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설교

요한계시록 강해(9)-빌라델비아 교회: 작지만 큰 교회(계3:7-13)

등불지기 2012. 3. 3. 16:36

매스컴이나 일반 사람들의 눈에는 유명하고 큰 일을 많이 하는 '대형교회'와 '대형교회 목회자들'이 있지만 세간에 알려지지 않았어도 주님 보시기에 매우 '크고' '영향력 있고' '의미 있는 교회들'이 많습니다.

김광락 선교사 올림

 

요한계시록 강해(8)

 

빌라델비아 교회: 작지만 큰 교회

 

본문:계3:7~13, 2001.11.18.청년부 주일설교

 

3:7 빌라델비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거룩하고 진실하사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이 곧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 사람이 없는 그이가 가라사대

3:8 볼지어다 내가 네 앞에 열린 문을 두었으되 능히 닫을 사람이 없으리라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적은 능력을 가지고도 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배반치 아니하였도다

3:9 보라 사단의 회 곧 자칭 유대인이라 하나 그렇지 않고 거짓말하는 자들 중에서 몇을 네게 주어 저희로 와서 네 발 앞에 절하게 하고 내가 너를 사랑하는 줄을 알게 하리라

3:10 네가 나의 인내의 말씀을 지켰은즉 내가 또한 너를 지키어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하리니 이는 장차 온 세상에 임하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시험할 때라

3:11 내가 속히 임하리니 네가 가진 것을 굳게 잡아 아무나 네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

3:12 이기는 자는 내 하나님 성전에 기둥이 되게 하리니 그가 결코 다시 나가지 아니하리라 내가 하나님의 이름과 하나님의 성 곧 하늘에서 내 하나님께로부터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의 이름과 나의 새 이름을 그이 위에 기록하리라

3:13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우리는 지상교회들에게 보내시는 주님의 편지를 살펴오면서 교회를 바라보는 주님의 관점이 사람의 관점과 얼마나 다른지 계속 놀라고 있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편지들을 주의 깊게 살펴보면서 우리가 교회를 향해 품는 생각들과 느낌들이 얼마나 피상적이고 얼마나 편견에 사로잡힌 것인지 깨닫게 됩니다. 교회를 바라보는 주님의 관점을 배우기 이전에 우리는 우리 자신의 무지에 대해서 더 많이 배우게 됩니다. 그런데 사실 이것이야말로 축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왜냐면 이러한 깊은 충격이 우리의 잠자는 영혼을 깨울 것이며 잠자는 교회를 일깨우는 개혁의 기수가 되게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건강한 교회관을 가진 사람이 건강하게 교회를 섬길 수 있다고 분명 확신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저는 이러한 충격이 우리 가운데서 더욱 깊고 넓게 확산되기를 간절히 희망합니다. 그리고 주님의 관점을 우리 마음 속 깊이 품도록 합시다.

