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사로서 교회에 대한 주님의 관점을 가지고 사역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주님이 보시는 것처럼 교회를 볼 수만 있다면!!
김광락 선교사 올림
요한계시록 강해(5)
버가모 교회: 적의 중심부에 위치한 교회
본문: 계2:12~17
2:12 버가모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좌우에 날선 검을 가진 이가 가라사대
2:13 네가 어디 사는 것을 내가 아노니 거기는 사단의 위가 있는 데라 네가 내 이름을 굳게 잡아서 내 충성된 증인 안디바가 너희 가운데 곧 사단의 거하는 곳에서 죽임을 당할 때에도 나를 믿는 믿음을 저버리지 아니하였도다
2:14 그러나 네게 두어 가지 책망할 것이 있나니 거기 네게 발람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 발람이 발락을 가르쳐 이스라엘 앞에 올무를 놓아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였고 또 행음하게 하였느니라
2:15 이와 같이 네게도 니골라 당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
2:16 그러므로 회개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속히 임하여 내 입의 검으로 그들과 싸우리라
2:17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감추었던 만나를 주고 또 흰 돌을 줄 터인데 그 돌 위에 새 이름을 기록한 것이 있나니 받는 자 밖에는 그 이름을 알 사람이 없느니라
우리는 원하든 원하지 않든 간에 복음을 듣고 성령으로 중생한 이후에는 영적 전쟁의 현장으로 투입됩니다. 적들은 우리의 달라진 신분을 바라보고 맹렬하게 공격하기 시작합니다. 우리는 이 싸움을 이겨야 합니다. 어떻게 가능할까요? 오늘 버가모 교회를 향하신 주님의 편지를 통해서 그것을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버가모 교회가 위치한 곳이 어디입니까? 버가모 교회는 일곱 교회 중 가장 북쪽에 위치한 교회입니다. 버가모 시는 다른 도시와는 달리 항구도시나 상업도시가 아니라 교육도시이며 동시에 군사도시였습니다. 지금 포천이나 의정부와 같습니다. 버가모 도시가 위치한 곳은 거대한 언덕 위에 세워졌습니다. 고대 세계에서 군사도시는 도시 자체가 거대한 요새였습니다. 그래서 이곳에는 군인들이 많았고, 학자들도 많았습니다. 버가모시는 당시에 보기만 해도 도저히 무너질 것 같지 않았던 튼튼한 권세와 힘을 소유한 도시였습니다.
자, 오늘 우리는 어떤 곳에서 살아가고 있습니까? 우리가 교회를 살펴보고 있지만 도시의 거대한 영적 상황이 사람들의 영혼에 어느 정도 영향을 주고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예를 들어 고린도시는 항구도시로서 음란했으며 교회 역시 부도덕한 문제로 사도로부터 책망을 받기도 했습니다. 지난 시간 살펴본 서머나 도시는 황제숭배에 대한 충성심이 다른 도시들보다 강한 곳이기 때문에 교회는 늘 위협과 핍박의 그들에서 벗어나기 어려웠습니다. 만일 우리가 신앙생활하면서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환경이 우리의 영혼에 어떤 영향을 주고 있는지를 알 수만 있다면 우리는 보다 효과적으로 대처하면서 신앙생활 해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우리 주님께서는 버가모 교회에 말씀을 주시면서 무엇보다 그들이 살고 있는 도시에 대한 영적인 정보를 제공하고 계십니다. 그렇게 하시는 이유는 버가모교회의 교인들이 좀 더 민감하고 적극적으로 대처해나가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오늘 우리도 우리의 시선을 내부에서 외부로 돌릴 필요가 있습니다. 문제를 내면화하지 말고 외면화하는 것이 어떤 면에서 지혜로운 것일 수 있습니다. 어떤 철학과 헛된 속임수가 교회가 사수해야 하는 진정한 복음을 희석하며 공격하고 있는지 경계의 태세를 늦추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오늘 우리 주변 상황을 보십시오. 세상은 여러 가지 철학과 공교한 말들로 무장한 채 우리에게 다가와서 복음의 진수를 이해하지 못하게 방해하고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살고 있는 환경에 대해 영적으로 분별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무기력한 삶을 살수밖에 없을지 모릅니다. 이런 점에서 교회는 세계관에 대해 강해야 합니다.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이상한 사상의 흐름에 대해 어느 정도 읽을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피터 와그너가 했던 것처럼 도시를 영적으로 분별하는 것의 가치를 어느 정도 인정하시지만 그러나 그것이 승리하는 교회의 관건은 아니라고 하십니다. 