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11월 11월 주일예배시에 전했던 말씀이네요..1시간 설교를 위해 일주일 내내 연구하고 묵상하고 설교를 준비하고 했던 날들이 제겐 가장 행복한 추억 중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선교지에 있다보니 언제 그렇게 할까 싶습니다. 한국어로 설교할 일은 없고..현지인들에게 강의와 설교는 하나 감정과 깊이가 부족하네요..
한국에 있는 모든 목회자분들을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김광락 선교사 올림.
요한계시록 강해(7)
사데: 유명무실한 교회
본문: 계3:1~6
3:1 사데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하나님의 일곱 영과 일곱 별을 가진 이가 가라사대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
3:2 너는 일깨워 그 남은 바 죽게 된 것을 굳게 하라 내 하나님 앞에 네 행위의 온전한 것을 찾지 못하였노니
3:3 그러므로 네가 어떻게 받았으며 어떻게 들었는지 생각하고 지키어 회개하라 만일 일깨지 아니하면 내가 도적같이 이르리니 어느 시에 네게 임할는지 네가 알지 못하리라
3:4 그러나 사데에 그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자 몇 명이 네게 있어 흰 옷을 입고 나와 함께 다니리니 그들은 합당한 자인 연고라
3:5 이기는 자는 이와 같이 흰 옷을 입을 것이요 내가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반드시 흐리지 아니하고 그 이름을 내 아버지 앞과 그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리라
3:6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오늘 본문에서 주님은 사데 교회에 나타나셔서 아주 충격적인 선언을 하십니다.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 이 말씀을 들은 사데 교회 성도들이 얼마나 충격을 받았을는지 상상해보시기 바랍니다. 만약 오늘 우리 가운데 나타나셔서 ”네가 실상은 죽은 자로다“라고 선포하신다고 가정해보십시오. 얼마나 큰 충격을 받겠습니까? 실제로 우리는 좀 충격을 받을 필요가 있습니다. 충격 없이 우리가 회개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사람의 눈으로 우리의 교회를 바라보는 것과 주님의 눈으로 바라보는 것이 얼마나 다른 가를 알 필요가 있습니다. 사람들의 일반적인 평가와 주님이 내리시는 평가는 정반대인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우리는 우리 자신을 점검해보아야 합니다. 살았다고 하는 이름이 있다고 해서 반드시 살아 있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깊이 인식합시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사데 교회를 향한 주님의 편지는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한 가지 교훈을 제공합니다. 그것은 참으로 살아 있는 교회, 참으로 생명력 있는 교회의 특징이 무엇이냐에 대한 것입니다.
먼저, 사데 교회에 나타나신 주님의 모습을 살펴봅시다. 늘 강조하듯이, 각 교회마다 예수님은 자신의 영광을 조금씩 달리 드러내시는 이유는 서로 다른 문제들을 안고 있는 지상교회가 바른 모습을 가지기 위해서 붙들어야 할 그리스도의 영광이기 때문입니다. 자, 1절을 봅시다. “사데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하나님의 일곱 영과 일곱 별을 가진 이가 가라사대” 사데 교회에 나타나신 우리 주님의 모습은 일곱 영과 일곱 별을 가지신 분이십니다. 여기서 일곱 영을 가졌다는 말씀은 하나님 나라를 이루기 위해 온 세상에 당신의 성령을 파송하시는 권한을 가지셨다는 뜻입니다. 일곱 영은 성령의 완전성을 의미합니다. 성령과 그리스도는 밀접한 관계에 있습니다. 성령은 하나님의 영이시며 또한 그리스도의 영이십니다. 성령은 하나님과 성부로부터 영원히 나오십니다. 성령은 그리스도의 영광을 보여주시며 또 증거하십니다. 사도행전 오순절 성령강림은 하늘로 올리신 그리스도께서 아버지로부터 성령을 받아서 부어주신 사건입니다. 이렇게 당신의 거룩한 영이 임하는 그곳이 바로 하나님 나라입니다. 성령이 임하시는 곳에 참 자유가 있고 참 생명이 약동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성령을 부어주실 능력과 권세를 가지고 계십니다. 그 다음으로, 일곱 별을 가졌다는 말은 예수님께서 교회의 신실한 성도들을 붙들고 주장하고 계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일곱 별은 모든 지상교회의 중생한 그리스도인들입니다. 존귀한 성도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서 하나님의 자녀의 권세를 가진 자들입니다. 주님은 그들을 붙드십니다. 보호하십니다. 주장하십니다. 아무도 그들을 주님의 손에서부터 빼앗아 갈 수 없습니다.
