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리카에서 선교하면서 거짓선지자의 문제가 얼마나 심각한지 알게 됩니다.
흑인들의 정서나 한국인의 정서나 비슷한 면이 많습니다.
교인들로 하여금 거짓선지자들을 분별하게 하도록 하는 것은 목회자로서 아주 중요한 사역입니다.
그런데 거짓선지자가 교회를 이끌고 목회를 하는 교회가 너무 많습니다! 그 교회에 속한 가련한 양떼들은 얼마나 큰 영적 고통을 겪고 있는지 모릅니다!
김광락 선교사 올림.
요한계시록 강해(6)
두아디라: 지도자로 고통당하는 교회
본문: 계2:18-29
2:18 두아디라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그 눈이 불꽃같고 그 발이 빛난 주석과 같은 하나님의 아들이 가라사대
2:19 내가 네게 사업과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를 아노니 네 나중 행위가 처음 것보다 많도다
2:20 그러나 네게 책망할 일이 있노라 자칭 선지자라 하는 여자 이세벨을 네가 용납함이니 그가 내 종들을 가르쳐 꾀어 행음하게 하고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는도다
2:21 또 내가 그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었으되 그 음행을 회개하고자 아니하는도다
2:22 볼지어다 내가 그를 침상에 던질 터이요 또 그로 더불어 간음하는 자들도 만일 그의 행위를 회개치 아니하면 큰 환난 가운데 던지고
2:23 또 내가 사망으로 그의 자녀를 죽이리니 모든 교회가 나는 사람의 뜻과 마음을 살피는 자인 줄 알지라 내가 너희 각 사람의 행위대로 갚아주리라
2:24 두아디라에 남아 있어 이 교훈을 받지 아니하고 소위 사단의 깊은 것을 알지 못하는 너희에게 말하노니 다른 짐으로 너희에게 지울 것이 없노라
2:25 다만 너희에게 있는 것을 내가 올 때까지 굳게 잡으라
2:26 이기는 자와 끝까지 내 일을 지키는 그에게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리니
2:27 그가 철장(鐵杖)을 가지고 저희를 다스려 질그릇 깨뜨리는 것과 같이 하리라 나도 내 아버지께 받은 것이 그러하니라
2:28 내가 또 그에게 새벽 별을 주리라
2:29 귀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고대 세계에서 ‘두아디라’라는 도시는 별 볼일 없는 도시였습니다. 성경에도 두아디라라는 도시는 여기 계시록 말고 단 한군데만 언급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16장을 보면 두아디라라는 도시가 어떤 성격의 도시인지 암시해주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주님이 주신 환상을 따라 빌립보에 이르렀을 때, 자주장사(옷감을 파는 상인) 루디아를 만나게 되었는데 그 루디아가 두아디라 출신의 상인이었다는 것입니다. 빌립보에서 두아디라까지 거리는 800km가 넘는 먼 거리로서 두아디라 성에서 빌립보까지 와서 장사했다는 것은 아마도 두아디라 성의 무역이 그만큼 활발했기 때문이 아닌가 합니다. 또 정황을 미루어볼 때, 루디아라는 여자는 평범한 여자라기보다는 매우 큰 물량을 거래하는 큰손을 가진 사업가였을 것입니다. 그렇게 볼 때 우리는 두아디라라는 도시가 상인들의 도시였다는 것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습니다. 두아디라는 에베소나 서머나처럼 항구도시도 아니었고, 버가모처럼 군사도시도 아니었습니다. 여러 가지로 취약한 도시였지만 이곳에서는 여러 상인들이 조합을 결성하여 살고 있었는데, 소위 ‘길드’라는 상인조합들로 구성된 도시가 바로 두아디라였습니다. 두아디라성에 교회가 세워지게 된 것은 분명 루디아를 중심으로 이루어졌을 것입니다.