분명히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 주님은 버가모 교회가 싸워야 하는 복음의 원수들을 가리키십니다. 그러나 그것은 교회 밖에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바로 교회 안에 존재하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버가모가 처한 영적 전투의 현실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전쟁의 지휘관으로 나타나신 주님의 영광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교회에 나타나신 주님의 영광을 바라보는 것이 승리의 비결입니다. 그래서 버가모 교회에 주님은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셨습니까? 주님은 교회의 상황에 따라 제각기 다르게 자신의 영광을 드러내십니다. 오늘 본문을 보십시오. 주님은 버가모교회에 좌우에 날선 검을 가진 모습으로 나타나셨습니다. 이 말을 들은 버가모 교회 성도들은 그것의 의미를 잘 이해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버가모는 군사도시로서 매우 권세 있는 도시며, 강력한 총독의 집무실이 있었고, 강력한 통치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과시하기 위해서 정문 위에다가 좌우에 날이 선 칼을 상징적으로 걸고 있었다고 합니다. 총독의 권위와 위엄을 보여주는 좌우에 날선 검은 버가모 시민이라면 누구나 볼 수 있었을 것입니다. 왜 주님께서는 좌우에 날선 검을 가진 모습으로 나타나셨을까요? 그것은 버가모 교인들이 사단이 통치하는 곳에 살지만 절대적인 권세를 가지고 통치하는 분은 바로 예수님 자신이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진정한 통치권, 다스리는 권세는 세상나라가 아닌 하나님 나라의 왕이신 구주께서 가지고 계십니다.
본문이 증거하는 그리스도의 영광은 어떤 것입니까? 위대한 전사이신 모습입니다. 누가 그분과 싸워 이길 수 있겠습니까? 교회는 이 질문에 대해 대답해야 합니다. 누가 그분과 싸워 이길 수 있으랴? 구주 예수님의 권능이 얼마나 큰 지 여러분은 알고 계십니까? 구주의 권능을 아는 참 지식은 우리를 세상에서 강하고 담대하게 만들어줄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주님보다 이 세상을 더 두려워하고 있음은 왜일까요? 주님보다 귀신들을 더 무서워하고 있는 것은 왜입니까? 주님보다 자기를 억누르는 세상환경, 세상관료들을 더 두려워하는 이유는 왜입니까? 주님의 권능을 아는 참 지식이 없어서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은 우리로 하여금 좌우에 날선 검을 가지고 계시는 주님을 바라보라고 요청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참으로 무서워해야 할 분은 오직 주님뿐입니다. 구주께서는 제자들을 향하여 육신의 목숨을 죽이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영혼을 불 못에 집어던지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우리는 한쪽 방향만 볼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여야 합니다. 우리가 처한 환경을 주목하기 시작하면 권능의 주님을 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권능의 주님을 바라보기 시작하면서 우리는 세상이 두렵지 않게 될 것입니다. 영광의 주님을 바라보는 것, 그것이 진정한 영적 승리의 비결입니다. 주님을 바라봄으로 세상에서 두려움을 이기고 하나님의 자녀답게 왕노릇하며 사는 것이 주님의 뜻이었고, 오늘 우리를 향한 주님의 뜻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주님께서 가장 먼저 하신 말씀이 “내가 안다”고 하십니다. 주님은 우리의 형편과 처한 환경을 누구보다 잘 알고 계십니다. 주님이 아시는 것은 교회가 처한 영적 현실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어떤 환경에서 신앙생활 하는지 누구보다 잘 아십니다. 주님은 버가모 교회를 향하여 “네가 어디에 살고 있는 지 내가 안다”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살고 있다’는 동사는 “잠시 거한다”는 뜻으로서, 일시적인 체류자, 나그네로서 살아가고 있다는 뜻입니다. 주님은 버가모 교회가 세상에서 잠시 체류하고 있으며 세상에서 사는 곳은 영구적인 거처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기를 바라십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영원한 집이 이 땅이 아니라 저 하늘의 도성에 있다는 사실을 믿고 계십니까?
