이 면류관의 모양처럼 산 중턱에 띠를 띠고 있어서 멀리서도 그것을 쉽게 볼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듣기 전에는 그리스도인들의 눈에 굉장히 가시처럼 보이고 혐오스럽게 보이던 것들이 이제는 주님이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소망하게 하는 것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 얼마나 기가 막힌 말씀인지요! 지금은 죽음의 그림자가 늘 드리워져 있고, 우상숭배의 신전은 늘 초라한 교회에 위협하고 조롱하고 있었지만 주님은 더 큰 영광의 약속으로 힘을 주십니다. 주님이 씌워주실 영광의 면류관을 바라보라고 격려하고 계십니다. 그 면류관을 마음속으로 그려보면서 서머나 교회 성도들은 기쁨으로 충성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지금도 이 면류관을 바라보는 자는 죽도록 충성하는 것을 영광으로 생각할 것입니다. 자신의 죄 때문에 죽은 인생에게 ’죽도록 충성하라‘는 주님의 요구만큼 더 감격스럽고 한없는 사랑을 느끼게 해주는 말씀이 더 없을 것입니다. 누가 이 영광의 면류관을 받아쓸까요? 순교자의 신앙을 본받는 모든 성도들입니다. 아니 모든 거듭난 성도들이 이 신앙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교회의 영광은 바로 순교자의 영광입니다. 어떤 교회가 힘있는 교회입니까? 순교자의 신앙을 소유한 일꾼이 많은 교회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우리 주님은 둘째 사망의 해를 면하게 해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여기서 둘째 사망이란 지옥 불 못에 던져지는 최후의 심판을 의미합니다. 영원히 하나님으로부터 유기되어 칠흑같이 어두운 곳에서 영원토록 정신적으로 또한 육체적으로 고통 받는 심판입니다. 유일하신 참 하나님을 비웃고 우상에게 절하는 모든 사람들이 타는 불 못에 던져지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순교자의 신앙을 지키는 사람은 이 불 못에 빠지지 않을 것입니다. 사실 성령으로 거듭난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이러한 순교자의 신앙을 받았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후1:5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 같이 우리의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도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5:11,12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 왜 이 말씀이 팔 복중에 맨 마지막에 위치했을까요? 그것은 주님을 위해 핍박과 고난을 받는 것이 가장 큰 복을 보장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가장 받기 힘든 복이라는 것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위해 고난을 받는 것은 아무나 받는 것이 아닙니다. 내 힘과 노력과 의지로 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주님이 우리를 인정해주셔야만 주님을 위한 고난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산헤드린 공회에서 사도들은 채찍에 맞으면서 바로 그것 때문에 기뻐하였던 것입니다. 주님을 위해 고난받는 것은 오직 선택받은 자만이 받는 것입니다. 순교자가 되는 것도 아무나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정하신 사람만이 순교의 잔을 마실 수 있다고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지금 여러분 중에 혹시 주님 때문에, 주님의 이름 때문에, 주님에 대한 신앙고백 때문에 고통을 당하고 있다면, 기억하십시오. 여러분은 세상에서 가장 부요한 자들입니다. 영광의 성령이 여러분의 머리 위에 임하고 계십니다. 저는 어릴 적 주일학교 다닐 때 옥중에서 고생하신 목사님을 뵌 적이 있었습니다. 주님을 위해 고생했다는 것이 얼마나 그분이 우러러 보이게 하는지 몰랐습니다. 한국교회에서 날고기면서 수 천 명, 수 만 명이 모이는 교회에서 목회 했다고 하더라도 그가 받는 면류관의 색깔은 주의 복음 때문에 핍박받고 이름 없이 피 흘린 무명의 성도들 앞에서 빛을 잃고 말 것입니다.