이제 주님의 편지가 이 외딴 곳에까지 도착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십시오. 주님은 변두리의 교회까지도 관심을 가지고 살펴보고 계십니다. 에베소, 서머나, 그리고 버가모에서 오른 쪽으로 가면 두아디라성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주님의 편지는 사도 요한의 손을 통해 시계방향으로 전달되었습니다. 이 두아디라 성의 교회는 주로 상인들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요즘말로 하면 주로 회사원들이나 사업자들, 경영마인드를 가지고 사업수완이 좋은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자, 한번 상상해봅시다. 이런 교회가 안고 있었을 영적 취약성은 어떤 것일까요? 여러 상인조합으로 구성된 교회가 안고 있던 문제는 무엇이었을까요? 작은 조합은 큰 조합에게 인정받아야 물량을 수주할 수 있는 것은 어제나 오늘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영향력 있는 상인조합과 동업하고 사업을 따내기 위해서는 그들의 비위를 맞추어야 합니다. 당시 길드는 우상숭배의 온상이었고 또 음란한 행위의 온상이기도 했습니다. 요즘도 마찬가지입니다. 큰 조합이 믿는 종교를 따라야 하고 때로는 성적으로 문란한 파티에도 참가해야 합니다. 돈을 벌기 위해 외국의 바이어들에게 고급창녀를 붙여주는 것은 보이지 않는 관행입니다. 회사 내에서 상사에게 인정받기 위해 회식자리에 가서 노래를 잘 불러야하고, 음란한 디스코텍에 가서 춤을 추도록 강요받기도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그건 분명히 큰 유혹이 아닐 수 없습니다.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돈을 벌어야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믿지 않는 자들 가운데서 어떻게 믿음을 지킬 수 있는가 하는 것이 큰 고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고민의 결과 두 부류가 생깁니다. 첫째는 타협하는 그리스도인과 신앙의 순수성을 지키기 위해 손해를 무릅쓰는 그리스도인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이 본문의 두아디라 교회도 바로 그렇게 두 부류의 신자들이 있다고 말해주고 있습니다. 하나는 이세벨을 따르는 신자들이고, 다른 하나는 그들과 교제하지 않고 스스로 순수성을 지키는 승리하는 신자들입니다. 이 분류는 오직 주님만이 하실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방문객이 되어 두아디라 교회를 방문했다면 누가 어떤 부류에 속하는지 쉽게 분간하기가 쉽지 않을 것입니다.
바로 이런 교회에 주님이 나타나셨습니다.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셨습니까? 18절을 보십시오. “두아디라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그 눈이 불꽃같고 그 발이 빛난 주석 같은 하나님의 아들이 가라사대” 이 말씀은 분명 예수님께서 자신의 영광을 교회에 계시하시는 말씀입니다. 다른 교회에 드러내신 자신의 영광과 달리 매우 독특한 점이 몇 가지 있습니다. 첫째, 불꽃같은 눈을 가지고 나타나셨다는 것입니다. 불꽃같은 눈을 가진 그리스도 앞에 서 있다고 상상해보십시오. 얼마나 무섭겠습니까? 이것은 두아디라 교회의 감추어진 모습을 다 살펴보고 계시고 모든 숨은 의도와 동기를 다 알고 파악하고 계시는 주님의 전지하신 통찰력을 가리킵니다. 그 주님은 지금도 우리 교회의 숨은 죄악을 다 보고 계십니다. 우리 마음의 숨겨진 죄악을 다 꿰뚫어 보고 계십니다. 우리 주님께서 두아디라 성에 무엇을 꿰뚫어보고 계셨을까요? 이세벨의 가르침을 받아 세상과 타협하는 교인들을 보고 계셨고, 또 몇몇 소수의 승리하는 교인들을 보고 계셨습니다. 둘째, 예수님은 그 발이 빛난 주석과 같은 모습으로 나타나셨습니다. 당시 두아디라 성에는 청동 제조업자들이 분명 있었을 것입니다. 청동은 당시 강력한 금속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청동과 같은 발, 특히 빛이 날 정도로 잘 제련된 모습은 교회를 심판하실 권세를 보여줍니다. 예수님은 교회를 돌보실 뿐만 아니라 교회를 심판하십니다. 교회가 순수한 신앙을 유지하지 않으면 주님은 그 교회를 심판하십니다. 불꽃같은 눈과 빛난 청동과 같은 발은 예수님의 전지하심과 전능하심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참으로 전지하시고 참으로 전능하신 주님 앞에 서 있습니다. 그분 앞에 숨길 것은 아무 것도 없고, 그분은 우리의 마음의 뜻과 행위대로 우리를 심판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주님이 심판주로 임하셔서 세상을 심판하실 그 때에 죄인으로 드러나는 것보다 지금 그분이 우리를 짓밟고 심판하시는 것이 얼마나 복된 것인지 모릅니다. 우리는 지금 이 땅에서 징계를 받고 영원한 세계에서 영원히 복락을 누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이 아니라 교회를 향하여 전지하시고 전능하신 모습으로 나타나신 것에 대해 놀라지 마십시오. 