주님은 버가모 교회가 처한 영적 현실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거기는 사단의 위가 있는 데라” 당시 버가모시에는 유명한 제우스 신전이 높이 6m, 사방 27m 크기의 제단이 도시를 내려다보고 있었다고 합니다. 여기서 ‘위’라는 말은 사단의 권세의 자리를 의미합니다. 계시록에서 ‘위’라는 말은 계속하여 “하늘의 능력”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여기서 사단의 위라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저항하는 사단의 중심본거지(central position)란 뜻입니다. 지금 주님은 “네가 잠시 거처하는 곳이 어떤 곳인지 나는 알고 있는데, 그곳은 사단의 지휘통제소가 있는 곳으로서 철학과 권력자들의 권력 배후에 역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실 버가모는 군사도시이면서 지식의 도시였습니다.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 도서관과 필적하는 거대한 도서관을 가지고 있었는데, 역사에 의하면 약 20만 권의 책을 가지고 있었다고 전해집니다. 애굽왕 프톨레미가 이것을 시기하여 파피루스 종이의 수출을 금지하자 버가모시는 그 유명한 양피지를 자체적으로 만들어냈을 정도입니다. 버가모 시민들은 이 도서관을 자랑했을 것입니다. 그것은 복음에 대한 교회의 가르침을 경시하고 무시하게 만들었을 것입니다. 지식은 사람으로 하여금 교만하게 만듭니다. 철학 공부를 많이 한 사람 치고 그리스도의 영광을 깊이 아는 사람은 보지 못했습니다. 지적인 교만을 조장하는 진정한 실체는 바로 사단이라고 주님은 지적하십니다.
그러나 주님은 버가모 교회가 이러한 환경에도 불구하고 승리하는 몇몇 그리스도인들이 있다고 칭찬하십니다. “네가 내 이름을 굳게 잡아서 내 충성된 증인 안디바가 너희 가운데 곧 사단의 거하는 곳에서 죽임을 당할 때에도 나를 믿는 믿음을 저버리지 않았도다”(13절) 지금 본문에서 주님은 버가모 교회가 승리하기 위해서 도시를 영적으로 분별해야 한다고 직접적으로 요구하지 않는다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요즘 존 도우슨이나 피터 와그너를 중심으로 와이엠에서 이러한 시도를 하고 있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한 전략이 교회가 지역사회 안에서 효과적인 영적 전투를 하기 위해 상당히 유익한 도움을 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그러한 영적 지도 그리기 작업이 교회가 승리하는 결정적인 지식이 될 수는 없다는 사실입니다. 영적 승리는 특별한 영적 지식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닙니다. 승리의 기반은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의 순종입니다. 여러분, 보십시오. 버가모 교회의 몇몇 성도들은 첫째 주님의 이름을 굳게 잡음으로써 승리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영적 도해라는 고난도의 지식이나 훈련도 받지 못했지만 단순한 믿음의 순종으로 승리하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주님의 이름을 견고하게 붙잡는 자들이었습니다. 주님의 이름을 붙잡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그것은 주님의 인격과 말씀을 굳게 지킨다는 것입니다. 성경을 아는 지식과 주님과 주님의 복음을 지키는 일을 다른 학문보다 더 굳게 붙잡는 것을 의미합니다. 오늘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주님의 이름을 굳게 붙잡는 것입니다. 학위를 받는 것도 좋지만 복음의 진리를 사수하는 몸부림이 더 필요한 시점입니다. 그렇게 지금은 복음의 핵심이 세상 철학에 의해서 많이 흐려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복음이 위기를 맞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위기에서 복음을 굳게 사수해야 합니다. 이것이 승리하는 진정한 비결입니다. 주님의 이름, 곧 주님의 말씀을 굳게 지키는 것입니다. 둘째로, 버가모 교회가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첫 번째와 연관된 것인데 믿음을 저버리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지적인 부분에서만 주님의 말씀을 지키는 것만이 아니라 실제 생활 속에서도 주님의 복음에 충성된 것을 말합니다. 믿음을 저버리는 것은 곧 주님을 저버리는 것입니다. 복음을 배반하고, 다른 사상과 타협하는 요즘 추세에 우리는 결코 믿음의 주를 배반하지 않도록 충성해야 합니다.