이러한 주님의 영광스러운 모습은 오늘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주고 있을까요? 교회의 생명력이 어디에 있는 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늘날 많은 교회들이 영적으로 죽어가고 있습니다. 주님을 위해 많은 사업과 이벤트를 벌이지만 그러나 그리스도의 풍성한 생명력은 잃어가고 있습니다. 그런 교회는 사데 교회를 향해 말씀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무엇보다 일곱 영과 일곱 별을 가지신 예수님을 발견해야 합니다. 즉, 지상의 교회가 어떻게 하면 살아 있는 교회, 교회다운 교회, 생명력 있는 교회가 될 수 있습니까? 생기이신 성령을 죽은 자에게 보내어 살게 하시는 주님을 믿어야 합니다. 일군들을 세우시고 그들에게 힘을 주시고 그들에게 증인이 될 수 있는 권능을 주시는 우리 주님을 발견해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당신의 교회 위에 당신의 성령을 한없이 부으시는 주님으로 알고 믿고 있습니까? 주님으로부터 무한히 나오시는 거룩한 성령을 사모하고 있습니까? 이 은혜를 간절히 사모하며 기도하고 있습니까?
사데 교회를 향한 주님의 책망이 곧 바로 이어집니다. 여러분, 일곱 교회를 향한 주님의 말씀들을 잘 비교해보십시오. 그러면, 다른 서신에서는 칭찬을 먼저 하시고, 나중에 책망을 하시는데 오늘 본문에서는 책망을 먼저 하시고 칭찬을 나중에 하시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고대 역사를 살펴보면, 이 사데 교회만큼 문제없는 교회가 없었다고 합니다. 사실 요즘 문제없는 교회가 어디 있습니까? 하지만 이 사데 교회는 문제없는 교회였습니다. 교회 문제로 상처받는 교인들은 이 사데 교회로 가야 할 것입니다. 당시 사데라는 도시는 고대 리디아 왕국의 수도였으며 고대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무역도시 중 하나였다고 합니다. 농산물이 풍부했고, 또 사금이 많이 났다고 합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을 보면, 교회를 어지럽히던 거짓 선지자들도 보이지 않습니다. 발람, 니골라, 이세벨도 보이지 않습니다. 두아디라 교회에 있었던 도덕성의 위기도 보이지 않습니다. 유대인들의 핍박도 없었습니다. 오늘날 관점에서 보면 가히 완벽한 교회 그 자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 주님은 “네가 죽은 자로다”라고 선언하고 계십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말씀입니까? 사람이 보기에 아무 문제가 없는 교회인데도 우리 주님은 “너는 죽었다”라고 책망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잘 보십시오. 이 사데 교회는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지고 있었다는 겁니다. 당시 소아시아 지방에서 살아있는 교회로 평판이 자자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요즘 말로 하면, 모든 교인들이 가고 싶어하는 그런 교회였습니다. 사데교회가 ‘살아 있다’는 이름을 얻게 된 것은 사데교회의 왕성한 활동, 종교적 행사, 외관적인 위엄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주님으로부터 “너는 죽은 자”라고 책망 받고 있습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것입니까?
여기서 우리는 심각하게 우리 자신을 되돌아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살아있는 크리스챤”이라는 말을 듣는다고 해서 정말 내가 살아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혹은 성장하는 교회에 다닌다고 내가 성장하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주님의 관점과 사람의 관점은 하늘과 땅 차이만큼 다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여기서 한번 고민해봅시다. 참으로 살아 있다는 증거가 무엇입니까? 주님이 찾으시는 생명의 특징이 무엇일까요? 여기서 우리는 먼저 교회의 활동과 생명을 구별할 줄 알아야 합니다. 종교적인 행위와 믿음의 선한 행위와는 분명 구별되어야 합니다. 일과 교제를 구별할 줄 알아야 합니다. 많은 교회가 좋은 조직을 가지고 있습니다. 좋은 프로그램을 가지고 있습니다. 좋은 이벤트도 시행합니다. 그러나 생명력은 그러한 활동의 왕성함이 결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분주하고 신나게 움직이는 모습들이 생명력의 증거가 결코 아니라는 것이지요. 우리가 주님을 위해 많은 일을 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내자 얼마나 주님을 기뻐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내가 주님을 위해 하는 일보다 주님께서 나를 위해 하시는 일이 더 중요합니다. 주님을 위해 선한 일을 많이 하지만, 그 속에서는 생명력을 찾아 볼 수 없습니다. 주님을 위해 무엇을 할까 고민하지만, 주님이 정말 주님처럼 여겨지지 않는 것, 이것이 바로 ‘살았다 하는 이름을 가졌으나 실상은 죽은’ 것입니다.