주님의 모습은 우리로 하여금 참으로 회개할 수 있도록, 참으로 세상에서 거룩한 삶을 살 수 있도록 도와주시는 것입니다. 세 번째로, 특이한 것은 예수님은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로 소개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다른 교회들에게 보내어진 편지의 서두와 비교해보면 분명 특이합니다. 그 의도가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아들로서 주님이 사셨던 삶은 오늘 우리가 세상에서 살아가는 진정한 삶의 방식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사셨지만 세상에 동화되신 것이 아니라 참으로 세상을 하나님께로 이끄셨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분명한 정체성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세상에 동화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거룩함을 지켜나가야 합니다. 그러한 뜻이 있는 줄 믿습니다.
주님은 두아디라 교회를 구석구석 다 보고 계셨습니다. 앞에서 이 두아디라 교회에는 두 부류의 교인들이 있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첫째는 이세벨의 영향을 받는 ‘타협하는 그리스도인’이고, 둘째는 순수하게 남아 신앙을 지키는 승리하는 그리스도인이라고 했습니다. 오늘 본문을 잘 보면, 예수님의 칭찬은 아주 조금이고, 책망하는 말씀은 의외로 길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그만큼 이세벨의 영향이 두아디라 교회에 엄청난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주님은 교회를 먼저 칭찬하십니다. “내가 네 사업과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를 아노니 네 나중 행위가 처음 것보다 많도다”(19절) 분명 두아디라 교회는 사업가의 기질이 다분히 있었던 교회였습니다. 사업가들이 많았던 관계로 교회의 전체 분위기도 사업 중심이었습니다. ‘사업’이라는 단어는 두아디라 교회의 특성을 잘 보여주고 있는 말입니다. 사업만 많은 것이 아니라,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도 많았습니다. 이것은 굉장히 중요한 것입니다. “네 나중 행위가 처음 것보다 많도다” 주님은 두아디라 교회가 점점 많은 섬김의 열매를 맺는다는 사실에 주목하고 계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행위와 믿음을 구별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분리해서는 결코 안 되는 것입니다. 분명 우리는 행위로 구원받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선한 일을 하기 위해서 구원받았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엡2:10)
그러나 주님은 두아디라 교회의 선한 행위가 위험에 처했다는 사실을 보고 계셨습니다. 그것은 이세벨이라고 하는 여자 때문이었습니다. 이세벨은 본명이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누구나 그녀를 알아 볼 수 있었을 것입니다. 이세벨은 두아디라 교회의 많은 사람들을 가르치는 영향력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여러분, 본래 이세벨이라고 하는 여자는 구약에서 시돈왕의 딸이었고, 바알신 숭배를 이스라엘에 들여오게 하는 일에 앞장섰던 아합의 왕비였습니다. 이세벨은 바알신의 여자 대제사장이었고, 바알신 숭배를 온 이스라엘에 퍼뜨리는데 사명감을 가진 여자였습니다. 구약에서 시돈이라는 나라는 무역국가였습니다. 그래서 정략결혼으로 시돈과 북이스라엘이 협정을 맺음으로 말미암아, 북이스라엘은 전에 없던 큰 물질적 풍요를 누리게 됩니다. 그 풍부함에 눈이 멀어서 북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세벨을 감히 거역할 용기를 가질 수가 없었습니다. 마찬가집니다. 바로 두아디라 성의 이세벨이라는 여자도 그런 위치에 있었습니다. 큰 재정적인 능력이 있었을 뿐만 아니라 교회에 영향을 미치는 지도자였습니다. 자기 나름대로 교리를 만들어서 교인들을 가르쳤습니다. 이 여자가 구체적으로 무엇을 가르쳤는지는 알 수 없지만 오늘 본문을 보면서 짐작해본다면 우상숭배와 음행을 용납하고 정당화하는 가르침이었을 것입니다. 20절 말씀을 봅시다. “그러나 네게 책망할 일이 있노라. 자칭 선지자라 하는 여자 이세벨을 네가 용납함이니 그가 내 종들을 가르쳐 꾀어 행음하게 하고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는도다” 교회 안에서 이세벨의 역할은 교리를 가르치는 일이었습니다. 두아디라 교회는 그것을 보고만 있었습니다. 가르치는 것이 중요하지만 무엇을 가르치는가는 더 중요합니다.