셋째, 버가모 교회가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예수 그리스도에 관해서 증거하는 것입니다. 13절을 보시면 버가모교회는 진리에 관해서 지적으로, 삶에 있어서도 충성했을 뿐 안라,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전했다는 것입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안디바였습니다. 터툴리안이 100여년 후에 안디바의 순교를 기록하기를 총독이 그를 놋쇠로 만든 황소 안에 집어넣고 산채로 불에 구웠는데 안디바는 그 안에서조차 큰 소리로 많은 사람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했다고 합니다. [복음을 부끄러워하는 교회]라는 책을 보십시오. 오늘날 교회가 복음을 부끄러워하는 현실에 대해 우리는 진정 분노할 줄 알아야 합니다. 본문에서 “내 충성된 증인”이라고 할 때, 증인은 처음에는 부활의 주님을 목격한 자를 가리켰지만 차차 순교자를 가리키는 말이 되었습니다. 순교자가 발생하면 교회는 대게 흩어지게 됩니다. 초기 예루살렘 교회가 스데반의 순교로 많이 흩어졌습니다. 서머나 교회 역시 많은 환난을 격었습니다. 그러나 버가모 교회는 그럴 때에도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진정한 충성입니다. 공동체가 위기를 만났을 때 오히려 공동체를 굳게 섬기는 모습이 진정한 충성입니다. 잘 되고 편안할 때 충성하는 것은 쉬운 일일 것입니다. 진정한 충성은 위기와 시련의 때 진가를 발휘하는 것입니다. 주여 우리에게 충성된 마음을 주소서!
본문을 보십시오. 분명 교회는 외관상으로는 승리하고 있었습니다. 순교자를 배출하고 있었고, 위기의 때에도 교회는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분명 승리하는 교회라고 말하기에 충분한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 중요한 한 가지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은 교회의 진정한 승리는 핍박에도 불구하고 충성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 밖에서 교회를 대적하는 원수들과 싸워 이기는 것이 아니라, 바로 교회 안에서 퍼져있는 잘못된 교훈들과 싸워 이기는 것입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에베소 교회가 이단과 거짓 사도들을 물리쳤지만 내부에 만연되어 가는 영적 매너리즘과 싸우는데는 패배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참된 복음의 원수는 복음을 핍박하는 불신권력자들과 그 배후의 사단이 아닙니다. 도시를 영적으로 분별하여 지도를 그리는 일이 전혀 나쁘다고 할 수는 없지만 우리가 진정 싸워야 할 진정한 복음의 원수는 우리 안에 스며있는 거짓 교훈입니다. 어쩌면 그러한 것들은 이미 우리의 생활의 일부분이 되어서 그러한 것들을 “개혁해야 한다”고 외치면 다들 깜짝 놀랄지 모릅니다. 동일한 사건이 1517년 독일에서 일어났습니다. 로마카톨릭이 싸워야 할 거짓교훈들이 내부에 퍼져있다고 고발한 평범한 청년 수도사 때문에 일어난 작은 파장이 오늘 우리 가슴에도 일어야 합니다.
그러면, 버가모 교회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복음의 원수가 무엇입니까? 교회 밖에서는 핍박과 순교의 위기상황을 훌륭히 싸웠지만 정작 보지 못한 내부에 스며들어온 복음의 원수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발람의 교훈입니다. 14절을 보세요. “거기 네게 발람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 발람이 발락을 가르쳐 이스라엘 앞에 올무를 놓아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였고 또 행음하게 하였느니라” 버가모 교회가 싸워야 할 복음의 원수는 교회 안에 용인되고 있었던 발람의 교훈이었습니다. 발람의 신앙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한마디로 타협의 신앙입니다. 민수기 31장을 보면 발람의 꾀가 이스라엘을 음란한 죄악에 빠뜨렸던 것을 봅니다. 발람과 같은 거짓 교사들이 버가모 교회 안에 있었다는 겁니다. 이 교훈은 분명 부도덕한 삶을 용인하는 교훈과 관계하고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볼 때 교회가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하심을 받는 이신칭의 교리”를 가르쳤을 때 많은 사람들이 그러한 교훈을 잘못 적용하여 음행과 같이 부도덕한 삶을 살아가면서도 자신은 구원받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것은 교회가 세속화의 길을 가는데도 용인하게 만든 것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위험성을 알고서 리쳐드 백스터와 같은 사람은 이신칭의 교리를 강조해서는 안 된다고 가르치기도 했습니다. 카톨릭은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다고 가르치는 사람은 파문하기로 결의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성경에 기록된 이신칭의 교리를 제대로 가르치지 못한 결과이지 교리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데서 오는 위험성을 생각하고서 이신칭의 교리 자체를 부정하거나 축소하는 것은 스스로 복음의 진수를 포기하는 행위인 것입니다. 오늘날 이러한 문제는 현대 교회 안에도 분명 있습니다. 본문 15절에 둘째로 “니골라당의 교훈”도 발람의 교훈과 마찬가지로 비슷한 교훈입니다. 즉, 내가 어떤 행위를 해도 믿기만 하면 구원을 받는다는 식으로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삶이 부패하고 부도덕한 삶을 살아도 구원받는다는 신앙지상주의로 치우치는 것입니다. 요즘 교회 안에서도 구원파의 교훈과 신앙지상주의를 신봉하는 것을 간혹 찾아볼 수 있습니다.