교회가 무엇입니까? 교회는 그리스도의 피로 구원받은 백성들이 예배하고 서로 교제하기 위해 모이는 곳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주님과의 살아 있는 교제입니다. 주님을 위해 우리가 많은 일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과의 교제가 살아 있지 않으면 우리는 죽은 자입니다. 왜냐면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참 생명이시기 때문입니다. 주님과의 만남이 생명력 있지 못하면 우리는 죽은 것입니다. 주님의 성령이 우리를 인도하지 않으시면 우리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참된 생명력은 성령의 임재와 인도하심에 달려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의 임재에 민감해야 합니다. 성령의 인격을 존중해야 합니다. 많은 활동, 분주한 듯 움직이는 활동은 살아 있다는 이름을 얻게 할 지 모르나, 참된 생명은 오직 그리스도의 성령이 실제로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물론 교회가 사업도 하고 활동도 계획하고 추진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생명력과 상관이 없습니다. 그것은 접촉점이 될 수는 있을 겁니다. 프로그램과 이벤트가 성공적으로 진행했다고 생명력이 있다고 착각하지 맙시다. 참된 생명력의 회복은 겉으로 보이는 것과는 전혀 다른 곳에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너무나 쉽게 겉으로 나타나는 분주한 활동, 겉으로 드러나는 열심 등으로 생명의 여부를 판단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종교적인 열심과 믿음의 선한 행위와는 분명 다릅니다.
그러면 참된 생명력은 어디서 찾을 수 있습니까? 우리는 어떻게 해야 생명력을 회복할 수 있습니까? 오늘본문에서 주님은 우리에게 구체적으로 대답해주고 계십니다.
첫째, 깨어 있어야 합니다.
2절 말씀을 보세요. “너는 일깨워...” 그리고 3절 말씀 중간부터 보세요. “만일 일깨지 아니하면 내가 도적같이 이르리니 어느 시에 네게 임할는지 네가 알지 못하리라”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말씀은 사데 교회 성도들이라면 누구나 무슨 뜻인지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사데 라는 도시에 관한 역사적 사실에 대해 주님은 언급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사데 라는 도시는 고대 세계에서 아주 유명한 무역도시였는데, 높은 산봉우리에 건설된 도시였습니다. 무엇보다도 삼면이 450m나 되는 절벽 위에 세워진 도시라고 합니다. 남쪽만 빼곤 전부다 가파른 절벽입니다. 그야말로 천혜의 요새였습니다. 그러니 누가 이 성을 정복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런데 주전 549년 페르시아 왕 고레스에 의해서 정복당하고 맙니다. 사데 성에서 삼면이 안전하다고 믿고 남쪽에만 군사를 배치하고 경계를 취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밤에 그 절벽을 기어올라서 사데를 함락시키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300년 동안 한 번도 함락되지 않다가 주전 218년 똑같은 방식으로 헬라왕이었던 안티오쿠스에 의해서 정복당하고 맙니다. 그때도 남쪽만 지키고 삼면에는 경계병을 배치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사데 교회 성도들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습니다. 삼면이 안전하다고 믿고서 자만심에 빠져 있을 때 야밤을 틈타 적병이 기어올라 성안으로 들어오고 말았습니다. “너는 일깨우라”는 주님의 메시지는 바로 이러한 역사적인 배경을 두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깨어있다는 말은 군대용어입니다. 군대생활을 하신 분들은 아마 잘 아실 것입니다. “전투에 실패한 자는 용서할 수 있어도, 경계에 실패한 자는 용서할 수 없다”고 하는 말을 많이 들어보았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 신앙생활을 되돌아봅시다. 우리 교회를 한번 봅시다. 우리가 혹시 안심하고 있는 부분은 없습니까? 우리의 신앙생활에 자신만만한 부분은 없습니까? 우리가 안심하는 그 부분 때문에 처참하게 실패할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일깨우라”는 말씀은 영적 전쟁을 인식하고 민감하게 깨어 있는 것입니다. 언제든지 주님의 부르심에 응할 수 있도록 만반의 준비를 해 두는 것입니다. 군대에서 5분 대기조는 잘 때도 탄띠를 차고 군화를 신고잡니다. 언제든지 달려나갈 수 있도록 준비해두는 것이 바로 깨어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어떻습니까? 깨어 있습니까? 주님의 재림을 맞이할 준비가 되어 있나요? 아니, 거창하게 말하지 맙시다. 오늘 밤 주님의 부름을 받을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먼 옛날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 전날 밤에 한 잠도 못 자고 허리띠를 띠고 서서 저녁 식사를 했던 것처럼 우리는 언제든지 주님의 부르심에 달려나갈 준비를 항상 하고 있습니까?