오늘은 교회를 향한 여섯 번째의 편지로서 빌라델비아 교회를 향한 주님의 말씀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빌라델비아 교회가 세워진 도시는 어떤 곳이었습니까? 이 빌라델비아라는 도시는 주전 140년 전 버가모왕 아탈루스 2세가 헬라문화를 전세계에 전파하기 위해 세운 도시로서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일곱 도시 중에 가장 역사가 짧은 도시입니다. ‘빌라델비아’란 이름은 ‘형제사랑’이란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묘하게도 현재 미국의 펜실베니아주에 빌라델비아라는 도시가 있는데 이 도시 역시 ‘형제사랑’이라는 뜻으로 세워졌다고 합니다. 1682William Penn이라는 영국의 퀘이커 교도가 핍박을 피해서 아메리카로 이주했는데 자신에게 할당된 땅을 펜실베니아라고 불렀고, 그 땅에서 인디언들과 회담을 가진 후에 그들과 친하게 지내자는 의도로 빌라델비아라는 이름의 도시를 세웠습니다. 묘하게도 오늘 본문에서 빌라델비아 교회가 서머나 교회와 마찬가지로 주님으로부터 책망 없이 오직 칭찬만 받고 있는데 사실은 “서로 사랑하라”는 주님의 새 계명을 잘 지켰기 때문임을 오늘 알 수 있습니다. (지금도 교회의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곳은 서머나와 빌라델비아 두 군데뿐이라고 합니다. 나머지는 다들 역사의 저 너머로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오늘 살펴보려고 하는 빌라델비아 교회는 참으로 매력적인 교회입니다. 빌라델비아 교회는 우리가 소망하는 교회상을 그려주고 있습니다. 빌라델비아 교회를 보면서 우리는 주님께서 어떤 모습을 찾고 계시는 지 알 수 있습니다. 자, 그러면 빌라델비아 교회의 가장 큰 특징이 무엇입니까? 적은 능력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큰 축복을 받은 교회였다는 사실입니다. 8절을 봅시다. “볼지어다 내가 네 앞에 열린 문을 두었으되 능히 닫을 사람이 없으리라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적은 능력을 가지고도 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배반치 아니하였도다” 오늘 우리는 주님의 칭찬하시는 여러 말씀 중에서 가장 의미심장한 부분을 보게 됩니다. 사실 빌라델비아 교회는 서머나 교회와 같이 전혀 책망을 듣지 않고 오직 칭찬과 약속의 말씀만 받았던 복된 교회였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은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교회 안에서 무엇인가를 찾고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분명 주님은 교회의 능력을 재어보고 계십니다. 교회가 안고 있는 현실적인 능력을 충분히 이해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본문에서 우리가 발견하게 되는 또 다른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능력을 받는 것은 필수적이지만 그러나 그러한 능력을 가졌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이 필요충분이 될 수는 없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무슨 말입니까? 즉, 사람들은 저마나 자기들이 가진 것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자기들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없을까를 생각합니다. 사람들은 언제나 자기 안에 있는 가능성을 재어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것 때문에 가능성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요한복음 6장에서 예수님께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하신 일을 기억하십니까? 큰 무리가 굶주려하고 있습니다. 분명 제자들은 그들에게 무엇인가를 해주어야 한다는 부담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필요를 어떻게 하든지 채워보려고 시도했습니다. 아니 예수님께서 많은 무리들을 보시고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을 시험하시고자 질문을 던지셨습니다.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로 먹게 하겠느냐?” 이 질문에 대해 빌립과 안드레가 각각 대답했습니다. 먼저 빌립은 최소한 200데나리온(한화로 약 1,000만원)의 돈이 필요하다고 대답했습니다. 반면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는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진 한 아이를 가리키면서 “그러나 그것이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습니까?”라고 대답했습니다. 이 두 제자의 반응은 오늘 우리들의 반응입니다. 하나는 계산에 빠른 사람입니다. 머리로 재빨리 계산해서 예산을 세워봅니다. 빌립의 유형은 오늘날의 이상주의자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무엇인가를 더 가져야한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무엇이 있어야 하는 지 누구보다 잘 파악하는 사람입니다. 오늘 우리 청년들 가운데 이런 유형의 사람들이 대부분입니다. 반대로 안드레의 경우는 현실주의자의 전형을 보여줍니다. 계산하기보다는 지금 가지고 있는 것을 신속하게 파악해봅니다. 불가능한 이상을 추구하기보다는 가능한 능력을 먼저 점검해봅니다. 그러나 현실적인 필요에 적절하지 못하다는 이유로 쉽게 절망합니다. 분명 안드레의 유형은 실제적입니다. 그러나 자신의 가능성만 생각하지 그리스도의 무한한 가능성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못합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는 빌립과 안드레의 두 유형 중에 하나로 기울어지게 마련입니다. 그들의 모습은 굉장히 계산적이고 이상적이며 동시에 현실적인 우리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무엇을 가져야 될 지를 생각하거나 혹은 우리가 현실적으로 가지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조사해보는 일에 우리는 항상 익숙해있습니다. 우리는 너무나 현실적이고 너무나 계산적이기 때문에 때로는 주님의 뜻을 행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너무나 생각을 깊이 하기 때문에 행동하는데 시기를 놓쳐버리기 잘 합니다. 자기연민에 빠져 있기 때문에 우리는 거시적인 안목으로 주님의 역사를 바라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우리 자신이 가져야 할 것과 가지고 있는 것에 너무나 집착하는 나머지 우리를 통해 이루실 그리스도의 무한한 가능성에 대해서는 생각할 여유를 잃어버리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오늘 빌라델비아 교회는 분명 그렇지 않았습니다. 빌라델비아 교회는 빌립과 안드레의 유형이 아닌 제3의 유형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가진 능력이 적다는 사실에 대해 분명 낙심하지 않았습니다. 또한 그들이 주님의 뜻을 행하기 위해서 얼마나 큰 능력을 가져야 하는지 계산하지도 않았습니다. 빌라델비아 성도들은 그런 일에 신경 쓰느라 시간을 낭비하지 않았습니다. 적어도 “주님의 말을 지키며 주님의 이름을 배반치 않는 일”에는 큰 능력이 필요 없습니다. 우리가 이미 그리스도인으로 거듭난 순간부터 이미 우리가 주님의 말을 지키며 주님의 이름을 배반치 않는 충분한 능력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빌라델비아 교회는 자기들이 받은 능력을 알고 있었고 그러한 능력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도전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의 귀중함을 아는 지식이 있어야 합니다. 분명 빌라델비아 교회는 그러한 지식을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지식이 참된 행위의 열매를 낳게 했습니다.