문제는 무엇입니까? 버가모 교회는 외부에서는 승리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정작 내부에서는 패배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교회의 머리되시는 주님은 당신의 교회가 진정한 복음의 핵심을 잘 이해하기를 바라고 계십니다. 그리고 복음을 진정으로 이해하는 데서 치우치거나 복음과 다른 사상과 타협하는 것을 교회가 용납하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왜요? 교회는 그리스도의 순결한 신부이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영광을 알고, 그리스도의 복음을 바르게 이해하고, 그 복음의 진수를 끝까지 보존하기를 바라십니다. 복음을 전파하는 것도 중요한 일입니다. 그러나 복음의 진수를 망각하고 세상적인 사상과 섞어서 혼합시켜버리면서까지 복음을 전파하는 것은 심각한 문제입니다. 오늘날 한국교회를 보십시오. 선교와 복음전파를 강조하면서도 얼마나 참된 복음을 지키기 위해 투쟁해보았습니까? 복음전파도 중요하고, 복음사수 역시 중요합니다. 어느 한쪽으로 치우쳐서는 안될 것입니다. 오늘날 현대교회 안에 선교와 사회 문화사업을 위해 종교간에 협력과 화해를 시도하는 흐름이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로마 카톨릭과 개신교, 성공회와 로마카톨릭, 등 공동선언문을 발표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매우 위험한 것입니다. 협력을 강조한 나머지 복음의 순수성을 잃어버리면 결국 기뻐하는 것은 마귀이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신중하게 생각하고 또 생각하여 복음의 진수를 보전하는 일에 힘써야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회개해야 합니다. 교회는 잘못된 교훈을 용납한 것과, 복음의 순수성을 지키지 못한 것을 진정으로 회개해야 합니다. 16절을 보세요. “그러므로 회개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속히 임하여 내 입의 검으로 그들과 싸우리라” 이것은 매우 중요한 말씀입니다. 교회가 싸워야 할 진정한 싸움의 본질은 바로 올바로 회개하는 것입니다. 회개의 목표는 복음의 본질을 회복하고 그리스도의 영광을 똑바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교회는 영적 지도를 만들어야 승리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도 도움이 될 수 있지만 그러나 진정한 승리는 그러한 것들에 달려 있지 않습니다. 교회의 승리는 진리를 바로 깨닫고 복음의 본질을 회복하기 위해 진심으로 행하는 회개입니다.
만약 교회가 회개하지 않으면 어떻게 됩니까? 이단적인 교훈을 용납하고, 복음의 본질을 제대로 깨닫지 못한 채 살아가는 이른 바 타협하는 그리스도인들을 향하여 주님은 어떻게 경고하십니까? 칼을 빼어들고 계십니다. 발람을 태우고 가던 노새는 여호와의 사자가 칼을 빼어 들고 길을 가로막는 것을 보았습니다. 우리의 눈도 열려야 합니다. 교회가 복음의 본질을 보존하지 않고 공교한 교훈을 용인하는 일에 대해 분노하고 계시는 그리스도의 모습을 보아야합니다. 교회가 복음의 본질을 잃어버리고 다른 교훈들을 용납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신부로서 순결성을 스스로 포기하는 위험성이 있으므로 주님께서 질투의 분노를 발하시는 것입니다. 결국 민수기 31장에 발람은 칼에 의해 죽임을 당하고 맙니다. 칼을 들고 계시는 주님을 바라보지 못하고 회개하지 않은 결과는 주님의 칼에 죽는 것입니다. 오늘 주님은 누구를 향해 칼을 겨누고 계십니까? 바로 회개하지 않는 버가모 교회를 향해서입니다. 여호수아 5장에 칼을 든 여호와의 사자는 칼을 들고 누구에게 겨눈 채로 나타났습니까? 바로 여호수아 자신입니다. 여호수아는 회개함으로써 여호와의 칼이 자신에게서 여리고성으로 옮겨가는 것을 지켜보았습니다. 만일 우리가 회개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칼은 우리를 향해 겨누어 지고 있으며 우리 목으로 깊이 들어오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만일 우리가 참으로 회개하고 그리스도의 신부로서 순결을 회복하고 복음의 본질을 지키면 주님의 날선 검은 우리의 대적들을 향해 겨누어질 것입니다. 거듭난 그리스도인이라 할지라도 복음의 본질에 대해 회개하지 않으면, 교회가 복음의 본질을 회복하지 아니하면 주님의 칼을 피하지 못할 것입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문제입니다. 