둘째로, 죽은 상태를 직면해야 합니다.
2절을 다시 보시죠. “그 남은 바 죽게 된 것을 굳게 하라” 이 말씀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현대적으로 표현해서 우리가 죽은 자가 되었다는 사실을 정직하게 직면하고 시인할 줄 알라는 것입니다. 생명의 회복은 언제나 정직의 회복에서 시작됩니다. 심령의 부흥도 죽은 상태에 대한 참된 인식에서 비롯됩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삶 속에서 죽은 상태를 찾아보십시오. 어느 부분이 죽은 상태인지 알아보십시오. 우리가 그것을 제대로 찾아내지 못하면 살릴 수 없을 것입니다. 치유는 항상 정확한 진단에서 시작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진단할 수 있을까요? 첫째, 성경의 말씀이라는 잣대를 통해 진단할 수 있습니다. 둘째, 성령의 조명이라는 은혜로 우리는 우리 자신의 모습을 제대로 볼 수 있습니다. 우리 자신의 실제 모습을 보여달라고 기도합시다. 자신의 실제 모습에 직면하는 것만큼 두려운 것은 없습니다. 그러나 거기서부터 그리스도의 생명력으로 채워지는 것은 시작됩니다. 그리스도의 생명력으로 채워지게 되면 우리는 자연스럽게 생명의 열매를 맺게 됩니다. 그것은 행위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믿음과 행위는 유기적인 관계입니다. 행위로 의롭다함을 받는 것은 아니지만 행위로 참 믿음의 여부를 가리게 되는 것입니다. 참 믿음은 칭의 뿐만 아니라 참된 행위를 낳습니다. 건강한 믿음이 건강한 행위를 출산하는 것이지요. 2절에서 말하는 “행위의 온전함”이란 무슨 뜻일까요? 사데 교회는 종교적인 행위는 왕성했지만 참 믿음에서 우러나오는 선한 행위는 거의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왕성하고 요란한 종교적 행위들로 우리는 생명력의 여부를 따져서는 안 될 것입니다. 오직 나 같은 죄인을 은혜로이 구원하신 그리스도의 의를 믿는 믿음만으로 행하는 참된 삶이 관건입니다. 여러분은 참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믿음만이 행할 수 있는 선한 일들을 하게 될 것입니다.
셋째, 신앙의 과거 역사를 회상해야 합니다.
3절, “그러므로 네가 어떻게 받았으며 어떻게 들었는지 생각하고 지키어 회개하라” 어떻게 받았으며 어떻게 들었는지 생각하라는 말씀은 과거의 은혜 받던 때를 회상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단순히 과거를 회상하는 데서 그쳐서는 안 됩니다. 주님은 회개를 원하십니다. 과거를 회상하는 것은 우리가 회개할 부분을 찾기 위해서 필수적인 것입니다 과거 은혜 받았던 때를 회상하면서 지금 우리 삶 속에 변화를 가져와야 할 부분을 찾는 것입니다. 어떤 변화가 필요할까요? 우리가 처음 주님을 만났을 때는 무엇보다 주님과 교제하는 기쁨이 있었고, 진실한 대화가 있었고, 사귐이 있었습니다.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롬4:5)였습니다. 교회에서 일하지 말라는 말이 결코 아닙니다. 일하는 것은 아무나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일하는 것 자체가 크나큰 은혜입니다. 이 말은 ‘나 같은 죄인을 큰 죄악에서 건져주신 주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이 있는 지를 묻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주님이 다 하셨습니다. 우리가 해야 할 진정한 일은 구주를 진정으로 믿는 것입니다. 주님을 알고 주님을 즐거워하며 주님과 교제하며 주님을 사랑하는 일이 우리가 해야 할 일입니다. 이것이 생명력의 증거입니다. 이것이 사데 교회가 변화되어야 할 수준입니다.
그런데 사데 교회에 몇몇 승리하는 소수의 그리스도인들이 있다는 사실에 주님은 칭찬하십니다. 4절, “그러나 사데에 그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자 몇 명이 네게 있어 흰옷을 입고 나와 함께 다니리니 그들은 합당한 자인 연고라” 죽은 교회에 살아있는 믿음을 가진 자들이 있었습니다. 산 믿음이란 어떤 것일까요? 계시록에서 옷을 더럽히지 않는다는 말은 ‘이신칭의’를 온전히 간직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정결한 믿음과 정결한 삶을 주님께 드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옷은 ‘성도의 행실’입니다. 오직 믿음으로 행하는 삶을 의미합니다. 그들의 믿음이 순수하므로 그들의 행실 역시 순수한 것입니다. 참 믿음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과 동행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의지나 행위로 주님과 동행하는 것이 아닙니다. 히브리서에서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한다고 했을 때 그 말은 창세기에서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한 것을 두고 하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나님과 동행합니까? 하나님의 의를 믿는 믿음만으로 하나님과 동행합니다. 주님의 임재를 늘 느끼고 의식하는 성도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들은 언제 어디서나 주님의 손길을 느끼면서 살아갑니다. 항상 기뻐하고 늘 기도하는 태도를 가지고 살아갑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며 하나님과 동행하는 자는 그 옷(그리스도의 의)을 더럽히지 않는 자들입니다.