그러면 “내가 네 행위를 안다”고 하셨을 때 빌라델비아 성도들의 행위는 어떤 것이었습니까? 적은 능력에도 불구하고 주님이 칭찬하시게끔 한 열매들은 무엇이었습니까? 언제나 우리 삶을 저울에 달아보시며 우리의 삶 속에 ‘선한 열매들’을 찾고 계시는 주님이 빌라델비아 교회 안에서 무엇을 찾아내셨습니까? 그것은 8절에 말하고 있는 대로 “주님의 말과 이름”이었습니다. 그러면 주님의 말씀은 무엇입니까? 교회가 마땅히 순종해야 하고 지켜야 할 주님의 계명이 무엇입니까? 주님은 교회에 여러 가지 명령을 주셨습니다. ‘기도하라’ ‘복음을 전하라’ ‘용서하라’ ‘섬기라’ 등등. 그러나 그 모든 것을 하나로 묶어주는 한 가지 단어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사랑’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서로 사랑하며, 이웃을 사랑하며, 또한 잃어버린 영혼들을 사랑하는 것 안에 주님의 모든 말씀이 함축되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잘 아시는 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입니다. 모든 계명이 사랑하라는 명령 안에 다 들어가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율법을 완성시키는 의미에서 새로운 계명을 제자들에게 주십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사로 사랑하면 이로서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요13:34,35) 오늘 본문에서 주님께서 “내 말”이라고 하셨을 때 그것은 분명히 ‘사랑의 계명’임에 틀림없다고 확신합니다. 교회는 사랑하는 일에 부지런해야 하며 사랑하라는 말씀을 지켜야 합니다. 빌라델비아 교회는 틀림없이 사랑하는 일에 어느 교회보다 부지런했음에 틀림없습니다. 그들은 분명 자기들의 능력이 부족하기 때문에 사랑할 수 없다고 변명하지 않았습니다. 빌라델비아 교회의 이름처럼 그들은 서로 사랑하는 일에 충성했습니다. 유세비우스가 쓴 교회사를 보면 빌라델비아 교회에는 암미아(Ammia)라는 여선지자가 잘 섬겼다는 사실을 볼 수 있습니다. 이 여인은 사도행전에서 아가보, 그리고 빌립의 네 딸과 함께 예언의 은사를 받아 진실하게 말씀을 잘 가르친 사람이라고 합니다. 신실한 말씀 가르침은 예언의 은사에서 비롯됩니다. 아무튼 말씀사역을 신실하게 감당하는 암미아를 중심으로 온 교회가 연합하여 사랑의 공동체를 형성한 교회였습니다. 분명, 빌라델비아 교회의 강점은 주님의 가르치신 말씀을 따라 사랑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는 교회였습니다. 말씀을 소중히 간직하고 사랑이 가득한 교회였습니다.