두아디라 교회의 문제를 여성의 문제로 보아서는 안 됩니다. 오늘날 여자 목사가 우리 장로교단에서는 허용이 안되지만 당시 초대교회에는 여자 목사가 많았습니다. 제가 중국교회를 다녀와 보니까 정말 신기할 정도로 여성들의 파워가 강하다는 것을 절감하게 되었습니다. 이세벨은 소위 ‘자칭 목사’였습니다. 어떤 학자는 이 여자가 바울의 설교를 들었던 자주장사 루디아가 아닌가 라고 말합니다만 정확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이 여자는 그리스도인이 세상에서 성공하기 위해 성적인 외도와 우상숭배는 어느 정도 허용될 수 있다고 가르쳤을 것입니다. 어떻게 가르쳤을까요? 돈을 벌어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쓰자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하는 우상숭배와 음행은 죄가 아니라고 가르쳤을는지 모릅니다. 아마도 이신칭의 교리를 그런 식으로 가르치지 않았나 봅니다. 역사적으로 볼 때도 이신칭의는 분명 성경적인 교리이지만 그러나 사단이 교회의 순수성을 무너뜨리기 위해 자주 역이용하기도 했습니다. 가장 강력한 복음의 무기가 교회가 깨어 있어 견고하게 붙잡지 않으면 때로는 사단의 손아귀에 들려지기 쉽다는 것이 얼마나 큰 아이러니인지 모릅니다. 아무튼 이러한 이세벨의 가르침으로 두아디라 교회는 거룩함을 잃어버리게 되었습니다. 거룩한 교리가 오히려 부도덕한 삶과 우상숭배의 삶을 정당화하는 근거로 사용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십시오. 우리는 진리가 죄를 정당화하는 쪽으로 사용될 수 있다는 사실에 놀라야 합니다. 결국 두아디라 교회의 다수 성도들은 세상 문화와 타협하기 시작했습니다. 여러분, 교회의 본질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무엇보다 거룩함에 대한 감각입니다. 세상과 구별되는 그 무엇인가를 소중히 여기는 그러한 감각입니다. 그런데 요즘 많은 교회가 이 거룩함에 대한 감각이 무디어져가고 있습니다. 사회의 어떤 모임에서 인정받기 위해 섹스파티에 어쩔 수 가야만 하는 남자들이 있습니다. 그들 중 상상수가 신자들입니다. 교회 안에서조차 남녀들이 모일 때마다 음란한 눈을 주고받고 음담패설을 주고받으면서 성도의 교제라고 정당화합니다. 어떤 교회의 수련회에서는 스트립쇼를 하기도 하고, 음란한 사교댄스를 추기도 하고, 또 포르노비디오를 틀어주기도 한다고 합니다. 교회가 야유회를 나가면 차안에서 세상적인 춤을 추고 남녀사이에 음담패설을 주고받는 것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가 거룩하기 때문에 부르신 것은 아니지만 우리를 거룩함으로 부르셨다는 사실을 알고 계십니까? 성도의 거룩함이 무엇인지 알고 계십니까? 그것은 거룩한 풍채가 아니라, 혹은 수양을 많이 한 사람만이 겨우 도달할 수 있는 어떤 고고한 정신세계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마음과 육체가 성적으로 깨끗함을 의미합니다. 여러분, 왜 우리 교회들이 거룩함에 대한 감각을 잃어가고 있을까요? 그건 이세벨의 교훈을 용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가장 큰 문제는 이러한 부도덕한 삶과 우상숭배의 삶을 오히려 진리의 말씀으로 정당화하려는 가르침을 마치 영적인 가르침인 양 자처하는 자들을 버젓이 교회가 용납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현대 교회 안에도 이세벨은 활동하고 있습니다. 그(그녀)는 나름대로 잘 가르친다고 자랑하고 자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상숭배와 음행을 용납하는 것은 그 어떤 것으로도 정당화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이세벨의 가르침을 듣고, 그렇게 가르치는 일을 방치해둔다면 교회는 주님의 엄중한 심판의 발을 피하지 못할 것입니다. 