주님은 거룩한 용사이십니다. 영적 전쟁의 주체는 내가 아니라 바로 주님이십니다. 구약성경을 보면 이스라엘의 대적과 싸우시는 여호와는 이스라엘 자체와도 싸우시기도 하십니다. 이스라엘이 회개하지 않고 다른 신들을 섬길 때는 질투하시는 하나님께서 가차없이 이방국가에 이스라엘을 넘기셨습니다. 여러분 영적 전쟁의 주인공은 바로 좌우에 날선 검을 들고 계시는 주님이십니다. 주님은 언제나 내 편이 되시는 것이 아님을 기억해야만 합니다. 주님은 때로는 나와 싸우시기도 하십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승리하도록 우리는 회개하는 일에 성공해야 합니다. 여러분, 내가 싸워 이기는 것보다 주님이 싸워 이기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교회가 해야 할 진정한 싸움은 땅을 밟으면서 새벽거리를 돌아다니는 것이 아니라(저도 여리고 작전이라고 하면서 땅 밟기를 해보았습니다만 이것은 복음의 본질을 회복하는 것의 핵심이 아닙니다.), 복음의 본질을 회복하기 위한 회개의 싸움이요, 복음의 순수함을 회복하기 위한 교리적 싸움입니다.
승리하는 성도에게 주님이 약속하시는 것은 두 가지, 만나와 흰 돌입니다. 첫째로, 만나는 시78:25에 “권세 있는 자의 떡”이라고 했습니다. 주님이 만나를 주신다고 약속하신 것은 참 만나이신 주님과 교제하며 그 속에서 영생의 축복을 계속 누리게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만으로 만족하는 삶은 승리하는 자에게 주어지는 상급입니다. 광야에서 하나님은 만나로써 이스라엘 백성을 먹이시고 인도하셨듯이 오늘날도 승리하는 그리스도인들에 신비한 은혜로 공급하십니다. 승리하는 그리스도인에게 이 만족이 주어질 것입니다. 둘째로, 흰 돌은 고대세계에서 중요한 특권을 의미하였습니다. 특히, 운동경기장이나 검투장에서 승리하는 검투사에게 수여하는 메달로 사용되었습니다. 노예의 신분에서 자유의 신분을 얻는 상징물이었습니다. 당시 검투사가 흰 돌을 받는다는 것은 시민으로부터 사랑을 받는다는 것을 의미했고, 은퇴하여 여생을 평안하고 즐겁게 보낼 수 있는 보증을 의미했습니다. 승리하는 자에게 이 평안이 주어질 것입니다. 그리고 이 평안은 받는 사람 외에는 아무도 이해하지 못할 것입니다.
결론을 맺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지금 치열한 영적 전투장의 한 가운데 있음을 직시해야 합니다. 중생한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이 거룩한 격전장의 한 복판으로 부름 받은 사람들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승리하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그러나 문제는 어떻게 승리해야 할 것입니까? 교회는 어떻게 영적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을까요? 그리스도의 영광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좌우에 날선 검을 가지신 그리스도를 진정으로 두려워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이름을 굳게 붙잡고 믿음을 배반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복음의 본질을 바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복음의 본질을 굳게 붙잡지 못하고 인본주의적인 사상과 거짓 교훈들을 용납한 것을 진심으로 회개해야 합니다. 이것이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의 싸움의 진정한 본질입니다. 복음의 진수를 보전하기 위한 싸움 말입니다. 만약 회개하지 않고 여전히 율법주의, 세속주의, 율법 폐기주의나 신앙지상주의와 같은 거짓 교훈들을 용인한다면 주님은 바로 그 날선 검을 교회 자신에게 겨누실 것입니다. 교회라 할지라도 주님은 싸우실 것입니다. 그리하여 교회를 향하여 당신의 거룩함을 입증해 보이실 것입니다. 앞으로 있을 종교개혁주간말씀세미나를 통해서 우리는 이 작업을 시작해야합니다. 여러분, 힘써 참석하십시오. 그리고 복음의 본질을 바르게 이해합시다. 그리고 복음의 진수를 보전하고 교리의 순결을 확보하기 위한 싸움에 우리 모두 동참하여 공동 전선을 펼쳐 나갑시다. 개혁자의 심장을 우리 가슴에 이식합시다. 주께서 우리를 도와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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