본문의 ‘내 말’이 ‘사랑하라는 새 계명’으로 보아야 한다고 제가 해석하는 이유는 9절 하반부에서 “...내가 너를 사랑하는 줄을 알게 하리라”고 하셨고, 또한 10절에서 “네가 나의 인내의 말씀을 지켰은즉”이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특히 ‘인내의 말씀’이라고 표현하신 것은 더욱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을 생각나게 해주기 때문입니다. 마지막 종말의 때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그때에 많은 사람이 시험에 빠져 서로 잡아 주고 서로 미워하겠으며, 거짓 선지자들이 많이 일어나 많은 사람을 미혹하게 하겠으며, 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마24:10-13) 예수님은 분명 사랑과 인내를 같이 생각하고 계셨습니다. 또한 고린도전서 13장에 사도 바울은 사랑에 대한 여러 가지 특징을 설명하면서 사랑은 견디며 오래 참는 것임을 여러 번 강조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참된 사랑은 인내심이 없이 불가능합니다. 오래 견디지 않는 사랑은 참된 사랑이 아닙니다. 오늘날 현대인들이 즐겨 부르는 사랑노래에 빠져 있는 것은 인내라는 단어입니다. 인내하는 사랑은 옛날 사람들의 고리타분한 애정방식이라고들 치부합니다. 오늘날의 참 사랑은 속전속결이라고 스스로 자부심을 느낍니다. 그것이 오늘날의 사랑에 대한 이해입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사랑이 순수하다고 주장할는지 모르지만 인내심이 없습니다. 조급합니다. 너무나 참지 못합니다. 오랫동안 참고 견디는 사랑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언제나 ‘사랑은 오래 참는다’라고 가르칩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견딘다’고 말합니다. 상대방에 대해 오래 참는 것이 참 사랑입니다. 인내 없이 결코 참 사랑을 이룰 수 없습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에게 참 사랑이 있는가 하는 문제는 참 인내가 있는가 하는 문제로 귀결됩니다.

분명 빌라델비아 교회는 인내하는 사랑이 있었습니다. 견디는 힘이 있었습니다. 사실 우리는 목표로 정한 ‘큰 일’을 하기 위해서 여러 가지 필요한 것을 생각하고 조사하고 계산하고 따집니다. 그러나 인내하는 참 사랑만 있으면 충분히 할 수 있는 ‘큰 일’이 많습니다. 실제로 큰 능력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 것도 하지 못하는 것은 사실 인내하는 사랑이 없기 때문이라는 사실도 모르고 있습니다. 저는 자라면서 참된 사랑이 큰 일을 이룬다는 것을 많이 보아왔습니다. 병 고치는 은사를 가져야만 병을 고치는 기도를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도 배웠습니다.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 역시 특별한 카리스마를 가져야만 가능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배웠습니다. 참아주는 사랑이 사람을 변화시키고 불치의 병도 낫게 합니다.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에 대해 길이 참는 사랑을 경험해보셨습니까? 나 같은 사람을 오랫동안 참고 기다려주는 사람을 만나보셨습니까? 오늘 우리는 진실로 참아주는 사랑이 있습니까? 아니면 무엇 무엇을 가지지 못했기 때문에 못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지요? 아닙니다. 참 사랑만 있다면 우리는 못해낼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오늘날 점점 사랑이 식어져가고 있습니다. 사랑이 식어져간다는 단적인 증거는 참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너무 조급하다는 것입니다. 기다려줄 줄 모르는 것입니다. 참된 사랑을 회복해야 하겠습니다. 어떻게요? 먼저 참는 법을 배워야만 가능합니다. 조급성을 버려야만 참된 사랑을 할 수 있습니다. 먼저 주님께서 나를 대하여 얼마나 오랫동안 참고 기다려주셨는지를 잘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진실한 사랑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베드로도 “무엇보다도 열심으로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벧전4:8)고 말했습니다. 참 사랑은 많은 허물을 가려줍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의 허물을 덮어주셨듯이 우리의 사랑은 다른 이의 허물을 덮어줍니다. 다른 이의 허물을 덮어주는 것은 참고 견디는 것이 포함됩니다. 물론 이것은 교리적인 문제나 교회의 거룩성의 문제와는 다른 차원입니다. 니골라당을 용납하고 발람의 교훈에 대해 참고, 이세벨에 대해 참고 견디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서로 그리스도 안에 한 가족으로 사귀면서 여러 가지 크고 작은 차이점들에 대해 참는 것입니다. 진리와 다른 것은 벗어버려야 하고 나와 다른 것을 견디는 것입니다. 그런데 요즘은 진리와 다른 것은 참고 견디며 나와 다른 것은 견디지 못하고 벗어버리는 모습을 자주 보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요구하신 새 계명이 바로 그것입니다. 서로 사랑하라고 하신 말씀은 서로의 다양성을 인정하라는 뜻이며, 그들의 연약함을 비판하기보다는 먼저 자기 것으로 끌어안으라는 것입니다. 형제의 허물을 바라볼 때 그것을 곧 자기의 허물로 간주하라는 것입니다. 형제의 허물을 수수방관하는 것이 사랑이 결코 아닙니다. 그러므로 형제사랑이든 이웃사랑이든 잃어버린 영혼에 대한 사랑이든 어떤 사랑이든 간에 인내 없이 참 사랑은 결코 불가능하다는 것을 잘 알아야 하겠습니다.