거룩함을 잃어버리고 세상과 타협하게 된다면 이것보다 더 무서운 것은 없습니다. 교회는 거룩함을 이루어야 합니다. 거룩함이 없이 주님을 볼 자는 아무도 없다고 했습니다. 거룩함이란 몇몇 사람만이 도달하는 그런 경지가 결코 아닙니다. 그것은 음란한 이 세상과 같지 않는 것입니다. 음란한 세상문화에 물들지 않는 것이 바로 교회의 거룩함입니다. 언약의 소중함을 인식하고 언약에 충성하는 것이 거룩함의 본질입니다. 우선 결혼이라는 제도를 신성하게 여기는 데서 거룩함은 시작합니다. 우리 주님과의 결혼, 남녀 사이의 결혼이라는 제도를 거룩하게 간주하는 데서 거룩한 삶은 시작됩니다. 여러분, 혼전섹스라는 말이 세상에서는 당연한 것처럼 여겨집니다. 대학생의 성의식에 대한 최근의 설문조사에 의하면 여학생의 3분의 1이상이 성경험이 있다고 합니다. 물론 남학생들은 더 하구요. 혼전섹스는 거절해야 합니다. 프라미스 키퍼스 운동처럼 순결서약 운동을 해야 할 판입니다.
여러분, 영황 카멜롯의 전설을 보셨나요? 거기 보면 레오네스의 여왕 기네비에가 아더왕을 배신하고 란셀롯과 사랑을 나누는 장면이 나옵니다. 상처를 받은 아더왕은 훗날 왕비를 용서하지만 그러나 원탁은 깨어지고 기사도 정신은 무너지고 기사단은 해체되고 맙니다. 기사들 간에 피로 맺은 충성서약에 치명적인 금이 가게 만든 것은 적군의 공격이 아니라 바로 사랑하는 아내의 외도였습니다. 마찬가지로 이세벨의 교훈을 받아들이면, 그래서 세상과 점점 타협하고 세상에 동화되기 시작하면 교회는 이내 무너집니다. 원탁의 기사가 그러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이세벨은 교회의 지도자적인 위치를 이용하여 복음을 가르치고 영성을 가르치는 것처럼 자신을 포장했지만 사실 사단에게 이용당하고 있었습니다. 이세벨은 사업을 위해서, 사업에서 이득을 모아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일해야 한다는 명분으로, 이신칭의의 교리에 지원을 받아, 세상과 타협하는 것을 주님이 용납하실 것이라고 가르쳤습니다. 이세벨의 가르침은 세상과 타협하고 세상 문화가 교회 안으로 흘러들어 올 수 있도록 물꼬를 터주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교리입니다. 무엇을 가르치는가 하는 점입니다. 어떤 복음을 전하며, 어떤 삶을 강조하느냐입니다. 우리는 성령의 체험을 강조할 뿐만 아니라 더 중요하게도 성령의 열매를 강조해야 합니다. 우리는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 교리에 대해서도 가르쳐야 합니다만 더 중요하게도 칭의 목적으로 성화에 대해서도 가르쳐야 합니다.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 것처럼 오직 믿음으로 우리는 거룩한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오늘날 많은 기독인 실업자들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이윤과 사업수주를 위해 할 일과 못할 일의 경계가 무엇입니까? 교인들이 모일 때마다 음담패설을 주고받지 않습니까? 제가 아는 어느 교회 장로님은 음란한 여관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교회는 그 장로님을 그냥 용납하고 있습니다. 그가 내는 많은 헌금 때문이겠지요. 이렇게 삶과 교리가 분리되는 것이 우리의 비극입니다. 당시 두아디라 교회의 교인들도 상부조합의 눈치를 봐야만 하기 때문에 사업에 수주를 따내고 성공하기를 바란다면 상부조합이 운영하는 우상숭배의식이나 섹스파티와 같은 의식에 참여해야 하는 유혹을 늘 받고 있었을 것입니다. 문제는 그러한 것을 오히려 거룩한 말씀으로 정당화하려는 가르침을 용납하는 데 있습니다. 오늘 우리 사회 역시 그 때와 마찬가지로 음란한 문화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이것을 우리는 늘 예의주시 해야 합니다.