여러분, 독수리의 새끼 훈련법을 아십니까? 자기 새끼를 새들 중의 왕으로 키우기 위해서 모든 연단을 다 시킵니다. 그것이 새끼를 미워해서일까요? 결코 아닙니다. 보금자리 안에서 틀어박혀 나오려고 하지 않는 새끼를 날도록 하기 위해 어미는 날카로운 발톱과 큰 날개로 그 둥지를 사정없이 흔듭니다. 그리고 새끼를 높은 하늘에서 벼랑 밑으로 떨어뜨립니다. 그리고 다시 그 날개로 떨어지는 새끼를 받습니다. 이렇게 연단을 받은 새끼는 날개의 힘을 얻게 되고 나아가서 새 중의 새가 되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왜 이렇게 나를 힘들게 하냐고 어미 새를 향해 불평, 원망하겠지만 나중에서는 바로 그러한 고통이 지금의 자기가 되게 했다고 하면서 자신이 받은 고통스런 연단을 자랑하게 될 것입니다
군대 갔다온 형제들을 보면 누가 군대에서 제일 고생 많이 했는가를 가지고 서로 자랑을 늘어놓습니다. 별로 고생하지 않은 친구들이 제일 크게 떠듭니다. 그러나 나중에 그들을 잠재우는 사람은 따로 있습니다. 그들은 가만히 있지요. 처음에 군대 입대할 때는 왜 나를 건강하게 낳아주셨냐고 부모님을 원망하다가 건강하게 제대한 이후에는 건강하게 키워주신 부모님께 감사한 마음을 가지는 법입니다. 우리가 극심한 가난과 고난을 겪을 때는 잠시 하나님의 선하심을 이해하지 못하고 불평, 원망하지만 그러나 주님 앞에 천만 만만 성도들과 함께 섰을 때 우리는 누가 가장 크게 고생했는가를 가지고 영광의 면류관의 휘도가 결정될 것입니다. 그곳에서 순교자들은 영원토록 주님을 위해 흘린 피를 자랑할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고 명령하고 있는 것입니다.
북해청어가 생명력을 유지한 채 대서양을 건너 런던항에 도착할 수 있는 이유는 메기 한 마리에 있다고 합니다. 북해에서 잡은 청어를 그냥 런던 항으로 가져가면 예민하기 때문에 도중에 다 죽는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 가운데 메기 한 마리를 넣어두면 청어들은 살려고 발버둥을 치는데 런던항에 도착할 때까지 싱싱한 생명력을 유지할 수 있다고 합니다. 메기는 몇 마리 청어를 잡아먹지만 배부르면 더 이상 잡아먹지 않기 때문에 나머지 청어들은 싱싱한 채로 보관될 수 있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진정한 보존을 위해 적극적으로 고난을 허락하십니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한다고 했던 바울 사도의 고백을 기억합시다.
오늘날 우리 교회에 꼭 필요한 것이 무엇이냐고 누가 저에게 묻는다면, 저는 서슴지 않고 순교자의 신앙이라고 대답하겠습니다. 복음을 위해 자기 생명을 아끼지 않는 헌신입니다. 죽도록 충성하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신앙으로 교회를 섬기는 것입니다. 교회가 물질적으로 안정해 가는 것은 복입니다. 좋은 예배당, 좋은 주차시설, 좋은 예산, 좋은 교육관도 좋습니다. 그러나 정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교회의 참 영광은 어디에 있나요? 순교자의 영광이 곧 교회의 영광입니다. 순교자의 피가 지금 우리 혈관에 흐르고 있습니까? 그 사람이 세상에서 가장 부요 한 사람입니다. 비록 가진 것이 아무 것도 없지만 주를 위하여 고난을 받는 사람이야말로 정말 부요 한 사람입니다. 주님을 위해 고난을 당하는 분이 여기 계십니까? 세상에서 가장 부요 한 자임을 자처하고 자랑하십시오. 주님을 위해 고난당하는 것이 없는 분이 여기 계십니까? 세상에서 가장 초라한 인생임을 자처하고 자신의 소유나 업적을 자랑하지 마십시오. 가장 가난하면서 가장 부요 할 수 있는 이 삶의 비밀을 간직하고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 되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주님, 우리가 지금은 비록 아무 것도 가지고 있지 못하지만 주님이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바라보면 죽도록 충성하는 복음의 종이 되게 하여 주십시오.
주님, 지금은 비록 세상적으로 가난하고 우리의 삶도 보잘 것 없지만 주님 안에서 가장 부요한 모습을 그려보면서 모든 고난과 시험 속에서도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런 즐거움으로 기뻐하게 도와주십시오.
주님, 우리가 우리 자신을 바라볼 때마다 늘 실망하고 낙심하지만 우리의 모든 것을 영광 가운데 풍성하게 채우시는 주님을 온전히 신뢰하면 주님으로 부요해지도록 도와주십시오.
주님, 복음으로 저희들을 도와주셔서 세상에서 가장 가난하면서도 가장 부요한 삶을 살았던 믿음의 선배들의 뒤를 따를 수 있도록 격려하여 주십시오.
주님과 함께, 주님을 위해, 주님 때문에 고난 받는 특권을 허락하여 주십시오.
죽도록 충성하는 일군들을 우리 가운데 더 많이 일으켜 주십시오.
주님의 교회가 순교자의 정신으로 살아나게 해 주십시오.
우리를 위하여 친히 고난을 받으셔서 본을 보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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