오직 사랑이 있으면 큰 일도 할 수 있다는 예는 얼마든지 들 수 있습니다. 미국에 제가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갈보리 교회가 있는데 갈보리 교회가 크게 부흥한 것은 척 스미스 목사님을 중심으로 온 교회가 마약에 찌든 히피들을 위해 간절히 기도하며 그들의 영혼을 불쌍히 여기며 그들에게 집과 음식을 제공하면서부터 폭발적인 대 부흥이 있었습니다. 수많은 히피들이 갈보리 교회당 안으로 맨발로 걸어 들어와서 복음을 듣고 회심하는 데 온 교회가 인상을 찡그리지 않고 그들을 진심으로 환영해주었습니다. 그들의 영혼을 위해 오랫동안 기도했기 때문에 히피들을 품어줄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한 교회에 성령의 크신 기름부음이 있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60년대 미국이 완전 도덕적 타락의 나락에 떨어지지 않은 것은 이렇게 대대적인 히피들이 회심하던 6,70년대 ‘예수 운동’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수 천 명의 히피들이 목회자로 선교사로 헌신하게 된 이 놀라운 부흥의 역사는 잃어버린 영혼을 바라보며 긍휼히 여기며 기도하던 척 스미스와 몇몇 성도들의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또 미국에 베다니교회가 있는데 제가 90년대 우연히 듣게 된 사실은 200명이 모이는 공동체인데 300명 이상의 선교사를 파송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그것이 공동체이기 때문에 가능할 것입니다. 맞습니다. 사실 교회가 진정으로 공동체가 되면 세상은 달라지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참으로 서로 사랑하면 세상이 우리를 바라보고 놀라게 될 것입니다. 세상으로 하여금 교회 안에 계시는 그리스도의 임재를 느끼게 해주는 유일한 방법이 바로 그것입니다. 성령의 충만한 강림입니까? 물론 그것이 있으면 더욱 좋겠지만 그것만이 아닙니다. 세상은 성령으로 충만한 예루살렘 교회를 향해 ‘술 취한 사람들’이라고 비아냥거렸습니다. 그러나 예루살렘 교회가 진정으로 서로 사랑할 때 비로소 세상은 교회를 달리 보게 되었습니다. 교회를 칭찬하게 되었고 많은 사람들이 그곳에 계시는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 모여오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세상이 우리가 그리스도의 제자인 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바로 이것이 세상을 변화시키는 교회의 모습입니다.