그러나 두아디라 교회에는 세상과 타협하지 않고 승리하는 신자들의 무리도 있었습니다. 주님은 그들을 기뻐하십니다. 24절을 보십시오. “두아디라에 남아 있어 이 교훈을 받지 아니하고 소위 사단의 깊은 것을 알지 못하는 너희에게 말하노니 다른 짐으로 너희에게 지울 것이 없노라” 여기서 ‘이 교훈’이라 함은 이세벨의 교훈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사단의 깊은 것이란 이세벨의 교훈 뒤에 감추어진 사단의 계략을 가리킵니다. 이세벨 자신이 사단의 도구로 사용되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 채지 못했을지 모릅니다. 어쨌든 두아디라 교회의 몇몇 성도들은 그 사단의 음모술수를 분별하지 못하면서도 그 교훈을 받아들이지 않고 신앙의 순결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참으로 놀랍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매우 불리한 위치에 놓여 있습니다. 주님이 보시기에 그들은 매우 연약한 어린아이와 같습니다. 두아디라 교회의 다수는 이세벨의 가르침을 더 좋아하고 있었습니다. 단지 소수의 신자들만이 신앙의 순결을 지키고 있었는데 그들은 두아디라 교회에서 별로 두각을 드러내지 않는 자들이었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에서 별로 드러나지 않는 몇몇 성도들이 정말 주님으로부터 칭찬 받는 경우가 많습니다. 보이지 않는 가운데서 신앙의 순수성을 지키는 남은 자들이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 주님은 그들을 귀하게 보십니다. 주님은 그들을 격려하기 원하십니다. 기독교의 역사는 다수가 아니라 소수가 주도했습니다. 무명의 신자들이 교회의 참 생명력을 유지했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교회가 여러분을 알아주지 않는다고, 여전히 마이너러티 그룹이라고 불평하지 마십시오. 우리 주님은 여러분을 알아주십니다. 그것을 믿음으로 만족하십시오. 주님의 인정하심을 믿고 사람의 칭찬을 구하지 마십시오.
이제 회개를 거부하는 자들을 향해 엄중한 경고가 주님으로부터 내려집니다. 이 심판의 경고가 교회 밖이 아니라 교회 안에 주어졌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21절부터 23절까지 읽어보겠습니다. “내가 그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었으되 그 음행을 회개하고자 아니하는도다. 볼지어다 내가 그를 침상에 던질 터이요 또 그로 더불어 음행하는 자들도 만일 그의 행위를 회개치 아니하면 큰 환난 가운데 던지고 또 내가 사망으로 그의 자녀를 죽이리니 모든 교회가 나는 사람의 뜻과 마음을 살피는 자인 줄 알지라. 내가 너희 각 사람의 행위대로 갚아 주리라” 주님이 두아디라 교회에 내린 역사적 심판이 구체적으로 언제인지 알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교회의 많은 가정에 큰 환난이 있었고, 몇몇 중직자들의 자녀가 죽게 된 사건이 있었던 것이 분명합니다.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우리 주님은 교회를 돌보실 뿐만 아니라 각 교회를 심판하십니다. 중직자들의 자녀를 죽이기도 하신다는 것을 주목하십시오. 또 침상에 던진다고 경고하신 말씀에 주목하십시오. 여기서 침상은 침대가 아니라 병상입니다. (그러나 주의할 것은 병원에 누워있다고 해서 다 주님의 심판을 받은 자라고 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주님은 병으로 혹은 사망으로 당신의 백성을 치십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에게 주님의 거룩함을 드러내십니다. 그들이 회개하면 주님은 세상에 대해 그렇게 자신의 거룩함을 드러내십니다. 고린도 교회를 보십시오. 고린도 교회는 은사와 모든 지식과 구변이 풍성했지만 우상숭배와 음행을 용납하기 시작했을 때 그 교회 안에 죽음과 질병이 유행하기 시작했습니다. 교회가 이상할 정도로 죽음과 질병이 유행할 때 그것은 회개를 촉구하시는 줄 알아야 합니다. 마지막 날에 심판당하여 영원히 멸망당하지 않게 하시기 위해서 지금 그렇게 징계하심으로 회개하고 구원의 목적인 거룩함을 회복하라고 하시는 줄 알아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주님은 각 사람의 행위대로 갚아주시는 분이십니다. 교회가 우상숭배와 음행을 용인하는 것, 그리고 그러한 행위를 회개하기는커녕 오히려 그럴듯한 교리와 명분으로 오히려 은폐하고 정당화하려는 행위는 주님이 미워하십니다. 