이렇게 승리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신 주님의 약속이 무엇입니까?
첫째, 흰옷을 입을 것입니다.
이 옷은 그리스도의 의와 순결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누구나 이 옷을 입은 자들입니다. 이 옷을 은혜로 받았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은 더욱 이 옷을 희게 할 것입니다. 이 옷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당신의 피로 깨끗이 빨아서 우리에게 입혀주신 옷입니다. 우리가 십자가에서 그리스도의 의와 공로를 발견하고 날 대속하신 그리스도를 참으로 믿을 때 하늘의 아버지께서 크신 자비로 우리에게 입혀주신 옷입니다. 존 칼빈이 한 말을 인용해보겠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은 일체의 허물도 없는 전혀 무죄한 분이지만 우리의 불의함으로 인해 부끄러움과 욕을 친히 담당하시고 그 대신 우리에게는 순결로 옷 입혀 주셨다” 루터 역시 비슷하게 고백했습니다. “주 예수여, 당신은 나의 의이시며, 나는 당신의 죄가 되었습니다. 당신은 내 것을 당신 것으로 취하셨으며 당신의 것을 내게 주셨습니다. 당신은 당신이 아닌 모습을 취하셨으며, 내게 나의 것이 아닌 당신의 모습을 주셨습니다.” 자신에게 전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찾으실만한 의가 없음을 깨닫고 또 행위와 전혀 상관없이 그리스도의 의를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 안에서 마련하신 하나님을 믿음으로 은혜로 거저 전가해주신 것입니다.
둘째, 생명책에서 이름을 흐리지 않고 시인할 것입니다.
주관적으로는 구원의 확신이 주어질 것이며 객관적으로는 구원의 확실함이 보장될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가 한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그러므로 형제들아 더욱 힘써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 너희가 이것을 행한 즉 언제든지 실족치 아니하리라”(벧후1:10) “이같이 하면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나라에 들어감을 넉넉히 너희에게 주시리라”(벧후1:11)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하나님의 택하심을 더욱 확실하게 하는 것입니다. 믿음만으로 행하는 참 행위를 살펴봄으로써 우리 자신이 참 믿음에 거하는 가를 늘 끊임없이 점검해야 할 것입니다. 교리적으로 말하면 ‘이신칭의’와 ‘이신성화’의 삶을 늘 점검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택하심을 굳게 하는 일입니다.
오늘 우리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주께서 우리의 귀를 열어주시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교회의 참된 생명력은 교회의 행사나 예산이나 활동을 통해서 증명되지 않습니다. 교회의 참된 생명력은 오직 복음에 대한 헌신에 달려 있습니다. 복음에 대한 확신에 달려 있습니다. 죄인에게 은혜로 입혀주신 그리스도의 의에 대한 즐거운 헌신이 우리에게 있습니까? 오늘 참 생명력을 회복하기를 기대하시는 주님 앞에 우리는 서 있습니다. 복음을 알고 복음을 지키며 복음을 전하는 일에 헌신하십시오. 여러분의 모든 삶을 즐거이 드리십시오. 복음을 알고 복음에 합당한 삶을 살도록 결심합시다. 그리고 우리를 긍휼히 여겨주셔서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귀를 달라고 기도합시다.
'내 설교' 카테고리의 다른 글
요한계시록 강해(9)-라오디게아 교회: 지워버리고 싶은 교회 (0) | 2012.03.03 |
---|---|
요한계시록 강해(9)-빌라델비아 교회: 작지만 큰 교회(계3:7-13) (0) | 2012.03.03 |
요한계시록 강해(6)-두아디라: 지도자때문에 고통당하는 교회(계2:18-29) (0) | 2012.03.03 |
요한계시록 강해(5)-버가모 교회: 적의 중심주에 위치한 교회(계2:12-17) (0) | 2012.03.03 |
요한계시록 강해(4)-서머나 교회: 가난하지만 부유한 교회(계2:8-11) (0) | 2012.03.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