이렇게 서로 사랑하는 일에 힘을 집중할 때 주님은 여러 가지 축복을 약속하십니다. 네 가지로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열린 문’을 약속하십니다.(8절)

여기서 열린 문은 분명 선교의 기회임이 분명합니다. 물론 성경에서 ‘문’을 예수님 자신으로 말하고 있지만 교회에 적용될 때 ‘문’은 언제나 ‘복음 전도의 기회’ 또는 ‘선교적 영향력의 주도권’을 의미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가는 곳마다 이 문을 열어 달라고 기도를 요청했습니다. “전도할 문을 우리에게 열어 주사 그리스도의 비밀을 담대히 알리게 하옵소서”(골4:3) 바울은 복음 전도의 기회를 열어달라고 늘 기도했고 그러한 기회에 늘 민감하게 반응했다는 것을 성경에서 알 수 있습니다. 고전16:9에 “내게 광대하고 공효를 이루는 문이 열리고 대적하는 자가 많음이니라”고 했고, 고후2:12에서 “주안에서 문이 내게 열렸다”고 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기회를 위해 늘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기회를 알아볼 수 있도록 기도하는 가운데 늘 깨어 있어야 합니다. 기회를 알아볼 수 있도록 자신을 준비시켜야 합니다. 최선의 기회를 주실 하나님을 믿고 기다려야 합니다. 기회는 준비된 자만이 알아보고 잡게 될 것입니다. 준비한 사람이 기회를 선용합니다. 분명 빌라델비아 교회는 선교의 문이 주님으로부터 활짝 열리게 되었습니다. 과거 버가모왕 아탈루스2세가 헬라문화를 세계만방으로 전파하기 위해 세운 이 도시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빌라델비아 교회를 통해 세계만방으로 전파하게 되는 주도권을 주님으로부터 받게 되었습니다. 복음으로 전 세계에 영향을 줄 수 있는 특권을 부여받는 것--이것은 정말 큰 축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복음으로 주위에 영향을 끼칠 수 있는 기회를 주신 것은 큰 축복입니다. 누가 이 축복을 받을 수 있을까요? 많은 능력을 받은 사람이 아닙니다. 적은 능력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인내하는 사랑으로 서로 섬기고 이웃을 섬기고자 했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문제는 무엇을 더 가질 것인가에 달려 있지 않고 내 안에 얼마나 참아주는 사랑이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참으로 인내하는 사랑이 있는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에게 이 문을 열어주십니다.

둘째, 주님은 빌라델비아 교회를 아끼고 사랑하시는 증거를 보여주겠다고 하십니다.

9절을 보세요. “보라. 사단의 (총)회, 곧 자칭 유대인이라 하나 그렇지 않고 거짓말하는 자들 중에서 몇을 네게 주어 저희로 와서 네 발 앞에 절하게 하고 내가 너를 사랑하는 줄을 알게 하리라” 주님이 사랑하신다는 증거는 매우 드라마틱하게 증명되고 있습니다. 이것은 매우 주목할만한 일입니다. 왜냐면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사람은 언제나 훼방과 시기와 질투를 받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사람은 오해와 미움과 질투와 사단의 훼방을 받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남을 비판하기 때문에 받는 것인지 아니면 정말 주님께서 나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받는 것인지는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그러한 훼방과 비판을 가하는 사람들을 주께서 내 발 앞에 무릎 꿇게 하시는 일이 그 기준입니다. 구약의 족장들을 보십시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요셉의 생애를 보십시오. 그들을 저주하고 훼방하던 자들을 하나님께서 얼마나 보기 좋게 그들 앞에 무릎 꿇게 하시는 지 창세기를 보십시오. 우리가 입으로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신다고 늘 고백할지 모르겠지만 정말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신다면 나를 훼방하는 자들을 내 앞에 무릎 꿇게 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반드시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경험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은 더욱 극적으로 우리에게 다가오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이사야 선지자는 미리 예언하기를 “그들이 너를 따를 것이라 사슬에 매여 건너와서 네게 굴복하고 간구하기를 하나님이 과연 네게 계시고 그 외에는 다른 하나님이 없다 하리라 하시니라”(사45:14) “그들이 얼굴을 땅에 대고 네게 절하고 네 발의 티끌을 핥을 것이니”(사49:23)고 말씀했던 것입니다. 빌라델비아 교회를 훼방하던 유대인 중에서 몇몇이 회심하게 되는 놀라운 일들을 통해서 빌라델비아 교회를 사랑하시는 주님이 자신의 사랑을 극적으로 증명해주시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축복입니까? 여러분,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진정 사랑하심을 믿습니까? 정말로요? 그렇다면 여러분을 힘들게 하고 훼방하던 원수들을 여러분 앞에 무릎 꿇게 하시고 발의 티끌을 핥게 만드시는 주님의 능력을 믿으십시오.