왜 이렇게 무섭도록 교회를 심판하실까요? 그것은 주님이 거룩하신 분이심을 알게 하기 위함입니다. 주님을 주님으로 두려워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세상에서 징계 받고 영원한 심판에 떨어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무서워하지 마십시오. 주님은 심판하시기 전에 먼저 회개할 기회를 주십니다. 지금의 음란한 삶을 회개하고 거룩한 삶을 회복한다면 이 심판은 임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 심판은 세상에 임하게 될 것입니다. 교회는 거룩함을 회복해야 합니다. 그리고 거룩성에 대해 민감해야 합니다. 이 거룩이란 무엇일까요? 혼인을 소중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언약을 거룩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세상에 동화되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 구별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거룩성을 지키는 자들이 진정으로 승리하는 자들입니다. 어떻게 이깁니까? 24-25절을 보십시오. “두아디라에 남아 있어 이 교훈을 받지 아니하고 소위 사단의 깊은 것을 알지 못하는 너희에게 말하노니 다른 짐으로 너희에게 지울 것이 없노라. 다만 너희에게 있는 것을 내가 올 때까지 굳게 잡으라” 이세벨의 교훈을 듣고 따르는 자들에게는 회개를 촉구하시면서, 승리하는 소수의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이미 가지고 있는 것, 즉, 거룩한 삶을 주님 오실 그날까지 붙잡고 유지하라는 것입니다. 주님은 더 요구하지 않으셨습니다. 다만 교회가 언약의 순결을 끝까지 지키기를 바라셨습니다. 어떻게 거룩해질 수 있습니까? 오직 십자가에 나타난 그리스도의 의를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았던 것과 같이 오직 불꽃같은 눈과 빛난 주석과 같은 발을 가지신 전지전능하신 그리스도, 참으로 거룩하신 그리스도를 온전히 바라보는 것입니다.
이렇게 이기는 자들에게 주님은 축복을 약속하십니다. 첫째 약속은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입니다. “이기는 자와 끝까지 내 일을 지키는 그에게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리니” 당시 만국이라는 말은 로마 제국을 가리키는 말이었습니다. 당시 로마제국은 정말 정복하기 힘든 국가로 인식되어졌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로마제국을 제압하는 권세를 주겠다고 하신 것입니다. 당시 조합의 파워게임을 잘 알고 있던 두아디라 성도들이 이 말씀을 듣고서 얼마나 충격을 받았겠습니까? 이것은 이렇게 이기는 자들이 나중에 노라 제국과 같은 나라를 다스릴 것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하면, 이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는 사람들로서 살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승리하는 자들은 그들의 거룩한 삶으로 세상을 정죄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가 철장(쇠몽둥이)을 가지고 저희를 다스려 질그릇 깨뜨리는 것과 같이 하리라. 나도 내 아버지께 받은 것이 그러하니라” 이 말씀을 문자적으로 보면 얼마나 우스꽝스러운지 모릅니다. 이것은 비유입니다. 세상을 정죄하며 의의 삶을 살았던 노아와 같이 살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세상에 영향을 미치는 교회의 방식이어야 합니다. 교회는 세상에 대해 공격적으로 나가야 합니다. 그러나 요즘 세상으로부터 오히려 비판을 받고 있으니 이 얼마나 땅을 칠 노릇입니까? 그것은 교회가 거룩함을 잃어가고 있다는 단적인 증거인 것입니다. 교회는 거룩함으로 세상을 쳐야 합니다. 그러나 더 나아가서 이기는 자들은 장차 임하셔서 세상을 심판하실 주님과 함께 할 것입니다. 세상을 심판하시는 주님의 편에 서서 자랑할 것입니다. 세상의 음란문화에 젖어들지 않는 것이 세상을 진정으로 다스리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방식입니다. 또한 교회의 선교사업은 만국을 다스리는 것이므로 교회가 열심히 해야 할 사업입니다.