셋째, 주님은 그들을 시험 중에 보호하겠다고 약속하십니다.

10절에, “네가 나의 인내의 말씀을 지켰은즉 내가 또한 너를 지키어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하리니 이는 장차 온 세상에 임하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시험할 때라”고 했습니다. 주님을 알지 못하는 자들이 겪는 그러한 시험을 당하지 않게 보호하시겠다는 약속입니다. 세상사람들이 영적 고통의 시험을 당할 때에도 빌라델비아 교회 성도들에게는 참된 평화로 지키실 주님은 오늘 우리의 주님이시기도 합니다. 이 큰 축복을 어떻게 받습니까? 누가 받습니까? “네가 나의 인내의 말씀을 지켰은즉” 주님의 말씀을 인내로써 지키는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구원의 완성을 바라보기 전에 무엇보다 인내를 온전히 이루어야 합니다. 인내를 이루지 않고서 결코 그 나라의 완전함에 참여할 수 없습니다. 주님은 다시금 빌라델비아 교회에게 당부의 말씀을 하십니다. “내가 속히 임하리니 네가 가진 것을 굳게 잡아 아무나 네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 우리는 우리가 가진 것을 정확히 볼 줄 알아야 하며 지킬 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가진 것의 가치를 깨닫지 못하면 우리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빼앗기고 말 것입니다. 우리가 가진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복음입니다. 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를 아는 지식입니다. 주님의 사랑을 아는 지식입니다. 주님이 우리를 대하여 오래도록 참아주시고 기다려주신 것에 대해 아는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베푸신 은혜로운 일들을 아는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어떻게 대하셨는지를 아는 것입니다. 왜냐면 바로 그것이 인내의 말씀을 지키게 하는 능력이고, 인내의 사랑으로 인도하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가진 것이 얼마나 영광스러운지 알고 계십니까? 다시 말해서 복음의 영광을 소유하고 계십니까? 우리가 가진 것의 귀중함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복음의 영광스러움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이미 받은 복음의 소중함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사도들과 개혁자들이 물려준 신앙의 유산을 소중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순식간에 우리의 가진 면류관을 빼앗기고 말 것입니다. 오늘날 이렇게 면류관을 빼앗기는 교회들이 얼마나 많은 지 모릅니다. 우리는 은혜로 물려받은 이 영광의 면류관을 사수해야 할 것입니다.

넷째, 주님은 하나님 성전에 기둥이 되게 하겠다고 약속하십니다.

12절에, “이기는 자는 내 하나님 성전에 기둥이 되게 하리니 그가 결코 다시 나가지 아니하리라 내가 하나님의 이름과 하나님의 성 곧 하늘에서 내 하나님께로부터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의 이름과 나의 새 이름을 그이 위에 기록하리라” 이 놀라운 축복의 말씀은 한 마디로 주님과의 특별한 친교의 축복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당시에는 귀족의 이름을 신전의 기둥에 새겨두었다고 합니다. 마찬가지로 이렇게 승리하는 자들은 하나님 나라에서 영원한 가치를 인정받게 될 것이고, 지상 교회에서도 기둥같이 쓰임 받게 될 것입니다. ‘내 하나님’이란 표현은 여기 12절에서 네 번이나 나오는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입니다. 왜냐면 이 말은 십자가상에서 절규하셨던 주님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자신이 가장 어려울 때 불렀던 이름이었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자신의 생명을 하늘의 하나님께 부탁하셨듯이 빌라델비아 교회를 지금 하늘의 하나님께 부탁하고 계십니다. 이것은 매우 감동적인 표현으로서 빌라델비아 교인들이라면 그 말씀에 대단히 감격했음에 틀림없을 것입니다. 이렇게 빌라델비아 교회는 완전하게 그리고 안전하게 하나님 한 분만의 소유로서 인정받게 되었습니다. 주께서 우리의 생명을 맡으신다면 이것보다 확실하고 든든한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역사적으로 이 교회는 1400년을 버텨왔고 최근에도 여전히 수 백 명의 그리스 회중을 섬기고 있는 감독이 있다고 합니다. 빌라델비아 교회, 그리고 서머나 교회를 제외한 다른 교회들이 자취를 감춘 것을 볼 때 우리는 주님의 축복이 얼마나 대단한 가를 역사 속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다시는 나가지 않을 것”이란 약속은 빌라델비아 교회 성도들은 몸으로 느꼈을 것입니다. 왜냐면 주후 14년경에 대규모의 지진이 일어나서 빌라델비아 도시가 거의 무너졌기 때문이고, 그 이후에도 간간히 소규모의 지진이 발생해서 대부분의 빌라델비아 시민들이 작은 진동에도 집을 뛰쳐나가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승리하는 자에게 주신 약속은 피부로 와 닿는 말씀입니다. 지진이 나서 안전한 곳을 찾아 달렸던 그들에게 하나니의 말씀은 큰 위로와 평안으로 다가왔을 것입니다. 그들에게 전혀 두려움이 없을 것이라는 확실한 약속이며, 그들에게 안전한 보호처가 되어주시는 하나님과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세 가지 종류의 이름으로 약속하십니다. 성부의 이름, 새 예루살렘의 이름, 그리고 예수님의 새 이름입니다. 이 이름은 더욱 견고하며 영구적인 가치와 소속을 약속하는 말씀이 분명합니다. 실제로 빌라델비아 도시는 두 번에 걸쳐서 이름이 바뀐 전례가 있었다고 합니다. AD 17년부터 50년까지 ‘네오케사레아’(Neocaesarea, 가이사의 새로운 성읍이란 뜻)라는 이름으로, 몇 년 후 다시 지진이 일어났을 때 ‘플라비아’(Flavia)란 이름으로 도시가 개명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지금 예수님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새 예루살렘)의 이름으로 빌라델비아의 견고함과 안전함에 보증하고 계십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축복입니까? 누가 이 견고함과 안전함을 확보할 수 있습니까? 오직 주님이 사랑하신 것처럼 힘써 사랑하는 그 사람이 아니고 누구이겠습니까?

결론입니다.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말하고 있는 바가 무엇이겠습니까? 우리는 늘 조급하며 참지 못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늘 계산적이며 분석적이며 지나치게 이상적이거나 지나치게 현실적이어서 정말 힘을 다하여 지켜야 할 주님의 계명은 지키지 못하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 자신의 제한된 자원에 늘 시선을 고정시킨다면 우리는 아무 것도 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시선을 ‘적은 능력을 가진 우리의 현실’에서 울타리 밖으로 시선을 보낼 때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이제 이웃을 바라볼 때고, 우리의 형제를 바라볼 때고, 세상을 바라볼 때입니다. 언제고 우리 자신만을 바라보고 있겠습니까? 이제 우리는 ‘힘써 사랑하라’고 하신 말씀을 지켜나갈 때입니다. 우리가 사랑하고 섬겨야 할 자들이 누구인지 보아야 할 때입니다. 적은 능력에도 불구하고 자괴감에 빠져있지 맙시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고, 형제를 사랑하고, 잃어버린 영혼들과 복음이 없는 열방을 바라보면서 힘있게 사랑해야 할 때입니다. 뜨겁게 사랑합시다. 사랑을 잃지 않도록 합시다. 우리의 허물을 덮어주신 주님의 사랑을 잊지 않도록 합시다. 그 사랑으로 다른 사람을 대하기로 굳게 결심합시다.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그 사랑을 지켜나갑시다. 사랑의 공동체로 이 청년부를 꾸며나갑시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세상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제자로 인정하게 될 것입니다. 빌라델비아 교회와 같은 교회를 함께 만들어갑시다. 이토록 멋있는 교회를 꿈꾸어 봅시다. 이를 위해서 우리가 지금부터 해야 할 일은 우리가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의 가치를 충분히 발견하고 인정하는 일입니다. 곧 복음의 영광을 붙잡는 것입니다. 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를 견고하게 붙잡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를 넉넉하게 이기게 하는 진정한 능력입니다. 복음의 영광스러움을 아는 지식은 적은 능력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사랑이 넘치는 교회로 만들어 가는 힘이 될 것입니다.