둘째는 새벽별에 대한 주님의 약속입니다.(28절) 이 새벽별은 동트기 직전에 밝게 빛나는 금성이라는 별입니다. 영어로 비너스라고 하지요. 이 새벽별은 우리 주님 자신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이 새벽별이 우리에게 주는 뉘앙스는 영적으로 어두운 이 세상가운데서 빛으로 함께 하시는 주님의 임재를 가리키며, 주님의 승리를 알려줍니다. “아무도 거룩함이 없이 주를 보지 못하리라”고 했듯이, 거룩함을 이루며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은 새벽별이신 주님이 함께 하십니다. 바로 주님이 새벽별로서 이 땅에 임하셨고, 어두운 세상에서 빛으로 사셨습니다. 마찬가지로 두아디라 교회도 어둔 세상 속에서 빛으로 살 것입니다. 타락한 사회에서 영성을 주도할 것입니다. 이것이 승리하는 두아디라 교회 성도들에게 주신 약속입니다. 그렇습니다. 21세기를 진정 주도해나갈 사람이 누굽니까? 이 세상 음란 문화에 젖지 않고 결혼의 신성함을 지키는 자들입니다. 주님과의 혼인을 거룩하게 지키는 자들입니다. 그리스도의 신부로서 순결을 지키는 자들입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성도의 거룩함, 교회가 가져야 할 거룩함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령께서 두아디라 교회에게 지속적으로 말씀하시는 것이 이것입니다. “너는 거룩함을 지키고 있느냐?” “너는 이세벨을 용납하지 말라.” “너는 세상과 타협하지 말고 성적 순결을 지켜라” 오늘 우리는 성령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성령의 음성에 따라 순결서약을 다시 한 번 주님 앞에 해야 하겠습니다. 세상에서 우상숭배와 음행을 피하고, 목숨을 다하여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를 섬기는 삶을 살도록 말입니다. 이를 위해서 우리는 두아디라 교회에 나타나셨던 그리스도의 영광을 보아야 합니다. 전지전능하신 주님의 영광을 주목해야 합니다. 그것이 세상을 철장권세로 다스리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비결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는 지극히 거룩하며 우리가 사모해야할 신랑이 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봅시다. 주님의 얼굴을 바라보는 것만으로 우리는 용서와 능력과 치유와 승리라는 온갖 축복을 받습니다. 오직 주님을 바라봄으로써 세상에서 참으로 거룩한 삶을 살아가는 우리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아멘.
'내 설교' 카테고리의 다른 글
요한계시록 강해(9)-빌라델비아 교회: 작지만 큰 교회(계3:7-13) (0) | 2012.03.03 |
---|---|
요한계시록 강해(7)-사데: 유명무실한 교회(계3:1-6) (0) | 2012.03.03 |
요한계시록 강해(5)-버가모 교회: 적의 중심주에 위치한 교회(계2:12-17) (0) | 2012.03.03 |
요한계시록 강해(4)-서머나 교회: 가난하지만 부유한 교회(계2:8-11) (0) | 2012.03.03 |
요한계시록 강해(3)-에베소 교회:처음 사랑을 잃음(계2:1-7) (0) | 2012.03.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